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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사람
1
일상에 균열이 생기거나 보이지 않는 변화가 생기기 전, 나는 예민해졌다. 내 예민함이 보통은 일을 크게 만들었으므로 그런 날이면 외출을 자제하거나 누군가와 만나는 일을 삼갔다. 그럼에도 어떤 일이 생기면 꼼꼼하게 방 청소를 하거나 수십 권이 고작인 작은 책장의 책들을 재배열하곤 했다. 감정으로 비롯된 문제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해결됐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날엔 노트를 펴고 숫자들을 적었다. 1은 한 번, 2는 두 번, 3은 세 번, 이런 식으로 적다보면 40이나 50언저리에서 마음이 누그러지고 관대해지곤 했다.
그 날, 나나의 언니라는 사람이 내게 찾아오기 전, 나는 전에 없이 예민해져있었다. 음료의 맛이 이상하다는 손님의 손에 들린 음료를 직접 마시고는 이상 없는데요? 하고 대답한다거나, 동료직원의 영업미소가 괜히 짜증나 실수를 가장하고 일부러 발을 밟기도 했다. 머릿속에 숫자가 적힌 헬륨풍선들이 둥둥 떠다녔다.
주문하시겠어요? 내 말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똑바로 봤다. 주문하시겠어요? 한 번 더 물어봤다. 그녀는 검은색 핸드백에서 손바닥만 한 사진 하나를 꺼냈다. 이 사람, 누군지 알죠? 그녀는 내 눈앞에 사진을 똑바로 들어보였다. 카운터에서 고개를 내밀어 사진을 훑어봤다. 맥주잔을 머리 위로 든 채 웃고 있는 사진 속 인물은, 나나였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뒤에 손님이 더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문을 하는 손님은 그녀 한 명 뿐이었다. 그녀는 내 앞에서 비킬 것 같지 않았다. 정말 몰라요? 손가락으로 포스기를 톡 톡 두드리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짜증이 일었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입 안이 유리가루를 머금은 것처럼 따가웠다. 일이 언제 끝나죠? 잠깐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무를 깎아 만든 흉상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부탁이나 강압적인 분위기, 혹은 배려를 바라는 분위기조차 없었다. 두 시간 후면 교대에요. 그녀는 그때까지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아메리카노 하나를 주문했다. 샷을 내리며 그녀의 저의를 생각했다. 몇 년이나 지났지? 3년? 아니, 4년? 나나는 이제 다시 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지금에 와 나나에 대해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퇴근 후 인애와 약속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여자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말없이 아메리카노를 받아갔고 그대로 두 시간을 핸드폰도 보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교대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그녀의 테이블로 갔다. 자리를 옮길까요?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나는 그 모습을 카페 입구에 선채 바라봤다.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따라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대로 돌아서야하는 건지. 열 몇 걸음 정도 멀어졌을 무렵,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왜 따라오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다.
2
나나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느 여성복 매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보세의류를 떼다가 비싸게 파는 곳이었다. 메니져였나 메신저였나. 필기체로 쓰인 간판을 단 작은 매장이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따금 번개가 반짝였고 곧이어 작은 울음처럼 천둥소리가 들리곤 했다. 점장은 점심을 먹으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갈 때까지 손님은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비는 그치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 오후 여덟시에 마감을 하고 매장 문을 닫았다.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전화를 붙잡고 엄마와 말다툼을 했다.
엄마는 스물다섯이 여자로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느냐고 말했다. 고장 난 형광등처럼 머릿속에서 그 목소리가 끊임없이 깜박였다. 이제 엄마도 일을 그만 둘 때가 되었다고, 어서 내가 결혼을 해야 자기 마음이라도 편하겠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이제 기력이 달려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두서없이 이어지는 묵직한 목소리들의 의중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핑계든 대면서 시위하고 싶은 것이었다. 결국 마지막엔 상담이라도 받아보자는 말로 마무리되곤 했으니까. 우산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그 길에도 엄마는 상담을 받아보자고 말했다. 성공한 사람이 꽤 많다느니 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귀에서 떼어놓으며 통화 종료버튼을 누르는데 땅이 푹 꺼지는 섬짓한 느낌이 들었다. 오른발이 온통 흙탕물에 잠겨 바지 밑단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열 정거장 넘게 가야 하는데. 문을 닫았던 매장으로 돌아갔다. 불을 켜고 바지를 갈아입은 뒤 슬리퍼를 찾아 있었다.
