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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사진여행 [강화/길상면] 역사를 면면히 지켜온 산사, 정족산 전등사(鼎足山 傳燈寺)
길손旅客 추천 0 조회 191 13.03.06 05:40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역사속의 천년고찰, 변해가는 아쉬움이 아쉽다.

정족산 전등사(鼎足山 傳燈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53  /  032-937-0125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절집,

밖의 분위기는 사뭇 전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어딘가 모를 대면대면한 분위기에

작지만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그러나, 절집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천천히 기억 더듬으며 둘러 봅니다. 

 

 

 

 

 

강화도의 절집하면 먼저 떠 오르는 절집, 전등사입니다.

현재는 조계종 총무원 직할말사이지만, 과거 조선불교 30본산 체재였을 때는 본산의 한 곳으로 강화와 개성등지의 6개군의 34말사를 관리하던 곳이었습니다.

전등사 창건에 대해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전해오는 바로는 고구려 소수림왕11년(381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집으로 처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강화도는 백제의 땅이었고, 백제에 불교가 들어선것은 그 보다 3년 뒤인 384년입니다. 즉, 고구려인 아도화상이 절을 세우기에는 시간이 맞지를 않는 것이지요. 강화가 고구려의 영토가 된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인 장수왕63년(475년)이었으니까요. 암튼, 전등사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8년(1282년), 충령왕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송나라의 대장경을 보관하고, 옥등(玉燈)을 시주했다하여 그때부터 '전등사(傳燈寺)'라고 하였습니다. 어찌되었건 현 우리나라의 사찰 중 가장 오래 된 절집이 되는 것입니다.

 

강화도 여행길이라면 대부분 전등사를 찾습니다.

길손 역시도 전등사를 서너번은 다녀 간듯 합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3년이 넘은 것 같네요. 그런데, 절집은 그대로 두고 그 주위가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없던 유료주차장이 들어섰고, 정문과 남문 주차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과거 남문으로 통행을 하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더하여 그 앞길을 왕복8차선으로 넓게 내어 놓고 나니, 이곳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그 전등사의 입구가 맞는지 조차 처음에는 많이도 헷갈려 했습니다. 주차를 하고 길을 삼랑성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이곳이 전등사의 동문임을 알 수 있었네요. 이전에는 남문으로 전등사를 찾았던것이지요.

천년고찰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절집, 전등사. 그러나 그것 말고도 전등사는 볼거리가 참 많은 절집 중 한곳이며 동시에 수 많은 아픔을 숨겨 놓은 절집이기도 합니다.  

 

 

 

삼랑성(동문)

 

 

 

'정족산 전등사(鼎足山 傳燈寺)',

마치 솥을 업어놓아 세발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는 정족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집으로, 단군의 세 아들들이 각각 맡아서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강화도가 군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수 많은 일을 겪은 만큼 전등사도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겠지요.

 

처음으로 전등사라는 이름을 갖게 한 '정화궁주 왕씨(貞和宮主 王氏, ? ~1319)'는,

'충경왕(忠敬王, 1219~1274, =원종元宗, 고려 제24대왕)'의 맏아들인 고려 제25대 충렬왕의 왕비로 충렬왕은 그녀에게는 9촌 조카뻘입니다. 하여간 그 시대는 막장이었다는 것이지요.

암튼, 원래 정화궁주는 '충렬왕(忠烈王, 1236~1308, 고려25대왕)과 처음으로 혼인을 한 왕비였습니다만, 충렬왕 즉위 한달 전인 원종15년(1274년)에 원나라로 떠나가서는 '원 세조(元 世祖, 1215~1294, 원나라 초대황제)'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1259~1297,=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이 후 원종 사후 지아비가 왕에 올랐으나, 원나라의 '상국(上國)'이라는 이유로 장목왕후는 '정비(正妃)'가 되었고, 정화궁주는 '제2비'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을 별궁에서 홀로 기거하게 됩니다. 즉 고려가 원나라의 신하국임을 자처하면서 처음으로 맺은 혼인관계의 피해자인것이지요. 

