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 볼라벤이 지나간 어제 저녁에 배란다 앞 유리창에 테이프를 X자로 붙이고 태풍의 강풍에 대비하고 잠을 잤다.
하지만 바람소리에 자꾸 신경이 쓰여 자는듯 마는듯 하며 잠을 설쳤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 동 어디선가 우리창 깨지는 소리가 와장창 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다행히 우리집은 아니어서 도로 누워 잠을 잤다.
낮에 시골 어머니 집에 별일이 없나 살펴보러 갔는데 예상대로 개집은 마당에 뒹굴고, 문간채 지붕을 덮은 비닐 포장은 벌러덩 벗겨져 있고, 대문은 바람에 휘어져 뒤틀려져 있었다.
대추나무의 대추열매들은 다떨어져 나뒹굴고, 감나무 가지는 바람에 찢어져서 늘어져 있고, 콩줄기, 고추 줄기들은 밭에 널부러져 있고...
대강 손질을 하고 바람에 더 흐트러지지 않도록 마무리를 하고는 집을 나왔다.
나오는데 강아지가 서운했다. 어머니집에 올 때 가져오려했던 먹다 남은 오리탕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깜박하고 놓고 온 것이다. 그걸 가져왔으면 강아지 오늘 별미를 먹는 것인데...
그리고는 비와 바람이 뒤섞인 고속화도로를 타고 집에 오는데 라디오 뉴스에서 이제 다음 태풍이 또 올라 온단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하지만 라디오 '세계음악이 있는 곳에'프로그램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이 분위기를 살려준다.
이제 태풍이 가고나면 그 무더웠던 올 여름이 갈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가을이 살짝 머리만 내밀고 있다가 바로 추워질 거란다.
그리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데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한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사람과 그날 그날 무엇이든지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이 생각났다. 그리고 남은 오리탕을 끓이고 실가리국을 끓이고 밥을 먹다가 뼈를 발라먹으면서 그 뼈를 발라먹고 나면 강아지를 가져다 주어야 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생명과 나의 생명에는 무엇인가 통하는게 있다.
이 지구라는 별에, 이 우주에 나는 사람이라는 인간류로 테어나서 먹는거 먹고 남기면 저 개를 주고, 저 강아지는 그저 주는대로 받아먹고 그렇지 않으면 배고프지 않기 위해 아니 살기 위해 아무거나 먹고 그러고 제 목숨 다하는 날까지 살다가 이 지구를 떠나는구나.
나는 왜 이러한 생각에 잠기는 것일까?
가끔 강아지를 보면, 그 눈빛을 보면 사람만이 생각을 하는 거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마찬가지로 우리 집 고양이에게도 똑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사는, 이 사람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관계가 있는데... 지금 나와 강아지와의 관계 또는 나와 고양이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사는 사회도 있는데...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도 별 다를바가 없는 관계도 있었는데...
사람이 잘난 것일까? 더 똑똑하고 더 영민하고 더 우월하고 더 존엄한 것일까?
단지 이 지구상에서 다른 삶을, 오직 다른 형태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누리고 사는 것이 구원인가? 사람들을 자기 생각대로 부리는 것이 구원인가? 다른 사람을 구원했다고 이름을 남기는 것이 구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 구원인가? 이 세상 모든 물질을, 물질의 원리를 깨달아서 남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구원인가?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부터 구해주는 것이 구원인가?
내 안에 내가 바라보는 나는 무엇이 구원인가?
이런 생각에 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들고, 바로 그 다음 구원이 무슨 의미인가? 무엇이 구원인가? 신이 나를 왜 구원하는 것일까? 내가 무엇이기에? 나는 당연히 구원 받아야 하는가? 참으로 한없이 가엽은 존재가 아닌가? 이 우주에서 존재하는 나는 그 자체로 구원인데, 나는 내안의 나를 바라다보면 무엇이 구원이냐고 묻고 있질 않는가?
나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죽은 뒤에? 누구에 의해서 어느 창조주 하느님 아니면 부처님 마호메트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 내가 죽고나서?
나는 그리스도 신자이다. 지금여기에서 거울을 보고 나를 마주보면서 자비와 연민을 느끼며 나 자신에게 내가 지금 구원을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은 뒤에 누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
지금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내 눈은 곧 구원인 것이 아닌가?
나를 바라보고 연민과 자비와 기도할 수 있는 '나'가 곧 바로 구원인 것이다.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나' 그 '나'가 곧 구원의 시작이요, 지금여기에 구원이 있는것이다. 나는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나'가 나를 구원한다. 지금 여기에...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한없이 '나'를 바라다보며 나를 구원한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오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고 전태일 열사 재단 방문을 하려다가 이 방문이 무산되었다 한다.
유족의 거부로...
참 대비가 된다. 전직 대통령과 노무현 , 김대중 대통령 유족들과의 방문은 성사되었지만...
무슨 의미 일까? 어떻게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화해와 화합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주 잘 활용한 것이다. 누구도 이 중대한 사안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만큼 화해와 화합이라는 사안은 민족의 중흥과 구원의 문제인 역사적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이 중대한 사안이 일방적이고도 속살이 드러나지 않는 일회성 홍보용이라면 결국 100%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강자논리인 자신들만의 잔치인 것이다. 누가 보아도...
즉 삶의 현장과 미래 기대치의 온도차일 것이다. 온도차가 아니라 진실성에 대한 속살을 의미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그들 나름의 통과의례라는 것을 그 속살의 눈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의 응어리짐에 대한 살풀이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노동현장에서 덛쌓이고 있는 한이 있는데 웃는 얼굴로 만난다고 한들 마찬가지로 상대 사람으로서 용서와 화해라는 통과의례를 무시한 삶의 현장에서 받아질 리가 없다.
진실된 노동현장의 해답이 없는, 원인에 대한 결자해지의 의식이 없는한 형식적인 일이라는 것이고, 결국 박 후보는 결과와 무관하게 화해의 제스쳐로서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자신들끼리만 뭉쳐서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보수는 용감했고, 그들의 단결은 공개적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고했다.
마치도 일제 강점기로부터 이어 내려온 그들만의 휘황찬란한 부귀영화의 신념같이 빛났다.
그러나 가족을 희생하고 오직 하나 조국의 해방과 통일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고난은 역사의 수레바퀴아래서 피와 땀과 눈물로 그 모든 수고로움을 이 붉은 황토땅에 묻고 사는 민초로서의 생애로서 역사의 든든하고도 깊은 뿌리가 되고 있다.
그들은 이름석자 칭찬을 바라지도 않았고,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고, 안락함을 바라지도 않았을 뿐더러 후세에게 이름을 불러달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오직 한반도에 조국해방, 평화통일, 민주주의 만세만을 외쳤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민초로 살았다.
이 땅 한반도에 구원의 서민 민초로서 살았다.
가장 낮은 데서 살았다.
있는 듯, 없는 듯 ...
