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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으로 부르심과 이웃과의 관계(2)
엡 4:17-32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설 교 >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에베소서 4:21-24 / 이은규 목사
새해 첫 날, 첫 주일을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다른 주일과는 사뭇 다른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간절함도 있고, 결연함도 있습니다. 올 해에는 무엇인가 다르게 보내야지... 그런 마음들이 바로 이 시간 우리가 가진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구도 오늘이 다른 날과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들은 지난 시간도 힘이 들었고, 앞으로도 쉽게 달라질 기색이 보이지는 않지만, 오늘 이 시간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나의 내면이 달라질 수가 있다면... 정말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새롭게 된다는 것처럼 막연하고도 힘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해마다 가졌던 새로움에 대한 각오와 결심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아마도 우리 모두는 성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좀 작은 것으로부터 하기 쉬운 것으로부터 새롭게 살기로 마음먹는 것은 어떨까요? 박노해 시인은 ‘참 사람이 사는 법’이라는 시에서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손해 보더라도 착하게/ 친절하게 살자/ 상처 받더라도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살자/ 뒤처지더라도 서로 돕고/ 함께 나누며 살자/ 우리 삶은 사람을 상대하기보다/ 하늘을 상대로 하는 거다/ 우리 일은 세상의 빛을 보기보다/ 내 안의 빛을 찾는 거다.’ - 참 사람이 사는 법(박노해)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경험한 그리스도 예수... 그분은 실로 새로운 생명의 원리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마다의 욕심을 좇아서 분주하게 살다가도 문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 분이 남기신 말씀들... 그 분이 살면서 추구하셨던 것...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고상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항상 허망한 욕심을 추구하는 삶일 뿐이었습니다. 아... 이게 내가 살고 있는 것이로구나... 아 이러한 삶이... 내가 맞이하는 이 순간이 진정 내가 원하던 삶이야... 그러한 만족이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진정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향할 때... 그 분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 분에게 나를 맡기려 할 때에... 그리고 진정 그 분처럼 살려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때에... 그 때에는 삶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같은 환경이나 조건 가운데서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정말로 다른 느낌을 가지고 살게 하여 줍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자기의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 그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 가운데서도 배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의 옷을 입을 수가 있게 된다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예전의 자기의 욕심을 추구하는 삶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과는 다른 새 사람을 입는 다는 것... 그것이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의 내면이 예수를 닮아가는 것... 우리의 마음이 점점 더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가진 모둔 허망한 것을 다 버리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예수가 가지셨던 삶의 비결...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입게 되는 새 사람의 옷... 그것은 먼저 믿음의 옷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셨고... 그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믿음이 예수의 삶의 비결이 되었던 것이지요. 우리에게 다가온 새로운 시간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떤 경우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셨고, 늘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항상 가지고 살았습니다. 설혹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등지고 떠나가는 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 믿음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이렇게 대응하셨습니다. ‘나는 그분(하나님)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7:29)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 그것은 마치 우리의 삶의 기초와도 같은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고... 이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삶의 기초... 그것은 오늘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 그것을 마음 가운데 새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에게 소중한 삶을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은 결코... 단 한순간도 나를 버리거나 외면하시지 않는다는 것... 이것을 확신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우리가 새해를 사면서 이 믿음이 확고하다면... 우리는 어디서도 흔들리지 않는... 혹시 실패하고 주저앉았다가도 툭툭 털어 버리고는 다시 일어서는 그러한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새로운 사람... 그것은 또한 사랑의 옷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예수가 세상에 오신 이유가 사랑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요한3:16) 이것은 아마도 예수가 삶을 다 마치시고 세상을 떠나셨을 때에 그를 추종하던 이들이 그분에게 붙여드린 찬사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곁에서 그가 하셨던 말이나 행동들 지켜본 사람들... 그들이 하나 같이 느꼈던 마음... 그것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그가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본 것... 그것은 사람들을 위하여서라면 아무 것도 아끼거나 감추어 두시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서 8:32) 바울이 이런 멋진 고백을 할 때... 그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염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입혀 주시는 사랑이라는 새 사람의 옷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갈아입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다 막아 내는 방탄조끼와도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아무리 어렵고 힘든 형편에 직면해 있어도... 그리스도가 입혀 주신 사랑의 옷... 그것만 입고 있으면 거뜬히 견디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해 수요일 저녁에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바울을 많이 읽었는데... 그를 성찰하면서 ‘상처받을 틈도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항상 그리스도가 부여하시는 목적에 사로잡혀서 그렇기도 하지만... 오늘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워낙 촘촘히 짜여진 사랑의 옷을 입혀 주셨기에 그런 것이로구나...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역시 상처받을 틈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항상 풍성하고 넉넉하게 해 줍니다. 설혹 내가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고 하여도 말이지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고후6:10)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 어떤 상처나 고통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박해를 당해도 버림 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9)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를 통하여 이런 신비한 사랑을 우리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새해에는 꼭 사랑의 새 사람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누구보다도 부요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은 또한 기쁨이라는 옷입니다.
새해에는 꼭 기쁨의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통하여서도 깨달은 것이지만... 예수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의 하나는 기쁨입니다. 누가는 아예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제목을 ‘큰 기쁨이 될 소식’(눅2:10)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초대교인들 가운데서 예수를 믿고 느끼게 된 공통적인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4:4) 아마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다가 아주 신비한 유전자를 하나 숨겨 놓으신 것 같습니다. 기쁨이라는 유전자 말이지요. 그 유전자가 올 한 해 동안 우리 가운데서 왕성하게 활동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도 좀 의구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가 있을까요? 정신이 좀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항상 싱글벙글할 수가 있을까요? ‘항상 기뻐하라...’ 이 문제를 가지고 좀 생각해 보면서 그런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 그래서 우리가 항상 웃고 다니게 되는 것... 이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늘 웃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슬픈 일일 당하면... 우리는 기뻐하거나 웃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어진 삶을 항상 밝고 건강한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 기쁨이란 이렇게 주어진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더 현실적으로 와 닿습니다. 슬픈 일을 당해도... 고통스런 일이 찾아오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참 슬픕니다. 눈물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무척 아프고... 이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의 옷을 입은 사람들... 그들은 슬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망스러운 현실에 직면하여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여유를 잃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항상 유머를 잃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단순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서 삶에 대해서 가지는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 바로 이것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의 실체인 것이지요. 새해에는 꼭 기쁨의 옷을 입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신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다 지나고 나서 연말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열심히 살아라.. 멋지게 살아라... 그런 명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새 사람의 옷을 입으십시오. 그것은 믿음의 옷이고, 사랑의 옷이고, 기쁨의 옷입니다. 새 사람의 옷은 우리를 아주 특별한 존재로 살게 하여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풍성하고 행복하게...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누구보다도 멋지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알프레드 디 수자는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이런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한 해를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여보지 못한 놀라운 일들... 아름답고 멋진 일들이 여러분의 가정을 통해서, 자녀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일터에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통해서... 이 나라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엡 4:21-24 / 김충식 목사
에베소 교회에는 아직 이방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현대 교회에 적용하면 지금도 교회 안에는,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그리스도인들, 지식으로만 믿으려는 그리스도인들, 즐기는 것과 재미로 믿으려는 그리스도인들, 초자연적 현상이나 신비만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영적인 교만으로 아집과 편견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참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성경은 참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매우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진리를 확실히 깨달아 모든 분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로, 진리를 깨닫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면에서 믿음은 진리를 알고 깨달아,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질문을 할 때에 ‘이것이 진리입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진리를 가리켜 ‘참된 이치’라고 쓰여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진리를 복잡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6을 보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진리는 예수님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있습니다. 성육신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후 다시 사시고, 하늘에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며, 다시 재림하시는 것과 같은 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진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깨닫는다고 하였는데, 깨닫는 것은 진리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십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대답합니다.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주’라는 것은 주인이라는 뜻인데, 그리스도되시는 주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 분만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신앙고백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28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의 대해 의심이 많았던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똑같은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 우리는 지식으로 알기도 하고 입술로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모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 신앙고백이 심령에서 믿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님만이 신앙의 대상이 되기에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볼 수 없으며, 어느 종교의식에도 몸을 굽혀 경배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예로 그리스도인은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부모님은 잘 섬겨야 됩니다. 공경해야 됩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효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시다 할지라도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예수님 대신에 예배드리고 제사할 대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하고 깨닫는 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어느 분은 한 달만에 깨닫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기에 알기는 알아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입술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지만 예수님만이 진정한 경배의 대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은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역할을 해주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많은 사람이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마16:7)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혈육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이성이나 노력이나 기타 인간적인 여러 방법을 말하는데, 진리를 터득하고 깨닫게 하는 것은 혈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신앙고백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안 믿으면 안 되게끔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3을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 밖에 안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있는 분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교회를 선택했고, 내가 종교를 선택했고, 내가 예수를 선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 즉 예수님에 대해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32를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되면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의 결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의 끝은 죽음입니다. 어떤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고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마지막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진리되시는 예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질고인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죄의 짐을 짊어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마음의 죄도 있고, 실제로 행하는 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죄로부터도 자유함을 누리게 합니다. 더 나아가 사탄으로부터도 자유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롬8:3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고백하는 것을 믿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사도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하였고, 요한복음 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진리를 깨닫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예수님입니다. 깨닫는 것은 주님을 신앙고백하는 것입니다. 깨닫게 해주는 사역은 성령이 하십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깨달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거듭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요한복음 3:3을 보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니고데모는 학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공의회 의원입니다. 공의회 의원은 국회의원과 판사를 겸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많은 재물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영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할 때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요3:4)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것은 자연적인 출생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데, 생명의 씨앗을 심으므로 그 영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 나는 것, 새로 나는 것. 중생, 신생 이라는 용어는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은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육적인 생명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생명도 있습니다. 육적인 생명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소유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는데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존재에 하나님의 생명을 새롭게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생명이 태동을 합니다. 그때부터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손주들을 보면 평상시에는 조부모들이 과자나 사탕을 사주고, 장난감을 사줄 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도 결정적인 때는 엄마나 아빠를 찾습니다. 그것은 그들속에 엄마와 아빠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나님의 생명이 거하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해바라기처럼 하나님을 지향하고, 영적인 일을 분별하며,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거해야 합니다. 거듭나는 것도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지 아니하고 목사님이 된 사람도 있고, 거듭나지 아니하고 장로님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이 우리 심령에 심겨져야 합니다. 생명의 씨는 우리 심령 속에서 발아가 되고, 싹이 나고, 자라납니다.
그러면 왜 거듭나야 할까요? 사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본이 되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말하기를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면에 완전하면서도 선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거듭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난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악했던 사람이 선해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인간의 눈으로는 선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엡2:1) 그래서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물과 성령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거듭나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5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1:23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과 성령과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는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는 결코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큰 공로를 세운다 할지라도 새로 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때에 자신의 죄악됨과, 자신의 영적인 무능력을 깨닫는 일, 그리고 거듭남의 절대적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나야 되겠다는 욕구와 더불어 하나님께 자복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듭나라”는 권면을 니고데모에게 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심령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기에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교회를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신비나 감정의 고조된 상태에 들어갔다고 해서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심령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이 거하여야 거듭난 사람입니다.
