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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신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란 말, 곧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체험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란 뜻이다.
인간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초월적 존재를 믿는 방식은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겪는 피할 수 없는 현실, 곧 죽음과 고통, 병과 인간적 시련 속에서 해방되고 싶은 종교적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성장해왔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구원체험, 즉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고통으로부터의 극복, 병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삶이 역사 속에서 발생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2천년 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사신 나자렛 사람 예수가 바로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명백히 드러났음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그리스도 신앙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체험을 전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일컫는다. 역사의 실존 인물이었던 나자렛 사람 예수 안에서 거룩한 신비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인생의 의미임을 고백하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하지만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체험해야할 중요한 선결조건이 있다.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맛보는 것이다.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을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 안에서 느끼는 일이다. 흔히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면서 쉽게 놓치는 부분이 있다면 머리로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교회 생활을 통해 신앙이 주는 기쁨과 평화는 누리며 살면서도 정작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는 신앙 체험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우리 시대는 ‘실천적 무신론’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선언하던 19세기말의 ‘무신론(無神論)’이
인간이 이루어 놓은 기술혁명의 교만과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류 역사의 고통 속에서 신의 부재(不在)를 체험한 인류의 탄원이었다면, 오늘날은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신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체험되지 않아 사실상 하느님 없는 세상, 하느님 없이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문제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생활 속에서 하느님 마음을 체험할 기회를 스스로 만들지 않는 한 하느님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잘 갖지 못한다.
반복적인 미사 참례와 고해 성사는 신자들이 미사의 풍요로움과 성체성사의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단순한 종교적 예식으로 전락하고,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도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의 설교 능력에 따라 제한적으로 맛볼 뿐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고해성사의 은총 역시 그 은총에 대한 진지한 체험 없이는 단순히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근래 들어 본당이나 교구에서 신자 재교육과 신앙 체험을 위해 다양한 강좌와 재교육 프로그램, 성경공부나 성령세미나, 영적 치유를 위한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지만, 사실 현장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 하느님 체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일부 영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특권층에 제한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과거처럼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시대를 살다보니 근래에는 영적 서비스마저도 삶의 여유와 여건이 맞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처럼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교회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특별한 영적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통애(通愛)를 내 삶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통애(通愛)란 말은 아프도록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선물처럼 찾아온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사랑이 언제나 행복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픔과 시련의 늪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기도 한다. ‘아프도록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참된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사랑은 때로 ‘눈물의 씨앗’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느님은 인류와 당신 피조물의 세계를 사랑하시지만, 때로 눈물이 날정도록 아프게 사랑하신다. 창조주이시면서도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 질서와 인간을 지배하거나 종속하려 하지 않으시고 당신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시도록 초대하신다.
대자연의 질서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질서 지워진 것처럼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 역시 태초의 창조적 질서에 맞게 살도록 초대되고 있다. 문제는 인간과 친교를 맺으시는 하느님께서 아프도록 사랑하시는 방식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이란 존재를 생각하면 대게 엄위하고 초월적이며 신적 거룩함 때문에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역시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만물을 섭리하시는 절대적 초월자임을 유대교의 절대적 유일 신관으로부터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인격적 절대신의 모습으로만 체험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때로 인간을 위해 당신의 완전성을 포기하시는 ‘사랑’의 본질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주신다.
하느님이 아프도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쉽게 상상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느님이 스스로 인간 고통과 죽음의 현실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다시는 죽음과 고통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본래의 모습을 인간이 잃지 않도록 초대해주신다는 믿음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신관에 속한다.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프도록 절절한 사랑을 체험해온 종교이고, 그 점을 어떤 종교보다도 더 강하게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사랑이란 그저 감정적으로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나약하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자기 양여, 혹은 자기 비움을 통하여 상대방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자유의 최고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인격적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가장 큰 고통과 사랑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체험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통애를 맛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놀라운 사랑,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 5)라는 시편 저자의 기도처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안에서 발견한다.
