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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만원권유통시작
5만원권이 23일 시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은행을 통해 시중에 유통됐다.
시민들은 5만원권을 보고 싶은 마음에
오전부터 은행 창구를 두드렸고 택시,
편의점 등 현금을 많이 취급하는
곳에서는 만원권 잔돈을 준비하는 문제
로 고심하기도 했다.
은행 당국이 5만원권을 일련번호 구분
없이 무작위로 배포하기로 했지만 이날
오전 9시 한국은행 1별관 창구 앞에는
사상 최고액 화폐인 5만원권을 먼저
교환하려 몰려온 시민 80여명이 길게
줄을 섰다.
▶ 2015년 김태선 KBO 기록위원, 프로야구 2500경기 출장 기록 달성
매일 프로야구의 역사를 쓴 지 24년째. 이제 그의 손을 거친 경기가 2500개에 달한다. 김태선(52·사진) KBO(한국야구위원회) 기록위원이 23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넥센―한화전에서 1군 250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 역대 KBO리그 기록위원 중 최다 출장이자 심판·선수를 통틀어도 가장 많은 숫자다.
심판 중에는 임채섭씨(2479경기), 선수 가운데는 양준혁(은퇴·2135경기)이 최다 기록을 가지고 있다.
김태선 위원은 고등학교 때까지 투수와 외야수로 뛰었던 선수 출신이다. 야구 특기생으로 대학 진학을 못해 글러브를 벗었다. 이후 프로야구 심판 시험을 준비하다 KBO 기록원 입사 공고를 보고 진로를 바꿨다. 그런데 기록위원 생활은 땀 흘리던 선수 시절보다도 더 힘들었다. 매일 저녁 3~4시간씩 목을 빼고 공만 보느라 목디스크에 걸렸다. 시력은 1.2에서 0.1로 떨어졌다. 화장실 가느라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플레이를 놓칠까 봐 물도 마음대로 못 마셨다. 식사는 경기 중에 배탈 날까 걱정돼 늘 가는 곳에서 같은 메뉴로 먹었다.
선수들과 맞서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일부는 타구가 안타가 아닌 상대 실책으로 기록되자 기록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삿대질을 했다. 김태선 위원은 “그럴 때는 나도 화가 나 맞선 적이 많다”며 “돌이켜 보면 성적에 연봉이 달린 선수들 입장을 고려해서 잘 설명해줘야 했는데 후회가 남는다”고 했다.
24년의 고된 시간을 견디게 해준 원동력은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직접 쓴다는 사명감이었다. 김태선 위원은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고 불리는데 그 기록을 모두 내 손으로 직접 적었다”고 말했다.
김태선 위원의 목표는 3085경기 출장이다. ‘3085’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장훈의 개인 통산 안타 개수다. 그는 “장훈 선생님이 쓴 ‘일본을 이긴 한국인’이라는 책을 보고 야구를 하게 됐다. 장훈 선생님의 안타 수만큼 경기장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 2015년 영화 음악의 거장 제임스 호너, 경비행기 추락사
영화 ‘타이타닉’과 ‘아바타’의 배경 음악을 작곡한 영화 음악의 거장 제임스 호너가 62세로 별세했다.
23일 CNN은 호너가 전날 오전 본인 소유의 경비행기를 혼자 몰다가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 인근에 추락해 숨졌다고 보도했다. 경비행기 조종은 그의 오랜 취미다.
호너는 타이타닉과 아바타 외에도 ‘뷰티풀 마인드’ ‘가을의 전설’ ‘브레이브 하트’ ‘스타트렉’ 등 영화 음악 100여편을 작곡했다.
합창에 전자 음향을 배합해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2회씩 받았다.
▶ 2015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이끈 니르말라 조시 수녀 별세
마더 테레사 수녀의 후계자로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이끌었던 니르말라 조시 수녀가 23일 80세로 인도 콜카타에서 별세했다.
인도 동부 란치시(市)의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난 니르말라 수녀는 어린 시절 ‘빈자(貧者)의 성녀(聖女)’로 불리던 테레사 수녀의 활동에 감동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후 테레사 수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서 평생을 봉사했다. 1997년 테레사 수녀 사망 이후 대표직을 물려받았으며 2009년 건강상 문제로 사임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니르말라 수녀는 빈자를 돌보는 데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며 고인을 기렸다.
