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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78
4월27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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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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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QB-1_TvkBE&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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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굳이 멀리 가실 필요 없습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바라셨던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백성들 사이에 분명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예표를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시켜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님을 뵙는 것이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뵙는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중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놀랍고도 신기한 기적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한번 맛본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 더 크고 대단하고 특별한 기적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군중은 대단한 능력자 예수님으로부터 또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께서 어쩌면 이 암담하고 부조리한 이스라엘의 고통스런 현실을 순식간에 뒤엎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세속적인 기대 말입니다. 이런 군중의 심리를 잘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정곡을 찌르는 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장 26절)
예수님께서는 육적이고 물질적인 만족 때문에 당신을 쫓아다니는 군중을 꾸짖으시며 한 단계 앞으로 더 나아가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양식을 찾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복음 6장 27절)
오늘날에도 뭔가 특별한 것, 뭔가 신기한 현상을 쫓아 멀리까지 다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구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특별하고 황홀한 신비 체험, 마치 거짓말처럼 이 고통스런 현실에서 한 순간에 벗어나는 것... 이런 것들은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세상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굳이 멀리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본당 성당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현존하십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매일 봉헌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빵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고백소 안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람직한 신앙이 어떤 것일까, 묵상해봅니다.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광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그런 신앙은 점검이 좀 필요한 신앙인 듯합니다. 한 지도자가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과장되게 포장되는 신앙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나 존엄성이 훼손되는 그런 신앙 역시 진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간의 이성이 잘 조화된 신앙,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본 상식과 예의가 존중되는 신앙, 단 한 번에 모든 것이 다 성취되기보다 돌탑 쌓듯이 오랜 세월을 두고 꾸준히 쌓아 올라가는 그런 신앙,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꾸준히 희망하며 나 자신의 비참함을 견뎌내는 신앙... 이런 신앙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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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튜브 복음 묵상)
https://youtu.be/ctG4Btgaidg
<믿음이 양식이다>
방관자효과(bystander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고도 하고 구경꾼 효과라고도 말합니다.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s)라는 여인이 뉴욕의 자기 집 근처에서 새벽 3시 30분경 30분 동안 반항하며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집 주변의 40가구에서 그 소리를 들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라테인(Latane)과 로빈(Robin)이라는 심리학자가 이와 관련된 실험을 했습니다. 대학생들을 실험 명목으로 불러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방을 여럿 나누어서,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럿이 같이 있게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들게 했습니다. 혼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75%가 2분 이내에 알렸고, 여럿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6분 이내에 불과 13%만 알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럿이 있으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책임감의 분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방관자 효과, 혹은 책임감 분산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아니어도 돼!’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01년 일본 신오쿠역 퇴근길로 인파가 가득 찬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이수현 신도롬’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쳤는데 자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4명이 구했고, 6명, 9명이 뛰어내려 구했다는 기사가 수도 없이 나왔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무기력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저 사람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등의 생각에 빠집니다. 이렇게 무기력증에 빠지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라면 일을 시키는 주인 앞에서 무기력증에 빠질 수 없습니다.
제가 무기력증에 시달릴 때는 대학을 계속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가 고민할 때였습니다. 그 1년이 가장 힘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사제가 되기로 하고 주님께서 불러주셨음을 믿게 되니까 다시 힘이 났습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의 주인공은 3살 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아버지가 있지만,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 자신을 낳은 것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도 저도 싫어서 사다리에서 떨어져 스스로 자라는 것을 멈추고 그저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런 무기력감으로 가족들에게 주는 것은 피해밖에 없었습니다.
카인은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너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받은 이웃의 방관자가 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헛갈리는 데서 옵니다. 부모가 명확해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밥만 먹어서는 힘이 나지 않습니다. 밥을 주는 이가 부모임을 믿어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힘도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명확히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는 것들은 이제 ‘표징’이 됩니다.