복음서에 펼쳐져 있는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은 모두 이러한 하느님의 통애에 대한 체험을 언어화한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속에서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사랑, 그야말로 자기를 버림으로써 한 인간을 구원에로 초대하는 사랑의 전형이자 원형을 맛보게 된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바로 그런 하느님의 인간의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아프도록 사랑한 하느님의 마음을 예수님 안에서 깨달은 사람들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무엇이 먼저 필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막연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가 결코 내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면서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고, 달라야 하는 점이기도 하다.
아프도록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1요한 4, 8)이다. 사랑 때문에 울고, 사랑 때문에 웃고, 사랑 때문에 살아가야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2 – 예수님의 한(恨)의 인생을 맛보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내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을 향한 영혼의 갈망을 맛보는 일이 먼저이다.
신비이자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내 자신이 부름 받고 있다는 확신, 한 없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의 체험이 중요하다. 한 마디로 종교적 삶에 대한 갈망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요원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 신앙은 나자렛 사람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이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하느님, 하지만 분명히 내 인생을 이끌고 있는 하느님의 신비를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체험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 1)
요한 사도는 생생하게, 때로는 감격적으로 예수님과의 만남과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 구원의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생명의 말씀이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고, 우리가 살아온 이유이자 살아갈 이유라면, 그 생명이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생생하고도 감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보이셨다는 확신이 선포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첫 증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읽는 복음서의 이야기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찾아볼 수 있겠다.
일단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담은 역사서나 전기가 아니다. 복음저자들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구원 역사를 체험한 초기 그리스도 신앙의 증거자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것과 같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 31) 한마디로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갈망해야 하는 지를 느끼고 체험하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 시대의 눈으로 읽는 것과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복음서를 읽은 느낌과는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엄연히 다른 역사적 배경과 삶의 환경, 문화적 가치들이 다르기에 복음저자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할 때 다분히 독자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저술했을 것이라는 점을 의식할 수 있겠다.
물론 복음서는 성령의 감도에 의해 적혀진 글이기에 복음서를 읽는 그 자체로 은총의 체험이 된다. 가령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 가운데에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 온 인류에게 공통된 진리의 메시지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말씀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 23)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 10)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 22)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다.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죄와 병,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선언되는 말씀의 은사는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복음서를 읽을 때 가령 예수님이 주변 인물들과 대화하는 방식이나 기적을 일으키시는 상황들은 당대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도록 성경공부의 필요성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점은 복음서의 상황을 자신의 상황과 견주어 묵상하는 것이 복음의 깊이를 맛보는 길이 된다.
과연 복음서를 읽을 때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의 참 맛을 볼 것이며, 그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예수님의 인격의 핵심을 우리들의 삶의 언어로 바꾸어내는 연습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 우리의 심성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인 한(恨)이란 단어를 되새겨볼 수 있겠다.
‘한’이란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한 맺힘’, ‘한스러움’. ‘한탄’과 같이 마음의 뿌리가 막혀 있는 상태인 한(恨)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한마음’, ‘한숨’ 등과 같이 크고 하나를 뜻하는 의미도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 인생의 여정이 이 한 맺힘으로부터 한 풀이, 한 숨으로 이어지는 삶의 역동성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한계, 곧 죽음과 죽음을 느끼게 하는 육체적 고통과 시련, 그리고 마음의 끝단이 심장을 꿰뚫는 것과 같은 상처로 얼룩지어진 삶의 무게를 느낀다. 한 마디로 한 많은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이다.
하지만 이런 한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순간은 이 한(恨) 맺힘을 풀어내려고 하는 한(一, 大)의 초월을 감행한다는 사실이다.
