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시(烏鷺詩) 현대국어역본
이직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
오로시(烏鷺詩) 청구영언
이직
가마귀 검다 ᄒᆞ고 白鷺야 웃지 마라 것치 검운들 속좃ᄎᆞ 검울소냐 것 희고 속 검운 즘ᄉᆡᆼ은 네 야긘가 ᄒᆞ노라 |
고려 말의 유명한 권문세족 출신으로 증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며 아버지는 이인민(李仁敏)이다. 그의 큰아버지는 공민왕 연간(1351 ~ 1374)의 명신이었던 이인복과 우왕 연간(1374 ~ 1388)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이다.[5] 하륜은 그의 사촌누나의 남편, 곧 종자형(從姉兄)이다. 8촌 형은 야은 길재 대신 3은으로 불리는 도은 이숭인이다. 그의 장녀는 태종의 후궁인 신순궁주(愼順宮主) 이씨이고 다른 딸은 태종의 처남인 민무휼에게 시집갔다.[6]
1377년(우왕 3) 16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직의 아버지인 이인민은 1383년에 우현보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그때 급제한 인물들이 김한로(장원 급제 : 양녕대군의 장인), 심효생, 정역(효령대군의 장인), 이방원(후일의 조선 태종) 등이다. 즉 조선 태종에게 있어서 이직은, 좌주(座主)의 아들인 종백(宗伯)이다. 고려 시대 좌주-문생 간의 관계는 친부자간처럼 각별했고 함께 급제한 동방들간의 관계도 각별했다(물론 이숭인 vs 정도전[7] / 심효생 vs 이방원의 경우처럼 예외인 경우도 있음)
1388년 무진피화 당시 권신 이인임의 조카였던 탓에 전주로 유배된 적이 있다.[8]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과 태조 추대에 참여해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인임이 이성계에 의해 축출당했으니 한 집안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9]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張至和)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다가 정안군 이방원이 이끄는 정변군의 습격을 받았다. 정도전, 심효생, 장지화 등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남은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다시 되돌아와 죽었다. 이때 이직은 급히 하인의 복색으로 갈아입고 도주해 목숨을 건졌고 이후 정안군에게 용서받아 다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아버지 덕분인데 이방원이 1383년에 합격한 대과의 지공거와 우현보, 그리고 이직의 아버지 이인민이었다. 이방원 입장에선 스승의 아들이니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
1403년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제작에 감독하였다.
1415년(태종 15) 태종 때 황희와 함께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고 민무휼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민무휼과 민무회(閔無悔) 옥사에도 연루되어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직첩이 회수되었다. 또한 황희와 함께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유배되었고, 또한 심온의 옥사에도 연루될 뻔했다.[10] 이후 귀양지에서 책만 읽으며 조용히 지내다 1422년(세종 4) 풀려나 1424년(세종 6) 영의정이 되었으며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기도 하면서 1426년(세종 8)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사직한 뒤 1431년(세종 13)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