따라서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를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려고 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 믿음만이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얻으려며 살다가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그러면 그런 양식들에 파묻혀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믿는 데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나의 삶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겉으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 젊고 예쁘고 돈 많고 명예 있는 이들이 자살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들은 모든 에너지를 육적인 양식을 얻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결말을 맞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대비시키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당신을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아서가 아니라 배를 채웠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지 말고 표징을 통해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양식을 먹는 이유는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증가하면 정체성이 확고해지고 그러면 삶의 의욕도 증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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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22-29 :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본 백성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피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과 합류하셨다. 그러나 군중들은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낸 예수께서 혼자 남으신 것을 알고 이튿날 다시 예수님을 그 곳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서야 예수님을 찾아보고는 놀란다.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이 말씀은 ‘너희는 영이 아니라 육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찾는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세에서 이익을 얻어 보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난관에 부딪치면 신부들에게 기도를 청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만을 원해 그분을 찾는 이는 드물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다른 것을 위해 나를 찾는다. 나를 원해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이 양식이시라는 진리를 암시하신다. 즉 “빵의 기적을 통하여 길이 남아 영혼을 기르는 음식을 찾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즉시 덧없는 음식을 찾고 있다. 너희는 육체 대신 영을 살지게 하는 음식으로 인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7절) 하느님의 모습이신 아드님은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그 양식을 주실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은총에 의해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새로 모양 지어진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 아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 은총을 받는다. 빵의 기적의 의미는 우리의 참 생명을 위한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엉뚱한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양식을 얻고자 힘써야 한다. 이 양식을 우리에게 주는 이는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드님이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는 누군가?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이는 누구인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안에서 자랑으로 여겨야(1코린 1,31 참조) 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아드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찾는 굶주림을 주셨다. 이것은 세상의 음식이나 현세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그러한 만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현세적인 만족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즉 참된 생명,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더 깊은 뜻을 알아듣고 실천해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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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리 예쁠 것도 없는 일상의 나그네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두 개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스테파노의 신앙 고백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 하였습니다. 반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보이신 뒤 곧바로 이어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어떻게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신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과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 일들의 좌절, 타인의 무시로 얻은 상처, 그리고 만족할 수 없는 자기 연민 속에서, 부활의 기쁨을 계속 간직하기에는 우리의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바로 이때에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으며,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보인 스테파노의 믿음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쁘게 살아가는 부활의 길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무거운 멍에로 비틀거리며 삶의 문제를 되새기기보다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축복을 헤아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와 같은 믿음으로 삶의 문제에도 편안히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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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빵>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그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면 항상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일에서 오늘날의 대통령 선거들이 연상됩니다. 선거의 주요 쟁점은 흔히 ‘경제 문제’이고, 후보자들의 주요 공약도 거의 언제나 ‘경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후보들마다 자기만이 경제를 잘 살릴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유권자들은 정말로 경제를 잘 살릴 것 같은 후보자를 선택합니다. 경제 문제가, 즉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긴 합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만 집착하다가 더 중요한 인권, 민주화, 평화, 환경 같은 문제는 뒤로 밀리고, 양극화 해소 같은 문제에는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 세계가 다 그런 모습입니다. 선거를 잘 치르고 좋은 후보자를 당선시키면 더 좋은 세상이 될 것도 같은데, 온 세상이 다 물질적인 풍요를 최우선 가치로 생각한다면, 점점 더 나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만이라도 가치관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선거 때만 되면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변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보입니다. 