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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으로 부르심과 이웃과의 관계(1)
엡 4:17-32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17-32 /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이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닫고 깜깜한 어둠에 갇혀 지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19) 그들은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불결한 생활 속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과 무분별한 욕망에 이끌려 그런 생활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21)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22)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을 뽑아 던지십시오.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이야 말로 육욕과 속임수로 가득 차서 속속들이 다 썩어 버린 지난날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23) 이제 여러분은 태도와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24) 여러분은 전혀 다른 새 사람,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이 되십시오. 25) [새 생활의 법칙] ㄴ)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한 몸의 지체인 우리가 서로 거짓말을 하면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셈입니다. (ㄴ. 슥8:16) 26) 혹시 분한 일을 당하더라도 원한을 품어서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기 전에는 다 잊어버리고 냉정을 되찾으십시오. 27) 여러분이 화를 내면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기 쉽습니다. 28) 만일 도둑질로 살아온 사람이 있거든 당장에 그 일에서 손을 떼고 그 손으로 정직한 일을 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29) 악담을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복이 되는 말만을 하십시오. 30)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 여러분에게 구원의 보증을 인쳐 주실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31) 심술궂고 불쾌한 태도와 성내는 버릇과 싸움과 가시 돋친 말과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버리고 32)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거룩하심으로 부름받은 성도는 옛것은 모두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17-2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다시 창조된 사람입니다. 처음 태어난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죄 가운데 있었으나, 성도는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죄로 인하여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원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 삶에서도 올바를 수가 있는 데 이것을 바울은 ‘의’라고 하였고, 세상과는 구별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을 ‘거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새 사람으로 재창조 된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기에 성도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7). 사도 바울도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고 하면서 성도가 버려야 할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모든 불경건하고 거듭나지 못한 이교도를 말합니다. 그런 이방인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며 무지하고 죽은 자같이 감각이 없으며 더러운 욕심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25-32) 성도는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사실인 것을 말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과장이나 진실이 아닌 내용을 덧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속여서도 안 되고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일이나 거짓된 변명을 하는 것 등도 포함됩니다. 주님은 미쁘신 분이십니다. 이는 사전적 의미로 ‘믿음직하다’ 또는 ‘진실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신뢰가 있어야 하며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노를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거룩한 분노(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와 악한 분노가 그것입니다. 악한 분노는 불의하고 부도덕하며 불경건합니다. 이런 분노는 성도가 피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옳은 분노라 할지라도 시간이 오래되면 적의가 생겨 악한 마음이 생길 수 있기에 하루가 끝나면 버려야 합니다. 오래된 분노는 마귀에게 틈을 줄 수 있기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자신이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적용: 당신이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주님께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다니엘 웹스터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까지 당신의 마음에 품었던 생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미국 역사상 훌륭한 지성 가운데 한 사람인 웹스터는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뢰입니다.“
< 설 교 >
변화는 계속되어야
엡 4:17-32 / 김상복 목사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17-32
2007년은 한국 교회에 대단히 중요한 해였습니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국 교회에 다시 한 번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해였습니다. 한국 교회 10만 성도가 상암운동장에 모여 예배를 드렸고, 각 교단들도 대형 집회를 열었으며, 선교단체와 개 교회들도 회개를 통한 부흥운동을 기대하며 한 해를 출발했습니다. 할렐루야교회도 1월 7일부터 1주일 동안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Transformation 2007’대회에 참석하였고, ‘우리를 새롭게 하여주옵소서’를 주제로 한국 교회의 소망에 동참했습니다. 이처럼 올 한 해 한국교회는 ‘부흥을 넘어서 변혁으로’가는 길을 추구해왔습니다. 한국 교회가 새로운 부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영적 부흥뿐 아니라 국가적인 대변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면서 부흥과 변혁을 추구한 한 해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영적인 방향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옛 성품과 습관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궁극적인 방향이 하나님 쪽으로 전환되는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첫 번째 변화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을 말 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입니다.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이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 하나님을 향한 방향의 전환이 꼭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속에 성령님이 오십니다. 내 속에 영원한 생명이 생겨서 다시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됩니다.
두 번째 변화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성장하는 변화입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나는 것처럼 영적인 생명도 우리의 가슴속에서 성장을 시작하고, 성장을 통해 우리 삶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부흥과 변혁”에 있어서 변혁은 이 두 번째 변화를 말합니다. 첫 번째 예수를 믿는 변화에 이어, 우리가 예수 믿고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화, 성숙, 성장, 변화 등 여러 가지 단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 때 그 삶에는 구체적으로 변화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자신의 변화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내 가족과 교회와 교계가 변하고 나라와 세계가 변하기를 바라지만 사실 우리 개인이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 때문에 내 가정이 변화되면 좋겠는데 나 스스로도 잘 변화되지 않아서 몸부림을 칩니다. 내 아내와 자식까지 변화시킬 여력이 없습니다. 하물며 내 직장을 변화시키거나 우리 사회와 나라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힘든 일이지요.
예수 믿고 내 내면이 변화되는 것도 힘들고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을 느끼고 방황 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하기도 합니다. 변화에 대한 욕구나 변화를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변화 자체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나라와 민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나 자신의 변화를 추구할 때 작은 변화로부터 큰 변화까지 점차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돌이켜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허황된 생각과 허망한 삶을 살던 예수 믿기 전의 옛사람과 비교했을 때 예수 믿은 지금 분명 변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전에는 교회라는 곳을 모르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기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속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변화요 성령님 때문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모든 성화(聖化)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왜 스스로 변화할 수 없나? 오늘 본문 17-19절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이해력이 어두워졌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17절) 여기서 총명은 understanding(이해)이라는 뜻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무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17절) 이해력이 부족하므로 영적인 지식을 갖추기가 힘듭니다.
셋째, 보이지 않는 마음의 눈입니다.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17절) 여기서 ‘굳어졌다’는 ‘blindness’, 눈이 어둡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서 보이질 않습니다. 이해도 되지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기 때문에 자연히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광야를 계속 빙빙 돌며 방황했던 것처럼 눈이 보이지 않아요.
넷째,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무뎌진 영혼의 무감각입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19절) 영적으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무질서한 성적인 타락입니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19절)
일곱째, 가득 찬 욕심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9절)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용할 줄은 알아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변화된 인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우리는 이런 것들로 가득 차서 선한 방법으로 상향적 변화를 일으킬 수가 없고 하향적인 변화만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죄성 때문에 생기는 이 엄청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피를 흘리심으로 내가 죄 사함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영적인 세계를 은혜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듣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성령님을 나를 도와주시는 분으로 믿으며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예수님 때문에 우리 안에 일어났습니다. 이 변화로 우리가 점차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제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고 방향이 정해졌기 때문에, 나의 문제들을 예수님이 고쳐주시도록 주님께 드리기 시작할 때 우리 삶에는 개인적인 변화, 구체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옛 사람의 타락한 모습과 행동은 완전히 버려야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도록 새 사람을 계속 입어라, 내면을 계속 변화시켜가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변화가 날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인가?
첫째는 윤리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변화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성령이여, 나에게 윤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나의 이 구체적인 문제를 바꿔주시옵소서.” 이렇게 성령님께 제시할 때 윤리적인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인 문제의 첫 번째가 거짓말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25절) 우리 입술의 거짓말을 멈추고 이제부터 참된 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힘듭니다.
1997년 4월에 캘리포니아 대학 심리학과에서 사람이 하루에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다양한 직업인들을 대상으로 하루의 대화를 녹음하고 저녁에 녹음기를 회수해서 이 사람들이 하루 종일 한 말들이 진실인지 아닌지 분석을 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평균 8분마다 한 번씩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루 동안 평균 200번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약속시간에 늦으면 “차가 많이 막혀서”라는 거짓말을 하는 식입니다. 직업별로는 정치인, 점원, 언론인, 변호사, 세일즈맨, 심리학자의 순으로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의 조사니까 우리의 경우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요.
제가 영어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란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all men be liars”,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 진실이요 인간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말입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조사가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표현력이 부족해서, 때로는 축소하거나 확대해서 말하거나, 아니면 고의적으로 검은 것을 흰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단어 하나만 다른 것을 써도 사실이 아닌 것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보면서 인간이 거짓말하기가 쉽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당신은 거짓말쟁이야!”라고 하면 엄지와 검지를 뺀 나머지 손가락 셋은 나를 가리키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보일 때 나에게는 그런 점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진실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 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노력한다 할지라도 완전히 진실할 수는 없습니다.
영국에서 열린 거짓말 대회에서 1등은 “나는 한 번도 거짓말을 안했어!”였답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는 존재여서 말을 해도 그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도 종류가 많아요. 도덕형․사기형․악질형․농담형․아부형․위장형․교육형․회피형 등 8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의도적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와 유한성 때문에 나도 모르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 하려면 진실이 우리 마음속에 있어야 됩니다. 마음에 진리가 없던 사람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면 비로소 진리를 얻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께 듣고 배워서 그분의 진실을 나의 진심으로 만들어 갈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변화되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성령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말을 네, 아니오, 함으로써 우리가 이 땅에서 신임 받고 살 수 있는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한국은 사기죄가 일본의 10배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여 년 전 제가 미국에 있을 때, ‘The kingdom of liar’( 거짓의 왕국)라는 제목의 TV프로가 30분 동안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짜상품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에서 가짜 상품을 만들어 파는 곳들을 취재해서 한국을 거짓말쟁이 나라로 미국 전역에 방송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우리가 변화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진실 된 나라, 믿을 수 있는 나라로 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화를 내지 않도록 변화하는 것입니다. 정서적인 변화,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26절)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화를 내지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것은 “분을 내어도”라고 한 것입니다. 분을 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 고맙지요. 속이 상하고 정말 신경질이 나서 화를 낼 수는 있으나 “범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물건을 부수거나 발길질을 하거나 욕을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지, 화가 난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중요한 것은 화를 내되 범죄 하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해결 하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잘 살아오신 어느 노부부가 있습니다. 물론 다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둘이 화가 나서 말을 안 하다가도 할아버지가 “여보, 해가 지네”라고 말하면 할머니가 “알았어요”하며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해결하라는 말씀을 잘 실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해가 지기 전에 “해가 지네!”라고 말씀하시고 분을 풀어가면서 변화를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분이 오래 가면 상처가 깊고 골이 깊어져 더 아프고 힘이 들지요.
만약 분을 풀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됩니다. “와서 마음대로 공격하고 헤집고 다니며 내 인생을 어지럽히라”고 마귀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분을 풀기 힘들면 그 문제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 제가 분을 잘 참지 못합니다. 제 분 냄을 하나님께서 가져가시고 고쳐주시옵소서.”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변화의 은총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셋째는 도적질 하지 않도록 변화하는 것입니다.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28절) 자기 손으로 수고해서 가난한 자에게 선한 일을 할 정도로 완전히 변화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도둑이 아닙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하지 않지요. 그런데 남의 명예를 뺏어 그 사람의 명예를 추락시키거나, 편하게 잘 있는 사람의 평화를 말 한 마디로 빼앗기도 합니다. 약속시간에 늦어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을 때도 있습니다. 6시에 약속했는데 6시 30분에 간다면 상대방의 시간 30분을 훔친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늦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아래층 체육관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예배에 계속 늦게 오는 분들이 계셔서 예배부에서 예배 시작 후에는 출입문을 잠갔습니다. 늦게 온 분들은 밖에서 예배를 드렸지요. 집에서 5분, 10분만 일찍 떠나면 될 텐데…. 시간은 지키도록 노력을 합시다.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대통령을 만나러 가도 1시간 먼저 가는데 하나님 만나러 가면서 습관적으로 늦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 아닙니다.
넷째는 나쁜 말을 하지 않도록 변화하는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29절) 들어서 불편하고 속상하고 평화를 깨는 말, 남의 인격을 손상시키고 기분 나쁘게 만들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더러운 말들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나쁜 말을 자꾸 입에 올려 평생 연습을 했는데 그것이 금방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 제 말이 참 험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연습해 놓은 것인데,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가 많습니다. 이 험한 말들을 고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면 성령님께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계속 추구해나가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나쁜 습관이 남아있으면 누가 슬퍼하나? 성령님께서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성령님이 우리 가슴속에 계실 텐데 성령을 속상하게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내 안의 성령이 괴롭고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절) ‘근심’은 걱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슬퍼한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십니다. 여러분의 나쁜 습관으로 인해 여러분도 불편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불편한데 여러분 속에 계시는 성령님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성령님, 내 마음을 정결케 하여주옵소서.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꾸준히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또 모든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버리라고 했습니다. 습관의 변화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좋지 않은 것들은 성령님을 슬프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쓴 뿌리) 노함과(분을 품는 것) 분냄과(분노를 폭발시키는 것) 떠드는 것과(말이 많은 것) 훼방하는 것(남을 비평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내 속에 악이 있기 때문에) 버리고”(31절) 이런 것들을 성령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씩 고쳐 달라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여러분을 정결케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원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성품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가장 귀한 것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32절) ‘인자하다’는 ‘친절하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고쳐 부드럽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나를 늘 용서해주시는 것처럼 서로서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변화는 주님나라 가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옛 습관과 옛 사고를 과감하게 주님께 내어드릴 때 주님께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습관, 새로운 사고,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감정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변화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모습에서 나타나고, 우리 때문에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복되기를 원합니다.
새사람을 입으라
엡 4:17-24 / 권오진 목사
미국생활을 하면서 가장 그리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의 목욕탕입니다. 뜨거운 싸우나에 들어가 열기를 인내하며 땀을 쭉 흘립니다. 온탕에 들어가서 때를 푹 불리고 때수건으로 열심히 찌든 때를 벗겨냅니다. 1시간정도 목욕을 마치고 목욕탕 문을 나설때의 그 느낌, 바로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된 느낌입니다.
미국에 와서 오랫동안 목욕탕을 경험하지 못하다가 작년 여름에 뉴욕에 있는 찜질방을 갔습니다. 거의 10년만이었습니다. 목욕을 하는데 정말 10년 묵은 때가 다 씻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얼마나 좋던지요. 하루종일 온탕과 냉탕을 왕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빨리 보스톤에도 하나 생겨야 할텐데요. 아니면 언제 한번 버스 대절해서 뉴욕 함께 다녀왔으면 좋겠습니다.
벗겨내어야 할 때는 우리의 육신뿐만이 아닙니다. 정말 벗겨내어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의 때입니다. 오늘은 2010년도 새해 첫 주일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기 앞서서 우리의 영혼에 찌들어져 있는 과거의 때들을 온전히 씻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예배의 시간이 영적 찜질방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하신 에베소서의 본문은 우리가 씻어버려야 할 영적인 때가 무엇인지 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7절부터 19절 말씀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는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루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늘 말씀에 이방인, 즉 하나님 떠나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먼저 마음의 허망한 것 (futility of their thinking)이라 했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모두 헛된 것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바라는 것,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외모를 꾸미는 것에 온 관심을 두고 사는 모습이 먼저 우리가 벗어내어야 할 영혼의 때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방인들은 그것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는 자들에게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말씀하시길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졌다 (darkened in their understanding) 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어두움에 있다는 것이지요. 어두움에 살면 그 어두움에 익숙해집니다. 야행성동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두움을 낮처럼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밝은 빛에 나아오면 그들은 눈을 감아버립니다. 다시 어두움을 찾아 들어가 버립니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앞에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그분의 빛을 받아 기쁘게 사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분의 빛을 피해 어두움을 찾아 헤매이십니까?
