| 🍁18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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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 기독교청년회(YMCA)가 런던에서 설립되다.
기독교청년회(YMCA,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1844년 결성한 기독교 민간단체이다. 세계 120개국, 1만여 개의 조직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개화기 때인 1903년 10월에 창립한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이 한국 YMCA의 시작이며, 월남 이상재 선생이 참여했다.
처음부터 빠르게 성장했고 궁극적으로 근육적 기독교 원칙에 기초한 세계적인 운동이 되었다. 지역 YMCA는 운동 시설 제공, 다양한 기술 강습 개최, 기독교 홍보, 인도주의 활동 등 다양한 청소년 활동을 통해 청소년 개발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YMCA는 비정부 연맹으로, 각각의 독립된 지역 YMCA가 국가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 국가 조직은 지역 연합(유럽, 아시아 태평양, 중동,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 미국 및 캐나다)과 세계 YMCA 연합(세계 YMCA)의 일부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YMCA는 고유하며 Paris Basis와 같은 특정 공유 목표를 따른다.
YMCA는 또한 개신교 가치에 기초한 파라처치 조직으로 간주되었다. 유사한 조직으로는 기독교청년협회(YWCA), 히브리청년협회(YMHA), 불교청년협회(YMBA) 등이 있다. 대중문화에서 YMCA는 빌리지 피플이 1978년에 발표한 노래 〈Y.M.C.A〉의 주제이다. 이 노래 덕분에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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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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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년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한국 영토의 3할이 넘는 황무지의 개간 건을 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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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손문의 입, 황흥의 두다리도 위안스카이 뱃속의 꿍꿍이는 따라잡지 못하네.” (20세기 초 중국 민간에 유행한 노래가사). 이렇듯 거대한 땅 중국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그가 1916년 6월 6일, 제제(帝制)의 부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만성 피로와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 출신으로 위안바오중(袁保中)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위안바오중은 친동생인 위안바오칭(袁保慶)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위안스카이를 양자로 보냈다. 위안스카이(袁世凯, Yuan Shikai, 1859-1916)는 도통 공부에 취미가 없었고, 대신 말 타기를 좋아하고 무예를 열심히 익히는 등 문(文)보다 무(武) 쪽으로 지나치게 열정을 보였다.
양아버지 위안바오칭의 추천으로 이홍장(李鴻章)의 참모인 우장칭(吳長慶)의 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은 우장칭에게 6개의 부대를 이끌고 출병할 것을 명령했고 위안스카이는 그의 휘하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임오군란의 수괴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는데 위안스카이는 우장칭을 도와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텐진에 연금함으로써 활약을 펼쳤다.
이 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때 25살의 풋내기 장교 위안스카이는 이들의 세상을 ‘3일 천하’로 만들어 버렸다. 그 공을 인정받아 1885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을 쥐락펴락하는 감국(監國)으로 올라섰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밀려날 때까지 그는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면서 조선을 실질적으로 중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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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사업 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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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 발발.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등이 이끄는 연합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가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무장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 전체적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격파한다는 작전 아래 행해진 것이었다.
홍범도의 지휘 아래 독립군 이화일은 일본군을 유인하고, 독립군은 여섯 개의 부대로 나뉘어져 각각 봉오골의 서북단, 동쪽 산, 북쪽 산, 서쪽 산 남단에 매복, 나머지 두 부대는 홍범도와 함께 서북 북단에 매복했다. 마침내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한 일본군은 사방에서 공격당했으며 400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반면 독립군은 6명의 피해자만이 발생하여 큰 승리를 거둔 전투로 기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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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설치 : 식민 사관 통한 한국사 왜곡 작업의 본부 역할. 🌳26년 6·10만세 운동계획 탄로남 : 200여명이 검거됨 🌳37년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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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Landings) 시작
6월 6일 새벽 1시 30분, 미군과 영국군의 공수부대가 낙하하는 것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6시 30분, 서서히 동쪽 하늘이 밝아 올 무렵 해상에서 대기하던 연합군 함대의 함포 사격이 시작된다.
함선 1200척, 항공기 1만 1000대, 상륙주정(舟艇) 4,126척, 수송선 804척, 그리고 수륙(水陸)양용 특수장갑차 수백 대로 편성된 대부대가 악천후를 뚫고 프랑스 노르망디 앞바다에 나타난 것이었다. 작전명 ‘오버로드(Overlord: 대군주)’로 명명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이날 연합군은 미군 7만 3,000명, 영국·캐나다 합동군 8만 3,000명, 그리고 자유프랑스군, 호주군, 폴란드군, 노르웨이군 등 8개국에서 온 총 15만 6,000명의 병력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이 중 13만 2,500명은 선박 편으로 영국해협을 건넜고 2만 3,500명은 공중 수송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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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졸업가 제정(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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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 경찰, 반민특위 습격사건
6월 6일. 사람들은 흔히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기억하는 현충일로 알고 있다. 그런데 1949년 6월 6일. 우리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반민특위습격사건’이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의 약칭으로,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특별위원회였다.
