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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1500년 전 백제 청동사리합, 아들 잃은 위덕왕 슬픔 고스란히
1일 충남 부여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이규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과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왼쪽부터)가 왕흥사 목탑 터에서 발굴된 돌 뚜껑과 금, 은 사리병(복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아래는 왕흥사 터를 공중에서 찍은 사진. 하단의 길쭉한 석축은 왕이 행차하던 어도로 추정된다. 부여=박영철 기자
1일 충남 부여군 왕흥사 터. 백마강 너머로 백제 멸망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낙화암이 멀리 보였다. 백제 위덕왕은 자신이 지은 화려한 왕실 사찰을 드나들며 보았을 낙화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나 했을까. 도도히 흐르는 저 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의 흥망성쇠가 오롯이 펼쳐진 셈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는 기구)가 이곳에서 출토된 지 10주년을 맞는 해다. 당시 왕흥사 목탑 터에서 사리기를 건져 올린 김용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과 이규훈 문화재청 학예연구관,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를 현장에서 만났다.
○ 우리나라 最古 사리장엄구, 모습을 드러내다
“뭔가 대칼(대나무 칼) 끝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 목탑 터 발굴 현장. 장마가 끝나고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 귀퉁이를 조사하던 강환구 연구원이 이규훈을 다급하게 불렀다. 조심스레 개흙을 제거하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탑에 사리기를 종종 묻어놓지만 심초석에 구멍을 내고 뚜껑돌을 놓은 건 처음이었다. 장기간 작업으로 지쳐 있던 발굴팀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간이 좁아 손끝이 야무진 허진아 연구원이 들어가 서서히 돌을 들어올렸다. 모두 숨죽인 가운데 뚜껑돌을 올리자마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대와 달리 내부는 진흙과 물만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흙탕물 속을 대칼로 찔러 보니 걸리는 게 다시 느껴졌다. 30분간 물을 빼내고 진흙을 제거하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원통형 그릇이 나왔다. 150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백제시대 청동 사리합이었다.
사리합 표면을 닦아내자 ‘정유(丁酉)년’으로 시작되는 한자 명문이 드러났다. 발굴팀의 심장은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1차 사료가 없는 삼국시대의 명문은 역사 해석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보존과학실 직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명문 해석에 돌입했다. 이때 안보연은 촬영한 명문 이미지를 바탕으로 글씨를 컴퓨터그래픽(CG)으로 복원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먼저 이 명문을 보는 호사를 누려 행복했다”고 말했다.
왕흥사 목탑 터에서 출토된 청동사리합과 은, 금 사리병(왼쪽부터). 청동사리합 내부에서 금 사리병이 들어 있는 은 사리병이 발견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 아버지와 아들 모두 잃은 왕의 슬픔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사리 두 개를 묻었는데 신묘한 조화로 세 개가 되었다.’
청동사리합 명문은 지금껏 알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우선 왕흥사 창건 연대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법왕 2년)보다 23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적힌 연대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용민은 “고고학자로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횡재를 누린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명문이 얘기하는 왕흥사의 조성 경위도 흥미롭다. 위덕왕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을 여읜 인물이다. 부친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한때 승려로 출가하려고 했던 그가 이젠 아들마저 잃은 것이다.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사찰을 세운 아버지의 슬픔이 사리기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백제왕의 가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확인됐다.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좌태자 이외에 위덕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왕자가 별도로 존재했음이 사리기를 통해 증명됐다.
○ 홈쇼핑 만능렌치의 비밀
청동사리합을 발견한 것 못지않게 이를 여는 것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보내 사리합 뚜껑을 열려고 1주일 동안 씨름했지만 청동 녹이 달라붙어 번번이 실패했다. 발굴팀은 내부를 찍은 X레이 사진만 언론에 공개하려 했지만,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열어볼 것을 지시했다.