▶ 2011년 TV 드라마 '형사 콜롬보'의 바바리코트 형사 피터 포크 별세
TV 드라마 '형사 콜롬보'로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배우 피터 포크(84)가 23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1927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악성 종양 때문에 한쪽 안구를 제거하고 인공안구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로 그는 약간 사시(斜視)처럼 보이는 얼굴을 갖게 됐다. 지난 2008년에는 큰딸 캐서린이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스스로 생활할 능력을 잃었다"며 법원에 재산 보호를 신청해 투병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형사 콜롬보'는 1971년 미국 NBC 방송 일요일 추리 드라마 시리즈의 하나로 시작해 30여년간 방영됐다. 한국에서도 1970∼80년대 방영되는 등 미국 외에도 세계 26개 국가에서 방영됐다.
포크가 이 드라마에서 연기한 LA경찰국의 수사반장 콜롬보는 냉철한 지성이나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기존 수사·탐정물의 주인공들과 달리 다소 얼빠진 듯한 표정을 한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그의 목소리를 더빙했던 성우 배한성씨의 코맹맹이 목소리도 인기를 끌었다. 허름한 레인코트는 어수룩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비상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콜롬보 형사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대표작인 이 시리즈로 포크는 TV의 아카데미상 격인 에미상을 네 차례 받았다. '살인 주식회사'와 '주머니 가득한 기적' 등 2편의 영화로 1961∼62년 연속으로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50대 이후에도 꾸준히 영화에 출연해 '5인의 탐정가(1976)' '프린세스 브라이드(1987)' '베를린 천사의 시(1987)' 등의 작품을 남겼다. '아메리칸 카우슬립(2009)'이 마지막 작품이다.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던 포크는 수채화, 스케치 등을 모아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 2010년 도요타 '전설의 시험운전자' 나루세씨 별세
도요타에서 47년간 수많은 명차(名車) 개발에 참여해온 일본의 전설적 테스트드라이버(시험운전자)가 독일에서 차량을 테스트하다가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도요타의 수석 테스트드라이버인 나루세 히로무(67)씨는 2010년 6월 23일(현지 시각) 독일 서부에 있는 유명 자동차주행장인 ‘뉘르부르크링’ 근처 도로에서 렉서스의 수퍼카(초고성능 스포츠카) ‘LFA’의 최상급 신모델인 ‘LFA 뉘르부르크링 에디션’을 시험하다가 충돌사고로 숨졌다. 그가 몰던 LFA는 마주 오던 독일 BMW 시험주행차량과 정면 충돌했으며, BMW에 타고 있던 2명의 테스트드라이버도 중상을 입었다.
1963년 도요타에 입사한 나루세씨는 전설적 스포츠카 2000GT를 비롯해 AE86(일명 하치로쿠), MR2, 수프라 등 도요타의 스포츠카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 사장의 운전교습자였고, 아키오 사장에게 스포츠카 개발과 관련해 많이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한국축구대표팀사상첫원정
월드컵16강진출.새벽3시30분(한국
시간)남아공더반경기장에서진행된20
10남아공월드컵에서나이지리아와2:2로
비기면서B조2위로16강에올랐다.
▶2009년 5만원권유통시작.
▶2009년 세브란스 병원, 국내 최초로
존엄사를 시행하다.
▶2008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최동환
주세네갈 대한민국대사와 Abdoulaye
Diop 세네갈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간에 서명된 “대한민국 정부와 세네갈
공화국 정부 간의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에 관한 약정”이 “외교통상부고시
제659호”로 서명일인 2008년 6월 23
일에 발효되었다.
▶ 2003년 14세 재미교포 미셸 위,
US여자아마 최연소 우승
골프 신동’ 미셸 위(14·한국명 위성미)가 2003년 6월 23일 US여자아마추어 퍼블릭 링크스(Public Links) 챔피언십에서 대역전극을 펼치며 역대 최연소 챔피언에 등극했다.
2003년 6월 23일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열린 US여자아마추어 퍼블릭링크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미셸 위가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이날 플로리다주 팜코스트의 오션해먹골프장(파72)에서 36홀 매치플레이(홀별로 승부를 가리는 방식)로 치러진 대회 결승전에서 미셸 위는 비라다 니라파스퐁폰을 1홀차로 꺾고 우승했다.
