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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에서 여수로 가는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쯤 가면 능주를 지나 춘양이라는 정거장이 있다. 여기서 내려 서쪽으로 십 오리 산골짜기 좁은 길을 타고 올라가면 오육십 호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마을이 보인다. 여기가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길이 멀고 험하여 별로 찾아가는 사람이 드문 궁벽한 산촌이다. 그러나 도암에 영기가 있었든가 혹은 이 마을이 우리의 등대가 될 것을 미리 옛 임이 미리 아셨던가? 도암면 등광리라는 이곳에 놀라울만한 성자 한분이 계시니 그의 이름은 이 세종이다. 우리는 흔히 이 세대에 참된 구도자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탄한다. 이 땅에 종교를 논하는 자는 많으나 참으로 도를 구하고 참으로 도를 즐기는 자 그 몇 사람이나 되는가? 현대인의 생활 기구와 이상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곤란케 한다. 이제 우리들의 신앙은 생명 전체에 대한 최종의 결단인 것 보다 감각적인 욕구를 채우려는 일시적 수단에 까지 타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기 전에 벌써 현대문명의 원리인 쾌락주의와 유물사상을 고집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논하기 전에 적당한 적당히 조절한 본능을 가졌다. 이 시대가 암울 한 탓인가? 혹은 너무 지나치게 냉랭한 탓인가? 우리는 이러한 모순을 그대로 선전하고 그대로 예찬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이제 기독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우리는 이 공(空)과 같은 인물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고 기쁘다고 할 것이다. 그는 과연 자기를 이긴 사람이요. 참된 사랑의 사도이다. 그에게는 간디의 정책도 없고 선다싱의 이론도 없고 내촌 씨의 지식도 없다. 그러나 나는 간디보다 선다싱보다 내촌씨보다 이 공(空)의 인물을 순경하여 마지아니한다. 나는 이러한 위인들보다 그를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물론 그는 설교가도 아니요. 신학자도 아니요. 경리가도 아니요. 사업가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의 가장 없는 인물을 존경한다.
공(空)은 몸 갈키가 호리호리하고 키는 다섯 자도 되지 못한다. 그의 목소리는 옆 사람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으리만치 적고 부드럽다. 나는 소박하고 순호한 성자를 대할 때는 마음에 넘치는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공(空)은 화순 땅에 나아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아로 자랐다. 고아가된 공(空)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싸우며 이집 저집 품팔이를 하며 호구의 책을 구하였다. 남에게 눌림을 받아 바른 것은 바르다고 말 한마디 크게 하지 못하고 먹을 것 입을 것 없이 굶주리고 헐벗어 눈물과 외로움으로 날을 보내고 해를 거듭하였다. 그는 골수에 사무치도록 고를 맛보았다. 공(空)은 고를 통하여 인간을 이해하였고 고로서 사람을 동정한다. 공(空)이 가정을 이룬 다음에 굳은 결심으로 십년을 작정하고 재산을 모아보기로 하였다. 그가 한번 뜻을 정하면 변하는 일이 없다. 공(空)은 신앙의 사람이 되기 전부터 벌써 의지의 사람이었다. 십년이라고 정하였으면 참으로 십년을 의미하는 것이요. 재물을 모으리라고 결심하였으면 재물을 모으는 것이었다. 공(空)이 이러한 결심을 한 후로는 십년을 하루같이 밤과 낮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땅을 파고 곡식을 가꾸었다. 그는 시기를 엿보아 이익이 되는 것이면 아니한 것이 없었다. 목화를 심어서 돈을 만들고 금융조합의 빚을 내어 땅을 샀다. 고리대금도 하였고 등짐장사도 하였다 말하자면 어디서든지 벌고 아무에도 쓰지 아니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이렇게 예정한 십년이 지난다음에 자기 것이라고는 한 푼도 없던 그가 사십여 두락에 토지를 장만하고 촌살림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유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각은 만족을 모른다. 식에 대한 공황이 없어지자 성에대한 새로운 욕구가 강열하여졌다. 불행히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아들 낳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 원통하고 분하였다. 왜 내게는 아들이 없나? 세상에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 내게만 일점의 혈육도 없는가? 이렇게 그는 운명을 저주하며 감각을 선호하고 있었다. 오냐, 내게 정성이 부족한 탓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니 내 정성을 다하여 보리라. 그는 동네 뒷산에 올라가 날마다 정성스럽게 산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맑은 물로 몸을 씻고 깊은 산속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신령님 아들을 주시옵소서. 성주님 내게도 아들이 있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여러 날 여러 달을 쉬지 않고 정성을 드렸다. 