교회를 악세사리로 여기면서 다닐 수 있습니다. 기타 여러가지 목적을 가지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요, 영적 생명이 새롭게 탄생한 사람들입니다. 천 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씨가 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암 같은 것으로 죽을 때에 육체적인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은 괴로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 때에 자신의 삶을 많이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공감하는 것 몇 가지를 소개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유산을 미리 염두에 두었더라면 하는 후회와, 장례식을 미리 생각했더라면 하는 후회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후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후회는 신을 모르고, 영원한 삶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영원한 삶을 발견한 사람들은 인생 마지막 순간에도 후회가 아니라 감사가 넘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삶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를 깨닫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새 사람 새 옷
엡 4:22-32 / 김삼환 목사
일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새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이미 새해를 맞이해서 두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기업들이 새로워지기를 원하고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고 새 출발하고 모든 국민들이 새로워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새 정부도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새로운 정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현대 자동차에서 이번에 새차 제네시스를 4년 동안 5000억이나 투자를 해서 정말 최고급 세단을 만들어 냈습니다. 렉서스나 BMW나 벤츠나 세계적인 명차와 손색이 없는 이런 자동차를 이번에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한 5년 전에 현대 자동차의 높으신 분과 제가 식사를 했는데, 그분이 ‘목사님 곧 우리가 지금 좋은 자동차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많이 기다렸는데, 정말 이번에 좋은 차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명차가 탄생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는가 봅니다. 이제는 우리 자동차도 세계적인 자동차와 경쟁할 수 있는 견줄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가 냉장고하면 일제나 미제 다 우선 했는데 지금 유럽까지 전 미국의 가정에서 LG나 삼성 냉장고를 최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의 모든 전자 제품이 세계 속에서 우수한 것입니다. 이번에 자동차도 아마 세계적인 차라고 생각을 하면서 다음 주일에는 모두 제네시스로 갈아타고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쌍용에서도 체어맨 5000cc짜리가 또 나오고 있고 에쿠스 뒤를 이어서 또 새로운 차가 나온다고 합니다. 정말 좋은 차가 많이 나오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기대해 볼만 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좋아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변인 이 강동구 명일동 지역도 원래는 가장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쪽으로 서울에 밀려 밀려와서 살게 된 지역이었습니다. 제가 개척했을 때, 강동아파트에서 시작을 했고, 조금 있다가 저 암사아파트가 지어 졌습니다. 다 9평, 11평, 13평 모두 그런 아파트였습니다. 강동 아파트도 11평, 13평 큰 아파트라야 15평 아파트가 몇 개 있었습니다 저희들 꿈이 ‘아, 언제 저런곳에 나도 가서 살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이 전부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암사 아파트라 안그럽니다. 새 이름으로 바꿔졌습니다. 강동아파트라 안그럽니다. 롯데케슬이라 그럽니다. 모두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정말 다 바뀌어져서 좋은 고급, 좋은 병원, 동서 신의학 병원도 들어오고 이 지역이 정말 엄청나게 좋아지고, 모두 리모델링하고 이렇게 해서 아주 새로운 모습으로 이 지역이 단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살던 지역은 원래 하일동 지역이였습니다. 하일동은 정말 우리나라의 하일이었습니다. 제일 어려운 분들 3000세대가 그곳에 와서 화장실 몇 개 놓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줄을 서있고 모두모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살아간 지역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급 아파트가 만 세대 가까이 들어오고 있고, 그 동네 이름도 하일동에서 강일동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강의 가장 좋은 넘버원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황산을 비롯해서 이 지역이 엄청나게 발전을 해서, 지금 일 이 년 내에 수 만 세대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전도서 1장 9절에 있는데로, 사실 새 것은 없습니다. 그 좋은 새 집들이 다 들어설 때, 너무너무 감격했지마는 모두 헌 집이 되었고 지은지 얼마 안되었는데 모두 뜯겨져 나갔습니다. 흔적조차 없습니다. 새 집도 없고 새 사람도 없고 새로운 정부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다 하루만 지나면 다 헌 것이 되고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새 것은 없습니다. 잠깐이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새 정부도 얼마 안있으면 헌 정부가 되서 물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정부를 몇 년 전에 모두 새 정부라고 했지마는 지금은 헌 정부가 되어서 산산조각이 나서 어디로 가야할지 갈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인생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을 기대하면 우리는 항상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전에 장로님이신 우리 김영삼 대통령이 80생신을 맞이해서, 생일에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기도 순서를 저에게 맞겨서 저도 가서 기도를 하고 같이 앉았습니다.
대통령 당선 된 분도 오시고 모두 속된 말로 ‘내놓으라’고 하는 그런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YS 전대통령, 장로님께서 나오셔서 한 말씀을 했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삼국지에 나오는 백마가 쫙--- 지나 가는데, 창문으로 한 여자가 내다 보는 것과 같다.’라는 겁니다. ‘앞에 있는 말들이 한 순간에 지나간다.’라는 겁니다. 한 순간에 백마와 같이 지나가는 것이 권력이라는 겁니다. 오래있었던 권력이지만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그 분 26살에 우리나라에서 최연소로 국회의원이 되어서 아홉 번 국회의원하고 야당 총재를 세 번까지 역임했으며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지나고 보니까 백마가 지나가는 거와 같더라는 거예요.
“해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옷도 입으면 낡아지는 거고 집도 들어가면 그 다음 부터 헌 집이 되는 거고 새 신랑 새 신부도 하룻밤 자고나면 헌 신랑 헌 신부가 되는 겁니다. 잠깐 이예요 잠깐 지나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기쁨은 잠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옷을 자주 사 입지를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설에만 딱 한 벌해주십니다. 섣 달 그믐 날 장에 갔다 오셔서 옷을 한 벌해 주시면 그 옷이 너무너무 좋아서 입고 설까지, 내일까지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친구들 있는데 자랑하려고 나가서 친구들하고 스케이트 타다가 물에 빠집니다. 그냥 좋아 가지고 막 같이 놀다가, 물에 빠지고는 물에 빠지고 나면 부모님께 혼날까 무서워서 걱정하고 이것 빨이 말려야 되겠다고 불을 피워가지고 말리다가 이번에는 다 태웁니다. 집에 와 가지고 ‘이 새끼야 고추 팔아 가지고 어떻게 산 옷인데 이렇게 망가뜨리냐!’고 그냥 얻어 터졌습니다. 옷, 새 옷 입었다고 자랑할거 없고, 새 정부라고 교만할거 없으며 새 집이라고 이 세상에 큰 소리 칠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새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는 세상에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분으로 인하여 새로워질 때 우리는 정말 새 옷을 입고 새 집을 짓고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이 새 옷을, 내 영혼의 새 옷을 갈아입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옛날 옷입니다. 썩은 옷이라고 오늘 말하고 있는 겁니다. 썩은 사람입니다. 냄새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은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영으로 지음받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우리를 새롭게 하는 창조의 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가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 낡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이 헌 옷이 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태양 하나를 보십시오. 언제 만들었는지 수 억 년 전에 만들어졌어도 태양은 항상 새 신랑과 같이 있습니다. 새 것입니다. 태양은 어제 태양이나 오늘 태양이나 억만 년 전이나 억만 년 이후나 항상 새로움으로, 오늘 처음 떠오르는 것 같이 우리를 밝게 우리를 비춰주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는 우리를 환~~~~~하게 태양이 비춰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산이 누추하거나 낡거나 썩은 것을 보셨습니까 옛날 산이 있고 새 산이 있습디까? 하나님이 만든 강을 보십시오. 물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을 보십시오. 버리는 자연이 있습디까? 실증나는 자연이 있습디까? 억천 만 년이 자나가도 얼마나 새롭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실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인간이 만든 것은 점점 이 세계와 자연을 오염시키지마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창조할 때에 우리의 심령은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에서 냄새나는 옛 사람에게서 우리를 새로운 몸으로 창조하시고 단장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우리를 새롭게하는 것입니다. 부모로 부터 태어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썩을 것으로 태어난다.라고 했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를 보고 죄인이라 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특별한 죄인 없습니다. 내 안에 다 모두 죄를 가지고 똑같은 욕심, 정욕, 미움, 시기, 질투, 온갖 음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두 번째 태어나는 사람일 때만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한 번 어머니 아버지로 부터 태어난 이 생명은 이 세상에 속하였습니다.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오리새끼가 물을 향하여 뛰어 나가듯이, 악어새끼가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물을 향하여 가듯이 강을 향하여 뛰어 갑니다. 우리 인간도, 부모로 부터 태어난 생명은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세상을 취하기위해 욕심과 정욕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태어나는 생명, 위로부터 태어나는 생명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 생명은 본능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에 나오는 그 날 부터 교회가 좋아지고 말씀이 좋아지며 영혼이 아름다워져서 거룩하신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과 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너희는 위엣것을 생각하고 아랫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생명은 죽지 않습니다. 첫 번째 생명은 죽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생명은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생명, 두 번째 태어나는 생명, 두 번째 갈아입는 이 옷은 쇠하여지지 않습니다.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죄악 속에 살아도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오물 속에 살아도 이 영혼은 깨끗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깨끗하려고해도 육으로 부터 태어난 생명은 더러워지고 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바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종교입니다. 심령을 살려주는 종교입니다. 내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거듭난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좋아 지려면 우리 영혼이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좋아 지려면 우리 영혼이 새로워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부터 거듭날 때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새로워질 때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는 디엘 무디 라든지 이런 분들이 일어나서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 미국은 사회가 새로워지고, 정치가 새로워지고 경제가 국가가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레를 통해 옥스포드에서 영적 부흥이 일어나서 심령을 새롭게 할 때, 영국은 새로워 질 수 있었습니다 세계 앞에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영혼은 그대로 인데, 영적인 우리 심령은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는데 개혁을 사십 년 오십 년 계속 부르짖어 봐야, 앞으로도 몇 천 만번 부르짖어 봐야 우리는 나라를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점점더 우리의 가정은 파괴 될 것이고, 점점더 우리의 삶 강퍅해져서 범죄는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텍사스 주에 이십 년 전에는 교도소가 세 개 였는데 지금은 스물 네 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범죄 교도소밖에 점점 더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술만 더 많이 먹고 자살만 더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동성연애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이번에 국회 통과까지 하려고 하는 것보면 우리나라는 보통 속도가 빠른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마약도 점점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정신병자도 점점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하나님께로 부터 지음 받은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지 않고 세상으로 가니 썩을 수밖에 없고, 돌 수밖에 없으며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를 치료 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새 집보다 더 좋은 집 새로운 자동차보다 더 좋은 자동차는 내 영혼이 새로워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잘 모릅니다 세상을 바꾸자 법은 바꾸자 제도를 바꾸자 인테리어를 통해서 무슨 가전 제품을 바꾸자, 바꾸자, 전부 자동차 바꾸자, 마누라도 바꾸자, 전부 바꾸자.바꾸자.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영광 여자 중.고등학교를 15년 전에 인수할 때에 4년제 대학에 한 명도 못들어 갔습니다. 한 학교에서 대학에 한 명도 못들어 간 학교, 정말 모두 그저 마지막에 누구든지 들어오면 문 열어주는 그런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이 이름 듣기 싫어하고 창피해하고 이 이름 자체를 모두가 안된다고, 모두 이름부터 바꾸자고 그랬어요 그래도 저는 ‘아닙니다. 이름 이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안에 정말 바꿔야 할걸 바꿔야 됩니다.’라고 차츰차츰 접근했는데, 그 학교가 지금은 전국에서 명문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최고 점수 받은 245명 가운데 우리 학교에서 3명이 나왔습니다. 전국에서 245명 뽑는 그 인원에 이 학교에서 3명이 나왔다니까요. 