세번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하십니다 (separated from the life of God).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죽어 있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바로 그들의 무지함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호흡만 알 뿐, 영혼의 호흡은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쉽게 그 무지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말씀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굳어있기에 그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 마음을 뚫고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 마음을 열기 전에는 다른 누가 그 마음을 침범해 들러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조차도 여전히 문밖에 서서 기다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굳어있어 마음이 열리지 않고, 그 굳은 마음 속에 주님이 들어가실 길이 없기에 그들은 여전히 무지한 상태입니다. 그 무지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죽어 있으면, 다른 것에 대한 감각이 발달합니다. 오늘 말씀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하셨습니다 (Having lost all sensitivity, they have given themselves over to sensuality so as to indulge in every kind of impurity, with a continual lust for more). 하나님 떠난 자들의 모습입니다. Sensitivity 를 읽으면 sensuality 에 집중하게 됩니다. 영적인 감각은 없지만 쾌락을 추구하는데는 엄청나게 감각이 발달되어 갑니다. 쾌락은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더해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더 자극적인 것, 더 짜릿한 것, 더 충격적인 것에 자기 자신을 몰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곳,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의 허무함, 생각의 어두움, 굳음 마음으로 인한 무지와 하나님을 떠남, 그리고 쾌락에 대한 무서운 집착, 바로 이 네가지가 오늘 말씀이 말씀하고 계시는 영혼의 때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오늘 이 말씀 앞에 겸손히 서시길 바랍니다. 지금 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허무한 것을 쫓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나는 빛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몰래 숨어 지내는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정말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접할때, 주님을 찬양할 때 내 마음이 녹아지고 마음이 뜨거워집니까? 아니면 여전이 굳은 마음에 너는 찬양해야, 나는 잘런다. 너는 설교해라, 나는 드라마 생각할런다 하십니까?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 마음 속에 계십니까? 나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눈물과 땀을 흘려 수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끊어버릴 수 없는 이 짜릿한 꽤락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그 영혼의 더러운 때를 씻어버려라.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You, however, did not come to know Christ that way). 세상 속에 살지만, 하나님 모른채 살아가는 수많은 이방인들 틈에 살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다르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고, 하나님 떠난 이방인들 틈에 살지만 그들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You, however, did not come to know Christ that way.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21-24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님 안에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과 내가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만나는 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일예배, 목장모임, 그룹모임, 가정예배, 새벽기도회 등,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꼭 이 자리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벗어버려야 합니다. 새 것을 입으려면 먼저 벗어야 합니다. 찌든 때를 벗겨야 합니다. 무엇을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썩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살아가다보면 죽음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았던 나의 이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쉽습니까?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왜요? 이것은 삶의 방식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Way of life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되고 내가 결정하고, 내 눈에 좋아보이는것, 내가 만족한 것을 추구하며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나의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습관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만나면 됩니다. 예수님 만나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삶의 주인되시고, 내 삶의 중심에 앉으셔서 나를 다스리시면 나는 이 모든 습관들을 벗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신가 아닌가입니다.
세번째,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와 결정은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은채 겉모습만 바꾸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북쪽으로 향하는 배 한척이 있습니다. 선장 좀 편하게 운전할 생각으로 북쪽으로 자동조정장치를 해놓습니다. 북쪽으로 향하다가 길이 잘못된 것을 깨닫습니다. 남쪽으로 다시 방향을 돌립니다. 선장이 힘을 써서 운전대를 남쪽으로 180도 돌립니다. 하지만 잠시뿐입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이 피곤해질때 그만 그 손을 놓아버립니다. 그러면 그 배는 다시 북쪽으로 향해 갑니다. 이 배를 남쪽으로 돌리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바로 그 자동조정장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심령이 바뀌어야 합니다. 심령은 동일한채 잘못된 행동 하나만 가지고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참된 변화는 심령의 변화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행동 하나 하나보다, 그 행동을 일으키는 여러분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이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를 보십니다. 마음의 변화, 심령의 변화를 받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네번째,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하셨습니다.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하나님이 입혀주고 싶으신 새 옷이 있습니다. 새로운 자아가 있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 닮은 새 자아입니다. 그 새 자아를 입히시길 원하십니다. 이 새사람을 입으면 우리의 우선순위가 바뀝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뀝니다. 우리의 말이 바뀝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옛사람을 과감히 벗어 버리십시오. 벗어버리지 않으면 새 옷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심령의 변화를 받으십시오. 심령이 변해야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새 자아를 입으십시오. 내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삶이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다음주부터 1월달 한달동안 잠시 창세기강해를 멈추고 신앙생활에 관한 기본적인 설교를 이어가려 합니다. 일년동안 우리가 해야 할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을 내 주인삼아 사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지라도 모든 것이 바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뉴욕주에서 제2차 세계청년선교축제가 지난주 연말에 있었습니다. 28일 오전 주제 강의를 전한 안찬호 선교사님(케냐감리교 일무코타니 마사이 지방회 선교목사)께서 하신 강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안선교사님은 케냐의 마사이족 수천명의 영혼을 전도하신 위대한 선교사님이십니다. 어찌보면 이 시대 최고의 선교사 중 한분이십니다. 그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씁니다. “최고가 되지 말고 우뚝 서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도 최고는 아니셨습니다. 우뚝 선 분이셨습니다. 새들이 와서 깃들고 더위에 지친 자들이 쉴 수 있는 나무로 우뚝 서십시오”라고 청년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안 선교사님는 "아는 것이 축복이고, 똑똑한 것이 축복인가? 최고가 되는 것도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최고가 되면 하나 밖에 없다. 최고가 되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서 불안하고, 끌어내리려는 사람들 속에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트 주의에 젖어있는 한인들과 한인교회에 참 신선한 충격을 주는 귀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미국교회에서 저희 좋은교회를 환영한다는 문구를 교회 입구에 세워두셨습니다. "Welcome Good Korean Methodist Church." 그런데 그만 실수로 Good 에서 o 가 하나 빠졌습니다. "Welcome God Korean Methodist Church." 그 간판을 읽는 순간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안선교사님이 동일한 깨달음을 전해주셨습니다. “Good에서 God을 빼면 0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건강한 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낮추어 Nothing으로 만들어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때, 낙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0+God이니 Good이 된다.”
그렇습니다. Good 에서 God 를 빼면 남는 것은 nothing 입니다. 우리 좋은교회에 하나님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먼저 옛사람이 벗어지고 nothing 이 될 때, 우리의 비어짐을 통해 하나님께 새사람을 입혀주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
엡 4:17-24 / 김태복 목사
엡4장 1-16절에서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일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가 17절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그리스도인들의 성화(聖化)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시는 훌륭한 교회냐 하는 것은 그 교회 안에 속한 교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시는 성도들로 가득 차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그릇이라도 그 속에 오물이 담겨 있으면 오물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싸구려 꽃병이라도 그 속에 보배가 들어 있으면 보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훌륭한 교회는 화려한 교회당이나 교인수의 많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성화된 교인들이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인 하나 하나가 성화되도록 힘쓸 때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화(聖化)란, 한 마디로 옛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요,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17-19절까지 옛사람에 대해서 나오고 20-24절까지 새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옛사람과 새사람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옛사람은 날마다 병들어 가고 있는 고목과 같은 자요, 새사람은 날마다 새순이 나오고 잎이 나는 자와 같습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했습니다. 옛사람은 날마다 영적으로 병들어 가는 자이지만 새사람의 심령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영이 거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끝없이 새 은혜, 새 생명, 새 능력이 흘러넘침으로 날마다 성장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자세하게 배워 보십시다.
1. 옛사람이 되는 이유와 그 과정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어찌해서 옛사람이 됨으로 병든 심령이 되어 갑니까? 17-19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옛사람이 되어가는 단계를 5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첫 단계로, 허망한 것을 좋아하기 시작합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한 마디로 ‘방향이 없다.’, ‘목표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마음의 방향이 없습니다. 탕자의 예를 들으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해 불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규율과 간섭이 싫어지고 독립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믿음이 떨어지는 첫 단계의 징후가 교회생활에 대해 싫증이 느껴지고 세상의 삶에 대해 동경되어지는 것입니다. 공연히 허망한 것에 대해 마음이 쏠리고 탐스러워 보이고 금지한 선악과를 취하고 싶은 유혹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둘째 단계로, 총명이 어두워져 진리를 분변치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했던 눈을 돌리어 세상의 허망을 향해 눈을 돌린 결과 점점 영적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탕자는 안목의 정욕으로 인하여 허망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생기므로 양심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총명과 양심은 거울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거울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성도들도 총명과 양심이 어두워지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교회에 참석해도 설교시간에 잠으로 때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빛이요, 우리 삶의 등불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기를 소홀히 함으로 점점 진리에 대해 어두워집니다.
(3)셋째 단계로, 마음이 굳어짐으로 완악해 집니다.
허망의 단계에서 영적인 어둠의 단계에 이르더니 마침내 마음의 굳어짐의 단계에 이릅니다. 양심이 점점 완악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양심의 문이 닫히니 마음이 어두워짐으로 마음이 굳어지고 완악해집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타이르고 눈물로 호소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신자가 총명이 흐려지고 양심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완악해지면 예배가 지루해서 견딜 수 없어집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깨달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찔림을 받는 설교를 들으면 자기를 친다는 반발심이 일어납니다.
(4)넷째 단계로, 영적 감각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지는 것, 이보다 더 심각한 저주가 어디 있습니까? 탕자는 마침내 아버지의 훈계나 간섭이 지겨워져서 아버지 집을 떠납니다. 될수록 멀리 멀리 떠납니다. 신자가 점점 병들게 되면 예배도, 설교도, 직분도 점점 멀리 합니다. 그리고 점점 교회를 빠지기 시작하고 요나처럼 세상의 숲에 숨어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여, 이 단계에 이른 자가 이 자리에 계시다면 매우 위험한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중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5)다섯째 단계로, 방탕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 가장 가슴 아픈 구절은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입니다. 이제 영적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그 공허를 잊기 위해 육체적인 감각에 빠지려고 합니다. 술과 담배, 도박과 음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방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방탕’이란 ‘기준이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할 인간이 욕심과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삶을 말합니다.
마침내 탕자는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더러운 곳에 던집니다. 창기와 함께 술과 음란에 빠집니다. 남까지 죄를 짓게 만듭니다. 신자가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면 교회를 자주 빠지면서 점점 세상으로 빠져듭니다. 나중에는 자신을 죄의 구덩이에 던짐으로 타락하고야 맙니다. 여러분들이여,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타락의 단계를 향해 차츰 내려가면서 병들어가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매가 임하기 직전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탕자는 모든 것을 잃는 날을 만납니다. 건강이나 돈, 애인과 친구를 다 잃고 마침내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돼지를 치는 존재가 되었고 먹을 것이 없어 돼지가 먹는 사료인 주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천 소망 교회 박금출 목사님이 쓰신 「실화사전」에는 이런 예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목회하던 교회 부근에 최 집사님이란 분이 자주 찾아와서 신앙 상담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분의 간증에 의하면 숭실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교회는 출석했으나 예수님에 대하여 믿어지지 않아서 중도에 타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상하게 하는 사업에 있어서 되지 않고 틀려 돌아가자 깨닫고 다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출석했으나 과거에 술 담배나 죄악된 행동을 끊지 못했고 변화된 생활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몸이 이상하게 오한 증세가 나더니 한 쪽이 마비가 되어버렸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오줌똥을 받아냈고 수개월 동안 실의와 절망 가운데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추운 겨울인데 본 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집안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교회 마룻바닥에 꿇어 엎드려 회개하고 날마다 울었습니다.
목요일쯤인가 이상하게 집에 가고 싶어서 뛰어 나가다 보니까 자기가 걷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야 자기 병이 낫은 것을 인식한 그는 춤을 추며 감사했습니다. 그 때부터 새벽 기도는 물론이고 충성 전도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런 은혜의 생활이 계속 되어야 하는데 몇 년 가니까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이 식어 집니다. 주일도 철저히 지키지 못하고 기도회는 빈번히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가 어떻고 사생활이 어떻고 여기 저기 다니면 교역자 흉을 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충성하던 사람이 변하여 교회에서 가시 노릇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다시 병이 재발되어 중풍으로 허구헌날 고생하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자를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자기의 택한 자가 범죄하고 타락할 때에 사랑의 매를 때려서라도 반드시 돌이키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마음이 허망하여 짐으로 총명이 더워지고 마음이 굳어지며 영적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한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아니면 더 깊이 들어가서 자신을 방탕으로 빠져들게 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 됩니다. 여러분들이여, 잘못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가 쉽습니다.
그 모든 죄를 회개하고 방향을 바꾸어 어서 속히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야 삽니다. 절망에 빠져 자살 직전에 있던 탕자가 방향을 바꾸어 아버지 집을 향해 나갔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지금도 두 손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십시오. 그 때 하나님은 온 천군천사와 함께 기뻐하시면서 새사람이 입는 은혜를 받게 하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새사람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자기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를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급한 환자라도 병원에 가면 당장에 수술부터 하지 않습니다. 의사들은 피검사, 엑스레이, 내시경, 엠알아이(MRI) 검사 등 갖가지 정밀 기계로 진단하여 병의 원인, 병의 깊이부터 진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영적인 병을 고치려면 내 병이 무엇이며, 얼마나 중한 단계까지 이르렀는지를 정확히 진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탕자는 큰 죄를 짓고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기 시작합니다. 모든 재산을 잃고 돼지 울간 옆에서 쥐엄 열매로 배고픔을 면하려고 하는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그 때야 탕자는 자기의 비참한 실상과 아울러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지겹게 여기던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족한 곳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영적인 상태가 너무 깊이 병들었음을 알고 자탄해 마지않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자기의 옛사람을 고치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깊은 낙심에 빠지면서 외칩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도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율법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통로로 믿고 율법을 지키려고 전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그 율법이 자기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사슬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석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롬8:1-2에서 고백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죄인임을 통감한 분들은 이제 새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성령께 “내 죄를 깨닫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 때 성령이 도우심의 손길을 내미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옛사람의 구습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22-23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 했습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해준 다음 말해주기를 “당신의 병은 술이나 담배가 원인입니다. 이제부터 술 담배를 끊으십시오.” 혹은 “당신은 너무 짜고 매운 것을 많이 먹어서 생긴 병입니다. 이제부터는 될수록 심심하게 잡수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영혼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병의 근원은 나쁜 구습, 나쁜 습관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마귀가 역사함으로 병들게 된 것입니다. 술과 담배, 도박이나 나쁜 오락, 우상숭배와 음란, 나쁜 친구와 나쁜 직장이 원인입니다. 그 옛사람의 구습을 과감히 끊고 버리지 않으면 마귀가 그 틈을 다시 이용하여 들어와서 자기의 거처, 자기의 소굴로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나쁜 구습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재미난 말을 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 교회 어느 여 집사님이 와서 상담하기를 “목사님, 우리 남편은 나를 너무 업신여깁니다. 나는 남편을 명상공월로 아는데 남편은 나를 흑사리 띠만도 못하게 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아직도 그 집사님은 화투장을 늘 만지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어느 성도는 아직도 이사 가는 날짜를 찾고 아들의 결혼 배우자가 궁합이 맡지 않는다고 극구 반대를 하고 자기 이름이 나쁘다고 미신 집에 가서 새 이름을 지어오기도 합니다.
