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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EO 스티브 잡스
시릴 피베 지음 / 유정현 옮김
이콘 / 2005년 7월 / 208쪽 / 10,000원
1955-1974
"10살인가 11살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보았어요. 에임스에 있는 나사의 연구소에서였죠. 그 때 컴퓨터와 사랑에 빠져버린 거죠."
- 스티브 잡스, 1995년 4월 20일, 컴퓨터월드 스미스소니언 시상 인터뷰 중에서
스티브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아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중산층 출신의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지금은 작고한 부모님에 대해 스티브 잡스가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는 존경으로 가득차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잡스 부부는 스티브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과 개방적인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분방한 교육 덕분에 그는 매우 일찍 기술에 눈을 떴고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 예로 레이저 공장의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스티브가 대여섯 살 때부터 차고에 있는 작업대에서 같이 일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스티브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잡스 가족은 나중에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게 될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마운틴 뷰로 이사하게 된다. 스티브는 "주변에 엔지니어들이 넘쳐났었죠."라고 회상하면서, "그 곳은 유년기를 보내기엔 세계에서 최고였어요."라고 덧붙였다. 스티브의 이웃이었던 래리 랭은 당시 HP의 엔지니어였는데, 자신의 전자공학에 대한 열정을 스티브에게 전해주게 된다. 스티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후론 어떤 제품을 보더라도 더 이상 신비하게 느껴지지 않았죠. 물건들은 사람이 작업한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 겁니다. 그건 제게 아주 강한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배움과 발견으로 인해 복잡해 보이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그는 전자공학에 대한 열정이 피어오르는 흥분을 느끼며 성장한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전문가들' 곁에서 그런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훌륭한 학문을 쌓지 않고도 천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기억하는 학교와의 첫 접촉은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린 시절의 스티브는 선생님의 수업을 잘 듣는 아이가 아니었다. 매우 자립심이 뛰어났던 그는 겉보기에는 주의가 산만한 학생같았다. 그러던 그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이었던 힐 여사가 그를 눈여겨보게 된다. 후일 스티브는 그녀를 "내 인생의 성녀 중 한 분"이었다고 회고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힐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해는 당시 채 열 살도 되지 않았던 스티브가 비범한 인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문적 측면에서 볼 때 저는 일생동안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 한 해 동안에 배웠습니다."
기술과 달리 학업은 그에게 계속해서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것 같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홈스티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열일곱 살 때, 잡스는 HP의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여름방학 동안 거기서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다. 바로 이 때 그는 전자공학의 작은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나게 된다. 후일 잡스는 워즈가 "내가 만난 사람 중 전자공학에 관해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았던 첫 번째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했다.
1972년 그는 오리건 주의 리드 칼리지에 입학하고,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졌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결국 잡스는 입학 6개월 만에 학기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그만둬 버린다(그래서 그에게는 대학 졸업장이 없다). 막 생겨나기 시작한 응용 컴퓨터 산업에 심취한 그는 2년간 아타리 사에서 게임 프로그래머로 일한다. 당시 잡스는 히피의 전형이었다. 매우 독립적이었으며 머리를 반쯤 기른 그의 모습은 어른 같아 보였지만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사소한 일거리'로 번 돈으로 인도 여행을 한 후 1974년 가을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그는, 공동농장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홈브류 컴퓨터 클럽에서 워즈니악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클럽은 컴퓨터광들이 만든 클럽으로서 후일 '해킹'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1976-1984 : 애플의 탄생
"사과 : 이 단순한 단어 속엔 고도의 정교함이 내포되어 있다"
- 스티브 잡스
잡스와 워즈니악이라는 성을 가진 이 두 명의 스티브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둘 다 테크놀러지의 신봉자였지만 그 배경은 서로 달랐다. 도구는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인간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워즈니악은 생각했다. 그는 전자공학의 신봉자였으며 간단한 기계들을 고안해내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반면에 잡스는 창조적 예견자(visionary)의 성향을 지녀,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이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예견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매우 보완적인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잡스의 폭스바겐 버스를 비롯해서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처분한 뒤 두 친구는 1,300달러를 가지고 모험을 시작한다. 풀타임의 정규직을 가져본 적도 없고 사회생활 경험도 거의 없던 잡스가 워즈니악을 설득해 그들 자신의 회사를 차린 것이다. 한편 잡스는 회사 이름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애플'로 지었는데, 이로 인해 '바이트(byte)'라는 단어와 회사 이름을 재미있게 연결 지을 수가 있었다. '바이트'는 정보의 최소 단위인 비트(bit)의 집합으로 구성된 컴퓨터의 기본 단위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깨물어먹다라는 뜻의 'bite'라는 동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애플 I'은 실제로 혁신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개인용 컴퓨터는 아니었고 사용자가 기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두 스티브는 666.66달러에 그들의 '첫 번째 사과'를 판매하는 데 애를 먹었다. 충격적인 숫자(이로 인해 컴퓨터엔 '짐승의 기계'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로 이루어진 이 가격은 흔히 말하듯이 잡스가 심취해 있던 우상파괴적 신비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두 발명가의 '학생다운 유머 감각'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애플컴퓨터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평가되면서 점점 소문이 퍼지게 되지만 상업적 성공의 길은 멀게만 보였다. 그러나 워즈니악은 벌써 새로운 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6년 그는 잡스 집의 차고에서 '애플 II'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그 해 가을 작업을 마쳤다.
