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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뉴스: 한국이 지난 해 (2019.7.30) 전세계 전자산업 업계에서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생산국이 된 것으로 조사 됐습니다. 한국 전자정보통신 산업진흥회는 지난 해 한국의 전자산업 생산액을 1711억 백만 달러로 집계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8%로 중국과 미국에 이어서 3위를 차지했습니다.
내레이션: 大韓民國 電子産業의 비약적인 성장 그 시작은 금성사가 있었다. 1959년 국내 최초로 라디오 생산을 시작한 금성사는 1962년에는 첫 수출에 성공한다. 금성사는 라디오에 이어 국내 최초로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 등을 연이어 개발하고 국내전자산업을 주도하게 된다. 1966년 흑백 TV 개발에도 최초로 성공한다. 여기에 도전장을 낸 건 삼성 이병철 회장 이었다. 1969년 삼성전자 공업을 창립하고 뒤늦게 전자산업에 뛰어든 것이다. 그 후 금성과 삼성의 치열한 경쟁은 50여 년간 계속된다. 두 기업은 국내 전자업계에 최고 라이벌이 된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사백 일회 역사저널 그날 입니다. 삼성이 전자업계에 뛰어든 그날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 보았는데요. 전자산업의 두 기업 라이벌 금성과 삼성의 이야기 해볼까 하는데~
최태성/한국사 강사: 금성과 삼성~ 태성도 할까요? (빠른 사과) 죄송합니다. 어쨋거나 금성하면 너무 유명하잖아요. 옛날에 럭키금성 Gold Star, 시원씨는?
이시원/배우: 저는 금성보다는 LG가 훨씬 익숙하긴 해요. 근데 금성이 확 와 닿았던가 김성규씨의 역할이 기억나시나요? 금성전자 대리점장이었어요. 그때 잠바에 빨간색 로고를 받고 나오셨죠.
최태성: 맞아요, 1980년대 럭키 금성, 그게 95년 이후 LG로 바뀐건데 LG에 익숙하시구나
김동환/삼프로TV 대표: 금성사 라는 회사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최초 개발이라는 타이틀을 싹쓸이 하고 있었어요. 정말 대단한 회사였죠. 1966년도에 흑백 TV륽 최초로 개발하였는데 이게 얼마였냐? 당시 19인치 흑백 TV 하나가 그때 당시 소비자 가격으로 6만 8천원 정도 했거든요. 당시 도시 근로자 한 달 평균 수입이 대체로 1만 1750원 이었으니까.
이시원: 그럼 여섯 배 정도
김동환: 몇 개 월치 월급~
최태성: 저도 기억 나요. TV가 집에 들어 왔을 때 제가 방방 뛰었던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이시원: 뭔가 우리 집의 가계가 피는구나 그런 느낌,
최태성: 그냥 TV가 생긴 게 좋았어요.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그 당시에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공급 자체가 딸렸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신청을 했다고 그럽니다. 신청을 하고 추첨을 해 가지고 그렇게 해서 TV 공급이 이루어졌다고 그래요.
이시원: 아파트 청약처럼
최원정: 추첨을 예전에 KBS 국영방송국 시절이었던 그때 방송국에서 하고 그랬죠.
허준/방송인: 추첨을 방송국에서
김동환: 저는 초등하교 4학년 때 TV가 처음 왔는데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요. 삼성에서 나온 이코노 TV 라고, 12인치인데 그 전까지는 사실 세를 살았는데 주인 집에 가서 TV를 보는 거예요. 눈치도 없이 심야까지도 보는 데 그때 공전의 히트를 친 아직도 기억이 나요. KBS 드라마 <여로> 장욱제씨와 태현실씨가 나온 건데
-----------(동영상) 1972년 4월 3일, 첫 방송을 한 KBS 드라마 <여로>
김동환: 아이들을 포함해서 전 식구가 그 집에 가서 마루에서 보는 거예요. (TV 드라마<여로>-여주인공 분이와 장애를 가진 남편 영구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다루었다)
이시원: 영화관 가듯이
김동환: 그리고 브라운 TV는 딱 누르면 20초 후에 나와요. (TV 시청에 인내심이 필요했던 시절), 뭐가 나올려면 20초를 기다려야 해요. 이코노 TV가 처음 나왔을 때 그 20초를 5초로 줄여주었다고
이시원: 이코노 TV 라고 하셨잖아요. Economy class 이코노미석 할 때 그거와 같은 건가요?
김동환: eco는 대중화 그러니까 1970년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삼성 이코노 TV, 야 돈 좀 없는 사람도 이거 살 수 있어 원래 TV하면 주로 티크 장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게 많았거든요.
최태성: 열리는 게 최고였지
김동환: 당시 TV는 전자제품이 다 가구야
최태성: 거기다가 열쇠도 달아났어요. 못 열게!
박태균: TV 장을 여닫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당시 실세였어요. 저희 집 같은 경우는 명절에 친척들이 다 모이면 큰 집이니까 다 모여요. 제가 그러면 이걸 열고 닫는 게 저의 집에서 최고의 권력자로서 행세를 했는데
최태성: 장손이신가요?
박태균: 장손입니다.
최태성: 그래서 그러셨구나.
김동환: 지금은 양강 체제가 견고해 졌는데 1950~60년대 그때만 해도 금성사가 독보적이었죠. 근데 삼성이 들어온 거예요. 사실은 그 전까지는 금성과 삼성이 비교적 나쁘지 않았거든요. 전자산업이라는 새로운 먹거리에 대해서 삼성이 뛰어들어 오니까 현직 사람들끼리 멱살잡이 까지 하는 모습도 나오고
최원정: 삼성이냐 LG냐 특히 TV 고를 때는 두 제품을 고민할 거고 아마도 신혼을 최근에 차렸던 시원씨 같은 경우도 어느 제품을 사야 될 지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이시원: 한 가지로 몰아야지 할인 혜택이 커지니까 단위가 커져요. 할인혜택도 많고 저는 솔직히말해 좀 더 가정적인 느낌의 브랜드를 고르긴 했거든요.
김동환: 그럼 LG네,
최태성: 저희 부모님이 늘 얘기했어요. 백색가전은 LG다.
김동환: 가전은 LG다 라는 얘기를 사실은 어쩌면 LG가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삼성은 가전의 비중이 크지 않거든요. 반도체가 있잖아요. 삼성은 주력산업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이 있단 말예요. 그런데 LG는 최근 들어서 휴대폰 접었죠. 반도체 포기했죠. 그러니까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게 가전이에요. 가전에서 삼성한테 밀린다. LG 전자 입장에서 굉장한 위상의 변화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에 가전은 LG다 라는 건 어쩌면 LG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다.
이시원: 우리가 원조다.
최원정: (최태성씨를 향해) 야구 LG좋아하는 사람도 여기는 트윈스 광팬이죠.
최태성: 전 예전 MBC 청룡 때부터 시작한 LG팬으로서 LG대 삼성이 굉장히 고민이 됩니다. 진짜로 어떤 때냐면 삼성이 LG를 이겼을 때 삼성제품 안 사게 되더라고요. 화가 나가지고~
허준: LG트윈스 팬이 라면 지금 현재 집에 있는 가전 제품들이 90년대 중반에 생산된 거라야 돼요.
최원정: 왜요?
허준: 그게 1994년 마지막 우승이거든요. 보통 야구 구단들이 우승하면 세일을 해요.
최태성: 왜 그렇게 뒤집어 놓냐.
허준: 트윈스 팬에게 너네는 이기면 TV 싸게 해주냐? 제일 많이 놀렸던게 자이언츠예요. (롯데 자이언츠 팬에게) 너네는 이기면 껌 세일하냐?
일동: (폭소)
최원정: 금성이냐 삼성이냐 시작부터 재밌습니다. 근데 금성 대 삼성 이 기업의 시작은 어땠을까요?