발굴단원들이 골머리를 앓던 상황이었는데 답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홈쇼핑 광고를 본 전산 담당 직원이 이른바 ‘만능렌치’로 열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 철물점에서 구입한 7000원짜리 렌치로 아무 흠 없이 사리합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청동사리합 안에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조그마한 금 사리병이 들어있는 은 사리병이 나왔다. 금 사리병 내부는 명문에 적힌 사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물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발굴팀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분 분석을 했지만 순수한 물로 조사됐다. 이규훈은 “사리공으로 물이 샜다면 청동사리합이나 은 사리병에도 물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사리기에 적힌 신묘함이 여기서도 드러났다”고 말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27. 경주 사천왕사터 발굴 -조각 한쪽 한쪽 맞추자… ‘신라의 미켈란젤로’ 걸작이 생생
20일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최장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윤형원 국립부여박물관장, 윤근일 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왼쪽부터)이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을 배경으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경주=김상운 기자
경주 낭산(狼山)은 예부터 신들이 노닌다는 신유림(神遊林)이 있던 상서로운 곳이다. 20일 문무왕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을 거쳐 선덕왕릉에 다다르자, 낭산 아래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숲길을 10분쯤 내려갔을까. 철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폐사지 한 곳이 보였다. 통일신라시대 으뜸가는 호국사찰이던 사천왕사(四天王寺) 터다.
2006∼2012년 7년에 걸쳐 발굴이 이뤄진 사천왕사에는 금당과 목탑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주춧돌과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당간지주(幢竿支柱)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이곳에서 동아시아 최강국 당나라와의 전쟁을 목전에 둔 문무왕이 온 백성의 염원을 담아 부처의 도움을 갈구했다.
○ 신라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걸작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녹유신장벽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갑옷을 입고 칼을 쥔 채 악귀를 엉덩이로 깔고 앉은 신장의 위세가 당당하다. 커다란 코에 부리부리한 눈은 언뜻 봐도 위협적이다. 얼굴만 봐도 악귀들이 감히 불법(佛法)을 넘보지 못할 것 같다.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벽塼·녹색 유약을 칠한 신장 조각 벽돌)은 승려 양지가 남긴 수작으로 손꼽힌다. 영묘사 장육삼존상과 천왕상을 제작하기도 한 양지는 ‘신라의 미켈란젤로’로 통한다. 녹유신장벽전은 조각가 이름과 제작 시기(679년)가 모두 확인되는 신라 불교조각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009년 5월 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 특별전에서 공개한 녹유신장벽전 복원품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된 벽전 조각과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조각이 90여 년 만에 결합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일대 사건이었다.
이는 2006년부터 발굴을 맡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윤근일 당시 소장(70·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과 윤형원 학예연구실장(51·현 국립부여박물관장), 최장미 학예연구사(38·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차순철 전문위원(49·현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단장)의 노력 덕에 가능했다.
○ 목탑 ‘면석 장식’ 역할 밝혀져
목탑 기단부 상상 복원도. 면석으로 쓰인 녹유신장벽전이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당초(唐草·덩굴) 무늬가 살짝 보인다!”
2006년 10월 12일 사천왕사 서쪽 목탑 터 발굴 현장. 계단 돌이 쓰러져 생긴 틈 사이로 차순철이 조각상을 발견했다. 목탑의 기단 면석을 장식한 당초 무늬 벽전과 녹유신장벽전 조각이었다. 파괴된 계단 돌이 벽전 쪽으로 쓰러진 건 발굴팀엔 행운이었다.
흙더미 속에서 계단돌이 감싸준 덕에 녹유신장벽전이 토압에 휩쓸리지 않고 제 위치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에서 유구 조성 당시 유물의 본래 위치를 파악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유물의 성격을 규정짓는 핵심 단서가 될 수 있어서다.
한 발굴조사원이 목탑터에서 녹유신장벽전을 노출시키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천왕사 발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굴 전 녹유신장벽전은 탑 안에 봉안돼 있었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06년 발굴에서 목탑 기단의 계단 옆에 녹유신장벽전이 서 있던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이것은 탑 면석(面石)이었음이 밝혀지게 됐다. 조사 결과 목탑 기단부 네 면에 걸쳐 24개의 신장벽전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 신장상…사천왕 vs 팔부중 논쟁
경주 낭산과 사천왕사지 발굴현장 전경.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녹유신장벽전에 조각된 험상궂은 신장들의 정체는 뭘까. 사실 이 부분은 고고미술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다. 학계 일각에서는 사천왕사의 명칭과 관련지어 신장상은 사천왕(四天王·수미산 중턱 사왕천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을 묘사한 걸로 봤다.