그리고 그 민초들은 항상 영구 임대의 인생을 살다가 간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와 그의 아버지를 따랐던 사람들은 영화와 권력과 모든 부귀를 오래도록 지금까지 누리고 살고 있다.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율 , 세멘트 지지율이라고 부르고 있는 50%로 자만할 만큼 그렇게 잘 뭉쳐서 누리고 살고 있다.
일부 언론(한겨레)에서도 이렇게 똘똘뭉친 보수의 집결을 위한 안전인수격 쇼라고 평가하고 있다.
==>친박 내부 다수는 전태일재단 방문 실패와 상관없이 대통합 행보에는 문제가 없다고 평가한다. 한 참모는 "박 후보의 통합 행보는 진정성 부분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며 "통합을 하자는데 이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박효종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은 이날 <시비에스>(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치적 쇼라고 해도 멋진 쇼는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건 사실 100만불짜리 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박 후보로서는 우리나라의 상처 난 곳을 치유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대선 캠프를 박근혜판 힐링캠프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캠프에선 득표 전략 차원에서도 통합 행보가 나쁠 게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친박 의원은 "경선 때의 불통 이미지와는 달리 경선 이후 박 후보의 행보는 전략적으로 시원시원한 면이 있다"며 "박 후보의 이런 행보는 '이번엔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권력의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지만 득표만을 놓고 봐도 훌륭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박 후보가 전태일재단에서 문전박대당한 것 자체도 이미지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하지만 박 후보의 '일방통행식 통합 행보'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도 있다. 한 친박 참모는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방문, 이희호씨 방문이 긍정적인 평을 얻으며 내부가 '오버'했다"며 "유족 반대도 고려하지 않았고, 진정성을 보일 만한 노동문제 해법도 제시하지 않는 등 사전준비작업 없이 막연히 전태일재단을 갔다가 탈이 난 것"이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지난 21일 봉하마을 방문 당시에도 노무현 재단 쪽에 당일에야 알려 재단 쪽이 "최소한의 절차를 밟지 않아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내기도 했다.5·16과 유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없이 진행하는 '불행한 과거와의 화해'는 공허하다는 지적도 있다. 통합 행보를 이어가도 진정성 논란을 잠재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상돈 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은 "박 후보가 좀더 유연하고 자연스런 과거사 인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또 전태일재단 방문 실패 직후 대변인 명의로 "국민을 분열시켜 계층, 세대, 지역간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100% 대한민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상대를 강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낸 것 역시 패착이란 평가도 있다. 한 친박 참모는 "어이없는 논평이 외려 진정성을 훼손했다"고 말했다.이밖에 박 후보의 최근 대통합 행보가 정치 쪽에만 치우친 것도 지적된다. 한 친박 참모는 "지금까지의 대통합 행보는 긍정적이지만 너무 정치적인 이벤트에 치우친 면이 있다"며 "'묻지마 살인' 등 사회 병폐에 관한 행보를 섞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그들은 똘똘뭉쳐서 지하에 계시는 장준하 선생, 전태일 열사, 민족 선열들을 영면의 잠에서 벌떡 일어나 깨어나게 하고 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시인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일이면 일로 손잡고 가자
천이라면 천으로 운명을 같이 하자
둘이라면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물이라면 건너주고
물 건너 첩첩 산이라면 넘어주자
고개 넘어 마을 목마르면 쉬어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가시발길 하얀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돌맹이 하나
------------- 시인 김남주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김희숙 여사,
"40년 세월, 신앙, 봉사로 나를 지탱해왔다."
반독재투쟁 하다 ‘의문사’한 고 장준하 선생 부인 김희숙 여사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인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실족사’라는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친 고 장준하 선생의 37주기를 맞아 지난 17일 파주에서 ‘장준하 추모공원’ 개원과 함께 장 선생 묘소 이장식을 가졌다. 이장을 위해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 선생의 두개골에서 원형 함몰과 균열이 발견됨으로써 그간의 타살 의혹 심증이 굳어졌다. 이에 따라 유족과 기념사업회측은 청와대에 진상조사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추모공원 개원식에는 장 선생의 유족과 백기완 선생, 장준하기념사업회 관계자 등이 대거 참석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희숙 여사와 장남 호권 씨 등이 참석했는데, 올해 86세이신 김 여사는 지난 시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곱고 단아한 자태로 참석자들을 맞아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김 여사가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셋집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장준하 추모공원에서 열린 장 선생 부조 제막식에 참석한 김 여사와 백기완 선생.
그로부터 며칠 뒤 지인을 통해 인터뷰를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응해 주셔서 지난 24일 김 여사님을 만나 뵈었다. 강남구 일원동 한 아파트 입구에 다다르자 가운데 도로를 기준으로 좌우의 아파트는 모양새부터 확연히 구분이 지어졌다. 왼쪽은 일반분양 아파트, 오른쪽은 임대아파트. 김 여사님은 오른쪽 임대아파트의 꼭대기 층의 동쪽 끝집에 살고 계셨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따라 가는 도중에 주민들이 내 놓은 화분이 드문드문 있었다. 13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는 실내에 화분 하나 놓을 자리도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열린 문을 들어서자 김 여사님이 맏며느리 신정자 씨(동아투위 회원)와 함께 마루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먼저 김 여사님께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서너 명이 겨우 앉을만한 거실에서 시원한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서쪽 벽에선 액자 속의 장준하 선생이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계신 김 여사님은 추모공원 개원식 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단정한 차림새였다. 팔순 연세이고 보니 심장도 좋지 않고 혈압, 당뇨까지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귀가 좋지 않으셔서 필자도 소파로 올라앉았다. 다음은 필자 일행이 김 여사님이 살아오신 지난 시절에 대해 한 시간여 나눈 대화를 간추린 것이다.
- 이번에 장 선생님 추모공원을 개장하고 또 이장을 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너무나 행복합니다. 37년 만에 선생님을 만나 뵈니 기쁘기 한량없었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유골 상태가 좋아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색깔도 좋고, 이빨도 고르고…. 선생님 유골을 보고는 다들 놀라워하더군요.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리라 믿습니다.”
- 이전에 선생님이 파주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혔던 것은 어떤 연유에서였습니까?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사전에 장례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유해를 모실 곳도 마땅치 않고 또 장례 치를 돈도 없었습니다. 장례미사를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집전하셨는데 마땅히 모실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천주교 측에서 파주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를 배려해주셨습니다. 그것 말고도 저희 가족들은 천주교 측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거실에 걸린 장준하 선생 사진을 배경으로 선 김희숙 여사.
- 슬하에 자녀는 몇이나 되며, 어떻게 지내는지요?
“3남 2녀입니다. 첫째(호권), 둘째(호성), 막내(호준)가 아들이고 셋째(호경), 넷째(호연)가 딸입니다. 막내는 미국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번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문동환 목사님과 함께 방북선교를 한 것이 문제가 돼 입국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벌써 받을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장준하) 아들인데....’ 하면서 여태 미루고 있답니다.” (장 목사는 지난 2009년 11월 필자를 통해 박지만 씨에게 ‘공개편지’를 보낸 바 있다.)