안놀래시네 좀 놀래보소 좀 놀래봐요 거 보세요 금년에도 연.고대에도 그 작은 학교에서 15명이나 갔습니다. 그 시골 아이들은 서울대나 그런데 보다 더 많이 가는 학교가 있습니다. 교육대학을 가는 거예요 전부 교육대학을 가고 경찰대학, 사관학교 이런 곳엘 갑니다. 그거요 어렵습니다. 여학생들이 사관학교나 경찰대학 가려면, 서울 법대에 갈만큼 아주 우수한 수준이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뭘 바꾼다.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앞에서 바로 서면 좋은 학교되고 영적으로 바로 서면 좋은 나라되고 좋은 가정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교회가 뭐 별로 크지 않지만 한 육백 베드되는 병원,그 병원은 전설의 고향입니다. 몇 년전에 에어콘 시설도 하나 없는 병원, 바람, 비가 다 새는 병원 전기 선이 하나도 감춰져 있지 않고 다 늘어져 있는 병원, 운영하는 분들이 다 싹 빼먹고 그냥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놓은 이 병원, 선교사들이 세워놓은 이 병원을 우리가 하나님앞에 어찌할 수 없어서, 피할 수 없어서 우리가 받았습니다. 빚더미에 올라있는 병원, 완전히 폐품된 병원,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병원, 거미줄이 다 쳐져있는 병원이었는데, 그러나 이 병원은 지금 일류 병원이 되었습니다. 입원하려고 여기까지 전화오고 전부 기다리고요, 유명한 의사들도 거기와서 치료받고요, 유명한 대학병원 의사들도 거기와서 치료 받습니다. 왜 다 인정해 주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거미줄있다고 말하지 말라고요. 하나님앞에 믿음으로 우리가 새로워져서 하나님앞에 바로서서 들어가면 정말 나라도 새로워지고 다 썩은 것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소생하는 종교예요, 능력의 종교예요, 치료의 종교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은 그대로 두고 오늘 많은 사람은 다른 곳에만 문제가 있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게만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줄 알아야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 이 세상 다 살릴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17장 9절에서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합니다. 사람마음이 제일 부패했습니다. 썩었다 썩었다해도, 사람같이 썩은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자와 짐승이 악하다해도 사람같이 악한게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사람이 제일 잔인합니다. 내 안에 온갖 독사의 굴이 내 안에 있고 온갖 무서운 짐승들이 내 안에 다 살고 있는걸 알아야합니다. 내 안에 온갖 무기들이 있습니다. 칼이 있고 독가스가 있고 핵무기가 있고 췌루탄이 있고 총 칼이 내 안에 미사일이 내 안에 있는걸 알아야 합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입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무엇을 하겠다.라는 것입니까! 여러분 진실하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죽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고 자식을 죽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게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 겸손히 내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내가 악한 줄 알고, 내가 부패한 줄 알고 ‘주여, 나를 치료하여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주님 앞에 접근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주의 성령은 여러분을 새롭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성령의 불이 내 정욕의 불을 태우고 교만의 불을 태우고 내 더럽고 추한 모든 오물들을 성령이 태우고 성령이 씻겨줄 줄로 믿습니다. 주 예수가 내 마음에 들어올 때, 주 성령이 내 안에 오실 때 역사하시면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던 온갖 무기들은 다 떠나가고 총 칼은 떠나가고 내 안에 사랑의 마음이 열려져서 사랑의 장미꽃이 내 안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깨끗한 사랑이 내 안에서, 절망과 낙심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이리들은, 맹수들은 모두 떠나가고 내 안에 초장에 양떼들이 뛰어노는 것입니다. 아, 깨끗한 어린 양이 어메, 어마마, 그러고 내 안에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뉴질랜드가 보니까 여기가도 양, 저기가도 양, 앉아도 양, 서도 양, 보는 것마다 양,눈만 뜨면 양, 금방 태어난 새끼들이 너무 귀엽고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휴, 여기와서 양 길렀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드는데, 주님께서 ‘야, 너는 양이 그렇게 많은데 뭐하러 여기와 기르냐!’라고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사랑스런 동산이 여러분 마음에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내 안에 독가스는 다 제거 됩니다. 내 안에 썩은 것은 다 지나가고 새로운 살아있는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썩어져가는 구습은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에베소서4장 22절~ 말씀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할레루야! 예, 그렇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방향이 위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은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시민권입니다 내 속사람의 고향인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내 육신이 부모로 부터 태어난 이 땅의 시민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평양 과기대에 우리 총장으로 계시는 김진경박사님이 지난 주일 여기 오셔서 저하고 식사하면서 그럽디다 나는 시민권 3개 가지고 있다고 하나는 미국 시민권, 하나는 북한시민권, 하나는 남한 시민권, 우리나라 시민권 이 모두를 정부로 부터 합법적으로 받았답니다. 참 편하답니다. 북한에 가서도 미국 시민권 가지고 있으니 저 북한이 마음대로 못하고 좋답니다. 나 건들면 미국이 가만히 안있는다.라는 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미국은 또 북한에서 활동 잘할 수 있구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많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여기와서도 모든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훨씬 좋은 거지요.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고 땅에서도 하늘에 보호를 다 받고 또 여기는 여기대로 잘 사니 일거 양득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하늘에 시민권 가지고 잘못 될게 없습니다.
금년에 모든 남자들의 소원 1호가 뭔지 아세요? 금년에 바라는 첫째가 뭐냐면요, 나 금연 했으면 좋겠다.예요. 뭐하러 그걸 배워가지고 그걸 끊으려고 그렇게 소원을 할 정도입니다. 하늘에 시민권 가지면 저절로 안피우는데, 그까짓거 피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하늘에 시민권 가지면 술은 저절로 안먹는데 성령을 먹으니까 술은 먹으면 토해지는 겁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술집은 저절로 안가는 겁니다.
할레루야!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면 죄악에 빠지지 않습니다 멸망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사탄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왜?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 어떤 사람은 불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죄짓는데는 불편합니다. 마귀의 길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의롭고 성공하는 길에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행복의 길은 열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죄의 길 잘못된 길을 걸어가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시민권 교회생활 내가 집사다 장로다 이래서 손해될 일은 하나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생활 잘하는 복된 성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나와 민족 내 이웃을 주님에게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민족이 새로워지고 우리나라 새로워지고 좋은 나라, 좋은 사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해야 되는 겁니다. 사람의 문제는 아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박지만군 잘 아시잖습니까? 박대통령 아들되는 박지만군이 너무 낙심하고 여러분도 입장 바꿔보십시오.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제 정신이었겠어요! 술먹고, 마약 복용하다가 감옥에 몇 번 가고 아무리 도와줘도 안되고, 이 사람을 건질려고 모두가 국가적으로 우리 모두 염려해도 안되잖아요. 사람을 누가 새롭게해요 안되는 겁니다. 결심으로 됩니까! 지식으로 됩니까! 돈으로 됩니까! 안되는 겁니다. 그랬는데 이 분 담당한 변호사가 이 분을 주님에게로 인도했습니다. 20년 걸려도 안 되던 분이 점점 더 안되던 분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정신병자가, 우리나라에 300만 알콜 중독자가 있습니다. 300만 고치지 못합니다 그냥 가두어 놓고 주사놓고 그러는거지 그 사람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수 없습니다. 이 분 보세요. 교회 나오니까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으로 새로워져서 죄사함 받고, 성령 충만하니 용기가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니까 마약에서도 해방되고 결혼해서 아들도 잘낳고 사업도 지금 멋지게 잘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분이 대통령 되었으면 좋겠더라구요. 미국 부시 대통령 아들도 막 그러다가 대통령 되었는데요 뭐 사람이 과거에 그런 상처는 누구나 있는 겁니다. 지난날에는 그랬어도 예수 믿고 새 사람되면 다 되는 겁니다. 사람 태어날 때부터 바로 사는 사람 어디있습니까, 거기서 나오면 되는 겁니다. 기독교는 출애굽, 탈출하는 엑소더스입니다. 저도 어렸을때 화투 얼마나 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돈 훔쳐 도망치고 그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교인들 잘못된 교인을 절대로 뭐라 그러지 않습니다. 나하고 사촌이다! 다 비슷하지 특별한 사람 어디있나! 특별한 의인도 없고 특별한 죄인도 없습니다. 다 비슷합니다. 우리가 주님에게로 가느냐 안가느냐! 그게 중요한 겁니다. 저도 거기서 탈출한 겁니다. 주님에게로 나간 겁니다. 나가서 다 그런 생활 정리하고 새 사람되는 겁니다. 성령이 내게 역사하면 아예 그런거 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믿으시면 아멘! 좀 아멘, 해봐요 좀...
오늘도 나오신 여러분, 자녀를 부모가 바로 인도하려고 그러지 마시고 주님께로 인도하세요. 우리 교회에 선생님도 많습니다. 조사해 보니 교장 선생님도 몇십명, 삼십 명,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많습니다. 학생들 좀 주님에게로 인도하세요. 선생님이 무슨 여러분도 방황하면서 애들 어떻게 바로 인도합니까! 주님에게로 좀 인도하세요. 예, 우리 교회도 변호사, 판·검사, ‘너무 내가 다 한다.’ 그러지 말고 주님에게로 인도해 보세요. 주님만이 참 판사가 되시는 거예요. 나는 죄인을 만드는 판사이지만 예수님은 의인을 만드는 판사입니다. 우리 교회 의사들도 많습니다. 치과의사, 병원하는 분만 서른 여덟가정입니다. 많습니다. 수많은 의사 교수들 수 백 명씩 다 있습니다. 여러분 이를 치료할 때도 그 이 선생님이 이빨문제보다도 속에 이빨이 다 썩었습니다. 그 심령의 이빨 치료해야 됩니다. 좀 이렇게 해서 주님에게로 인도해 보세요. 모두 복음을 증거 해야합니다. 사람은 다 우리 안에 이 죄가 있습니다. 악한 생각이 있습니다. 더러움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 새 이빨 갈아 넣기를 바랍니다. 우리 동네 한의원 동서 한의원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약만 끓이는게 아닙니다. 신약, 구약 끓여 가지고 먹어야 이게 모두 좋아지는 겁니다. 할렐루야! 한약 먹는다고 다 고치는게 아닙니다. 병원 원장님 그걸 좀 아셔야 됩니다. 교회에 나가서 성경 끓여 먹으면 말씀 끓여 먹으면 완전히 새 사람 됩니다. 건강해집니다. 할레루야!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저자,조엘 오스틴이라고 하는 분이 지은 책이 있습니다. 거기보면 가장 무서운 적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무서운것, 나를 망치는것은 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다 있는 겁니다. 모두 거기 있는 그 지도를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겁니다. 입력된 것 때문에 문제입니다. DNA가 문제입니다. 이건 치료가 안되는 겁니다. 우리가 다 아담의 자손이고 가인의 자손입니다. 남이 잘되는거 싫어하는 그런 자손으로 태어나서 육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자유함을 얻는 길은 성령이 함께 하셔야 됩니다. 그전에는 죄를 짓는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얼마나 모두가 죄짓는 일에 적극적입니까! 술 하나 먹는 것도 돈 빚내 가지고 도박하는 것도 다 빚내 가지고 하는 겁니다. 모두 시간, 몸, 마음 다 바치고 다 버리고 거기에 빠지는 겁니다. 믿음의 생활에도 좀 적극적으로 하기를 바랍니다 이건 잘되는 길이요, 이건 영생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요, 무한한 축복의 길인데, 교회생활 소극적으로 하지 말고 새해 적극적으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믿고 나오십시오. 그러면 좋아질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예배드리고 감사하고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해서도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남에게 해주지 말고 남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불쌍히 여기고 새 사람 새로 지음을 받은 우리 심령이 이웃이 잘되는 것을 좋아 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돌아옵니다. 그건 좋게 돌아옵니다.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남을 미워하는 것도 돌아옵니다. 이것은 내게 엄청난 고통으로 돌아옵니다. 많은 사람은 남을 비방하고 남을 비판하고 남을 욕하고 시기 질투하면, 그게 남에게 가는 줄 아는데 몽땅 돌아옵니다 그저께 우리 윤박사님이 그랬잖아요 ‘남에게 말하면 손가락 하나만 나가지마는 세 개의 손가락이 돌아온다’는 겁니다. 보십시오. 남을 헐뜯으면 그게 세배로 내게 돌아오는 겁니다. 오늘 많은 사람 자기도 의인이 아니면서 남을 얼마나 뜯어내고 남을 얼마나 비난하고 누구는 어떻데..., 누구는 뭐래... 그러면 이것이 전부 자기 자녀에게로 돌아오고 자기 집안으로 돌아오는걸 모르는 겁니다. 사울 왕이 남을 미워하다가 자기 집안 완전히 망했고 아합 왕이 남 시기하다가 다 자기 망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 감옥에서 다 탈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보여준 교훈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는 그런 식으로 살면 안됩니다. 남 헐뜯고 남 비난하고 이런 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감옥입니다. 자기 자신이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 삶인 것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섯 개의 감옥이 다 있다고 합니다 첫째의 감옥은 자기도취의 감옥입니다. 자기 잘난 줄 알고 교만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 병에 걸린 감옥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 약점만 보고 비판하는 겁니다. 이게 감옥입니다. 감옥. 세 번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 불만하는 것은 감옥입니다. 자기 집안에 감옥을 많이 두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네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자꾸 옛날 생각하고 옛날 좋았다고 지난 날을 생각하는 겁니다. 사랑도 옛날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의 사랑만 사랑인 것입니다. 옛날 애인 만나고 학교 다닐때 친구들 만나가지고 그러지 마세요. 오늘 내 남편만이 애인이고, 그 외에는 애인이 아닙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고 남에 것만 귀하게 생각하고 남의 것만 자꾸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겁니다. 여섯 번째의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공연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는 사람, 이게 모두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헐뜯으면 이게 전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보세요. 권력이 늘 비판하는 사람 모두 대통령되었습니다. 하지만 비판했던 사람 헐뜯은 사람은 모두가 망했습니다. 다-- 망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해 주고 사랑해 주고 격려해 주고 이렇게 되야 좋은 나라 되는 거지요 할렐루야!
