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
현대인에게 커피보다 친숙한 기호음료가 또 있을까.
기원전 6, 7세기경 커피의 각성효과가 커피 시음의 효시가 된 이후, 중세에는 약리작용에 대한 믿음으로 환자의 치료제로몸값을 높여왔다.
세계 최대 다국적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사장이 “우리는 커피만이 아니라 문화를 판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에 이르러 커피는 세계인의 기호식품을 넘어 커피와 문화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며 신분상승을 꾀하고 있다.
문화와 건강, 행복의 아이콘으로 격상한 커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마시는 방법을 제안해 본다.
커피의 역사
1. 커피의 가치
커피는 영양을 위해 우리가 꼭 마시는 필수음료가 아니다.
꼭 마셔야 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다양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기호음료로서 때론 밥보다도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우린 커피를 마시게 된다.
그럼 커피에는 어떠한 가치들이 있을까 먼저 기본적으로 커피가 가진 특유의 맛과 향을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활동성이다.
우린 벼락치기 시험공부가 필요한 늦은 밤이나 낮 시간 식사 후 밀려오는 식곤증 등 잠을 떨쳐내려 커피한잔을 찾게 되곤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린 친구를 만날 때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가게 된다.
이건 사회성이라 볼 수 있겠다.
이렇듯 맛, 향, 사회성, 활동성 등 다양한 가치를 가진 커피를 좀 더 잘 알고 즐길 수 있다면 각각의 개인에게 좀더 다양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까 한다.
2. 커피의 발견(유래)
커피의 유래에 관한 전설은 대표적인 아비시니아(Abyssinia : 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의 목동 칼디의 전설과, 오마르의 전설이 있다.
칼디의 전설은 이렇다.
기원전 6,7 세기경,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남서부에 있는 험준한 산맥에 칼디라는 염소치기 소년이 어느 날 기르던 염소들이 이상한 빨간 열매를 먹고는 춤을 추듯 뛰고 달리고 밤에 잠도 자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칼디가 그 열매를 먹어보자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솟는 듯 한 기분이 느껴지고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열매를 따서 근처 수도원 원장에게 열매를 보여주었다.
수도원 원장은 이 열매를 악마의 유혹으로 생각하고 불에 던져 태웠다.
태우기 시작한 후 열매가 불에 타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퍼져 그 냄새에 반한 원장은 태우는 것을 중지하고 타나 남은 열매를 갖고서 직접 먹어본 후 커피의 위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 수도원 승려들은 커피의 힘으로 밤새 졸지 않고 기도를 할 수 있었고, 종교 교리에 대한 학습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오마르의 전설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1258년 아라비아의 부족장(Sheik) 하지 오마르(Hadji Omar)가 중병에 시달리는 아라비아 모카왕의 딸을 치료한 후 그 공주를 사랑하게 되고, 그것이 발각되어 아라비아의 오우삽(Ousab)산으로 추방된 뒤, 배가 너무 고파서 선속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우연히 한 마리의 새가 빨간 열매를 먹는 모습을 보고 그 열매를 따먹었다.
오마르는 빨간 열매를 먹고 나니 피로가 풀리고 심신에 활력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 그 열매를 사용하여 많은 환자들을 구제하는 데 성공하여 결국 그동안의 죄가 풀리고 성자로서 존경받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3.커피의 어원
커피의 어원은 에티오피아의 지명인 카파(Kaffa)에서 유래됐다는 학설과 카와(Kahwa)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있다.
카파는 에티오피아에서 커피나무가 야생하는 곳의 지명인 동시에 ‘힘’을 뜻한다.
희랍어에서 ‘힘과 정열’을 뜻하는 카웨(Kaweh) 와도 연관이 있다고 본다.
커피의 각성효과 때문에 아랍어의 카파, 즉 힘을 뜻하는 단어로 불려 지게 되고 오스만제국에서 카웨(Kahweh)로 불려지다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카페(Cafe)로 불려 지게 되었다.
아랍에서 기운을 돋우는 커피의 효능을 나타내는 뜻을 지닌 카와(Kahwa)로 불려 지다가 술(Wine)을 뜻하는 카와(Qahwa)가 되고, 카와(Kahwa)가 오스만 제국에서는 카흐베(Kahve)로 불렸으며, 이후 유럽 각지로 전파되면서 카페(Cafe)로 불려지게 되었다.
아랍어 카와가 원래는 술이란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었던 이슬람 신자들은 술 대신에 커피를 마시며 이슬람의 와인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은 전 세계인의 음료가 된 커피의 시작은 에티오피아 카파 지역에서 시작된다.