우리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으면 안 됩니다. 육신을 살리는 빵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썩어 없어질 양식”은 육신의 생명만을 유지해 주는 양식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모든 음식은 다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의 빵을 나누어 주셨을 때, 그 빵으로 육신의 배고픔만 해결한 사람들에게는 그 빵도 ‘썩어 없어질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은 사람이라면, 그 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아보고 믿은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모두 포함된 말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라는 말씀은,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집착하다가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내세의 삶’을 목표로 삼는 인생을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현세의 삶은 가치가 없다는 뜻도 아니고, 육신의 생명과 일상적인 식사가 무의미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내세에 잘 도착하려면 ‘현세의 삶’을 잘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생명도 소중하고, 일상적인 식사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 또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 ‘잘 사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사는 것,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일’을 ‘먹는 일’로 표현하시기도 했고, ‘마시는 일’로 표현하시기도 했는데, 표현이 어떻든지 간에 당신을 믿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뒤의 40절을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전권’을 주셨다는 선언입니다.(마태 28,18; 요한 5,22)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 사람들을 심판해서 멸망시키거나 구원할 권한”을 전부 넘겨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해서, 예수님만 믿고 아버지 하느님은 안 믿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느님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반대로, 하느님만 믿고 예수님을 안 믿는 종파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종파를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라신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영원하고 참된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자녀들이 행복하게 되기만을 바라시는 아버지이신 분입니다. ‘내가’ 행복하게 되기만을 바라시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기쁨과 행복은,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간 다음에나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기쁘고 행복한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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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동원 베드로 신부님]
한때 손수 밥을 해먹고 생활하면서 하루하루 음식을 해먹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밥을 차려 먹는 것이 큰일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골고루 영양을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야윌 수밖에 없었고 체력이 부족해서 공부를 제대로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새삼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한 건지 그리고 어머니 사랑이 담겨 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지요.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면서 음식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음식에 사랑이 들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깃들어 있는 음식은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보고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적은 단지 사람들의 굶주림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려고 하셨다는 것을.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양식으로 배부르고 살이 쪄 있지만 영혼은 여전히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생명을 빵과 포도주에 담아서 당신의 몸과 피로 만들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활기있게 살아갈 수 있듯이 영혼은 생명의 양식을 섭취함으로써 활기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체는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서 영혼을 성장하게 하며, 영적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세상은 죽음의 양식으로 가득 차 있는 만큼 더욱 생명의 양식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에 생명을 주시듯이,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체로서 우리 영혼을 북돋워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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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아름다움은 진리의 맛을 본 사람의 몫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능력으로 충만한 스테파노를 시기하고 핍박하던 이들조차도 그의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봅니다. 세상의 폭력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진리 안에 머문 사람만이 누리는 자유와 행복입니다. 스테파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본 행복한 첫 순교자가 됩니다.
반면에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겪은 군중은, 그분께서 보여 주신 진리의 표징, 곧 나눔의 기적을 통해 탐욕에서 벗어나 참된 자아를 만나는 은총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고 나서 또 다시 자신을 배불릴 수 있는 빵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자아의 참된 모습을 찾지 못한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질책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실상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수많은 고민들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다 겪는 실망과 분노에서 옵니다. 남들보다 좀 더 배부르려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때로는 중상과 모략으로 거짓된 자아에 숨어 버리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보내신 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입술과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의 가치를 동물적 욕망이 아닌 영적인 아름다움에서 찾을 때 가능합니다. 사랑, 친절, 인내, 나눔, 희생, 겸손. 듣기만 해도 아름다운 것들이 바로 예수님께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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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님]
<금의환향>
제 고향은 전통적으로 불교 집안이 많은 곳으로 저희 집을 포함한 몇몇 집들만이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면서 그들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제가 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이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의젓한 사제의 모습을 갖추고 등장했으니 그들의 반응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으니까요.