이제 우리나라는 새 바람이 불어야 됩니다. 헐뜯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 교훈은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산산조각 망했습니다. 세상에 농사를 지어도 일 년 지으면 먹을 것이 있고 집에 가져갈 것이 있는데 몇 년 동안 정치해가지고 요렇게 산산조각 나는 권력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도 자기 있을 곳도 없이 망하는 그런 정치가 어디있습니까! 그거 어디서 왔느냐? 자꾸 남 뜯어내다 그렇게 된겁니다. 이제는 그런 시대는 지나 갔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잘되고 남을 도와 주는 자가 잘 되는 걸 믿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나오신 모든 성도들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시고, 새 마음, 새 영혼, 새 옷, 입고 이 시대를 새롭게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32 / 김명혁 목사
제가 2010년부터 매년 한 번씩 오산 초대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오늘 여기 다시 와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축복이 윤종호 목사님과 오산 초대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윤종호 목사님이 작년에는 "세월호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작년 5월 18일 여기 와서 "세월호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은 “새롭게 살자”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와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교하기가 매우 어려운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7년 동안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목회자들이 부탁하는 제목의 설교를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국교회 앞에서, 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방문하는 교회의 신자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하곤 했는데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들이 저에게는 매우 귀중하고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들이 되곤 했습니다. 오늘 20 여명의 신자들이 있는 아주 작은 오산 초대교회에 와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는데 이 설교도 정성을 다해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재부터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우리 신자들의 삶 속에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과 고전15장에서 이 세상에는 대표적인 두 사람이 존재하는데 한 사람은 죄를 범한 인류의 조상 아담이고 또 한 사람은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는 둘째 아담 예수님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모두 아담이 범한 원죄를 몸에 짊어지고 즉 “옛 사람”의 모습을 몸에 지니고 평생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흘린 대속의 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으면서 즉 “새 사람”의 모습을 몸에 지니고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말씀을 읽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5:17).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고전15 장 말씀을 읽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15:45,47). 결국 우리 신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 속에는 “옛 사람”인 아담의 흔적과 “새 사람”인 예수님의 흔적이 함께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죄악의 세력과 의의 세력이 함께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이 짊어지고 살게 된 고통스러운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신자들이 짊어지고 살게 된 이 고통스러운 운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신자들이 우리들 속에 공존하는 죄악의 세력과 함께 의의 세력을 함께 지니고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고통스럽게 살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악의 세력과 전쟁을 치르는 자기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처절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여기 “곤고한 사람” 이란 말은 영어로는 “wretched man”인데 “저주 받을 사람” 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죄악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부정적인 말들을 총 동원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주 받을 곤고한 사람” 이란 말과 함께 “만물의 찌끼” 라는 말과 “죄인 중에 괴수” 라는 부정적인 말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13).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저는 9년 전인 2006년 9월 14일 새벽 강변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절망적으로 묘사한 처절한 죄 고백에 깊은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글을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 글이 뉴스파워에는 9월 14일에 실렸었고 국민일보에는 9월 21일에 실렸었는데 그 글을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오늘 새벽기도회 시간에 성도들과 함께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읽으면서 가슴과 눈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늘 아침 차를 타고 교회로 오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눈물이 내 가슴과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처절하게 죄를 고백한 사람이 정말 사도 바울 자신이었을까. 일부 성서 학자들은 그 죄 고백이 사도 바울 자신의 죄 고백은 아니고 중생하지 못한 자나 일반 죄인의 고백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필자가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성서학자 박윤선 목사님은 그것은 사도 바울의 죄 고백이라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중생한 자의 영혼도 범죄한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나는 오늘 새벽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한 마디 한 마디 읽으면서 “어쩌면! 어쩌면!” 하면서 나 자신도 감동에 떨며 탄식하고 있었다. 삼층 천에 올라갈 정도로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한 사도가, 그의 손수건이 닿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물러갔던 가장 큰 능력을 지녔던 사도가, 어떻게 그런 처절한 죄 고백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가슴과 목이 메어 어쩔 줄 몰랐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이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4,18,21,24). 기독교는 값싼 은혜를 파는 종교가 아니다. 만사형통을 빌어주는 종교도 아니다. 그럴 듯한 선으로 포장해주는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와 절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종교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스러운 모습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하는 종교다. “내 속에 정한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습니다”(다윗)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사도 바울)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아우구스티누스).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란체스코). “나는 버림 받을 죄인입니다”(루터).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지금 우리는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 모른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한탄했던 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모두 너무 의인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 크게 보는, 너무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이상한 가슴을 지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메마른 나의 가슴에 사도 바울이 가슴에 지녔던 처절한 죄 고백과 탄식의 수 백분의 일이라도 주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길선주 이성봉 김치선 목사님들이 지니셨던 처절한 죄 고백과 탄식을, 나도 가슴에 지니면서 남은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소원한다. (2006.9.14)』 이것이 제가 9년 전에 눈물로 쓴 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 “옛 사람”의 흔적과 “새 사람”의 흔적을 함께 지니고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비극적인 일이고 불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절망적인 일이고 불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우리들 속에 거하는 죄악의 세력과 싸우느라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에서처럼 야곱처럼 삼손처럼 다웟처럼 가롯 유다처럼 베드로처럼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죄악의 세력과 싸우느라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하는 것이 우리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천사들처럼 죄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산다면 우리들은 교만해지고 하늘까지 높아지려고 하는 위태로운 존재들이 되기가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학자들은 천사가 교만해져서 사탄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14:12에 나오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역사적으로는 교만했던 바벨론 왕을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는 교만했던 천사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사야14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읽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14:12-15). 이 말씀은 누구든지 자기 분수를 모르고 교만해서 높아지려고 하면 음부에 빠치우는 저주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영적인 교훈을 전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위선에 쌓인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무서운 지옥의 저주를 선언하시기도 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사실 자기의 쥐꼬리만한 선을 자랑하는 위선에 쌓인 바리새인들보다 더 위태로운 존재들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주 넘어지는 죄인들이 오히려 덜 위태롭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에 쌓인 바리새인의 기도와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다음 죄인인 세리를 귀하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우리 신자들이 우리들 속에 거하는 죄악의 세력과 싸우느라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때로는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하는 것이 우리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에게는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한 경험이 오히려 필요하고 유익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에게도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한 경험이 오히려 필요하고 유익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너무 이상한 복음이고 너무 이해하기 힘든 역설적인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고통스러운 영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비극적인 일이고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를 받고 또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렇다고 맨날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롬6:1에서 이렇게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결국 사도 바울은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셋째로, 우리 신자들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 영적인 전쟁을 계속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는 일입니다. 여기 “벗어버린다”는 말은 “내어버린다” “없애버린다” 또는 “죽여버린다” 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사람을 죽여버리는 처절한 영적인 전쟁을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과 우리 몸에 가득한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는 일이 너무너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영적인 전쟁을 평생토록 계속해서 치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9:26,27). 사도 바울은 자기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날마다 죽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영적인 전쟁을 계속해서 처절하게 치르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겼다는 영적 전쟁의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그리고 디모데와 우리들을 향해서 영적인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라고 분부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 영적인 싸움을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도다”(힘12:4). 사도 바울은 오늘 엡4장 본문에서 옛 사람을 내어버리고 없애버리고 죽여버리면서 새 사람을 옷 입듯이 입으면서 살라고 권면하면서 네 가지 종류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네 가지 종류의 새 사람을 입으라고 구체적으로 권면했습니다.
첫째는 거짓을 버리고 참 된 것을 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4:25). 옛 사람은 거짓을 좋아합니다. 속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귀는 거짓을 좋아하고 속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새 사람은 진실을 좋아합니다. 솔직한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좋아하시고 솔직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보다 거짓과 속이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고 합니다. 깊이 반성하여야 할 부끄러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새로운 삶을 살려면 거짓을 버리고 죽이면서 진실해지도록 노력을 하여야 하고 솔직해지도록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거짓된 믿음과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소망을 내어버리고 진실한 믿음과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소망을 지니도록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거짓은 자기를 죽이고 이웃을 죽입니다. 진실은 자기를 살리고 이웃을 살립니다. 진실과 솔직을 지닐 때 우리는 울면서 회개도 하고 이웃을 끌어안고 울게도 됩니다. 거짓을 지닐 때 우리는 위선자가 되고 남을 비난하고 정죄만 하게 됩니다.
