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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는 인생
시편 23:1~6
얼마 전 오륜교회에서 실시됐던 다니엘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이 때 강사로 참석했던 분들 가운데 이창훈 앵커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창훈 앵커는 우리나라 첫 장애인 앵커로 활동했던 분이고, 우리나라 공영방송인 KBS뉴스에서 앵커로도 활동했던 분입니다.
이창훈 앵커는 32년 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창훈 앵커가 생후 7개월 때, 3~4일 동안을 하염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놀란 엄마는 아이를 업고 동네병원에를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네 병원에서는 자기들은 고칠 수 없으니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으로 가라고 하더랍니다.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한양대학교 병원에 갔더니 병원에서는 “이 아이는 실명입니다.”라고 판정을 내리더랍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서울대학교 병원에 갔더니 서울대학교 병원에서는 뇌수막염으로 인해서 아이의 눈과 귀와 입이 닫혔다는 진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어린 아이에게 뇌수막염 예방접종을 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그런 보건제도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열이 나면 열의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뇌수막염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넋이 나간 어머니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유명하다는 무당을 찾아가서 굿도 해보고, 아이를 고칠 수 있는 민간요법이 있다면 그것을 써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어머니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은 지리산에 있는 유명한 도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리산 도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고 안 되면 교회로 가라고 말하더랍니다. 타 종교인이 교회에 전도한 것입니다. 정말 마지막 방법을 써도 아들의 병을 고쳐지지 않자 엄마는 드디어 진주에 있는 한 교회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눈과 귀와 입이 닫힌 상황에서 아이는 두 돌 6개월 동안 걷지를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목에 큰 혹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기도하던 중에 어머니는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아들의 몸에서 불 뱀 두 마리가 나가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들의 목에 있던 큰 혹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될 거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신기하게도 그 아들이 걷기 시작했고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들의 눈이 완전히 떠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포천에 있던 할렐루야 기도원에 아들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원장은 어떤 기구로 아들의 이마를 사정없이 긁었다고 합니다. 물론 당연히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진주로 내려오던 차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네 아들을 위해 울지 말고 많은 영혼을 위해서 울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감동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아이의 눈이 떠질 것을 구하지 말고, 네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라고 어머니에게 감동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장면도 기억하게 하셨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님의 죄 때문입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어머니의 마음은 한쪽에서는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이러한 주님의 감동을 통해서 분명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 행하고자 하시는 놀라운 일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어머니의 고민이 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아들의 눈을 뜨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부터는 어떻게 아들의 자립과 교육을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 강북구에 있는 한빛 맹학교에 8살 된 아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트럼펫을 불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트럼펫을 통해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에는 베이스기타를 연주하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학생회장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 움츠려 있던 마음들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서울신학대학교와 숭실대학교에서 사회복지 학사와 석사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창훈 앵커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면 눈뜬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예수를 믿으면 눈뜬다는 정도의 복음일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뜬 후에 예수님을 좇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가치관이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복음이더라는 겁니다. 복음의 진수는 자신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바뀌는 것입니다. 이창훈 앵커는 자신의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방향이 바뀌게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육신의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창훈 앵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혹시 저렴한 복음을 믿고 있지는 않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또 이창훈 앵커는 시각장애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흰 지팡이를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흰 지팡이는 자신보다 앞서서 자신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시작장애인들을 인도하는 흰 지팡이처럼, 주의 지팡이는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27장 32절에 보면, 모든 소와 양을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게 해서, 목자가 양의 수를 세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게 해서 우리를 살피십니다. 목자가 가지고 다녔던 막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가 가지고 다녔던 막대기는 양들을 흩트리거나, 양을 괴롭히는 사나운 짐승들을 쫓아낼 때 사용했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다할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창훈 앵커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과연 이창훈 앵커가 만난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일까요? 또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일까요? 이창훈 앵커가 만났고, 다윗이 만났던 것처럼, 여러분이 만나야 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1~6).”
시편 23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인생승리의 열쇠입니다. 인생승리의 비결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답입니다. 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 지위가 높고, 아무리 부귀권세를 가졌어도, 주님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분명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면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잠시 있다가 썩어 없어질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처럼 허무한 인생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록 육신의 눈은 멀쩡하지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지 않는다면 그는 가장 비참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가장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밑바닥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인생 승리의 비결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였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과연 누구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은 말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알듯이, 양도 자기를 이끄는 선한 목자를 압니다. 선한 목자와 양 사이에는 깊은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깊은 사귐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자와 양의 깊은 사귐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0장 15절에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주셨습니다. 그러면 목자를 잘 아는 양은 무엇을 합니까? 요한복음 10장 16절은 말합니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가 되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핵심입니다. 목자와 양의 깊은 사귐은 서로를 위한 희생적인 사랑을 낳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창훈 앵커가 말한 것처럼, 육신의 눈이 떠지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가치관이 바뀌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지 않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 축복입니다.