제 어린 시절 모습을 알고 계신 동네 어르신들, 아무런 허물없이 뛰어놀았던 개구쟁이 친구들, 그리고 저희 식구들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던 이웃들이건만 그들의 시선은 마치 낯선 이를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저는 농부의 아들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마리아고, 할머니도 마리아며, 동생은 프란치스코입니다. 사람들은 저희 식구들 모두를 알고 있고, 지금도 저희 식구들은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저희 식구들이 그동안 걸어왔던 기쁨과 감동의 나날들, 때로는 고통과 슬픔으로 다가왔던 위기의 순간들은 진정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가 되어 돌아온 저와 제 식구들을 신비롭고 경이롭게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예수님보다 나은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셨지만, 적어도 저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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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순시기가 시작되면서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부활이 되면 당연히 중단된 미사가 시작될 줄 알았습니다. 40일이면 정화의 시간으로 충분할 줄 알았습니다. 40일이면 현대의 과학과 의술이 충분히 바이러스를 이겨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부활의 시간이 되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사가 없는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전례와 형식이 갖춰진 미사가 있습니다. 성전, 제단, 성가, 강론, 영성체, 친교로 이루어진 미사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되어서 또다시 묻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미사를 드려야 하나요? 전례와 형식을 갖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함께 모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미사와 전례(典禮)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읽기, 묵상, 애덕의 실천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한 미사참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영이시라 이야기하십니다. 그러기에 영은 장소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와 영에 충만하다면 비록 전례와 형식을 갖추지 못할지라도, 공적인 미사에 참례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성인과 성녀 중에는 전례와 형식,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박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진리와 영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일정표의 칸마다 빼곡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강의, 면담, 미사, 모임, 여행, 식사, 봉성체, 홍보, 피정, 운동으로 일정표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루에 몇 가지 일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오전에는 길음동 수녀원, 오후에는 해방촌 성당, 저녁에는 안양 라자로 마을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드렸습니다. 텅 빈 일정표를 봅니다. 사순시기에 예정되었던 특강과 홍보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부활 후에 예정되었던 성지순례가 취소되었습니다.
텅 빈 일정표를 보면서 ‘빈 무덤’을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요청과 요구에 의해서 일정표를 채웠습니다. 지금은 스스로 일정표를 채워야합니다. 십자군 이야기, 로마제국 흥망사를 읽어보려 합니다. 바쁜 일정표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책입니다. 요한복음 강의록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밤이면 핸드폰을 충전하듯이, 텅 빈 일정표에 진리와 영을 채우고 싶습니다. 외부로 향했던 시선과 생각을 성찰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곧 없어질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한모금의 물이 되어 주는 것,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쉼터가 되어 주는 것, 가난한 이웃에게 빵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것이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영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오늘 스테파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박해를 받기도 하고, 그 길은 모욕을 받기도하고, 그 길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길입니다. 곧 없어질 음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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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
요한 6,22-29 (생명의 빵)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
내 편을 들어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도 아니요
재물 힘 건강의 축복을 받기
위함도 아니요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함도 아니요
고단한 삶의 탈출구를 만들기
위함도 아니요
채워지지 않는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함도 아니요
고상한 여가생활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요
세속에 물듦 없이 거룩하게 보이기
위함도 아니요
인간관계의 폭을 다양하게 넓히기
위함도 아니요
공동체 안에서 한자리 차지하기
위함도 아니요
알 수 없는 죽음 이후를 보상받기
위함도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함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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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작년 말에 양치질하다가 치아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누구보다도 튼튼한 치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양치를 하다가 부러진 것입니다. 어이없기도 했고 동시에 화도 났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병원에 갔더니 이를 뽑은 뒤에 임플란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서글픈 마음도 생깁니다. 임플란트하는 선배 신부님들을 보면서 ‘나는 치아 관리를 잘해서 임플란트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저 역시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어느 선배 신부님께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0년 넘게 썼으면 오래 쓴 거지. 가전제품도 10년 쓰면 오래 썼다고 하잖아. 그 다섯 배를 사용했는데 뭐가 불만이야?”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고, 그동안 이상 없이 자신의 역할을 했던 치아에 감사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올 초, 임플란트 수술을 하는데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힘들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전혀 아프지도 않고, 30분 정도에 끝났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치아 뼈가 튼튼해서 빨리 끝났고 그래서 그렇게 아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많은 세상처럼 보이지만, 다르게 바라보면 감사하고 기쁜 것들도 많은 생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쫓아서 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무엇을 얻을 생각에 그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그들의 마음은 육체의 양식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덧없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추구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육체의 양식만을 바라보면 불평불만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영원한 양식만을 바라보면 감사하고 기쁜 것들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중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 인정하신 아들을 믿는데 그분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분이 원하시고 또 말씀하신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고,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육체의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하느님 나라 안에서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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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일을 하기>
사람들은 편안함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삶에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것을 마련하려고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안함이 반드시 좋은 것일까요? 종이에 직접 글을 쓰는 것은 꽤 불편합니다. 저의 경우는 주로 만년필로 글을 쓰는데, 이 만년필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펜촉이 굳어버려서 상하게 됩니다.
