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갈명〔墓碣銘〕 〔김응조(金應祖)〕
공(公)은 성이 배씨(裴氏)이고 휘(諱)가 용길(龍吉)이며 자는 명서(明瑞)인데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고려 때 휘 전(詮)이 있었으니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평리 흥해군(僉議評理興海君)이다. 흥해군이 휘 상지(尙志)를 낳았는데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으며, 호가 백죽당(栢竹堂)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는데, 후인이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다. 증조는 휘가 헌(巚)인데 생원이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휘가 천석(天錫)인데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휘가 삼익(三益)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영양 남씨(英陽南氏)인데, 호조 참판 민생(敏生)의 후손이며, 처사 신신(藎臣)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병진년(1556, 명종11) 9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어, 일찍이 《강목(綱目)》을 한 번 죽 훑어보고도 전질(全帙)을 바로 암송하였다. 글을 지을 때는 붓을 대면 소나기가 오듯이 글이 쏟아졌고, 호탕하면서도 품격이 있어 또래 중에 썩 빼어났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무자년(1588)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다. 갑오년(1594)에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가 부솔(副率)로 자리를 옮겼으며, 무술년(1598)에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에 임명되었다. 임인년(1602)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계묘년(1603)에는 선발되어 예문관 검열(藝文官檢閱)이 되고, 갑진년(1604)에 물러났다. 을사년(1605)에 감찰(監察)로 승진하고, 병오년(1606)에 전적(典籍)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정미년(1607)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는데, 모부인이 가도록 권하였으며, 무신년(1608)에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유년(1609)에 병에 걸려 죽었다. 안동 도목촌(桃木村) 서쪽에 있는 우모동(寓慕洞)의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경오년(1630)에 선무 원종공(宣武原從功)으로 통정대부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아, 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서 여섯 살 때 어머니의 머리쓰개를 보고서는 울면서 “이것은 노인들이 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감사공(監司公)이 황해도 감영에서 별세하자 본도(本道)의 부의(賻儀)가 매우 많았는데, 사양하여 받지 않고는 “어찌 상(喪)으로 재물을 모으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에 팔도(八道)가 무너지자 공은 분개하여 의병을 앞장서 일으켜,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와 합병(合兵)하고 부장(副將)이 되어 적을 토벌하니 군사들의 기세가 점차 떨쳐 나갔다. 한원(翰院)에 있을 때, 《효경발문(孝經跋文)》을 강론하려 하니 이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었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권근은 임금에 대한 충성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효경》의 의리를 알겠습니까?”라고 하니, 주상이 이 때문에 강론을 중단하게 하였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는 사당에 배알하고 모부인께 문안드렸다. 물러나서는 조용한 방에 머물며 종일토록 책을 보았는데, 생각과 합치되면 번번이 스스로 설(說)을 지어 자신을 돌아보았다. 정인홍(鄭仁弘)이 《남명집(南冥集)》 발문(跋文)에서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호)을 비방하면서 퇴계 선생에게 미치자, 공은 변설(辨說)을 지어 매우 힘껏 공박하였다. 일찍이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살피다가,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는 것에 선후가 있다면 상복을 벗는 것에도 당연히 선후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였는데, 서애(西厓) 선생이 답장에서 이르기를 “요즘 선비 중에 이러한 글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고, 또 “궁벽한 곳에서 사느라 구별하여 바로잡지 못했지만 마음은 좌우(左右 금역당)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그 장려하고 인정함이 이와 같았다.
한번은 제천 현감(堤川縣監) 금응훈(琴應壎)과 함께 오현 종사(五賢從祀)에 관한 일을 논하였는데, 그는 말하기를 “연평(延平)이 주자를 깨우쳐 주었고, 한훤당(寒暄堂)과 일두(一蠹)가 정암(靜菴)을 깨우쳐 주었으니, 지금 두 분 선생의 종사(從祀)를 청하면서 마땅히 함께 연평도 청해야 한다.”라고 하자, 듣는 이들이 시끌시끌하였다. 뒤에 학봉(鶴峯) 선생의 《계문문답일록(溪門問答日錄)》을 보고서야 사람들의 의혹이 풀렸다. 공은 학식이 두루하고 단아하며 뛰어난 재주로 고가(高駕)를 몰고 먼 길에 나아가려는데, 그 재능을 다하기도 전에 하늘이 그의 수명에 인색하니 애석하다.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충의위(忠義衞) 호(壕)의 따님이며, 고려 문하성사(門下省事) 광존(光存)의 후손이다. 법도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부도(婦道)를 잘 갖추었는데, 감사공이 그 현명함을 자주 칭찬하였다. 경신년(1560, 명종15)에 태어나 병인년(1626)에 별세하였는데,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3남을 두었는데, 숙전(淑全)ㆍ택전(澤全)ㆍ윤전(潤全)이다. 4녀는 형조 정랑(刑曹正郞) 김회(金淮)ㆍ학생(學生) 권인(權軔)ㆍ와서 별제(瓦署別提) 한필달(韓必達)ㆍ학생(學生) 박형(朴瑩)에게 각각 시집갔다. 숙전은 아들이 없어서 택전의 셋째 아들 흥주(興胄)를 후사로 이었다. 택전은 5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흥종(興宗)ㆍ흥도(興度)ㆍ흥주(興胄)ㆍ흥조(興祚)ㆍ흥일(興一)이다. 딸은 생원(生員) 김학배(金學培)에게 시집갔다. 윤전은 2남을 두었는데, 하나는 일찍 죽었고 하나는 어리다. 딸들은 유상의(柳尙䭲)ㆍ이아(李亞)ㆍ김석좌(金碩佐)에게 각각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김 정랑(金正郞)은 아들이 하나인데 상유(尙瑜)이고, 네 딸은 박원(朴垣)ㆍ신점(申坫)ㆍ권선(權璿)ㆍ박륜(朴綸)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 학생(權學生)은 아들 유경(有慶)을 두었다. 한 별제(韓別提)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여벽(如璧)ㆍ여탁(如琢)ㆍ여규(如珪)이고, 딸은 김도일(金道一)에게 시집갔다. 박 학생(朴學生 권인(權靭))은 아들이 하나인데 종화(宗華)이고, 두 딸은 김학규(金學逵)ㆍ김행일(金行一)에게 각각 시집갔다. 친손과 외손을 합하여 백여 명이다.