에티오피아 카파 지역에서 야생으로 자라던 커피나무는 수도원의 염소에 의해 그 열매와 씨앗이 가진 효과가 알려지게 되면서 에티오피아의 수도원에서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로 전파됐다.
씨를 심어 나무와 열매를 키우고 수확해 그것을 다시 볶고 분쇄해 물에 끓여먹는 방법이 개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아랍지방에서 황실의 수입을 올려주는 귀중한 자원이 되었다.
1536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예멘을 점령하고 난 후 커피는 터키 황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
커피는 예멘의 모카(Mocha)항을 통해서 수출되기 시작했다.
커피의 수출 경로는 배로 수에즈 지역까지 운반한 다음, 다시 낙타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커피 창고로 집하되어 그 곳에서 프랑스나 베니스의 상인들에게 팔려나갔다.
커피가 터키 제국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자 그들은 커피의 경작이 예멘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싹을 틔울 수 있는 종자용 생두의 반출을 엄격히 통제했다.
즉 끓는 물에 담갔다가 꺼내 싹을 틔울수 없는 생두나 볶은 후 원두만을 판매하도록 했다.
1600년 인도의 이슬람 순례자인 바바 부단이 성지 메카를 순례하고 오면서 삼엄한 몸 검색을 무릅쓰고 7개의 종자용 그린 빈을 몸속에 숨겨 반출해 인도의 남쪽 마이소어산에 심어 재배에 성공했다.
그 커피가 지금 인도의 마이소어 커피로 대표적인 인도의 아라비카 커피가 된 것이다.
1616년 세계의 해상 무역을 제패하였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예멘의 아덴에서 커피나무 한 그루를 탈취해 암스테르담의 식물원에 심어 놓고 연구해 1658년 실론 섬(스리랑카의 옛 이름)에 이식해 경작하기 시작했다.
1699년 인도의 말라바 해안에서 인도네시아 자바로 옮겨 재배하는데 성공하여 그로부터 수마트라, 셀레비스, 티모르, 발리 등 인도네시아의 다른 섬들로 커피 경작을 확산 시킨다.
그곳에서 경작한 커피의 수확으로 네덜란드 국영 동인도 회사는 한동안 유럽의 커피 시장에서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1714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자치정부간의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체결 기념으로 1714년 7월 29일 암스테르담 시장은 프랑스 루이 14세에게 5피트의 튼튼한 커피나무를 선물하였으며 이 커피나무는 왕실 식물원에서 자라게 되었다.
1723년(1720년) 해군 장교 “가브리엘 메튜 드 클리외”는 그가 관리하는 서인도 제도의 마르티니크(Martinique)섬으로 커피나무를 가져가서 커피 재배에 성공을 거두고 후일 서인도 제도와 중남미 여라 나라 커피의 원조가 된다.
“클리외 장교가 힘겹게 살려 옮겨 심은 한그루의 커피나무가 서인도 제도의 1800만 그루의 나무로 성장해 프랑스를 커피 부국으로 키우는 재목이 되었다.
프랑스 왕은 공로를 인정해 후일 그를 서인도 제도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718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기아나(Guiana 현 수리남)에서 커피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커피 경작을 위해 자신들의 북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주고 영국령 기아나를 취득해 그곳에 커피를 경작했던 것이다.
1727년 기아나는 영국·네덜란드·프랑스 3개국의 영토로 나뉘어 있었는데 국경분쟁이 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영토인 브라질의 관리 프란시스코 드 멜로 팔헤타(Francisco de Mello Palheta)에게 분쟁을 심판해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브라질의 관리는 커피 종자를 브라질로 수입 것을 염두에 두고 그 일을 맡게되는데, 그때까지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정부는 커피의 종자 반출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쪽의 총독은 커피의 종자에 관한 한 반출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잘생긴 군 장교였던 팔헤타는 분쟁을 성공적으로 잘 중재하고 그 기간동안 의도적으로 프랑스 총독의 부인을 유혹했다.
진심으로 팔헤타를 사랑하게 된 총독 부인은 그가 떠나는 날 프랑스 총독과 함께 배웅을 나온 총독 부인이 그에게 꽃다발을 하나 선물했는데 그 꽃다발 안에는 잘 익은 커피 열매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팔헤타는 그 열매에서 씨를 추리고 싹을 틔워 그의 영토인 파라 지역에 심었다.
그의 영토로부터 브라질의 남부로 퍼진 커피는 브라질이 20세기 초 세계 생산량의 75%를 담당하는 커피의 생산 대국으로 성장하는 시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