이번 달 「생명의 삶」에 이런 재미있는 예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전화로 주일에 할 설교 제목과 성경 본문을 비서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 본문은 시편 23편 1절부터 6절이고, 설교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러자 비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게 전부입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뭐가 더 필요해?”라고 말했고, 비서는 “알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주보를 받아 든 목사님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설교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뭐가 더 필요해?”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화가 났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제목이 참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비서를 통해 하나님이 설교 제목을 주신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뭐가 더 필요해?”라는 부분에 맞춰 설교를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자시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이미 엄청난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묵상이 물밀 듯 몰려오면서 목사님 자신이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자이시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면 나는 이미 엄청난 것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늘 달라고만 하고, 투정만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분명히 믿는다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분명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바뀌지 않는 게 신기한 일이요, 기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 우리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제도 한 자매와 대화하는 중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최근 시골에 계신 이 자매의 어머니가 딸을 통해 저에게 기도제목을 부탁해오셨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현재 이 자매의 어머니가 다니는 직장이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매주 교회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인데, 주일성수할 수 있는 직장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교회 권사님들 몇 분과 기도제목을 나누고 이 문제를 위해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제 이 청년의 어머니에게 문자가 왔는데, 현재 근무 중인 직장에서 앞으로 일요일에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어머니는 아무래도 대전에서 딸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니까 이런 응답이 일어났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물론 저도 기도했고, 딸도 기도했고, 권사님들도 기도했지요. 그러나 그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자매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주고 계시다는 사실로 인해 저는 더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우리가 기쁨과 감사로 그분의 뒤를 따르기 원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 내가 부족함이 없기 위해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어주셔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냐면, 원인과 결과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그 결과로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내게 부족함이 없기 위해서가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으라는 말이지요. 신앙생활에서 내가 목적이 되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목적이 되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 그 결과로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얼마 전에 우리교회를 방문했던 인도 선교사님의 최근 근황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전립선 암 조직검사를 위해 급하게 한국에 갔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들의 기도의 힘으로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나의 심장을 묻어 둔 인도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 11월 30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홍콩을 거쳐 방콕을 8시간 만에 도착, 3시간 대기, 5시간 다시 비행기를 타고 인도 땅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은혜로 입국심사를 잘 통화하고 하루 델리 숙박, 그리고 안개 때문에 기차가 8시간 연착되어 18시간 기차를 차고 12월 2일 저녁 4시 경, 드디어 알라하바드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2박 3일이 걸렸다. 그런데 인도에 도착하니 화폐개혁으로 구권은 휴지처럼 되었고, 신권은 구할 수가 없어서 야채 살 돈도 없었다. 갑자기 거지 아닌 거지가 되어버렸다. 역시 인도가 나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난 이런 인도가 좋으니 내가 잘못된 건가? 그런데 집 집 텃밭에 심어둔 배추, 무, 상추, 쑥갓, 열무, 당랑 무 등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 시장은 못 가지만 직접 가꾼 상추로 쌈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다. 그래서 인도는 내가 있어야 할 존재의 이유가 있는 땅이다.
저는 이 선교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아니 여행 다녀온 사이에 화폐개혁으로 옛날 돈을 다 못쓰게 되었고, 새 돈도 구할 수 없는데 여러분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꾼 상추로 며칠 째 쌈을 싸먹으면서도 자신이 그 땅에 있어야 할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예수님 믿으면 눈 뜬다는 이야기만이 복음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눈이 떠집니다. 하나님께서 뜨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창훈 앵커처럼, 구지 육신의 눈은 감겼어도 영적인 눈이 열려,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무장되면 그게 진짜 행복인 것입니다. 꼭 육신의 눈이 떠져야만 기적이 아니에요. 진짜 기적은 나의 삶의 목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는 거예요. 육신의 눈 떠졌다고 주님을 떠나 세상의 길로 나아가면 그게 오히려 망하는 길이에요. 사업 잘 되고, 아이들 좋은 대학 갔다고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면 결국 그게 지옥가는 길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지금 여러분 안에서 살고 계신 분은 누구시지요? 예수님 맞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 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요?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나요? 그러면 여러분은 이미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호와가 여러분의 목자이시면 여러분은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이 귀한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