<참조- 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 씨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 장 선생님께서 졸지에 돌아가신 후 남은 가족들은 그간 어떻게 지내오셨습니까?
“말 그대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온 가족들은 흩어져 한동안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지냈습니다. 며느리는 친정으로 가고 저는 제주에 사는 둘째딸(호연) 집에서 한동안 몸을 의탁했습니다. 얼마 뒤 서울로 돌아와서는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지냈습니다. 어떤 이는 쌀집 주인을 시켜 쌀을 몰래 갖다 주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신문지에 고기를 싸서 담 너머로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주변 분들에게 참으로 많은 빚을 졌습니다.”
- 가족 중에서는 특히 장남 호권 씨가 큰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들은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취직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겨우 직장이라고 들어가면 얼마 안 있어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출근한지 한 달도 안 돼 사장이 한달치 월급을 주면서 제발 좀 나가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회사가 세무조사를 당하고 하니까 그 사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큰 애는 서점의 책 감시원 등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좀 과장하자면 직업이 아마 한 100가지는 될 겁니다. 그나마도 국내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말레이시아로 갔다가 거기서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싱가폴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무엇으로 지탱하며 살아오셨는지요?
“지난 40년 세월은 신앙(천주교)과 봉사활동으로 저를 지탱해 왔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서 저도 죽고 싶었지만 아이들 다섯을 두고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평소 상봉동성당엘 다녔는데 교인 중에 상사(喪事)를 당하면 달려가서 시신을 수습해주곤 했었습니다. 그게 제게는 거의 유일한 외출이었는데요, 그 때마다 성당에서 국수랑 먹을 것을 도와주곤 했었지요. 또 명절 같은 때가 되면 옷 만드는 집에 가서 동정도 달고 주름도 펴주고 하면서 잔심부름을 해서 몇 푼 받아서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어찌 먹고 살았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이 추석 때마다 20만원씩 보내주셔서 큰 힘이 됐습니다.”
- 집안 살림살이는 선생님이 생존해 계실 때도 비슷하지 않으셨나요?
“마찬가지였죠. 1년에 이사를 평균 세 번 정도 다녔습니다. 그래서 우리집엔 가구 같은 게 없고 대신 캐비넷이 세 개 있었습니다. 언젠가 김지하 시인이 선생님 선거유세 때 찬조연설을 하셨는데 ‘장 선생 집에 가보니 항공모함만한 구두 한 켤레와 캐비넷 셋뿐이더라’고 해서 화제가 됐던 적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더러 함석헌 선생님, 법정 스님 등 손님들을 집으로 모시고 오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찬거리가 없어서 겨우 동태와 두부로 전을 부쳐 상에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마나 맛있게들 잡수셔서 감사했지요.”
- 장 선생님과 함께 지내던 시절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 같은 건 없습니까?
“국회의원 하실 때 국방위에 소속돼 있어서 월남까지 국정감사를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다. 현지에 가셔서 이런저런 문제점을 지적하신 모양인데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집으로 큰 박스가 하나 배달돼 왔습니다. 그 안에는 케익과 두툼한 돈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욕심이 나기도 했었지만 그날 저녁 선생님께서 비서를 통해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또 저의 한 친구가 아들이 군에 갈 때가 됐는데 어느 날 제게 ‘남편 명함에 도장만 하나 찍어 주면 집 한 채 사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그런 게 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우리 남편은 명함이 없다고 했더니 ‘그런 영감과 어찌 사느냐’고 타박을 하더군요. 선생님이 국회의원이 되자 이제 월급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그것도 허사였습니다. <사상계> 낼 때 밀린 종이값, 인쇄비로 월급이 차압돼 그 때도 늘 빈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늘 ‘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장 선생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방위에서 활동함)
- <사상계> 내실 때의 기억할만한 일화는 없습니까?
“당시 선생님은 기자이자 편집장이셨고 저는 교정 담당이었습니다. 피난지 부산에서 마땅히 사무실도 없고 해서 주로 다방을 이곳저곳 전전하면서 교정을 봤습니다. 또 당시 영도다리 밑에 있던 <리더스다이제스트> 사무실에 가서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새 책이 나오면 리어카에 싣고 부산 광복동 동아서적센터로 싣고 가서 넘겼는데요, 제작 과정에서 종이나 인쇄비는 외상이 되지만 동판값은 외상이 안 돼 한번은 제 오버를 팔아서 대기도 했습니다. 그 뒤에 미문화원(USIS)에서 종이값을 대줘서 조금 숨통이 틔었지만 책을 펴내는 내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식인 사회의 큰 호응을 얻어서 보람은 컸습니다.” (장 선생은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賞)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함)
▼장준하 선생이 생전에 쓰던 안경.
- 장 선생님께서 약사봉에서 변을 당하실 무렵 무슨 낌새 같은 게 혹 있었나요?
“선생님 본인은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것저것 신변의 정리를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목숨처럼 소중히 보관해오시던,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전에 사용했던 태극기는 두 딸이 다니던 이화여대에 기증하셨고, 망우리에 있는 시아버님(장석인 목사) 묘소도 참배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혼배성사도 해주셨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내놓고 보니 그게 선생님 나름의 주변정리였던 것 같습니다.”
- 사고 당일 선생님의 사고 소식을 전하는 의문의 전화를 받으셨다면서요?
“예, 그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고 당일 오후 1시~2시경 낯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장 선생님에 등산을 하시다가 크게 다쳤다고 하더군요.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때만 해도 전화가 귀했는데 산에서 다친 사람의 소식을 누가 어찌 알고 그 시각에 전화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할 따름입니다.”
-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지금 살고 계신 이 집은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20만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정이 어떠신지요?
“정부에서 광복군 출신들에게 13평짜리 아파트를 제공하였으나 선생님은 ‘박정희가 주는 것은 받지 않겠다’며 아파트는 물론 건국훈장도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선생님 동지들이 국가에서 주는 것이니 받아도 된다며 강권해서 훈장도 1991년에 남들보다 뒤늦게 받았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국가보훈처와 서울시가 국가유공자에게 제공한) 영구임대아파트이며 7~8년 전에 입주했습니다. 또 매달 (독립유공자 유족) 연금도 받고 있는데 그날이 되면 ‘영감님,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하곤 합니다.”
- 2007년 대선 무렵 박근혜 의원이 찾아와서 사과를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박근혜가) 돌연 저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장 선생님과 제 부친(박정희)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서로 달랐을 겁니다’ 그러더군요. 사과 얘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보상’ 운운 하길래 제가 듣다못해 한 마디 했죠. ‘너희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정이 파괴되었고, 또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그걸 무엇으로 보상하겠다는 것이냐’고요.” (이 얘기 끝에 동석했던 김 여사님의 맏며느리 신정자 씨는 2007년 박근혜 의원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아파트 인근 청소를 하는 등 주변에서 부산을 떨었다고 들려줬다)
- 살아오시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장 선생님이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을 때였습니다.” (1966년 삼성 재벌의 ‘사카린밀수사건’이 발생했을 때 장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비난했다가 구속돼 한 달간 수감됐다가 그해 12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는데 이듬해 2월 공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장 선생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무려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당한 바 있다.)
