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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인가? 집회인가?
주승중(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I.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를 방문하여 우리의 예배 예전의 현장을 살펴본 외국의 예배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는 ‘집회는 많은데 예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전 세계의 어느 교회보다도 모이기를 힘쓰며, 한 주간 동안에도 주일 아침 예배, 주일 저녁(또는 오후) 찬양예배, 수요일 저녁 예배(또는 기도회), 구역예배, 매일 새벽 예배(기도회), 그리고 가정 예배 등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한국교회에 예배보다는 집회만 있다는 이런 평가를 받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의 예배 예전 현장이 어떤 모습이기에, 우리에게는 집회만 있고, 예배는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들의 이러한 지적이 과연 타당한지를 점검하기 위하여 우리의 예배 예전의 현장을 심각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II. 몸 말
1. 왜 기독교 예배를 말하는가?
1) 서구교회 교인들의 현상황(Church-Shoppers)
지금 전 세계에서는 예배의 현장에서 새로운 물결들이 흐르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에서는 예배의 현장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즉 예배의 현장에 혁신적인 예배의 스타일과 음악들이 소개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서구 교회에서는 이런 예배의 현장과 관련하여 회중들 가운데는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이 흐르고 있는데, 먼저는 엄청난 수의 Church Shopper들의 등장이요, 또 하나는 예배와 선교(혹은 복음전파/worship&Evangelicalism)의 연결이다.
소위 베이비 부머(1946년-1960년)들과 특별히 베이비 버스터(1960년대 이후 출생)들은 이전의 세대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방법과 아주 다르다. 그들에게는 과거에 기능 하던 것들은 이제 더 이상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거에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 하던 기능은 무엇인가? 즉 과거의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들은 어떤 요인들이었는가?
(1) 교단(Denominational Affiliation)
장로교인들은 장로교회에 출석을 하였고, 감리교인 들은 감리교회에 나아가 예배를 드렸다. 성공회 교인들은 성공회에 나갔고, 루터 교인들은 루터교회에 나아가 예배를 드렸다. 예를 들어 루터교에서 예배드리던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루터교 예배에 참석해야만 찬송도 익숙하고 모든 예배의 분위기가 익숙하여 루터교회만 찾아갔다. 그들은 루터 교인들과 함께 루터교의 예배형식으로 드리는 것이 편하고 좋았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어디를 가도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예배를 드려야 마음이 놓였고, 따라서 교단적 배경을 교회를 선택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다.
(2) 신학(Church Doctrines)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온 신앙과 신학의 전통을 따라 교회를 선택하였다. 즉 교회를 선택할 때에 자신들이 믿고 고백하는 바가 같은 곳을 선택하였다. 물론 때로는 몇 사람들이 교단적인 선을 넘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도 사람들은 그들이 믿고 고백하는바 신앙의 내용이 비슷한 한에서 그리 하였다. (장로교, 감리교)
(3) 위치(Location)
고속도로가 생기고, 교통이 편리해지기 이전에,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정할 때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곳을 선호하였다. 그래서 대개가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한 회중을 이루기 마련이었고, 그들은 모두 한 마을이라고 하는 경계선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에 이런 세 가지 이유는 더 이상 제대로 그 기능을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오늘의 교인들은(Church-Shoppers) 교파적인 충성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였고, 교리 적인 차이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있으며, 거리가 가깝다는 것도 그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였다.
오늘 교회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한마디로 그것은 소비자(consumers)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현대교인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그런 교회를 선택하기를 원한다. 교파적인 이유나, 교리의 차이 그리고 위치와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예배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회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정하기 위하여 여러 교회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예배의 스타일을 중요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난 후에 그 다음주에 다시 올 것인가를 결정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두 번의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에 예배가 지루하고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그들의 찾음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만일에 예배가 생동력 있고, 실제적이면, 그들의 찾음(shopping)은 당분간은 끝이 날 것이다.