둘째는 분을 내거나 품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 분을 장시간 품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분을 장시간 품으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되고 해가 지도록 품으면 마귀가 틈을 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시편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37:8). 옛 사람은 분을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화를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귀는 분을 내는 것을 좋아하고 화를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새 사람은 참는 것을 좋아하고 온유한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는 것을 좋아하시고 온유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사도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하면서 인내와 온유를 강조했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1,12). 분을 품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마귀에게 넘어가기가 쉽고 참고 온유함을 지니는 사람은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가게 되고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인내와 온유함을 지닐 때 이웃을 절망에서 소망으로 끌어 올리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셋째는 도적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도적질한다는 것은 물질과 명예와 권리에 대한 탐욕을 품고 그것을 쟁취하려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부터 물질과 명예와 권리에 대한 탐욕을 지니고 도적질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앞을 떠나 놋 땅에 거하면서 성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그 후손들은 두 아내를 취했고 수금과 퉁소 등 악기를 만들었고 날카로운 동철로 기계와 무기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벽돌과 역청으로 성과 대를 하늘에 까지 닿게 하는 바벨탑을 쌓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한이 없습니다. 작은 예수라고 불리던 장기려 박사님은 인간의 탐욕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했는데 그는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인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톤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자본주의와 물질의 노예가 된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 말인지 모릅니다. 자본주의적인 맘몬이즘이 세월호의 참사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부귀영화를 버리고 가난하고 검소하게 그리고 착하게 살았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던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은 나의 애처이고 고난은 나의 스승이라고 고백 하면서 청빈과 무소유와 사랑의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짊어지고 청빈과 무소유와 착함의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 한 가지 방법은 예수님과 신앙의 선배들을 닮으면서 탐욕을 버리고 가난과 고난을 사모하면서 제 손으로 수고하면서 사랑과 선한 일을 힘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는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우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습관과 인격과 운명이 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사도 바울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고 권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엡 4장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성경은 마음과 중심을 중요하게 보지만 동시에 입술의 말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우리들이 말 한 마디를 잘못하므로 성령님을 탄식하시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말 한 마디를 잘 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끌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름다운 말 다섯 마디를 자주 하자고 “미언 오언: 고미사뭘보”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일도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 아름다운 말은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뭘 해 드릴까요?” “보고 싶습니다” 라는 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들이 더러운 말을 함부로 하므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마귀를 기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격에 피해를 입히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말을 조심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으라고 권면하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30절)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악들인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모든 악의를 벗어버리고(31절) 선의 리스트인 인자와 긍휼과 용서를 나타내면서 살라고 권면했습니다(32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0-32). 여기서 인자와 불쌍히 여김과 용서를 강조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형식적인 종교도 아닙니다. 구체적인 종교이고 실제적인 종교입니다. 이론의 종교가 아니고 삶의 종교입니다.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실천적인 종교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인격적인 삶의 종교입니다. 세상과 유행을 따라가는 종교도 아닙니다.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성공지향적인 종교도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과 고난을 귀중하게 여기는 종교이고 청빈과 무소유를 귀중하게 여기는 종교이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착함을 강조하는 삶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 프랜시스를 존경하고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을 존경하고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권면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옛 사람의 흔적인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처절한 영적인 전쟁을 계속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의 처절한 영적인 투쟁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의 처절한 영적인 전쟁이 우리들의 영적인 전쟁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사도 바울의 구체적인 권면을 받아드리면서 거짓을 버리고 참 된 것을 말하기를 힘쓰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분을 내거나 품지 말고 인내와 온유를 지니고 살기를 바랍니다. 도적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힘쓰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말고 선한 말을 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모든 악의를 벗어버리고 인자와 긍휼과 용서를 나타내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유혹의 욕심과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에베소서 4:22-24 / 배진기 목사
유혹의 욕심과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에베소서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사람들은 누구나 새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새 것만을 추구할 뿐 벗어버려야 할 옛
것을 청산하지 않기 때문에 겉모습만 잠시 다라질 뿐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변질
이 되고 부패하고 냄새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아름답고 보배로운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기 위해 우리는 벗어 버리는 일과 다시 새롭게 입는 일을 끊임없이 계속
해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제 2015년의 중간지점인 6월을 맞았습니다. 우리의 새로움을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
하면서 새롭게 되기 위해 먼저 지난 반면의 누더기들을 벗어버리기를 우리 같이 결단합
시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과 구습들을 벗어 버립시다!!!”
그렇다면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정돈 하면서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유혹의 욕심과
구습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1.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거짓을 과감하게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은 거짓으로부터 옵니다. 거짓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구습은 거짓입니다. 거짓은 죽을 때까지 따라오
는 가장 무서운 유혹의 욕심입니다. 거짓은 마귀의 가장 큰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마귀
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요한복음8:44에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
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
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범죄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가 거짓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에덴동산의 하와를 유혹 할
때에 거짓으로 유혹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
적하여 “결코 죽지아니하리라”고 거짓말로 속이며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라고 유혹
하였습니다. 마귀는 거짓으로 유혹을 했고 인간은 그 유혹의 욕심을 따라 죄를 범하였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거짓을 불러오는 유혹의 욕심을 멀리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거짓의 역사는 우리 안에 있음을 알고 깨달아 내 안의 유혹의 욕심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에게는 거짓의 본성이 남겨져 있습니다. 유
혹의 욕심을 좇는 우리의 가장 무서운 구습은 거짓입니다.
2015년을 지나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 거짓의 모습이 있다면
과감하게 벗어 버립시다.
2.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탐욕과 더러운 정욕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이 일어나 자리를 잡는 또 하나의 구습은 탐욕과 더러운 정욕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소망하는 바가 있으며 욕구와 욕심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소망
이나 욕구는 사람을 활기차게 만들어주고 의욕을 일으켜 능력을 발하게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분수를 넘어선 욕구와 욕심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더러운 정욕에 잡히게 만들어줍니다.
탐욕과 정욕에 사로잡히면 마치 사람이 짐승 같은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곤 합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임으로서 탐욕과 정욕의 거짓 선지자들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5에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
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다윗이 마음의 더러운 정욕을 이기지 못하자 충성된 신하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짐승처럼 탐하고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지혜롭고 현명하던 솔로
몬이 탐욕에 잡히니까 그 삶이 무질서해지고 방탕이 극에 달게 되었습니다.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탐욕과 정욕
의 유혹의 욕심을 우리의 심령에서 내쫓고 구습을 청산합시다.
3.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원망과 불평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이 가져오는 또 하나의 구습은 원망과 불평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 자체
가 감사의 조건이요 제목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
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제대로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없다고 해도 아무
리 부족하고 장애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은혜를 입은 백성들입니다. 감사드리는 삶을 살
아야 합니다. 오늘 주어진 것들에 자족하고 기쁨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디모
데전서 6:7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귀
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평하게 만들고 원망하게 만듭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가장 귀하고
값진 은혜를 입었음에도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서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 고생만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10에 “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
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며 어느 누구에게도 핑계를 대거나 원망하지 맙시다.
시편 37:8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가장 무서운 유혹의 욕심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망과 불평
입니다.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하면서 유혹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불평과 원망의 구습
을 깨끗하게 청산합시다.
4.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불안과 초조함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을 가져오는 네 번째의 구습은 불안과 초조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주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29:11에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
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라고 분명하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기본적인 뜻을 평안으로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평안을 끼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말
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는 당연히 생명과 평
안을 확신하고 언제나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어찌하든
지 우리를 불안과 공포와 초조함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욥이 여기에 넘어가서 자신의 내면 속에서 불안과 공포의 거짓 선지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고백하기를 욥기
3:25에 "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
구나"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반대로 욥에 못지않은 고난에 빠졌던 요셉은 언제나 그 심령 속에 평안을 유지하고
소망을 든든히 가짐으로 결국은 승리의 자리에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4:18에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
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하면서 주님 안에서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함을 물리치고
담대함의 백성으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깨끗하게 정리합시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주
어지는 유혹의 욕심과 구습이 바로 조급함입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유혹의 욕심과 구습
을 철저하게 청산합시다.
5.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좌절과 포기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으로 자리잡는 구습의 또 하나는 좌절과 포기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
나 고난과 환란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범죄하였기 때문이고 마귀가 우리를 멸망시키려
고 하기 때문이요 때때로 하나님도 우리를 연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우리 인생
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분명하게 주어진 당연한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은 승리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거짓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므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를 버리셨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할 수 없다. 망한다.
노력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우리를 좌절과 포기의 자리로 몰고 갑니다.
가룟 유다의 결과와 베드로의 결과를 비교해 보십시오. 가룟 유다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스승을 배반하고 무서운 죄를 범하였을 뿐 아니라 자존심과 체면이라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번민하다가 결국은 좌절하고 포기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유혹의 욕심에 넘어가 유다와 같이 스승을 배반했지만 유혹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부끄
러움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좌절하고 포기함이 문제이지 예수님은 여러분 때문에 좌절하시지 않으시고
결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10정탐꾼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결과를 비교해 보십시오.
같은 조건과 같은 환경 속에서 전혀 다른 삶의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내면 속
의 유혹의 욕심에 대한 자세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
백으로 삼고 좌절과 포기의 구습을 멀리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7-10에
서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
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
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담대한 승리자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승리의 백성들입니다. 고난과 환란은 우리를 더욱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유익에 대해
베드로전서 5:10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
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 고백하였습니다.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하면서 환경이나 조건에 대한 좌절과 포기의 구습을 물리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과 포기를 청산하고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담대함을 서
는 자녀들이 됩시다.
6.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미움과 분노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으로 자리 잡는 여섯 번째의 구습은 미움과 분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
서 억울한 일도 당하고, 오해도 받고, 손해도 보고, 이용도 당하며 삽니다. 그래서 우
리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떠나지 아니하고 자리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미움과
분노는 가장 무서운 거짓 선지자입니다.
병의 원인 가운데 대부분이 미움과 분노라는 사실을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는 폭력과 다툼을 낳고 결국에는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는 길로 가게 합니
다. 살인의 모든 원인은 미움과 분노에 있습니다. 가인의 살인이 바로 미움과 분노의 거
짓 선지자를 물리치지 못한 결과입니다.
미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므로 비참하게 된 사람이 바로 사울왕입니다. 고마워야 할
대상이, 사랑해야 할 대상이 미움과 분노의 대상이 되도록 역사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역사입니다.
빌립보서 4:5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라고 말
씀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필요해서 그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들을 미워하게 하고 그들을
향해 분노를 품게 하는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삽시다. 로마서 12:19에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
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고 말씀 하셨고 히브리서10:30
에도 "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용서를 먼저 행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며 복 받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3에 “누가 누
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성도로서 감격을 가지고 2015년 상반기 동안 우리 안에
자리 잡았던 모든 미움과 분노의 구습을 물리치고 사랑의 승리자들이 되어 상반기를 정
리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의 새롭게 됨을 기념하는 6월의 성찬을 나누면서 지속적인 새로움을 입기 위해 다
시 한번 모든 유혹의 욕심과 악한 구습을 과감하게 벗어 버립시다. 무엇보다 유혹의 욕
심으로 주어진 거짓의 구습을 청산합시다.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탐욕과 더러운 정욕
의 구습의 옛사람을 벗어 버립시다. 그리고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원망과 불평의 구
습을, 불안과 염려의 구습을, 좌절과 포기의 구습을, 미움과 분노의 구습을 물리치고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청산하여 지속적인 새로움으로 2015년의 하반기를 거룩
하게 살아갑시다.
벗어야 할 옷 입어야 할 옷
엡 4:22-24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의식주(衣食住)입니다. 옷을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대개 '식'(食), 즉 먹는 것을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옷이 없어도 집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 중에서 사람을 짐승과 구분시켜주는 것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의'(衣), 즉 옷 입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짐승도 인간과 똑같이 먹고 거처를 정해서 잠자지만 옷은 만들어 입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고 멋을 부리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인류 최초의 의상, 무화과 잎으로부터 하이테크 섬유 폴리에스텔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의상은 질과 패션의 변천을 거듭해 왔던 것입니다.