이때의 2년간(1974년부터 1976년까지)은 잡스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잡스는 미리부터 CEO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열정이 매우 빠르게 전달되며 자신에게 카리스마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투쟁하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의 주도권을 나타내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특히 자신이 정확한 비전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잡스는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길 원했고 자신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잡스는 당시 인텔의 마케팅 담당 이사였던 마큘라를 설득해 투자를 받을 수 있었고 애플컴퓨터 주식회사가 도약하게 되는 '제2의 탄생'이 되었다. 당시 잡스의 나이는 21세였다. 몇 달 후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된 마큘라는 향후 20여 년간 애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애플 II는 1977년 4월 상용화되었다. 개인용 마이크로 컴퓨터가 탄생한 것이다. 애플 II는 컴퓨터 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애플은 단지 연구소나 컴퓨터실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무실에서 소형컴퓨터가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장점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애플 II에 진정한 애정을 갖고 계속 사용하는 팬들이 수천 명에 달할 정도이다.
1979년은 애플과 잡스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회사는 제 모습을 갖추어갔고 재능 있는 엔지니어들을 끌어들이는데, 그 중에는 특히 애플의 31번째 직원이자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맡게 된 제프 라스킨이 있었다. 그는 게임 전용 컴퓨터 제작 계획을 포기하고 '강력하면서도 사용하기 편한 컴퓨터'를 만들자고 마큘라를 설득한다. 그러나 당시 모든 노력은 애플 II의 후속 버전인 '리사 Lisa'의 개발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 해 말, 잡스는 향후 수년간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자신의 '혁명적' 개인용 컴퓨터의 비전을 실현시켜줄 기술을 발견하게 된다. 1979년 11월, 제록스 사의 연구소인 PARC가 연구 중인 기술 가운데서 잡스는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발견한 것이다. 잡스에게 이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하는 데 부족했던 무언가를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아무리 혁신적이라 할지라도 사용하기 쉽고 간편해야 했던 것이다. 다음달 PARC에 다시 찾아가 책임자들에게 애플이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설득한다. 그 후로 잡스는 PARC의 기술을 반영한 개인용 컴퓨터 출시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980년 초, 리사 프로젝트의 작업 계획에 여러 가지 지시사항이 추가되었고, 잡스는 리사 작업팀을 보강하기 위해 제록스의 엔지니어 십여 명을 끌어들이게 된다.
1980년 12월 12일, 애플은 증시에 상장된다. 주식은 1시간 만에 모두 팔렸고 주가는 상장 하루 만에 32% 상승한다. 대주주이자 당시 25세였던 스티브 잡스는 일순간에 백만장자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애플의 성장으로 상황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규모가 커지고 증시에 상장되면서 회사의 성격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체계는 비대해졌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세우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재정적 문제들과 경쟁의 압력이 대두됨에 따라 이익 다툼이 생겨나게 되었다. 상업적인 요구들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들은 두 스티브가 차고에서 누리던 행동의 자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잡스는 이제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입지를 굳히면서 혁명적인 컴퓨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1981년 1월, 잡스는 리사가 자신이 꿈꾸는 컴퓨터가 될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닫고 애플 경영진들을 설득하여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그 후 3년간 잡스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자신의 생각에 맞도록 고쳐나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동료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한편 1981년 8월, IBM이 첫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를 출시한다. 혁신적인 것이라곤 전혀 없었고 가격도 애플 II보다 두 배 이상 비쌌지만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로 2년간 백만 대가 팔렸고 첫 글자를 따서 만든 PC가 개인용 컴퓨터의 동의어가 될 정도였다. 1983년 초, 애플은 두 가지의 새로운 컴퓨터를 시장에 출시한다. 약 1만 달러에 출시하여 상업적 실패를 본 리사와 대성공을 거두며 이후 10년 이상 생산된 '애플 IIe'가 그것이었다.