그때, 나나가 매장으로 들어왔다. 흙탕물에 젖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나나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곧장 걸어 들어와 사이즈만 보고 블라우스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가지고 왔다. 이미 마감을 했으므로 보통은 다시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컴퓨터를 부팅하고 포스기를 켰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나나에게 따뜻한 믹스커피를 건넸다.
포스기가 고장 난 것 같다고, 번개가 쳐서, 그래서 작동이 안 된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래요. 어떻게 안 될까요? 나는 메모지 하나를 내밀었다. 옷은 일단 가져가시고 나중에 연락을 드릴 테니 그때 계산해주세요. 그렇게 나나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나나는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며 비가 내리는 밖으로 나섰다. 나는 나나가 커피를 마시고 둔 빈 종이컵을 바라봤다. 나나는,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투명한 벽을 가진 사람이었다. 단단해보였지만 깨끗했다. 벽 너머로 그 사람이 온전히 보이는 최초의 타인이었다.
자신의 직업이 변호사라던가, 그 말을 다시 장난이라고 덮으면서, 사실은 방문판매원이라는 말들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이 나나의 독특한 성격에서 나오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쓴다니까, 소설 속 이야기들을 내게 하는 거라고도 생각했다. 나나는 흔들림 없고 정확한 발음으로 부드럽게 발성했다. 상투적인 어휘를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것을 다른 것에 비유하여 말 하거나, 보이지 않는, 이를테면 감정에 대해 설명하려 할 때에 특히 그랬다. 사각형으로 잘 정돈된 잔디밭, 혹은 깔끔하게 가지치기 한 분재. 나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런 것들이 생각났다. 그런 이미지들은 나나의 이야기들에 신뢰를 더해주었다.
3
옷값을 계좌로 보내달라는 내 문자에 나나는 직접 만나서 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고, 이야기했고,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떤 사이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운명이 그렇게 정해놓지 않으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나나와 만나 대화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구경하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나와 같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나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내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와 다른 위안이 느껴졌다. 나는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벽’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또 나의 성정체성, 그런 것들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들을 이야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 말들을 죄 지은 사람의 변명처럼 했던 것 같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당당하게 밝히던 나나에 대한 열등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내게 커밍아웃이라는 게 없었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아웃팅 당한 적도 없다는 말을 했다. 영원히 말 하지 못할 사실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는 게, 그것이 내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느끼던 깜깜한 골목길 같은, 암담한 미래에 대한 예지 비슷한 것들. 열 살이 넘었을 무렵부터였다.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 드라마에 나오는 커플들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경우의 수, 남자와 여자 외에 두 가지가 더 추가되어야만 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그런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왜 그런 걸까. 내가 살아갈 남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나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엇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로는 오른쪽으로, 때로는 왼쪽으로. 금을 넘었다 다시 돌아올 때마다 가슴 속 어딘가에 구멍이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역주행하는 자동차나 추락하는 새에 비유했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 수십 년이나 남은 내 인생의 나머지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느낀 최초의 순간. 여자를 좋아한다는 내 손을 끌고 교회에 가던 엄마의 손에서 비어져 나오던 땀. 그 여름. 목욕탕에서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밀어대던 녹색 타월. 웃는 입 모양처럼 그어진 엄마의 아랫배 수술자국. 다시 교회. 무거운 공기 사이로 천둥처럼 울리던 엄마의 통성기도. 그리고 보이기 시작하던 벽. 엄마의 콘크리트 블록.
이런 이야기들을 나나에게 처음 했다. 나나는 내 눈을 바로보고 시선을 흘리지 않은 채 조용히 내 말을 들었다. 최근엔 그 벽들에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도 나를 덮치려는 착각이 든다고 말했다. 거기까지 말 했을 때, 나나가 자신의 벽은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볼 줄 알았다. 나나가 입술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너도 있어. 그 벽 말이야. 내 눈에도 그런 게 보이거든.