-----------이광용/아나운서: 제가 나왔습니다. 저 오늘 달라 보이지 않아요? (갑자기 안경을 쓰고) 좀 있어 보이지 않아요?
이시원: 떠 오르는 패션?
최태성: 금수저?
이광용: 몇 개고? 밥알 말이다.
최태성: 들어본 말인데, 아~ 재벌 진양철 회장
이광용: 그게 돈이 됩니까?
이시원: 진양철 회장님
이광용: 다시 본캐로 돌아가서 지난해 엄청 화제가 됐던 드라마죠. <재벌집 막내아들>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얽히고 설키며 성장한 순양의 모습이 실제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많은 분들이 공감하셨고 시청률이 대박났잖아요. 특히 그 드라마의 주인공, 삼성 이병철 회장-순양 진양철 회장, 똑같다 똑같다 순양의 진양철 회장을 보면서 이 안경하며 외모하며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모델아냐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최태성: 자연스럽게 오버랩 됐네요.
이광용: 특히 제가 조금 전에 했던 대사, 초밥집에서 요리사에게 몇 개고? 밥알 말이다. 이렇게 물었던 것을 실제로 이병철 회장이 요리사에게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허준: 저희 나이 때 이후로는 전부 다 이병철 회장님이 아니에요. 이건희 회장이에요. 근데 이병철 회장님을 요즘 젊은이들이 진양철 회장을 보면서 기업가 정신이다 이런 걸 볼 때에 화를 낸 게 아니라 오히려 호감도가 올라갔다 라는 기사가 굉장히 특이 했던 게 사실은 안좋게 표현할려고 했던 모습들이 많았거든요, 근데 요즘 젊은이들이 왜 진양철 회장 괜찮은데 라는 의견들이 많았데요.
이광용: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한국전자산업을 이끌었던 삼성의 이병철 그리고 금성의 구인회 회장의 면면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병철 회장
최태성: 회장도 이력서 써요?
이광용: (늠늠하게) 제가 쓰라고 했어요.
허준: 이병철의 호=호암(湖巖), 호암 아트홀의 그 호암?
이광용: 그럼요. 이병철-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난 호암(湖巖) 이병철 (李秉喆) 회장, 진주 지수공립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전학을 가게 되구요. 三星의 시작이 언제였냐, 1938년 대구에 三星商會 라는 회사를 이병철 회장이 자본금 그때 돈 3만원 지금으로 따지면 3억원 정도를 들여서 세우게 됩니다. 三星商會
이시원: 상회하면은 온갖 과일 팔고 채소 팔고 백화점 같은 느낌이거든요.
이광용: 맞아요, 삼성상회가 당시에 대구 인근 지역에서 수확한 청과물이나 건어물을 만주 또 북경지역에 파는 무역업을 주로 했어요. 그런데 삼성상회에서 직접 만들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이 있습니다. 뭐였을까요?
이시원: 채소, 과일로 만든 것?
허준: 잼!
최태성: 쥐포!
이시원: 떡!
김동환: 국수
이광용: 오~ 정답입니다. 바로 국수였습니다. 그 이름하여 별표국수였습니다.
박태균: 별표국수 나와 가지고 너무 인기가 있어 가지고 국수공장이 쉬지 않고 매일 매일 돌리고 국수하면은 칼로 잘라먹는 전통적인 방식이 있는데 이 국수를 만들어서 삼기만 하면 끝이니 얼마나 편리해진 거예요. 그러면서 삼성상회가 크기 시작한 겁니다.
허준: 저희가 흔히 아는 동그란 종이에 말려있는 국수가 거기서 나온 거잖아요.
이광용: 이병철 회장, 성격-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확실하게 해내고야 마는 그런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경영철학은 어땠을까요? 경영철학-事業報國, 人才第一, 合理經營으로 대표되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최원정: 드라마에서 보면 그게 돈이 됩니까? 항상 그러시잖아요. 그러면 그런 말을 실제로 했나요?
김동환: 실제로 별명이 있었어요. 이병철의 별명-돈병철 우리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았다고
최태성: 그렇죠,
김동환: 옛날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대요. 당시 이병철씨는 부자의 상징 같은 그 이름이 이병철이었죠. 그런데 성품이 워낙 치밀하고 사업을 전개하는 것도 내가 지금하고 있는 사업이 어느 정도 완벽한 상태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1939년 별표국수가 완전 대박을 내니까 여기서는 내가 확장해도 되겠다. 그 이듬 해에 양조사업에 진출해요. 술 그리고 1953년에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설립합니다. 제일제당을 만들어서 우리나라가 최초 국산 설탕을 그 다음 54년도에 제일모직,
최태성: 제일모직 유명하죠.
박태균: 삼성에서 제일제당을 만들고 제일모직을 만든 이유가 있어요. 이 때가 삼백산업(三白産業-1950년대 미국 등의 원조자금 및 물자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분, 제당, 면방직 산업)을 키울 때 였어요.
최원정: 삼백?
박태균: 세 가지의 하얀 게 들어오는 데 삼백(三白)=세 가지 흰색 생산품, 그게 설탕, 면화, 밀가루 이런 게 들어오는 때니까 요게 딱 제당하고 모직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이게 정부에서 원조물자를 가지고 그걸 불하를 받아 가지고 이것들을 만드니까 사실 재료 값이 거의 안 드는 거죠.
이광용: 그렇다면 라이벌인 LG 그 옛날 금성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어떨까요? 여러분, 오~ 저~ 사람 뭔가 연결고리가 보이세요?
이시원: 같은 진주 지수공립보통학교
이광용: 이병철 회장이 중간에 전학가기는 했지만 진주 지수공립보통학교를 함께 다녔습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이병철과 구인회), 나이는 세 살 차이가 나죠. 근데 두 사람이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대요.
이시원: 왜요? 이째서요?
최태성: 옛날엔 다 그랬어
이광용: 3학년 때 구인회 회장이 반 번호 6번, 이병철 회장이 26번 이었대요.
허준: 기억이니까 더 앞 번호
이광용: 가나다 순이었는지 키 순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시원: 그때 담임 선생님은 한국의 이런 굴지의 기업가를 동시에 가르쳐 본 거네요.
최원정: 이 학교가 진짜 특이한 학교인 게 또 유명한 사람이 또 있더라구요. 허경영~
허준: 저 학교가 지금도 있어요?
최원정: 있더라구요. 지수초등학교 (2009년 송정초등학교와 통폐합 후 이전 옛 건물은 기업가 정신교육센터로 활용중),
김동환: 지세를 보는 분들이 이게 左靑龍 右白虎 금계포란형 (風水地理에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세, 富와 名譽를 두루 갖춘 明堂으로 통함), 한국 기업가의 산실이다, 기념관도 있구 그래요.
허준: 가보고 오신 거에요?
이광용: 금성이라는 회사를 창업했던 구인회 회장은 전자산업이 처음이 아니었어요. 럭키화학 공업사 라는 회사를 1947년에 창업을 합니다. 이게 치약, 비누, 샴푸 등의 생필품을 만들던 회사인데요. 무엇보다 최초로 여성용 크림인 럭키 크림(Lucky Cream) 을 만들어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시원: 지금도 LG 생필품들이 있어요. 은근히 많이 사
박태균: 럭키 같은 경우에는 약간 독점성이 있었어요. 해외에서 생필품들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치약이 다 럭키 치약이었거든요. 나는 당시에 치약이 럭키인 줄 알았어요.