▼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행을 문앞까지 나오셔서 전송하는 김희숙 여사.
(* 이 글은 27일자 <진실의길>에 실렸습니다.) ==2012.08.27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보림재:임종국을 보배로 받드는 서재 ==
장준하 죽음 알린 '괴전화' , 중정은 알고 있었다.
사건 당일 작성된 '중정 문서'와 목격자의 부인... 국가차원의 재조사가 이뤄져야
▼ 1975년 8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장례미사
"세상 일, 알 수 없다."
그랬다. 2003년 7월,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을 내가 맡게 되었음을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부끄럽지만 내가 처음 '장준하'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93년 3월 어느 날이었다.
노태우 군사정권이 끝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방송과 언론 역시 과거 '잊혀진 의혹'에 대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시청하게 된 방송이 문성근씨가 진행하던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였다.
당시 24살의 청년이었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던 '재야인사 장준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신선한 감동이었다. 장준하는 무소불위의 유신 독재 권력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을 두고 '밀수 왕초'라며 공개 집회에서 서슴없이 비판했다. 결국 그 대가로 장 선생은 '국가원수 모독죄'로 잡혀갔다.
독립운동가로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서, 그리고 다시 <사상계>를 펴낸 언론인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던 중 37번 체포되고 9번 감옥에 가야 했던 장준하. 어떻게 저런 분을 학교 교과서에서 볼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장준하 선생의 그 굽히지 않는 민주주의 열망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유족에게 사건 발생 알려준 '괴전화'의 정체는?
그런데 그런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아 숨졌다는 것이다. 방송을 보는 내내 정확한 사실을 잘 모르는 젊은 청년이었지만 그 당시 내 심정은 당연히 안타까웠고 너무나 답답했다.
"이제 우리는 장막에 가려진 장준하 사건의 한 구석을 조금 열어보았을 뿐입니다. 그 속에는 왜곡된 사실과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실이 뒤엉켜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에서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분들께서도 이제는 그 침묵을 깨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진실은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얻은 사회는 역사 앞에 언제나 떳떳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행자인 문성근씨가 장준하의 의문사를 다루는 2부작을 모두 마치면서 남긴 이 말은, 그래서 오랫동안 젊은 나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 누군가가 반드시 꼭 밝혀줘야 할 억울함이니 꼭 밝혀져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 10년. 놀랍게도 내가 그 사건의 조사관이 되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우연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발족한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 공채 시험에 응시한 후 일정한 수습기간이 끝나 나에게 배당된 사건이 바로 그 '재야인사 장준하 의문사 사건'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에게 다가온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10년 전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나서서 장 선생의 억울함을 규명하고 밝혀주기를 기대했던 그 간절한 심정처럼 부족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이 의혹을 밝힐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 하고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한편, 퍼즐 조각을 찾듯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던 우리 조사팀이 제일 알고 싶었던 진실은 하나였다. 누구나 궁금해 했고 지금 역시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 바로 사건이 발생한 1975년 8월 17일 오후, 장준하 선생의 집에 걸려왔다는 '괴 전화의 실체'였다.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당일 오후 3시경,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한다. <여성 동아> 1983년 12월호에 실린 김희숙 여사의 진술이다.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오후) 3시경이었어요. 집에는 저와 두 딸, 그리고 막내아들만 있었는데 전화를 받은 건 막내였어요. 한 1분 정도나 통화를 했을까요. 산에 올라 가셨다가 떨어지셨는데 서울서 사람들이 많이 와야 모셔올 수 있다고 하더래요. 목소리는 처음 듣는 사람이었구요."
유족이 처음 장준하 선생 사건에 대해 의혹을 품게된 시작 역시 이 전화 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1975년 당시 전화는 지금처럼 흔한 때가 아니었다. 실제로 조사 과정에서 확인해보니 사건 당시 장 선생이 사망한 포천 약사봉 인근에 설치되어 있던 전화는 단 한 대였다. 바로 이장 집에 설치된 행정 전화가 유일했다.
그런데 이처럼 전화가 흔치 않던 그 시대에 누구인지 자신도 밝히지 않은 이가 장 선생의 사고를 집에 알려준 것이다. 더구나 그 시각은 아직 장 선생의 사고가 경찰에 접수도 되지 않았으며 시신 역시 추락한 사고 현장 부근에 그대로 안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또한 사고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중 누구도 이런 전화를 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는 상황에서 그 괴전화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문제는 유족의 입장에서 매우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일부 협조받은 중앙정보부 문서를 꼼꼼히 확인하던 그때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전에도 수없이 봤는데 그전에 보이지 않던 문서가 있었다. 놀랍게도 문제의 괴 전화를 한 이가 누구인지를 기록한 1975년 8월 17일자 중앙정보부 생산 '중요 상황 보고서'였다.
중앙정보부 '중요 상황보고'에 적힌 괴전화의 주인공
"장준하는 8. 17 08:30 호림산악회(서울운동장 앞 소재) 회원 일행 41명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소재 운악산으로 출발 등반 도중, 동일 14:40분경 동 운악산 약사봉 계곡에서 실족으로 추락,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음. 시체는 검사 지휘를 받기 위해 사고 현장에 보존중이며 현지 경찰 3명이 현장을 경비 중에 있는데, 동 일행인 김용환(동대문구 이문동 거주)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준하 부인 및 가족 등이 20:30경 현장에 도착하였음."
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요 상황보고'라는 제목으로 1975년 8월 17일 오후 9시 작성했다는 이 한 장의 문서를 보면서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그 충격으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이름을 한자 한자 읽고 또 읽었다.
김․용․환
목격자였다. 장준하 선생의 사고 현장을 목격했다며 그동안 주장해 온 바로 그가 그동안 유족에게 전화하여 사건을 알려온 그 괴전화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중앙정보부 문서에 그렇게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직접 확인한 우리조차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의심했다. 정말 이 문서에 적혀 있는 이 김용환이 정말 목격자라는 그 '김용환'인지부터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용환'이라는 이름은 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만 보더라도 이들이 동명이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안에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냥 이름 석자만 있었다면 장담할 수 없겠으나 대상자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는 주소 덕분이었다. 중정 문서에서 전화를 했다는 김용환의 이름 옆에 '동대문구 이문동 거주'라고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 이는 목격자 김용환씨의 1975년 당시 주소와 일치했던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동 일행인 김용환'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바로 그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보한 이 중정 문서가 정말 신빙성 있는 자료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 당시 중정에 근무했던 관련자를 찾았다. 문제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부서의 책임자였던 H였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해 "반정부, 반체제 인물에 대한 24시간 감청을 통한 정보 수집"이었다고 밝히면서 문제의 문건에 대해 "문서에 기재되는 실명은 사실로 확인된 것이며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면 보고서에 정확하게 기재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답했다.