쉬운 말로 누구나 삶의 막힘은 뚫고자 하지 그냥 막힌 채로 살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묶인 것은 풀고, 맺힌 것은 치유하고, 억눌린 곳에서 해방을 찾는 삶. 그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진수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마태 4, 18)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이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에서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 예언된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분명히 깨달은 복음저자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 복음서 속에서 그런 기쁜 소식과 해방을 체험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을 만난 수많은 복음서의 인물들이 체험한 하느님을 나 역시 예수님 안에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복음서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난 복음서의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보자.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 헐벗고 굶주리고, 인생의 변두리에 머문 사람들이다. 병자, 과부, 고아, 세리, 가난한 이들, 창녀, 이방인 등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강조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 하느님 나라를 감히 생각할 수 없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들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통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들의 인생을 가두고 있는 한(恨)의 인생을 깊이 느끼고, 그 안에서 한탄과 탄식 속에서 체념하며 원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맺힌 한을 넘어 치유와 해방, 일치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원대한, 한(一)의 인생을 꿈꿨던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그 한(恨)의 인생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자신의 한을 더 넓고 심오하며 모든 것을 일치시키고 화해시켜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점은 그런 실존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예수님이 간직한 죽음의 한(恨)에서 부활의 한(一)으로 넘어갈 마음의 준비를 늘 하면서 살고 있는 지 묻는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3 – 예수 부활의 신비를 살기
요즘은 ‘웰빙(well-being)’이 대세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중요한 목표란 말이다. 세상에서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의 전통적인 구조가 여전히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현실 세상은 달라 보인다.
착하게 살면 어리석고 늘 손해만 보는 것 같고, 조금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현실적인 축복과 행복을 더 누리는 것 같아 쓴맛을 느끼는 세상이니 말이다.
종교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는 맛, 사는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 궁극적인 힘은 현실적인 고통과 죽음의 벽을 넘지 못하는 인간에게 분명히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음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이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사는 지, 그리고 어떻게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즉 죽음의 순간에 엷은 미소라도 지으면서 ‘참, 그래도 한 인생 잘 살았다.“라고 말하면서 후회 없이 감사하며 눈을 감을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한 마디로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웰다잉(well-dying)‘, 잘 죽는 길이 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살고 죽는 문제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지금 행복해지기 위함이겠다. 하지만 언젠가 맞이할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잘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도 열심히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생을 잘 마치는 기준은 뭘까?
돈을 많이 벌어서 남보다 떵떵거리며 살고, 그래서 자손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후손들이 내 이름을 잘 기억해서 제사도 잘 치러주고, 묘자리도 잘 관리해줄 것을 기대할까? 자식들이 화목하게 살고, 후손들이 성공해서 성공한 인생이란 말을 자손들에게 듣고 싶은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꿈꾸는 재벌들의 삶도 요즘 언론을 보면 그렇게 행복한 인생 결말을 맞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살고 죽는 문제를 풀어내는 또 다른 해법이 있다. 이미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하느님의 통애(通愛)를 느끼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恨)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살지 않는 한 얻지 못할 은총이다.
‘부활(復活)’,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모욕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셨다.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떠났으며, 그분께 희망을 가졌던 모든 이들은 참담한 결과에 망연자실했다.
다락방에 모여 앞날을 두려움에 떨며 걱정하던 제자들의 마음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와 용서를 체험한 이들이 결국 어쩔 수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한 인간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복음서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를 살고 있는 초기 신자들과 증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이미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했고, 그토록 오랫동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오셨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이미 하느님의 뜻임을,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사 50, 4-11)의 모습 속에서 예고된 것임을 깨달았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도 본 적이 없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분명히 살아생전의 예수님과 같은 분을 만났지만, 동시에 부활하신 그분의 육신은 이제까지 세상에서 체험했던 그런 몸이 아니었다.
더 이상 고통과 죽음으로 신음할 그런 육신이 아닌 불멸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이 잠겨진 다락방으로 들어오셔서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 안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내어 주실 때,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다시 파견하실 때,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분명히 같은 몸이었지만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셨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들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코린전 15, 51-53)
썩지 않는 몸.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몸의 고통과 육신의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운 몸, 어떠한 세상의 헛된 망상과 유혹, 두려움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몸,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마주보며 이야기 나누셨던 에덴동산의 최초의 인류의 모습으로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바로 그 몸을 뜻한다. 그 몸은 썩어 없어지지 않고 변화될 것이란 점이 중요하다. 그것도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인생을 살다보면 살고 죽는 문제가 순식간이란 생각을 한 번쯤을 해봤을 것이다. 내 앞에서 이야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늘 함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저 세상 사람이 되고,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다가도 한 순간 이 고통의 깊이를 박차고 다시 일어나는 회심의 순간도 있다.