2000년부터 이 대회에 출전한 미셸 위는 네 번째 도전 끝에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으며 지난 2000년 캐서린 카트라이트가 세운 이 대회 최연소 우승기록(17세)을 ‘13년8개월11일’로 갈아치웠다.
미셸 위와 결승에서 맞붙은 비라다 니라파스퐁폰은 NCAA(전미대학체육협회) 챔피언으로 태국판 ‘박세리’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선수였다. 결승은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이었다. 미셸 위가 2번홀(파5)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먼저 기선을 올렸다. 하지만 니라파스퐁폰은 3번홀 버디를 시작으로 반격을 시작, 8번홀(파3)에선 무려 4홀차로 앞서나갔다. 승부는 35번째 홀(파3·135야드)에서 갈렸다. 둘 다 1m가 채 안 되는 파 퍼트를 남긴 상황에서 니라파스퐁폰은 파 퍼트에 실패했고, 미셸 위는 파를 잡아 대접전을 ‘해피 엔딩’으로 장식했다. 위성미는 “열 살 때부터 출전한 전국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해서 기쁘다”며 “나는 다른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꺾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2003년 세계 최대 LFG발전소
인천 매립지에 건설.
▶2003년 세계 IT 기업 삼성전자 3위.
▶1999년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모습이 1400여년 만에 재현되어 국립공주박물관에서 공개되다.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모습이 1400여년 만에 재현됐다.
국립공주박물관’(관장 김영원·46)은 백제 중흥의 기틀을 다진 무령왕 흉상을 23일 일반에 공개했다. 높이 88㎝ 크기의 이 흉상은 조각가 임영호(34)씨가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관련 문헌과 무령왕릉 출토 유물 등을 토대로 1개월간의 작업 끝에 우선 점토로 제작했다.
흉상으로 드러난 무령왕은 기다란 얼굴에 코와 입술이 또렷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녀 용맹스러우면서도 지략을 갖춘 모습. 무령왕이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재위 12년의 52세 때가 기준이 됐다. 여기에 공주문화대 이충우(47) 교수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모조품을 제작, 금관을 씌우고 한 쌍의 금제 관식을 머리에 꽂았다.
박물관측은 곧 점토 상태의 흉상을 석고로 만들어 전시한 뒤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청동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김 관장은 “무령왕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왕임에도 그 동안 고분 구조나 출토된 유물에만 관심이 쏠렸었다”며 “인물 자체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1999년 네로 ‘황금궁전’ 18년 만에 재공개
고대 로마 네로 황제(37∼68)의 몰락의 원인이 된 황금궁전(domus aurea)이 23일 붕괴 위험으로 폐쇄된 지 18년만에 다시 일반에 문을 열었다.
네로 황제의 황금궁전 ‘도무스 아우레아’.
2000년 새 밀레니엄 개막을 앞두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 고대 로마 및 르네상스 문화유산 복원사업을 벌여온 이탈리아 정부는 96년 황금궁전 복구를 위해 복권 판매 수익금 등 보수자금 300만달러를 마련,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웅장한 기둥을 따라 늘어선 방 300개 가운데 150개가 복원공사를 마쳤고, 그중 32개가 이번에 공개됐다. 물이 말랐던 호수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로마시는 황금궁전 복구를 기념하기 위해 25일부터 사흘간 네로의 기독교 박해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 ‘쿼바디스’를 야외상영하고,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 서사시 낭송회를 여는 등 행사를 벌였다. 각종 박물관도 무료 개방했다.