만약, 주일날 등산이나 낚시가 교회를 자꾸 빠지게 하면 그것도 구습입니다. 과감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 노력은 자신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의 연습이요, 선한 싸움입니다. 낡은 옷을 벗지 않고 새 옷, 새사람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가수 팀 스펜서는 인기인이었습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아주 중독이 되어버렸고, 돈과 명성은 있었으나 자기 삶에 대해 심한 권태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더 나가서는 영적인 만족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세상에 대한 심한 염증 때문에, 하루는 권총을 가지고 호텔에 들어가 자살하려고 머리를 겨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나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일어나 무릎을 조아렸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이 부르짖기를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 술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옵소서. 나의 길을 인도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평안히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항상 마시던 술도 마시지 않아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상하게 술 마시기가 싫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신 줄 믿고 의식적으로 죄의 자리를 피하고 이전 생활을 과감히 끊어 버렸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 동료들을 열심히 전도해서 80명이 신자가 되게 함으로 헐리우드 크리스챤 클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배우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 영화만 제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어도 죄의 자리, 구습의 자리에 갔다면 얼마나 안 가서 다시 타락으로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더러운 죄의 자리는 성령의 역사보다는 사탄이 역사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은 집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집이나 승용차 안을 보면 찬송가 테이프는 거의 없고 온통 유행가 테이프 투성입니다.
평소에 성경은 읽지 않는지, 주일날 교회를 가려면 성경찬송 찾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한심해 여기겠습니까? 아이들은 보지 않는 것 같아도 다 봅니다. 아니 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세상적인 말투, 세상적인 노래, 세상적인 나쁜 오락까지도 옛사람의 구습인 줄 아시고 과감히 벗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새사람의 은혜를 달라고 구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새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새사람이란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 하나님을 통해서 영이 거듭 난 사람,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기 시작한 사람을 말합니다. 새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는 길, 하나님과 연결하는 진리의 줄이 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영을 정결케 하실 뿐 아니라 새사람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에 양을 잡으시고 피를 흘려 속죄 제물로 삼으시고 그 양의 가죽으로 옷을 입히신 것처럼 예수님이 흠 없는 어린양이 되사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옷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옛날 말에 옷이 날개란 말이 있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벌거벗고 있으면 장군이든 졸병이든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장군의 복장을 입어 보십시오. 번쩍이는 별과 훈장들을 보면 너무나 멋집니다. 위엄이 대단합니다. 아무리 몸에 큰 흉터가 있을지라도, 화려한 옷을 입으면 모든 부족이 가려지고 빛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멋진 몸매를 가진 사람이라도 훈련병의 복장을 입으면 그렇게 초라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옷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다.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으니 몸이 옷 안에 있듯이,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허물과 죄가 가리워집니다.
그런 성도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새사람을 입습니까? 바울은 롬13:14에서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했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사라지고 부활과 함께 예수님의 지체가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가 됩니다.
그 때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옷, 흰 예복을 입히어 주십니다. 이 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흰 예복을 입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흰 예복이 더러워집니다. 그 때마다 회개함으로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실 때는 흰 예복이 더러운 자로 보이실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193장에서는 “모든 죄에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벗어서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함으로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그 때마다 다시 샘물처럼 계속 솟아나는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하면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우리의 예복을 흰 눈같이 깨끗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은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서운 살인강도라도 그 보혈의 능력을 통해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국의 스로스츠란 죄수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0년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고 가죽 채찍으로 50번씩 여덟 차례나 맞았으나 그의 생활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찰이나 교도소에서도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구세군 숙박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인연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구원을 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구세군 출옥자 보호소에서 18년 간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간증하기를 “400번의 가죽 채찍이나 40년간의 교도소 생활로도 변화되지 않은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 불과 1, 2분 만에 변화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직도 세상을 향해 탕자처럼 내려가는 분들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빨리 하나님께 돌아서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회개하심으로 새사람이 되십시오. 새사람의 옷을 입었지만, 흰 예복이 더러워진 분들도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하심으로 깨끗이 씻으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로 구원 받은 것을 감사 찬양하면서 거룩한 삶을 사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롭게 되어라
엡 4:17-24 / 민경설 목사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편하게 변하는 것 같지만 실제 영적으로 보면 어둡고 악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세상의 일은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더 악하고 타락해진다는 것입니다. [호4:7]“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세상이 좋아지고 편해진다고 하지만 악하고 어둡게 변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르고 신령하게 살려고 하는 성도의 삶은 고통스럽고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딤후3:1-4]“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처럼 이상하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복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새롭고 복되게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되고 새롭게 변할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악하고 어둡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 복되고 새롭게 변하는 길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주님만이 우리의 삶의 어떤 환경도 극복하고 새롭고 복되게 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죄악의 세력에서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고전15: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안에서 복되고 새롭게 변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4:23)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주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 마음 속의 주인을 바꿀 수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세상의 영에서 예수의 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즉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의 영이 나를 주인으로 내세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마음의 주인인 것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상의 영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세상의 유혹에 눌려 죄짓고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 주님을 영접하면 나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죽고, 성령으로 예수님이 내 속에 주인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2)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여 우리 속에 주인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제 그 주인을 의지하여 우리의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속에 주인이 바뀌었으니 죄의 유혹에 빠져가는 나쁜 습관을 우리가 쉽게 벗어 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일 때는 어렵지만, 아니 불가능하지만 우리 속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오신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 쉽게 그 분의 은혜로 어떤 나쁜 습관도 옷 벗어 버리듯이 쉽게 끊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3)거룩한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이제 믿음을 가지고 의와 진리와 거룩한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의 주인이 바뀌면 이제 믿음을 가지고 거룩한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의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옷 입듯이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새사람을 입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상상력을 가지고 입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이것은 예수님이 나의 지, 정, 의를 입고 내 속에 사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믿음으로 상상하여 그대로 행하면 그대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달라진다고 겁먹지 말고 새롭게 변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구습에 썩어져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와 거룩한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아멘.
심령을 새롭게
엡 4:17-24 / 곽선희 목사
현대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Fixation 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과거의 종래의 유치한 습관, 혹은 부정적인 습관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이런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무조건 변화는 싫어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낡은 것에 매여서 거기서 안정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정지상태란 없는 겁니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속에 나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안 변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퇴보라고 하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차가 속도를 내서 여러 대의 차가 화악 물밀 듯이 밀려갑니다. 거기 한 길 가운데 서있어 보면 차들이 무지하게 빨리 달립니다. 그럴 때에 나는 서있습니다. 그게 내가 서 있는 겁니까? 이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면 내가 지금 뒤로 물러가고 있는 것이에요. 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의 속도가 중요한 거예요. 계속 변화하는 것과 속도를 맞추지 아니하면 그 순간 나는 지금 뒤로 물러서고 있는 결과가 되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리석게 내가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은 정지 상태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나는 지금 뒤로 물러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 차를 몰고 갈 때, 저 빨리 가는 차하고 내가 속도를 맞추면 말이에요. 특별히 그 캘리포니아 사막 넓은 곳에 깜깜한 밤에 아무 불빛도 없는 사막을 갈 때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상하더만요. 혼자 가는 게 싫어서 저 차에 누가 탔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같이 가길 원해요. 그래서 하나의 군단을 이루어 가지고 한 열대의 차가 같이 갑니다. 그 갈 때 보면은 깜깜하죠. 차가 정지상태를 유지하고요. 길이 그냥 앞으로 오는 거 같아요. 차가 딱 서있는 거 같은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되는 사회에 있어서 생각의 변화의 속도를 맞추면 정지상태가 이루어지고 거기에 안정이 오는 것이에요. 그런 고로 생명적으로 사는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를 즐깁니다. 변화를 타고 넘으면서 거기서 창조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계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고착상태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다가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그러고 심장이 터져서 죽어요. 이것은 세상이 잘못된 게 아니오. 당신이 잘못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어리석은 고착상태라고 하는 병에 빠져서 스스로 퇴보하고 거꾸로 변화된 거예요. 그 상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와서 유독 담배에 대한 광고가 많이 나오데요, 담배 피우면 나쁘다고. 그 이주일씨가 폐암으로 고생을 하면서 이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아주 금연운동의 선두에 섰습니다. 나처럼 되지 않으려면 담배 피우지 마라. 아주 굉장한 증거를 댑니다. 어쨌든 담배 피우는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60배나 폐암 걸릴 가능성이 많다. 어디는 보니까 또 담배 피는 사람은 젊은 사람도 정력이 50% 감퇴된다. 그 효과 있을 거 같아요. 그 말은 무서워하거든요. 자, 이렇게 멀쩡하게 알아요. 지금 담배가 유익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 멍청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왜 못 끊는 겁니까? 옛날 것에 안주하고 싶었어요. 변화가 싫은 거예요. 그게 문제예요. 제가 요새 음식점이나 뭐 이런데서 광고하는 걸 좀 보면서도요 좀 못 마땅해요. 그게 뭐냐하면 어떤 음식이나 물건을 만들었을 때도 '이건 새 거입니다. 이건 이건 21세기적인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질 않고요 "이것은 30년 전통, 이것은 200년 전통" 이라고 해요. 이 전통이 망쳤다는 걸 몰라요? 그렇게 낡은 걸 좋아하니 이게 어떻게 새로운 세계가 오겠노? 입맛도 바꿔야지. 그 30년 전통음식만 좋아하니 이게 되겠어요 이게. 그게 바로 문제라고요. 제가 음식점에 갈 때마다 제일 괴로운 게 뭐냐하면 땅에 앉으라는 거예요. 무릎이 아파 못 견디겠던데. 그 의자에 앉으면 좋으련만 그 질벅하게 앉아 가지고 그렇게 해야만 좋다고 하니 이게 언제나 이게, 북한말로 할까요, 골통을 바꿀 수 있을까.
고착상태에 빠지면 구제불능입니다. 게다가 영적 고착상태가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Spiritual Fixation 그것이 문제입니다. 벌써 영적 주도권을 육체의 욕망에 빼앗긴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알게 모르게 바울의 논조대로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 처음에는 순수한, 아주 구원받은 은총에 감격하는 신앙으로 출발했는데 신앙생활 해 가면서가면서 자기 나름으로 자기가 율법이 되어서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돼버렸어요. 그걸 자기가 모르고 있어요. 그리고 오히려 생생한 생명력 넘치는 영적 상태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어요. 이 또한 비참한 것이올시다. 어떤 분이 그러대요. 장로님인데 "목사님, 나는 신앙생활 하는 거 다 좋아요. 교회 봉사하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딱 하나가 문제예요. 그거 좀 가르쳐 주세요." 그게 뭐냐고 그랬더니 "그 새벽기도 꼭 나가야 됩니까?" 그러더라구요. "아 이거 장로라 안 나갈 수도 없고 나갔다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아 이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그랬어요. "꼭 나갈라고 그러지 마세요. 그거 나가야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 꼭 잘 믿는 것도 아닙니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나 소망교회 나가겠습니다." "그거 조심하세요. 소망교회 나오면 새벽기도 나오게 됩니다" 내 그랬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분의 얘기는 이래요. 꼭 일어나야겠다 생각을 했다가도 새벽만 되면은 생각이 달라진대요. 어떻게 달라지느냐. '아, 하루에 여덟시간 자야된다는데, 내가 오늘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은 건강상 좋지 않을텐데……' 이런 생각을 한데요. 그러면 또 생각을 합니다. "아 이거 곽 목사님은 평생 새벽기도 인도하고도 건강한데 내가 그 분보다도 건강한 것도 아닌데……" 갈등을 일으킵니다. 여덟시간 자야 좋은지 다섯시간 자야 좋은지, 그런 중에 새벽만 되면은 어느 이론에 지는고 하니 '여덟시간 이상 자야 좋으니라.' 이렇게 이 이론 앞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아요. 그렇게 하기를 한 평생이라 하는 것이죠. 몸이 요구하는 바가 있어요. 육체의 욕망을 그의 이성으로 합리화하면서 그의 영이 그 합리적 이론 앞에 굴복하고 말아요. 아시겠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에 성령은 탄식합니다.
로마서 8장 있는 말씀대로 보면 성령이 탄식합니다. 아, 쓰러지는구나. 아시겠어요? 이 바울의 신학을 연구해보면 인간을 상징적으로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성전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해야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 뜨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큰 성전은 뜰입니다. 결코 건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 드릴 때 전부 마당에 서서 예배드리는 거지 성전 안에 와서 예배 드리는 게 아닙니다. 가끔 카톨릭에서 신년미사 같은 거 할 때 봐도 마당에서 서있지 않았습니까? 마당에서 예배를 드려요. 이게 성전입니다. 성전 뜰이 성전이고 그 다음에는 그 성전 뜰 안에 성소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성소가 바로 제사들이 드리는 기구가 있고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사역을 하는 곳입니다. 이게 성소고, 그 다음에 성소 안에 지성소라고 있습니다. 거룩한 중에 더 거룩한 곳이다, 그 지성소,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괘가 있습니다. 자 이제 생각합시다. 성전 안에 성소, 성소 안에 지성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몸도 몸이라는 것이 있고 혼이라는 것이 있고 혼 안에 다시 영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이게 바로 핵입니다. 성전이 성전되는 것은 지성소 때문입니다. 지성소가 없다면 성소도 없고, 그 넓은 뜰은 운동장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문제는 그 지성소 때문에 이 성전 전체가 거룩해 지는 것이올시다. 이 이론에 의해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푸뉴마, 바로 영을 말하는 것이요,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요. 우리 영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요. 그 다음에 우리의 이성이 있어요. 그 이성이나 지성이나 양심이 뒤따릅니다. 그래 이게 성소올시다. 그 다음에 그를 싸고 있는 몸이 있습니다. 그건 육체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육체는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하고, 이성은 영의 주도하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그때에 멸망이 오는 것이올시다. 자, 보세요. 요새 심령의학에서 하는 이야기 입니다마는 육체가 병들면 정신이 치료합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육체가 병든 줄 알지만 병은 정신에서 오는 거예요. 정신력이 약해져서 생긴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되요. 원인은 정신이에요. 여러분, 하룻밤만 고민하면서 잠을 못 자보세요. 다음날 아침에 콜록거리는 거 아니에요. 그거 잊지 말아야 되요. 암 환자들도 보면 내과의사의 기록대로 보면 3년 전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충격이 오늘에 와서 Cancer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런 고로 정신이 건강할 때에 육체가 건강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정신은 영이 건강할 때 그 정신이 건강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육체가 병들면 정신으로 치료합니다. 정신이 잘못되면 영으로 치료합니다. 영이 병들면 무엇으로 치료합니까? 이게 끝이라는 거예요. 그런 고로 육신 혹은 육체의 정욕 주도적 인간과 또 이성이 병들고 영도 잠들어 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어요.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요. 그 병든 이성이 영을 지배하게 될 때 영은 잠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구습을 쫓는 옛사람. 옛 영겁에 속한 옛사람. 오늘 본문에 누누이 설명을 합니다. 옛사람, 이것은 그 속성이 영 주도적 인간에서 떠나서 육체 주도적 인간으로 타락된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허망하다 그랬어요. 목적을 상실합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허무하고 허망한 세상,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무엇 때문에 이러는 지를 모르겠어요. 사업을 하나 결혼을 하나 목적이 없어요. 의미가 없어요. 허망함에 빠져듭니다. 그 다음에는 어두움이라 그랬습니다. 디아노이아라고 하는 말은 지성적 결여, 본문 말씀대로 총명이 흐려진다 그랬어요. 판단하는 능력, 총명이 흐려져서 어두워졌어요. 이성의 능력이 어두워졌어요. 그 다음에는 무지함이다 그랬어요. 아그노이안 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선악이 모호해집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지고,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지고 그랬습니다. 강퍅해지는 거요. 고집만 남아요.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를 못해요.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감각해진다 그랬어요. 이건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각능력 상실입니다. 무감각해요. 이제는 어떤 자극에도 감각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여섯번째는 방임이라고 했습니다. 방임,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Give up, 포기상태입니다. 거기다 기대를 걸 수가 없습니다. 인간 됨을 포기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지존파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들을 재판할 때 그 재판 판결문에 사형을, 사형을 선언하는 판결문에서 마지막 말을 제가 자세히 들었습니다. '인간 됨을 포기하였으므로 사형한다' 그랬어요.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인간들이요. 자동차로 말하면 브레이크가 터져 나갔어요. 브레이크 터진 자동차, 이거는 좌충우돌이요. 이런 방임 상태에 빠져 버린 거예요. 그런 고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라' 심령을 새롭게 하라. 조금 원문적인 말씀을 드리면 "프뉴마티툼 누스휴몬" 입니다. 프뉴마 누스라고 하는 두 단어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누스' 의 '프뉴마' 라고 말합니다. 우리말에는 이거 둘을 합쳐서 심령이라고 그랬어요. 영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심령. 다시 말하면 너희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라. 너희 마음 안에 있는 영을, 마음 안에 있는 영, 그 핵심 그것을 새롭게 하라. 그것은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에요.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를 새롭게 하라, 그런 뜻입니다.
