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로 세 가지 요소 얘기는 마무리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식론은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 그리고 그 사이의 반영인 인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수 보살의 후기 저작으로 알려진 회쟁론의 14번 게송에서는 구사론자의 입을 빌려, 이와 같은 인식론의 세 가지 요소는 그것을 부정할 때도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로 그 경우에,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는 대상과 그것의 이해하는 자와 부정과 부정하는 대상과 부정하는 자, 그 여섯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이제론을 전면에 내건 중론 제24품 사성제에 대한 고찰에도 이와 같은 인식의 3대 요소에 대한 언급이 존재한다.
"(그와 같은 견해는) 과와 연 자체들과 행위자와 행위와 행위의 대상과 생기는 것과 사라지는 것과 그 과도 또한 훼손한다."
이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교 인식론의 근간이 바로 오온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인식 대상인 색을 파악하는 [인식 주체인 식]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달라이 라마의 법문 가운데 등장하는 티벳어 'la yang', 즉 '~조차도'가 뜻하는 바는 인식 주체도 연기적인 존재임을 극도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첫댓글 내용 중에 '인식론의 근간이 바로 오온설이라는 점이다' 에서 우몽은 나름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요..옛날에 부시맨 영화에서 부시맨이 콜라병인가? 를 보았을
때 부시맨의 앎은 우리가 쓰는 인식이라고 볼 수 없지요. 인식의 사전적 뜻이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인데 부시맨도 콜라병을 잘 관찰해 보면 물을 담아 먹을 수는 있겠구나 하고 알지 모르나 콜라는
마셔보기 전까진 모를겁니다.
그처럼 인식이란 단어는 어쩌면 위 내용 중 인식론은 오온의 근간설이란 점이다란
말도 우몽 갠적으론 와닿는데..
부시맨이 기어히 콜라병을 분명히 알게되면 그때야 인식이란 말이 성립될 것인데 다시 인식의 주체 , 대상 ,인식으로
나누어 놓으면 ..인식이란 말 자체도 다시
헷갈려 지는 게 현 우몽의 수준입니다..ㅠㅠ
오메~출근시간..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오온을 분명히 알면 오온을 분명하게 인식했다란 말도 성립이 될 것이다 뭐 그런 뜻으로 한말씀 땡기습니다..()..
그렇다면 ..오온을 알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인식의 주체는 되겠네요..멀쩡히 띵까띵까 살다가 왜 갑자기 오온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났을까요? 오래살고 볼일이죠..네.. 아 진짜 지각 ㅜ
몇년 전에 이 카페에 들어와 보고...
오늘 우연히 웹검색 하다가 화엄 이라는 카페 이름이 보여서 들어와 봤는데...
게시글에 댓글이 100개 가까이 달리고 법담이 뜨겁네요
과거에는 불교나 수행과 관련된 카페마다 논쟁이 차열 찼는데
어느 때 인가 부터 잦아들어 거의 보기가 힘들어 졌지요
읽고 그냥 가려다가...잊혀졌던 예전의 첫사랑 여친(열정)을 만난것 같은 기분에...
가입하고 잘 읽었다는 댓글 남깁니다
아 참 그리고 법무아님이 말씀하신 김성철 교수님 작년에 돌아 가신걸로 압니다
연배가 저보다 조금 위신데...너무 빨리 가신것 같아 안타깝네요
제가 글이나 댓글을 오래 남겨두지 않고 수시로 지우는 편인데 읽는 분이 있다고하니 남겨둘지 말지 고민이네요. 논쟁하는 댓글은 읽는다고 별 이득도 없고 일부분만 지운 상태로 냅두자니 오해나 편견이 생길 거 같아서 흠..
맞습니다.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일찍 돌아가셔서 황망하네요.