남성 신사복 만드는데 30년 이상을 바쳐온 이영재씨가 「옷은 사람이다」(은행나무, 2001)라는 책을 써서 화제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이영재씨는 옷이 그냥 멋이나 품위, 유행과만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배격합니다. 물론 멋진 옷은 우리의 품위도 높여주고 또 유행도 따라잡게 해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씨는 의복이 무엇보다도 신체의 건강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의상을 만들거나 고를 때 건강을 생각해서 반드시 자신의 체형, 체질, 직업, 환경 여건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령 이씨가 제시하는 체형별 디자인을 보면, 마른 체형은 품을 크게 하기보다 볼륨감 있는 소재와 무광택의 밝은 색 옷이 좋다고 합니다. 반면에 배가 나온 비만 체형은 불룩한 배 부위에다가 앞단추를 정하고 어깨와 엉덩이는 약간 넓게 살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또한 엉덩이가 큰 체형은 어깨를 키우고 여유있는 품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코가 작아서 콤플렉스를 느끼는 남성은 넥타이를 굵고 강렬하게 매면 약점을 커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씨는 체형과 체질에 맞고 센스 있게 옷을 착용하는 방법까지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옷은 인체 공학적인 관점에서 디자인이 될 때에만 멋과 품위는 물론이고 건강까지도 높여줄 수 있다는 것이 이영재씨의 지론입니다.
더럽고 추한 옷은 우리를 불결하게 만듭니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옷은 우리의 건강까지도 좀 먹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옷은 우리의 외모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착용감이 편한 옷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날 패션 디자인이 세계적인 각광(脚光)을 받고 있고, 운동 선수들의 옷을 만드는 스포츠 용구 업체가 크게 성행하는 이유는 모두 이와 같은 미와 건강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옷을 갈아입습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에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하지만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벗어야 합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잠잘 때까지 양복을 입고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또 요즈음과 같이 쌀쌀한 날씨에는 짧은 소매의 여름옷은 다 옷장에 들어가고 두꺼운 긴팔옷을 꺼내 입습니다. 이렇게 적당한 장소와 날씨에 맞게 옷을 벗고 입는 것은 우리의 사회 생활과 건강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입는 옷은 우리의 직업이나 사회적 신분을 보여주기 마련입니다. 하얀 가운을 누가 주로 입습니까? 대부분 의사나 약사, 간호사 등, 의료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아니면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과학자들도 흰 가운을 입습니다. 그러면 주로 까만 가운을 입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판사와 같이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아니면 교회의 목사들일 것입니다. 또 경찰관은 경찰복을 입고 군인은 군복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입는 옷은 우리의 직업과 신분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벗어야 할 옷들, 입어야 할 옷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인들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름답고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하여 어떤 옷들을 벗어 던져야만 할까요? 어떤 옷들을 입어야만 할까요? 우리가 입는 옷들이 우리의 신분과 지위를 보여준다고 할 때 도대체 어떤 옷들을 입어야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다음과 같이 무겁고 불편한 옷, 더럽고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 던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① 벗어야 할 옷 =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 (22절)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3:1; 4:1; 6:20 참조). 에베소에서 이방인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고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해서 에베소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회람용 서신(circular letter)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세상 풍조 속에서 살다가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여전히 옛날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갈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두루 읽어보도록 보낸 편지인 것입니다. 결국 에베소서는 옛날의 구습으로 되돌아 갈 가능성을 항상 안고 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준 서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 관해서는 바울 자신이 그곳에서 약 3년 간 선교활동을 했기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행 20: 31 참조). 먼저 에베소 교인들은 종교적인 구습으로 돌아갈 위험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주전 11세기에 건설된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서 특히 우상숭배가 창궐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의 우상, 아데미(Artemis) 여신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모신(母神, the mother-goddess)이었습니다(행 19: 23-41 참조). '아데미 여신의 전각'은 세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중 하나로서 길이가 128 미터, 폭이 66 미터의 면적 위에다가 높이 18 미터의 기둥 127개를 세워서 만들어진 건축물입니다. 어쨌든 간에 아데미 여신과 신전은 에베소 사람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서 이들의 일상 생활과 뗄래야 뗄 수 없도록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데미 여신을 비롯하여 여러 우상들을 섬기던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왔을 때 저들은 마음을 새롭게 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옛날의 종교적 습관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이 헛된 신을 섬기며 우상숭배 하던 낡은 습관의 옷을 과감히 벗어 던질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베소 교인들은 도덕적인 타락 한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에베소는 특히 수많은 극장들을 자랑하던 도시였습니다. 어떤 극장은 2만 4천 명 정도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이런 극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온갖 저질스러운 공연과 폭력적인 투기(鬪技), 음란한 쇼 등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에 있었던 '아고라'(Agora)라고 하는 큰 시장은 돈과 황금에 눈이 먼 장사꾼들로 가득 찼습니다.
이렇게 에베소 지역은 온갖 음행과 사기와 희롱과 황금에 대한 유혹, 더러운 말들이 판을 치는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이와 같이 저열(低劣)한 환경 속에 있던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들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나쁜 습관으로 돌아갈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와 같은 도덕적 구습의 옷을 깨끗이 벗어 던질 것을 또한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세상에서 행했던 온갖 못된 습관들은 '욕심으로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고 또한 우리를 속입니다'--"corrupt and deluded by its lust." 우리는 더 이상 이와 같은 욕망에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속아서는 안됩니다. 깨끗이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과거 예수를 믿기 전에 가졌던 나쁜 구습들을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마치 낡은 옷을 벗어 던지듯이 깨끗이 벗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새롭게 입어야 할 옷은 어떤 옷입니까?
② 입어야 할 옷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 (24절)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 던지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을 하기 전에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과거에 하던 모든 버릇들을 벗어 던지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옛날과 똑같은 마음, 똑같은 정신 상태를 가지고서는 절대로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름옷을 벗어 던지고 겨울옷을 입을 때에도 뭔가 마음을 새롭게 한 채 그렇게 합니다. "아, 이제 무더운 여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왔구나!" 하면서 뭔가 새 마음 새 뜻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다짐하면서 옷을 갈아입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사람의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변화되면 생각이 변화됩니다. 생각이 변화되면 행동이 변화됩니다. 행동이 변화되면 우리의 습관이 변화됩니다. 습관이 변화되면 마침내 우리의 운명이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이 변화되려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먼저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지 않고서는 결단코 새 사람의 옷으로 갈아입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어 새롭게 되면 우리는 새사람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이 옷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the new self, created according to the likeness of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의 옷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옷은 하나님을 따라 새롭게 창조된 옷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주어진 옷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심을 통하여 얻게 되는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어진 신령한 옷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새 옷을 입는다는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옛날에는 내 욕심과 내 유혹에 이끌려 되는 대로 살았다면 이제는 그렇게 살아서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날에는 남보다 더 잘살고 더 높아지고 더 유명해지고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사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옷을 입으면 그렇게 살아서 안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에 합당한 일인가를 묻는 생활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엡 4: 25 이하는 벗어야 할 옛 사람의 옷과 입어야 할 새 사람의 옷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를 하나하나 들고 있습니다. '거짓의 옷,' '분을 내어 죄짓는 옷,' '마귀가 틈타게 하는 옷,' '더러운 말의 옷,' '성령을 근심하게 만드는 옷,'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그 대신에 '참말의 옷,' '덕을 세우는 선한 말의 옷,' '인자의 옷,' '긍휼의 옷,' '용서의 옷,' '사랑의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골 3: 5절과 8절도 벗어야 할 열 가지 옷을 열거합니다. 우리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우상숭배)의 옷들을 벗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분'과 '노'와 '악의'와 '훼방'과 '입에서 나오는 모든 부끄러운 말'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골 3: 12은 입어야 할 새 옷 다섯 가지를 말씀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합니다!
<닫는 말: '영혼으로 갈아입는 옷'>
바울 신학에 있어서 '옷을 벗고 입는다'는 표현은 세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옛날에 입던 세상 옷을 벗고 새로운 세례 예복으로 갈아입고 물 속에 잠겼습니다. 이제 세례 받은 사람이 옛 옷을 벗고 새 예복을 입듯이 세례와 더불어 옛 자아가 죽고 새 자아가 태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인격과 본성, 의지가 변화되라는 말씀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고 겉옷만 화려하게 입어서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옷을 입어서 진짜 아름답게 되는 것은 우리가 속으로, 영혼으로, 마음으로 옷을 입을 때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세상 육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하늘의 신령한 옷을 입음으로서 사람들이 여러분의 변화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결론을 맺습니다. 22절과 24절을 다시 한번 주목해서 보십시오. 헌 옷과 새 옷이 아주 극명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벗어 던져야만 할 옷은 옛 사람의 옷입니다. 과거에 아직도 하나님을 모를 때 세상에서 내 멋대로 살았던 육신의 옷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옛 사람의 옷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옷'입니다. 이 옷은 반드시 벗어 던져야만 합니다!
정반대로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새 사람의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따라 사는 새 생활의 옷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 옷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옷'입니다. 이 옷은 반드시 입어야만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옷을 입고 계십니까? 옛 사람의 옷입니까? 새 사람의 옷입니까? 낡고 더러운 옷을 입으신 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벗어 던지십시오! 새롭고 깨끗한 옷을 이미 입으신 분들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입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사람들은 누구나 새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새 것만을 추구할 뿐 벗어버려야 할 옛
것을 청산하지 않기 때문에 겉모습만 잠시 다라질 뿐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변질
이 되고 부패하고 냄새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아름답고 보배로운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기 위해 우리는 벗어 버리는 일과 다시 새롭게 입는 일을 끊임없이 계속
해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제 2015년의 중간지점인 6월을 맞았습니다. 우리의 새로움을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
하면서 새롭게 되기 위해 먼저 지난 반면의 누더기들을 벗어버리기를 우리 같이 결단합
시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과 구습들을 벗어 버립시다!!!”
그렇다면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정돈 하면서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유혹의 욕심과
구습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1.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거짓을 과감하게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은 거짓으로부터 옵니다. 거짓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구습은 거짓입니다. 거짓은 죽을 때까지 따라오
는 가장 무서운 유혹의 욕심입니다. 거짓은 마귀의 가장 큰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마귀
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요한복음8:44에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
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
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범죄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가 거짓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에덴동산의 하와를 유혹 할
때에 거짓으로 유혹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
적하여 “결코 죽지아니하리라”고 거짓말로 속이며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라고 유혹
하였습니다. 마귀는 거짓으로 유혹을 했고 인간은 그 유혹의 욕심을 따라 죄를 범하였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거짓을 불러오는 유혹의 욕심을 멀리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거짓의 역사는 우리 안에 있음을 알고 깨달아 내 안의 유혹의 욕심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에게는 거짓의 본성이 남겨져 있습니다. 유
혹의 욕심을 좇는 우리의 가장 무서운 구습은 거짓입니다.
2015년을 지나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 거짓의 모습이 있다면
과감하게 벗어 버립시다.
2.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탐욕과 더러운 정욕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이 일어나 자리를 잡는 또 하나의 구습은 탐욕과 더러운 정욕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소망하는 바가 있으며 욕구와 욕심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소망
이나 욕구는 사람을 활기차게 만들어주고 의욕을 일으켜 능력을 발하게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분수를 넘어선 욕구와 욕심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더러운 정욕에 잡히게 만들어줍니다.
탐욕과 정욕에 사로잡히면 마치 사람이 짐승 같은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곤 합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임으로서 탐욕과 정욕의 거짓 선지자들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5에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
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다윗이 마음의 더러운 정욕을 이기지 못하자 충성된 신하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짐승처럼 탐하고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지혜롭고 현명하던 솔로
몬이 탐욕에 잡히니까 그 삶이 무질서해지고 방탕이 극에 달게 되었습니다.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탐욕과 정욕
의 유혹의 욕심을 우리의 심령에서 내쫓고 구습을 청산합시다.
