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기간 중 이들에게있어 또 한차례 밤잠을 설치게했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해에도 유난히 많은 양의비가 내겨 한강유역은 장마때마다 비상이엇다. 물난리에대한 걱정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같은 해 또다른 더 큰 걱정이었는데 이때는 아들이 전방 군복무를 하고있던때였다. 1996년 9월18일 강릉 앞바다에 나타난 북한의 잠수함으로 인해 전 군에 `진돗개1호가`발령되고 강릉으로 향했다. 20여 명의 공비와 교전 끝에 한 명이 생포되고 모두 사살되었다. 대북 쌀 지원을 한 지 1년도 채 안된 시기여서 이에대한 분노가 주를 이루었다. 마침 군복무중이던 아들의 안부가 걱정되자 마음을 조이면서 상황을 지켜보았으며 교전과정에서 아군의 전사자가 속출하면서 명단이 공개 되었으나 전사자 명단은 물론 부상자 명단에도 나오지 않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도 공비들은 모두 소탕되었고 한명이 생포되면서 공비침투로 인한 교전은 일단락되었다.
"정말 무사한가요?"
"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주재단이 완공되면서 개봉동시대를 마감하고 파주로 보금자리를 이전하고 에덴식구들도 꾸준히 증가하였다. 재단이 완공되던 1998년 8월6일에서 12일에 걸쳐 서울과 경기북부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특히 한강과 마주해 있는 에덴복지재단 건설현장 인부들은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무너지지 않게 동여매도록 하게...`
1987년 수마의 악몽이 떠오르기도 했으니 당시의 집중호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같은난관 속에서도 복지재단은 완공되었다. 대학 후배이자 21년째 자원봉사를 해 온 한 교회집사는 정덕환 이사장님이 비닐봉투의 원료를 구하지 못해 대한유화(주)나 호남석유화학(주)를 찾아가 협조를 호소하기도 하고 대출을 받기 위해 금융기관을 찾아다녔지만 문전박대를 당하던 일, 방송국을 찾아가 장애인 재활 근로의 작업장 모델로 개척하고있는 분을취재해 달라고 부탁하던 일,사회복지법인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해 서울 특별시청 부시장을 만났던 일,제품 구매,지원금을 배정받기 위해 구청장, 국회 보건복지 분과위 간사를 찾아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고 회고하였다. 나사렛대학에서 재활복지학 과정을 마치고 이듬해모교에서 졸업논문을 발표하여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것으로 제1회 연세사회복지 대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주 선교센터가 완공을 앞둔 1998년에 정덕환 원장은 학업에대한 미련이 남아 재활과 복지에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나사렛대학에 등록하였다. 재활복지의 선두주자라 불리는 나사렛대학에는 아들 딸 뻘되는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듣는 게 서먹하기도 했으나 끝까지 하지 못했던 배움의 길을 가기 위해 만학도의 뜻을 이루었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있었다.복지학은 자신에게 폭 넓은 복지제도를 마련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동생이나 또래로 보이는 교수를 두고 귀담아 들으면서 중요한 내용을 매모해두기도 하고 경청하였다. 때로는 교직원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도 했으나 굳이 학생식당을 이용하겠다며 자신의 신분을 구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