홀로 지낸 40년의 세월도 결코 조용하지 못합니다. 일예로 충렬왕 원년(1276년)에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여 연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 충렬왕은 장목왕후와 같은 위치에 정화궁주를 앉히도록 하였는데, 자신과 동격으로 취급한다며 정화궁주의 자리를 옮기에 하였고, 이에 정화궁주는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렸는데 충렬왕을 살피던 제국공주는 왕이 자신을 흘기며 쳐다본다면서 연회를 엎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장목왕후의 시기로 왕의 총애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옥에 갖히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아들이 유폐당하는 시련마저 겪게 됩니다. 이에 의지 할곳 없던 정화궁주 왕씨는 전등사에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충렬왕8년(1282년), 승려 '인기(印奇)'로 하여금 송나라로 건너가 대장경을 인쇄하여 전등사에 보관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옥등잔을 절집에 시주함으로서 '전등사(傳燈寺)'라는 사액하여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훗날, 정화궁주는 충렬왕23년(1297년)에 장목왕후가 죽자 충렬왕은 이듬해 장목왕후가 낳은 '충선왕(忠宣王, 1275~1325, 고려26대왕)'에게 왕위를 주고 자신은 정화궁주를 궁으로 불러들여 상수궁에서 함께 지내게 됩니다.

 

한 서린 23년의 세월입니다.

자신보다 14년이나 늦게 결혼한 몽고의 공주가 정비가 되고 자신은 계비로 밀려났고, 그녀의 시기로 옥에 갖히고 아들마저 유폐되는등의 질곡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 한서림을 전등사에 기대게 됩니다. 비록 훗날, 지아비와 다시 만나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긴 시간의 서러움과 시련은 그녀만이 감내할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화궁주 왕씨가 아내로서, 엄마로서, 여자로서의 아픔과 시름의 '한(悍)'이 전등사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전등사에는 또 한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바로 '나부상'의 이야기이지요. 

절집의 대웅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공사 중에 만난 마을의 여인을 알게 되었고, 이는 사랑으로 발전하여 도편수는 공사가 끝나는 대로 여인과 혼인을 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지요. 정신은 온전하지만 제정신이 아니지요. 그리하여 도편수는 어차피 아내가 될 그 여인에게 공사에서 받은 노임을 모두 맡기게 됩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날 즈음, 그 녀는 딴 놈과 배꼽을 맞추고 줄행랑을 놓지요. 이에 도편수는 한동안 사랑에 대한 감정과 증오의 감정이 복잡해지면서 한동안 일을 놓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날, 마음을 다 잡은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대웅전 공사의 마무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네 귀퉁이에 그녀의 나체상을 조각해 넣은 것이지요. 평생 무거운 대웅전의 지붕을 떠 받들게 만든 것입니다.

 

또 한가지, '대웅보전 기둥과 벽면의 흔적'입니다.

삼랑성의 입구를 지나면 '양헌수장군 승전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격퇴한 '충장공 양헌수(忠莊公 梁憲洙, 1816~1888)'장군의 공을 기리는 기념비입니다.  병인양요는 고종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탄압을 구실로 삼아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입니다. 기념비는 1873년 강화도 백성들의 힘으로 세워졌다고 전해지는데요. 프랑스군을 막아냄으로서 전등사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과 왕실족보 '선원보(璿源譜)'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은 자신들과 나라의 운명을 보살피게 해 달라며 전등사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 놓으며 빌었다고 합니다. 많이 지워지기는 하였으나,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가 자리합니다.  

이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로, 배불숭유정책으로 인하여 관가는 절집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은행나무에 열매가 열릴즈음이면 관가에서 찾아와 열매를 거두어 가곤 했는데, 어느 날 부터는 수확량의 두배를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늘 정해진 량이지만 두배를 요구한다는 것은 절집을 아예 귀속시키려는 것이지요. 노스님은 크게 걱정하며 인근의 백련사를 찾아 스님께 방도를 물으니, 차라리 열매를 맺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드리자며 3일동안 기도를 드리니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풍경이 너무 진기하면서도 두려워 고개를 숙였는데 그 사이 스님 두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보살이 절집을 구하기 위하여 스님으로 변하여 나타났다고 하였고, 은행나무는 기도처럼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열매를 맺지 않고 있으며, 관가에서도 더 이상의 수탈이 없게 되었습니다.

 

 

'양헌수장군 승전비(梁憲洙將軍 勝戰碑)'

 

 

 

이렇듯 전등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애틋함이 묻어납니다.

자, 그럼 동문을 통하여 전등사의 경내로 들어 서 봅니다. 삼랑성의 동문에 해당하는 전등사 들어가는 길로 들어 섭니다.