따라서 꾸준히 써야 합니다.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것이 훨씬 편한 것은 분명합니다. 직접 글을 쓰는 것보다 빠르고, 프린트하면 저의 악필을 가려줄 멋진 글씨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글의 깊이가 없어집니다. 제 침대에는 매트리스가 없습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편안함을 주지만, 허리가 좋지 않은 저로서는 순간의 편안함이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래서 매트리스 없이 딱딱한 나무 위에서 잠을 잡니다.
경제, 경영지 ‘오너 매거진’의 발행인 크리스 브로건은 하루에 한가지씩 불편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편하지 않은 사람과 통화도 했습니다. 이렇게 불편한 일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의도적으로 편안함을 깨는 행동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주님 따르는 것도 분명히 불편함을 줍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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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
-삶은 선물이자 과제이다-
얼마전 프란치스코 교황님 강론중 빛과 어둠 사이의 선택에 대한 묵상 내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어둠에 익숙해진, 빛안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빛이 그들을 눈멀게 하였고 그들은 볼 수 없다. 그들은 인간 박쥐와 같다. 그들은 오직 밤 동안만 움직인다. 우리 자신도 죄의 상태에 있을 때 빛을 감당할 수 없는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하여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더쉽다. 빛이 얼굴을 스치면 보기 원하지 않는 것을 빛은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빛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 비록 힘들다 할지라도 영혼의 눈이 빛에 무지하게 되면 더 나쁘다. 많은 사람들의 장애물과 부패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친다. 부패한 이들은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하느님 사랑의 빛이 성령을 통해 우리 삶을 비추도록 하자. 그리고 자문해보자. 나는 빛속에서 살고 있는가 혹은 어둠속에서 살고 있는가? 나는 하느님의 자녀인가 또는 박쥐처럼 살고 있는가?”-
그러니 환한 대낮에도 죄악의 어둠 속에서 영적 박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빛속에서 살고 있는 빛의 자녀인지, 혹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박쥐와 같은 어둠의 자녀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외출하여 활동한다는 자녀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도 생각납니다. 이렇게 박쥐처럼, 어둠 속의 은둔자처럼, 밤의 어둠속에 사는 것이 익숙해지다보면 빛속에서 사는 것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코로나 사태가 무질서한 삶에 제동을 걸면서 밤을, 가정을 찾아 준 듯 하여 고마운 생각도 듭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 빛을 선택하여 빛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또 이와 비슷한 물음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위에 속한 사람인가 아래에 속한 사람인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가 혹은 땅에 속한 사람인가? 참으로 우리처럼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저절로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리하게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스테파노가 예수님처럼 지상에 살지만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이라면 스테파노를 박해하여 죽음에 내몰고 있는 자들은 아래의 땅에 속한 어둠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에 눈먼 박쥐와 같은 어둠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은 이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흡사 빛과 어둠의 싸움같습니다.