이를 뒷받침 하는 진술 역시 줄을 이었다. 또 다른 중정 관계자의 진술이었다. 그들은 "8월 17일자 '중요상황 보고' 내용 중에 장준하의 집에 전화했다고 적혀 있는 것은 해당 국에서 감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그렇다면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전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진술했다.
"중앙정보부 문서의 기재 내용이 정확한 사실이며 그렇지 않으면 실명을 기재하지 않는다"는 중정 관계자의 진술을 통해 마침내 괴전화의 실체가 누구인가를 확인한 그날, 우리는 이 새로운 의혹에 대해 김용환씨가 뭐라고 답변할지 궁금했다.
중정 문서에 대해 묻자, 김용환 "모두 조작이다"
"장준하의 집에 전화하여 사고 사실을 알린 적이 없는데 중앙정보부 문서에 제가 전화했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김용환'씨를 상대로 중정 문서에 기재된 내용을 토대로 사실 여부를 묻자 그는 부인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부인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의 반응은 더 강렬했다. 이 문서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역시도 잘 알기에 그의 반응은 절박했다.
나아가 그는 아예 "중앙정보부 문서는 조작"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앙정보부가 왜 진술인이 하지도 않은 행위를 했다며 보고서를 조작했겠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라고 답하며 거듭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랬다. 어쩌면 그의 주장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가 전화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앙정보부의 문서가 잘못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중정 생산 문서에 그렇게 기재되어 있으면 그것은 사실'이라는 중정 관계자 진술을 복수 이상으로 확보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용환씨는 사건 발생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진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파출소에 있었다고 하는 사건 발생 당일 오후 그를 당연히 봤어야 마땅할 파출소 경찰관 4인은 입을 모아 그를 본적이 없다고 분명히 확인했다. 또한 포천경찰서에서 밤을 새웠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사건 현장을 방문한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 등은 8월 18일 오전 1시경, 전혀 다른 장소인 사건 현장에서 목격자를 분명히 만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이들의 진술 역시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같은 사례는 차고 넘쳐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모든 기록과 증언이 괴전화의 실체가 바로 자신임을 밝히고 있는데 그 혼자 또다시 아니라고 부인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목격자'이며 '참고인'이었다.
2004년 1월 14일. 의문사위는 '장준하 사건 중간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은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국가정보원측에 협조되지 못한 추가 문서를 공개하도록 거듭 촉구했다. 그 날로부터 어느덧 만 8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다.
'애증'이라는 단어가 있다. 김용환씨에 대한 나의 감정이 그렇다. 적어도 15번을 만나면서 나는 그와 적지않은 시간을 함께했다. 몇 번은 그와 같이 밥도 먹었다. 조사가 늘 날카롭게 대립하며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연세가 많은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말 어느 순간에는 그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언행이 안타까워 부질없는 말도 한 적이 있다.
"선생님. 이 사건이 왜 이렇게 복잡해졌는지 아세요? 정말 제가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 한 축은 바로 선생님 책임입니다. 왜 자신의 행적에 대해 자신있게 설명을 못하세요? 내가 본 것은 무엇이고 내 행적은 이거다. 이렇게 딱 부러지게 하셨으면 이 사건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정말 우리가 납득할 수 있게 말씀 좀 해주세요."
'아무리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장준하 선생님은 약사봉 등반 중에 실족하셔서 추락하셨고, 그래서 돌아가셨다. 그걸 내가 현장에서 봤다. 무얼 더 얘기하라는 것인가.'
'이 사건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10분이면 조사가 끝나요. 그렇게 길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2004년 8월호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김용환씨가 한 말이다. 그는 <월간 조선>과 이렇게 인터뷰하기 전에 여기서 말한 그 '복잡한 것도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초면 끝날 진실'을 우리에게 설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했다. 조사관인 내가 '머리가 둔한 때문'이라면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겠다.
그래서 그가 <월간 조선> 인터뷰 후 다시 8년이 지난 2012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장준하 사건은) 사실상 종결된 것 아니냐. 두 번에 걸쳐 철저하게 조사를 했으니 이미 결론이 난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아둔한 조사관 고상만은 다시 묻는다.
1975년 8월 17일, 그날 장 선생과 포천 약사봉에서 당신이 본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당신이 만난 이들은 누구이며 장 선생의 집에 전화를 걸어 사고 사실을 알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장준하 사건, 김용환 위해서라도 재조사 이뤄져야
▼ 광복군 장교 시절의 장준하와 일본 황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이 글을 쓰기 전, 솔직히 많은 고심을 했다. 혹여 이 글로 인해 그에게 무리한 비난이 쏟아지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고민하고 또 고심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첫 번째는 '숙명'이었다. 조사관으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양심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을 직접 조사한 조사관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밝히고 알려주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독배'라고 판단했다.
특히 "장준하의 실족사를 목격한 사람이 있고 과거 의문사위에서 명백하게 조사하여 진실이 다 밝혀진 것임에도 또다시 무고한 이를 억울하게 몰아간다"며 비난하는 이들에게 왜 우리가 목격자라는 그의 주장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것인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를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반드시 재조사 되어야 함을 말하고 싶었다. 터놓고 말해 재조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장준하 선생 사건을 '박정희 유신 정권에 의한 타살'로 믿을 것이다. 반대로 김용환씨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매우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굳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김용환씨에게 그가 진실을 밝힐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진짜로 무고하다면, 억울하다면 이것이 밝혀질 수 있는 방법은 이 모든 의혹에 대해 재조사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적 진술과 다르게 말하는 전직 검사와 경찰, 그리고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문서가 그가 주장한 것처럼 잘못된 것이라며 바로 잡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지난 2004년 8월호 <월간 조선>과 김용환씨가 나눈 인터뷰 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주장을 보고 매우 기뻤다.
"난 차라리 국정원이 장준하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면, 다 공개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사실도 없겠지만 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 이 모든 의혹을 규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그의 주장처럼 지금 존안되어 있는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의 '존안 문서 확보'다. 장 선생 사망 후 현재까지 장 선생의 사망을 전후한 행적을 알 수 있는 문서는 이 글에서 언급한 김용환씨 관련 문서, 단 '한 장'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1975년 8월 17일 오후 9시 이후 '추가 보고' 문서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판단하는 것은 우리만의 추측이 아니다. 이 건과 관련해 조사했던 중정 관계자들은 "이같은 중요 상황 보고가 있었다면 당연히 이후 사건 현장을 방문한 검사, 그리고 검안했던 의사 등과 관련한 추가 상황 보고가 있어야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이 사건 조사관으로서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많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재조사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끝내 장준하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조사가 이뤄지지 못한다면 나에게 맡겨진 또 다른 '숙명'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장준하 선생이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는 반드시 재조사 되어야 한다.==2012.08.27 오마이뉴스 고상만기자==
“1975년 숨지기 직전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유신정권을 깨부술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낌새를 챈 중앙정보부(중정) 요원들은 ‘장준하 같은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수행비서였던 나를 40여일 고문하며 간첩단 사건을 꾸며내려 했지요. 유신정권과의 팽팽한 긴장 속에 장 선생은 등산 도중 변을 당한 겁니다.”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하기까지 3년 가까이 수행비서로 경호를 맡았던 박세정(72)씨는 “장 선생이 추락사한 게 아니라 타살당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박씨는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의 8평 임대주택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37년간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털어놨다.