1983년 12월, 매킨토시의 첫 TV광고가 방송된다. 이 광고는 애플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왔다.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절제되고 혁신적이며 혁명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광고는 IBM에 대한 애플, 즉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자 했다. 컴퓨터라는 도구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유의 원천이 되어야 했고, 그는 모두에 맞서서 홀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세상은 변화할 것이다. 잡스 자신으로 인해서 말이다.
1984년 1월 24일, 맥이 출시되었다. 사람들은 모니터와 마우스를 갖춘 가볍고 작은 크기의 '호감이 가는' 기계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가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그림과 창을 통해 컴퓨터의 내용을 간단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맥은 컴퓨터 전문가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는데 이들에게는 맥이 간단한 장난감 정도로 비쳤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맥이 '비서를 위한 컴퓨터'라고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맥의 우수성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맥은 컴퓨터에 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컴퓨터의 기능을 선사했던 것이다. 1984년, 애플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세찬 파도에 불을 당겼고 매킨토시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상표 중 하나가 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스티브 잡스는 도전에 성공한 것이다.
잡스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자신의 비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단 프로젝트가 끝나자 그는 비즈니스 세계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첫 번째 고난의 행로가 시작되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던 그는 때로 자신이 회사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너무 자기중심적이었으며, 협력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애플의 임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5년 여름 애플은 창립 후 처음으로 분기 적자를 기록했고 잡스가 채용했던 애플의 회장 스컬리의 거센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 이사회가 열린 지 며칠 만에 잡스는 애플의 운영진에 의해 모든 직위가 해제된다.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그 때부터 아이러니컬하게 'Global thinker'가 되었다. 그는 한 사무실에 고립되었는데, 그 후로 이 방은 사내에서 '시베리아'라고 불렸다. 잡스가 그 자신의 회사에서 '유배'된 것이다. 1985년 9월 17일, 잡스는 사표를 제출한다.
1985-1995 : 새로운 모험을 향해
"스티브 잡스는 이미 잘 만들어진 자신의 전설에 아마 한두 장을 덧붙이게 될 것이다."
- 비즈니스위크, 1988년 10월 24일
애플에서 잡스가 보낸 마지막 몇 달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쫓겨난 것에 대해 약간은 상처받은 듯 보였으나 우리가 상상하듯이 그는 당하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 유명한 1979년의 PARC 방문이 그에게 안내자 역할을 했다. 잡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에 그들은 작업 중이던 세 가지 일들을 제게 보여주었어요. 그런데 저는 첫 번째 것만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 눈이 멀어버려서 나머지 두 가지를 그만 놓쳐버렸던 거죠. 그걸 다시 발견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어요. 그 세 가지는 그래픽 인터페이스, 객체지향 컴퓨터, 그리고 네트워크였지요."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애플 초기부터 잡스는 자신이 '교육상의 문제'라고 판단한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1995년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더 이상 아이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우린 미국의 전 학교에 컴퓨터를 한 대씩 기증하고 싶었어요." 교육에 대한 잡스의 높은 관심은, 너무 폐쇄적이고 비혁신적인 교육체계에 대한 혐오에서 생긴 것 같다. 어쨌든 잡스는 애플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교육시장을 공략해서 아직은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1986년 2월 그는 한 주를 제외하고 자신이 보유한 모든 애플 주식을 팔아버린다. 잡스의 삶은 이제 애플을 떠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1986년 말, 31세의 잡스는 자신의 두 번째 회사인 넥스트NeXT를 창립하고 컴퓨터의 사양을 교육시장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여러 대학들과 공동으로 작업한다. 항상 그랬듯이 잡스는 컴퓨터의 구상과 디자인에 관련된 모든 세부 사항에까지 참견을 했고 역시나 거칠고 완강해 보였다. 1988년 10월, 1년이 넘게 지연되기는 했지만 첫 넥스트 컴퓨터인 넥스트큐브NeXTCube가 출시되었다. 이것은 혁신적인 디자인을 갖춘 강력한 컴퓨터였다. 사실 기업주가 컴퓨터와 그 회사를 이렇게까지 자신과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넥스트는 잡스의 회사였고, 잡스는 넥스트 그 자체였다. 세계 컴퓨터의 '앙팡 테리블'로 떠오르고 경영 방식이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 선구적이고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실현할 능력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던 것이다.