이시원: 하~하~
김동환: 럭키 크림도 여성분들 한테 완전 독점이었거든요. 더 앞쪽으로 가면 두산의 박가분 (1916년 국내 최초로 제조 및 판매된 화장품) 이라고 있어요. 왜냐면 두산 창업주 박승직, 박씨잖아요. 박가분-박씨 가문이 만든 분=박가분(朴家粉), 두산의 박가분, 럭키의 럭키 크림,
이광용: 이렇게 생필품으로 큰 재미를 봤던 구인회 회장, 1958년에 전자쪽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그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한 제품을 가리킴)
이시원: 레코드 판?
최원정: 전축?
이광용: 부하 직원이었던 카이파이 전축 소리에 매료된 구인회 회장이 라디오를 생산해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최태성: 진짜 신기해요. 듣고 좋다가 아니라 그래
이광용: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를 창업한 지 1년만에 국산 제1호 라디오를 개발하면서 한국 전자산업에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경영철학도 구인회 회장의 이런 행보가 잘 드러나게 돼요. 남이 미쳐 알아낸 걸 선택하라.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부터 착수하라. 생필품 말 그대로 국민생활에 정말 필요한 거잖아요. 라디오를 시작으로 전자도 그렇다고 생각을 했던 거죠.
박태균: 라디오나 전자 산업으로 진출했을 때에 1960년대 이때가 정부 정책하고 잘 맞았던 것 같애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 군사정부에서 외제 말고 우리 국산을 가지고 보급 좀 하자 라고 해서 라디오를 보급하는 정부 주도 운동을 시작했을 때에요. 정부에서 보조금을 대서라도 라디오를 보급해야 된다. 요게 그 당시에 금성이 라디오를 만들기 시작하는 것과 정확히 맞물렸고 이걸 부품을 수입해다 조립해서 보급하다 보니까 수출을 하게 되는 거죠.
최원정: 삼성은 왜 갑자기 전자산업에 뛰어들게 된 건가요?
박태균: 이병철 회장의 삼성이 몇 차례 고비가 있었습니다. 1960. 4.1`9 혁명 직후에 대표적인 부정부패한 기업해 가지고서 조사받고 그러고 풀려납니다. 그때도 정부에서 요구를 한 게 정부정책에 맞는 분야에 투자를 해라. 이게 하나 있었고 그 다음에 65,66년에 아주 중요한 사카린 밀수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실 여러가지 산업 중에 굉장히 당시 블루 오션이라고 하는 비료산업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농업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근데 한국 비료를 삼성이 가지고 있었어요. 삼성이 수입하는 데 사카린을 넣어서 밀수를 하다가 걸린 거예요. (사카린 밀수사건/1966년-삼성그룹 계열사 한국 비료공업이 사카린을 대량 밀수입한 사건),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됐을 때는 한국비료를 그냥 정부에다 헌납해 버려요. 결론적으로 8.3 사태 때 또 한번 문제가 된 겁니다. (8.3 사채동결조치/1972년-기업들에 대한 모든 사채를 동결해 일정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 명령), 그때에 정부에서 재벌 기업들 대기업들을 불러서 선택해라. 자동차, 조선, 전자 우리 70년대 지금 중화학 공업 간다. 그런데 어떤 거 할래? 그런데 삼성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게 뭐냐면 2000년 이후에도 북한에 투자할 기업 대우 현대 다 가는데 삼성은 안 가거든요. 이걸 다 계산을 해 본 거예요. 자동차 조선 아니다. 우린 전자로 가야 된다.
이시원: 둘이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 서로 기억도 다 하고 그럴 것 아네요. 전학을 갔어도,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나요?
이광용: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끈끈해 집니다. 왜냐 1957년에 이병철 회장의 차녀가 구인회 회장의 3남이 결혼을 했습니다. 친구인데 거기에 사돈 관계, 가족이 된 거죠. 얼마나 끈끈 했겠습니까.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허준: 혹시 이혼?
이광용: 아니요, 기업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예요?
이시원: 돈!
이광용: 돈이죠, 구인회 회장이 꽉 잡고 있던 전자산업에 이병철 회장이 나도 하겠다 라고 끼어듭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김동환: 사위가 구자학 회장인데 사실 구자학 회장이 장인인 이병철 회장의 신임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제일 제당 이사에다 호텔 신라 초대 사장까지 시키고 이렇게 했는데 뜬금없이 삼성이 전자를 하니까 태도가 바뀐거야. 구자학 사위가 경영 일선에서 후퇴, 그리고 더 심한 건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시면서 자제분들한테 다 유산을 주었거든요. 그런데 차녀 이숙희 여사에겐 유산을 안 주었어요.
최태성: 진양철 회장 맞네.
이광용: 하지만 구인회 회장의 금성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던 1969년 금성은 아주 상징적인 제품을 또 한 번 최초로 만들어 내면서 큰 화제를 모았는데요. 당시 최고의 톱스타가 찍었던 그 제품 광고의 뒷 얘기를 듣기 위해 2023년 지금의 최고의 톱스타가 다녀왔습니다.
-----------최원정/아나: 안녕하세요? 국민배우 최불암 선생님을 역사저널 그날에서 뵙다니 영광입니다. 여러분들 기억나실 지 모르겠는데 금성사 지금은 LG잖아요. 금성사에서 수많은 최초의 전자 제품들을 내놨는데 그때마다 광고 모델로 서셨어요. 선생님 혹시 이 광고 기억나세요? (용량 50%가 더 커진 대형 백조 세탁기 탄생), 저희가 판넬로 준비해 봤는데~
최불암/국민 배우: 69년도에 처음 나온 세탁기인 걸로 알고 있는데~ 세탁기 하면 내가 상당히 충격을 크게 받았을 것 같애요.
최원정: 세탁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것이거든요. 그럼 선생님도 이때 광고 하시면서 아~ 이게 세탁기구나 처음 접하셨을 것 아녜요?
최불암: 그렇죠.
------------(광고) 당시 30세 최불암, 3킬로그램 대용량 금성 백조 세탁기
최원정: 세탁기를 처음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요?
최불암: 산업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귀중한 거로구나 또 잘 살아보자는 어떤 노력의 결과가 이런 거였구나 하고 충격이 컸어요. 어떻게 기계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것이 산업사회에 첫번에 깃발을 들은 환호였죠.
최원정: 백조 세탁기가 워낙 인기여서 동네마다 세탁소 이름들을 백조 세탁소라고 많이 지었죠.
최불암: 광고에서도 그걸 찍었어요.
-----------(광고) 금성 백조 세탁기 출시 50주년 기념 광고영상 (2019년) 한국인의 세탁소-백조 세탁소
최원정: 저걸 찍으시면서 눈물이?
최불암: 이 장면이 아니고 세탁기가 남아있으려나 한 번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LG 역사관에 보관 중인 백조 세탁기 50년전 이 세탁기가 바로 대한민국 세탁기의 시초입니다.
최원정: 19년에 출시 50주년인데 지금 보시니까 감회가 어떠세요?
최불암: 세월이 이렇게 갔나 또 지금 내 생각이 이렇게 변했나 젊음은 좋은 시간에 있었구나. 그런 걸 왜 간직하지 못했는가 하는 후환이 가슴에 저려오더라고요.,
최원정: 금성 모델을 오래 하다 보면 그 제품을 쓰게 되나요?
최불암: 그렇죠, 더 가까워지죠. 안쓰면 안되는 책임감 같은 게 느끼고 내 집사람이 또 삼성 CF를 했어요 (80년대 삼성전자 전속모델 아내 김민자)
최원정: 그럼 부부가 경쟁사 광고를? 그러면 제품 고를 때 어떻게 고르세요?
최불암: 냉장고하고 세탁기는 LG 거예요.
최원정: 휴대폰은?
최불암: 휴대폰은 항상 삼성 걸 쓰니까 TV 까지는 삼성 걸 쓰는 것 같애요.
최원정: 최빈국에서 10대 강국이 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과정을 다 보셨잖아요.