건평 24만4800평에 분수대, 정원, 목욕탕, 인공호수, 정자를 갖춘 황금궁전은 방마다 천장에 진주와 상아를 박아 넣었다는 화려한 건축물이다. 기원 64년 로마시의 절반 이상을 태워버린 대화재 직후 네로는 로마 시내 한가운데 땅을 강제로 사들여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65년 착공된 황금궁전은 티베레강을 끼고 팔라티누스, 카일리우스, 오피아누스 언덕 등 7개 언덕 중 4개에 건설됐으며 고대 로마 시내 전체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당시 네로는 시민들의 미움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네로 어머니 소(小)아그리피나는 네로의 생부인 남편을 죽이고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결혼한 뒤, 새 남편을 설득해 네로를 후계자로 세웠다. 54년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뒤 옥좌에 앉은 17세 소년 네로는 곧 사사건건 간섭하는 어머니와 사이가 나빠졌고, 5년 뒤 어머니를 살해했다. 로마 시민들은 주색에 빠져 밤거리에서 난동을 부리고, 연극무대에 서서 수금을 타며 눈물을 짜는 폭군 네로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64년 대화재가 일어난뒤 네로가 “로마를 그리스식으로 재건축하겠다”고 발표하자, 당장 “그리스 예술을 좋아하는 네로가 로마 외관을 취미에 맞게 뜯어 고치려고 일부러 불을 놓았다” “불타는 로마를 앞에 두고 수금을 타며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이 퍼졌다. 네로는 소문을 무마하기 위해 “기독교도들이 진짜 방화범”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원형 경기장에서 기독교도들을 살육했다.
화재 사건과 뒤이은 반란 기도에도 불구하고 황금궁전 건축을 강행한 네로는 66년 로마 정치를 해방노예에게 맡긴 채 그리스 유람에 나섰다. 68년 2월 로마 황금궁전으로 돌아온 네로는 몇달 뒤 스페인 속주 총독 갈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들었다. 근위대마저 네로를 버리고 반란군에 합류하자, 네로는 노예의 도움을 받아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네로 뒤를 이은 황제들은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할까봐 황금궁전을 공공건물로 사용하고, 궁전 부지에 다른 건물들을 세웠다. 로마 제국이 몰락한 뒤 흙먼지에 묻혀버린 황금궁전은 16세기 르네상스때 다시 발굴됐다.
▶1998년 국무회의,
재외공관 6곳 폐쇄 의결.
▶1997년 북한 국제연합(UN)에 보고,
1인당 GNP 239$
▶1997년 20개국 참가 탄도미사일및
요격체계에 관한 국제회의(이스라엘).
▶1997년 유엔 환경특별총회 개막-
핵폐기물 관리.해양오염 등 논의.
▶1997년 민간지원 북한구호식량을
선적한 첫 국적선 <장영호>, 부산에서
흥남으로 출발하다.
▶1996년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Andreas Papandreou) 그리스
사회주의자 전 수상 사망.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77)가 1996년 6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는 그리스 현대 정치사의 거목이다. 반군사독재 투쟁 끝에 두 차례의 투옥과 망명, 3차례의 총리 재임과 세번의 총선 패배, 그리고 두 번의 결혼 등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1981년 총선에서 대승, 그리스 최초의 좌파사회당(PASOK) 총리가 됐다.
총리가 된 그는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간통죄 폐지, 이혼 허용, 사회보장 확대 등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1985년 재선되기도 했다. 그리스 내 미군기지 철수를 주장하는 등 냉전의 틈바구니에서도 독자노선을 걷기 위해 노력했다. EU 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그리스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그는 당시 신처럼 추앙받았다. 그는 그러나 1988년 사회당 각료들의 대규모 뇌물수수 사건이 터지면서 재판에 회부되는 등 오욕을 겪었고, 1989년 이후 세번의 총선에서 참패했다. 하지만 그는 1992년 뇌물 스캔들 혐의를 벗고 1993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1919년 에게해의 섬에서 태어난 파판드레우는 아테네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급진적 좌파이념에 눈을 떴다. 1939년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른 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대 초 귀국, 1964년 아버지인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 밑에서 장관직을 맡았으나 1967년 쿠데타로 독재 체제가 들어선 뒤 투옥됐다가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군정이 붕괴된 1974년 조국으로 돌아와 PASOK를 창당했다.
▶ 1996년 송광사 조계총림 방장, 승찬 스님 입적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곧 생사요, 일어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생사와 열반이 누구를 말미암아 있는 일이냐,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손등과 손바닥이니라" 1996년 6월 23일 입적한 승찬 스님이 남긴 임종게(臨終偈)이다.