4
여자는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골목 구석에 있어서인지 매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하고 싶었거든요. 커피 두 잔을 놓고 마주 앉아서야 그녀를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미간이 좁았고 입술이 얇았다. 눈가에 주름이 있는 것 같았지만 화장이 짙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앞머리를 내지 않고 머리를 뒤로 넘겨 묶은 것이 깐깐한 인상을 풍겼다. 그녀의 얼굴에서 나나의 얼굴이 비쳤다. 좁은 미간과 짙은 쌍꺼풀이 그랬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나나와 함께했던 몇 달 동안 나는 내 자신이 크게 다쳤다고 생각했다. 회복되지 않을 상처를 입었고, 그것이 내 삶의 궤적을 어느 정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고 믿었다. 나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내 말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앞에 놓은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삼키면서 여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겉봉엔 내 이름과 내가 사는 원룸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순간 이사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일부러 직접 들고 온 거에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편지까지 쓸 정도의 사이라면 나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나는 편지를 받아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편지 입구는 뜯었다가 다시 붙인 것처럼 지저분했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양 손으로 이마를 짚고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저는, 저는 정말로, 나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요.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나나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나가 고아인 줄 알았으니까. 나는, 나나가 하는 말 대부분을 사실로 믿었다. 그 차분했던 목소리나 고른 억양, 진중하게 고르는 용어 하나하나가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상상할 수 없게 했다. 어느 날 나나가 사라졌을 때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가끔 사라지거나 연락이 끊기기도 하는 게 나나였다. 소설을 쓰려면 응당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것도 나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사라진 나나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자기가 사실은 고등학교를 이미 자퇴했다고, 아침마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척 하는 것은 다 연극일 뿐이라고. 처음엔 놀라서 무슨 말이냐고 물어봤어요. 그 말 그대로라며 태연하게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날 선아를 미행했어요. 아, 선아는 나나의 본명이에요. 그랬는데, 그냥 학교로 가더라고요. 담임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해봤는데, 뭐, 크게 이상한 점도 없다고 말하고요. 그쪽과 나나가 만나고 있을 때, 나나는 어땠나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었나요?
나나는, 자기가 고아라고 말했어요. 가족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고요.
여자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5
나나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었지만 고향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오래 산 곳이 고향이고, 정이 들어서, 그래서 언제든 다시 찾고 싶은 곳이 고향이라면 보육원은 어떤가. 보육원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의 성장은 천천히 프레스에 눌려 납작해져만 가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나 선생들이 가하는 차별들과 마주해야했다. 드러나지 않는 공기 같은 차별. 나나는 견뎠다. 그 편이 안전했다. 맞서거나 피하려 하면 그것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나나는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학교에 가는 과정들이 지난했다. 빨리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긴 시간의 무게가 나나의 내면을 더욱 압착시켰다. 학교를 향해 걷는 몇 십 분 동안 나나는 자신의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느꼈다. 반대로 보육원으로 돌아올 때는 점점 커져서 작은 상자에 몸이 꽉 낀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나나는 그 느낌이 가끔 죽을 것처럼 무서웠다고 말했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이 나빴던 건 아니냐. 뉴스에 가끔 나오는 학대 같은 것도 없었어. 만족스럽다면, 음, 어떤 부분에서는 그랬던 것도 같아. 어떤 부분에서는 말이야. 그런데,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게 딱 하나 있었어. 사람들과의 관계였어. 너무 차가운 거야. 사슬처럼, 쇠사슬.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나나에게 있어 관계는 사슬이었다. 그 관계를 이루고 있는 면면은 하나같이 차가운 쇠로 되어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관계의 쇠사슬이 결국 나나를 옭아맬 것만 같았다. 어느 책에서 읽은 대로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그래서 나나 자신도 그 사회에 편입되어야만 한다면, 결국 인간은 모두 쇠사슬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차라리 죽고 싶어졌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갈까. 아마 모두가 똑같이 차가워서 차갑다, 라는 느낌 자체를 알 수 없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온기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침내 성인이 된 나나는 보육원을 나올 수 있었다. 보육원 문을 나서면서 나나는 자신도 대부분의 온기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되도록 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 거리를 걸으면, 손을 잡고 걷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나나가 처음 일한 곳은 공단에 위치한, 주야 2교대가 끊임없이 반복되던 라이터 공장이었다. 일정 액수 이상의 돈을 벌며 사람과 부딪히지 않는 일을 고르다 선택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나나는 모든 공정을 마친 라이터의 불량을 체크했다. 대부분의 불량은 불이 켜지지 않는 것이었으나 이따금 불이 너무 세게 나오는 것들도 있었다. 몇 번 앞머리를 태우고 나서야 나나는 라이터를 멀리 두고 틱틱 부싯돌을 당겼다.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면 나아질까. 그럴 사람도 시간도 없었으므로, 나나는 3개월 된 말티즈 한 마리를 샀다. 잠이 많은 아이였다. 처음 데려올 때도 잠을 자고 있었고 집에 데려다 놓았을 때도 잠을 자고 있었다. 처음 하루를 보내고 나나가 출근 할 때 겨우 일어난 강아지는 물을 몇 모금 마시곤 다시 엎드렸다. 나나는 밥그릇과 물그릇을 가득 채우고 야간 일을 하기 위해 출근했다. 다음 날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말티즈는 침대 구석에서 피를 토한 채 죽어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나는 강아지의 사체를 종량제봉투에 넣어 밖으로 내다놓았다.
