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내 편
김 경 숙
띵동~. 방문할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벨을 눌러 나가 보니 상자가 놓여 있다. 상자 안에는 빨강, 노랑, 파랑, 자주색의 자그맣고 씽씽한 파프리카들이 빼곡하다. 보기만 해도 건강한 맛이 느껴진다. 아침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다니라는 목소리가 싱싱한 파프리카처럼 탱글탱글 굴러 들어와 내 맘을 흠뻑 적셔놓는다.
방학 때가 되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들. 방학이 끝 날 무렵이면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 숙제를 도맡아 해 주던 언니. 어쩌면 그렇게 산이며 바다를 예쁘게 색칠하는지 놀라움을 뒤로하고 의기양양하게 내가 그린 그림이고 내가 쓴 시라고 신나게 자랑했던 일들을 기억해내니 낯이 뜨거워진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언니가 사준 예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갔을 때 음악 선생님이 “넌 어쩜 이렇게 옷도 품격 있고 우아하니”라고 했을 때 느꼈던 우쭐함은 학창 시절 내내 콧대를 세워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몸에 좋은 음식이며 예쁜 옷을 살 때면 하나 더 장만하여 보내주는 언니. 바쁘고 힘들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벨이 울린다. 아마도 텔레파시가 통하는가 보다. 시곗바늘이 쉼 없이 달려 몇 바퀴를 돌아도 무슨 얘기가 그리 많은지 수다는 멈추지 않는다. 서로의 이야기보따리에 장단을 맞추다 보면 피곤함도 사라져 몸이 개운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너는 글공부도 하고 참 좋겠다”라는 말을 한숨과 함께 전해왔다. 다른 날과는 달리 기운이 없어 보였다. 동네 아줌마들과 걷기도 하고 이런저런 취미활동을 해도 집에 돌아오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뭔가 허전하다고 하소연한다. 수필 공부를 하며 가끔 일간지에 글을 올리는 내가 부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나 보다. ‘언니가 나를 부러워할 일은 아닌데. 나보다 더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잖아’라고 말하며 언니도 글을 써보기를 권유했다.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꽁꽁 싸맨 이야기보따리를 풀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언니라고 용기를 내서 글공부를 시작해보라고. 지나간 이야기를 할 때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해내고 맛깔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언니는 글로 대박을 낼 것이라고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럴 때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선뜻 글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런 건 하나도 이유가 되질 않는다. 아흔이 넘는 노인도 공부를 시작하지 않느냐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삶이 충만해지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음을 계속 얘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시 한 편을 보내왔다. 그 후 우린 서로의 글을 주고받으며 감상평을 했다. 언니는 어릴 적 이야기들을 잘 풀어냈다. 대단한 기억력으로 소재도 풍부하고 감성도 넘쳐났다. 언니의 보물상자엔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끊이지 않는 시어들을 쏟아 냈다.
일간지에 나오는 글을 부러워하더니 언니는 시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언니는 더 큰 용기를 내어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누구도 아닌 나에게서 찾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느끼는 뿌듯함. 나 자신이 행복해야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드디어 첫 시집을 낸 언니가 건네준 시집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너무도 소중한 보물이었다.
시와 수필을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떠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일을 하며 지내는 언니가 있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어릴 때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소환해내는 언니의 보물 창고는 끝이 없다. 언니 다후다 잠바를 입고 장난을 치다가 난로에 태웠던 추억들이 나와 언니를 웃게 한다. 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마음속 이야기를 전부 꺼내놓고 나눌 수 있고 같은 길을 걷고 있고 언제나 내 편에 서서 나를 위로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언니. 예나 지금이나 언니에게 응석 부리며 보살핌을 받고 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더니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리는 비에 마음까지 축축해진다. 언니가 만들어준 쌈장과 고추장으로 밥을 썩썩 비며 축 쳐진 마음을 달래련다. ‘언니 고마워. 우리 함께 글 쓰며 언젠가는 예쁜 글방도 만들어요.’라고 속삭여 본다. 언제나 내 편인 언니가 있어 오늘도 행복하다.
첫댓글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리는 비에 마음까지 축축해진다. 언니가 만들어준 쌈장과 고추장으로 밥을 썩썩 비며 축 쳐진 마음을 달래련다. ‘언니 고마워. 우리 함께 글 쓰며 언젠가는 예쁜 글방도 만들어요.’라고 속삭여 본다. 언제나 내 편인 언니가 있어 오늘도 행복하다.
언제나 내편,
많이 부럽습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