중정, 나를 남파간첩으로 몰고
장 선생 포섭했단 각본 만들어
지옥같은 고문 끝 성불구자 돼
장 선생, 함석헌·김대중과 접촉
유신체제 무너뜨리려 거사 준비
미군첩보대 훈련 받은 장 선생
자일없이 그곳서 추락 말 안돼
-추락사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뭔가?
“장 선생은 미군전략첩보대(OSS) 특수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산악 전문가다. 그런 사람이 자일 없이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75도 가파른 절벽에서 추락했다니 어느 누가 믿겠나. 내가 중정에서 고문당하고 제주도에서 요양하고 있던 틈을 그들이 노렸던 것 같다. 장 선생은 목격자 김용환씨의 강권으로 등산에 따라나선 것이 분명하다. 1993년 민주당 조사 때 김씨가 ‘중정의 사설정보원’이라는 중정 직원의 증언이 나왔는데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번에 유골에서 명백한 타살 증거가 나왔는데도 진상 규명을 하지 못하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숨질 무렵, 장 선생은 어떤 정치적 활동을 했나?
“선생은 1974년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그해 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박 정권을 무너뜨리기 어렵다. 비상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자주 말했다. 숨지기 직전 재야 원로 함석헌 선생, 왕래가 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은밀히 만났다. 75년 7월 말께는 광주광역시의 홍남순 변호사에게 밀지를 전달했다. 박 정권에 결정적 치명타를 가할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장준하를 철저히 감시·추적해 보고하라’고 요원들에게 지시하고 ‘장준하 1일 보고’를 작성해 행적을 추적했다. 73년 나를 간첩으로 조작하며 고문을 자행하던 중정 수사관들도 입만 열면 ‘장준하 같은 빨갱이는 죽여야 된다’고 떠들어댔다. 어떤 형태로든 선생을 죽일 것 같았다.”
-어떤 연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했나?
“중정 정보요원들은 73년 2월 총선 때 장 선생이 출마한 서울 동대문을 선거구에서 부정선거에 강하게 항의하던 나를 노렸다. 수행비서였던 나를 간첩으로 몰아,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방해물인 장 선생까지 간첩으로 엮으려고 꾸며낸 ‘각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 친척의 빨치산 경력을 빌미로 ‘거물 남파간첩’ 혐의를 씌워,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작전을 벌였다. 결국 그해 가을 붙잡혀 지옥 같은 고문을 당했다.
40일 동안 독방에 갇혀 ‘고문 기술자’한테서 무릎관절 뽑기, 거꾸로 매달기, 5일 동안 잠 안 재우기 같은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나를 ‘북에서 김일성 부자를 세 번 만났고 고등 밀봉교육을 받았으며, 강원도 동해안 섬을 거점으로 침투해 장준하 선생에게 거액의 공작금을 건네주고 각계각층을 포섭해 국가 전복 음모를 획책했다’는 각본의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했다. 협조하면 출세도 시켜주고 벼락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회유도 했다. 단식하며 저항하자 고문기술자가 주요 부위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성불구자로 만들었다.”
-장 선생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함석헌 선생의 씨알농장에서 일하던 중 72년 함 선생의 서울 원효로 자택에서 장 선생을 처음 만났다. 73년 2·27 총선을 앞두고 함 선생의 권유로 장 선생 경호를 맡게 됐다. 보수도 받지 않고 일하는 내게 장 선생은 쌀포대를 건네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을 총선 캠프에 합류해 이부영·김도연씨 등과 함께 선거참관인으로 개표를 감시했다. 서울대 사범대에서 개표가 시작돼 장 선생이 압도적 1위를 달리는데, 갑자기 참관인들을 내쫓은 뒤 여당 후보의 몰표가 쏟아졌다. 참관인이던 나는 개표를 중단시키며 항의하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국가원수 모독죄, 공무집행 방해죄 등으로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급히 달려온 장 선생이 정보요원들에게 호통쳤다. ‘박정희 깡패집단의 부정선거 음모를 알고도 선거판에 뛰어든 내가 잘못이다. 분명히 내가 이긴 선거지만 포기하고 돌아설 테니 아무 죄 없는 참관인을 당장 풀어내라.’ 하찮은 청년의 인권을 위해 미련 없이 국회의원직을 포기한 거인의 풍모가 지금도 선하다.”
박세정씨는 홍남순 변호사, 이해학·문대골 목사 등의 증언에 힘입어 2002년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2012.08.29한겨레 박경만 기자==
100일간 6명이…어느 영구임대아파트의 자살행
지난 5월부터 자살 줄이어6명 모두 지자체 관리밖주민이 서울시에 글 올려“삶 포기 않게 도와주세요”
아파트 화단이 동트기 전 ‘붉게’ 물들었다. 새벽 5시20분 이도희(94)씨가 가동 13층 집 베란다에서 잠든 손자를 뒤로하고 투신했다. 14평 집 안방에선 장애 아들 내외가 자고 있었다. 지난 3일이다. 나흘 뒤 이씨의 동네 단짝 차배숙씨도 나동 6층 복도 밖으로 몸을 던졌다. 오후 6시45분께 늙은 아들에게 차려준 밥상을 치운 뒤다. 복도 벽은 차씨가 감당할 높이가 아니다. 98살 노파는 유모차를 끌어와 버겁게 딛고 올랐다. 일주일 뒤인 14일 다동에 거주하는 21살 이준호씨는 외조부모가 잠든 13층 집 앞 복도에서 뛰어내렸다. 밤이었다.
홀로 사는 손한수(63)씨는 집안에 설치된 간이소화기에 빨랫줄을 묶고 목을 맸다. 누구를 기다렸는지 현관문을 열어뒀다. 이웃이 발견했다. 5월15일 가정의 날이었다. 두 발목도 줄에 감겨 있었다.
보름 전인 5월1일 나동, 경찰이 김수연(35)씨가 잠근 욕실을 열어젖혔다. 문짝 틈새까지 두른 청테이프가 뜯어졌다. 욕실 안 김씨는 다 타버린 번개탄 옆에 누워 있었다. 안방엔 유서가 있었다. “나를 화장해 바다에 뿌려줘.”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김종석(22·지적장애 2급)씨는 아버지가 음주폭력으로 입건된 사이 투신자살했다. 7월20일이다. 나동 1층에 사는 김씨가 15층까지 올라가는 마지막 길을 승강기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기억했다. “불안해하며 계속 층수만 보더라고요. 1층, 2층, 6층, 15층…. (경찰이) 그러고 바로 뛰어내린 거래요.” 따로 살아왔던 김씨의 형(31)이 울며 말했다.