그러는 동안 어느 날 동네에 내려왔더니 마침 어느 점쟁이 집 하녀가 별안간 미쳐서 소리를 지르며 이런 짓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믿어야해. 하며 뛰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구경을 하고 다 미친년이 헛소리 한다고 했으나 이 공의 귀에는 이 미친 사람의 말에도 깊은 뜻이 있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짓을 하여서는 안 돼. 하나님을 믿어야지, 하나님을 믿어야해. 그는 어느 날 등광리 에서 칠십 리 길을 걸어 광주 어느 선교사를 찾아갔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도를 배우려고 선교사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그 선교사는 산골 농부를 환영해주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교만하고 냉정한 태도를 가지고 진리를 배우려고 헤매는 그를 상대하여 주지 않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겨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할 일 없이 선교사 집에서 쫓겨나오다시피 문간을 나서서 길거리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의 마음에는 의혹과 번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서양사람 이들이 여기까지 와서 도를 전하려고 왔다면 왜 그렇게 행동할까? 내가 비록 걸인이나 광인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더 불쌍히 여기고 영접할 것이 아닌가? 내가 그들에게 진리를 구하나 그들은 나를 배척함이 웬 일인가? 공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산란하여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끝까지 신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어느 전도 인을 만나 창세기와 시편과 잠언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 그는 이 책을 얻는 것이 미칠 듯이 기뻤다. 마치 보화를 얻은 사람처럼 뛰는 가슴을 억제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때껏 한글에 상식까지도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동네사람들에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며칠이 못되어 한글을 깨쳤다. 그는 이제 새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성경을 손에 들고 한글자 두 글자 말을 붙여서 읽어 내려갈 때에 그는 경이 환희 영감에 도취되어 참으로 날이 가는 줄 모르고 읽고 또 명상하였다. 공(空)은 성경을 읽은 후 곧 산당을 헐고 창세기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제단을 돌로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얼마를 지내고 난 다음에는 어떤 사람이 사도신경을 사도행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책을 얻어다가 읽었고 나중에는 신약전서라는 책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비로소 신약전서를 사가지고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읽었다. 공(空)은 신약을 통하여 예수를 배웠고 참 종교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신약을 읽고 놀래어 산에 올라가 제단을 헐고 은총의 세계를 명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이다. 공(空)은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 영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동네 뒷산 깊은 암자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고 진리를 명상하는데 몰두하였다. 교회 전통이나 교파의 신조나 제도의 구속을 벗어나 그의 적나라한 영은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유명한 학자에게서 계통 있는 사상의 체계를 전수한 것도 아니요. 어떤 성경학자의 주석이나 비판을 참고한 것도 아니다. 그는 성경에 손을 들고 자기 독특한 해석을 알고 성경을 통하여 자기 독특한 영감을 받았다. 공(空)이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명상하는 동안 그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시절이 바뀌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철을 따라 옷을 바꾸어 입고 때를 따라 음식 먹는 것을 잊었다. 어느 때는 암자에서 명상에 빠져있다가 동네를 내려오면 소를 몰아 논을 갈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자기가 산으로 올라갈 때는 길가에 눈이 허옇게 덮였었는데 이제 벌써 봄이 되었나보다 하였고 어느 때는 어린애들이 밭에서 참새를 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을이 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렇게 한 것이 몇 해가 되어 지났는지 그때부터 자기도 자기 나이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옛적에 글을 좋아해서 가죽 책 갈이가 세 번이나 헤어진 분이 있다고 하더니 진리에 탐하여 해가는 것을 잊은 사람이 이 시대에도 있었던가? 학위를 간판삼고 신학을 직업 술로 여기는 속의 사람들에게는 공의 존재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지 아니할까 두려워한다.’