사람이 극단을 체험하면 더 이상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내 신념의 확고함 앞에서는 그 어떤 협박과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 인간이다. 순교자들이나 신앙의 수많은 증거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과 용서를 선포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부활은 분명히 하나의 신비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 안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완전한 사건이었지만, 그 사건은 우리 인간의 죽음을 넘어서 일어날 희망의 사건에 대한 가장 강력한 표징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죽음이 이 세상의 마지막 말이 아님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확신한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고백의 중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활의 신비를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는 것이 잘 사는 것만이 아님을 말한다. 잘 살기 위해서는 잘 죽는 연습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살다보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인생이 있고, 죽어도 늘 우리 맘에 남아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적어도 신앙의 언어로는 삶과 죽음은 생물학적인 과정을 넘어선다.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고, 죽지 못해 살 수밖에 없는 죽은 인생도 있다. 비록 죽었지만 그의 삶과 행적이 길이 남아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진을 간직하는 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표징을 마음에 간직하고 평생을 살아가는 일.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던져주는 작은 영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맛본다.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다고.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모순과 불의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승리하신다는 확신. 비록 지금은 악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날에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듯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완성하실 날 우리들의 삶을 심판해주실 날이 올 것이란 확신. 그래서 지금 순간을 영원처럼 감사하며, 기뻐하며,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 1 – 성사(聖事)에 맛들이기
오늘날을 ‘글로벌(Global) 시대’란 말들을 한다. 과거처럼 지역과 언어, 문화와 풍습이 서로 달라도 그 다름이 차별화를 뜻하지 않고 풍요로운 공존을 이끌어 내는 세상이란 말이다.
물론 그 뜻은 좀 다르지만 가톨릭 신앙은 ‘글로벌 신앙’에 속한다. 어떤 지역, 문화, 인종과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토대로 신앙을 이해하는 종교가 바로 가톨릭(catholic) 신앙이란 뜻이다.
이 보편성 덕분에 가톨릭교회는 2천년을 많은 편견과 박해의 시간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인간들의 영혼의 울림을 느끼고 표현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로 만들어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톨릭 신자로서 느낄 수 있는 글로벌 신앙의 특징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미사에 참석해서 같은 성체를 모실 수 있다는 동질감일 듯싶다.
비록 언어는 달라도 가톨릭 신자라면 그 미사를 통해 얻는 은총이 같다는 것도 느낀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성체를 나눠준다는 사실이 때로 미사에 참석한 개신교 신자들이나 예비신자들에게는 ‘왕따’ 체험을 갖게 해주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가톨릭 신자로서 느끼는 자부심 중에 하나는 미사에 참석하면 당당하게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자격과 영광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체를 모시는 특권을 받는 가톨릭 신자의 영예가 언제부터인지 부담스런 일이 되어버렸다. 중세의 엄격한 신심을 강조하던 때에는 성체의 존귀함 때문에 성체를 함부로 모실 수도 없었고, 일생에 단 한 번의 성체만을 모시던 때도 있었다.
특히 죄의 상태에서 성체를 모셨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성체신심이 강조되어 성체의 은총보다는 자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적도 있다.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잘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성체신앙, 곧 누룩 없는 빵의 표징이 사제의 축성을 통하여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믿음은 가톨릭 신앙에 있어서 본질에 속한다. “교회는 성체성사롤 산다.”라는 말이 있듯이 성체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가장 완전한 형태이고, 다른 성사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신자라면 누구나 주일에 미사를 참석할 의무를 갖고, 성체를 합당히 모시기 위해서는 대죄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봐야 성체를 모실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미사 안에서만 성체를 모실 수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과거에 주일 미사의 중요성을 주로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기회로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성체신심이 보편화되면서 미사 참석 자체에 의미를 두다보니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는 기쁨보다는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를 채우는 것으로 미사의 의미를 두기 시작한 점도 없지 않다.
