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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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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대성 이론의 맹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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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2월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이에 상응하는 기준좌표계의 가속운동이 완전히 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등가 원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후 아인슈타인은 등속도 운동만이 아니라 가속운동에도 적용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머나먼 학문적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1907년의 이 논문에서 MICHELSON - MORLEY\'S EXPERIMENT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아인슈타인은 주로 The origin of the word 오랜 침묵 끝에 1911년 6월 아인슈타인은 프라하에서 중력에 관한 논의를 재개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 다시 말해서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빛에 적색 편이가 생긴다는 것과 강한 중력장 부근에서 빛이 속도가 달라진다는 주장을 1907년보다 훨씬 정확한 형태로 전개했다. 즉 여기서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전제가 되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빛의 속도가 강한 중력장 속에서 달라지기 때문에 호이헨스의 원리에 따라 강한 중력장 주변을 지날 때 빛이 휘게 되는 소위 중력 렌즈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다음 해 2월 아인슈타인은 역시 프라하에서 가변적인 빛의 속도를 바탕으로 해서 전기 (수학중심) 1912년을 전후해서 아인슈타인은 가속운동을 하는 물체가 경험하는 관성력은 전체 우주 우주의 다른 물체들의 양과 분포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소위 ' The Analysis of Sens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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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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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만과의 협동 작업과 리만 기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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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8월 연방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취리히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학창시절 친구였으며 당시에는 ETH', STICKY, CAPTION,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mouseout="return nd();" href="xxjavascript:void(0);">취리히 연방공과대학 의 수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그로스만의 사진과 약력', STICKY, CAPTION, '그로스만');"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mouseout="return nd();" href="xxjavascript:void(0);">그로스만 (Marcel Grossmann, 1878-1936)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로스만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시간-공간 구조와 연결시켰다. 즉 그들은 스칼라 함수로 표현되는 뉴턴의 퍼텐셜을 포기하고 대신 텐서로 표현되는 새로운 중력 방정식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로스만과의 공동작업에서 아인슈타인은 그가 1915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얻은 리만 기학학에 입각한 장 방정식에 아주 근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상대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때 아인슈타인은 Riemannian Geometry 1913년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의 협동 작업에서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얻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집필한 에이브러험 파이스(Abraham Pais)는 당시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중력 장 방정식을 유도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텐서 방정식을 유일하게 결정하는 데에 필수적인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좌표 조건이란 Gravitation and the General Theory of Relativity 이에 대해서 현재 아인슈타인의 전집을 편집하고 있는 스태철(J. Stachel)과 특히 존 노튼(John Norton)은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지 못한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정적인 중력장의 개념이 물리적으로 그릇된 추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노튼은 이런 주장을 뒤받침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 공동 작업을 했을 시기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공책에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식을 손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사실 역사적인 설명을 할 때, 왜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왜 성공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명을 얻어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무엇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어내지 못했는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이 당시에 중력 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상당히 헤맨 것만은 분명하다. 20대 젊은 시절의 참신한 기지로 얻어낸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많은 실수와 오랜 방황의 끝에 힘겹게 얻어내었던 것이다. 1914년 4월 아인슈타인은 새로이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기 위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 새로운 연구 환경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찾던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계속 찾아나갔다. 1915년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은 1913년 자신이 버렸던 리만 기하학의 방법론을 다시 채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자신의 ' Introducing The Einstein Principle of Equival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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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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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의 괴팅겐식 전개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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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리만 전기 아인슈타인 우선 괴팅겐 수학자들은 최소작용의 법칙에 바탕을 둔 변분법의 원리와 basic, path curves ..etc 또한 괴팅겐 학파는 비유크리드 기하학과 군론의 일종인 불변이론 분야에서 이룩한 그들의 수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항상 중력과 전자기력을 동시에 다루었다. 이미 1908년에 Hermann Minkowski 1909년 민코프스키가 맹장 수술 뒤에 갑자기 죽자, 민코프스키가 맡았던 물리학 분야의 연구는 힐베르트가 떠맡게 되었다. 민코프스키의 연구 프로그램을 떠맡은 힐베르트는 중력과 전자기력을 새로운 비선형 전자기 방정식에 의해서 통일하려고 했던 미(Gustav Mie, 1868-1957)의 이론에 주목하였고, 이 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장 방정식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미의 물질이론은 괴팅겐 출신인 헤르만 헤르만 바일 전기 또한 괴팅겐을 방문해서 민코프스키와 교류를 가졌으며, 민코프스키가 죽은 뒤에는 그가 추구하던 중력 이론을 발전시킨 필란드의 물리학자 노르드스트룀의 사진과 그의 업적들', STICKY, CAPTION, '노르드스트룀');"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mouseout="return nd();" href="xxjavascript:void(0);">노르드스트룀 (Gunnar Nordström, 1881-1923)의 논의도 아인슈타인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1913년에 발표된 노르드스트룀의 중력이론에 의하면, 중력 현상을 다룰 때에도 특수 상대성이론은 일반적인 유효성을 지녔으며, 중력장 속에서 중력 작용은 항상 빛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속도로 전달된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가속운동에 관한 상대론에서 바탕으로 했던 Introducing The Einstein Principle of Equival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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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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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대성이론의 검증과 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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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3월 20일 Annalen der Physik 태양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개기일식 때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처음으로 관측되었다. 사실 영국에서는 20세기초의 전자기학 분야에서 Ether and the Theory of Relativity', STICKY, CAPTION, '에테르');"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mouseout="return nd();" href="xxjavascript:void(0);">에테르 이론이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수 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영국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적대적이었며, 심지어는 냉소적이기까지 했었다. 더욱이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전쟁 중이어서 독일의 학술 잡지가 영국으로 올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영국 과학자들은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 영국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왕립 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이었다. 그는 전쟁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지터의 전기
Arthur Stanley Eddingt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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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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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장 이론과 아인슈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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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력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전자기 현상과 중력 현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통일장 이론을 계속 갈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과 전자기 현상을 통일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18년 괴팅겐의 수학자 헤르만 헤르만 바일 전기 아인슈타인이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는 통일장 이론을 얻어내려고 시도했던 것은 그가 광양자 가설의 통계적 성격을 극복하려고 했던 노력과 연결을 가지고 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광양자의 방출이 통계적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양자론에 내재하고 있는 커다란 약점으로서 아직 광양자에 관한 논의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아인슈타인은 1923년 상대론적인 장방정식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상위 결정된(überbestimmten) 미분방정식 체계를 유도해보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는 연속체 가설과 결정론적 기술이 유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비결정론적 성격도 상위 결정된 미분방정식 체계에 의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아인슈타인의 바램이 담겨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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