사실 이 대목에서 제 자신 제일 마음이 아팠습니다. 학위를 간판삼아 신학을 직업 술로 여기는 속계의 사람들 그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저의 모습이기도 했고요. 또 이 글을 쓸 때 정 경옥 선생의 모습이기도 했었지요.
‘공(空)이 이같이 산당에서 명상에 빠져있는 동안에 공(空)의 부인은 간부를 두어 말없이 집을 떠나고 말았다. 공(空)이 상당에서 돌아온 후 이것을 알고 즉시 간부와 같이 자는 자기 아내를 찾아갔다. 공(空)은 그러나 공(空)은 벌써 속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자비로 세상을 덮을 수 있었고 그의 성품은 눈같이 희었다. 공(空)은 자기 아내와 간부를 한곳에 불러 앉히고 권고하고 전도를 하였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 자기 아내가 쓰던 가구와 의류를 다 싸서 보내며 이것을 가지고 잘 살기를 바라나 이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닌 만큼 아닌 것은 깨달으라고 했다. 그 후 일 년쯤 있다가 그의 아내는 간부를 버리고 다시 옛집을 찾아 돌아왔다. 공(空)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아내를 받아들이고 예전과 같이 한집에 살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서로 부부의 관계는 맺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하는 친구로 방을 달리하였다. 공(空)은 항상 그 여자를 위하여 기도’ (끊김)
‘동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공(空)은 언제나 그 여자를 옹호하고 자기 사랑하는 친구로 여기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공은 지금도 늘 말한다. 사람의 일 사람은 사람의 일을 모른다. 사람의 운명과 선악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 에게만 있다. 나는 끝까지 그 여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긴다. 나는 그를 보살펴줄 책임이 있다. 앞으로 세상일을 누가 아는가? 그가 구원받고 내가 타락할는지 모른다. 그가 잘못된 길로 나간 것도 나의 책임이 중하다. 그로 인하여 나도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로 공(空)은 물질적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극기의 생활을 계속한다. 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나더러 소유하라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도 내 것이 아니다. 나를 내 것으로 여길 때에 사람은 가장 큰 배역을 행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空)은 언제나 홑바지 저고리로 지낸다. 추운 때나 더운 때나 같은 옷을 입는다. 그도 사람인지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의복이 싫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걸인과 같이 떨어진 베옷을 기워 입고 구멍 뚫린 모자를 쓴다. 얼핏 보아서는 너무 심한 것도 같고 일부러 극단을 취하는 것도 같다. 혹은 중세기의 걸식제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삼야신도 모르고 아씨스의 프란치스코도 모르는 사람이다. 공(空)의 심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를 오해하기 쉬울 것이다. 공은 왜 그렇게 차마 먹지 못할 음식을 먹고 의복 같지도 않은 홑 누더기를 입느냐고 물으면 그는 좋은 옷을 입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황공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는 천박한 절제를 가르치지도 아니하고 소극적인 금욕주의를 믿지도 아니한다. 그의 자비심은 세상을 덮을 만큼 넓고 크다. 공(空)은 불쌍한 사람을 생각하고 밤에 이불을 차마 이불을 덮고 잘 수가 없어서 절반만 걸치고 잔다고 한다.
그는 고를 안다. 그의 사랑은 고로서 고를 이해하는 것이다. 혹 걸인이 공(空)의 집에 찾아가면 자기는 땅에 앉아서 먹고 걸인에게는 좋은 상에 차려서 대접한다. 그는 참으로 요구되는 것이면 구하는 자에게 물리친 때가 없다. 몇 번이고 달라고 하기만 하면 자기 손에 있는 것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준다. 공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것을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 살수가 없다.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내게 와서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나의 책임 나의 책임은 있는 것을 나누어 구제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을 즐겨하고 없는 사람은 돌보지 아니한다. 불쌍한 사람이 내게 오면 내게 있는 것으로 나누어 준다. 이것은 내게 덕이 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긴 것이니 하나님께 돌려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