중세기 신학자들은 이 심령을 새롭게 하는 길이 어디 있을까 해서 수도원 적으로 이 문제를 풀이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첫째는 Purgation 입니다. 청결입니다. 세속을 떠나야 한다. 아무래도 먹는 거 자는 거 문제가 다 있다. 이 세상에 문제 있다. 그런 고로 세속된 것을 떠나야 하겠다. 그 수도원적으로 이 문제를 풀이해 보려고 했고 또 한가지는 Illumination입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마치 태양 빛을 받아서 우리 식물들 모든 생물이 소생함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시는 빛을 받아야겠다. 영적인 빛을 받아들여야 되겠다. 그리고 세 번째가 Union 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마음과 나와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는 가운데서 이것이 이웃사랑으로 이어질 때 거기에 영적인 온전함이 있다, 라고 중세기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다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선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를 말합니다. 여러분,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아들 자격이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했고 너무 많이 타락돼서 나는 아들자격이 없다. "머슴꾼의 하나로 대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굶지 않고 살게 해주세요" 이런 초라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만납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하고 만납니다. 그 때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아버지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는 순간, 나의 더러운 과거 부끄러운 모습은 다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영광된 잔치에 참여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낡은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의 옷을 입혔습니다. 옷은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신분을 주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사랑으로 덮었습니다. 사랑으로 감쌉니다. 거기서 녹아져서 그는 아들의 정체의식을 가지면서 새사람이 됩니다. 아버지와 만나는 관계에서 새사람이 된 것이에요.
여러분, 사람을 물질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물질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환경으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구조조정, 구조조정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몸부림쳐왔습니다마는 구조조정을 하는 그 사람이 구조조정이 안됐어요. 사람이 달라지기 전에는 구조를 100번 바꿔도 안됩니다. 그걸 우리가 보았습니다. 또한 제도를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가치관이 바뀌기 전에는 안됩니다. 구조를 바꾸고 사회제도를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칼 마르크스입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고로 외적문제에선 내적문제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내적인 것은 내적으로,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내적인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사회도 인간도 변하는 것이요. 중생은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사람이 사람이 됩니다. 근본은 영적 문제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문제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제올시다.
1990년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엘리나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별명은 '노인의 어머니'라 하는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훌륭한 양로원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었습니다. 이분은 본래 하나님께 헌신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힘써서 중국선교사로 일하려고 했는데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그 불결한 환경 속에서 폐결핵 걸려가지고 각혈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여 어째서 내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 라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조용히 겸손한 기도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불모지 넓은 땅이 있습니다. 이걸 개간을 해서 농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농사해서 얻어지는 수확을 가지고 중국선교사들의 선교비를 많이 보냈습니다. 자기 대신 일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농사하다가 또 추수하면서 탈곡을 하던 중에 탈곡기에 손이 끼어들어가면서 손이 부러지고 손을 자르게 됐습니다. 오른손을 짤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멈추고 그 땅에다가 양로원을 짓고 노인들을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확장되어서 세계적인, 유명한 양로원이 되고 그는 노인의 어머니라고 하는 높은 칭호를, 사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주는 내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기도했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달라지는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것을 능가할 만큼 확실한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며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 원컨대 이 모든 변화 속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게 하시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능히 이 세상을 고칠 수 있고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면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자
엡 4:17-24 / 이수영 목사
지난 해 2000년대의 첫 1년을 보낸 우리는 이제 엄격한 의미에서 21세기의 첫 해를 맞았습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새 시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자연 우리의 마음도 새로워져야겠고 우리의 삶 또한 뭔가 달라야 할 것입니다. 또 새 담임목사와 함께 맞은 첫 해의 새문안교회도 어떤 분명한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좋은 전통은 계속해서 잘 지키며 발전시키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만과 안이함 속에서 구태의연함을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점, 우리가 잘 몰랐던 것, 우리가 소홀히 했던 것, 우리답지 못했던 것을 부지런히 살피고 고치며, 더 해야 마땅한 일들을 찾아가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가 지켜야 할 일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고 교회답기 위해서는 세상과 분명히 달라야 하면서도 그렇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 하나 살피고 찾아내서 고쳐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밝히고 그것을 우리의 지식과 삶 속에 자리잡게 하고 뿌리내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배, 교육, 선교, 봉사의 영역에서 지금까지 해온 사역들을 한층 강화하며 계속 추진해야하겠습니다. 특히 교회교육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는 아낌없는 투자를 할 것입니다. 러시아에 한 분의 선교사를 증원파송하려고 합니다. 또 태국에 제2의 한태선교관 건립을 추진할 것입니다. 베트남인들을 위한 봉사사역도 확대하는 방안을 연구할 것입니다. 내년부터는 사회복지사역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기울일 것입니다.
넷째로 지금까지 하던 일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역들을 시작해야 합니다. 청소년 대상의 학원선교사역을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 교단 교회들의 장래가 걸린 목회자후보생신학교육의 향상을 위해 앞으로 본 교회예산의 2%까지를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인데 이는 지금까지 우리 교단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어머니교회로서의 책임을 담당하려는 의지의 대표적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교인 한 가지 대외봉사직 갖기 운동" 같은 것도 전개하려고 합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모든 관점에서 바르고 한국교회를 향해서 본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로 이 모든 일들을 우리 인간의 힘과 지혜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로 모든 일을 통해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고, 모든 일은 온 교우 사이의 겸손과 사랑과 화목과 일치 속에서 하며 그로 인해 소외되거나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새로운 일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2001년 교회의 표어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자"로 정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라야함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시작했으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면서 그들과 같은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에베소교회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한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가 말하는 이방인,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첫째는 허망한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며, 둘째는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해진 것과 마음이 완악해진 것이며, 셋째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죄의식도 부끄러움도 없어지는 것이며, 넷째는 그 결과로 온갖 더럽고 끝없는 탐욕과 방탕에 자신을 내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것이며 영적으로 죽은 것이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진리는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는 것은 곧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교인들을 향해 했던 이 권면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다 무지와 완악한 마음과 허망함과 더러운 욕심과 방탕 속에서 산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옛 사람을 그대로 입고있을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배에서 성찬식을 함께 거행할 것입니다. 지난 번 성찬식에서 저는 성찬에 임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의 하나로 변화된 삶, 성결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되고 거짓되며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지적인 면에 많은 강조를 하고있음에 주목합니다. 17절에서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이라 할 때의 그 마음이란 말은 "지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이란 말을 하고 있는데 "총명"이니 "무지"니 하는 것도 다 지성 또는 지각에 관계된 말들입니다. 20-21절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배움", "들음", "가르침 받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로워지며 새 사람을 입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 했는데 "진리의 거룩함"이란 "참된 거룩함" 또는 "진리로부터 오는 거룩함"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고 또 어떤 번역에는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새 사람의 본질인 의와 거룩함은 참된 진리의 인식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먼저 힘쓰지 않고는 새로워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을 입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보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노력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각종 예배를 통해서, 각급 성경공부반에서, 각 구역성경공부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는 열기가 뜨거워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연구는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고 교회봉사와 하나님나라 사역에의 의지가 확고해지는 가장 분명한 길입니다.
새 사람을 입고 새 시대를 맞아 새 사역과 함께 복된 한 해를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새사람을 입어라
엡 4:17-24 / 민경설 목사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소원을 빌고 단순히 마음을 새로 가졌다고 해서 인간이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2003년 새해가 되고 새로운 복을 받으려면 우리가 정말 새로워져야 됩니다. 새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9: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존되느니라" 즉 "새술은 새부대"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새술은 새은혜 새축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새루워지기가 정말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말에 "세살 버릇 여든간다는 말"이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성경도 인간이 스스로 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렘13:23]"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정말 새로워질 수 없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새로워 질 수 있다는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안에 거하면 새로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런데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반드시 새로워져야 할 당위성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새로워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창39:23]"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요셉 같은 사람도 참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때, 형통의 역사가 일어나 결국은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님 안에서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 안에서 영이 거듭나야 됩니다.(엡4: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인간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거듭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거듭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이 오셔서 영이 거듭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요3: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예수를 영접할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영이 거듭나며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둘째, 옛사람을 벗어버리겠다는 결단을 해야 됩니다.(엡4: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도 있고 새사람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옛사람을 버릴 때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새로워지지 않는 것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 옛사람을 해결하셨기 때문에 내가 믿고 결단하기만 하면 새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다 처리됐지만 내가 결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끊지 못했던 옛사람의 구습을 과감하게 끊어버리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내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겠다는 결단을 할 때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으로 새사람을 입어야 됩니다.(엡4: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새사람을 입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예수님이 머리이고 내가 지체가 될 때 예수님과 한 몸이 됩니다. 의도 예수, 진리도 예수, 거룩함도 예수입니다. 예수와 한 몸이 되면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됩니다. (롬12: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내가 지체가 되어 순종할 때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새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을 때 내 속에서 주님을 보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고 주님과 한 몸이 될 때 예수로 옷 입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새사람이 되고 의와 진리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새사람이 되어 답답한 현실이 뚫리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옛 사람과 새 사람
엡 4:!7-24 / 방충근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해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22절의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옛 사람의 특징은 먼저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욕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욕심이 있기 때문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냥 욕심이 아니라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 바로 옛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길로 이끌고 죄악의 길로 인도하는 욕심을 유혹의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은 자기중심적인 욕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배만 채우고 호의호식하고 안락하게 살아가려는 욕심을 말합니다. 이런 욕심 속에 살아가는 자를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사람은 그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그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4:19).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하지만 마음의 욕심이 그 말씀을 막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하늘의 신령한 만나를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짐승들과 달라서 잘 먹고 배부르게 산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고는 참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히려 건강한 사람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육신이 연약하고 병든 그들의 모습은 만족하며 기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 만족은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후 3:5에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참 만족을 얻고 살아가는 인생은 행복과 기쁨 그 자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참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살면 우리의 인생은 실패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은 우리를 죄악된 길로 이끌며,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욕심을 따라 살면 순간적인 만족과 기쁨을 얻는 것 같은데 진정한 만족은 얻지 못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바다의 소금물로 그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과 같습니다. 목이 말라서 자신의 욕심을 계속 채우고 채우다 보면 결국 그 모든 욕심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1:15)” 고 말씀하십니다.
욕심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런 거룩한 욕심을 꿈 혹은 비전이라고 표현합니다. 존 하버드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후 그가 가졌던 거룩한 욕심과 비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황무지 같은 땅에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키우는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이 기도하면서 보스턴의 한 구석에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가 대학을 세울 당시 가진 것이라고 단돈 700파운드와 200권 책이 전부였습니다. 존이 대학을 세운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거룩한 욕심과 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욕심과 비전에 복에 복을 더하셨습니다. 그래서 존 하버드를 통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이름 있는 하버드 대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 미국을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바로 하버드 출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 이왕이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삶을 살기보다 거룩한 욕심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 영광위해 살다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866년 8월 9일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땅을 밟은 28세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통역관이란 직함을 가지고 이 배를 탔습니다. 오로지 조선에 예수를 전하고 조선에 사는 영혼들이 구원받기만을 간절히 소원하는 열정으로 그의 가슴은 불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제대로 전도해보지도 못하고 대동강변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외치면서, 결신을 맺은 적도 없었습니다. 세례를 베풀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성경공부를 인도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는 예수 믿으라고 외치며 그가 가져왔던 성경을 건네주며 죽어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죽음은 열매 맺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사라져가는 의미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초로 이 땅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의 죽음에 복에 복을 더하셨습니다. 그가 참수 당했던 대동강변에 그의 기념교회가 세워졌고 결국 그 교회가 1907년 평양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죽어 가면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조선에 교회가 세워지며 조선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리라 그는 상상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코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순교의 피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평양 대각성 운동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 목회자와 22명의 성도들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젊음을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그곳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죽음이 앞을 가로 막을지도 모르는 곳이었습니다. 그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며, 그들 속에 예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산과 계곡으로, 해외로 나가는 동안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어렵고 힘든 자들을 위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직장까지도 내려놓았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름 없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목회자와 또 한 사람의 평신도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평양 대각성 운동이 있은 지 100년이 되는 해 이제 한국의 교회는 복음의 불모지에 두 사람의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하나라도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사람의 손에 달린 것 같고, 정치적인 관계에 달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하나님께서 만든 만물 가운데 최고의 영광스러운 존재, 걸작품은 다름 아니라 사람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귀한 생명, 결코 헛되이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저는 그 순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이 그 순교의 피 속에 있으리라 확실히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욕심을 따라 사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빕니다.