최불암: 우리 집이 높이 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면은 새벽 6시, 5시 반부터 한강변 도로 88도로가 차들로 빽빽합니다. 전부 불 켜고 저 양반들은 5시 반에 차를 몰고 나왔으면 몇 시에 일어나야 되나, 4시에는 일어나야 한 술 뜨고 세수하고 옷 입고 나왔을 거예요. 근데 토요일 일요일 보면은 차가 없을 때가 있어요. 얼마나 그게 섭섭한지 오늘은 왜 이렇게 차가 없지? 하면 주말이에요. 그만큼 부지런함이 이 나라를 여기까지 만든 것 같애요.
최원정: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일 밖에 모르시면서 눈부신 발전을 일궈오신 거잖아요.
최불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였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나라의 운명, 이런 것들이 제 가슴을 자꾸 울렁거리게 하네, 그런 거 극복하고 이제는 후배님들만 믿습니다.
최원정: 저희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화면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멋진 연기도 보여주시고 역사저널 그날 시청자와 함께 추억을 남겨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허준: 삼성전자에서 김민자씨를 광고모델로 섭외한 건 전략적인 거라 생각되는 게 가전제품을 선택하는 건 거의 대부분 아내 쪽이에요. .
최태성: 그렇죠,
최원정: 여긴 안 나왔는데 가전제품 고를 때 뭘 고르세요? 물었는데 뭐는 뭘 보고 뭐는 뭘 보고 하셨지만 아내의 권한으로 대부분 삼성전자의 제품을 선택하신다는
최태성: 삼성과 금성의 경쟁에 최대 수혜자는 최불암 부부예요.
최원정: 금성광고에 최불암 하니까 삼성에서 김민자를~ 금성에서 백조 세탁기가 나오니까 삼성에서 은하 세탁기가 나오죠. 정말 어마 어마한 라이벌이에요.
김동환: 금성사 입장에서 세탁기가 어느 정도로 역할을 하느냐면 1959년 당시에 금성사에 총자본금이 1천만원에다 직원수가 313명 매출도 5천만원 정도였는데 10년 뒤에 그러니까 세탁기를 개발했던 1969년에 금성사의 위상이 얼마냐 직원수가 6천 명, 그러니까 59년에서 69년 사이에 독주를 한 상태에서 최초의 자동 세탁기를 개발하면서 위상을 훨씬 더 강화하는 상태인데 삼성이 도전자로 나선 것이죠
허준: 금성 입장에서 야 이거 1위를 어떻게 지키지 벌써부터 고민이 시작됐을 거야.
박태균: 금성만 그런게 아니고 그때부터 유명한 전자 산업체가 또 하나 있었어요. 아남산업이라고 아남은 1970년대 반도체를 처음 시작한 기업 중의 하나예요. 근데 그 당시에 전자공업 협동조합에 59개 회원사가 있었는데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에 항의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 시장이 얼마 안 되는데 삼성까지 들어오면 큰 일 난다. 그래 가지고 항의를 하고 이게 또 신문에 보도되고 삼성이 그걸 반박하는 기사를 내기도 하고 너무나 반발을 하니까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에 이런 이야기가 쓰여 있어요 (李秉喆 著 湖巖自傳). 그들을 설득하다 못해 부득이 대통령에게 직접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설명하며 이것은 국가적 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더니 즉시 전자산업 전반에 관한 개방지시가 내려 삼성전자 설립을 보게 되었다.
허준: 안 되면 바로 대통령한테 쫓아가는 거야.
최원정: 바로 해결해 주고
이시원: 제안을 이병철 회장만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구인회 회장은 뭐했나요 그때 딱 하나 던졌어야죠.
박태균: 그것까지는 제가 모르겠어요.
최원정: 창업주의 자존심까지 걸린 전자산업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앞서 나왔지만 경쟁에 불이 붙게 된 풍경이 바로 TV였어요. TV 얘기를 본격적으로 해 볼까요?
김동환: 삼성이 뭘 하면은 엄청 물량공세를 해요. 1969년도에 전자산업에 뛰어들었잖아요. 1970년부터 74년 사이에 삼성이 출시한 TV 모델만 무려 48종이에요.
허준: 모델 종류가요?
김동환: TV사업을 시작하자 마자 몇 년 안 되었지요. 1978년도에 TV 총생산량이 그 해에 100만 대를 돌파해요.
이시원: 삼성이 이렇게 TV물량 공세를 할 때 LG는 뭘 했나요?
박태균: LG도 개발했죠. 같이 개발하는 거죠. 당시의 개발이라는 게 R&D 투자해서 개발하는게 아니고요. 크기, 모양 등 단순한 부분들이기 때문에
이시원: 다양성을 넓히는~
박태균: 그 부분에서는 금성도 똑같이 개발을 해 나갔죠.
김동환: 그런데 삼성의 등장이 금성사를 매우 자극한 건 사실이죠. 왜냐면 1970년도에 금성사의 텔레비전 생산량이 5만 대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1978년에 118만대 였어요. 삼성이 10년 만에 100만 대 하니까 이거 선두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118만대를 하거든요. 그래서 1978년도에 전체 매출이 1700억 원, 그 중에서 TV가 차지하는 게 600억 원입니다. LG가 수성을 할려고 노력을 엄청 했는데도 삼성의 물량공세에 안되게 돼요. 1978년도 말에 내수시장에서 삼성이 LG를 제치고 1등을 합니다. 거기다가 1979년도에 삼성전자가 금성을 앞지르기 시작한 게 또 있어요. 뭐냐 수출, 수출시장에서도 삼성이 앞서 나갑니다.
박태균: 이게 사실 배신한 거예요. 겉으로는 그렇게 얘기했다고 그래요. 삼성 쪽에 너희는 내수하지 말고 수출만 해라 그랬대요. 근데 뒤에 가서는 이렇게 되어 버리니까 금성은 뒤통수 맞았지 이럴 수가 있느냐.
최원정: 내수시장이 발전한 건 알겠는데 해외시장을 우리가 후발 주자 중에서도 아주 뒤늦은 업체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수출도 잘 했대요?
박태균: 한국 정부하고 미국 정부하고 경제협상을 했던 자료들 하고 영국하고 협상을 했던 자료들이 남아 있어요. 협상의 주요 사항 중의 하나가 TV 수출 제한이에요. 한국 TV가 덤핑으로 너무 싸게 들어오니까 그 나라에서 생산된 TV들이 팔리지가 않는 거예요. 그게 굉장히 논의가 될 정도로 한국의 수출이 굉장히 늘어났고 80년 8월 초에 칼라 TV가 나오기 시작하잖아요.
최원정: 칼라 TV가 나오면서 양사의 경쟁이 심화된 거죠.
김동환: 지금도 첨단 업종에선 인력 스카우트가 문제가 되고 하잖아요. 반도체 같은 데에서 그 때도 똑 같았던 거예요. TV 산업에 엔지니어들을 두고 스카우트 경쟁이 워낙 심하니까 각사 대표들이 일종의 협약식을 합니다. 취업 후 일년내 스카우트 하는 거 불공정 행위다 (소속회사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퇴직한 자를 1년 이내 다른 전자업체에서 채용할 경우 부당 스카우트로 간주한다). 절대 못 데려간다. 이렇게 어떤 협약을 할 정도로 TV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에 대한 스카우트 경쟁이 엄청 났었죠.
최원정: 이렇게 TV시장에서 격렬하게 붙고 있고 당시도 붙었던 경쟁 삼성과 금성의 대결, 소비자를 사로 잡기 위해서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 집니다.
--------------(스튜디오 무대) 짜잔~, 방송인 황광희 등장,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역사저널 그날에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정말 즐겨보는 프로 거든요. 역사에 대한 관심도 높고 지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근데 오늘 프로그램에 나올 줄은 몰랐어요. 오늘이 그날인 것 같애요. 꿈을 이룰 수 있는 그날,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서 코멘트를 대본대로 할 수 있을지는 걱정이 되긴해요.
