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외 1편
이봄희
봄, 막무가내로 뚫고 나오는 것들
정말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어디 눈 똑똑히 뜨고 보고 말 거야, 겨울의 은닉술들이 예상치 않은 보도블록 틈에서, 나뭇가지 끝에서, 양지에서 허락도 없이, 선전포고도 없이 막 나오겠다 이거지
생의 고수들 앞에서 하수에게나 통할 감언이설로 구구절절 허투루 야멸찬 앞날을 논하겠다 이거지
두고 보자는 말 무섭지 않지
어디로 갈지, 말도 않고
제풀에 자취를 끊고 꽁무니 뺄 것 다 아는데
뾰족한 수도 없이 고작 따뜻한 햇살 하나 믿고
대책 없이 밀고 나오는 봄의 앞잡이들
그 최후의 순간을 아는지 몰라
과신은 때로 낭패의 원인이기도 하지
무지하게 변덕 심한 햇살이 열백 번 쨍쨍해도
발등 한번 안 찍히는
저 꿋꿋한 혈기와 두둑한 배짱
왠지 그것들에게 코를 얻어맞거나
멱살을 잡히고 싶은 날이지
어이없이 멍하니 감탄만 할 뿐인
봄날의 현란한 시비 같은 거지
롤러코스터
놀이공원엔 비명이 꽃핍니다
대체 어떤 믿음이 저리 비명을 질러 대는 걸까요
어떤 무모한 믿음이 구심력과 원심력에 매달려
아찔한 생을 소진하고 있는 걸까요
밖으로 튀어 나갈 수 없는 이 놀이는 무섭습니다
현기증을 다독이며 회전하는
공중의 수를 서서히 줄이기로 합니다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돌리던
저녁의 둘레를 줄이면
둥근 공포는 야광으로 빛날까요
노랗게 질릴수록 안전 운행을 믿지만
믿어서 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힘이 센 믿음에서 이탈하고 싶어도
굴곡의 운행은 중도하차를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존재의 끈을 놓지 않고
기어이 튕겨 나간 방식으로 지킨 일생이라면
저렇게 즐거워도 됩니다
현란한 굴레를 휘돌리던 바퀴들의 공중
즐겁던 아비규환이 조용합니다
어떤 황홀한 절정까지도
저리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놀이기구 밑엔 비명들이 즐비하고
비명은 즐거움과 고통의 두 가지 방식입니다
구심력으로 밀고 원심력으로 배신당하는
이 아찔한 일생의 놀이
아이들은 일찍부터 배우려 합니다
― 이봄희 시인, 『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시인의일요일 / 2023)
이봄희
강원도 예미 출생.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 5·18문학상 신인상, 전태일문학상 등 수상.
책소개
2023년 올해로 일흔 살을 맞은 이봄희 시인의 첫 시집이다. 나이 밝히는 일이 혹여 시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할까 꺼려지고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정작 그의 시편들을 보면 문청다운 패기와 발랄한 상상력을 갖춘 신인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이봄희 시인은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등단 당시 필명은 이온정이었다. 그는 이미 등단 바로 전 해인 2017년, 사회-역사적 시선을 중시하는 전태일문학상과 5·18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를 보면 그는 든든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한 시작 실력을 두루 인정받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에도 수록된 당시의 수상작을 읽어보면, 이봄희 시인이 왜 당시 문학상을 연달아 받을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편들뿐만 아니라 이 시집 전체를 읽어 보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시 한 편, 한 편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치밀하고 깊은 이미지 조성은 그가 시를 얼마나 공들여 쓰는지 짐작케 한다. 나아가 그의 시는 이미지즘적인 대상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묘사를 통해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