그러나 ‘사천왕사 탑 밑에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팔부중(八部衆·육욕천 등에 머물며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으로 보는 주장도 제기됐다.
사천왕사지 가람배치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와 관련해 2008년 7월 3일 사천왕사 동쪽 목탑 터 발굴 성과가 주목된다. 이곳 기단부 계단 옆으로 세 종류의 녹유신장벽전이 나란히 발견됐기 때문이다.
서쪽 목탑에서 나온 녹유신장벽전도 이 세 가지(A, B, C) 유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의 출토 위치도 조성 당시 그대로여서 신장벽전의 배치 순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 목탑 기단은 ‘A-B-C-계단-A-B-C’ 순으로 구성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녹유신장벽전 3개가 한 세트임을 감안할 때 신장상의 정체는 사천왕이나 팔부중이 아닌 제3의 존재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불교조각 연구자인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탑의 가장 아래인 기단에는 신격(神格)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신왕상(神王像)이 조각됐을 걸로 본다”며 “그보다 위인 사천왕상은 목탑 안에 봉안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28.공주 수촌리 고분 발굴 - 금빛 봉황이 날아오를 듯… 현존 最古 백제 금동관의 자태
수촌리 4호 석실분 출토 금동관으로 높이는 19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하는 한 마리 ‘금빛 봉황’을 보았다. 6일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본 수촌리 고분 출토 금동관은 신라 금관과 또 다른 아취를 담고 있었다.
온몸에 달개를 매단 세 줄기 입식(立飾)은 정면에서 보면 꼿꼿이 세운 봉황 머리와 양옆으로 활짝 편 날개를 연상시켰다. 나뭇가지를 닮은 신라 금관의 입식과 확연히 다른 형태다. 특히 머리에 닿는 관테까지 날렵하게 이어진 곡선은 우아함을 더한다. 수촌리 고분에서 함께 나온 금동신발과 금귀고리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삼국시대 장신구 연구 권위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수촌리 금귀고리는 현미경으로 200배를 확대해 봐도 만듦새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며 “백제 왕실에 소속된 최고 장인의 솜씨”라고 말했다.
그러나 4∼5세기 한성백제시대 수촌리는 백제 영토였지만 중앙과 멀리 떨어진 지방이었다. 이 1급 유물들이 왜 한성이 아닌 이곳에 묻혀 있을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2003∼2013년 수촌리를 발굴한 이훈 당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단장(55·현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현장을 찾았다.
○ 묘제(墓制) 세 번이나 바뀐 사연
충남 공주시 수촌리 야트막한 구릉에 오르자 정상에 봉분 6기가 원형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래로도 고분 10여 기가 늘어서 있는데 절벽 끄트머리에 제단(祭壇)을 이루는 돌무더기가 깔려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중 나란히 조성된 무덤 세 쌍은 부부 관계임이 확인됐다.
수촌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중국 동진에서 만들어진 흑유닭모양항아리. 당시로선 최고급품에 속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훈은 “수촌리 지배집단이 백제 중앙과 교류하면서 돌무덤을 들여온 것”이라며 “최고 수준의 금동관, 금동신발, 중국 자기들이 부장된 걸 보면 이들이 백제 왕실과 돈독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백제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배경일 수도 있다.
학계는 4∼5세기 백제 왕실이 지방 유력자들을 통해 간접지배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에게 금동관 등을 사여한 걸로 보고 있다.
이훈 공주대 공주학연구원 연구위원이 6일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수촌리 고분 금동관을 살펴보고 있다. 뒤쪽 금동관이 이 연구위원이 4호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앞쪽은 원형을 복원한 복제품이다. 공주=원대연 기자
○ 1600년간 제자리 지킨 목관 꺾쇠·관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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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촌리 1호분 토광묘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높이는 약 18.7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2003년 11월 3일 발굴팀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백제 금동관을 발견했다. 지금껏 발견된 백제 금동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덧널무덤인 1호분 내부를 十자형으로 팠는데 바닥에서 금동관과 환두대도가 함께 나왔다.