최태성: 광희씨 그럼 대본으로 돌아가서
------------황광희/방송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비타민, 해피 바이러스 광희입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 자리에 찾아 왔냐. 여러분 제가 누굽니까 수없이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경쟁업체 라이벌 기업을 이용해 거침없는 협상을 했던 협상왕 광희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아주 역사가 아주 깊은 라이벌 기업 금성과 삼성의 아주 치열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 치졸한 싸움 이야기를, 혹시 허준 님은 라이벌이 누구시죠?
허준: 저는 황광희씨입니다.
황광희: 왜요? 갑자기
허준: e채널에서 요리 프로그램 하셨잖아요. 그게 저한테 먼저 섭외가 들어왔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 광희씨가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내가 언젠가는 너를~
황광희: 제가 사실 출연료를 좀 낮춰서~ 그런 의미에서 제가 협상을 잘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저도 라이벌이 있습니다.
최태성: 누군가요?
황광희: 정말 이 친구가 지긋지긋하게 붙어 다니는데요 연기를 너무 잘 하는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임시완씨입니다. 어디가나 매스미디어가 항상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요.
이시원: 근데 옆 모습이 닮은 것 같애요.
황광희: 약간 옆 모습, 혹시 뒷 모습 아닌가요? 한번 저는 속으로 시완이를 라이벌이라 생각하고 선의의 경쟁자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이완이 에게 미안하지만요.
최태성: 소중한 존재인데요.
황광희: 지금 라이벌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금성과 삼성은 서로 광고에서도 엄청나게 싸웁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한 코너~ 이름하여 금성과 삼성의 광고 전쟁! 1라운드-슬로건 대결입니다. 여러분, 누가 누가 광고를 더 잘 했나 평가하시면서 보시면 더욱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최태성: 저희가 평가하는 거예요?
황광희: 다같이 하는 겁니다.
최원정: 황광희 방송인이 처음 소개할 때 바이러스, 해피 바이러스
황광희: 제가 정말 좋아했는데~ 해피 바이러스, 여려분의 비타민 이 슬로건이 저와 잘 어울리지 않나요? 그래서 제 슬로건 처럼 이미지와 잘 맞고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게 만들어야 하는 게 슬로건이기도 하죠. 금성의 슬로건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영상) 금성 하이테크 TV 광고 (1981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기술의 상징 금성
황광희: 금성의 슬로건 보셨는데 다들 어떠셨는지? 다들 기억 나시나요?
일동: 알다 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최태성: 지금 저 슬로건은 지금도 가전선택을 할 때 저 슬로건이 머리 속에 들어와 있어요. 이거 선택하면 10냔 써야 돼. 이게 있기 때문에 저 슬로건은 최고인 거 같애요.
박태균: 저게 인상적이었던 게 뭐냐면 TV가 안 나오면 때렸어요. 탁~ 탁~ 그러면 나왔어요. 그래서 이게 기술의 상징 10년 이건 상상하지 못하는 얘기였어요. 금성은 1980년부터 모든 광고 앞에 이 슬로건을 넣어서 완전히 히트를 쳤습니다. 그럼 당시 삼성의 슬로건은 뭐 였을까요? 여러분,
최원정: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간다 버금가는 슬로건이 아닐까요?
최태성: 지금 기억 못하는 거예요.
이시원: 아까 10년 간다고 했잖아요. 저희는 20년 갑니다.
황광희: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딱히 기억나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슬로건 대결은 금성의 승리가 되겠습니다 (금성승). 근데요, 방금 본 금성의 슬로건 보셨나요?
최태성: 기술의 상징
황광희: 맞습니다. 기술의 상징 금성이었죠. 금성의 슬로건은 금성사가 흑백 TV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사용하여 온 카피였는데요. 여기에 삼성은 첨단이라는 두 글자를 더해~ 첨단 기술의 상징
허준: 뭐야?! (얼굴을 찡그림)
황광희: 첨단 기술의 상징으로 카피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금성을 자극하게 되는데요.
이시원: 최첨단 기술의 상징 금성 칼라 TV
황광희: 그래서 금성은 첨단 앞에 최 자를 넣어서 최첨단 기술의 상징으로 다시 한번 커피해 업그레이드 시킵니다.
이시원: 그럼 다음 삼성은 또 최최첨단?
황광희: 거기까지는 서로 안해요.
기술의 상징-하이테크-금성사
첨단 기술의 상징-삼성가전용품-三星電子
최첨단 기술의 상징-금성칼라TV-금성사
이번에는 브리핑을 해야 되니까 공부를 했는데 조금 생각보다 대기업이 아이디어를 낸 것 치고는 유치하더라고요 한글자씩만 부쳐서~그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2 라운드를 한 번 해볼텐데요. 2 라운드 대결! 민망하기는 한대 공격적인 광고전쟁 CM송 대결입니다. 짜라 짜라 짜~짜라라~ 일요일은 내가?
허준: 요리사!
황광희: 맞습니다. 이렇듯 강렬하게 기억되는 노래 한 소절 바로 CM송 인데요. 제가 또 가수지 않습니까. 냉정하게 한 번 들어보고 두 회사 중에 어떤 회사가 CM송을 더 잘 만들었는지 한 번 들어 보겠습니다. 금성 황금회로 TV광고 (1977년) 황금회로 텔레비전 아무리 돌려도 선명한 화면 긴 수명의 순금회로 텔레비전// 삼성 이코노 TV광고 (1975년) 이코노~이코노~ 켜면 바로 화면이 나오는 이코노 앞서가는 새기술 삼성 이코노 텔레비전
최원정: 삼성이 압도적인데요. 기억하잖아요. 이코노~이코노~이코노~
이시원: 금성은 멜로디가 기억이 안나요.
황광희: 아까는 가수라고 말씀드렸지만 솔직히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아니에요. 프로필에서도 가수라는 걸 뺐구요. 노래를 잘 못하는 저도 들을 때 각인될 기업의 CM송 이코노~이코노~이코노~2라운드 CM송 삼성승
허준: 광희씨는 CM송 부른적 있어요.
황광희: 숙박업체 광고 찍을 때 한 번 CM송 불러 봤는데 거의 다 기계가 불렀어요. 그 프로가~ 여러분도 이코노가 기억이 나시죠? 그로부터 10년 뒤 3라운드가 시작합니다.
최태성: 지금 1대1 이에요.
황광희: 3 라운드 이번에 기업 이미지 광고 대결입니다. 금성광고 (1987년). 반도체 컴퓨터 이제 금성의 첨단 기술은 생각하는 지능을 갖춘 로버트로 실험하고 있습니다.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인간을 더욱 행복하게 이것이 바로 금성이 펼치는 테크노피아의 세계입니다 금성, 삼성광고 (1986년) 인간을 위한 기술 삼성의 첨단 기술에는 휴머니즘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을 더욱 편리하게 더욱 건강하고 안전하게 인간과 호흡하는 기술 바로 삼성의 휴먼 테크입니다 삼성,
최태성: 비슷한 것 같지 않아요?
최원정: 인간을 이롭게 하는 기술이라고 했잖아요. 테크노피아
이시원: 뭔가 더 친화적이에요. 인간에게는
박태균: 그건 지금 관점에서 그렇고~ 지금은 저희가 알잖아요. 잘못하면 기계의 세상이 되겠구나. 그 당시에는 생각하는 것은 좀 달랐을 수 있을 것 같애요. 뭔가 이게 진짜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돌아가는 그런 세상이 오면 뭔가 다르겠는데 지금과는 조금 감성이 다를 수도 있어요.
최원정: 그럼 교수님은 금성사 광고가 조금 더 와 닿아요?