컨베이어벨트를 본 적 있어? 끊임없이 움직이는 뱀 허물 같아. 그 위에 빨간, 파란, 초록 라이터들이 툭, 툭, 뱉어져 나와. 나는 그걸 주워들고 켜 보는 거야. 틱, 틱, 딸각, 딸각, 그 끝없는 반복이라니. 그러다보니 생각이며 행동 같은 것들이 틀에 갇혀 일정해지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던 느낌말이야. 학교가 끝나고 보육원으로 갈 때의 느낌. 프레스에 압착되는 느낌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야.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맨손으로 부싯돌을 계속 돌렸는데, 그러고 나니까 엄지손가락이 까맣게 변했어. 잘 안 지워지더라.
어느 날 아침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나나는 울었다. 데려오자마자 죽어버린 강아지가 생각나 울었다. 먼지덩어리나 머리카락이 구석구석 쌓인 자신의 방이 생각나 울었다.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 울었다. 자신의 주변엔 그런 것들 뿐이라는 게 억울했다. 공장에서 일한지 일 년 삼 개월이 조금 안된 날이었다. 라이터 불꽃은 한 모금의 온기도 남기지 않았다. 나나는 다음 날부터 공장에 나가지 않았다. 모인 돈의 일부로 노트북을 샀다. 서점에서 눈에 보이는 소설책들을 닥치는 대로 잔뜩 샀다. 그날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나는 그 날의 선택을 자신의 27년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나가 내게 했던 이 모든 이야기는 거짓말이었다.
6
7월이 될 때까지 나나와 나는 열 번이 조금 안되게 만났다. 그 동안 나는 나나를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영화를 보기도 했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나나가 주로 내 일정에 맞췄다. 나는 그것이 데이트라고 생각했다. 나나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 걸 물어보는 행동이 촌스러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런 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로 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이상한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나나와 만나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이상한 안정감에 취해갔다. 언제 뽑힐지 모르는 뿌리에 의지하던 날들에서, 단단하게 땅 속으로 감겨들어간 뿌리를 가지게 된 것 같았다. 그때는 내가 나나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언젠가 내 주위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흔들릴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즈음 나는 나나의 추천으로 영화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모임의 이름은 ‘큅’이었는데 표면적으로는 영화 모임이었지만 실제로는 레즈비언들이 모이는 퀴어 모임이었다. 큅은 월에 두 번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개인적으로 연락하며 만나는 경우도 있었으나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내겐 나나만 있으면 괜찮았으니까. 만약 나나가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 나도 나가지 않았다.
우리는 7월 말에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에 관한 이야기들을 했다.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거나 피켓 디자인, 문구 같은 것들에 대해 토론했다. 그 가운데서,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퍼레이드에 나간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각종 인터넷 기사 같은 곳에 사진이라도 올라가게 된다면, 그래서 누군가 나를 알아본다면 하는 걱정이 손바닥에 잡히는 습기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나나는 주도적으로 모임을 이끌고 있었고 퍼레이드에 관해서도 앞장서서 역할을 나눴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내게 나나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나가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돼. 괜찮아. 직접 퍼레이드에 나갈 사람들이 모였고 피켓 디자인과 문구를 맡을 사람을 뽑기 시작했다. 나나가 나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내가, 내가 할게요. 어색하게 든 내 손을 나나가 잡았다. 고마워. 정말, 정말로.