이훈은 직접 만든 대나무칼로 푸르스름한 청동녹이 낀 금동관을 조금씩 땅 위에 노출시켰다.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자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도움을 요청했다. 바깥 공기에 취약한 청동유물 특성상 보존과학 전문가들이 흙과 함께 통째로 수습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길이 35cm의 재갈.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말을 탈 때 쓰는 등자로 길이 25.0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쇠창으로 길이는 29.2cm.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유물도 화려했지만 사실 학문적으로 더 중요했던 건 조성 당시 위치를 간직한 목관 꺾쇠와 관못이었다. 발굴팀은 3열에 걸쳐 목관을 두른 총 90여 개의 꺾쇠를 지표 20cm 아래서 찾아냈다. 통상 오랜 세월이 흘러 목관이 썩으면 물이 흘러들어가 꺾쇠나 관못의 위치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1호분은 물 대신 모래흙이 목관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부속품이 고정될 수 있었다. 덕분에 발굴팀은 백제 지방 지배층이 사용한 목관의 형태와 크기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 내세에도 다시 만나리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첫번째 사진), 금동관(두번쨰 사진)과 대롱옥. 부부가 묻힌 4호분과 5호분에 각각 부장된 대롱옥을 맞춰보니 아귀가 딱 맞았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야, 이게 정말로 딱 붙습니다!”
2004년 7월 발굴팀에서 사진을 담당한 이형주 연구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갑자기 외쳤다. 수촌리 고분 출토 유물들을 늘어놓고 촬영하던 이형주가 4호분과 5호분에서 각각 나온 대롱옥(관옥) 2점을 우연히 맞춰봤는데 거짓말처럼 아귀가 맞았다.
원래 하나였던 대롱옥을 두 개로 부러뜨린 뒤 남편과 아내 무덤에 각각 부장한 것이었다. 생전에 금실 좋던 부부가 내세에 가서도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쪼갠 게 아닐까.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떠올리는 역사의 내러티브는 때론 소설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29. 동삼동 패총의 재발견- 하인수 부산근대역사관장
- ‘반구대 암각화’ 미스터리 푼 열쇠, 5천년 전 토기에 새겨져 있었다
동삼동 패총 토기조각(첫번째 사진)과 반구대 암각화(두번째 사진)에 새겨진 사슴 그림. 사다리꼴모양의 몸통과 선으로 간략히 묘사된 뿔, 얼굴, 다리 등이 서로 유사하다. 반구대 암각화를 신석기인이 처음 그렸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하인수 관장 제공
《 한적한 어항(漁港), 배를 수리하는 어부들이 보인다. 8000여 년 전에도 고래와 물고기, 조개를 잡아 올린 어부들이 여기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데자뷔인가. 27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조개무지) 유적에서니 코앞에 너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선사(先史)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무더기를 이룰 만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음식물 쓰레기장이 아니었다. 1999년 하인수 당시 부산 복천박물관학예연구실장(57·현 부산근대역사관장)의 손을 통해 집터와 무덤(옹관)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다. 기원전 6000년∼기원전 2000년 약 4000년에 걸쳐 신석기인들이 먹고 자고 버린 생활 흔적이 패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 ‘반구대 암각화’ 미스터리 풀 열쇠
“이기 뭐꼬? 그림 아이가?”
2004년 2월 초 부산박물관 연구실. 5년 전 동삼동 패총에서 손수 발굴한 토기조각들을 정리하던 하인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토기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음각선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토기 표면은 붉은색이 완연했다. 대충 만든 게 아니라 채색까지 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27일 부산 동삼동 패총 전시관에서 하인수 부산근대역사관장이 사슴 그림이 새겨진 토기조각을 살펴보고 있다. 하 관장은 2004년 유물 정리 과정 에서 사슴 그림을 우연히 발견했다. 부산=박경모 기자
철로 만든 핀으로 토기에 묻은 흙을 조심스레 긁어내자 사다리꼴을 그리던 음각선은 다시 위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눈은 점점 커졌다. 처음 눈에 들어온 사다리꼴은 몸통, 윗선은 머리, 아랫선은 다리가 분명했다.