완전히 무지에 눈먼 사람들과 빛의 사람 스테파노의 대결같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빛의 사람 스테파노를 당해 낼 수 없자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테파노를 사지에 몰아 넣는 악의 무리, 어둠의 무리들입니다. 마지막 말마디가 빛의 사람 스테파노를 잘 드러냅니다. 이 또한 빛으로 돌아오라는 참으로 강렬한 회개의 표징처럼 생각됩니다.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는 스테파노는 그대로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임을 입증합니다. 어제 우연히 들은 억울하게 고통받고 있는 어느 분에 대해 두둔하던 어느 관상가觀相家의 말도 생각납니다.
“눈빛이 선하지 않습니까?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전형적 선비입니다. 윗분에게 절대 누가 되지 않도록 자기가 온갖 고통을 다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대판 순교자와 같은 의로운 이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사도행전과 같은 대조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들이라면 빵의 기적을 들고 모여든 피상적 사람들은 말 그대로 아래의 땅에 속한 어둠의, 욕망의 사람들입니다.
요즘 좀비란 말이 많이 회자됩니다. 신분과 계급이 사라지고 식욕만 남은 이들을 좀비라한답니다. 그러니 아래의 땅에 속해 어둠의 욕망대로 살다 보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좀비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아래의 땅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래의 땅에 속한 사람들은 ‘빵’을 찾지만 위의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표징’을 찾습니다. 참으로 찾아야 할 1차적 대상은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찾을 때,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 때 비로소 좀비가 안되고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사람으로서 존엄한 품위의 회복일 것입니다.
정말 날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간다면 본래의 참 얼굴이 드러날 것이기에 관상觀相은 전혀 신경 안써도 될 것입니다. 화장도 성형 수술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며칠전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마음이 예쁘니
말라도/뚱뚱해도
작아도/커도
젊어도/늙어도
예쁘다/다 예쁘다”-
마음이 주님을 닮아 예뻐갈수록 저절로 모두가 예뻐질 것이니 외모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이들과 주님과의 문답 내용도 의미심장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며, 따르는 하느님의 일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을 것이며 우리 수도자들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선택의 과제입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이신 분’인 파스카의 예수님을 선택하는 과제입니다. 오늘 본기도와 영성체후 기도가 참 고맙게도 오늘 강론을 요약하며 우리의 소망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의 영약으로 저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옛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위의 하늘에 속한 빛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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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무엇을 먹든 먹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영양을 보충할 수 있겠지만 일시적입니다. 단식을 한다고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위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양을 보충 시켜야 합니다. 음식을 통해서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든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육체를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어야 삽니다. 영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6,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에 관심을 두어봅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간절함에 귀 기울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하시는 말씀은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밥을 먹는 것 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항상 말씀이 먼저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마태4,4) 그리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완성하게 됩니다. 요한 일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지상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천상의 양식이 더 소중한데 그 천상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요한6,29)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인간이 거부할 수 있으니 신앙은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성경에 관해 많이 알고 통성기도를 잘 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특히 전교에 동분서주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서 열성을 부러워하고 말 잘하는 그들을 보며 주눅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으려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왜 그 말씀을 듣기를 주저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은총은 풍부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도 천상의 영원한 생명에는 굼뜬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위안은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헛된 것과, 영신적인 것이 육신적인 것과, 최고의 것과 최저의 것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똑같이 맛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 살면서도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자주 접하고 미사 안에서의 영성체로써 신앙의 건강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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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생명의 빵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25)
군중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배를 타고 빵의 기적이 있던 곳에 왔다가 거기에 주님이 계시지 않자 카파르나움까지 가서 드디어 예수님을 뵙지요. 매우 적극적이고 열성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위해 시간과 수고,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군중이 당신을 찾는 이유를 잘 아시는 예수님의 지적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표징의 진정한 의미에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사실 "빵"은 당장 물리적으로 배를 곯는 이들에게는 실질적 양식이 되겠지만,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재물이나 명예, 권력까지도 의미할 겁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주님을 그토록 간절히 찾는 이유가 썩어 없어질 세속의 환영을 얻기 위함이라면 참 허무하지요. 인간에게 필요한 진정한 양식은 영원까지 이어지는 행복인데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적대자들 앞에 선 스테파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사도 6,10)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가 사심이나 탐욕으로 세속의 양식을 좇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인"(사도 6,15) 것도 이를 증명합니다. 부와 명예의 바벨탑을 아슬아슬 쌓는 자의 얼굴에서는 찾기 힘든 빛입니다.