애플을 그만 둔 스티브에게는 넥스트만이 유일한 계획은 아니었다. 1986년, 그는 유명한 영화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의 회사인 루카스필름의 컴퓨터그래픽 부문을 개인 돈 1천만 달러에 사들인다. 잡스는 이를 44명의 직원을 거느린 '픽사Pixar'라는 이름의 회사로 만든다. 픽사는 노하우와 전문성을 축적하고 있었고 얼마 안 가서 시장에는 이들과 견줄 만한 상대가 없어지게 되었다. 1991년, 픽사와 디즈니 스튜디오는 중대한 계약을 맺는데, 컴퓨터그래픽으로 된 세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공동 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95년 11월 개봉된 '토이스토리'는 컴퓨터그래픽에 완전히 의존한 첫 번째 영화이며 3D로 이루어진 첫 '만화영화'였다. 또한 그 해의 가장 큰 흥행작이었다. 이후 화려한 성공을 거듭하며 오늘날 디지털 산업의 선두주자로 자리잡았다.
픽사의 성공은 애플의 설립을 가능케 했던 두 가지 요소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성과 기술의 결합이었다. 잡스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모든 이들이 이 분야에서 일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장애물이 있죠. 그 첫 번째는 창조성이라는 장애물입니다. 두 번째는 기술이에요. 픽사는 기술을 사들여 만들어진 회사가 아닙니다. 지난 10년간 말 그래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어요. 누구도 그 기술을 픽사에서 가져갈 수 없어요. 디즈니도 못 가져갑니다. 세 번째 장애물은 이 둘의 결합이죠. 우린 이 두 가지 문화, 즉 기술과 창조성을 결합시키는 데 10년을 보냈어요. 어느 누구도 그걸 시도해본 적이 없을 겁니다."
한편 1985년 애플 경영진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이는 이후 '컴퓨터 역사상 가장 큰 전략적 실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애플은 당시 운영체제 분야에서 유일하게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갖춘 OS로 크게 앞서 있었다. 맥OS를 다른 업체에 라이선싱했다면 애플은 아마도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가 오른 위치, 즉 개인용 컴퓨터의 세계 1인자가 될 수 있는 방편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플의 경영자들은 컴퓨터를 운영체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세계 1인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십여 년이 지난 후 애플은 맥OS의 라이선싱을 시도하나 그때는 이미 윈도가 전 세계를 휩쓴 뒤였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몇 차례의 법적 분쟁은 이 두 회사에 대한 인식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초기부터 맥의 팬들은 윈도 사용자들과 대치했는데,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러한 대치 상황이 두 OS 사이의 "종교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지곤 했다. 이는 두 사용자 집단 간의 문화의 차이, 때로는 그들의 분쟁이 지닌 폭력성을 나타내는 데 그리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다. 1995년 8월, 마이크로소프트가 PC의 발명 이후 가장 훌륭한 발전이라는 찬사를 받은 윈도95를 통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맥 사용자들은 "결국 매킨토시 84의 마이크로소프트 버전"일 뿐이라며 이를 비웃었다.
1996-2000 : 천재의 귀환
"오늘 우리는 이 산업에 낭만과 혁신을 불어넣었습니다."
- 스티브 잡스, 1998년 5월 6일, 아이맥 발표 공식성명 중에서
1996년 초, 넥스트는 적어도 상업적 측면에서는 실패가 확실한 것 같았다. IBM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점령한 세계에서 그를 위한 자리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잡스는 실망했다. 그가 이룩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제는 그들에게 미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없지요. (중략) 그들은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제품에 문화를 불어넣지 않습니다. (중략) 그것 때문에 슬퍼지는 겁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제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들은 성공할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3류 제품을 만든다는 겁니다."라고 잡스는 결론지었다.
