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물들다
가브리엘
친한 고교 동창 세 명과 금산 고향 집에서 만났다. 서로 일정을 맞추기가 만만치 않아서 두세 달 만에 만난 것이다. 그런데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못해 아예 하얗다. 한 명의 머리는 여름 장마에 산이 다 무너져 내린 것처럼 벌겋게 드러난 살이 애처로울 정도다. 아예 모자를 쓰고 산단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해서 사람들이 지나가며 뒤돌아보던 친구였는데, 시간이 만든 변화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만나서 반갑지만 변한 모습이 서글픈 것이다.
흘러간 물리적인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고 사는 감정 시계는 가슴을 쓰리게 한다. 나이 들면서 현실에 뒤처진 마음의 시계는 문제를 일으켜 왔다. 무조건 달려 나가다 상체를 못 따라가는 하체의 엇박자로 넘어지기를 몇 차례 당하곤 했다. 과거의 기억만 믿고 마음만 앞섰던 까닭이다. 동창회에 나가서 너무 늙은 친구들에 놀라기도 했다. 그렇지만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 올려다본 나의 얼굴도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 마음이 아팠다. TV에 나오는 동년배를 보고 왜 저렇게 늙었냐고 지적하니, 아내가 옆에서 당신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해 서운한 감정이 일기도 했다. 어르신 교통카드를 받았을 때는 나이가 들어 받는 거라서 싫다고 했는데, 지금은 무심하게 공짜 카드를 긁어대고 있다. 아직도 마음은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연신 푸르렀던 옛날을 헤매고 있다.
늦가을의 고향에서 보석사, 운일암반일암(雲日巖半日巖), 용담댐 등을 둘러보았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잎을 떨어내고 앙상한 몸피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을걷이를 마친 들녘은 매달렸던 식구들을 모두 비워낸 수숫대나 고춧대가 덩그러니 서있다. 산의 풀들도 초록에서 갈색, 다갈색, 고동색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이 차분하게 어울리고 있다. 자연의 본질은 아름다운가 보다. 그저 보여줄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드러나는 수수함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설악산이나 속리산의 단풍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가을은 만들지 못하지만, 고향의 가을은 소박하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우리를 그대로 투영시켜 주었다. 언제나 거기에 있으면서 하얀 수건 두르고 펑퍼짐하고 수수한 치마를 입은 채 정지 문에서 미소 짓는 어머니를 닮은 가을 풍경이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명예를 구하고, 허망스러운 꿈을 꾸다가 돌아온 네 명의 자식을 맞아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자태였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삶을 살려고 그렇게 머리에 눈이 내릴 때까지 떠돌다가 이제 돌아와 어머니께 안기고자 하는가.
노랗게 물들며 천 년을 넘게 산 보석사 은행나무 아래에서, 빙 둘러치며 꽂아놓은 소원에 더해 우리의 소망을 가만히 중얼거렸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낙엽을 밟으면서 오랜만에 서로 객쩍은 소리로 스산함을 달래도 보았다. 이런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질 텐가.
예전과 비교하여 절 마당이 훨씬 넓어지고 화단이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좁지만 아기자기하게 어울려있던 그곳을 기억하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변하면서 고향은 예전 같기만을 바라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라고 달리 생각하였다.
운일암반일암에서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기꺼워하다가 절벽 위에 서 있는, 가지를 옆으로 카이저수염처럼 늘어뜨린 소나무 몇 그루를 보았다. 손바닥만 한 바위틈에 활짝 핀 송이버섯 같은 자세로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은 눈부심 그 자체였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선 모습에서 지금의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바위 위에 싹이 떨어져 힘들었지만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포기하지 않으니 터가 잡히더라. 앞으로도 계속 파랗게 버티고 살겠다.’
용담댐의 수면 위에 비치는 물들어가는 산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깊어 가는 가을을 맞이하였다. 비록 머리는 하얗게 눈이 내리고 무너져가지만 소박한 고향의 가을처럼 포근하게 내려앉고 싶었다. 혹시 아는가, 우리에게서 고향의 정취를 느끼고 수수한 포근함을 가졌다고 칭찬해줄 현자를 만날 날이 있을지 말이다. 넉넉하고 포근하게 감겨오는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있자니 기러기가 열 지어 날아갔다.
자연은 익어가며 아름다워진다. 숲이나 산 본연의 빛으로 서로 조화롭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포근하게 사랑스럽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비록 나이 들면서 머리는 빠지며 하얘지고, 얼굴은 쭈글쭈글해져도 속에 들어찬 마음은 푸르고 입가에는 항상 미소를 짓고 싶다. 말보다 생각을 많이 하며 자연에서 행동의 규범을 찾고 싶다.
비워내고 떨어내어 앙상해졌지만, 고향의 가을처럼 조화롭게 어울리고 수수하지만 푸르게 물들어가고 싶다.
아름답게 나이 드는 사람이 있다.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고, 따뜻한 눈길로 대화를 나누고,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렇게 늙어간다면 몸은 늙어도 서글픔이 덜하지 않을까. 고향의 가을처럼 말이다.
첫댓글 가브리엘님,
멋진 글입니다. 글을 읽다보니 정과 편안함 그리고 따뜻함이 넘치네요.
역시 수필가다운 문학적 수사가 여기 저기 넘치구요.
많이 배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멋지십니다. 필력이 부럽습니다~~~
작가이신가요? 부럽진 않으나 작문의 힘이 넘치시네요...
필 에도 힘이 있다더니....마음이 풍성한 더택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