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를 5월의 식탁으로 / 한정숙
뿌리로 엄동을 견디고 씨앗 속에서 기도로 날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 그들이 만드는 5월은 정말 아름답다 생각하며 동네 공원길을 가로지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존재와 향기로 친구가 되었던 단풍나무와 동백꽃에겐 인사를 건네고 이름을 몰랐던 사랑스러운 작은 꽃에게는 휴대폰을 디밀어 이름을 익힌다. 동네를 벗어나자 마주치는 자동차 소리도 기분 좋고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다정해 보인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 여력이 없으면 차라도 한 잔 함께 하시자는 연락이 여러 차례 왔으나 나대로 생각이 있어 이참 저 참 기회를 보다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만났으니 5월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스승의 날을 앞에 두고 오늘 서로 시간을 맞췄다.
당초엔 풍광도 있고 맛 좋기로 이름난 곳에서 풍성하게 차린 음식을 옆에 두고 그간의 이야기를 맘껏 풀기로 하였으나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생각을 바꿨다. 내 사는 곳과 그녀의 직장이 멀지 않고 동네에도 맛집이 있으니 서로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문득 지나오면서 얼굴을 튼 화단 바닥에 눈꽃처럼 피었던 안개꽃과 서로 닮았구나 생각하니 온 몸에 웃음이 퍼진다.
대형 마트 앞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나를 기다리는 모습이 강아지처럼 귀엽기도 하다.
함께 지내던 동료들이 그녀를 들먹일 땐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천사’라고 했다. 그를 부르는 말에서 짐작이 되겠지만 일단 성품이 온화하고 얘기할 때 경상도 억양까지도 사분사분하여 달콤하게 들렸다. 40 킬로그램이 될까 말까 한 작은 체구에 옷차림은 유난하지 않았으며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 눈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와 만나 빛이 되어 쨍그랑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한 철저한 교육활동과 포기하지 않는 학생 사랑은 다른 이들의 본보기였다.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달려와 안긴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부터 안부를 묻더니 어느 식당으로 갈 건지, 이번에는 정말로 자기가 크게 대접하고 싶다니 하며 쏟아내는 모습이 참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한다. 학생들 공부거리로 꽉 찼을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괜찮다면서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이 동네에 가정식 백반을 잘하는 집이 있다며 동네 길로 들어섰다. 자꾸 ‘선생님’을 부르며 궁금해한다. 나도 식당 걱정은 말라며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여긴 선생님이 사시는 아파트가 아닌가요?” 하며 걱정스러워한다. “혹시?”하는 눈빛이다. 아파트를 지나면 식당이 나온다고 하고선 요즘엔 아파트 안에서 가정식 백반 하는 집이 있다며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빈손으로 왔다며 당황하는 그녀에게 초대하지 않았는데 선물이 가당키나 하겠냐며 준비해 둔 저녁상을 차렸다.
찬이라야 반찬가게 하시는 형님이 주신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배추김치와 열무김치, 친구가 준 멸치조림, 묵은 김치를 송송 썰어 밀가루와 달걀에 부친 전이다. 우리 밀가루와 들기름을 썼으니 그래도 당당했다. 양념장은 양조간장에 파를 잘게 썰고 고춧가루를 살짝 뿌린 후 참기름과 참깨를 섞었다. 고소한 냄새가 좋았다.
비장의 무기는 우리 가족의 애정 생선 ‘도미구이’였다. 제법 크기가 있는 것으로 성의껏 구웠지만 시간이 지나 전자레인지에 데워 냈다. 소고기를 구워 줄까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생선을 먹을 기회가 적겠다 싶어 내 맘대로 식단을 꾸린 것이다. 낚시 경력이 오랜 남편은 횟집의 생선은 나 몰라라 한다. 본인이 직접 잡거나 고향 가는 길에 열리는 오일장에서 그물로 잡은 ‘돔’ 만 생선으로 친다. 그나마 텃밭과 야생화에 마음을 두면서는 바다에 가는 횟수가 확 줄어 오늘 상에 오른 생선은 우수영 장에서 사서 당신이 손질하여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밥은 현미와 귀리, 검정 쌀과 보리에 검정콩과 병아리 콩을 섞어지었고, 미역귀가 달린 자연산 미역에 고기 대신 단백질 보충용으로 손 두부를 넣어 국을 끓였다. 너무나 조촐한 상이 부끄러워 큰소리로 “오늘 식단의 주제는 채식이야.” 하며 특식인 양 너스레를 떨었다.
거실을 서성이며 미안해하는 그이에게 친인척을 빼고는 유일하게 식사 대접을 하는 외부 손님이라며 볼품없는 식단을 덮으려 안간힘을 썼다.
자리에 앉으며 너무나 영광이라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꼭 한 번 밥을 해주고 싶었다고 다독였다. 자신 있는 돔 구이는 찬사를 많이 받았는데 잘 구워서라기보다는 살이 오른 생선 자체의 맛이 좋았다. 사실 우리 집에선 돔 이외의 생선은 별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건 단연코 남편의 돔 사랑 때문이며 전자우편 신분 확인용 이름에까지 애정을 과시한다.
식사 시간 내내 달라져가는 학생들 이야기며 동료 선생님 자랑을 늘어 놓더니 마음속에 켜켜이 담아 둔 이야기도 담담하게 내놓는다. “선생님, 결혼했어요?” 하는 질문을 자주 받지만 그녀는 40대 후반이다. 결혼한 지 제법 되었으나 자녀가 없어 서늘한 아픔이 있다. 휴직을 하며 노력도 했으나 지금은 마음을 내렸다고 한다. 함께 근무할 때는 아직도 희망을 갖고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부처님오신 날을 기다려 연등에 그녀의 바람을 대신 전하기도 했다.
지금은 성장하는 조카를 응원하고 날마다 함께 생활하는 학생들을 사랑하며 기쁘게 산단다.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부족한 만큼 채워지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남편과의 돈독한 애정도 행복한 생활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고 수줍게 자랑한다.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사이 두어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을 대신해 미리 준비해 둔 두유를 한 병 선물했다. 친구가 일반 콩보다 맛있다며 준 겉은 까맣고 속은 초록색인 콩을 갈아 만들었다. 그이가 미리 맛보며 좋아한다. 다행스럽고 뿌듯했다.
다시 손잡고 우리가 만났던 곳까지 바래다주며 어떤 꽃보다 좋은 인연을 만들어준 사람 꽃이 제일이려니 생각하니 그녀가 더 귀하고 사랑스러웠다. 초록 향기와 온갖 예쁜 꽃이 마음까지 물들이는 축복받은 계절, 나는 천사를 5월의 식탁으로 모셨다.
첫댓글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 밤을 통째로 새지 않고 매우 이른 새벽에 탈고 하리라 했는데 도리어 지각에 지각을 더했습니다. 그래도 아뭏든
장렬하게 제출합니다. 호호
선생님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천사를 초대하셨네요. 이쁜 선생님을 만나서 식사 자리로 초대하는 과정, 대접하는 음식을 설명하는 이 모든 것이 참 아름답네요. 상을 차리는 것이 손이 많이 가는 것인데, 준비하는 과정을 보니 선생님의 성품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두 분의 인연이 쭉 이어지길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