박태균: 그때 관점에서 보면
최태성: 저는 무승부 느낌이.
황광희: 저도 사실은 무승부로 주고 싶었던 게 정말 이 당시에는 뭔가 미래지향적으로 광고를 멋지게 잘 만들기는 했는데 뭔가 닿는 게 없어요. 사실 광고는 뭔가 남아야 되잖아요. 돈을 들인 만큼 얼마나 그래픽도 나름대로 열심히 썼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삼성 건지~ 금성 건지~
최태성: 차별도 안돼
황광희: 기업 이미지 광고대결은 저도 무승부로 했습니다.
최태성: 1대1 무승부 네
황광희: 왜냐면 저희가 또 1대1 끝내야 되는 게 우리에게 삼성인지 LG인지 어디에서 협찬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일동: 아~ 맞어! 맞어!
황광희: 제작진이 너무 이걸 잘 짜주었어요. 두 기업은 광고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도 톡톡하게 보는데요. 삼성은 IMF 어려웠던 1997년에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가족광고를 내며 4개월 만에 기업이미지 호감도 1위에 등극하게 됩니다.
최원정: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
이시원: 같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이런 느낌이었어요.
황광희: 맞습니다. 그러면서 LG는 누군가 한번쯤 호감을 그려봤던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히트 광고까지 내게 되는 데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LG”
일동: 사랑해요~ LG
김동환: 금성사나 삼성전자 그렇게 광고를 원래 많이 안했다고 그래요. 1978년 말에 역전이 됐잖아요. 이건 진짜 금성사의 입장에서 절체절명인 거에요. 왜냐면 원조인데 역전이 되니까 막대한 광고비를 쏟아 부으면서 다시 1위를 탈환할려고 했는데 삼성이 호락호락 하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삼성에는 계열사 제일기획이라는 광고회사가 있죠. 또 LG쪽에는 계열사 LG 애드 라는 광고회사가 전면전을 한 거예요.
황광희: 서로 그렇게 경쟁을 하다 보니까 우리 소비자들은 알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고 좋아진 것 같애요. 저도 이제 두 회사의 제품을 여러가지로 비교를 해 보았는데
최태성: 뭘 네고 하실 거에요?
황광희: 네고 보다 제가 찍고 싶은 광고 어필을 해볼게요. 역사저널 그날에 삼성과 금성에 대한 얘기를 한다고 하니까 관계자들이 보신다고 하니까
최태성: 임원들이 많이 봐요.
황광희: 제 얼굴 자체도 실리콘 벨리 이기 때문에 이런 데 잘 어울려요. 그래서 삼성과 금성 업계에 계신 분들 지금 많이 신경 써주시고 역사저널 그날도 신경 써주세요. 지금까지 해피 바이러스 여러분의 황광희였습니다.
박태균: 이렇게 과열이 되면 기업에서 제품개발에 투자해야 될 돈을 엉뚱한 데 쓰게 되는 거에요.그건 사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한테 오 거든요. 그러니까 상공부에서 불러가지고 중재도 할려고 그래요. 근데 그 자리에서도 심각하게 싸웠다는 거예요. 사실 80년대 현실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제품들이 아무리 발전해도 해외 제품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었어요. 기술력이나 이런 면에서 굉장히 모자랐는데 이런 경쟁이 어느 정도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그 한계는 명확했죠. 그래서 외제가 1980~90년대 까지도 국내에서 외국제품이 계속 유명했죠.
이시원: 80년대, 90년대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초반까지도 웬지 외국제품이 브랜드 가치가 있고 더 좋은 이미지가 있었어요.
최태성: 특히 일제가 너무 좋았어요. 당시 일제를 쓰면서 어떤 걸 느꼈느냐면 우리나라 제품들은 100년, 1000년이 가도 일본제품을 못 넘을꺼야 라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근데 이게 격세지감이 지금 일본제품을 쳐다도 안 봐요.
이시원: 중동에 오일머니 왕들 보잖아요. 다 한국 가전제품들 쓰고 있어요. 리모콘 TV 딱 켜면 삼성 LG 전 세계 제일 돈 많은 사람이 쓰는 거 우리나라 제품
박태균: 미국의 전자제품 좋은 거 파는 데 가보면 최상위 제품은 다 한국산이에요. 삼성 LG 특히TV 세탁기 이쪽은 한국이 완전 장악하고 있어요.
김동환: 50여 년 동안 우리 산업사회에 두 라이벌 회사는 첨단 전자산업 대표들이죠. 첨단산업에 있어서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치열한 경쟁은 우리의 기술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두 기업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모든 전자산업에 기술이 발전됐고 많은 인재가 배출된 거죠.
박태균: 경쟁해 오는 과정에서 오늘은 기업 입장에서 바라 봤지만 기술을 개발했던 기술자들, 기술자들을 키워냈던 교육자들, 그 공장을 운영할 때 그 시기에 그 많은 여공들이 집을 위해서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일했던 전자단지 계셨던 분들, 이분들의 공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최원정: 한국현대경제의 기업사를 다루면서 우리가 잘 살아보세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는 데 다음 시간에는 포항제철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01회 공영방송 50주년 기획-잘 살아보세 ② 금성 대 삼성, 별들의 전쟁에서 정리)
요약
① 한국이 지난 해 (2022년) 전세계 전자산업 업계에서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생산국으로 조사 됐다. 한국 전자정보통신 산업진흥회는 지난 해 한국의 전자산업 생산액을 1711억 백만 달러로 집계했다.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8%로 중국과 미국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大韓民國 電子産業의 비약적인 성장 그 시작은 금성사가 있었다. 1959년 국내 최초로 라디오 생산을 시작한 금성사는 1962년에 첫 수출에 성공한다. 금성사는 라디오에 이어 국내 최초로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 등을 연이어 개발하고 국내전자산업을 주도하게 된다. 1966년 흑백 TV 개발에도 최초로 성공한다. 1969년 삼성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 공업을 창립하고 여기에 도전장을 냈다. 그 후 금성과 삼성은 50여 년간 치열한 경쟁을 하여왔다. 두 기업은 국내 전자업계에 최고 라이벌이다. 1980년대 럭키 금성이 95년 이후 LG로 바뀌었다. 금성사는 대단한 회사였다. 1966년도에 흑백 TV를 최초로 개발하였는데 19인치 흑백 TV 하나가 당시 소비자 가격으로 6만 8천원 정도 했다. 도시 근로자 한 달 평균 수입이 대체로 1만 1750원 이었다 (여섯 배 정도). TV를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급 자체가 딸렸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신청을 해서 추첨을 통해 TV 공급이 이루어졌다. 그때 TV는 누르면 20초 후에 나왔다. 인내심이 필요했던 시절, 이코노 TV가 처음 나왔을 때 그 20초를 5초로 줄여주었다. 당시 TV는 전자제품이 다 가구였다. 1950~60년대는 금성사가 독보적이었다. 근데 1969년 전자산업이라는 새로운 먹거리에 삼성이 뛰어들어 오자 현직 사람들끼리 멱살잡이 까지 하는 모습도 나왔다,
② 가전은 LG다 라는 얘기를 한다. 삼성은 가전의 비중이 크지 않다. 삼성은 주력산업이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이 있다. 그런데 LG는 최근 들어서 휴대폰 접었다. 반도체 포기했다. 그러니까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게 가전이다. 가전에서 삼성한테 밀린다 LG 전자 입장에서 굉장한 위상의 변화다. 가전은 LG다 라는 건 LG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금성 대 삼성 이 기업의 시작은 어땠을까. 한국전자산업을 이끌었던 삼성의 이병철 그리고 금성의 구인회 회장의 면면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먼저 이병철 회장, 이병철의 호=호암(湖巖),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난 호암(湖巖) 이병철 (李秉喆) 회장, 진주 지수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전학을 가게 된다. 三星의 시작이 언제였냐, 1938년 이병철 회장은 대구에 三星商會 라는 회사를 자본금 그때 돈 3만원 지금으로 따지면 3억원 정도를 들여서 세운다. 三星商會는 당시 대구 인근 지역에서 수확한 청과물이나 건어물을 만주 또 북경지역에 파는 무역업을 주로 했다. 그런데 삼성상회에서 직접 만들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이 있다. 바로 국수였다. 그 이름하여 별표국수다. 너무 인기가 있어 가지고 국수공장이 매일 매일 돌리고 전통적인 방식의 국수는 칼로 잘라먹는 데 이 국수는 삼기만 하면 끝이니 편리해진 거다. 그러면서 삼성상회가 크기 시작하였다. 동그란 종이에 말려있는 국수다.