성체는 가톨릭 신앙이 강조하는 성사적 표징의 으뜸에 속한다. 여기서 ‘성사(聖事)’란 말 그대로 ‘하느님의 거룩한 사건’을 뜻한다. 이 세상에서 신비처럼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거룩함으로 초대해주는 사건. 그건 바로 하느님을 직접 만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마주 뵐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상을 초월해계신 하느님을 인간이 어떻게 감히 직접 만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초월적인 하느님을 세상 안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통로를 알고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초월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도요한의 말씀처럼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1요한 1, 1)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과의 친교이다. 이미 초기 교회의 증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생생한 얼굴을 읽어냈다.
그분이야말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죄와 죽음을 당신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겨내신 영광의 주님이심을 고백한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 9)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 말씀 속에서 (루카 15장),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마태 18, 12-14),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모습 안에서(요한 8, 1-11)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한다.
가톨릭교회는 역사 안에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증거해야할 특별한 성사적 지위를 갖는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자 도구”(교회헌장 1항)라고 강조하면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느님과의 화해와 새로운 계약으로 맺어진 하느님 백성의 완전한 일치를 드러내는 표징이자 도구임을 밝혔다.
그야말로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기 위해 파견된 종으로서의 소명을 가톨릭 신앙은 철저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는 바로 이 거룩한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신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해주는 은총의 가지적인 표징들이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삶의 구체적인 여정에서 당신의 구원과 평화를 주시는 중요한 통로들이라는 말이다.
세례성사는 ‘물’이라는 표징을 통해 죄의 씻김과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남을 전해준다. 견진성사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세상 속에서 참된 믿음을 지키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 받는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인간 자유의 방종으로 생긴 단절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하느님과 화해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백성 상호 간에 맺어진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게 한 잘못된 행위들로부터 회심을 일으켜주는 화해와 치유의 성사이기도 하다.
병이 난 이들에게 닥치는 신앙의 위기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한 병자성사는 기름을 이마와 손에 발라줌으로써 세례 때 이마에 받은 인호의 의미를 더 강하게 새겨주고, 손을 통해 하느님 창조에 동참하는 능력을 회복시켜줄 것을 청하는 것이다.
혼인성사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능력을 서로 선사하는 부부 사랑을 통하여 한 가정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장 기초 단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부부는 사랑과 신뢰의 표징으로 반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신뢰를 약속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그 신비를 부부사랑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성품성사는 하느님 백성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을 교회에 봉헌한 사제들에게 특별한 축성의 은총을 전하여 신자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고 그들과 영적 친교를 나누며 교회공동체를 성장시키는 특별한 은사를 전해준다. 특히 주교의 안수와 기도는 성품성사의 중요한 표징이기도 하다.
이렇듯 가톨릭 신앙은 성사의 은총으로 가득차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그분의 사랑의 신비를 우리가 볼 수 있는 표징들을 통하여 가톨릭교회는 끊임없이 신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스스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성사가 되어야 한다. 거룩함과 단일함, 보편적이면서도 역사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전통을 지켜가는 가톨릭교회야말로 성사라는 은총의 보고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신자는 먼저 성사에 맛 들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부분 신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는 이 성사들 가운데 으뜸을 차지한다.
두 성사는 가톨릭 신앙의 보편성과 역사성을 잘 표현해주는 성사이다. 즉 가톨릭교회가 전 세계에서 같은 미사 전례를 통하여 단일한 형태로 성체성사의 표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그렇다.
또한 시대와 문화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죄와 용서의 체험을 가톨릭 신앙은 인격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고해성사의 표징을 통해서 참된 치유와 해방의 체험을 전해준다. 우리가 참으로 가톨릭 신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살려면 이 두 성사에 맛을 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 두 성사야말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자, 그 어떤 신앙에서도 볼 수 없는 가톨릭교회만이 간직한 고유하면서도 독특한 신앙의 원리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 2 – ‘성당 스타일’로 살기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노래가 있다. 싸이라는 가수의 ‘강남스타일’이다.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사람들은 단순한 리듬과 경쾌한 멜로디, 그리고 누구나 유쾌하게 보면서 따라할 수 있는 형태의 가벼운 춤이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SNS(Social Networking Service)을 통한 개인 간의 실시간 소통 문화가 자신의 관심을 타인과 공유하는 독특한 문화의 덕을 본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노래의 성공은 ‘스타일’이란 단어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 보다는 자기가 따라하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자신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가장 가깝게는 부모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들, 가령 식탁문화와 언어생활, 옷을 입고, 집을 꾸미고 정리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기 위한 심리적 교감을 중요시 한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면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 여러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인간관계에서 늘 우리는 내 자신의 스타일보다는 남들과의 관계에서 보여 지는 스타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유행과 같이 흘러가는 대중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민감하다. 청소년들은 유명 연예인이나 가수들의 의상과 춤, 말투나 행동들을 따라하고, 여성들은 당대의 패션과 소품들의 다양한 유행에 민감하다.