제헌국회는 정부 수립을 앞두고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헌법에 두었다. 이에 따라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1948년 9월 22일에 공포되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같은 해 10월 22일에 설치되었다.
반민특위는 각 도에서 지명된 국회의원 총 10명을 조사위원으로 삼았다. 또한 이들의 효율적 활동을 위해서 중앙사무국과 각 도에 지방사무국을 두었고, 반민족행위자의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도 구성되었다. 즉 반민특위는 헌법에 의하여 제정된 기구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이 함께 구성하였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가진 기관이었다는 것이다.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였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둘겨 패면서 쓰리쿼터(M37 트럭)에 실었다. 여기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오면서 욕설을 해댔다. 모두 35명이 끌려 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체를 압수해갔다.
국민적 염원을 담아 출범한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그의 주변 친일세력들의 줄기찬 방해책동으로 업무개시 8개월 만인 1949년 9월 22일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파 청산은 후세들에게 역사적 과제로 남겨졌고, 이후 한국사회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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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년 아이젠하워 미대통령,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용의 친서 송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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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현충일 제정-국립 묘지에서 합동 위령제, 서울 동작동 제1회 현충일 추도식
현충일(顯忠日)은 독립운동가, 순국선열, 참전용사 및 전몰장병, 순직 공무원 등의 넋을 기리고 얼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정된 대한민국의 중요한 추모일이자 법정공휴일이다.
휴전 이후 육군, 공군, 해군이 각각 전몰 장병 추도식을 거행하던 것을 1956년 동작동에 국군묘지를 새로 단장한 후, 정부 주최로 전몰 장병 추도식을 거행하기로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고 6.25가 발발한 달인 6월 중에 하루를 골라 기념일로 지정했다.
이후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격상되면서 추모 대상도 전몰 국군장병을 포함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모든 분들로 범위가 확대되었고 이후 순국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충절을 추모하는 행사로 발전하였다.
현충일에는 관공서 뿐만 아니라 각 가정, 민간 기업, 각종 단체에서 조기(弔旗)를 게양한다. 대통령 이하 3부 요인하고 국민들은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오전 10시 정각에 전 국민이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비는 묵념을 1분 동안 행한다.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대통령으로 공포하여 공휴일로 정하였다. 1956년 4월 19일의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대통령령 제1145호)[2] 및 1956년 4월 25일 "현충 기념일에 관한 건"(국방부령 제27호)[3] 에서 "현충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1965년 3월 30일 "국립 묘지령"(대통령령 제2092호)[4] 제17조[A]에 의거 연1회 현충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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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공포 🌳62년 고려대학생, 한ㆍ미행정협정촉구 데모. 8일 서울大生도 행정협정 촉구 데모 🌳84년 입주자폭행 연립건축사장체포-남의 땅에 집짓고 중도금 챙겨 달아나 🌳85년 한일상공그룹, 105억 부도 🌳87년 서울 29개 대학 학생 1500여명, 고려대서 연합 대동문화제 열고 시위 🌳89년 대우조선 관리직 3000여명 사표, 노조측 불법집회 폭행에 항의 🌳90년 노태우 대통령, 부시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서 남북한관계개선에 한미 긴밀 협력 합의 🌳91년 검찰, 밀입북사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던 문익환 목사(73) 재수감 🌳91년 전국 6대도시와 경기도 지방의 2주택 이상 소유자가 19만5214명, 3주택 이상은 2만8649명. 🌳93년 뒤셀도르프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에이지그룹 국제대회에서 한국사상 첫 개인·단체 우승. 🌳93년 중국 전인대부위원장 전기운, 의회지도자로는 처음 우리 나라 방문 🌳98년 김대중 대통령 미국 국빈 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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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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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금성의 태양면 통과 현상이 관측되다.
NASA의 SDO로 촬영한 일면통과 사진
2012년 금성 일면통과는 2012년 6월 5일에서 6월 6일에 발생하였다. 다음에 발생할 가장 가까운 금성의 일면통과일은 2117년 12월 10일 ~ 12월 11일이다.
관측 가능 지역으로 동티모르 딜리에서 아이들이 관찰한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2012년 금성이 태양 표면을 통과하는 모습을 시작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일면통과가 시작할 즈음까지만 관측이 가능하며 남부 아시아, 중동,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는 일면통과가 거의 다 끝날 때만 관측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남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2012년 일면통과를 관측할 수 없었다.
금성 통과 애니메이션 관측 가능 시각 UTC 기준으로 일면통과 시작 시각과 종료 시각은 various international cities와 various US cities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표시되어 있는 시각은 UTC이므로, 영국과 같은 경도대에 있지 않은 나라들의 거주자들은 실제 발생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국가가 속해 있는 지역 시간을 더하거나 빼야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