제가 중론을 처음 접한게 80년대 초중반 정도 된것 같은데요
일본학자가 쓴걸 번역한 책인데...읽다가 짜증나서...뭐 이런 책이 하며 던져버린 기억이 납니다
뭐 중론 자체가 난해(난삽?) 하기도 하지만...나중에 알고 보니 번역,자체의 문제도 있었구요
아뭇튼 세월이 지나도 불교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중관과 유식이 필수 코스인건 변함이 없는것 같습니다
지금은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아마 그때 들었던 의문이 대충 이랬던것 같아요
"눈이 눈을 볼수 없기에 눈이 없고,그러하기에 또한 그 대상(형색)도 있을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인간의 감각기관,자체가 그렇게 조건지어져 감각대상을 만나야 식과 함께 성립 하는데
뭔 눈이 눈을 볼수 없다는 이유로 눈이 없다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가?
눈이 눈을 볼수 있다면,눈이 있다는 동치가 성립할수 있는가?
설사 (눈 스스로 견분과 소분의 역할이 일원화 되어 1인2역 하며)눈 스스로 눈을 본다는 가정을 하더라도
명근을 비롯해 다른 조건들이 없다면 눈이 있어 스스로 존재 한다고 할수 있을까?
"가는 놈이 간다.비가 내린다... 등등등"
가는 놈이 가거나,비가 내린다고 하면 동어반복 이기에...
인간의 언어 구사 용례에 있어,인식 논리의 부조리를 타파 한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는가?
특히나 가는 놈이 간다는 말의 형식은 우리나라에서는 쓰지도 않는 말이기에...
그 시기의 저쪽 지방에서나 문제화 되어 나름 의미를 갖겠지만...
뭐 물론 가는 놈을 철수로 바꾸면,가는 철수가 간다고 굳이 말 할수는 있겠지만.
그럼 내린다를 빼고 "비"만 쓰면 어떨까?
"엄마 비! 우산 줘"
엄마가 후다닥 빨래 걷으러 뛰쳐 나가셨다 들어오신다
"야 비도 안오는데 깜짝 놀랬잖아 이눔아"
"아 먹구름이 낀것 같아서 혹시 비 내릴까봐 우산 가지고 가려고..."
걍 시공간을 특정하는 술어 하나 붙혀서 동어반복하는 수고를 추가하면 이러 혼란은 없을것을...
철수가 중론에 심오하게 빠져있는 스승 논사에게 말했다
"선생님께 오다가 옷이 다 젖었습니다"
"옷이 왜 젖어 비도 그쳤는데"
'고인 빗물에 차가 지나가며 빗물이 튀었습니다"
논사 스승이 제자 철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 말조심 하라고 몇번이나 말했니.내리는게 비 이기에 고인 물은 빗물(내리는 물)이 아니라고..."
우스개 소리를 섞어서 좀 써봤는데요
아주 오래 전 일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 일반인들이 흔히 하는 이런 식의 의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끄적여 봤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나이 가 드니 뇌세포가 게을러지고 녹이 슬어서 암 생각도 없습니다
의문도 열정이 있고 부지런해야 뻣뻣이 세울수 있는데 통 바ㄹ기가 안된다는...^^
비가 내린다 대신 '비'라고만 쓴다한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비(가 내린다)'를 상정하는 게 아닐까요. 가는 놈도 마찬가지구요. 언어의 차이로 인한 한계도 있을 거 같네요. 저쪽 나라말로 했을 땐 가는 놈, 가는 것 등이 비교적 직관적으로는 더 잘 구분이 됐던 거 같습니다.
어디서 읽은 문장인진 기억이 안 나는데, 중론의 모든 게송들도 태클 걸려면 어떻게든 태클 걸 수 있겠지만 목적이 공성을 체득하는데 있는 것이란 걸 잊지말아야 한다고 했던 거 같습니다. 아무리 언어적 논리적으로 풀이해도 수학 공식 증명처럼 엄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명상을 포함한 문사수 모든 수행 방편들 또한 그 방법이 어떻든간에 목적은 지혜(공성)를 체득하고 보리심과 자비심을 발심하는데 있다는 걸 다시 생각해보네요.