2월의 끝자락임에도 산지가람의 절집에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풍경은 오롯히 길손의 마음속에 담깁니다. 고요한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참 정감이 있습니다.

 

전등사는 숙종4년(1678년), 조정에서 실록을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조선왕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합니다.

절집의 지주에게는 승려의 직책 중 최고위직인 '도총섭(都摠攝)'을 부여하였을 정도입니다. 영조2년(1726년)에는 영조가 친히 전등사를 찾았고, 곡식 수십곡을 하사하는가 하면 영조25년(1749년)부터 이루어진 대대적인 중창불사에 쓰이는 대부분의 재목을 영조가 하사 하였습니다. 정조8년(1784년)에는 양곡을 보관할 수 있는 '정족창(鼎足倉)'을 세우는등 절집의 사세는 날로 번창하였지요.

그러나, 고종8년(1871년)부터는 쓰임새가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무기보관소이자 군량미를 보관하는 '포량고(砲糧庫)'를 신축하였고, 이듬해에는 총섭과 함께 승군50여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苦)'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집의 남쪽에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동문을 통과하고 나면 우측에 전각하나가 서니 '양헌수장군승전비'입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전등사에 보관 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장병들이 무운을 빌었던 전등사 대웅전의 기둥과 벽면에는 그들의 이름을 써 놓은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대로 호젓한 산길을 따라 가면 작은 삼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걷지 않은 길은 남문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동문과 남문에서 이어진 길이 마나는 삼거리에 '윤장대(輪藏臺)'가 서 있습니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오르면 은은한 차향이 어우러지는 '죽림다원'이 넉넉하게 자리하며, 그 앞으로 전등사의 경내를 알리는 2층 누각의 '대조루(對潮樓)'입니다. 최초로 영조가 시주한 것으로 중창을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릅니다. 앞에서 보면 2층의 누각이지만, 경내 마당에 들어서서 보면 1층의 전각이 됩니다. 대조루의 아래를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을 지나 정면으로 전등사 '대웅보전(大雄보殿)'입니다. 세월의 유구함을 몸소 느끼고 있는 전각으로 나부상은 오늘도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 기둥과 벽면에는 병인양요 당시 장병들이 무운을 빌며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대웅보전은 선조38년(1605년)에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절반이 소실 되었고, 광해군6년(1614년)에 다시 불이 나서 완전히 소실 되었던 것을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13년(1621년)에 완공하게 됩니다.

대웅전의 우측으로 '강설당(講說堂)'이 자리를 하고 그 뒤로 스님들의 수행공간들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좌측으로는 다른 절집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로 전각들이 일렬로 늘어섭니다. '향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명부전(冥府殿)'이 차례로 서고 'ㄱ'자로 꺽이면서 계단 위로 '극락암(極樂庵)'이 자리를 합니다. 계단의 앞으로는 '종각(鐘閣)'입니다. 그 옆으로는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요사와 '적묵당(寂默堂)', 전등사 종무소가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적묵당의 아래로 근래에 새로 건립된 건물이 자리하는데, '무설전(無說殿)'이라고 합니다. 무설전에는 기도처임과 동시에 사진전도 함께 열리는 공간입니다.

 

향로전과 약사전의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삼성각(三聖閣)'이 그리고 앞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취향당(翠香堂)'과 '조선왕조실록', '선원보'를 보관 하였던 '정족사고(鼎足史庫)'입니다.

 

 

전등사 '윤장대(輪藏臺)'

회전식의 사거로 내부에 경전을 넣어 두고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때 사용 됩니다. 또는 개인의 발복을 기원하면서 돌리기도 합니다.

 

 

 

 

천년고찰의 면모는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참 많이도 바뀌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전등사의 입구에 그리 많은 식당이 즐비한지 이번에야 알았고, 산골의 산사를 찾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던 예전과 달리 초지대교를 건너 새롭게 뚫린 신작로를 따라 직진을 하게 되면 도착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밖에서는 호젓함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삼랑성의 안으로 들어서고 나니 제법 절집의 분위기가 납니다. 흙길, 나무와 숲, 다원의 음악소리와 차향들이 소란스러운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의 어느새 전등사의 모습도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전각이 들어서고 화려한 내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뭐랄까...이제 전등사도 세속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려 한다.라고 할까요? 얼핏 세속의 내음이 나는 것은 길손만의 느낌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강화도에서 가장 많이 찾는 절집중의 한 곳, 전등사.