18절에 보니까, 옛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는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죽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누리고 있어도 하나님 없으면 그의 생명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고 썩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은 솔로몬 왕이었습니다. 세상에 왕보다 더한 권력이 어디 있습니까? 최고의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1000명의 처첩을 거느린 사람이었습니다. 왕이었기에 세상에서 내놓으라는 미모를 가진 여자를 다 아내로 취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세상에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1:2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가졌고 다 해보았으면 그는 “복되고 복되며 복되고 복되니 모든 것이 복 되도다” 고 고백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헛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헛된 것입니까? 왕이라는 권력 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권력은 헛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재물도 헛된 것이요, 내가 가진 지식과 명예 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입니다. 내 가정에, 내 직장에, 내 사업체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고 곧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지 않으면 나의 하루가, 아니, 1년이, 아니 인생전체가 다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니까 하나님 없는 인생은 썩어져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솔로몬의 그 부귀영화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부귀영화는 곧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와 같은 것입니다. 솔로몬이 남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어떤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력도 하나님 없으면 헛된 것이란 교훈을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늘 죽음의 고비 고비를 어렵게 넘기며 살았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 왕으로부터 쫓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왕이 되고 나서는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쫓기는 부끄러운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 험난한 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편 23:1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나를 인도하는 목자가 되니까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해야 될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공명을 다 가졌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어떤 분이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을 글로 남겼던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목욕을 다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 울렸습니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요즘은 전화기 성능이 좋아져서 통화 하는 내용이 곁에 있는 사람까지 잘 들립니다. 딸이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나 MP3 하나 사고 싶은데 사도 돼?” 아빠가 대답합니다. “암~ 되고 말고.” “근데 아빠 여기 나와 보니까 휴대폰이 너무 예쁜 게 많은데 하나 바꿔도 돼?” 역시 아빠가 대답합니다. “그래 그래라” 조금 있다가 딸이 또 묻습니다. “아빠, 나 컴퓨터가 너무 느려져서 그런데 신형 하나 사도 돼?” 하고 묻습니다. 그 통화를 듣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MP3나 휴대폰은 1-20만원이면 되지만 컴퓨터는 백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것이라 설마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빠는 “그래 너 사고 싶은 거 다 사” 하고 통화가 끝났습니다. 이 남자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좌우를 둘러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휴대폰 주인~ 전화기 좀 찾아 가세요~” 하고 외치더라는 겁니다. 자기 딸이 아니니까 너 하고 싶은 거, 너 원하는 거 그리고 네가 뭘 해도 다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겁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썩어져 가는 것이요, 허망한 것이요, 하나님이 없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옛 것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새 것을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3-24절에 보니까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속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년 수가 우리의 속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붙들고 살아야 변화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성령 충만 받아야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운다고 되지 아니합니다. 힘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뜻과 행실이 착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속에 오셔야 우리는 변화 받는 것입니다. 은혜 없이는 우리는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9)”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우리는 변화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속사람이 바뀌지 아니합니다. 성령 받고 은혜 받은 사람은 먼저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 얼마 전에 ‘우간다의 부흥’이라는 영상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상물을 보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간다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독재자 이디 아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군인들이 갓 난 아기를 안고 가는 여인을 검문하면서 아기의 신분증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갓 난 아기에게 무슨 신분증이 있습니까? 신분증이 없는 아기를 빼앗아 하늘로 던진 후에 총에 꽂아 둔 칼에 찔러 죽였습니다. 거리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습니다. 누구 하나 그 시체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낳은 아기가 아프다고 낳은 지 3개월에 만에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2,3일만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밖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심지어 어느 날 군인들이 탄 트럭들이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이 군인들은 그 마을을 빙 둘러섰습니다. 그리고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격훈련을 실시하며 그 마을 사람 전부를 죽이고는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주술이 팽배했던 나라가 우간다였습니다. 그 결과 하늘 문이 닫혀서 비를 내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땅도 그 소산을 내지 아니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에이즈가 창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에이즈로 죽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목회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합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잠자고 있다” 고 조롱했습니다. 우간다는 악한 세력이 그 나라를 조정하고 죄가 창궐한 죽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우간다 교회의 목회자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늪지에 숨어서 밤을 세워가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성도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주님 도와달라고 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 죽음의 땅을 구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그들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공설 운동장에 모여 교회가 철야하며 기도했습니다. 교회마다 구역마다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면서 몸 안에 무엇인가 적셔지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땅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7명을 데리고 개척했던 교회가 2주 만에 2천명이 되었고 지금은 주일 날 다섯 번 예배드리는 자그마치 2만 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우간다의 교회는 모이기만 하면 기도하기 또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이즈가 창궐하던 나라가 에이즈 발생이 급격하게 감소할 뿐 아니라 치유되기 시작했고, 범죄율이 50%나 감소되었습니다. 정치권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12월 31일 뉴밀레니엄을 앞두고 서울 상암 운동장 같은 곳에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권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새 천년을 앞두고 그 나라는 하나님 앞에 우간다는 앞으로 우상숭배를 버리고, 주술을 타파하고 주님을 모시고 살기로 다짐하면서 이 나라를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을 서약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상물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어떻게 죽음의 땅 우간다가 변화되어 영적 부흥을 이루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He was invited. 하나님이 초대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영상물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엘2:12-13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 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는 살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스가랴4:6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읍시다. 이 나라의 참된 광복은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간절히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약속하신 주님께 우리의 소망과 미래가 있습니다.
종교개혁과 생명적 변화
엡 4:17-29 / 서정호 목사
오늘은 마틴 루터(M. Luther)가 1517년 10월 31일 로마 교황청을 향하여 95개조에 달하는 항의문을 내걸고 개혁의 기치를 든 지 506주년이 되는 주일이다. 중세 로마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교권의 남용과 교회 안에 우상적 요소를 용납하는 등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교회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당시의 형편은 정치, 사회, 문화, 예술 할 것 없이 개인의 자유와 의사는 무시된 채 모두 다 로마 교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급기야 문예부흥(Renaissance)운동이 터지게 되고, 이어서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둘 다 로마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지만 문예부흥운동이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면,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이어져야 된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종교 개혁의 요체를「말씀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이는 단순히 옛날로 돌아가는 복고(復古)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이나 단체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바꾸어 버리는 힘의 원천이 된다. 「개혁」은 궤도를 이탈하고 비정상적인 길로 가는 것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정상적인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며 교회가 지향하는 노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이루어나가는 생명적인 운동이다.
구조적 변화
성경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일러준다(고전10:31).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 최고의 가치를 망각한 채 자기의 욕심에 따르는 목적을 추구하곤 한다. 이럴 때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자기를 합리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소위 「장로의 유전」이라 불리우는 제도로 사람들을 얽어 묶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다(마 15:3). 개혁은 이렇게 잘못된 제도나 관행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제도를 만들게 하는 것이다.
중세 로마 교회의 잘못된 제도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 교회는 급속도로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성직자들에게 특혜가 주어지면서 성직이 매매되기 시작하였고, 사도들의 신앙이 퇴색되면서 교회는 속화일로를 걸었다. 그레고리 1세(GregoryⅠ)가 교황으로 즉위한 A.D. 590년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까지 약 1천 년간을 신앙적으로는 기독교의 암흑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데, 로마 교회에서는 이때가 교황권이 하늘을 찌를 듯한 전성시대라고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유나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부여해 주셨다. 그 중에도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제한할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앙이 앞서는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되어져 갔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가 아닌 이교도들의 지역이나 로마 카톨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일수록 독재권력과 인권의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척도에 따라야 된다.
성경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이며 가장 정당하고 바른 길을 일러주는 지침서가 된다. 개혁주의 신앙노선은 오직믿음(SolaFide),오직은혜(SolaGrace),오직성령(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다. 또한 개혁은 사상이나 이론만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곧 행동으로 옮겨지는 삶이어야 한다.
위선의 옷을 벗는 것.
신앙생활이 잘못 길든 사람은 자칫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구조 속에 갇혀버린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표현하였다(마 7:15).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형식 종교로 전락해 버린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지칭하였다(마23:15). 그들은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는 자들이었고 속은 불신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 거룩하고 진실한 것처럼 위장하고 다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고 하였다(시51:6).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식 종교로 전락하였고, 겉으로만 거룩을 표방하면서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다. 참된 신앙은 위선의 옷을 벗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타락한 교회와 변질되어 버린 신앙을 과감하게 타파하며 제 모습으로 돌려놓게 하는 시도이다. 개혁 운동은 잘못 된 일들을 과감하게 척결하고 정리하는 행동이다.
교회의 사명과 관련된다.
요한복음 2:1-11에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번 이적을 소개하고 있다. 쓸모없는 물을 가치가 있는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도하시는 교회 운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독교를 변화의 종교라고 한다. 그것은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바뀌어지는 생명적 변화를 의미한다(고전 15:53).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변화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질 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복음의 위력을 나타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인격의 변화
본문 말씀 22-24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라고 하였다. 개인에게 있어서 옛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인격의 변화가 개혁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변화이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다(고후 5:17).
마음은 인격의 주체
기독교의 복음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겨냥하고 작용하므로 그 인격을 새롭게 만들곤 한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중 씨 뿌리는 비유에서(마 13:18-23) 네 종류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였는데, 좋은 땅이 아닌 길가 밭이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은 모두 버린 바 된 자연인 그대로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문 말씀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여기 허망한 마음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마음이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마음을 뜻한다. 로마서 1:28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라고 하였다. 이처럼 황폐한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개혁 신앙이고(빌2:5) 곧 상실된 마음이 제 주인을 찾으므로 비로소 새롭게 변화가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지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고 언제 어디에서나 성령의 주도하시는 능력에 힘입어 생명적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3대원리는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사람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정직한 사람을 원하신다. 우리 삶의 정직과 진실이 무엇일까?
폴 틸리히라고 하는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의 불행은 역사 속에서 볼 때, 어디에서 오는가? 고대 사람들은 불행을 운명에서 온다고 했다. 그들은 잘살고 못사는 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노력을 하지 않았고 중세기 사람들은 불행이 죄와 저주에서 온다고 했다. 병이 들고, 홍수가 나고, 흉년이 와도 그 모든 것이 저주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어떤 노력과 의지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 사람들은 불행이 교만에서 온다고 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도 짓고, 옷도 좋은 것을 입고, 잘 먹고 생활한다. 그러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해서 그렇다. 성경에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어리석은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한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성경을 볼 때, 인간은 약하고 하나님은 강하다는 것이다. 하나님만 믿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고 정직함이다.
사람들이 스티븐 호킹 박사를 아인슈타인보다 위대한 과학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근육이 굳어 가는 병에 걸렸다. 의사는 현대의학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그가 2년이 아니라 10년, 20년 지금까지도 살고 있고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 가고 있다. 그는 「시간과 역사」라는 책의 서문에 ‘나는 매일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또 그 힘 때문에 살아간다’라고 썼다. 주어진 상황에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는 것이다. 그가 쓸 수 있는 생존의 시간은 2년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뿐 아니라 그의 능력까지도 크게 만들어 주셨다. 특히 우리 신앙인은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감사는 인간이 해야 할 본질이다. 우리 인생은 감사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구원받은 것도 감사하고, 이날까지 살아온 것도 감사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참 신앙인이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 주실 줄로 믿는다.
종교 개혁은 단순히 종교구조를 고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감사하는 자가 되고, 전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하면서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가운데 `세바스찬 바하`라는 분이 있다. 그는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곡을 많이 썼지만, 그의 인생은 작품처럼 화려하지 못했고 고난의 연속이었다. 열 살 되기 전에 조실부모해서 고아로 자랍니다. 형 밑에서 크면서 많은 구박을 받았다. 어른이 되어서 결혼했는데, 그만 아내가 13년 만에 죽었다. 또 다시 결혼을 해서 자식이 스무 명이나 되었지만 그 중에 열 명이 죽었으며 남은 열 명 가운데 하나는 스무 살이 되어서 죽고, 그 중에 하나는 뇌성마비로 고통을 받았다. 그 자신은 나이가 들어감에 눈이 점점 안 보이다가 그만 맹인이 되고 말았고 뇌일혈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가 곡을 만드는데,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곡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오라트리오를 만들 때 맨 밑에 싸인을 하는데, `세바스찬 바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합창곡을 만들었을 때는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께.` 오르간 반주곡을 만들 때는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싸인을 남겼다. 그는 자기를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내세우고 모든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은 그의 어려운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가?
진정한 개혁은 사람의 개혁이다.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물이 고이면 언젠가는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물은 흘러야 맑고 살아있는 것이다. 문화도 정체되어서는 안 되고 흘러야 한다. 하나의 기관도 새로워져야 미래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쉴 새 없이 새로워졌다. 외부적으로는 박해를,내부적으로는 이단을 물리쳤고 자체를 정화하는 개혁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기간에도 수도원에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누가 교회를 개혁해 가는 것이 가장 건전하며 신앙적으로 모범이 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이 스스로를 점검하여 잘못된 것이나 왜곡된 것을 찾아서 바로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자체 정화 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그것이 성령운동 또는 경건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경험했다. 이렇게 되려고 하면 ‘내 탓이요’라는 자각과 ‘내가 죄인이다’라는 회개운동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운동이 일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모든 잘못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자체 개혁은 결코 일어나지 못한다.
또한 개혁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므로 타인이 나를 개혁하는 결과가 된다. 기독교가 다른 세력에 의해서 개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개혁하면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된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항상 자발적인 개혁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이 개혁이 계속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가? 눈으로 보아 알고 있으면서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가 무엇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우매하지는 않다. 알면서도 용기가 부족하던지 아니면 안일하게 생각하는지 시작을 못하고 있다. 내 몸에 내 손으로 수술하는 칼을 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시해야만 살 수 있다면 감행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거듭난 심령들이 세례 받는 예식을 거행하게 된다. 성례전에는 세례와 성찬식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세례는 씻음을 받음과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성만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세례(Baptism)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예식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 것의 증명이며,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결단한 우리의 서약을 표시하고 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속에 이루어 놓으신 신분의 변화를 외적으로, 공적으로 인치는 예식이다. 또한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다. 갈라디아서 3:27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고 말씀을 한다. 세례는 세상에 속했던 내가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타락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며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인침이다. 또한 세례는 회개와 용서의 예식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확증이다. 회개하는 자녀의 죄를 완전하게 도말하여 씻겨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곧 세례이다.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을 의미한다. 세례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세례를 주실 때 역사하신 성령님 안에서 내가 변화된 생의 출발을 하는 것이다. 세례는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입장허가'이다.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한국교회가 복음을 재발견할 때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영적 각성은 도덕적 갱신과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져 교회가 사회를 정화하고 선도하는 중심세력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그 화려한 성장도 유럽교회들처럼 하나의 과거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현대적 의미
엡 4:17-29 / 손샹률 목사
10월 마지막 주일은 개신 교회에서 지키는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 Luther)가 로마 교황청을 향하여 95개조에 달하는 항의문을 내걸고 개혁의 기치를 든 지 485주년이 됩니다. 중세 로마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교권의 남용과 교회 안에 우상적 요소를 용납하는 등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교회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형편은 정치, 사회, 문화, 예술 할 것 없이 개인의 자유와 의사는 무시된 채 모두 다 로마 교회의 교권주의 자들에게 장악되어 있었습니다. 급기야 문예 부흥(Renaissance)운동이 터지게 되고, 이어서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둘 다 로마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지만 전자는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입니다. 옛날이마 지금이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이어져야 됩니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의 요체(要諦)를 「말씀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이는 단순히 옛날로 돌아가는 복고(復古)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이나 단체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바꾸어 버리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개혁」은 궤도를 이탈하고 비정상적인 길로 가는 것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정상적인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며 개혁 교회가 지향하는 노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이루어나가는 생명 적인 운동입니다.
Ⅰ. 구조적 변화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일러줍니다(고전10:31).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 최고의 가치를 망각한 채 자기의 욕심에 따르는 목적을 추구하곤 합니다. 이럴 때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자기를 합리화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소위 「장로의 유전」이라 불리우는 제도로 사람들을 얽어 묶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15:3).
개혁은 이렇게 잘못된 제도나 관행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제도를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1) 중세 로마 교회의 잘못된 제도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 교회는 급속도로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직자들에게 특혜가 주어지면서 성직이 매매되기 시작하였고, 사도들의 신앙이 퇴색되면서 교회는 속화일로를 걸었습니다. 그레고리 1세(GregoryⅠ)가 교황으로 즉위한 A.D 590년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까지 약 1천 년간을 신앙적으로는 기독교의 암흑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데, 로마 교회에서는 이 때가 교황 권이 하늘을 찌를 듯한 전성시대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레고리 7세로 불리 우는 힐데브란트(Hildebrand)가 교황이 된 후(1073-1085),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땅에도 왕이 둘일 수 없다"고 하며 교황을 유일한 권력자로 인정하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 개혁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교황 레오 10세(Leo Ⅹ. 1513-1523)때 시행한 속죄권 발매 제도였습니다.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게 되자 그것을 조달하는 목적으로 속죄권을 판매하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맬 수 있고 풀 수 있는 권세를 받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천국과 지옥문을 열어 놓았다. 이 속죄권을 사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사함을 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해 표를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궤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곧 천국으로 옮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명시하였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회의 또는 교황의 권위를 빙자하여 만들어진 제도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하는 요소들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 개혁운동인 것입니다.
(2) 세상 나라의 불합리한 제도들
인간 역사를 통하여 보면 개인이나 국가간에 불평등한 조약이나 법을 제정해 놓고 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런 것은 명분상 합법적인 절차를 내세우지만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들입니다.
노예 제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과거 기독교 국가들 중에도 오랜 기간 노예제도를 법으로 정해 놓고 이를 시행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가 그것을 남용하여 국민의 인권을 탄압했던 사례나, 사용자가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했던 일들이라든지 모두 다 하나님의 원리에 거스리는 일들을 하면서 이를 제도와 관행으로 묶어 놓은 경우들입니다.
창조 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유나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중에도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개혁 신앙이 앞서는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되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가 아닌 이교도들의 지역이나 로마 카톨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일수록 독재 권력과 인권의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의 척도에 따라야 됩니다.