그 날, 우리는 술자리를 가졌다. 어쩌다 보니 나는 나나와 좀 떨어진 곳에 앉게 되었다.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인애가 쓰러지듯 앉았다. 털썩, 하는 소리에 옆을 보니 인애가 나를 보며 말했다. 괜찮죠? 술자리에 나온 사람은 여덟 명이었다. 나나는 말이 많았다. 나와 단 둘이 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을 꺼내면서 그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용상 어색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나는 이번에 쓰는 소설 제목이, ‘사랑의 십자가’라고 했다. 변태 교회 목사가 젊은 교회 신도 둘의 연애를 방해한다는 내용이 주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 그 목사가 게이라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 나나씨 이야기잖아. 그런 건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이지. 내 옆에 앉아 있던 인애가 내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나나 언니, 좀 허언증 같지 않아요? 무슨 말이냐는 내게 인애가 말했다. 그게, 우리 모임 사람들이 각자 알고 있는 언니 과거가 다 다르더라고요. 뭐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들은 아닌데, 사람들이 들은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다 극적이기도 하고……. 컨셉인가? 내가 나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해봤다. 나나는 고아였고, 공장에서 일 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었다. 인애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나나 언니가 금융업계에서 일한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 모임이 끝나고 며칠 후 나나에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나는 처음으로 내게 화를 냈다. 카페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느라 나나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내가, 내가 그럼 너한테 했던 말이 다 거짓말이라는 거야? 아니, 언니, 그런 말이 아니라……. 내 말을 못 믿는 거 아니야? 그래서 그런 거 아니냐고! 너같이 사람 못 믿고 의심하는……. 나나는 말을 맺지 않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나나가 넘어뜨린 의자를 다시 세워 놓으며 어쩐지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나를 믿지 못해서, 확실하지도 않은 주변 이야기로 나나에게 상처를 주다니. 평탄하게만 흘러가던 우리 관계가 망쳐버린 수채화처럼 어지럽게 변해버린 것 같았다.
7
다음 모임에서 나나는 탈퇴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대로 모임 사람들이 모여 있던 카페에서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어쩐지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나나의 뒤를 쫒았다. 저번에 그 일 때문에 그래? 미안해. 언니, 언니. 나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왜 그래? 응? 왜? 내 말을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 나나는 내 얼굴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는 나나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손끝에 느껴지는 저항의 흔적이 너무나 분명해서 나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나나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왜 그래……. 나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으니까. 무슨 말을? 내가, 내가 그 사람들에게 했던 말들 전부 다! 나나는 다시 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큰길까지 나간 뒤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카페로 돌아온 나는 먼저 가보겠다고 말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인애가 내 뒤를 따라왔다. 언니, 언니. 인애가 말했다. 언니, 조심하세요. 나나 언니가 하는 말 믿지 마세요.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 후로 나나와 연락이 닿는 일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나나의 핸드폰은 늘 꺼진 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지. 그랬어도 전화가 꺼진 상태로 며칠이나 받지 않는 일은 없었다. 길어야 사 나흘이면 연락이 닿았었는데. 모임에 나오지 않겠냐는 인애의 문자를 몇 통이나 무시했다. 어쩐지 몸에 힘이 빠져 일을 하기도 힘들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자는 날이 지속됐다. 내 발 밑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던 발판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잠을 자다가도 깜짝 놀라 깨곤 했다. 이렇게까지 나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나나에 대해 생각할 때,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 그럴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꼈었다. 좌우 사방으로 가지를 치는 것만 같던 시간이 드디어 한 길로 흐르기 시작했다고 느꼈는데. 우리는 연인 사이도 아니었다. 모든 일을 함께 했고 보통의 연인들이 하는 일들, 관계의 과정들을 착실히 밟아나갔지만, 정작 우리의 관계를 말로써 정립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런 식으로 사라질 것이었으면 아마도, 아마도 나나는 나를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인애의 말처럼 나나가 허언증 환자였다면 나에게 한 말들도 다 거짓말이었겠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거짓과 진실이라는 두 개의 벽이 내게 전진해오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천천히 압착되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인애에게 전화가 왔다.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내게 인애는 대뜸 함께 여행을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럴까, 하는 내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의 제안을 금방 받아들이는 내 자신이 이상했다. 그럼 다음 모임에 꼭 와요. 그때 같이 상의해요. 전화를 끊고 달력을 봤다. 나나가 사라진지 이주일이 조금 지나 있었고 일을 그만 둔 지 나흘이 지난날이었다.