이제, 변해만 가는 절집의 모습에 천년고찰의 면모를 지닌 '고찰다운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싶습니다.  

 

 

 

죽림다원

 

전등사 '대조루(對朝樓)'

 

전등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178호))'

정면3칸, 측면3칸의 단층팔작건물입니다. 건물은 지형에 따라 지어졌는데, 동쪽이 높고 서쪽과 뒷면은 낮게 한 허튼층쌓기로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위와 기둥 사이에도 짜올린 다포식입니다. 

대웅보전은 선조38년(1605년)에 절반이 불에 타고, 고아해군6년(1614년)에 모두 전소 되었다가 이듬해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13년(1621년)에 완공을 한 건물입니다. 이 후 철종6년(1855년) 중건 되었습니다.

지난 2012년 12월, 대웅보전에 봉안 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이 보물 제1785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의젓한 모습의 전등사 견공, 대웅보전 앞에서 느긋하게 오는 이들을 반깁니다.   

 

 

  전등사 '대웅보전귀공포나녀상(大雄寶殿귀龜貢包裸女像)'

대웅보전 공사 당시 도편수의 사랑을 배신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라는 의미로 무거운 추녀를 받들고 죄값을 치루라는 의미와 그녀를 경고의 본보기로 의미한 것입니다.

 

 

 

 

 

 

 

 

전등사 은행나무

 

전등사 '향로전(香爐殿)'

 

전등사 '삼성각(三聖閣)'

 

전등사 '취향당(翠香堂)'

숙종33년(1707년)에 사고를 지키는 별관으로 세운 건물로 이 후 중건된 건물입니다.

 

 

전등사 '정족사고(鼎足史庫)'

실록을 보관했던 사고(史庫)는 내사고(內史庫)인 춘추관과 외사고(外史庫)로 충주, 성주, 전주에 3개가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주만이 화를 피하였고 나머지 두 곳은 모두 소실 되었습니다. 그러자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강화로 옮기고 선조39년(1606년)에 복인(復印)을 완료하고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두고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에 각각 보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병자호란과 화재로 힌하여 삼랑성 내의 정족산사고에 보관하게 됩니다.

이 후 1910년 일제에 의해 정족산의 사고본, 태백산사고의 실록, 규장각의 도서등이 조선총독부로 들어 갔다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고, 광복이 되면서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정족사고는 1931년 파괴가 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복원, 정비한 것입니다.

 

 

  정족사고 내 '장사각(藏史閣)'

 

 

  정족사고 내 '선원보각(璿源寶閣)'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전등사 '명부전(冥府殿)'

2012년 12월, 명부전에 봉안 되어 있는 목조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 도명존자와 함께 시왕(十王)상, 귀왕상, 판관상,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등의 31구가 모두 보물 제1786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전등사 '극락암(極樂庵)'

 

전등사 '범종(梵鐘, 보물 제393호)'

1097년 송나라 회주 숭명사(懷州 崇明寺)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입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기 위하여 병기창에 가져다 놓은 것을 광복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습니다.

두마리의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와 몸통 위부분에는 팔괘를 새겼으며, 몸통은 두부분으로 나누어 8개의 정사각형을 두어 안에 명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전등사 '무설전(無說殿)'

최근에 중수 된 건물인 듯 합니다. 불당이지만 열린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하여 안으로 들어 가 보았습니다. 천년고찰에서 뜬끔없이 만난 너무도 새로운 분위기에 머리가 '띵~' 하더군요.

 

 

 

 

 

by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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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06 09:01

    첫댓글 사진 하나하나가 전부 작품입니다....구경 잘했습니다...
    근데 궁금한건 왜? 절집 견공들은 그렇게 도도한지요......불러도 안오고 모른척하고.....ㅎㅎ

  • 작성자 13.03.07 05:47

    그러게요.
    절집 개들에게는 묵언수행이 유행인가 봅니다.^^

  • 13.03.07 08:47

    묵언수행........ㅋㅋㅋㅋㅋㅋ

  • 13.03.06 09:57

    좋은사진 전등사를 완전히 돌아볼수있는 전경등 좋은작품시진입니다
    유적 유물 그리고 풍경등을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3.03.07 05:48

    전등사는 생각 보다 넓어 천천히 여유를 두고 둘러 보아야 합니다.
    급하면 늘 와서야 후회가 되는 절집 중 한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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