계절이 바뀌면 옷이 가득 찬 옷장을 열면서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대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여성이 남성보다는 스타일을 중요시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남성들이 그런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남성들 역시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하거나, 직장에서 자신들만이 가진 고유한 삶의 방식들이 있다. 대화의 방식이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일종의 사회적 약속과 같은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 공감한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도 어떤 ‘스타일’이 있는 것일까? 분명히 존재한다. 신앙생활이란 한편으로는 시대와 문화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적인 문제를 하느님 앞에서 풀어내는 신뢰에 찬 인격적 결단이라는 점에서 다를 수 없겠지만, 신앙을 일상의 삶에서 풀어가는 과정에는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다.
이미 오랫동안 서구 유럽인들의 삶의 중심에 있던 ‘성당’은 그들이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중심지였다. 그들은 주일이면 따로 준비된 옷을 입고 미사에 참석하고, 주일 헌금을 내며, 공동체와 친교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온 이들과 친교를 나눈다.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 생선을 먹고, 성당을 지날 때면 고개를 숙여 감실을 향해 절을 하고, 삼종이 울리면 삼종기도를 바친다. 거리에서 사제들을 만나면 예의를 표하고, 큰 죄를 지었으면 어김없이 고해성사를 보며 죄를 씻는다.
일년 중에 가장 중요한 성인들의 축제가 오면 아이들과 함께 거리를 나가 축제를 즐기며, 부활절과 성탄절 즈음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지킨다. 대림시기에는 불야성을 이룬 성탄절 시장에서 선물을 사서 성탄절에 가족들과 함께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순시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재계의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 카니발을 열어 성대하게 즐기고 사순절을 시작한다.
물론 이런 가톨릭의 고유관습이 서구 유럽에서 점차 사라지고, 그 신앙적 의미가 세속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젊은 층에게 가톨릭교회의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신앙 세계가 황폐해지고 있는 유럽의 현실을 생각하면 왜 교황님이 ‘신앙의 해’를 선포 했는지 이해가 간다.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떨까? 나는 어떤 스타일로 가톨릭 신앙을 살고 있는가?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단순한 성당 스타일로 산다. 주일에 자기가 편한 시간에 미사에 참석하고, 행여 신부님과 마주칠까 혹은 성당에서 봉사하라고 붙잡을까 두려운지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성당에서 별별 행사를 해도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며 충실하게(?) 주일의 의무만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일 미사에 빠졌다고 영성체를 못할까봐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보는 이들은 그래도 양반이다.
미사에 빠져도 주일의 의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다. 성당에 오래 다녔어도 성체조배를 제대로 해본 사람도 없고, 묵상기도가 뭔지도 모르고, 모임에서 개인적인 통성기도를 바치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그래도 천주교 신자라는 자부심은 강하다. 묵주반지와 묵주를 들고 다니는 열심함(?)은 물론이거니와 용감하게 식당에서 성호를 긋는 이들도 많다.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기위해서인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감추고 선행을 하는 이들도 많다.