공은 《역(易)》을 즐겨 읽고, 거문고를 잘 타서 금역당(琴易堂)이라 자호(自號)했다. 월천(月川) 조 선생(趙先生)의 시(詩)에 “스스로 즐겼다.”, “참되게 알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지은 시문(詩文)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인재를 내심은 하늘의 뜻이고 生才天意
재능을 씀은 하늘의 명수에 달렸네 用才天數
이미 태어나서 재능을 발휘하는데 旣生而用
어찌 그 수명에는 인색한가 胡嗇其壽
인재가 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其生不易
그 재능을 다하지도 못하였네 其用不究
이러한 이치를 묻기 어려워라 此理難問
아득하기만 한 하늘이여 茫茫天宇
금상(今上 효종) 8년 정유년(1657) 11월 하순에 풍산(豐山) 김응조(金應祖)는 짓다.
<출전 : 금역당집 제7권>
墓碣銘[金應祖]
公姓裵。諱龍吉。字明瑞。興海人。高麗時有諱詮。三重大匡僉議評理興海君。生諱尚志。司僕寺正。號栢竹堂。麗亡。守義高蹈。後人立祠俎豆之。曾祖諱巚。生員。贈左承旨。祖諱天錫。贈兵曹參判。考諱三益。通政黃海道觀察使。妣貞夫人英陽南氏。戶曹參判敏生之後。處士藎臣之女。以嘉靖丙辰九月生公。幼有逸才。嘗一覽綱目。全帙卽成誦。爲文。下筆霶霈。豪橫雅健。絶出等夷。乙酉。中進士。戊子。遭外艱。甲午。除洗馬。遷副率。戊戌。拜安奇察訪。壬寅。中文科。癸卯。選爲藝文檢閱。甲辰罷。乙巳陞監察。丙午。拜典籍。皆不赴。丁未。除忠淸都事。母夫人勸之行。戊申罷歸。己酉。感疾卒。葬于安東桃木村西寓慕洞子坐之原。庚午。以宣武原從功。贈通政左承旨。嗚呼。公性孝。六歲見母夫人㔶頭而泣曰。此老人所著也。監司公卒於海西營。本道賻贈甚多。辭不受曰。豈可因喪致富。壬辰。八路瓜潰。公慨然倡起義旅。與金近始垓合兵。爲副將討賊。士氣稍振。在翰院。將講孝經跋文。乃權陽村近所撰。公進曰。權近不知忠於君。安知孝經之義。上爲之停講。平居。晨起整衣冠。謁祠宇省母夫人。退而處靜室。終日看書。其有意會。輒自爲說以自省。鄭仁弘跋南冥集。詆龜巖以及於退溪先生。公作辨說。攻之甚力。嘗考朱子語類。以爲聞喪成服有先後。則除服亦當有先後。西厓先生答書曰。近日士友中未見有此等文字。又曰。僻居鈍滯。無從辨質。心未嘗不在於左右。其奬許如此。嘗與琴堤川應壎。論五賢從祀事。以爲延平啓發朱子。寒暄,一蠹啓發靜菴。今請兩先生從祀。當幷以延平爲請。聞者譁然。其後得鶴峯先生溪門問答日錄。群疑乃釋。夫以公博雅長才。策高駕臨脩途。未究其用而天嗇其壽。惜哉。配光山金氏。忠義衞壕之女。高麗門下省事光存之後。生長法家。壼儀甚備。監司公亟稱其賢。生庚申歿丙寅。祔葬于公之塋。男三。淑全澤全潤全。女四。適刑曹正郞金淮,學生權軔,瓦署別提韓必達,學生朴瑩。淑全無子。以澤全第三子興胄後。澤全五男一女。男興宗,興度,興胄,興祚,興一。女生員金學培。潤全二男。一夭一幼。女柳尙䭲,李亞,金碩佐。餘幼。金正郞一男尙瑜。四女朴垣,申玷,權璿,朴綸。權學生一男有慶。韓別提三男如璧,如琢,如珪。一女金道一。朴學生一男宗華。二女金學逵,金行一。內外子孫合百餘人。公喜讀易善彈琴。自號琴易堂。月川趙先生詩有自娛實知之句。所著詩文若干卷藏于家。銘曰。生才天意。用才天數。旣生而用。胡嗇其壽。其生不易。其用不究。此理難問。茫茫天宇。
上之八年丁酉復月下澣。豐山金應祖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