"권세가들 모여 앉아 저를 헐뜯어도 이 종은 당신 법령을 묵상하나이다."(화답송)
힘 있는 자들이 함부로 자신을 도마 위에 놓고 온갖 모함과 음모로 난도질하는 순간에도 평정을 유치하며 말씀에 머무를 수 있다면 엄청난 내공이 아닐 수 없겠지요. 평소 사람의 평판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꿋꿋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정심일 겁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영성체송)
세상의 양식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다르듯,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세상 양식으로 만족스런 상태를 평화라 착각하지만, 어떤 환난과 고통 앞에서도 우리를 지혜와 성령으로 굳건히 하며 천사의 얼굴처럼 순수하게 만드는 힘은 영원한 양식에서 옵니다.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 묵상을 읽는 벗님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찾는 분입니다. 아니라면 재미나고 감동적인 글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굳이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두드리셨을 리 없겠지요. 벗님은 누구를 찾아서 오셨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주시기를 원하시나요? 주님을 찾아 헤매다 만난 군중이 되어 이 질문에 깊이깊이 머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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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희망과 기쁨이라는 생명력은?
성녀는 직관에서 영혼의 목소리를 듣고 전한다. “내가 머물 곳인 나의 육체여! 네 안에 머물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영혼은 육체 안에 기뻐한다. 기쁨은 우리의 생명력, 자연의 힘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봄에 초록이 움트는 만물과 함께 우리의 영혼도 기쁨으로 뛰어오를 (Spring,봄, 우리말로 스프링-튀어 오름, )것이다.
겉으로만 기쁨이 아니고, 우리 안에 내재된 생명력을 통해 기쁨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준다. 우리 영혼 밑바닥에 항상 준비된 자연의 힘을, 기쁨을 질적으로 충만하게 채울 것이다. 예 : 대자연, 아름다움, 아름다운 음악에 도취되어 기쁨을 누린다면, 사람과의 만남을 기쁨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 일깨워졌음을 의미한다. 기쁨은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한다.
-성녀 힐데가르트의 치유 법,「치유」에서
♣우리가 다시금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 세상과 마주하게 되면, 기쁨이 우리의 의식意識에 드러난다. 이 세상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우리의 감각을 세상을 향해 최대한 열어야 한다. 우리의 감각이 기쁨을 알아보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예컨대, 좋은 음식의 맛을 누릴 때 기쁨을 누린다. 유용한 생필품도 육체와 영혼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성녀는 잡곡이 기쁨을 주는 생필품이었다. 절제와 수양을 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예 : 케이크 먹는 순간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나, 나 자신을 제어(절제)할 수 없다면, 즐거움도 기쁨도 없고 배탈이 나 짜증을 낼 것이다.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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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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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한편, “일용할 양식”마저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식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밥그릇만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체 어떤 양식에 허기져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5)
그렇습니다.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하느님의 일”이란 단어를 만납니다. 여기서,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일’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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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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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아침묵상)
https://youtu.be/tPjQ65xfxuQ
찬미예수님!
아침묵상 유투브에서 자연 풍경과 함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드립니다!
https://youtu.be/IYFiToGAc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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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 27)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시 살리시는
주님께서 다시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당신 생명을
떼어 우리에게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려오시어
말씀이 되시고
빵이 되십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시며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썩어 없어질
생명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닙니다.
생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새로워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어둠을 비추는
생명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 생명을
사람이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아 모시는
감사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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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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