그것은 신석기인들이 그린 한 마리 사슴이었다. 하인수의 회고. “다른 토기에서 흔히 보이는 조잡한 선이 아니었어요. 보는 순간 조형미가 느껴졌습니다. 사슴 그림이란 걸 알고서 온몸에 전율이 흐릅디다.”
그때까지 신석기시대 그림은 이것이 유일했다. 선사시대 그림은 매우 희귀한 데다 선사인들의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유추할 수 있는 핵심 자료라는 점에서 귀중하다. 총 2만여 개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토기조각에서 그림을 찾아낸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1차 조사에서 무늬가 없는 걸로 분류된 토기들을 모아 최종 확인하는 과정에서 건져낸 월척이었다.
무엇보다 동삼동 사슴 그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미스터리를 풀 열쇠였다. 당시 학계는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그림 등을 근거로 청동기시대 후기 유물로 봤다. 석기로 고래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하인수의 생각은 달랐다. 암각화와 동삼동 패총 토기에 새겨진 사슴 그림은 전체적으로 간략하고 몸통을 사다리꼴로 표현했으며 몸통에서 이어진 선으로 다리를 표현하는 방식 등이 서로 유사했다.
더구나 뼈로 만든 화살촉이 박힌 고래 뼈가 울산 황성동에서 발견돼 신석기인들의 고래 사냥이 증명됐다. 이에 따라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인들이 처음 그렸다는 하인수의 주장은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 ‘신석기인은 원시적’ 편견 깨다
1930년대 일본 학자를 비롯해 1960, 70년대 미국 학자 A 모아와 서울대, 국립박물관이 동삼동 패총을 잇달아 발굴했지만 누구도 집터와 무덤을 찾지 못했다. 조개무지라는 선입견에 갇혀 내부에 다른 유구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인수는 속단하지 않고 토층 조사를 치밀하게 진행해 신석기시대 집터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옹관을 동시에 발견했다.
신석기인들은 수렵·채집에만 의존했다는 편견을 버린 것도 중요한 연구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패총 집터 안에서 기원전 3300년 무렵의 탄화된 조와 기장이 나왔고, 출토 토기에서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의 압흔(壓痕·눌린 흔적)이 발견됐다.
하인수는 “이는 이미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한반도 전역에 걸쳐 조, 기장 등 밭농사가 보편화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조개 팔찌’들. 조개에 구멍을 뚫어 만든 장신구다. 부산박물관 제공
한발 더 나아가 동삼동 패총 신석기인들이 해외 교역까지 한 정황도 포착됐다. 조개 팔찌 1500여 점과 일본산 흑요석, 조몬(繩文) 토기가 함께 출토된 것이다. 조개에 구멍을 내 장신구로 만든 조개 팔찌는 워낙 가공이 힘들어 귀한데, 일본 규슈 사가(佐賀) 패총에서 한반도산 투박조개 팔찌가 90여 점이나 발견됐다.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흑요석들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일본 규슈 고시다케(腰岳)가 산지(産地)인 걸로 조사됐다. 하인수의 설명.
“동삼동 패총에선 배 모양 토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곳 신석기인들은 배를 타고 일본 열도까지 건너가 조개 팔찌와 흑요석을 교환한 걸로 보입니다. 한일 교류사는 멀리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죠."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30. 경남 함안 성산산성 발굴-박종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
-천오백년 견딘 신라 목간 308점, 석성의 진짜 주인 밝히다
10일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성벽 위에서 박종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과 조희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정인태 학예연구사(왼쪽부터)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함안=박경모 기자
가파른 경사를 헐떡이며 15분쯤 올라갔을까. 약 3∼5m 높이의 흙벽이 사방을 두른 넓은 풀밭이 펼쳐졌다. 고원에 자리 잡은 아늑한 분지를 연상시켰다. 풀때 입은 흙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온통 돌무더기. 자연석이 아닌 축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다듬은 돌들이었다.
10일 박종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56), 조희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58), 정인태 학예연구사(38)와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북동쪽 성벽에 오르자 옆으로 길게 늘어선 원형 봉분 수십 기가 내려다보였다. 아라가야 왕릉인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이었다.