나나가 없는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인애가 내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어린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내가 어색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인애는 내가 만든 피켓을 들고 퍼레이드에 나갔다. 인애가 들고 있는 피켓이, 높이 들어 올린 직사각형이 어쩐지 십자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애의 얼굴이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핫팬츠 아래로 드러난 하얀 다리가 눈부셨다. 인애는 거리를 행진하다 퍼레이드 행렬 바깥에 서 있는 나를 보곤 생긋 웃어보였다.
끝이었다. 긴 낮잠을 자고 나서야 문득 느껴지는 부재처럼, 마무리는 그렇게 찾아왔다. 나나에게, 언니가 나를 구원했어, 라고 말하고 싶던 때가 있었다. 나나가 내게 무엇을 했었지, 하고 생각해보면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고해성사를 하는 신도처럼 나는 나나의 앞에서 나의 부끄러움을 말했고 나나는 그것을 받아먹었을 뿐이었다. 이제 역할극은 끝났다. 무너진 내 발 밑은 거대한 공동으로 남을 것이고 아마 무엇으로도 그 자리를 다시 채우지 못하겠지. 그 동안 나나, 네가 어줍잖게 내린 구원이 나를 다시 지옥으로 끌어내린 것만 같았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나나의 번호를 삭제했다. 나를 지나쳐 행진하는 인애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봤다.
인애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고, 나에게 같이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인애가 하는 말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지난 얼마간의 시간이 오래된 악몽처럼 느껴졌다. 불안, 질투, 절망 같은 감정들은 단어의 나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됐다. 우리는 인애의 원룸에서 자주 만났다.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주로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내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엄청나게 허우적댔는데 말이야. 그런데 앞으로도 똑같을 것 같아. 지루해. 지루해서 죽겠어. 인애는 그렇게 말 하며 계속해서 맥주를 마셔댔다. 우리는 맥주를 아주 많이 마셨다. 나아지지 않은 오늘 때문에, 나아지지 않을 내일 때문에. 맥주를 많이 마시고는 싱글침대에 함께 누웠다. 그러고 나면 좌표 없던 삶이 갑자기 목표점을 찾아 순항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 생각 안나? 누구? 나나. 아…그다지. 나는 언니가 그 사람하고 사귀고 있는 줄 알았어. 그렇게 보였어? 응. 왜? 그냥, 그 사람이 없으면 언니 엄청 불안해보였거든. 내가? 응. 그랬나? 근데 언니는 하나도 안 궁금해 하는 것 같아. 이제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뭐……. 언니 은근히 차가운 면이 다 있네? 내가? 응. 근데 있지, 이상하게도 내가 궁금한 거 있지? 그 사람 어디서 뭐 하는지 말이야. 이상한 사람이었잖아. 그치?
8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그냥, 그것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요.
툭툭 뱉는 내 말투에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걸까. 여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려 쇼윈도 바깥에 시선을 뒀다.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전봇대 위에서 걸어 나오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제 자리에 정지했다. 여자는 그 고양이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이윽고 지루해진 고양이가 아무렇지 않게 길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그만 일어날게요. 내 말에 여자는 작게 숨을 뱉었다.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도 나나와 닮아 있었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잠깐이면 되니까……. 여자는 숨을 삼키듯 말했다.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시 다리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본 여자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선아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랐어요. 바란 건 그뿐이에요. 그래서 선아를, 상담소에 보냈어요. 치료를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아실 거에요. 전환…치료 말이에요.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알아낸 곳이었죠. 그곳에서 제대로 치료된 사람이 9할이 넘는다고 했어요. 꽤 많은 액수의 돈이 들어갔어요. 기간도 길었고. 6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선아를 볼 수 없었지만, 저흰 괜찮았어요.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요. 그 시간이 온전히 선아의 치료에 쓰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는 가끔 선아가 있는 상담소에 편지를 보냈어요. 면회는 금지였지만 편지만은 괜찮다고 했으니까요. 선아에게 답장이 오기도 했어요. 선아에게 온 편지는 컴퓨터로 타이핑해서 프린트한 A4용지였어요. 그곳에서는 펜과 종이를 쓸 수 없대요. 펜과 종이가 있으면, 온전히 자신을 비울 수 없다고 말 하더군요. 그래서 안심했어요. 선아가 제대로 마음을 잡고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선아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기도 했고 또 제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아버지도 저도 그 변화가 기분 좋았고, 그대로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죠.