1990년대 중반은 애플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던 시기였다. 10년 동안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20%에서 8%로 감소했다. 1995년에서 1996년 사이에 사직 또는 해고로 인해 전 직원 수의 4분의 1이 감축되었다. 매출은 격감했고 공장은 폐쇄되거나 매각되었다. 1997년 2월, 애플의 넥스트 합병 절차가 끝나고, 스티브 잡스는 공식적으로 애플의 새로운 CEO 길 아멜리오의 고문이 되었다. 이후에도 애플은 여전히 실패를 거듭했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누가 파산 직전의 쓰러져가는 회사를 떠맡으려 하겠는가? 적자는 쌓여갔고 주가는 지난 5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공식적으로 애플의 CEO 직은 여전히 비어 있는 상태였으나 회사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바로 스티브 잡스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1997년 8월 8일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간에 역사적인 계약이 체결된 날이다. 잡스는 주머니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조커'를 꺼내어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에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도록 만들었다. 이 놀라운 계약은 숱한 분석의 대상이 되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우선 그로 인해 마이크로소프트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분명치가 않았고, 다음은 잡스와 게이츠가 그다지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애플이 항상 '윈텔 Wintel' 커플과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고 항상 자신의 다름을 큰 소리로 외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플의 이름을 마이크로소프트나 오라클 또는 인튜이트에 긴밀히 연계시킴으로써 잡스는 죽어가는 회사처럼 보였던 애플이 여전히 업계의 지지를 얻고 있는 메이저 기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역사적인 계약은 잡스가 계획한 간단하면서도 멋진 '마케팅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발표가 있던 날, 지난 몇 해 동안 폭락했던 애플의 주가는 33%나 상승했다. 이후 새 이사회가 구성되면서 마큘라가 사직하고 잡스가 이사회 멤버로 선출됨에 따라 이 '임시 CEO'의 운신의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1998년 5월, 잡스는 다시금 맥에 집중하여 노트북 컴퓨터의 새로운 버전으로 '파워북'을 출시함과 동시에 아이맥 iMac의 출시를 발표한다. 아이맥의 외형은 맨 처음 매킨토시를 연상시키면서 잡스가 애플의 사령탑으로 정말 다시 돌아왔음을 확인시켜주었다. 1998년 8월 3일, 제품이 마침내 판매되었을 때 그 성과는 놀라웠다. 단 1주일 만에 아이맥 15만 대가 팔려나간 것이다. 아이맥은 애플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판매된 컴퓨터가 되었고, 1998년 10월 회사는 3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으며 이후 거의 매 회계분기마다 흑자를 기록하였다. 여전히 혁신적이면서 일관성 있고 애플의 새로운 이미지에도 충실한 제품의 출시가 잇따랐다. 잡스는 어떻게 해서라도 혁신을 계속하고자 했다. "혁신을 위해 태어난 회사에서 위험한 것은 혁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험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000-2003 : 디.지.털. 혁명
"애플은 향후 10년간 가장 수익성 있는 10대 인터넷 기업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 스티브 잡스, 2000년 1월 5일, 맥월드 엑스포 연설 중에서
1999년 말까지 스티브 잡스는 여전히 '임시 CEO'로 간주되었고 공식 성명에서도 그렇게 소개되었다. 2000년 1월 5일,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맥월드 엑스포에서 4,000명이 모인 가운데 자신이 공식적으로 애플의 CEO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럼에도 그는 'iCEO'라는 직함에서 i를 그대로 써달라고 제안했는데, 이는 더 이상 임시직(interim)이라는 의미가 아닌 인터넷을 의미하는 i였다. 잡스가 나아갈 길은 분명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맥이 탄탄한 운영체제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 애플이 인터넷의 선두 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말 애플을 구한 이후 잡스는 애플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대담한 전략을 수행한다.