승찬 스님은 효봉(1888∼1966), 구산(1909∼1983)스님으로 이어지는 송광사의 근대 승맥을 잇는 인물이다. 평남 개천 출신인 승찬 스님은 동국대 국문과를 중퇴하고 1947년 10월 지리산 칠불암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송광사 초대~2대 방장을 역임한 구산 스님은 절집안에서 그의 형님뻘이고 법정스님, 시인 고은씨 등은 아우가 된다.
1960년 통영 미래사의 주지가 된 승찬 스님은 이후 충무 용화사, 순천 송광사 등 중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했으며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중앙감찰위원 등으로 종단운영에도 참여했다. 1984년 조계총림 제3대 방장으로 추대된 승찬 스님은 이후 효봉문도회 회장, 보조사상연구원 총재, 전국불일회 총재 등으로 한국불교의 한 축을 형성하는 송광사 문중을 이끌어 왔다.
▶1996년 방글라데시 총리에
와제드 아와미당 총재 취임.
▶1995년 미국 소아마비백식 개발자
조나스 솔크 사망.
▶1995년 김영삼 대통령, 김정일 주석
직 승계후 남북정상회담 재추진 시사
▶1995년 한보철강 당진공장 준공.
▶1995년 러시아-체첸, 체첸 수도
그로즈니서 회담.체첸 자유선거 실시.
▶1994년 전기협 전지협소속 기관사
노동자파업(6일간 교통대란)
▶1993년 일본 운젠화산 폭발.
▶1993년 독일의회,
이국인 테러보상법 통과.
▶1992년 미국,
카타르와 방위협정 체결.
▶1992년 이스라엘 좌파연합.
총선에서 리크프트당을 누르고
15년만에 정권을 획득.
▶1991년 서방선진 7개국,
구소련에 IMF 준회원자격 부여 합의
▶1991년 내리교회 박재선 선교사
말레이시아로 파송.
▶1991년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서 남북단일팀, 8강 진출
▶1990년 김상조 전경북지사,
뇌물수수혐의로 구속
▶1989년 미국 상원의원들 주한국.
미국군 3년간 1만명 철수토록 하는
주한국.미국군 감축법안 제출.
▶1989년 앙골라 호세 에두아르도 산토
스(Jose Eduardo dos Santos) 대통령
과 앙골라 완전독립민족동맹(UNITA)반
군 지도자 호나스 사빔비(Jonas Savim
bi) 14년간 내전 종식 선언에 합의.
▶1989년 행정개혁위는 통일원장관을
부총리로 격상시키는 등의 통일행정체제
조정 방안을 확정하다.
▶1987년 전남 영광 원자력발전
7-8호기 준공. 용량 190만 kw
▶1986년 미국 오하이오주
페리 원전에 화재.
▶1986년 일본 이바라키현 토카이<東
海>사업소 핵연로 검사중 국제 원자력
기구 조사관등 12명이 방사능 오염.
▶1986년 프랑스
핵연로농축공장 방사능 누출.
▶1985년 [인도]항공 보잉747기,
아일랜드 연안 추락 329명 사망.
▶1985년 아시아
기독교언론인협회 창립
▶1983년 대구에서
고려시대 천문도를 발견하다.
▶1982년 동국대 고비(오래된 비석) 조
사단, 파주 감악산에서 고비를 발견하다.
▶1981년 프랑스정부, 공산당 4명 입각
▶1981년 우리나라서 가장오래된
태극기 미국 윌리엄롤스턴 소유
92년만에 미국서귀환.
구한말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O. N. Denny, 1838~1900)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극기
▶1981년 대한민국-미국
경제협의회 서울에서 열림
▶1980년 베트남군,
캄보디아 영내로부터 태국영내로 침입
▶1979년 윤보선 전 대통령 등 20여명,
화신 백화점 앞에서 카터 방한 반대시위
▶1978년 박대통령, 북한에 민간경협
촉진 협의기구 구성을 제의
▶1976년 이은무 선교사 “국제선교협력
기구”(KIM) 파송-인도네시아 선교사로 1
976.9.15.-싱가포르선교사로 임지이동
▶1974년 [인도], 수소폭탄 개발.