그게 아니었던 거죠. 선아는 지금 병원에 있어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자신의 이름도 그 무엇도 말이에요. 일부러 그러는 걸지도 몰라요. 어쩌면 말이에요.
지금은, 그렇게 된 게 그 치료의 결과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제가 아까 말 했었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 게 고등학교 때부터였다고요. 사실은, 그 치료 이후의 일이었어요. 다소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게 일상생활을 크게 해치지는 않았으니까. 공부도 열심히 했고 대학교를 졸업했고, 남자친구 없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수줍어하면서, 있는데, 아직 사귄지 얼마 안됐어, 라고 말하던 선아가.
그 치료 이후의 선아는 무슨 상태로 살았던 걸까요. 저는 그 치료에서 원래의 선아가 죽었다고 생각해요. 그 빈자리를 수많은 대체인격이 채웠던 거죠. 어딘가에서 읽거나 접한 다른 사람의 정보로 그 빈자리를 채우고, 또 그게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쨌든, 그쪽을 만나러 온 건 그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선아가 그쪽에게 정확한 주소로 편지를 썼다니. 아마도, 아마도 그쪽을 만나면 선아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괴로운 듯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나나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괴로워하는 걸까. 정말로 나나가 살아온 삶이 안타까워서? 그런 것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모습이 역겨웠다. 이 여자의 말대로라면 내가 만난 나나는 수많은, 다른 것들로 채워진 껍데기였을 것이다. 진짜 나나는 다시 볼 수 없게 아주, 아주 사라져버렸겠지. 여전히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얼굴로 열이 올라왔다. 천천히 끓어오르는 주전자처럼 감정의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분노 같았지만 슬픔 같기도 했다. 혼탁한 감정의 기류가 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나나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왔다고 했다. 나나에게 미안해서 괴로워하는 거라면 이런 장황한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했겠지. 정말로 나나를 생각한다면. 여자에겐 슬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됐다. 또 굳이 이런 모습을 내 앞에서 보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됐다. 병원에 있다는 나나의 상태가 어떻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게 썼다던 나나의 편지를 먼저 뜯어본 여자의 모습에서 아무 희망도 읽을 수 없었다. 여자의 주위로, 시커먼 아스팔트로 된 벽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괴로우세요?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네…….
나는 화를 억누르려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목소리가 삼키듯 새어나왔다.
1부터, 순서대로, 숫자를 써 보세요.
두 손 아래 있던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눈 주위 화장이 눈물로 지워져 기미와 주름이 보였다. 그렇게 보니 나나와 더 닮은 것 같았다. 나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1은 한 번, 2는 두 번, 3은 세 번, 이러 식으로요. 이렇게 쓰다보면 50까지 가기 전에 어떤 일이든 해결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꽤 효과적이에요 이거. 나나가 저한테 알려줬던 방법이기도 해요.
젖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그녀를 뒤로 하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해는 좀처럼 지지 않았고 거리는 여전히 더웠다. 나나가 썼다던 편지를 놓고 온 게 생각났지만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화는 사그라졌지만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연기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우웅, 진동했다. 인애의 전화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아, 응. 지금 가고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없었어. 정말로? 응. 정말이야. 영화 시작까지 30분도 안 남았단 말이야. 언제 올 거야? 늦어서 미안해. 금방 갈게. 나는 서둘러 인애와의 약속장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인애와의 약속장소로 걸어가는 동안 해가 졌다.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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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모임 가실 때 도장은 집에 두고 가시길 권장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7.11 2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