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에서 배운 것들이 참 많은데요
1. 수직적 층차가 포함된 구조에 대한 조망
소위 야매 출신인데요.. 그 바닥에서 이뤄지는 깨달음 등에 대한 모든 논의가
<일상의 평면에서의 의식상태>에서의 쿵짝쿵짝이라는 것을 배웠는데요,
뭐 좀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던 제 모습이, 유치원 소꿉놀이 에이스 정도란 거를 알아버렸슴미다.
주제파악은 확실히 됐는데... 부작용으로.. 향상심이랄까..그런 마음도 같이 사그러든 듯.. ㅡ..ㅡ;
2. 거울이미지
네임드 인도 성자들이, 일상의 평면에서도 소위 '참나' 혹은 '참나의 속성'이 작동하는 듯한 묘사를 하는데요.
저는 뭔가 엄청난 직관과 통찰을 토대로, 이런 얘기들이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방문객님이 '거울 이미지의 투사'라는 용어로 설명을 해주신 걸 듣고, 나름 충격을 받았었죠.
특정 상태(유상삼매나 무상삼매)에서 취한 <인상>을, 일상의 평면에서 투사하는 거였다니...
네임드 성자들은 범인의 지각을 초월한 엄청난 뭔가를 확보하고 있을거라는 환상이 깨지는 계기가 됐었슴니다.
3. 식의 대상으로서, 모든 상태의 평등함
전에는 남다르고 대단한 뭔가가 되려는 마음이 충만했었는데요,
선정을 포함한 모든 상태가 평등하다니.. ㄷㄷㄷㄷ
차별심과 향상심이 세트로 사그러드는.. 그런 언명으로 다가왔습니다.
위의 1.만 고려하면.. 유치원생에게는 좀 절망적인 생황인데요..
일체의 상태가 평등하다는 이해와 신심으로 정신승리를 하면.. 나름 즐거운 유치원 생활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유딩은 가오가 안 서기 때문에.. 향상심을 조금씩 살려가는 중입니다.
4. 정교한 언어 구사(인상, 직관적 파악, 추정 등의 구분 등)
대부분의 경우(거의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문장으로 표현함에 있어,
인상, 직관적 파악, 추정을 정교하게 구분하지 않고 <사실의 지위>에서 함께 버무리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언어를 정교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인식은..
타인이나 자신의 경험을 파악할 때 광장히 소중한 자산입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포장지와 알맹이를 구분하는데,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정직성의 토대가 됩니다.
"밀물이 빠지면, 누가 알몸으로 헤엄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미국 주식의 장인 웨런버핏의 명언이 있는데요,
산냐로 이뤄진 포장지를 벗기고 나니깐.. 제가 팬티 한 장 걸치고 있더라구여..ㄷㄷㄷ
5. 집중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
일정 수준 이상의 집중을 위해서는 '단일하고 선명한 구체적 대상'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배웠는데여,
다른 표현으론, 침묵, 허공, 존재감 등의 거칠고 추상적인 무엇을 대상으로한 집중은 (거의)불가능하다는 거죠.
6. 소위 '식작용'에 대한 이해
아는놈, 아는작용, 알려지는 대상, 주시의식, 관찰자 등등...
이 모든 개념들이, '(자신의 필요와 입맛에 따라)속성 - 표상 - 기능을 실체화한 가공물'임을 배웠습니다.
이게..지금보면 너무 당연한 얘긴데... 도판에 범람하는 말들의 향연에 휘말리면.. 요상한 상상을 하기가 쉽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개만 적어봤습니다. _()_
첫댓글 요가행자등을 좀 옹호해 주자면요.
근래 거론된 쿤달리니요.
쿤달리니 행자는 쿤달리니를 '나'로 삼구요, 쿤달리니 삼매로 선정에 들구요, 쿤달리니와 합일합니다. 이 단계가 무색정입니다.
쿤달리니를 심상화할 수 있다면, 쿤달리니 행자에게 알려진 해당 무색정과 함께 한다고 파악합니다.
현재 있는 것은 심상화된 쿤달리니일 뿐이지만, 그 쿤달리니는 애초에 마하쿤달리니 즉 해당 무색정이므로 언제나 초월상태라는 주장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거를 '의지처'라고 이름합니다.
너는 그것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근래 거론된 호흡, 마음의 빛...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삼매의 대상 = 나 = 선택한 삼매의 끝(초월)
오늘날 널리 소개된 호흡 알아차림하다 마음의 빛이 나오는 기법은요. 호흡 알아차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요가의 쁘라나야마에 가깝습니다.
쁘라나야마는 호흡통제인데요. 호흡을 삼매 대상인 심상 형성을 돕는 집중 예비단계로 사용합니다.
해당 심상은 일상에서 빡세게 공부하죠, 그게 진아가 되는 거니까요.
불교의 아나빠나사띠 경의 경우, 호흡으로 삼매를 성취해 선정에 들어야 하구요, 선정에서 호흡을 또 다시 관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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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적었듯, 요가에서 주류는 라마누자의 베단따입니다.
샹카라의 베단따를 따르는 소수, 거의 없는 거 같은데요. 어쨌든 그 쪽에서는 기본 사고틀에서 위에서 거론한 거로 이야기하자면요.
(심상화된) 쿤달리니와 마하쿤달리니의 관계 설정을 다르게 하는 겁니다.
라마누자 계열에서는 = 입니다. 둘은 같아요. 그래서 일원론이라고 하죠?
샹카라 계열에서는 ≒ 입니다. '그 둘이 같지는 않지만 다르지는 않다'는 식의 논리 구성을 합니다. 그래서 불이일원론이라고 합니다.