"비" 라는 말이 보통명사이니 외연이 넓지요
"비" 한 자만 쓰면 그때 그때의 쓰임에 있어 내포한 의미가 모호해지지 쉽습니다
그리고 "비" 라는 말이 조어될때 이미 어떤 상태의 의미임을 규정한것 입니다
그러니 동어반복이 될수 밖에 없는 언어적 구조를 갖는건 당연한거겠죠
그렇지 않으면 말을 만들어 서로 통어할수 없습니다
하물며 고유명사인 철수도,한 반에 둘이 있으면 출석 부를때 ...
큰 철수,작은 철수하며 서술어를 갖다 붙히지요
암튼 그건 그렇고 법무아님 말씀처럼 "목적은 지혜(공성)의 체득과 보리심,자비심 발심인데"
실제 그 당시 상황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 현실보다 훨씬 냉혹했던것 같습니다
용수스님도 그렇고 상수제자 아리아제바를 비롯해 여러 중관논사들의 죽음이 순탄치 못했던것 같습니다
치열하게 논쟁을 많이 하다보니...아무래도 미움이나 원한을 많이 살수 밖에는 없었겠지요
결과적으로는 보리심과 자비심의 발심이 아닌 미움,분노,원한을 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청풍명월 절대부정을 말하는 중관논사들은 미움을 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비심을 목표로 한 옳은 이치를 말해도 상대방의 탐진치는 상대방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지, 부처님도 대신 해결해 줄 순 없으니까요.
데바닷타는 증오감 때문에 바위를 밀어다 부처님의 머리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중관을 떠나 불교 자체로 보더라도 무슬림에겐 당시 인도의 불교는 박해의 대상이었던 것처럼요.
중관은 말 그대로 중간을 보는 것일텐데요.. 어떻게 중간을 설명했간디
미움을 샀는지 그것도 궁금하네요..
몬 알아 듣는다 싶으면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얼릉 지 갈 길 가는 지혜가 부족했는지 아님 ..가리왕할절신체의 습이 남아있었는지 낄낄~
청풍명월님 초면입니다만 절대부정을 하면 중간이 나오는 이치를 혹 아시면 이왕 오신 김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괜시리 오시지는 않으신 거 같고요..
괜시리 온거 맞습니다
딱히 어떤 투철한 이유가 있거나,안-밖이 다른 실속을 차리려고 온거 아닙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예수천국/불신지옥 사람이 돼도 않는 소리로 크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어떤 사람이 나서,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자초지종을 낱낱이 따지며...
말도 안 돼는 소리로 대중교통 시설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그 어떤 사람의 옆사람이 너도 시끄럽기는 매한가지라고 나무랬어요
.
.
.
여기까지 해서 일순에 조용해지며 끝나면 해피엔딩(중도?) 입니다
.
.
.
근데요.예천/불지를 타이른 사람이 자기는 억울하다며...
자기를 나무랜 옆 사람에게 또 다시 자초지종을 낱낱이 따지며 설명을 한다거나...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그 옆사람에게 너나 조용하라고 한다거나(옥상옥식 부정)...
알고 보니 예천/불지 사람과 그 옆 사람이 친구 였다거나...
.
.
.
하면은 언해피엔딩 입니다...........우리 모두 해피엔딩 하는 그날까지 아자아자 파이링!^^
차라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기 중간이라 하시오..거 참 누구랑 꼭
닮았소 ㅋㅋ
어디든 머무는 바 없이 머무는 이 에게는,머무는 곳 도처가 해피엔딩이니...
행복을 찾는 우리네 중생들의 각본도 언제든 수정해 바꿀수 있어야 하겠죠
.
.
.
객차안이 일순에 조용해 지자,예천/불지 사람으로 부터 불똥이 튈까봐...
저 멀리 객차 구석에서 지켜보던 스님이 혼자 중얼거리면서 합장을 했다
.
.
.
"처음도 좋고,중간도 좋고,끝도 좋으니,시종일관 중간이라 보기에 참 좋구나"
(객차에서 스님이 내리며,잠시 머물렀던 객차 씬은 마무리 된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나마스떼 알샬라 그리스도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