발굴 전 학계에서 이곳을 아라가야의 산성으로 본 이유다. 하지만 26년 전 박종익이 이끈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은 성산산성이 가야가 아닌 신라 석성임을 규명하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전체 목간의 절반에 육박하는 308점의 신라 목간이 성산산성에서 무더기로 출토됐다.
○ 밝혀진 석성의 정체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의 동쪽 성벽 발굴 현장. 저수지가 이곳에서 발견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성벽 옆에 또 다른 성벽이 있다!”
1991년 11월 말 성산산성 발굴 현장에 수수께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문 터 동쪽 성벽 아래 쌓인 돌무더기를 제거하자, 삼각형 단면의 석축이 나타난 것이다. 석축은 마치 성벽을 뒤에서 떠받치듯 외벽에 바싹 붙어 있었다.
‘이중 성벽인가? 아니면 다른 구조물?’ 박종익이 새로운 유구의 정체를 놓고 한참 고민할 때, 1970년대부터 경주 발굴 현장에서 산전수전 겪은 조희경의 입에서 결정적인 힌트가 흘러나왔다. “예전 경주 명활산성 발굴 때 본 거랑 비슷한데….”
부리나케 명활산성 발굴 자료를 찾아보니 돌 재질은 달랐지만 성산산성과 흡사한 삼각형 단면의 석축 사진이 있었다. 신라 석성에서만 보이는 이른바 ‘외벽(外壁) 보축(補築)’이 분명했다. 신라인들은 산성의 몸체에 해당하는 체성벽(體城壁)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뒤 무너질 것을 대비해 옆에서 볼 때 이등변 삼각형 모양인 보축을 성벽 아래 붙여 세웠다.
이것은 신라식 귀면와, 막새기와 등과 더불어 성산산성이 신라 석성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학계는 출토된 신라목간 내용과 일본서기 기록 등을 감안해 6세기 중엽 신라가 성산산성을 세운 걸로 보고 있다. 다음은 박종익의 회고.
“1991년 발굴에서 외벽 보축의 시작점을 발견했습니다. 문지(門址)를 따라 시작되는 보축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건 우리가 처음이었어요.”
○ 목간의 보고(寶庫) 성산산성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각종 목간. 대부분 동문 터 근처 부엽층에서 발견됐다. 우리나라 출토 목간의 절반가량인 308점의 신라 목간이 나왔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듬해인 1992년 6월 초 박종익은 진귀한 ‘첫 경험’을 했다. 발굴 인생에서 처음으로 묵서(墨書)가 적힌 목간을 발견한 것이다. 목간은 동문 터 부근 지하 2m에 깔린 부엽(敷葉·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나뭇잎이나 가지를 깔고 흙을 쌓은 것)층에서 나왔다. 부엽층은 외부 공기가 차단된 채 습기를 머금고 있어 나뭇조각 같은 유기물질이 10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는 특수한 환경을 제공한다.
박종익이 발견한 목간에는 한자로 ‘上彡者村(상삼자촌)’이라는 지명과 ‘波婁(파루)’라는 인명이 함께 적혀 있었다. 신라 지방민이 성산산성으로 물자를 보내면서 꼬리표로 붙인 것이었다.
“물에 닿은 목간 묵서가 천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선명해서 놀랐습니다. 성산산성 발굴에서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었죠. 당시엔 이곳에서 목간이 수백 점이나 쏟아져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묵서 판독을 위한 적외선 카메라가 연구소에 도입돼 출토 목간 26점을 분석한 발굴보고서가 1998년 발간되자 학계는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현존하는 1차 사료가 없는 삼국시대 연구에서 명문은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는 핵심 자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1999년 11월 한중일 3개국 학자들이 참여한 ‘목간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목간과 관련한 국제학술회의는 국내 최초였다. 학술회의에서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현 한국목간학회장) 등 일본 학계는 “성산산성 목간은 일본 고대 목간의 원류를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한일 고대 교류사 연구에서도 성산산성 목간 발굴은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한일 학자들이 성산산성 목간을 지속적으로 연구한 결과 현재의 경남, 경북, 충북 지역에서 피와 보리, 쌀, 철 등 각종 물품을 산성으로 운송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 교수는 ‘한국 목간과 한국사 연구’ 논문에서 “성산산성 목간은 신라의 지방지배 체제와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썼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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