▶1973년 김일성,
조국통일 5대 강령 발표.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평화 통일안
을 선언하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비롯해 교차
승인과 내정 불간섭 원칙을 주장)
조국의 평화통일 및 개방선린외교를 표방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성명 이른바 ‘6ㆍ23선언’이 1973년 6월 23일 발표됐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겠다’ 등의 내용을 담은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선언에 국민들은 ‘실리(實利)’를 향한 방향전환으로 여기며 이를 차분히 받아들였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대북정책인 ‘6ㆍ23선언’이
발표되자 이를 알리는 조선일보 호외
를 지나가던 시민들이 받아보고 있다.
이날의 성명은 1970년 8월 15일 한국정부의 ‘평화통일구상선언’ 발표에 북한이 1971년 8월 12일 남북적십자회담 제의로 응답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는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의 경험을 토대로 통일 여건을 보다 실질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통일외교의 의지를 담고 있다.
모두 7개항으로 구성된 이 선언은 1.조국평화통일을 위한 노력 2.남북한 상호 내정불간섭 3.남북대화 성실 인내 노력 계속 4.북한의 국제기구 가입 불반대 5.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불반대 6.상호평등원칙 아래 모든 국가와 문호개방 7.우방과 기존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의 의의를 크게 두가지로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사적으로 세계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점, 둘째, 민족사적으로 ‘선평화 후통일’ 여건 마련의 현실적인 방향을 천명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의 이같은 조처에 영국과 일본 등에서도 이를 크게 보도 ‘창조적 정책’이라고 환영했다.
▶1972년 영국,
파운드화 변동환율제로 이행
▶1972년 안무가 보브 포스 출생
▶1968년 만원버스 춘천호에 추락,
21명 사망
▶1967년 경기도청,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전
▶1964년 콩고에 반란
▶1962년 라오스,
푸마3파 연합정부 발족
▶1961년 남극의평화적이용과 군사
행동 금지를 담고 있는 남극 조약이
12 개국이 조인 하여 발효됨.
각국기지와 남극횡단대 루트. 남극조약발효 전의 각국령
유권주장선을 나타낸 지도.
극지 개발이 활발이 이루어짐에 따라 남극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12개국이 워싱턴에 모여 1959년 12월 1일 조인한 남극조약이 1961년 6월 23일부터 발효됐다. 조약은 남극지역이 평화목적으로만 이용되는 것을 원칙으로 해 군사시설 설치, 군사연습, 병기실험 등 소위 군사적 조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핵폭발과 방사능폐기물 처리도 이후의 새로운 국제협정에 의해 인정되어지지 않는 한 금지토록 했다. 또 영토청구권의 동결, 과학적 조사의 자유와 지속적인 국제협력도 구체화했다.
조약이 성립하게 된 계기는 1958년 5월 미국정부가 `국제지구관측년`(1957년 7월~1958년 12월) 회의에 참가한 12개국 대표에 남극관련 국제회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제안에 12개국 대표가 6월1일 워싱턴에 모여 최초의 예비회담을 열었고 1년여 동안 58회의 예비회담을 거쳐 1959년 12월1일 12개국 대표들이 남극조약에 조인했다.
▶1957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100여동 소실. 49명 사망
▶1956년 낫세르,
이집트 초대대통령에 당선
1952년 7월, 34세의 청년장교 나세르가 자유장교단을 이끌고 무혈쿠데타를 감행, 영국의 비호를 받아온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렸다. 1차 중동전의 영웅 나기브를 1인자로 내세우고 무대 뒤에서 힘을 비축한 나세르는 예상대로 2년 뒤 나기브를 축출했다.
1956년 1월에 일당 정치체제에 사회주의 아랍국가를 표방한 이집트 헌법을 공포하고, 6월 23일에는 이집트 최초의 국민투표를 실시, 99.9%의 찬성표를 얻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1개월 뒤에는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 중동지역을 세계 질서의 주요 변수로 부각시켰다.
아스완댐 건설 비용 마련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서방국가로부터 운하 소유권을 되찾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국유화 조치가 야기한 2차 중동전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 ‘서방세계에 도전한 첫 아랍인’이 돼 단숨에 아랍세계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나세르는 여세를 몰아 지리멸렬한 중동지역에 아랍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정치블록을 형성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를 경찰국가로 만들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아랍통합을 꿈꾼 진정한 지도자였다.
▶1955년 주요도시에 양곡배급 실시
▶1954년 서울 남대문시장에 화재,
피해 6800억원 점포600동 전소.