서울 강북권에 위치한 이 영구임대아파트엔 1780여가구 4250여명이 산다. 지난 5월부터 100여일 동안 이도희·차배숙·김수연·김종석·손한수·이준호(모두 가명)씨 등 주민 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단일 거주환경에서 단기간에 이처럼 많은 이들이 잇따라 자살한 사례는 국내에서 찾기 힘들다.
3~4년 가중된 경제난과 박탈감 등이 이곳 빈민들의 삶을 무력화한 결과로 분석된다. 이 아파트의 최근 자살률은 1000명당 1.41명꼴이다. 2010년 전국 평균 자살률인 1000명당 0.31명, 서울시 0.26명과 단순 비교하면 4.5~5.4배 차이가 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0.11명)의 12.8배다.
자살한 6명 가운데 단 한명도 자치구나 정신보건센터, 서울시 지원을 받는 단지내 사회복지관의 사례관리·상담군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주변 아파트 주민 여럿은 이곳을 ‘거지아파트’라 부른다. 재력·건강·소속(커뮤니티)이 없는 ‘3무 시민’으로 공공복지체계의 사각에 놓여 있다.
단지내 한 주민이 지난 16일 서울시 누리집에 글을 올렸다. “존경하는 서울시장 및 공무원 여러분 우리 동네에 자살 방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시고…, 답답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주민들에게 존엄성과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지난 3월 시행된 ‘자살예방법’에 따라 서울시는 다음달, 보건복지부는 연말께 자살예방 종합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미 세상을 뜬 여섯 망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영구임대아파트 역사
영구임대아파트는 1990년 10월 서울 도봉구 번동에서 처음 입주자들을 맞았다.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수급자, 새터민, 유공자 등에게 거주 자격이 주어졌다. 1993년 사업이 중단되고, 정권에 따라 공공임대아파트나 국민임대아파트 등이 등장했다. 영구임대아파트는 임대아파트 가운데서도 최저빈곤층의 주거공간으로, 사회 전반의 차별이 집중된다.
전국엔 영구임대아파트가 20만가구가량, 국민임대 아파트가 37만가구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서울시 산하 에스에이치(SH)공사가 공급·관리하지만, 자살 현황은 파악하지도,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도 않는다. 에스에이치공사가 일부 제공한 자료는 경찰 집계와 차이가 컸다. 영구임대아파트에서의 죽음을 따로 연구한 정부나 학계의 보고서도 없다.
==2012.08.28 한겨레 임인택기자==
전태일 재단에서 저지당한 박근혜, 쌍용차 분향소 향했다가 방문취소
민주열사추모연대 회원 등 10여명 " 박근혜 쇼 그만해라"
박근혜 후보는 오전 10시 20분께 전태일재단 앞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박근혜 후보는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불편하게 해드린 건지 모르겠다"며 "오늘 찾아뵙지 못하고 다른 기회에 뵙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발길을 돌린 박근혜 후보는 청계천에 있는 전태일 다리로 이동하고 있다. 박 후보는 이곳에 있는 전태일 동상에 헌화할 예정이다. 한편, 박근혜 후보 쪽은 전태일 열사의 친구였던 김준용 국민노동조합총연맹 상임자문위원을 통해 박계현 사무총장에게 연락해 재단 방문 약속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태일 열사의 유족인 전순옥 민주통합당 의원과 전태삼씨는 박 후보의 재단 방문 사실을 뒤늦게 통보받았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전태일재단을 방문할 예정인 가운데,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재단 입구 앞에서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가 쌍용차노조 조합원, 민주열사추모연대 회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이 통하는 길로 와야 한다, 너무 일방적인 통행이다, 맞이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며 박근 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28일 오전 9시 45분께 쌍용차노조 조합원과 민주열사추모연대 회원 10여 명이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재단 입구를 막아섰다. 현재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 30분으로 예정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을 반대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는 "박근혜 후보는 쌍용차 분향소에도 들리지 않았고, 이런 곳을 방문하려면 마음의 진실을 앞세워야 한다"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이 통하는 길로 와야 한다, 너무 일방적인 통행이다, 맞이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며 박근혜 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 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김명운 민주열사 추모연대 의장은 "이소선 여사가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방문을 거부한 것은 노동자 탄압세력의 대표인 박근혜 후보와 만나서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었다"며 "전태일 열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죽인 게 아닌데, (박근혜 후보가) 왜 사과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전태일 열사는 산업화 사람목숨보다 돈만 목적으로 사는 사회에 경고하고 노동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분신을 선택한 것"이라며 "박근혜 후보는 쌍용차 분향소나 용산 참사현장에 가 보셨나, 그렇지 않고 여기 와서 손 한번 붙잡는다고, 국민 화해가 이뤄지나, 쇼는 그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쪽은 앞서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등과 연락해 이날 오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의 빈소에 헌화·조문하고 재단관계자들과 환담 한 뒤, 전태일 열사 동상을 서 있는 청계천 다리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날 박근혜 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이 제대로 이뤄질지 미지수다.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민주통합당 의원이 박근혜 후보의 전태일 재단 방문에 대해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전순옥 의원은 27일 밤 낸 성명에서 "(박근혜 후보가) 비정규직, 최저임금, 청년실업, 가계부채 등 이 나라 노동현실의 절박함을 온 몸으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정책을 가장 앞에 세울 때 나를 포함한 이 나라 국민들이 전태일 재단 방문의 진심을 믿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쌍용자동차 희생자와 유가족들, 용산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먼저 찾고 가장 나중에 전태일을 찾아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한 "과거 5.16쿠데타와 유신, 군사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다음은 전순옥 의원의 성명 전문이다.