잡스는 맨 먼저 운영체제의 새로운 버전인 맥OS 텐 MacOS X을 소개한다. 맥OS 텐은 성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언론은 잡스의 전략을 칭찬했다. 애플의 새로운 전략의 또 다른 핵심 요소인 '아이툴즈 iTools'는 일반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소프트웨어 또는 '인터넷 서비스'였다. 잡스가 지휘권을 잡은 후 강화된 애플은 회사의 신조에 충실하면서도 교육시장을 잊고 있지는 않았다. IDC연구소에 따르면 2000년 6월 애플은 미국 교육시장의 25% 이상을, 또 세계 시장의 14%를 점유했다. 7월에 나온 2억 달러의 순이익 발표로 인해 애플은 11회 연속 분기별 흑자를 기록하게 되었고, 새로운 황금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2001년 1월, 아이툴즈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사용하기 쉬운" 가상의 쥬크박스로 소개된 아이튠즈 iTunes가 추가된다. 이것은 무엇보다 애플이 디지털 음악 시장에 힘 있게 진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말부터 전자 음악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인터넷의 대중화와 MP3 포맷의 효율성 덕분에 저작권법에 위배되기는 해도 음악을 변환하고 공급하는 것이 쉬워진 것이다. 2001년에 역시 애플은 예상치 못한 제품 아이포드 iPod를 출시한다. 이는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인데 MP3를 비롯한 여러 가지 디지털 포맷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포드는 디자인과 성능, 사용 편의성으로 인해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고, 2002년 애플은 디지털 플레이어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아이포드는 그 자체로 잡스의 전략을 상징하고 있다. 이는 소니를 모방하고자 하는 애플의 다각화 정책의 일환일 뿐 아니라 애플이 단지 맥의 소유자만이 아닌 모든 사용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는 증거였다.
2001년 3월 방대한 직영 네트워크인 '애플 스토어'를 개설한 이래, 2003년 4월에는 애플에 그 해의 가장 큰 성공으로 기록될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온라인 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이는 사용자들이 디지털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새로운 유료 서비스였다. 잡스는 이 솔루션이 P2P 공유 서비스와는 달리 합법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가상 스토어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고 기획자들의 예상을 크게 넘어섰다. 일주일 만에 애플의 뮤직스토어에서 백만 곡이 판매되었고(이 기록은 한달 만에 달성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 다음 주에도 같은 양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잡스의 진정한 성공은 모든 음반회사들로 하여금 이 모험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다. 잡스는 주요 관련 기업들이 내버려둔 황무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혁신과 사용 편의성, 그리고 회사가 갖고 있는 좋은 이미지(매우 현대적인 이미지)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2003년 들어 애플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제품을 출시한다. 6년 전에는 별 볼 일 없었던 애플이 이제 놀라운 성공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회사는 이제 각 분야별로 포지셔닝이 잘된 제품군을 구비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신뢰성이 있는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 해 연말에는 잡스의 야심을 보여주는 대규모 발표가 있었다. 10월 16일, 아이튠즈를 윈도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애플에 있어 확실히 중대한 결정이자 디지털 음악 시장을 점령하려는 전략이었다. 이는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아이튠즈 윈도 버전은 3일 반 만에 백만 회나 다운로드되었다.
세 가지 제품으로 애플은 세계 음반업계의 거역할 수 없는 강자로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애플이 편리하고 완벽한 음악 판매 도구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 곡씩 0.99달러에 살 수 있는 노래들이 잘 구비된 온라인 스토어(아이튠즈 뮤직스토어), 음악을 분류하여 클릭 한 번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간편한 소프트웨어(아이튠즈), 그리고 음악을 전부 지니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휴대용 플레이어(아이포드). 각각을 처음 볼 때는 그리 혁명적이지 않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쳐져야 비로소 솔루션이 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애플의 경쟁자들 또한 사태를 파악하고 대응에 나섰다. '디지털 음악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2004 : 스티브 잡스의 해
스티브 잡스는 현재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미래에 소비자들이 원하게 될 것입니다."
- 마크 크밤(애플의 전 직원). 2003년 12월 15일, '애드에이지'
2003년 하반기에 애플과 잡스는 여러 가지 상을 잇따라 수상했고, 회사의 성과, 특히 디지털 음악 상품과 관련해서 성공 스토리들이 언론에 쏟아져 나왔다. 이제야 잡스가 이루어낸 변화의 크기를 실제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12월 14일 「포천」지는 아이튠즈 뮤직스토어를 '올해의 상품'으로, 맥 G5를 '그 해의 가장 좋은 상품 Top 25'에 선정했다. 12월 15일 마케팅 관련 주요 정보 사이트의 하나인 애드에이지는 스티브 잡스를 '올해의 마케팅 인물'로 선정했다. 또한 12월 15일, 애플은 공식 성명을 통해 자사의 서비스에서 2,500만 곡이 판매되었다고 발표하는데, 이는 분명히 '온라인 음악 서비스 사상 가장 큰 성공'이었다. 12월 27일, '샌프란시스코 비즈니스 저널'은 스티브 잡스를 '올해의 경영인'으로 선정했다.