어쩌면 그것이 반전 효과를 일으키는 지도 모르고, 정 반대로 나의 행실 때문에 성당 다니는 사람들이 욕을 먹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성당스타일’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내 편의대로 신앙생활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도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인지,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체험이 부족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기도생활이 익숙하지 않고, 그저 미사 참석해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의 성호를 긋고 기도하며, 식사전후에 기도하고, 어렵고 힘들 때 화살기도를 바치며, 눈에 잘 띄는 곳에 성경구절이나 좋은 기도문을 걸어두고 늘 주님께 의탁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도우려는 선한 의지를 갖고, 성경책에 먼지가 쌓이도록 놓아두지 않고 매일 미사 책에 나오는 그날의 독서와 복음이라도 읽을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그립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회적 행태들을 볼 때 정의감을 갖고, 사회 복지, 정의 평화, 환경 문제와 같은 사회 교리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할 말은 하고, 최소한 함께 행동은 못해도 반대는 하지 않는 그런 신자로서의 동질감도 가졌으면 좋겠다.
사제들이 비록 부족하고 인격적 결함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존경심과 그들 없이는 미사도 성체성사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주면서 기도로서 회심하고 더 신자들을 향해 전념하도록 사랑해주는 성당 스타일도 필요하다.
누가 뭐래도 성당스타일은 ‘우리 신부님’, ‘우리 수녀님’이란 사랑스런 존재를 떠올리고, 성모님의 사랑과 성인성녀들의 신앙을 본받는 신심이 중요하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좋겠다.
레지오 활동을 하든, 본당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든 중요한 것은 내 신앙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신심을 키워가고,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좋은 관습들과 전례들, 성체강복, 성시간, 십자가의 길, 금육과 단식재, 성체조배, 묵주기도, 연도와 같은 전통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노력도 필요할 듯싶다.
특히 11월 위령성월이면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며 성인들의 통공의 교리를 살아가고, 미사의 은총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생미사나 연옥영혼들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하는 가톨릭의 전통도 지켰으면 좋겠다.
우리가 나름대로의 삶의 스타일이 있듯이, 내가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할 ‘성당스타일’을 되찾을 때가 된 것 같다. 그것이 성당에서 누리는 기쁨을 넘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복,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믿음의 라이프스타일로 성장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다.
신자로 산다는 것 3 – 세상 속 빛과 소금되기
얼마 전 어떤 기사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한국인들 가운데 만일 종교를 갖게 된다면 어떤 종교를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천주교가 꽤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을 보았다.
주로 40대와 50대가 가장 선호하는 종교로 선정되었는데, 눈여겨 볼 점은 20-30대의 천주교 선호도는 지극히 낮았다는 점이다. 본당 신부로 살면서도 느끼는 점이지만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의 구성 비율이 40대와 50대가 주축이고,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 역시 이들 세대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본당 신부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일이겠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청소년 사목과 청년 사목의 현실이 생각보다 막막하다는 점에도 동의할 듯싶다.
왜 천주교가 40대와 50대에서 주목을 받는가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겠다 싶다. 지금의 40대와 50대는 대부분 한국 역사 속에서 전후 세대에 속한다. 이른바 베이비붐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58년생부터 63년생에 이르는 ‘베이비부머’들이 이 세대의 중심에 서있다.
요즘 이들의 은퇴연령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이 부모님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본받아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달라진 사회문화 때문에 적응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성들은 아버지들의 삶의 가치관을 본받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형태로 늘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직장동료들과의 술과 운동 정도로 생을 보내다보니 가족들과의 소통문제나 부부관계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생기는 모양이다.
열심히 살았는데 막상 은퇴하고 보니 할 일이 없고, 무엇하나 인생의 의미를 채워갈 것들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에 여성들은 육아와 가사일로 결혼 후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니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여생을 즐길 새도 별로 없다.
남편과의 관계나 자신이 젊은 시절 꿈 꿔왔던 인생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자괴감도 작지 않다. 더욱이 급변하는 사회구조가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자기계발을 부추기다보니 성실하게 집을 지키는 여성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 때문에 집 밖을 나서기가 일수다. 이 세대의 한국인들이 겪을 영적 공허감이란 족히 상상이 간다.
본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부류로 나눠진다. 한 부류는 성당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좋거나 자신들이 성당에서 맡은 일에 소명감을 갖고 열심히 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신앙은 삶의 힘이지만, 동시에 성당은 제2의 삶의 자리이다.
