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서경희
인생 어디나 고수(高手)들이 있다는 '인생도처유상수라는 말은 들을 때 마다 기분이 좋다. 남이야 알든 모르든 나 홀로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 세상 곳곳에 조용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싱그럽고 뿌듯하다.
내가 아는 한 아주머니는 정말로 놀라운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람을 '인생도처유상수의 한 증인이라 생각해본다. 그는 시골에서 자라 학교 근처에도 못 가봤다는데 도대체 음식이라면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일상 음식은 물론 양식집 고급 요리도 한 번 먹어보면 돌아서서 척 만들어낸다.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부르는 곳마다 달려가 음식을 맡아놓고 하는 그가 혹 학교공부를 했더라면 천연의 능력이 퇴보했을까? 비료 주고 물 많이 주어 자유로운 영혼을 꺼뜨려버렸을까?
뭐든 남보다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을 나는 존경한다. 그런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이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을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다고 똑같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보고픈 것이다.
사람의 능력은 타고난 인자가 70%, 노력이 20%, 나머지 10%는 주위 환경이라고 어느 연구자가 말했는데, 나와 통했다.
우리 고전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무명씨'라는 이름이 많다. 처음에는 무명씨라는 이름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이 무명씨라는 이름을 가진 이름없는 작가야말로 존경해 마지않을 '인생도처유상수'의 꽃이 아니겠는가
무명씨가 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오래되어 이름이 사라진 경우도 있고, 불이익이 무서워 이름을 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여성이어서 이름을 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춘향전』 이나 『심청전』 『흥부전』 같은 고대소설도 작자 미상의 무명 씨 작품이다. 이런 소설은 대부분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엮은 것이라 하지만, 완성의 꽃을 피운 빼어난 작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없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나게 노는 가면극처럼, 이름을 가리고 한가락 용감하게 시대를 외치고 비틀어보고 싶은 무명씨들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이름이 없는 까닭 중에는 이름을 낼 수 없는 여성이 많았다. 「조침문」이나 「규중칠우쟁론기」 같은 고전문학은 빼어난 여성작가 글인데, 이름이 없다. 「조침문은 그나마 순조 때 유씨부인'이라는 조그만 이름이 있어 고맙다고나 할까. 유려하고 섬세하며 완성도가 뛰어난 이 명품작품을 대할 때마다, 나는 지성과 감성이 흘러넘쳤던 그때 그 선인들을 그리며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다.
'인생도처유상수는 지금 세상에도 많다. 요즘 방송사마다 큰돈을 내걸고 하는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는 정말 놀라운 노래꾼들이 모여든다. 저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저렇게 무대 위에 뛰어올랐나. 이 땅엔 무대 아 래에 훨씬 많은 실력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세상은 이제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한 그물 안에 갇혀있다. 모두가 그물에 갇혀 퍼덕이는 물고기가 되어있다. 숨을 곳이 없을 만큼 사회연결망도 하여 단단하게 묶여있다. 온갖 것이 발가벗겨지고, 뛰어봤자 거기가 기기다. 이런 세상 속에서도 인생도처유상수 은신처가 있을까? 순간이 빛으로 가닿는 이 찰나 세상에도 빛이 들지 않는 토굴이 있을까?
이럴 때일수록 토굴 속에는 고뇌하는 구도자들이 더 많을지 모른다. 사실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도력(道)을 키우는 구도자이다. 인생도처유상수는 따지고 보면 평범한 것이다. 살다 보면 평범한 사람 누구에게나 하나의 상수(上手)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득도는 깊은 산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계곡에서 하는 것이다. 모두가 나보다 한 수 위이다.
정들면 미운 얼굴이 없듯이, 알고 나면 어수룩한 사람이 없다. 누구나 한 가지씩 특장(特長)을 지니고 살아가고, 누구나 몰래 지구 한 귀퉁이를 쓰는 미덕을 가지고 살아간다. 모두가 위대하고 고귀하다. 이게 진정한 '인생도처유상수'가 아니런가.
서경희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강사
수필집 <장미와 안개꽃>,<비밀번호>,<코리안 디자인>,<파안대소>
* 주) 행간을 뗀 것은 인터넷상에서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함일 뿐입니다.
(한국산문 4월호에서 발췌)
첫댓글
"정들면 미운 얼굴이 없듯이, 알고 나면 어수룩한 사람이 없다. 누구나 한 가지씩 특장(特長)을 지니고 살아가고, 누구나 몰래 지구 한 귀퉁이를 쓰는 미덕을 가지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