흔히 사람들의 하는 일은 다수의 힘을 모아 밀어붙이는 식으로 일종의 포풀리즘(populim)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있어서 그것이 또 다른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성경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이며 가장 정당하고 바른 길을 일러주는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다.
개혁자 루터는 1521년 교황 레오 10세의 명을 받은 찰스 황제의 부름을 받고 웜스(Worms) 국회에 나갔는데, 황제로부터 "그대의 글들을 취소할 용의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루터는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을 지적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는 취소할 수 없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노선입니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ce) 오직 성령(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구호가 개혁 신앙의 모토(motto)입니다.
Ⅱ. 생활의 변화입니다.
본문 말씀 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28절에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개혁은 사상이나 이론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행동으로 옮겨지는 삶이어야 합니다.
(1) 위선의 옷을 벗는 것.
신앙 생활이 잘못 길든 사람은 자칫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구조 속에 갇혀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마7:15).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형식 종교로 전락해 버린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마23:15). 그들은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는 자들이었고 속은 불신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 거룩하고 진실한 것처럼 위장하고 다녔습니다. 마태복음 23:5-7에 보면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51:6).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식 종교로 전락하였고, 겉으로만 거룩을 표방하면서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습니다.
(2) 과감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수님꼐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는 세계 각 국에서 모여온 사람들을 상대로 소와 양과 비둘기 같은 동물을 팔거나 돈을 바꾸는 등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을 내어쫓고 돈 바꾸는 상을 엎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2:13-16). 이 때 제자들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2:17).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타락한 교회와 변질되어 버린 신앙을 과감하게 타파하며 제 모습으로 돌려놓게 하는 시도입니다. 개혁 운동은 잘못 된 일들을 과감하게 척결하고 정리하는 행동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종교가 암흑기에 들어갔을 때 분연히 일어나서 모든 우상 숭배의 잔재를 척결하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개혁을 단행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합 왕과 맞서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제사장들을 진멸해 버린 엘리야나(왕상18:40), 므낫세 이후 우상 종교로 전락해 버린 유대 왕국을 하나님 중심의 나라로 바꾸어 놓은 요시야 왕 같은 인물입니다. 열왕기하 23:1-16에 보면 그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율법 책을 찾아 그 말씀에 명시된 도리를 백성에게 낭독하고 곳곳에 있는 우상의 전각들을 훼파하였으며 심지어 우상 숭배를 주도했던 무리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 뼈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3) 교회의 사명과 관련됩니다.
요한복음 2:1-11에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번 이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쓸모 없는 물을 가치가 있는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도하시는 교회 운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변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바뀌어지는 생명적 변화를 의미합니다(고전15:53).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변화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춰질 때 바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복음의 위력을 나타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기 못할 것이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마5:14-16).
Ⅲ. 인격의 변화입니다.
본문 말씀 22-24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옛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인격의 변화가 개혁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변화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5:17).
(1) 마음은 인격의 주체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겨냥하고 작용하므로써 그 인격을 새롭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중 씨 뿌리는 비유는(마13:18-23), 네 종류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여기 좋은 땅이 아닌 길가 밭이나 돌 밭이나 가시떨기 밭은 모두 버린바 된 자연인 그대로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문 말씀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허망한 마음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마음이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마음을 뜻합니다. 로마서 1:28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은 마귀가 표적으로 삼는 마음이요 온갖 죄악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더 흉악한 범죄를 유발시키게 되는 것입니다(롬7:20). 이처럼 황폐한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개혁 신앙인 것입니다(빌2:5).
(2) 회개하므로 마음을 비워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마음을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마5:3). 그것은 청결한 마음과 직결되는 것입니다(마5:8). 마음을 청결케 하는 작업은 회개하므로 가능해집니다. 로마서 1:29-31에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마귀의 속성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로마서 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변화와 개혁은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므로 이루어집니다. 오순절에 성령받은 베드로의 셜교를 들은 무리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행2:37-38).
(3) 성령의 역사로 되어집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게 되면 모든 육신의 소욕은 소멸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라사인의 마을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이 들려 소리를 지르며 무덤 사이로 돌아다니는 사나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옷을 벗고 광란극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안에 있는 귀신들을 쫓아 내신 후 맑은 정신이 들어갔을 때 그는 옷을 입고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눅8:26-39). 곧 상실된 마음이 제 주인을 찾으므로 비로소 새롭게 변화가 되어진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지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성령의 주도하시는 능력에 힘입어 생명적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새해에 새 사람
에 4:17-32 / 한경직 목사
여기 보면 세 가지 권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 방면의 권면이요, 다른 둘은 적극적 방면의 권면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면의 권면을 생각함으로써 새해에 처하여 새로운 변화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一, 소극적 방면의 권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여기 옛 사람(old nature)이라 한 것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유혹의 욕심을 쫓는 자』입니다. 이 유혹의 욕심은 미혹의 욕심, 꾀는 욕심, 또는 속이는 욕심이니 즉 우리들을 꾀는 욕심을 따라 행하는 자를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인간들은 권세욕, 명예욕, 금전욕, 물질 욕, 등의 모든 욕심의 꾐을 받고 있으며 인간은 이것들을 찾으면 행복이 오고 기쁨이 오는 줄로 알고 애쓰지만 사실인즉 이러한 유혹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자가 얻는 것은 다만 저주와 비애뿐입니다.
둘째로,『썩어 가는 옛 사람』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늙으면 썩어지며 더러워지고 냄새가 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말하는 옛 사람은 도덕적으로 썩어져 가는 것이며 냄새나는 것입니다.
셋째로,『구습을 쫓는 옛 사람』입니다. 이 구습이라는 것은『옛 생활 양식』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모를 때에 가졌던 불결의 행동이며 상상하기도 싫은 방탕의 생활 양식이니 이와 같은 더럽고 무서운 구습을 완전히 벗어버리라는 권면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우리를 꾀는 욕심, 썩어 가는 옛 사람, 예수를 모를 때 좇으며 행하던 생활 양식을 온전히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二, 적극적 방면의 권면
첫째로,『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구역에는『네 속 사람을 새롭게 하여』라 하였습니다. 로마서 十二장 二절에 보면『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 하였습니다. 세인의 야식대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리고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며 속으로부터 새로워져서 변화하라는 것이니, 변화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두 가지로 선별하면 하나는 물리적 변화이며 또 하나는 화학적 변화입니다. 물리적 변화란 것은 형태만 변하고 그 본질은 불변한 대로의 것이며 화학적 변화란 것은 형태와 본질이 다 변화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변화는 화학적 변화와 같이 형태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완전히 변화하여 하나님에게까지 나갈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하면 수렁 이가 고치를 뚫고 나비가 되는 것과 같으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정한 온기를 받으면 수렁 이는 그 고치 속에서 점점 변화하여 날개가 생기고 빛깔이 생기고 발도 생기고 수염도 나며 마지막에는 나비가 되어 어두운 고치를 뚫고 광명(光明)한 공중에서 공기를 마시며 아름다운 꽃을 따르면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둘째로,『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먼저 속에서 은혜를 받으면 밖에서 새 사람으로 나타나나니 그 형태는 하나님을 따라서 변화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하였으니 지와 성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이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경과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내재의 하나님의 형상은 다 파괴된 것입니다. 그런즉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변화할 자의 형상을 의, 진리, 성(聖)의 세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즉 우리의 의의 생활(도덕적인 생활), 진리의 생활(그리스도를 중심 한 생활) 이 두 가지의 생활은 결국 성결한 생활로 변하는 것이니 의, 진리, 성 이 세 가지는 새 사람의 특색이며 기독교인 된 자는 마땅히 이것을 받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중생케 하시니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었다 하여서 우리의 성질이 갑자기 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전에 있던 나의 습성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우리의 태도가 변하며 간단없는 노력으로 우리는 성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一九五四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좀 더 성화(聖化)의 생활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중에 욕심을 따르는 자, 썩어져 가는 옛 생활 양식을 따르는 자는 없습니까? 이것들을 다 벗어버리십시오! 우리가 축복을 원한다 하여 이 축복이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변화하여 새 사람이 됨으로써만 우리에게 축복이 올 것이고 금년 一년이 참으로 축복의 해가 될 것입니다.
신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민족적 과제는 통일과 재건입니다. 이것을 우리 전 겨레는 염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을 우리가 원함으로써 되는 것이라면 인간을 통하여 된다 할 수 있으니 오늘 과연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이 축복을 성취시킬 수 있습니까?
세계는 험악합니다. 국제 정세는 긴장하여졌습니다. 세계 인류는 불안과 공포에 떨며 특히 한국 백성은 한국의 앞길에 대하여 떨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창세기를 읽는 중 가장 은혜로운 것은 소돔과 고모라 에 관한 기사입니다. 세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려고 올 때 아브라함은 따라나가면 간절히 부탁하여 의인 五十명이 있으면 유황불의 재앙에서 면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나 그 성에 의인 五十명이 없었고, 또 四十명만 있어도 면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으나 四十명의 의인이 없었고, 의인 三十명, 二十명, 나중에는 의인 十명만 있어도 멸하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였으나 의인 十병이 없는 고로 하나님의 진노의 유황불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내리어 멸망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문제는 그 땅에 의인이 몇 명이나 잇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통일을 염원하지만 우리 나라에 의인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좇아 새 사람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 국가가 통일되기를 원하면 나 자신부터가 새 사람이 되어서 이 민족을 구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군중 교회(People's Church)의 목사인 스미드 박사는 一九二七년에 그의 제三十八회 생일을 당하는 날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一,『주님의 마음과 꼭 같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二,『주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소서』
三,『저는 오늘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하나 그러나 내 노력은 분산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백 퍼센트 하나님만 위하여 충성하게 하여 주소서』
보십시오!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가 목회 하는 군중 교회는 지금 四, 五천 명이 모이는 대 교회이며 三백여 명의 외지 선교사를 그 한 교회에서 파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목표가 금년 중으로 四백 명의 외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 하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에게 모든 새로운 계획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업의 계획은 모두 둘째이며 무엇보다도 먼저 할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간격이 없는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인간 계획과 가로 인한 사업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겸손하며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충성하여야 하겠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새 마음을 받아 하나님과 나와의 간격 없는 생활을 할 것이며 三六五일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하십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신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해 첫 주일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입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예수를 믿자
엡 4:!7-32 / 김태환 목사
어느덧 2002년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새해에 많은 포부가 있지요? 많은 계획이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큰 뜻을 품고 자기가 목적하고 있는 "어떤 곳"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 쯤 가다가 한 곳에 이르렀을 때, 청년은 그곳 사람들을 만나 "여기가 바로 그 '어떤 곳'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닙니다. 당신이 만일 거기에 가려고 한다면 당신의 눈에 꿈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청년은 눈에 꿈을 가지고 계속 걸었습니다. 다음 마을에 이르러 그 청년은 사람들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길로 가면 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귀에 음성(音聲)을 들어야 합니다."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다시 귀에 음성을 담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다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 청년은 몹시 지쳐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려고 하는 "어떤 곳"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당신은 지금 목적지에 가까이 오기는 왔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정말 가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마음에 노래를 가져야 합니다."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청년은 눈에는 꿈을, 귀에는 음성을, 마음에는 노래를 가짐으로써 마침내 목적했던 "그 어떤 곳"에 갈 수 있었다는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꿈이라는 말대신 “비전”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꿈 중의 꿈, 비전 중의 비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갈라디아서6:15 말씀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발견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이 말씀을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이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할례였습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자부심의 토대였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유대인들의 자부심을 한마디로 깔아 뭉갠 것입니다. “할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새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23-24절에 그 말씀이 나오지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변화되어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저는 그 가능성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껏 목회를 하면서 그렇게 변화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49:8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있습니다.