③ 이병철 회장 성격은 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확실하게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경영철학은 事業報國, 人才第一, 合理經營으로 대표되는 가지고 있었다. 이병철의 별명은 돈병철로 우리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았다. 당시 이병철씨는 부자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성품이 워낙 치밀하고 사업을 전개하는 것도 완벽한 상태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그래서 1939년 별표국수가 완전 대박을 내니까 확장해도 되겠다. 그 이듬 해에 양조사업에 진출한다. 1953년에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설립한다. 1954년도에 제일모직을 만든다. 1950년대 미국 등의 원조자금 및 물자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분, 제당, 면방직 산업을 키울 때 였다. 세 가지의 하얀 게 들어오는 데 삼백(三白)=세 가지 흰색 생산품, 그게 설탕, 면화, 밀가루가 들어오는 때니까 요게 제당하고 모직을 만들기에 가장 좋다. 정부에서 원조물자를 불하를 받아 가지고 만드니까 사실 재료 값이 거의 안 든다. LG(옛날 금성)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어떨까. 같은 진주 지수공립보통학교 다녔다. 이병철 회장이 중간에 전학을 갔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이병철과 구인회, 나이는 세 살 차이다. 두 사람은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지수초등학교는 2009년 송정초등학교와 통폐합 후 이전 옛 건물은 기업가 정신교육센터로 활용 중이다, 지세를 보는 분들이 左靑龍 右白虎 금계포란형, 風水地理에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세, 富와 名譽를 두루 갖춘 明堂으로 통함, 한국 기업가의 산실이다, 기념관도 있단다.
④ 금성 회사를 창업했던 구인회 회장은 전자산업이 처음이 아니다. 럭키화학 공업사를 1947년에 창업한다. 이게 치약, 비누, 샴푸 등의 생필품을 만들던 회사다. 무엇보다 최초로 여성용 크림인 럭키 크림(Lucky Cream) 을 만들어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럭키는 약간 독점성이 있었다. 해외에서 생필품들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치약이 다 럭키 치약이었다. 럭키 크림도 여성들 한테 완전 독점이었다. 두산의 박가분은 1916년 국내 최초 화장품이다. 두산 창업주 박승직, 박씨 가문이 만든 분=박가분(朴家粉), 럭키 크림, 생필품으로 큰 재미를 봤던 구인회 회장, 1958년에 전자쪽에 눈을 돌린다. 부하 직원의 카이파이 전축 소리에 매료된 구인회 회장이 라디오를 생산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금성사를 창업한 지 1년만에 국산 제1호 라디오를 개발한다. 경영철학은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부터 착수하라. 라디오를 시작으로 전자도 그렇다고 생각을 했다. 1960년대 정부 정책하고도 잘 맞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부 라디오 보급 운동 정책과 일치하였다. 그 당시 금성은 라디오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금성은 수출을 하게 되었다.
⑤ 삼성은 왜 갑자기 전자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나. 이병철 회장의 삼성은 몇 차례 고비가 있었다. 1960. 4.19 혁명 직후에 대표적인 부정부패 기업으로 조사받고 풀려난다. 그때도 정부에서 정부정책에 맞는 분야에 투자를 해라. 이게 하나 있었고 1965~66년에 아주 중요한 사카린 밀수사건이 있었다. 당시 비료산업은 블루 오션이다. 아직은 농업이 중심이기 때문에 삼성이 한국 비료를 가지고 있었다. 수입하는 데 사카린을 넣어서 밀수하다가 걸린 거다. 1966년 삼성그룹 계열사 한국 비료공업이 사카린을 대량 밀수입한 사건, 이것 때문에 한국비료를 그냥 정부에 헌납해 버렸다. 1972년 8.3 사채동결조치 기업들에 대한 모든 사채를 동결해 일정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 명령, 정부에서 재벌 기업들 불러서 자동차, 조선, 전자 선택하라. 70년대 우리 중화학 공업 간다. 삼성은 전자로 가야 된다. 이병철과 구인회 두 사람의 관계는 끈끈해 진다. 1957년에 이병철 회장의 차녀와 구인회 회장의 3남이 결혼을 했다. 친구인데 사돈 관계, 얼마나 끈끈 했겠나.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고 만다. 돈이다, 구인회 회장이 꽉 잡고 있던 전자산업에 1969년 이병철 회장이 나도 하겠다. 두 사람의 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사위가 구자학 회장인데 사실 구자학 회장이 장인인 이병철 회장의 신임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제일 제당 이사에다 호텔 신라 초대 사장까지 시키고 했는데 삼성이 전자를 하니까 태도가 바뀐거다. 구자학 사위가 경영 일선에서 후퇴, 그리고 더 심한 건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시면서 자제분들한테 다 유산을 주었다. 그런데 차녀 이숙희 여사에겐 유산을 안 주었다고. 하지만 구인회 회장의 금성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던 1969년 금성은 상징적인 제품을 최초로 만들어 내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⑥ 이제 한국은 경제발전 과정을 거쳐 최빈국에서 10대 강국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일 밖에 모르시면서 눈부신 발전을 일궈오셨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였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나라의 운명, 이런 것들이 우리 가슴을 자꾸 울렁거리게 한다, 부디 이제는 후세들만 믿는다. 1959년 당시 금성사는 총자본금이 1천만원에다 직원수가 313명 매출도 5천만원 정도였는데 10년 뒤에 1969년에 금성사의 위상이 직원수 6천 명, 59년에서 69년 사이에 자동 세탁기를 개발하면서 위상을 훨씬 더 강화시킨 상태인데 1969년 삼성이 도전자로 나섰다. 금성 입장에서 1위를 어떻게 지키지 고민이 시작됐다. 금성만 그런게 아니고 그때부터 유명한 전자 산업체가 또 하나 있었다. 아남산업이라고 1970년대 반도체를 처음 시작한 기업이다. 근데 그 당시에 전자공업 협동조합에 59개 회원사가 있었는데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에 항의를 하였다. 우리 시장이 얼마 안 되는데 삼성까지 들어오면 큰 일 난다. 이게 신문에 보도되고 삼성이 그걸 반박하고 너무나 반발을 하니까 이병철 회장이 부득이 대통령에게 직접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설명하며 이것은 국가적 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시 전자산업 전반에 관한 개방지시가 내려 삼성전자 설립을 보게 되었다. 전자산업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경쟁에 불이 붙게 된 풍경이 바로 TV였다. 삼성은 1969년도에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다. 1970년부터 74년 사이에 삼성이 출시한 TV 모델만 무려 48종이다. TV사업을 시작하자 마자 몇 년 안 되었다. 1978년도에 TV 총생산량이 그 해에 100만 대를 돌파한다. 삼성이TV물량 공세를 할 때 LG도 개발했다. 같이 개발하였다.