2. 한국교회는 다른가?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도 분명히 Church-Shoppers 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Church-Shopper라는 말이 더 이상 미국이나 서구에서나 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도 얼마나 많은 철새교인들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분명히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교회를 선택하고 교회를 섬기던 모습과는 다르다. 그들은 더 이상의 희생과 헌신을 감당하기를 싫어한다. 그저 편안하고 안락하고, 그리고 부담이 없는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그리고 세련된 교회를 원한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주일에 교회 출석이라는 자신의 종교적인 의무를 하고 그 이후는 자신들의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일주일에 딱 한번 참석하는 예배가 전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오늘 많은 교인들이 예배가 자신들의 수준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예배에서 설교가 마음에 들던지(현재 한국교회의 철새 교인들이 돌아다니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음악적인 수준이 마음에 들던지, 아니면 교회학교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든지...그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튼 이제 한국에도 내 부모님이 장로교인이었으니까 나도 반드시 장로교회에 출석해야 한다든지, 내가 어려서부터 믿는바 신앙과 교리는 장로교니까 반드시 장로교회만을 출석해야겠다는 의식도 이미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더군다나 교회의 거리가 가까운가 하는 것도 이제는 교회 출석의 이유가 못된다. 오늘 한국의 교인들은 그 교회의 예배 현장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좋다하면 멀기를 마다하지 않고, 그 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마음에 들고, 그 교회의 교회교육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 하면, 아무리 멀어도 그곳으로 달려간다. 결국 오늘 한국교회에서도 이미 미국을 중심한 서구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shopping 현상이 벌써부터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3. 예배란 무엇인가?
1) 예배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행위
우리가 한국교회의 이런 예배의 현장을 이야기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예배 현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통한 성육의 사건과 십자가의 구속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자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분께 “최상의 가치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worship),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래서 개혁교회 예배학자인 존 버카르트(John Burkhart)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잔치적인 응답”이라고 말한다.
2) 기독교 예배는 기쁨과 부활의 잔치
예배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기쁨의 응답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가장 크고 놀라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기독교 예배의 출발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즉 기독교 예배는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요, 성찬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잔치의 자리였다. 즉 초대 교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안식일 대신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매주일의 첫날”에(고전 16:2, 행 20:7-11) 또는 “주의 날”(계 1:10)이라고 불리는 주일에 함께 모여 성만찬을 가지면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매주일은 기쁨의 날이요, 부활 신앙을 입증하는 감격스러운 날이 된 것이다. 그래서 매주일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작은 부활주일”(little Easter)이었다. 예배는 이렇게 기쁨의 잔치, 부활의 잔치로 응답하는 현장이다.
3) 한국교회 예배 예전의 뿌리와 문제점들
그런데 이렇게 본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응답하며, 그의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로 시작된 초대교회의 예배가 유럽을 거쳐, 영국 그리고 미국을 지나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동안 많이 변질되고 말았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부활의 잔치로서의 예배의 성격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의식”이 되면서 퇴색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예배가 19세기 미국의 대각성 부흥운동을 거치게 되면서 그 궤도를 많이 이탈하게 되었고, 우리 교회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부활의 잔치와도 같았던 예배에서 많이 이탈된 예배를 전수 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청교도의 후예들이었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해진 예배는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닌 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1) 19세기 미국의 “변방전통”(Frontier tradition)의 영향
우리가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이 가진 문제점들을 알려면 우리의 예배에 지대한 영향을 준 19세기의 미국의 “변방전통”(frontier tradition)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전통은 초기 한국 교회의 예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열린 예배” 또는 “구도자의 예배”로 알려진 새로운 예배의 형태로 한국교회의 예배에 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북미 지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이 변방전통(예배?)는 두 번에 걸친 대각성 부흥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19세기에 미국이 서부로 땅을 개척해 나가면서 개척지에서는 대규모의 천막집회가 열렸다. 이 때에 드려진 예배는 뜨거운 준비찬송과 예배의 중심부로서 회심을 촉구하는 복음적인 설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신자를 불러내는 초청(altar call)의 순서로 되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과 관련해서 이 집회는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변방전통은 설교 중심의 예배였다. 그리고 그 설교의 특징은 복음적 메시지이다. 즉 설교의 초점은 언제나 복음의 제시에 있었고, 설교의 주제는 주로 구원, 멸망, 회심 등이었다. 당시 이 천막집회에서 헌신을 다짐한 많은 청년들은 후에 전 세계에 선교사로 나가게 되는데, 그 중에 많은 이들이 한국에도 나오게 된다.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가 설교중심으로 되어있는 것은 이들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로 변방전통의 기본 정신은 실용주의였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께 드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미국의 교회들은 예배를 선교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예배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을 그 예배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결신자를 맺느냐에 두었다. 그리고 이 목적, 즉 예배를 통한 결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들이 동원되었다. 예배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집회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셋째로 변방전통은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강조하였다. 이 집회는 신자 개인의 회심과 결단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 적인 영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복음송가들이 불려졌고, 그 중에 많은 복음송가들이 오늘 한국교회의 찬송가에 들어있고, 아직도 애창되고 있다.