서울대학을 나온 잘 생긴 청년이 있었습니다.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집안도 좋고 그야말로 여자들 사이에서 킹카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짱”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졸업하고 하바드로 유학을 왔습니다. 저희 교회는 학생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는 탓에 명절이 되면 혼자 있는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서 먹입니다. 한 학생이 제게 전화를 했어요. 오늘 목사님 댁에 가는데 친구 한 사람을 데려가면 안되겠느냐고요. 그래서 괜찮다고 했더니 친구를 데려 왔습니다. 바로 이 청년이 ‘짱”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저희 집에 왔다가 교회 반주자하고 눈이 맞아서 결혼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이 청년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자꾸 다른 여자들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일날은 교회를 나오는데, 그 태도가 거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부흥회를 하면 아내가 반주지이니까 교회를 나와야 하고 집에 가는 시간이 늦어집니다. 그러면 이 청년이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립니다. 그러다가 저희 교회에서 일대일 양육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기를 끝내고, 2기를 끝내고, 3기를 모집할 즈음에 어쩌다가 이 청년이 교회에서 저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청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자네 나한테 일대일 양육을 받지 않겠나?” 그랬더니 한참 말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이놈이 또 무슨 핑계거리를 찾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맞아. 지금 박사논문을 쓰고 있으니까 시간이 없다고 하겠지?” 하고 그의 핑계거리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러죠, 뭐.” “그러죠, 뭐” 이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태도는 진지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유치했지만 진지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많은 신앙생활의 문제들을 그에게서 배웠습니다. 제가 그를 가르치는 시간보다 그가 나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주로 토요일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그를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꼭 올 때 아내가 타 준 것이라고 하면서 보온병에다가 생강차 두잔 정도를 타왔습니다. 그걸 마시면서 저는 그 청년에게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목이 아파서 말을 더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태도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로마서를 따로 집에서 읽으면서 올 때마다 한뭉치 씩 자기가 이해한대로 말씀을 써와서 잘못된 곳이 없는지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글은 거칠지만 주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와 열정이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변화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 청년이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권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집사직을 받고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관리부장 직을 몇 년 하다가 지금은 인디아나에가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다. 물론 그곳에 있는 좋은 제약회사에 취직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권사직을 받고 국제 결혼한 사람들을 위해서 동시통역을 맡고 있고, 교회에서 목사님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그날이 언제였습니까? 저와 교회에서 마주친 날이었습니다. “그러죠, 뭐” 하고 저에게 선뜻 대답한 바로 그날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그렇게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17절에 “그러므로(Therefore)” 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결론을 내리는 말입니다. 그 위에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살을 살아야 한다(1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각자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셨다(11절).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으로 잘 양육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야 한다(12절). 우리 모두는 서로 도와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한다(15-16절).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a life worthy of the calling you have received)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을 좀 해야 합니다. 그냥 적당하게 교회 생활하면서 그럭저럭 사는 것이 아니라 좀 성경을 깊이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숙해 집니다. 그래야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는데 그 은사들을 사용해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잘 세워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믿음을 본받아서 잘 성장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그 이유를 압니다. 여러분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23-24절 말씀을 읽어 볼까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러분, 성경 말씀의 표현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새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put on the new self” 라고 했습니다. 이 “put on” 이란 말은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옷을 입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입던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던 옷을 벗지 않고 그 위에 옷을 껴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몸이 불편하지요. 행동이 거북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옛날의 나(old self)”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new self in Christ)”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갈아 입지 않고 껴 입는 것이 문제입니다. 껴입으니까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10년 믿어도 변화가 되지 않는 사람, 무엇이 문제입니까?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한다는데 예수 믿은지 10년이 되어도 변하지 못하는 사람,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월은 많이 지나갔지만 예수를 잘못 믿었습니다. 20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엣날의 나”를 헌 옷처럼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로 새옷처럼 갈아 입어야 하는데 헌 옷 위에 새 옷을 껴 입은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믿으면 죽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17-19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셌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보세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그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허망한 것들입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쓸데 없다” “아무 열매가 없다” “아무 유익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전도서 1장에 나오는 첫 말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2-3절)”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전도서에는 허무주의 사상이 강하다고 합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말씀을 그렇게 읽으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허무주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허망함(futility)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떻게, 무슨 업적을 남겼든지 간에 필연적으로 이런 고백으로 인생을 마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삶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허망한 것입니다. 보세요.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예수 믿음면서도 여전히 이런 삶을 깨끗하게 청산(淸算)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보면서 각자 기도 제목을 5개씩 써 내라고 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그 사람 기도 제목을 따라 혼자 다 할 수 없으니까 교역자들이 나누어서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제목 5개를 쓰라고 했더니 그게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예요. 제일 많이 나온 것이 “가족의 건강을 위하여” 이고, 두번째로 많이 나온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하여” 입니다. 이런 기도 제목 내놓는 사람들은 기도생활 안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생활 하는 사람들은 기도 제목이 이렇지 않습니다. 기도 제목이 구체적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의 기도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 남편이 술 좀 그만 마시개 해 주세요.” 이 사람 예수 오래 믿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오래 믿었어도 여태껏 술 담배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例)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 위에 새 옷을 입으려고 하니 변화가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이기심입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이기심(利己心)이라고 하는 장애물을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이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전의 습관이요, 예전의 가치관입니다. 이것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를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22절에 지금까지 말한 말씀이 나와 있네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다시 묻습니다. 왜 벗어 버려야 합니까? 새 사람을 옷입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2002년 새해에는 뭐라도 좋으니까 지금까지 벗어 버리지 못했던 것 하나만이라도 벗어 버리십시오. 벗어 버릴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은 한꺼번에 다 벗어버리면 좋겠지만 힘들면 그 중에 하나만이라도 벗어 버리십시오. 뭐를 벗어 버릴까요? 그 중에 만만한 것 하나를 선택하세요. 이게 중요합니다. 되지도 않을 것을 모두 벗어버리겠다고 결심해 놓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금년 말에 가서 “역시 나는 변화되지 않아! 나는 할 수 없어!” 이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사무엘 상 17장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있습니다. 골리앗이 누구입니까? 거인입니다. 그가 쓰는 칼은 보통 사람이 들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온 몸에 갑옷을 입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기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골리앗이 뭐라고 하냐면, 우리 이렇게 싸울 것이 아니라 대표끼리 싸우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면 우리가 모두 너희들의 종이 되겠고, 너희가 지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편의 대표니까 너희도 대표를 뽑아 내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기가 죽었습니다. 이 때 어린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아버지가 싸준 도시락을 전해 주기 위해서 왔다가 마침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어린 다윗의 마음 속에 의분(義憤)이 일어났습니다. 거룩한 분노(憤怒)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골리앗에게 놀림감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어린 다윗은 분개했습니다.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이 말이 사울 왕에게 까지 올라갔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불려갔습니다. 사울이 보니까 어린 애입니다. 그의 뜻은 가상하지만 이런 어린애를 골리앗과 싸우게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이 사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34-37절).”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날 이 때를 위해서 다윗을 어떻게 훈련 시켜왔는지를 보십시오.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 입에서 양 새끼를 건져냈고, 내가 그 수염을 잡고 쳐 죽였나이다.” 어린 다윗에게 맞아 죽을 정도의 사자나 곰이라면 이 놈들도 변변한 놈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놈들도 사자 새끼나 곰 새끼들이 아니었을까요? 곰 새끼냐 아니냐, 사자 새끼나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훈련 시키는 방법은 쉬운 상대를 붙여 주셔서 다윗에게 승리의 자신감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의 당당한 말 속에 승리의 자신감이 배어 있지 않습니까?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 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포기해야 할 많은 문제 중에 “내가 새해에는 이 모든 것들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지!” 이렇게 결심하는 사람은 못합니다. 그 중에 만만한 것을 하나 고르세요. “하나님, 저의 약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믿음 생활하면서도 이것 하나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금년에 이 문제를 꼭 해결해서 다윗처럼 저에게도 승리의 자신감을 심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아, 나도 되는구나. 이번에 내가 술도 끊었는데, 끊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이런 승리의 고백이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언어생활에서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듣는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25, 29절). 성도의 언어 생활이 중요합니다. 예전의 언어 생활을 벗어 버리지 못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끔 툭툭 튀어나오는 말들을 보면 이 사람이 과거에 어떤 생활을 했겠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윷놀이 하다가 자기 말이 앞서 가는데 뒤에서 상대방의 말이 바싹 쫓아 옵니다. 무심결에 이 사람이 “야, 빨리 토껴라! 토껴!” 그럽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심결에 “제가 삥땅을 좀 쳤거든요.” 그래요.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모이면 음담패설을 잘 합니다. 그리고 서로 낄낄거리고 웃습니다. 성도는 이런 말들을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대신 남을 격려하는 말,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금년에는 언어생활 하나만이라도 좀 벗어 보세요. 야고보서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3:2 ),” 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자기 성질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26-27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여러분, 제 성격이 어떨 것 같습니까? 제 성격이 붙같아서 불이 붙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안팎으로 얼마나 실수가 많았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날 새벽기도 시간에 에베소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 말씀이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니까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foothold” 라는 말이 우리 말로 기회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 뜻은 “발판(footstool)” 이란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마귀가 항상 발판을 딛고 우리를 엿보고 있다가 우리가 화를 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을 마귀는 놓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완전히 마귀의 손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 “딴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마귀가 그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제 얘기하다가 말았지요?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의 뜻을 그날 새벽기도에서 설명하다가 하나님께서 분명한 성령의 내적인 음성으로 제 마음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래. 너는 그렇게 말씀을 잘 설명하면서 너는 얼마나 마귀에게 기회를 주고 있느냐?” 목사가 되어서 일생동안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도구가 되겠다고 헌신한 사람이 내 성질 하나 조절 못해서 마귀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말씀이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화가 날 때마다 속으로 다짐합니다.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말자!” 저에게는 이 간단한 결심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후로 화를 전혀 안내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고쳐졌습니다.
끝으로, 성도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30절). 성령은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인격(人格)을 가지고 계십니다. 기뻐하시기도 하고 슬퍼하시기도 하십니다. 기도의 사람 케더린 쿨만(Catherin Culman)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의 집회에서 놀라운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병고치는 일들은 예사로 일어났고, 성령이 강하게 역사해서 그녀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상한 현상도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집회할 때는 맨 앞자리를 미리 예약을 해서 그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앉혔다고 합니다. 어느 집회에서 설교 시간이 되었는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청중은 쥐죽은듯이 조용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발 우리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마세요. 여러분 제발!(Ladies and gentlemen! Please,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Please!)” 그 때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회개의 영을 강하게 부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그대신 성령을 기쁘시게 해 드리십시오. 우선 내 속에 성령님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것부터 깨달으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집에 손님이 한분만 와 계셔도 그분에게 마음을 써 드려야 하는데,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님이 들어와 계시는데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얼마나 그분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속에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태복음 12:31)”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훼방한다(blasphemy)”는 말은 “모독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검증(檢證)된 얘기는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닙니다. 성령은 매우 마음이 여립니다. 그래서 그분은 상처받기 쉽습니다. 그대신 그분은 작은 일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인정할 때 그분은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를 때 우리 속에 계시는 그분은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그분을 인정해 보세요. 비록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 내 보여 보세요. 여러분의 입을 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 보세요. 그 때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물밀듯이 밀려 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2002년 임오년(壬午年)이 밝아왔습니다. 올 해는 말(馬)의 해입니다. 말은 힘과 도약(跳躍)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새해 동안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향해서 힘차게 도약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삶
엡 4:18-21 / 박상훈 목사 / 승동교회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행19:28 말씀과 같이, 그 당시 에베소에는 풍요의 여신 아데미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수시로 아데미 신전에 올라가, 자신들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했습니다.
당시의 이방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신전에 올라가 제사할 때, 완전히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술에 취하고 나면, 그 뒤를 이어서 온갖 방탕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사람들은 술에 취해서 고성방가를 일삼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술에 취해서 거친 말을 하며, 서로 간에 원망하며 다투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엡5:18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도는 이교도들처럼 술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거역할 수 없습니다. “예!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에 온전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계속해서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술 취하는 것과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을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술 취했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았을 때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술 취하면,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성령 충만의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배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관하십니다.
예컨대 눅4:1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으셔서 성령님에게 이끌리셨습니다. 막1:12 말씀을 보면, 이를 좀더 강하게 표현해서 예수님이 성령님에게 몰아내심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곧이어 오늘 본문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삶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늘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 노래를 심어주십니다.
엡5: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 그 결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첫째 현상은 무엇입니까? 산을 옮길 만큼 큰 믿음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천사의 말로 방언을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 충만의 첫째 결과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새 노래를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본문의 말씀을 따라서, 이 사실을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첫째,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입니다. 이것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부르는 “새 노래”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입술에 “새 노래,” 곧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심어주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이 세 가지 용어를 우리가 억지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드리는 시가 곧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며, 또한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부르는 신령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새 노래”라는 용어가 모두 아홉 번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에 여섯 번, 이사야서에 한 번,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새 노래”는 언제나 구원받은 성도들에 의해서만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신령치 못한 노래들, 방탕한 노래들을 즐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새 노래, 곧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둘째, “서로 화답하며”입니다. 우리는 새 노래로 서로 화답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서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 곧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성도들은 새 노래로 서로 화답하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기억합시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불신자들이 들으라고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찬양이 전도용으로 사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노래하라는 말씀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따라서 찬양을 불신자에게 들려주어서 전도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부르는 새 노래가 불신자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성도들 사이에 서로 화답하면서, 오로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너희의 마음으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입술로만 부르는 노래일 뿐입니다.
찬양은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지 입술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렁찬 목소리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음악적으로는 완벽할는지 몰라도, 그것이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이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암5:23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로만 부르는 노래를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늘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새 노래를 하나님에게 올려드리기를 바랍니다.
넷째, “주께”입니다. 물론 우리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간에 화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아 우리의 마음으로 부르는 새 노래를 궁극적으로 받으셔야 할 분은 누구이십니까? 오직 한 분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찬양은 우리 자신의 만족을 꾀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인기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찬양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혼자서 찬양을 하든지, 성가대의 일원으로 찬양을 부르든지, 온 회중이 다함께 찬양을 드리든지 간에, 우리의 시선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새 노래를 기쁘게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노래하며 찬송하며”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새 노래를 하나님에게 올려드리는 방법이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노래는 육성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여기에 나오는 찬송의 본 뜻은 악기를 이용해서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하5:13 말씀을 보면,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때 육성으로 노래하는 자들이 있었고, 악기를 사용하여 찬송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드리는 노래와 찬송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합시다. 그리함으로서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늘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하십니다.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오늘 본문 20절은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감사의 삶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서, 감사의 원리를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첫째, “범사에”입니다. 오직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기 때문입니다.
욥1:21 말씀처럼, 욥은 하나님이 주실 때도 감사했습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때도 역시 감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욥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그가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마음이 교만해서, 자기가 항상 더 많은 것을 누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범사에 불평하며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요14:13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예수님이 친히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이 됩니다.
히2:12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문맥상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하반부에서, 예수님은 그 자신이 친히 교회 중에서, 곧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 자신이 친히 하나님을 찬송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중보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도,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게 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드리는 감사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셋째, “항상”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는 항상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때와 관련해서, 성경에는 세 종류의 감사가 등장합니다.
먼저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나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그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비로소 감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은혜를 받기 전에 미리 드리는 감사도 있습니다. 대하20:21 말씀을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이 전쟁에 나가기 앞서,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게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이 미리 드리는 감사를 받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결과 유다 백성들은 싸우지도 않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바라보면서, 먼저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단6:10 말씀을 보면, 다니엘이 곤경에 처했지만 그는 이전에 하던 대로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는 전연 관계없이, 하나님은 항상 감사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의 경우에서,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드리는 감사는 가장 기본적인 수준입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 미리 드리는 감사는 조금 더 영적으로 성숙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수준의 감사는 항상 드리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수준은 어떠합니까? 우리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우리의 형편이나 처지와는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시며,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습니다. 롬8:16 말씀처럼, 성령님이 그 사실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약1:17 말씀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드리는 감사를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좋은 선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실제로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궁극적인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넷째,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가 드리는 감사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피차에 복종하게 하십니다.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안으로는 새 노래가 넘쳐흐르게 됩니다. 둘째로, 위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옆으로는 피차에 복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피차 복종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따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본을 보여주셨습니까?
빌2:6∼7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해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늘 자신을 낮추며, 즐겨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음은 “피차 복종하라”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결코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피차 복종합니다. 이 원리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결코 다투지 말고, 피차에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각자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다른 지체에게서 섬김만 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 단 한 사람에게서만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모두가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차 복종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연히 우리 모두가 든든히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아,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골로새서는 성령 충만에 대해서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골로새서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며 삽시다. 이와 같은 순종과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금년의 상반기가 지나가고, 이제 금년의 하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이제부터는 새 노래로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피차에 복종함으로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0-24 / 홍인식 목사
성령강림 주간
지금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기간으로 지킵니다. 교회력의 절기 중에 가장 긴 기간이 바로 성령강림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류의 역사 속에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기독교회는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한 이후에 교회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교회는 언제든지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계 교회는 교회력 중에서 성령강림 기간을 27 혹은 28주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 년의 교회력에서 반 이 상이 성령과 관련된 절기라는 것입니다. 그 만큼 성령이 교회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강력하다는 것은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그리스도만이 지배하고 교회가 그의 음성만을 듣는 곳에서만 교회는 진리 속에 있고, 자유하게 되고 세상을 해방하는 힘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음성을 바로 듣게 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럼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셨던 교회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오늘 이 시대에 성령의 강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금년은 저희 교회가 시작 된지 35 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특별한 의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창립 35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의 창시자인 삼위일체 하나님 특히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시는 성령과의 관계에서 준비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새 옷을 갈아입다.
오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옷을 갈아입도록 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는 사람은 새 옷으로 단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 시대를 헌 옷을 입은 채 맞이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설날은 아이들에게는 새 옷을 입는 날이었습니다. 때때옷이라고 해서 저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설날을 맞이하면서 어른들에게 세배하곤 했던 생각이 납니다. 설날에 때때옷으로 갈아입는 우리의 풍속은 참 좋은 풍속이었습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음과 동시에 새로운 각오로 새 해를 살겠다는 결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이 주시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성령의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이제부터 현대교회의 새로운 역사와 더불어 각자의 삶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새 옷 갈아입기
옛 옷을 벗어버려야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여러분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옛 생각을 버리지 않고서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옛날의 시각을 버리지 않고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생각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리 잘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 생각과 옛 시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옛 생각과 시각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 생각과 시각에 의존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살면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교회의 총회가 미국에서 개최되어서 그것을 방문했습니다. 95년도로 기억합니다. 총회에서 마련해 준 호텔을 숙소로 해서 들어갔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서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습니다. 날씨가 매우 차가왔습니다. 더운물로 목욕을 해야 했기에 뜨거운 물 꼭지를 틀어놓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틀어나도 물이 더워지지를 않습니다. 한참을 있다 보니 조금 미지근해 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찬 물로 숨을 헐떡이며 목욕을 했습니다.