3.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원망과 불평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이 가져오는 또 하나의 구습은 원망과 불평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 자체
가 감사의 조건이요 제목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
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제대로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없다고 해도 아무
리 부족하고 장애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은혜를 입은 백성들입니다. 감사드리는 삶을 살
아야 합니다. 오늘 주어진 것들에 자족하고 기쁨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디모
데전서 6:7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실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귀
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평하게 만들고 원망하게 만듭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가장 귀하고
값진 은혜를 입었음에도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서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 고생만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10에 “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
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며 어느 누구에게도 핑계를 대거나 원망하지 맙시다.
시편 37:8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가장 무서운 유혹의 욕심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망과 불평
입니다.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하면서 유혹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불평과 원망의 구습
을 깨끗하게 청산합시다.
4.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불안과 초조함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을 가져오는 네 번째의 구습은 불안과 초조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주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29:11에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
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라고 분명하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기본적인 뜻을 평안으로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평안을 끼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말
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는 당연히 생명과 평
안을 확신하고 언제나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거짓의 아비인 마귀는 어찌하든
지 우리를 불안과 공포와 초조함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욥이 여기에 넘어가서 자신의 내면 속에서 불안과 공포의 거짓 선지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고백하기를 욥기
3:25에 "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
구나"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반대로 욥에 못지않은 고난에 빠졌던 요셉은 언제나 그 심령 속에 평안을 유지하고
소망을 든든히 가짐으로 결국은 승리의 자리에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4:18에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
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하면서 주님 안에서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함을 물리치고
담대함의 백성으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깨끗하게 정리합시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주
어지는 유혹의 욕심과 구습이 바로 조급함입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유혹의 욕심과 구습
을 철저하게 청산합시다.
5.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좌절과 포기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으로 자리잡는 구습의 또 하나는 좌절과 포기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
나 고난과 환란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범죄하였기 때문이고 마귀가 우리를 멸망시키려
고 하기 때문이요 때때로 하나님도 우리를 연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우리 인생
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분명하게 주어진 당연한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은 승리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거짓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므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를 버리셨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할 수 없다. 망한다.
노력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우리를 좌절과 포기의 자리로 몰고 갑니다.
가룟 유다의 결과와 베드로의 결과를 비교해 보십시오. 가룟 유다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스승을 배반하고 무서운 죄를 범하였을 뿐 아니라 자존심과 체면이라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번민하다가 결국은 좌절하고 포기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유혹의 욕심에 넘어가 유다와 같이 스승을 배반했지만 유혹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부끄
러움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좌절하고 포기함이 문제이지 예수님은 여러분 때문에 좌절하시지 않으시고
결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10정탐꾼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결과를 비교해 보십시오.
같은 조건과 같은 환경 속에서 전혀 다른 삶의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내면 속
의 유혹의 욕심에 대한 자세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
백으로 삼고 좌절과 포기의 구습을 멀리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7-10에
서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
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
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담대한 승리자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승리의 백성들입니다. 고난과 환란은 우리를 더욱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유익에 대해
베드로전서 5:10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
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 고백하였습니다.
2015년의 상반기를 정리하면서 환경이나 조건에 대한 좌절과 포기의 구습을 물리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과 포기를 청산하고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담대함을 서
는 자녀들이 됩시다.
6.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미움과 분노의 구습을 벗어 버립시다.
유혹의 욕심으로 자리 잡는 여섯 번째의 구습은 미움과 분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
서 억울한 일도 당하고, 오해도 받고, 손해도 보고, 이용도 당하며 삽니다. 그래서 우
리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떠나지 아니하고 자리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미움과
분노는 가장 무서운 거짓 선지자입니다.
병의 원인 가운데 대부분이 미움과 분노라는 사실을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는 폭력과 다툼을 낳고 결국에는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는 길로 가게 합니
다. 살인의 모든 원인은 미움과 분노에 있습니다. 가인의 살인이 바로 미움과 분노의 거
짓 선지자를 물리치지 못한 결과입니다.
미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므로 비참하게 된 사람이 바로 사울왕입니다. 고마워야 할
대상이, 사랑해야 할 대상이 미움과 분노의 대상이 되도록 역사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역사입니다.
빌립보서 4:5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라고 말
씀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필요해서 그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들을 미워하게 하고 그들을
향해 분노를 품게 하는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삽시다. 로마서 12:19에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
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고 말씀 하셨고 히브리서10:30
에도 "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용서를 먼저 행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며 복 받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3에 “누가 누
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성도로서 감격을 가지고 2015년 상반기 동안 우리 안에
자리 잡았던 모든 미움과 분노의 구습을 물리치고 사랑의 승리자들이 되어 상반기를 정
리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의 새롭게 됨을 기념하는 6월의 성찬을 나누면서 지속적인 새로움을 입기 위해 다
시 한번 모든 유혹의 욕심과 악한 구습을 과감하게 벗어 버립시다. 무엇보다 유혹의 욕
심으로 주어진 거짓의 구습을 청산합시다.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탐욕과 더러운 정욕
의 구습의 옛사람을 벗어 버립시다. 그리고 유혹의 욕심으로 주어진 원망과 불평의 구
습을, 불안과 염려의 구습을, 좌절과 포기의 구습을, 미움과 분노의 구습을 물리치고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청산하여 지속적인 새로움으로 2015년의 하반기를 거룩
하게 살아갑시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 4:22-27 / 피종진 목사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에게 인도함을 받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에 좀 어리석고 미약해도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아래서 모든 일에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에 마귀가 우리 인간의 힘보다도 약하다면 성경에 마귀에 대해서 이렇게 경계하고, 틈을 타지 못하게 하고,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을 안했을 것입니다. 마귀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귀신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길 가다가도 '귀신 나온다'하면 어릴 때 '와'하고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는 사람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미혹도 하고, 또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사로잡아서 비정상적으로 정신이 돌게도 합니다. 마가복음 9:25에 보면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호령 소리에 귀신이 나가서 벙어리가 말하게 되고, 귀머거리가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탄은 여러모로 역사합니다. 마음을 병들게도 하고, 육체를 병들게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도 하고, 스스로 고통과 괴로움과 번민을 가져오게도 합니다. 또 미혹의 영으로 역사해서 타락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격분시켜서 노를 발하게도 하며, 거짓 영으로 역사해서 거짓말을 하게도 하고, 거짓 미혹에 빠져들게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상고하는 여러분과 저는 이 땅에 사는 온 생애 위에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철장 권세로 무장해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마귀로 틈을 타지 않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옛사람을 좇는 구습을 버려야 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22절) 옛사람의 근성 중에 하나는 필요없는 욕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5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천국입니다. 편안합니다. 성경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기라(딤전 6:8)고 하신 말씀대로 살면 더불어 있는 것은 감사뿐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충만하게 되면 마음에 빈곤을 일으키게 되고 모든 것에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습을 좇는 옛사람 중에 가장 더럽고 흉악하고 무섭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또한 욕심은 사탄이 틈을 타는 통로가 됩니다. 욕심을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심 때문에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기도 합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사탄이 뭐라고 미혹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창 3:5)고 하는 이 욕심 때문에 그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예수님인줄 아는 사람은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욕심을 버릴 때에 하나님이 가장 귀하고 놀라운 것을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마음의 변화를 가져와야 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23,24절)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우리 마음에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바로 이것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마음을 교만해지게 해서 넘어지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넘어진 것도 사탄이 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고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고 했습니다.
또한 마음이 온유해져야 합니다. '온유'란 저항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 대적에 대해서 복수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온유는 언제나 솜처럼 부드러운 것이고, 밀가루처럼 고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강퍅한 마음이 무서운 것 같지만 온유한 마음이 더 힘이 있고, 더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정말 예수님의 온유함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점점 강퍅하고 포악해져갑니다. 그리고 대적이 점점 많아집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같이 강퍅해져서는 안됩니다. 온유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밀가루처럼 고와야 됩니다.
열왕기상 4:29에 보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넓어야 됩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상반된 마음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습니다. 누구도 이 마음들을 한데 같이 통일시킬 수는 없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해보는 마음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마음의 변화를 가질 때 언제든지 마귀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탄이 틈타도 다 능히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25절) 마귀는 거짓을 통해서 역사하고, 거짓을 낳기도 하고, 또 거짓에 거짓을 이어나가게 합니다. 그래서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거짓은 사탄의 역사에 휘말리게 되는 순간 순간의 행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역대하 18:21에 보면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탄이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서 역사하겠다고 소리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정직해야 됩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살면서 좀 손해를 봐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해서 더 좋은 것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거짓된 사람이 빨리 출세하고, 수단 방법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혜성처럼 반짝 나타나지만 그런 사람은 오래 못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에게 평안을 주시고(시 37:37), 기쁨을 주시며(시 97:11), 좋은 것을 아끼지 않는다(시 84:11)고 말씀했습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하게 하고, 거짓을 믿게 하며, 거짓을 행하게 하고, 거짓 대답을 하게 합니다. 욥기 13:4에 보면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라고 말씀했고, 또 욥기 21:34에는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거짓들이 이 땅에 얼마나 성행하는지 모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1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거짓을 버릴 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13:6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는 거짓이 어느 정도냐 하면 점괘를 보면서 여호와의 말이라고 하면서 허탄한 예언을 하는 이런 데까지 거짓이 들어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나 성경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거짓 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됩니다.
넷째, 분을 품지 말아야 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26절) 마귀는 분을 일으키고 분을 통해서 틈을 타기도 하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가인이 분을 품은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을 때 가인이 분을 품었습니다(창 4:4,5). 그래서 창세기 4:6,7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분을 품게 되면 살인까지 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여러분, 분이 나게 되면 환경을 바꾸든지 인상을 바꾸든지 아니면 자기 마음을 빨리 바꾸고,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악한데 빠져 들어가면 빨리 돌이켜야 됩니다. 여러분, 베트남성회에 가서 정글을 보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많이 희생을 당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숲이 우거져 있으니까 정글인지 땅인지 구분하지 못해서 정글에 빠지면 정글은 진흙구덩이이기 때문에 점점 더 빠져 들어갑니다. 그런데 같이 빠져도 베트남 사람은 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트남 사람은 정글에 빠지면 빨리 숨을 죽이고 무기를 가볍게 해서 붙잡을 것을 찾아서 천천히 빠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은 성격이 급해서 안 빠지려고 허우적거리다가 점점 더 깊숙이 빠져 들어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분을 내거나 이성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분이 날 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먼저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면서 분을 가라앉혀야 됩니다.
