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의 통찰,
“인생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문제들이 해결되면 인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내 가슴을 깊이 후벼팠다.
문제가 해결되면 인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읽힌다.
문제(고통)는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구조다.
삶은 본래 긴장 위에 서 있다.
욕구와 현실 사이의 간격, 이상과 조건 사이의 차이,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팽팽함.
이 긴장이 바로 삶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보어가 실제로 이런 맥락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게 이 문장은, 삶이 왜 ‘고'일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준다.
삶은 구조적으로 이미 고를 품고 있으며, 그 고를 떠난 어떤 별도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구조를 갖고, 그 구조 안에서 생동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주는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으로 흐른다.
그 가운데에서 생명은 질서를 유지하려 애쓰며 존재한다.
무질서로 향하려는 자연의 경향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생명의 운동.
이 긴장 속에서 에너지는 소모된다.
그리고 에너지 소모는 생명에게 고통 등의 감정으로 드러난다.
동물은 감정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신을 보호한다.
질서를 유지하려는 분투 속에서 우리는 피로를 느끼고, 불안을 느끼고, 고통을 느낀다.
결국 우리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긴장,
그 긴장에서 비롯되는 고통이라는 구조 속의 존재다.
그 구조가 완전히 붕괴된다면(죽음), 우리가 말하는 ‘삶’도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없는 것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스친다.
삶이 고통의 구조라면 차라리 끝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죽음은 내가 유지하던 이 구조의 해체일 뿐이다. '무'화이다.
자연은 여전히 조건 속에서 생동한다.
나는 그 생동하는 자연이 잠시 그려낸 한 조각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하나의 의지일 수 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이 구조를 바라보고,
그 구조를 관조하며 생동하는 길 또한 선택일 수 있다.
구조를 모른 채 휘둘리는 삶과,
구조를 보며 휘둘리지 않는 삶은 다르다
관조의 눈이 열리면,
'죽음을 통한 무'화가 아니라 평온이라는 가능성이 보인다.
붓다가 말한 길은 도망이 아니었다.
죽음으로 구조를 붕괴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관조하여 그 안에서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무로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고요 속에서 생동하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윤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붓다가 말한 윤회는 고정된 ‘식’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 다니는 영혼 이동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는 12연기를 통해
무명에서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로 이어지는 조건의 흐름을 설명했다.
이것은 실체의 이동 경로라기보다,
조건이 조건을 낳는 반응의 구조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생기고,
행이 있으면 식이 일어나고,
그 식이 다시 다음 조건을 낳는다.
윤회란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기 전에,
이미 지금 이 순간 반복되는 조건의 흐름일 수 있다.
탐욕이 집착을 낳고,
집착이 불안을 낳고,
불안이 다시 집착을 강화하는 이 자동반응의 사슬.
이 조건의 반복이 곧 윤회라고 나는 본다.
어떤 스님이 육체의 소멸 후 다른 몸으로 이어지는 윤회를 부정했다 하여,
그 말이 반드시 붓다의 뜻을 거스른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윤회의 종식이란
육체가 사라진 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12연기의 구조를 바로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조건을 사실대로 아는 것.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러면 우리는 고통이라는 파도를 타되,
그 파도를 붙잡으려 허우적거리지는 않는다.
윤회는 미래의 형벌 제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반복되는 반응의 구조다.
그래서
“윤회가 없다면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윤회를 보상과 처벌 체계로 이해할 때만 성립한다.
그러나 연기의 세계에서
행위는 즉시 구조를 만든다.
탐욕은 즉시 마음을 거칠게 만들고,
거친 마음은 즉시 불안을 낳는다.
집착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다시 집착을 강화한다.
이것이 현재적 윤회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관조하는 순간,
문제는 나를 묶는 사슬이 아니라 깨어 있음의 조건이 된다.
윤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통찰의 대상이다.
관조는 도망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의 자유다.
여기서 다시 보어의 그 선언을 가져와 본다
“인생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문제들이 해결되면 인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첫댓글 애초에 불교는, 윤회가 형벌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만...