⑦ 삼성의 등장이 금성사를 매우 자극하였다. 1970년도 금성사의 텔레비전 생산량이 5만 대 수준, 그런데 1978년에 118만대 였다. 삼성이 10년 만에 100만 대 하니까 선두에서 118만대를 한다. 금성사 1978년도 전체 매출 1700억 원, 그 중에서 TV가 600억 원차지다. LG가 수성을 할려고 노력을 엄청 했는데도 삼성의 물량공세에 안되었다. 1978년도 말에 내수시장에서 삼성이 LG를 제치고 1등을 한다. 거기다가 1979년도에 삼성전자가 수출에서 금성을 앞지르기 시작한다. 사실 삼성은 수출만 하겠다고 했는데 내수까지 하였다. 배신이다. 금성은 뒤통수를 맞았다. 금성이나 삼성이나 후발 주자 업체들인데 수출도 잘 했다. 한국 정부하고 미국 정부하고 경제협상을 했던 자료들 하고 영국하고 협상을 했던 자료들이 남아 있다고. 협상의 주요 사항 중의 하나가 TV 수출 제한이다. 한국 TV가 덤핑으로 너무 싸게 들어오니까 그 나라에서 생산된 TV들이 팔리지가 않는다. 굉장히 논의가 될 정도로 한국의 수출이 굉장히 늘어났고 80년 8월 초에 칼라 TV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칼라 TV가 나오면서 양사의 경쟁이 심화된다. 지금도 첨단 업종에선 인력 스카우트가 문제가 되고 한다. 반도체 같은 데에서 그 때도 똑 같았다. TV 산업에 엔지니어들을 두고 스카우트 경쟁이 워낙 심하니까 각사 대표들이 일종의 협약식을 한다. 취업 후 일년내 스카우트는 불공정 행위다. 소속회사의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퇴직한 자를 1년 이내 다른 전자업체에서 채용할 경우 부당 스카우트로 간주한다. 절대 못 데려간다. 이렇게 협약을 할 정도로 TV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에 대한 스카우트 경쟁이 엄청 났었다.
⑧ 이렇게 TV시장에서 삼성과 금성의 경쟁 대결, 소비자를 사로 잡기 위해서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금성과 삼성은 광고에서도 엄청나게 싸웠다. 광고 전쟁! 1라운드-슬로건 대결이다. 금성 하이테크 TV 광고 (1981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기술의 상징 금성 인상적이었던 건 TV가 안 나오면 때렸다. 탁~ 탁~ 그러면 나왔다. 그래서 이게 기술의 상징 10년, 이건 상상하지 못하는 얘기였다. 금성은 1980년부터 모든 광고 앞에 이 슬로건을 넣어서 완전히 히트를 쳤다. 당시 삼성의 슬로건은 뭐 였을까,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딱히 기억나는 게 없다. 그래서 슬로건 대결은 금성의 승리가 되겠다 (금성승). 기술의 상징 금성. 금성의 슬로건은 금성사가 흑백 TV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사용하여 온 카피였다. 여기에 삼성은 첨단이라는 두 글자를 더해~ 첨단 기술의 상징으로 카피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금성을 자극하게 되었다. 금성은 첨단 앞에 최 자를 넣어서 최첨단 기술의 상징으로 다시 한번 커피해 업그레이드 시킨다. 기술의 상징-하이테크-금성사 첨단 기술의 상징-삼성가전용품-三星電子 최첨단 기술의 상징-금성칼라TV-금성사
⑨ 2 라운드 대결! 광고전쟁 CM송 대결이다. 짜라 짜라 짜~짜라라~ 일요일은 내가? 요리사! 이렇듯 강렬하게 기억되는 노래 한 소절 바로 CM송 두 회사 중에 어떤 회사가 CM송을 더 잘 만들었는지 들어 보겠다. 금성 황금회로 TV광고 (1977년) 황금회로 텔레비전 아무리 돌려도 선명한 화면 긴 수명의 순금회로 텔레비전// 삼성 이코노 TV광고 (1975년) 이코노~이코노~ 켜면 바로 화면이 나오는 이코노 앞서가는 새기술 삼성 이코노 텔레비전 삼성이 압도적인 기억이다. 이코노~이코노~이코노~ 금성은 멜로디가 기억이 안난다. 들을 때 각인될 기업의 CM송은 이코노~이코노~이코노~2라운드 CM송 삼성승 그로부터 10년 뒤 3라운드가 시작이다. 3 라운드 이번에 기업 이미지 광고 대결이다. 금성광고 (1987년). 반도체 컴퓨터 이제 금성의 첨단 기술은 생각하는 지능을 갖춘 로버트로 실험하고 있다.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인간을 더욱 행복하게 이것이 바로 금성이 펼치는 테크노피아의 세계다 금성, 삼성광고 (1986년) 인간을 위한 기술 삼성의 첨단 기술에는 휴머니즘이 담겨있다. 인간을 더욱 편리하게 더욱 건강하고 안전하게 인간과 호흡하는 기술 바로 삼성의 휴먼 테크입니다 삼성, 이 당시에는 미래지향적으로 광고를 멋지게 잘 만들기는 했는데 뭔가 가슴에 닿는 게 없다. 사실 광고는 뭔가 남아야 된다. 돈을 들인 만큼 얼마나 그래픽도 나름대로 열심히 썼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삼성 건지~ 금성 건지~ 차별도 안된다. 기업 이미지 광고대결은 무승부다. 결과는 1대1에 무승부다. 삼성은 IMF 어려웠던 1997년에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가족광고를 내며 4개월 만에 기업이미지 호감도 1위에 등극한다. 같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LG는 누군가 한번쯤 호감을 그려봤던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히트 광고까지 낸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LG” 금성사나 삼성전자 그렇게 광고를 원래 많이 안했다.
⑩ 1978년 말에 역전이 됐다. 금성사의 입장에서 절체절명이다. 왜냐면 원조인데 역전이 되니까 막대한 광고비를 쏟아 부으면서 다시 1위를 탈환할려고 했는데 삼성이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삼성에는 계열사 제일기획 광고회사가 있다. LG에는 계열사 LG 애드 라는 광고회사가 있다. 서로 그렇게 경쟁을 하다 보니까 소비자들은 알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고 제품은 좋아졌다. 이렇게 과열이 되면 기업에서 제품개발에 투자해야 될 돈을 엉뚱한 데 쓰게 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한테 돌아간다. 상공부에서 양사를 불러가지고 중재도 하였다. 그 자리에서도 심각하게 싸웠다는 거다. 80년대 현실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제품들이 아무리 발전해도 해외 제품들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기술면에서 굉장히 모자랐는데 이런 경쟁이 어느 정도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그 한계는 명확했다. 외제가 1980~90년대 까지도 국내에서 계속 유명했다. 80년대, 90년대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초반까지도 외국제품의 브랜드 가치가 더 좋았다. 특히 일제가 너무 좋았다. 당시 일제를 쓰면서 우리나라 제품들은 100년, 1000년이 가도 일본제품을 못 넘을꺼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근데 이제 隔世之感이다. 지금 우리는 일본제품을 쳐다도 안 본다. 중동에 왕들이 다 한국 가전제품들 쓰고 있다. 리모콘 TV 켜면 우리나라 삼성 LG 전 세계 제일 돈 많은 사람이 쓰는 제품들이다. 미국에 가보면 최상위 가전제품은 다 한국산이다. 삼성 LG 특히 TV 세탁기 냉장고는 한국산이 완전 장악하고 있다.
⑪ 두 라이벌 회사는 50여 년 동안 우리 산업사회에 첨단 전자산업 대표들이다.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치열한 경쟁은 우리의 기술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두 기업에서 전자산업에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오늘은 기업 입장에서 바라 봤지만 기술을 개발했던 기술자들, 기술자들을 키워냈던 교육자들, 그 공장을 운영할 때 그 시기에 그 많은 여공들이 집을 위해서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일했던 전자단지에 계셨던 분들, 이분들의 공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