(2) 한국교회 예배 예전의 문제점들
문제는 이 변방집회의 전통이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에 그대로 답습되어 내려오고 있다는데 있다. 먼저 한국교회의 예배는 목사 개인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특히 설교자에게 예배가 지나치게 의존되어 있다. 설교가 곧 예배요, 예배는 곧 설교를 듣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모든 것이 설교에 의해서 결정이 난다. 결과적으로 회중들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존재”(Worshipper)가 아니라, 단지 “교회에 가는 존재”(Church-Goer) 또는 “설교를 들어보는 존재”(Sermon-Hearer)로 머물게 되고 말았다.
두 번째 문제는 회중의 수동적 참여이다. 변방집회에서는 회중들은 예배에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예배 시간에 회중들은 스스로 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들려오는 설교를 들으며, 찬양대의 찬양과 기도자의 기도를 듣기만 하면 되었다. 성찬도 마찬가지였다. 안수 받은 성직자가 모자라는 서부 개척지의 상황에서 성례전은 1년에 두어 번 순회목사가 방문할 때만 집례 되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에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회중들은 앉아서 듣고 보기만 하면 된다. 성찬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의 모습이 아닌가?
세 번째 문제는 개인주의적이고 “참회적 영성”이다. 변방예배는 사실상 예배라기보다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 집회’였다. 따라서 예배의 초점은 언제나 참석자들의 회심에 있었다. 그러나 보니 메시지의 초점도 항상 죄에 대한 회개와 회심을 강조하는데 두어졌다. 그리고 성만찬에서도 언제나 강조된 것은 갈보리 산상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이었다. 이 전통은 엄격하고 경건한 청교도의 후예들이었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교회에 거의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여전히 무겁고, 참회를 강조하며, 복음과 은혜보다는 율법적인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한국교회를 방문하였던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Moltmann)은 “한국교회에는 십자가의 신학은 있으나 부활의 신학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한국교회가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은 강조하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성찬식을 생각해보자. 한국교회의 성찬식에서는 대게의 경우 항상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만이 강조될 뿐이다. 그래서 마치 성찬식만 하면 그 날의 예배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어둡고, 마치 장례식과도 같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미 지적한대로 우리 기독교의 예배의 출발은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 초대교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성찬을 나눌 때에도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고 더 나아가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축하하고 감사함으로 재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내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네 번째 문제는 이미 지적한대로 이러한 결과로 나타나게 된 예배와 집회와의 혼동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우리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예배라기보다는 집회 중심의 예배 아닌 예배를 선교사들을 통해서 전수받았다. 그래서 예배와 집회가 뒤섞여 있다. 예배와 집회의 차이가 무엇인가? 쉽게 표현하자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집회는 인간을 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예배와 집회는 다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전도 집회를 예배로 착각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생각이 잠재해 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예배의 우선순위(priority)가 뒤바뀌고 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데, 예배의 방향성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와 집회의 혼동,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 예배 예전의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III. 나가는 말: 예배 예전 거듭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의 예배 예전은 거듭나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는 예배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초대교회의 예배 예전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그 분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을 향하여 감격적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칼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이 그렇게도 회복하기를 원했던 초대교회의 예전, 기쁨과 감격으로 구원을 노래하며 응답했던 환희의 예전, 말씀과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재현하면서 감사함으로 응답했던 그 기쁨의 예전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배의 현장에서 부활의 감격과 앞으로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참 소망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재현할 수 있는 그런 예배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이를 위하여서 우리는 한 학기 동안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진정한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토론하며, 우리 예배 예전의 기준이 되는 초대교회의 예배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공부하며, 그 후에 예배는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예배는 어떤 것들이었는지, 예배의 중요한 내용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 예배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예배의 형식들(전통적 예배. blended worship, seeker-sensitive worship, Emerging worship 등) 에 대해서 함께 방문하며, video를 통하여 보고 토론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우리 모두에게도 한없는 은혜와 감사와 감격과 기쁨의 찬송을 통한 응답이 넘쳐나는 그런 예배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한 학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첫 강의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