▶1954년 육군사관학교를 현재의 위치
로 복귀하여 옛 화랑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화랑대'로 명명하다.
▶1953년 정부, 전란 3년간의 일반 국민
피해 발표(사망 23만, 부상 22만, 행불
29만, 학살 12만등 총 92만8천명)
▶1953년 베를린장벽 최초희생자
추도식, 서독서 거행
▶1953년 이용문 장군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
▶1952년 유엔군 만주 국경의
수풍댐 폭격
▶1951년 말리크 소련유엔대표
한국전쟁 휴전제의
▶1950년 김관주 목사 사망.
공산당에 의해 옥고중 사동탄광으로
옮겨져 복역하다 학살되었다.
▶1949년 뉴질랜드, 대한민국 승인
▶1949년 이란-이라크 상호원조협정
▶1949년 맹호부대 창설
▶1946년 한-미 문화협회 결성
▶1946년 진해에서 출옥 교역자 주관
으로 하기신학강좌 개최
▶ 1945년 미군 총공격에 일본 오키나와 수비대 전멸
일본의 오키나와 수비대가 1945년 6월 23일 전멸했다. 오전 4시30분경 수비대 제32군 사령관도 자결해 사실상 오키나와는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화염방사기로 1945년 미군 총공격에 일본 오키나와 수비대 전멸
일본의 오키나와 수비대가 1945년 6월 23일 전멸했다. 오전 4시30분경 수비대 제32군 사령관도 자결해 사실상 오키나와는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화염방사기로 동굴진지를 공격하는 미군 병사.
4월 1일 미군은 수백척의 상륙선을 타고 오키나와에 상륙, 2개의 비행장을 점령했다. 상륙부대는 점차 증가해 18만명에 달했다. 일본군 오키나와수비대 주력부대인 제32군(약8만명)은 2번에 걸친 총공격으로 비행장 탈환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미군에 밀려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월 31일 오히려 나패(那覇)시가 점령되었다. 6월에 들어서자 제32군과 다수의 민간인들이 산악지대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오키나와를 점령하려는 미군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 수비대, 의용군, 주민 등 약 15만명이 사망했다. 미군의 사상자수도 6만5천명에 달했다.
동굴진지를 공격하는 미군 병사.
4월 1일 미군은 수백척의 상륙선을 타고 오키나와에 상륙, 2개의 비행장을 점령했다. 상륙부대는 점차 증가해 18만명에 달했다. 일본군 오키나와수비대 주력부대인 제32군(약8만명)은 2번에 걸친 총공격으로 비행장 탈환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미군에 밀려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월 31일 오히려 나패(那覇)시가 점령되었다. 6월에 들어서자 제32군과 다수의 민간인들이 산악지대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오키나와를 점령하려는 미군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 수비대, 의용군, 주민 등 약 15만명이 사망했다. 미군의 사상자수도 6만5천명에 달했다.
▶1945년 박춘금,
친일 단체 대의당을 창당하다.
▶1944년 프랑스ㆍ폴란드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하다.
▶194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지휘자
제임스 레빈 출생
▶1941년 "슈호프가 집을 나선 것은
1941년 6월 23일이었다. 일요일 아침
폴롬냐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던 사람들
이 전쟁이 터졌다고 알려주었다."
▶1939년 영화배우 버트 콘비 출생
▶1934년 사우디아라비아-예멘,
6주간의 전쟁 이후 평화협정에 조인.
▶1927년 중국 제4회 전국노동자대회
무한서 개막.
▶1925년 중국 광저우에서 반제국주의
시위대에 영국군이 발포하여 50여명이
사망했다.
▶1922년 안병무 출생. 신학자, 철학자.
1970년대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안병무의 눈을 [현존]에서 [현장]으로
옮기게 하였다.
▶1920년 한규설,이상재 등 조선교육회
발족(뒤에 조신민립대학 기성회로 발전)
▶1916년 사우디아라비아 독립선언.
▶1913년 전 미국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 출생.
▶1903년 빌링슬리 출생. 미국 남감리
회 여선교사. 한국선교사 자원하여 남감
리회 외지선교부의 파송으로 내한함.
가정생활 개선운동 책임자
https://youtu.be/d5t7JV3Bg4k
출처 네이버지식배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