2003~04년에 걸친 애플의 전략은 숱한 분석과 논평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애플의 추종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잡스의 전략은 그가 공식적으로 회사의 지휘권을 되찾은 2000년 당시 세웠던 목표와 부합하고 있다. 이 전략의 큰 줄기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신뢰성 있는 운영체제에 기반을 둔 시장성 있는 컴퓨터를 일관되게 공급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시장에 더욱 치중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디지털 혁명의 새로운 물결'에 부응하며, 윈도의 세계를 잠식해 나가면서 또한 인터넷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지난 4년간 이 이중의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투자했고 결국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첫 번째 측면에서 볼 때 애플의 상황은 매우 긍정적이다. 맥 제품은 모든 소비자층을 겨냥한 깔끔한 컴퓨터들로 일관성 있고 구성요소가 잘 갖추어져 있다. 게다가 이 컴퓨터들은 맥OS 텐이라는 우수한 평판을 받고 있는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두 번째 측면에서 볼 때 잡스의 전략은 분명한 성공이었다. 애플은 최첨단에 서 있는 '인터넷 기업'이 되었으며 전자상거래의 핵심 시장 및 디지털 음악업계에서 리더가 되었다. 특히 아이튠즈-아이포드 커플은 애플이 PC 사용자들 사이에 침투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따라서 지금까지 한정된 시장에 머물렀던 애플이 잠재시장을 엄청나게 확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두 가지 주요 측면 외에도 잡스의 승리 전략의 기반이 되는 몇 가지 다른 강점들을 간추려볼 수 있다. 먼저 일관된 관리다. 애플은 제품의 구상에서부터 제작, 유통까지 도맡아 하는 유일한 회사이다. 이러한 방식은 욕심이 좀 지나치긴 해도 애플과 고객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 다음은 마케팅이다. 애플은 혁신을 계속하고 있으며, 적어도 광고를 통해 사람들의 기억에 계속 남도록 하고 있다. BBC 뉴스사이트에 따르면 애플은 2년간 아이튠즈와 아이포드 관련해서 6,000개 이상의 기사거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애플과 다른 회사들 사이에 체결된 협정의 중요성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는 단연코 잡스가 가진 힘 중의 하나이며 아마도 회사의 재건을 위해 그가 기여한 핵심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의 전략은 주로 다른 메이저 회사들과의 '윈윈win-win' 계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 스티브 잡스가 '애플 신화를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애플의 활동 하나하나를 둘러싼 비밀스러움, 화려한 주목을 받는 중대 발표들, 그리고 애플은 항상 우리의 기대를 넘어선다는 인상 등은 회사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한편 이러한 신화는 사용자들에 의해서도 유지되고 있는데, 최근 몇 년 동안에도 그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현재 애플의 포지셔닝이 미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시장에 진출해 있음으로써 회사는 제품이나 홍보 측면에서 계속 서로 다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성과로 판단할 때 이 전략은 위험하다기보다는 야심적인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음악시장에 확실히 포지셔닝을 하지 않았더라면 애플은 지금 적자를 기록하면서 다시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말로 확실한 유일한 사실은 애플이 그리고 잡스가 계속해서 혁신을 해나가리라는 것이다. 애플이 '연구 및 개발'부서에 할당하는 예산은 매년 상당히 증가하고 있다. 2003년에는 4억 7,100만 달러였고 이 분야에 종사하는 직원 수는 2,500명이었다. 맥 제품들의 변화 외에 컴퓨터 아닌 디지털 레저를 위한 새로운 기기들이 출현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애플은 몇 가지 유리한 카드를 쥐고 있고 이로 인해 편안한 위치에서 차분하게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애플은 그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가장 좋은 상황을 맞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브 잡스는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서 아내와 세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오래 전부터 채식주의자였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며, 편한 복장으로 다니기를 좋아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가 맡고 있는 두 회사의 경영에 투자한다. 잡스는 16억 달러로 평가되는 재산가로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부자 중 122번째에 오른 누가 보기에도 부유한 인물이다. 또한 현대 역사상 가장 훌륭한 기업가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그가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기에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