불교에서 윤회는, 스스로 찾은 행복을 구현하는 흐름입니다.
제목 '윤회는 형벌이 아니라 구조다'
네. 거슬릴 수 있어서 제목을 바꿨습니다.
대화는 화자의 수사학이 아니라, 청자의 심리학이다.
저 본글에 보어의 언설은 그의 입을 떠난 순간 청자인 나의 것이 되어 불교로 피어올랐습니다.
오늘 제목도 사실 청풍명월님과 황벽님의 대화 내용을 보다가 착안한거구요.
보어의 선언을 보다 가슴 저릿했는데, 마침 청풍명월님의 "재회 윤회" 글을 보고 연결해본 글입니다.
하하
화자들의 수사학이, 청자인 나의 심리학으로 피어난거죠.
거슬리지는 않구요, 단순히 (불교에서는) 형벌이 아니란 겁니다.
고통도 연료가 된다는 것, 그거는 뭐... 뭐든 현상은 연료가 됩니다. 불교에서도 긍정하는 바구요.
흔히 “윤회가 없다면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이야기를 하지만요. 개인적으로, 그런 반문은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가 필요한 분들도 있기는 하니까요...
똥파리가 똥냄새에 이끌리고 그것이 스스로 찾은 행복이고, 꿀벌이 꽃향기에 이끌리고 그것이 스스로 찾은 행복이고... 그렇습니다.
똥냄새가 행복이고 싶냐, 꽃향기가 행복이고 싶냐?
똥냄새가 행복이면 좋겠고 스스로 그렇다면, 그냥 뭐 그렇게 살면 되는 겁니다. 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구요.
부처님 불국토는 '똥냄새'와 '똥냄새가 스스로 찾은 행복인 것'도 평등하게 수용합니다. 차별하지 않으니까...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하니까...
고통과 관련해서는 그래요. 밀어내는 힘을 발생시키는 수온... 똥냄새가 스스로 찾은 행복이면, 꽃향기가 고통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꽃향기를 밀어낸다고... 보통 수온은 힘을 발생시키니까...
단지 그 뿌리를 뽑아 그 호불호 등이 없이 비로소 평등하나니, 더이상 그 속박 즉 그 태어남은 없다.
스스로 찾은 행복을 실현한다는 말은 참 무서운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행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또한 그 과보로 인한 이런저런 괴로움도 세트로 떠안아야 하니깐요..
상대적으로 안전한 행복 실현을 위해, 주가가 떨어지면 사려고 기다리고 있는데요
떨어질듯 하던 주가가 오를 때... 기다림에 상응하는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아 괴롭다.. ㅠ ㅠ
모이니까 중생이다...
똥파리는 똥파리끼리 모이고, 꿀벌은 꿀벌끼리 모입니다.
동류가 모인 즉 스스로의 행복, 스스로 찾은 행복을 파괴합니다.
똥파리는 똥을 두고 경쟁해야 하구요, 꿀벌은 꽃을 두고 경쟁해야 합니다.
줘패는 것이 스스로 찾은 행복이면, 마침내 그런 애들끼리 모이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줘패야만 하는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러한 세계 등을 육도 중 지옥계라고 합니다. 물론 줘패는 짓거리를 좀 잘 정서했으면, 수라계에 태어날 수도 있어요.
===
친구들의 관심을 받던 삼성전자 주식 거의 전부 처분했는데, 이후 50% 더 올랐어요. 혹 위안이 될지? 하하하
나름 안타깝긴 한데, 별로 큰 동요가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얼마전 친구랑 다음 이야기를 했는데요.
산업혁명은 200년 정도 걸려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지금 돈이 모이는 속도가 엄청나다. 그래서 그 기간이 10분의 1로 단축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새로운 산업혁명 시도가 성공한다면, 20년 안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주식 하락하기는 하나? 당연하지. 꾸준히 리스크 관리를 한 경험이 없으면, 기둘려라. 산업혁명 실패하면 폭락이고, 성공해도 20년은 걸리니까 충분한 기회는 있다.
충분한 기회가 있다! 가즈아!.. 가 아니라....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