왜 더운물이 안 나왔을까요? 하여간 얼마 추운지 숨을 들이키면서 목욕을 끝마쳤습니다. 그리고 수도꼭지 앞에서 이도 닦고 하느라고 서성거렸습니다. 그런데 문득 수도꼭지를 들여다보니까 꼭지 위에 H 자와 C 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저는 끝까지 C 자가 쓰여져 있는 수도꼭지만을 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스페인어로 “뜨겁다”라는 단어가 C 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저는 줄곧 C자가 쓰여져 있는 꼭지만 붙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끝내는 찬물로 목욕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거긴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미국이였습니다. 스페인어 권이 아니라 영어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스페인어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 와서는 스페인어의 생각구조를 버리고 영어의 생각구조를 채택해야 하는데도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스페인어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어권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바라보고 영어로 말해야 하는데도 저는 여전히 스페인어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상생활뿐이겠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살아오던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의 삶과 신앙적인 삶이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어권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스페인어를 버리고 점차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 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몇 년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별 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 옷을 입는 다는 것은 이처럼 시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 성령의 시각, 예수님의 시각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몇 년을 믿어왔느냐가 아닙니다. 그 몇 년 동안 얼마나 우리의 시각이 예수님을 행해서 바뀌어져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수 십 년을 믿어왔는데도 여전히 제가 실수한 것처럼 미국에서의 C 가 스페인어의 caliente 인 것으로 생각하고 cold 찬물을 틀어 놓은 채 더운물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C를 caliente 가 아닌 cold 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절대 더운물이 나오지를 않는 것처럼 우리의 시각이 성령의 시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우리에게서 믿음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 성령절기는 우리 모두에게 시각의 변화가 일어나는 새 옷을 갈아입는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 온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활습관이 새로워 져야 합니다.
시각과 생각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활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사는 것을 버리고”
성령의 새 옷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생활방식의 채택에서 두드러집니다.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새 옷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혹시 구겨지지는 않을까 찢어지지는 않을까 걸을 때도 앉을 때도 조심합니다. 새 옷을 입고 거기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작업복을 입고 있으면 작업을 합니다. 파티 복을 입었으면 파티에 가서 거기에 알맞은 행동들을 합니다. 작업복을 입고 파티 가는 사람이 없고 파티 복을 입고 일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옷을 갈아입는 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활 활동 방식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비단 일반생활 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먼저 생활습관이 바뀌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생활양식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생활방식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례도 치루기를 원하였고 그대로 밭도 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의 생활습관을 버리지 않고서는 안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옛 사람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령이 입혀주시는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옛 생활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옛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옛날부터 해 오던 습관들을 그대로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더러워진 옷은 자꾸 벗어버리고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채택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알아서 생활하다가는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법을 알아야 한다.
캐나다 방문 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토론토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회의를 마치고 차를 빌려서 몇 군데 여행을 갔습니다. 몬트리얼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토론토에서는 우회전일 경우 신호등에 상관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몬트리올서도 마찬가지로 신호등과 상관없이 빨간 불이 있을 때에 우회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나타났는지 경찰차가 나타나서 사이렌을 울리고 불을 번쩍이면서 저보고 한 쪽으로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호를 위반했다고 하면서 딱지를 띠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토론토에서 분명히 이런 식으로 운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이 여기는 토론토가 있는 온타리오 주가 아니라 퀘벡 주라는 것입니다. 퀘벡 주의 교통법은 빨간 신호등에서는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보고 운전하려면 각 주의 교통법이 어떤지 공부하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번만 용서해 주겠다고 합니다. 실수였습니다. 먼저 퀘벡 주에서는 어떻게 운전하는 것인가를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냥 운전하는 것만 알아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공부하고 알아서 해야지 지레 짐작으로 했다가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열심히 있다고는 하면서도 실수를 많이 하는 것,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이 주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거기에 걸 맞는 생활양식을 채택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새 옷을 입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행동습관을 가집시다.
성령의 새 옷은 신뢰의 대상이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제는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 만을 의지하는 것은 성령의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힘과 지식만을 의지하고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헌 옷입니다. 이제 자신만을 의지하고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토론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토론토 중심가에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 CN Tower라는 탑이 있습니다. 높이가 총 590 미터가 하는데 전망대는 370 미터 지점과 470 미터 지점 두 군데에 있습니다. 370 미터 지점의 전망대에 가면 glass floor 라고 해서 밑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닥을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서 밑이 보이도록 한 특이한 곳입니다. 거기에 올라서면 까마득히 땅 바닥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발을 잘 디디지를 못합니다. 밑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거기에 서 봤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더라고요..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어찌나 무섭던지...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눈 장난일 뿐이지요... 돌보다 더 두껍고 당한 유리로 든든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만 다른 바닥과 다른 것은 유리를 통해서 밑이 보인다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바로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만 의지합니다. 그래서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사실 glass floor에 서서 눈에 보이는 밑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는 투명해서 잘 안 보이는 유리를 의지한다면 겁이 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를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까마득히 보이는 밑바닥을 봅니다. 그래서 발걸음을 띠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CN Tower Glass Floor에서 보이는 끝없는 밑바닥 같은 지도 모릅니다. 그 밑바닥만 보면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 발자국도 발을 옮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이 주는 새 옷을 입으면 이제 우리의 눈에 아주 두터운 유리가 거기에 깔려 있음이 보입니다. 우리를 지켜주는 유리만 볼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은 어떤 두려움도 주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껏 우리의 눈만을 의지하였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분을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의 힘만을 의지하고 살아왔다면 두려움에 가득 찬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바닥만 바라보면서 근심걱정과 한숨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던 헌 옷을 벗어버립시다. 이제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읍시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는다면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투명한 두꺼운 유리처럼 지탱해 주면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헌 옷을 벗어버리고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이 주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서 예수임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방식대로 생활하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새 사람이 됩시다. 35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이제 성령이 주시는 새 옷으로 과감히 갈아입고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비젼과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과 능력이 아니고서는 교회는 시작될 수 없었습니다. 35주년을 기다리는 우리 교회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교회로 살아가고 있는 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늘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새 옷을 입도록 하고 있습니다.
요즘같이 암울한 시절에 교회는 더욱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새 옷을 갈아입고 헌 옷을 입고 썩어져 가고 있는 이 사회와 인류역사를 행하여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새 옷을 입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새 옷을 입고 성령의 바람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교우들에게 임하기를 기원 드립니다.
새로워지는 신앙
엡 4:20-24 / 이정익 목사
몇 일전에 몽골에 갔을 때 여러 선교사님들을 만났습니다. 그중 어느 선교사 부인이 나를 자꾸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물으니까 “실례지만 지금 몇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몇 살로 보이느냐”고 물으니까 “한 40중반 쯤 되지 않으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많이 보이느냐”고 했더니 “그러면 실례했느냐”면서 아주 죄송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내 나이가 그 정도”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때 속으로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는가”하고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제 고향에 초등학교 친구 하나가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해서 언젠가 일부러 찾아 갔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고향을 지킨다면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찾아 갔더니 어느 노인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 분이 그 친구의 아버지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나를 불러내지 않으셨더라면 지금 나도 저 친구처럼 저렇게 늙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참 생각이 많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특징은 모두 젊어지려고 애를 쓰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두 젊어지려고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좋은 현상입니다. 그래야 스스로 노력하게 되고 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또 그래야 몸도 마음도 생각도 몸가짐도 삶도 젊게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몸이나 생각만 젊어지고 새로워지려고 할 것 아니고 신앙의 삶도 젊어지려고 힘쓰고 애를 써야 합니다. 신앙도 그냥 놓아두면 쇠하고 늙어 버립니다. 구태의연해 집니다. 그러면 구습을 그대로 좇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도 새로워지고 갱신되고 젊어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구습은 옛 생각, 옛 습관, 옛 태도, 옛 사고, 구태의연함을 말합니다. 이것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생각 새로운 태도 새로운 영을 품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젊어지는 데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젊은이들처럼 살아가는 방법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신앙의 삶이나 인생을 젊게 살아가는데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청년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낙관적
청년의 특징은 지극히 낙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주례를 하다 보면 신랑신부가 시종 싱글벙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서약을 할 때 보면 전혀 주저함이 없이 시원하게 약속합니다. 자신만만합니다. 그때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결혼해서 3개월만 살아 봐라, 그때부터는 싸우느라고 정신없을 거다.” 그런데 결혼하는 두 젊은이는 그런 걱정이나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어두워도 괘념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젊은이입니다. 젊으니까 그들의 가슴 속에 낙관적이고 매사 소망이고 희망적인 요소가 가득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젊은이의 특징입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소망 적이고 희망적이고 미래적입니까.
그러다 그 젊은이들도 나이를 먹어 가면 몸이 점점 굳어갑니다. 그리고 유연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몸뿐이 아니고 정신도 생각도 사고도 따라서 굳어갑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다 해봤어, 소용없어, 안 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참신하던 생각과 사고가 그만큼 굳어졌다는 표시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삶이 얼마나 소망적이고 기대가 있고 바람이 있고 낙관적이고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감격적인 삶입니까. 신앙의 삶에 그런 요소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신하던 신앙도 연륜 쌓이고 나이가 들게 되면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감동도 사라지고 눈물도 사라지고 열정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생동하던 신앙이 마침내 형식화되어 가고 이론화 되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무섭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지극히 소망의 삶입니다. 기대의 삶입니다. 바램의 삶입니다. 낙관의 삶입니다. 기다림의 삶이고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예민하게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소망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인생도 젊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몸도 젊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도 젊게 살아야 합니다. 늘 생동감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 좋던 신앙도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젊고 참신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비관적 사고에서 낙관적 사고로 전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옛 사람은 대부분 비관적 생각을 가진 삶을 말합니다. 구태의연한 삶을 말합니다. 그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과 미래와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상적
신앙의 삶은 현실의 삶이 아니고 이상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오늘 현재 보다 내일과 미래와 장래와 천국에 이상과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인은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면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미래와 천국을 위해서 오늘 헌신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나를 바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청년의 삶과 똑같습니다. 청년은 지극히 이상적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꿈꾸는 것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청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가 안 될 정도로 이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것이 청년의 특징입니다. 이상적이고 미래적이고 때 묻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청소년 때 얼마나 생이 맑고 감성적이고 이상적입니까. 그 때는 비가 오면 모두 감성에 흠뻑 젖어버립니다. 모두 문학소년 소녀가 됩니다. 오늘 나이들은 주부들 가운데서도 젊었을 때의 그렇게 맑은 이상과 꿈과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비가 오면 그냥 집을 나갑니다. 나가서 기분이 상기되면 우산을 버리고 비를 맞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기분이 더 상기되면 신발을 벗어들고 길을 걷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저 청승 좀 봐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이미 감성이 말라버린 고목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청순하던 꿈과 이상과 감성이 풍부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지게 되면 그 꿈, 희망, 이상, 기대, 감성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고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으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욕망과 욕심과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결혼해서 20주년 쯤 살면 그렇게 고목으로 변해 버리기 쉽습니다. 얼마나 고목으로 변하는가 하면 이렇게 변합니다. 결혼 20주년 기념을 맞은 부부가 오랜만에 양식집엘 갔습니다. 가서 20년 만에 한손에 칼을 들고 또 한손에 쇠스랑을 들고 칼질을 하고 있는데 때 마침 죽여주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모처럼 무드에 젖어 소녀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게 무슨 곡이에요” 그때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무슨 고기라니 소 등심이지.”
지금 여러분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꿈을 가지고 있고 기대와 이상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확인 해 보십시오. 여러분, 감성과 꿈과 기대가 상실되지 않도록 자꾸만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십시오. 남편이 어느 날 큰 용기를 내어 “여보 사랑해요” 하거든 속으로 좋으면서도 “왜 안던 짓 하느냐”고 핀잔을 주지 말고 그곳이 어디든 안방이든지 시장이든지 까무러쳐 기절해서 죽어 넘어지십시오. 그러면 사랑한다는 말이 자꾸 나올 것입니다.
그런 삶은 어쩌면 신앙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이 이렇게 감격적이고 감성적이고 꿈이 있고 기대가 있고 소망이 가득해야 그것이 생동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적 비전이 얼마나 있고 꿈이 얼마나 있고 기대가 얼마나 있습니까.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구습, 체면, 권위, 굳어짐을 벗어 던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워지기를 위해서 힘쓰라는 말 입니다. 즉 현실적으로 신앙이 변하고 구태의연해지고 타락하고 굳어지는 것을 막으라는 말씀입니다.
변화
젊은이의 특징은 늘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날 완행열차를 타면 부산까지 8시간 걸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두 시간이면 갑니다. 앞으로는 한 시간이면 갈 것입니다. 오늘 5분은 옛날 이집트 시대의 12년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온 나라에 다 알려지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지구상의 사건 사고소식들이 그날 그 즉시로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오늘을 거류시대라고 말합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생각이나 의식이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 초등학생들이 남녀교사 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얘들아 비켜주자“하고 비켜주는 시대입니다. 오늘 아이들이 이런 생각과 사고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 어른들은 감도 잡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나오면 변화에 너무나 무디기 때문에 숨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놀다 보면 부수고 깨고 어지럽힙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교회 문을 잠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이들이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놀다가 유리를 깼습니다. 그때 어느 장로님이 와서 보시고 “왜 유리 한 장만 깼냐? 다 깨지 않고” 그런 장로님이 한분이라고 있으면 아이들이 모여들을 것입니다. 변화에 무딘 사회나 집단 그리고 교회나 가정에서는 아이들 문제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변화에 비해서 너무나 감각이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삶도 부단히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신앙도 굳어버리고 퇴색해 버리고 뒤처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특히 오늘은 이 변화에 둔감하면 퇴보되고 낙오되고 탈락하고 구태의연해 집니다. 그래서 심령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 힘쓰라고 했습니다.
열정
젊은이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열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것이 좋은 것입니다. 다윗이 이 열정 때문에 골리앗 앞에 나아갔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하는 것을 목격한 다윗은 순간 분노가 폭발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골리앗에게 나아가 넘어트렸습니다. 이것은 나이 먹은 사람은 절대 못합니다. 어른들은 앞뒤를 재느라고 이런 용기가 폭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비록 실패할지라도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젊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에게는 이런 용기가 있습니다. 이 용기는 열정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괴테는 젊은이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찬양할 때 보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합니다. 기도할 때 보십시오. 땅을 치며 기도합니다. 어른들은 울고 싶어도 창피해서 울지 못하고 웃고 싶어도 체면 때문에 속으로 웃습니다. 찬양할 때도 입술로 겨우 부릅니다. 그만큼 열정이 식어져서 그렇습니다. 그분들도 한때 젊고 용기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용기가 다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이 열정이 왕성합니다. 올 여름에도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모두 자비로 갔습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식사도 불편하고 고생뿐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가라고 하면 끔찍해 합니다. 돈을 줘도 안갑니다. 그런데 젊은이들 기쁨으로 가거든요. 왜냐하면 젊은이들에게는 이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도 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고 찬양이 있고 감사가 있고 은혜가 있고 변화가 있고 밤을 새워도 거뜬히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에서 이 열정이 식어지고 차분해지면 곧 바로 이론신앙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러면 가슴이 식어지고 머리만 뜨거워져서 입으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앉아서 비판만 하고 판단만 하고 계산만 하는 신앙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신앙의 삶은 가슴으로 하는 삶이고 열정으로 하는 삶입니다. 거기서 기적이 일어나고 감동이 주어지고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용기 없는 남자가 보기에 추하듯이 용기 없는 신앙도 보기가 딱합니다. 보기가 초라합니다.
어느 집에 밤에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나가 보라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남편이 빗자루를 들고 나가면서 “들어오기만 해 봐라“ 하고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도둑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이불 속으로 숨으면서 “가져가기만 해 봐라” 했습니다. 도둑이 물건들을 싸가지고 들고 나갑니다. 아내가 어떻게 좀 해 보라고 하니까 남편이 얼른 나가면서 “또 들오기만 해 봐라”하고 문을 잠갔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움직이는 신앙이 됩니다. 움직이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젊어지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 인생은 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우리 신앙도 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에 힘이 있고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시대를 새롭게 신선하게 신앙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신앙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