不二일원론...이 '不二'때문에 중론쪽과 혼동을 하는 분들이 많은 거 같더라구요. '사실'에서는 전혀 그런 문제가 아닌데요.
불자든 요가행자든 아주 구체적인 것을 다룹니다. 꿈의 질료야 뭐...다를 바 있겠습니까? 같은 집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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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조건을 본다면, 미혹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꿈이 무엇인지, 어떻게 있고 없는지...
나의 꿈은 무엇인지, 어떻게 있고 없는지...
수행, 요가, 불법 등을 기준으로 할 때, 저는 '수행을 시작하기 위한 시작점' 정도에 서있는 것 같아요. (10년 넘게 시작점에서 두리번 거리는 중..ㄷㄷ)
의지처... 특정상태(특정한 조건지어짐)로서의 의지처라고 할 때..
저의 의지처는..
'(과거-미래-현재에 대한)언어적 생각으로부터 (나름) 자유로운 상태와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자각',
'조악하지만 '침묵'이라 할만한 기본 상태',
'편안하고 안락한 몸의 상태' 였던 것 같습니다.
색계와 무색계 선정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 야매로 두 세계의 표상의 열화판을 땡겨서, 일상의 평면에서 쪼끔 실현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여
(선정을 모르니깐.. 만구 제 상상입니다만..)
언젠가는 초선정도의 표상을 경험하고.. 그에 상응하는..소위 '행복한 몸'을 확보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슴미다.
(너무 원대한 꿈인지도..)
주위를 보면은..온갖 '진리의 말씀과 지혜'를 가까이 하고 실천하려고 애를 써도..
기본적인 힘? 통제력?이 없으면은...<알긴 아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요>라는 상황이 되고..
시간과 투입이 쌓이면서 나름대로 나아감은 있겠지만.. 더딘 것 같아요.
우리 보통 사람들이 대단한 목표를 향하는 것은 아니니깐..
짝퉁이든 야매든..뭐라도.. 힘이 좀 있어야 되는 것 같슴다
우리 까페 공지글에 [ '나'를 세워라 ]라는 글이 있지 않습니까?
특정 종교등을 떠나서요. 마음이라는게, 기본적으로 붙잡음을 떠나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붙잡고 있거든요. 자기 보기에 좋은 거를 붙잡냐, 자기 보기에 나쁜 거를 붙잡냐의 문제는 있지만요.
자유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데요. 굳이 쓰자면요.
하나를 붙잡으면, 그만큼 그 하나를 제외한 것에서는 자유로워집니다.
언어적 사유는요. 별로 힘이 없습니다. 언어적 사유로 생기는 직관? 그것이 힘이 있는 거구요.
예전에, "언어적 사유는 직관을 조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삶의 자세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자면요, 언어적 사유의 유용성이 거기에 있거든요.
어쨌든 하나를 붙잡는데, 그거를 꼭 집중과 같은 거로 하는가? 그게 빠르죠... 그런데 세월도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업력요.
[ '나'를 세워라 ]라는 글에서 예로 든 거로 보자면요. 자존심...
행위할 때마다 자존심을 세우고, 자신이 세우는 자존심이 뭔지 언어적 사유로 조각하고, 그래서 구체적 행위들과 연결시켜 보다 구체적으로 세우고...
그렇게 세월이 쌓이면요. 그 자존심이, '자신' 즉 '엄청난 힘'입니다. 의지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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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글에서 황벽님이 적었지만, '그냥 침묵'과 같은 거는요. 붙잡기 적합한 대상은 아닙니다. 이미 너무 많은 판단이 필요해서요. 모호하거든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따뜻한 햇살을 즐기는 거요. 그 햇살의 촉감... 약간 따끔거리는 듯 하면서 포근하고 그런 거요... 그때의 마음...
그런 거를 경험하고 기억하고 붙잡으면, '침묵'이나 '편안한 몸 상태'와 같은 거를 구현하기 쉽습니다. 그때의 마음 상태는 경험했고 기억했고 아는 거니까요.
힘을 받으려면, 힘을 받을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요가 수행에서 집중 대상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그래서거든요.
구체적이고 선명한 만큼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힘을 기르려면, 힘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직관도 하나의 마음 상태구요. 언어적 사유로 조각하면, 직관도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됩니다. 그만큼 힘을 버틸 수 있어요.
마찰력이 제로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운동은, 힘은 마찰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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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따뜻한 햇살을 즐기는 거... 그때의 마음...
어떻게 보면 참 유치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어릴 때 조금 굴곡이 있었는데요. 그 유치한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었구요, 조크 한마디 던질 수 있었습니다.
마음은 마음입니다. 유치하고 말고 그런 거는 없습니다.
"자신에게 소중한가, 소중하지 않은가"가 있을 뿐입니다.
수행카페에서 하기는 좀 거시기한 말인데여..
"들풀이나 잡초같은 존재라도..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때..나름의 평안이 함께한다" 라는 생각입니다.
거시기하지 않은데요.
억지로 뭔가를 형성하는 인상을 꺼리는 거? 기질? 선호도? 그냥 그런 문제로 보입니다.
인위와 무위의 문제, 보통 게으르면 무위를 좋아하죠. 특히 시체놀이, 그거 좋아했어요.
자신에게서 찾아야 온전하다고 할 수 있구요. 그래야 거지가 아니잖아요?
'자신을 수용하는 마음'부터 '불성', '마음의 본성' 등등...
'식' 즉 '마음'은, '차별 없이 비추는 거울'이구요.
마음은 형성력을 떠나 있을 수 없어, 형성력을 비추는 거라고 할 수도 있구요.
무엇을 (집중의) 대상으로 하든, 그거는 자신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에 이름을 붙인 거죠.
그래서.. 불법은 한량없는 자비심을 함유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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