==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민주통합당 의원 성명 발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내일 전태일 재단을 방문해 전태일 정신을 살리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소식에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박근혜 후보가 좋은 취지로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고자 하는 것이겠지만, 이 나라 노동의 현실은 그렇게 쉽게 개선될 수 없을 만큼 문제투성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현재의 진실은 미래에 대한 지향과 과거의 삶이 일치할 때 빛을 발하는 것이다. 과거 5.16쿠데타와 유신, 군사독재에서 지금의 정수장학회까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지금의 말과 행동은 그 진실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전태일 재단의 방문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면 비정규직, 최저임금, 청년실업, 가계부채 등 이 나라 노동현실의 절박함을 온 몸으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정책을 가장 앞에 세울 때 나를 포함한 이 나라 국민들이 전태일 재단 방문의 진심을 믿고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쌍용자동차 희생자와 유가족들, 용산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먼저 찾고 가장 나중에 전태일을 찾아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969년 스물 한 살 전태일이 노동자의 현실과 그 대책에 대해 피와 눈물로 써내려간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낸 지가 4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 땅에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오는 9월 3일은 나의 어머니 이소선의 첫 번째 추모일이다. 나 뿐만 아니라 이 나라 노동자들이 모두 어머니라고 불렀던 그는 1970년 척박한 노동현실을 고발하며 산화한 전태일의 어머니로서 이 땅의 노동자들과 함께 전태일 정신을 맨몸으로 지켜왔다. 그들의 바램은 오직 하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고 바로 지금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이 엄수된 지난 2011년 9월 7일 낮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앞 '전태일 다리'에서 열린 노제에서 고인의 영정사진이 아들의 동상앞에 놓여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재단 방문 무산 이후 진행된 청계청 6가 '전태일 동상' 헌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재단 방문을 저지한 김정우 쌍용차노조 지부장은 동상 앞까지 후보를 쫓아와 박 후보의 헌화를 막았다. 김 지부장이 동상 앞에 주저 앉아버리자, 박 후보는 5초 정도 머뭇거리다 국화다발을 김준용 국민노총 상임자문위원에게 건넸다. 김 자문위원은 박 후보의 재단 방문 등을 추진한 인사다. 김 자문위원이 놓은 헌화 다발은 바로 난간 밑으로 치워졌고 이후 한 학생에 의해 건너편으로 던져졌다. 박 후보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장소를 찾아가 한동안 김 자문위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김 자문위원에 따르면, 박 후보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화해·협력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김 자문위원이 "노동자가 행복한 나라를 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니, 박 후보는 "꼭 그렇게 하겠다"면서 "오늘 못 뵌 분들에게도 뜻을 전해달라, 유족들에게도"라고 답했다. 이후 박 후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차를 타고 자리를 떴다. 김정우 지부장 등은 박 후보의 차에 몸을 던지며 "열사의 정신을 모독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박 후보를 안내한 김 자문위원도 쌍용차노조원 등으로부터 "어떻게 여기까지 (박 후보를) 데리고 오나, 제 정신인가"라는 등 거친 비난을 받았다. 한편, 박 후보 측 관계자는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전태일재단 방문 준비를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 무산돼 안타깝다"며 "그쪽에서 오지 말라면 못 가는 것이지,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당초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를 방문할 예정이었던 박근혜 후보는 방문 일정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후보 쪽 이학재 비서실 부실장은 이날 <오마이뉴스>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전태일 동상 헌화 이후 일정은 없다"고 밝혔다. 한편, 쌍용차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 앞에는 박근혜 후보 방문과 관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경찰 기동대 버스가 배치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박근혜 후보가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전태일재단에서의 반발 등을 고려해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 방문 일정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후보가 현재 쌍용차 노조 분향소가 있는 서울 덕수궁 대한문으로 가고 있다. 이창근 쌍용차노조 기획실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박근혜 후보 쪽으로부터 잠시 후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박근혜 후보의 쌍용차 분향소 방문은 오늘 일정에 없었던 것으로, 갑작스럽게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 쪽은 이날 전태일재단 방문 취재를 위해 동행했던 취재진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이 거부된 가운데,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를 찾은 박 후보가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려하자,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바닥에 누워 헌화를 막고 있다.
쌍용차 노조원들은 박근혜 후보가 방문하면 만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정우 지부장은 "22명이나 죽고 나서 왜 오려고 하느냐"면서도 "오면 만나서 쌍용차 국정조사를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노조원 고동민씨는 "지난 3년 간 박근혜 후보가 쌍용차 문제에 대해서 '기업 내부 문제가 아니냐'면서 전경련 수준의 언급만 했다"면서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사회적 문제가 된 만큼, 여당의 대선 후보가 된 박근혜 후보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뿐만 아니라 대책과 돌아가신 분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전했다. 박 후보 물론, 새누리당 주요 인사 중 쌍용차 분향소를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박 후보는 쌍용차 노조원들의 박근혜 캠프 앞 농성에 대해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쌍용차 노조원은 지난 8일부터 '국정조사 및 청분회 실시', '쌍용차특별법 재정 촉구' 등을 주장하며 농성을 시작했다==2012.08.28 오마이뉴스 선대식 기자==
민주, "전태일 방문 의미 있지만 입법 노력부터"
박근혜 전태일 재단 방문에 " 노동법안 개정 동참하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전태일재단을 방문하는데 대해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전태일'의 문제에 답하는 게 먼저"라면서 비정규직 문제해결과 최저임금 인상 관련 입법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민주통합당 경제민주화 추진 의원 모임은 28일 낸 성명서에서 박 후보의 전태일재단 방문에 대해 "매우 의미 있는 일정"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번 방문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현실의 노동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고 입법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모임은 "8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문제와 박근혜 후보가 '5000원도 안 되냐'고 되물었던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놔야 한다"며 "입법과 제도화 노력 없이 말로만 하는 행보는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며 "박근혜 후보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최저임금 인상에 적극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들 의원이 박 후보에 동참을 요구한 법안은 노동자의 사용기간 초과 및 불법 파견시 자동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대한 법률' 개정안과 현행 시급 4580원인 최저임금을 전체 노동자 평균 정액급여의 50%(5410원) 이상으로 인상하는 내용의 최저임금법 개정안이다. 이목희·김현미 의원 등과 함께 국회에서 이 성명을 발표한 은수미 민주당 의원은 "현실의 전태일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한 마디 말이 없고 심지어 최저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는 박근혜 후보가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는 것은 전태일을 두번 죽이는 일이 아니냐"고 우려했다. 은 의원은 "1970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전태일은 죽었지만, 2012년 현재 약 400만 명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4580원인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200만 명"이라며 ▲ 쌍용차 부당 정리해고 ▲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 SJM·만도·유성기업·3M·상신브레이크 등에서 발생한 용역폭력 ▲ 현대자동차의 대규모 불법파견 혐의 등을 열거했다은 의원은 박 후보를 향해 "(전태일 재단 방문보다는) 정리해고로 고통받고 용역폭력에 짓밟히며 비정규직으로 전전해야 하는 수많은 현실의 전태일의 문제에 답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2.08.28 오마이뉴스 안홍기 기자==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인 전순옥 민주통합당 의원
"박근혜 후보와 어떻게 화해할 수 있겠느냐."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 재단을 방문한다. 이에 대해 전태열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 민주통합당 의원 쪽은 박근혜 후보의 방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최근 박근혜 후보는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된 다음 날인 지난 21일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이 있는 봉하마을에 방문하는 등 이른바 '국민대통합' 광폭 행보에 나선 상황이다. 9월 3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씨의 1주기를 앞두고 박근혜 후보가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는 것은 산업화 시대에 고통을 겪은 노동자들과의 화해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보인다.하지만 전순옥 의원 쪽은 "박근혜 후보의 행보에 진정성이 담기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전 의원은 이미 4·11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끄는 새누리당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전 의원은 이를 거절하고 민주통합당 의원이 됐다. 전순옥 의원실 관계자는 "전 의원은 새누리당의 영입제안을 거절하면서 '역사적으로 봤을 때 (새누리당과 궤를 같이 하는 세력이) 오빠인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도록 하고 어머니인 고 이소선씨를 핍박했다, 새누리당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한편, 피복공장 재단사 출신의 노동자 전태일 열사는 산업화 시대인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이후 그는 산업화 시대에 희생된 노동자들의 상징이 됐고, 그의 죽음은 노동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전태열 열사는 분신 전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단축해 달라",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한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해 달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2012.08.27 오마이뉴스 선대식 기자==
<인터넷 오마이뉴스,한겨레에서 퍼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