가정에서 얻지 못하는 행복과 평화를 그나마 성당에서라도 얻고 싶어 하는 영적 욕구가 숨겨져 있다. 이들은 신앙생활의 본질보다는 성당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얻어지는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본당신부나 수녀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의 존재감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자존심 상하는 일에는 참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상처를 잘 받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는 유형에도 속한다.
다른 한 부류는 성당에서 조용히 자신의 신앙만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정말 신심이 좋아서 미사 시작 전에 일찍 와서 묵상과 기도를 바치고, 조용히 성체조배실을 찾기도 하고, 성모님 앞에서 묵주기도를 홀로 바치기도 한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행여 신부의 눈에 띨까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가기가 일수고, 본당에서 어떤 단체나 활동을 피하면서 자기만의 신앙에 몰두하는 유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 가운데에는 이미 이전에 본당 활동의 경험이 있거나 봉사자로서 열정적으로 살다가 이사를 하면서 속칭 ‘잠수’를 탄 이들도 있고, 성당에서 좋지 않은 인간관계로 상처를 받아 더 이상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아 겨우 의무적으로 주일미사만 참석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신자들 가운데에는 활동과 기도를 조화롭게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람들의 말에 부하뇌동하지 않고, 신부 수녀를 흉보는 일에 동참하지 않으며, 자신의 힘이 꼭 필요한 곳에서 말없이 봉사하고, 늘 겸손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다.
가끔 그들을 본당에서 마주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그래도 하느님이 좋아서 그분의 은총 덕분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적 평균의식이 개신교인들처럼 열정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열정이 때로 왜곡되고 자기중심적일 때 신앙은 보편적이지 못하고, 자기아집과 편견에 빠지기 쉽다.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 열정이 좀처럼 커지지 않는 이유는 가톨릭이 생활 속 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열렬히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야말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는 생각이 틀리지는 않겠지만, 자기 생활 현장에서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고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이중적인 삶은 절대로 가톨릭이 강조하는 복음적 삶이 될 수 없다.
가톨릭 신앙은 언제나 우리가 사는 땅에 발을 딛고 하느님을 향할 것을 요청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시고 ‘보시니 좋더라.’(창세 1, 4)하신 것처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말씀의 육화의 신비에서처럼(요한 1, 14 참조), 신앙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세상에 숨겨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순례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의 삶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 마을 공동체와 국가공동체와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피난처’가 아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몸담고 있는 교회는 신앙 공동체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세상의 혼란과 어두움을 벗어나 평화와 안정을 찾기 위한 장소에 그치지 않고, 더 큰 교회인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신앙의 못자리’와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가정이 가장 작은 교회이자, 기초공동체라는 말을 쓴다.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공동체의 모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은 그 의미가 퇴색하고 있지만 마을 공동체란 이름으로 지역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신앙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삶의 체험들을 나누는 기초공동체 활성화을 강조하는 이유도 같다.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면 우리가 성당을 다니는 이유는 자기만족과 영적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체험함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와 기쁨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고, 교회 생활을 꾸준히 하는 것에 대해서도 피로감을 많이 느끼는 것은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신자들에게 영적인 충전소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현대 사회 속에서 영적 공허감이 늘어가고 있는 40대와 50대 이상의 세대일수록 그 욕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젊은 세대들에게 가톨릭교회가 매력을 주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연구와 노력으로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겪는 시대적 아픔을 교회가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이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와 영적 재충전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제로 살면서도 내가 사제로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주어진 미사와 성사를 습관처럼 해내고 그 이외의 삶은 자신만의 삶으로 채워가는 많은 사제들의 영적 공허감과 사목적 무력감도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자기발견에 커다란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구조상 사제들의 열정이 곧바로 신자들의 열정으로 이어지는 특성을 생각하면 신자들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길 바라는 마음처럼 사제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소명을 하느님께 바치는데 더 큰 은총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영적 재충전의 시간들이 많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성직자들이 열정을 갖고 살 수 있도록 신자들의 격려와 기도가 필요하고,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삶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노력도 필요할 듯싶다.
하느님의 은총 아래 사는 신앙,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고, 기도하며 기뻐하는 삶.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서로 소통하는 교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이 되는 그런 가톨릭교회를 기대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찾는 신앙생활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