야고보서 1:20에 보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좋은 일을 의논하면서도 마음에 분이 품어지면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을 품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 마음 속에 계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5에 보면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1:11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가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분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벌이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 마음에 유혹의 욕심과 거짓을 버리고, 분을 품지 말고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자비와 의가 있어서 정말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기도로 무장하여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귀한 승리의 삶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3-32 / 이윤재 목사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그날 이후”라는 글을 썻습니다. 이 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 나타나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나타났으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고쳐 주셨던 사람들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폐인이 되어 손발을 떨고 있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세히 보니 바디메오입니다. 나면서 소경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고쳐주었는 데 그가 폐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형제여, 어떻게 이렇게 되었소?” 바디매오가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건강하게 되니 먹고 살 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거리에서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그 주변에는 그를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한때 귀신들리고 창녀였던 마리아, 예수니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마리아가 그렇게 되다니, 예수님은 너무 놀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아니, 마리아, 어떻게 되었소?”.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주님 떠난 뒤 힘들어 다시 옛생활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또 한참 가다보니 피투성이가 된 불량배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자세히 보니 실로암에서 고쳐준 맹인입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요?” 했더니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진흙을 이겨 발라 주셨을 때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눈은 떴으나 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에배소 1장에서 3장에 나타난대로 우리를 위한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4장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4:1, “그러므로”를 넘었습니다. 엡4:1, “그러므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리하여 이제 구원받은 자답게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4장으로 왔으나 아직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받았으나 모든 일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지난 주 종교개혁 500주년 예배도 드리고, 루터 영화도 보고, 지난 주 “오직 믿음으로, 그 이후”까지 설교를 들었으나 우리에게는 문제는 구원 이후는 쉽지 않습니다. 구원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원받은 다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은 자로 살 수 있을까? 바울은 4장이후 계속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구원 이후, 4:1절, ‘그러므로“ 이후, 우리의 믿음의 삶을 다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심령이 새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말씀은 23-24절입니다. 엡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문법적 형태는 미완료 현재형입니다. 이 말은 새롭게 되는 것은 어느 한 시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새롭게 되는 일이 한순간에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옷을 벗고 입는 것처럼 매일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옷을 입고 영원히 안벗는 사람은 없습니다. 옷은 매일 벗고 매일 입습니다. 아침에 입고 저녁에 벗습니다. 옷을 벗고 입는 것처럼 우리 영혼은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새로워집니다. 또한 수동태입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일은 내가 할 일이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그 일의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도와줘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군가 옷을 벗기고 입히는 것처럼 우리 영혼을 주관하는 분이 있고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따라 그렇게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핵심 단어는 23절,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입니다. 다같이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여기서 “심령”은 문자적으로 말하면 “마음에 있는 영”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하면 “spirit in the heart”, 마음속에 있는 성령입니다. 우리안에 계시는 성령입니다. 이 분이 관건입니다. 단순히 우리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가 결심하고 다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어“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님을 좌지우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좌지우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30절 보시겠습니까?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성령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첫째는 영원히 계십니다.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최후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성령님은 역사합니다. 두 번째는 근심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십니다. 때로 근심하여 기도하고 위로하고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는 “그 안에서”, 성령님은 우리안에 계십니다. 요14:17,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슴이라”. with you, and in you.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24절 다시 보겠습니다.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란 말이 나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닙니까? 500년전 마틴 루터가 고민하다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그의 노력과 고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일에 실패하고 “아, 내 안에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하고 하나님앞에 항복하며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Lord, I am yours. please help me) 고백했습니다. 그때받은 말씀이 롬1:17절 아니었습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다.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나는 오직 믿음을 통해 그 의를 받는다“. 이것을 깨달은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의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 믿음으로 나에게 들어 오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24절 다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이미 지으심을 받았으니”. 이미 받는 것입니다”. 우리속에 하나님의 의가 예수믿음을 통해 이미 들어온 것입니다. 약1:21절의 말로 하면 우리속에 그 의가 ”심겨진 것“입니다. 생명의 씨가 우리속에 뿌리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다시 24절, ”새사람을 입으라“. 이 일이 남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의는 받았습니다. 거룩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의 일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새사람을 입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한번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되는 것은 옷을 입듯이 매일 이루어야 합니다. 나 혼자 하는 일은 아닙니다. spirit in the heart,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합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그 분이 일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님이 주신 선물이 있습니다. 이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엡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새롭게 하시는 능력의 원천인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각 사람에게 각각 주셨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은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찾아와서 “네가 병에 걸린 것을 보니 하나님이 너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분명한 뜻이 있다. 너 회개할 것 없냐?” 하고 물었습니다. 예언의 은사입니다. 또 한 친구가 와서 “얘, 여기 너에게 온 편지 다 갖고 왔다. 네 방에 있는 화초에 물도 주고 방 청소도 다 해놓았다”, 섬김의 은사입니다. 또 한 친구가 와서 말합니다. “너, 맨 날 밥도 굶고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니까 병에 걸린 거야. 네가 아픈 것을 보니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겠다.” 가르침의 은사입니다. 또 한 친구가 와서 “네가 지금 겪는 어려움은 반드시 후에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에 크게 사용될 수 있을 거야”. 위로의 은사였습니다. 또 친구가 친구는 와서 “병원비가 많이 들 텐데 …, 너 보험으로 그 병원비 다 해결할 수 있겠냐?” 하며 슬그머니 돈을 놓고 갑니다. 긍휼의 은사입니다. 또 한 친구가 와서 “너무 걱정하지마. 이미 다 보험으로 해결해 놓았어”. 다스림의 은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온 친구가 큰 소리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기도했더니 이 친구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치유의 은사입니다. 우리안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믿습니다.
먼저 생각과 감정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면 우리안에 있는 성령님은 우리를 어떻게 새롭게 합니까? 먼저 생각과 감정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의 운명은 그가 가진 생각에 따라 결정됩니다. 잠23:7이 중요합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생각이 곧 사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떠한 것은 그 생각이 어떠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잠12:5,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사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요13장에서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어떻게 팔았습니까? 요13:2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마귀는 가롯 유다에게 단 한 가지를 했습니다. 예수를 팔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예수를 팔도록 명령하지도 않았고 예수를 팔 계획이나 전략을 사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했습니다.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만일 훗날 하나님이 마귀를 심문하면서 “네가 가롯 유다를 유혹해서 예수를 팔게 했지?” 하고 물으면 아마 마귀는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다만 가롯 유다에게 생각 하나를 넣어준 것 뿐입니다.”. 마귀가 간사한 것은 그가 우리 행동을 직접 통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명령하지도 않고 지시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합니다. 우리속에 죄를 지으라는 생각을 넣어줍니다. 그리고는 아무 책임이 없는 것처럼 뒤로 빠져 나갑니다. 그래서 사55:7에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생각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다스리는 것은 마음의 생각입니다. 롬8:5-6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마귀는 우리에게 사망에 이르는 생각을 넣어주지만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에 이르는 생각을 넣어 줍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파괴적이고 부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넣어주지만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산적이고 긍정적이고 남을 사랑하는 생각을 넣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기도해야 할 제목이 이것입니다. “성령님, 우리 생각을 다스려 주옵소서. 우리가 성을 세우지만 성을 지키는 것은 성령님입니다. 우리 마음을 지켜 주옵소서. 우리 생각을 지켜 주옵소서”.
성령님이 우리의 생각과 함께 우리는 다스리는 것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엡4:3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흔히 실수하는 죄의 목록들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감정에서 옵니다. 감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중의 하나입니다. 문제는 이 감정이 누구의 지배를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실수를 많이 하는 감정이 분노의 감정입니다. 26-27절입니다. 엡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내어도” 했습니다. 누구나 분노할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분노를 죄악된 감정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잠14:17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여기에서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저 노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잠14:29절도 같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여기에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번도 노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기만 하면 명철한 자가 될뿐입니다. 누군가 우리의 감정을 통제해야 합니다. 누가 하겠습니까? 약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 지 못함이니라”. “성내기를 더디하라” 했습니다.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성을 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성내기를 더디하면 됩니다.
26절,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여기서 ”분“이란 말은 앞에 나오는 ”분“과는 원어가 다릅니다. 앞에 나오는 ”분“은 일반적인 ”분노“입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분“은 격양된 상태입니다. 화산처럼 폭발해서 주어 담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의 분은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제하지 않고 저녁까지 두면 화산처럼 폭발합니다. 그래서 요즘 보는 것처럼 어머니를 포함한 일가족을 죽이고 뉴질란드로 도망갑니다. 주차문제로 시비하다 애먼 사람 죽입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마귀는 처음 분노때 틈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분노할 때 틈탑니다. 우리는 다 약한 사람들입니다. 분노가 없을 수 없으나 그 분노를 가지고 성령님께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 분노를 가지고 나아 갑니다. 내 속에 있는 분노를 바꾸어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변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감정을 성령님이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말과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지배하는 마지막이 말과 행동입니다. 말은 존재의 집이요 사고와 행동의 관문입니다. 성경은 말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잠: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잠12:18절입니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같으니라”. 잠20: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 귀지 말지니라”. 29절입니다.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왜 우리에게서 더러운 말이 나옵니까? 우리 안에 더러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는 폐수가 나오고 깊은 골짜기에서는 맑은 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이 누구의 지배를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 나쁜 말이 나오고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좋은 말이 나올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나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내 입에서 은혜스럽지 못한 말이 나오면 얼른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서는 감정적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옳은 말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옳은 말도 옳게 말해야 옳은 말이 됩니다. 옳은 말도 잘못 말하면 상처받고 나쁜 말로 잘하면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옳은 말을 하는 것보다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느냐 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느냐를 중요합니다. 옳지 않은 사람이 옳은 말 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옳은 말로 약한 사람들을 시험들게 했다면 그 말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엡4:29절을 다시 보십시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사람들이 대개 나쁜 말을 쓰는 것은 나쁜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메아리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장에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어?”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업어주기 싫었지만 잔소리가 겁나 할머니를 업어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조금 미안한지 물었습니다. “나, 무겁지?”.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할머니가 “왜?”하고 묻자 할아버지는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줘”.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업었습니다. 미안해서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 무겁지?”.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럼 가볍지”.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지”.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습니다.
촤고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도 선교사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중의 하나인 스텐리 죤스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1884년,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 파송되었는 데 그는 1961년, ”간디 평화상“을 수상하고, 노벨평화상에 두 차례나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런데 67세인 197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마룻바닥에 눕게 되었습니다. 급하게 보스턴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는 데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들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보시고 “스텐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소리쳐 주십시오.“ 의사는 놀랐습니다. 자기는 목회자도 아니고 믿음도 없는 데 무슨 능력이 나타날까? 그래서 말했습니다. ”아니, 선교사님, 저는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부흥사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도 스텐리 존스가 부탁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스텐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스탠리 존스가 부스럭 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몇 달후에는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21년을 더 살아 88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말은 성경의 말입니다.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은혜”는 “생명”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성령의 말입니다. “주여,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함께 우리의 말을 다스리시사 우리가 선한 말, 은혜로운 말, 생명의 말만 하게 하소서”.
우리의 생각은 감정을 통해 말로 나타나고 말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마지막 단계는 행동입니다. 28절입니다. 엡4:28,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둑질의 대표적인 것이 물질입니다. 그러나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있습니다. 시간을 낭비시킨 도둑이 가장 큰 도둑입니다. 생각을 훔칠 수도 있습니다. 남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것이 아닌 것은 내것으로 삼으면도적질입니다. 목회자도 도둑질이 있습니다. 남의 설교 베끼는 것입니다. 말씀은 성경에서 나오기 때문에 내용과 주제가 일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하는 것을 똑같이 베끼는 것은 게으른 일일 뿐 아니라 범죄입니다. 영국이 스펄전목사가 휴가를 만나 한 주 쉬면서 여행하다 주일을 만났습니다. 휴가지에서 예배를 참석했는 데 그 교회 목사님이 어디서 들은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설교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설교후에 그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만든 요리를 다시 데워주시니 맛있습니다”.
성경에는 속이는 저울추와 부정한 저울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합니다. 잠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아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20:23,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아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곳이니라”. 신25:13절,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며 오직 공정한 저울추를 두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 부정한 저울추 문제는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만벌면 된다는 크리스쳔 기업가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다니는 직장의 물건을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직장 물건을 자기 것처럼 씁니다. 직장에 있는 연필이나 종이를 마음껏 사용하고 직장에 있는 컴퓨터 종이를 마음껏 사용하고 직장에 있는 전화도 자기 전화처럼 사용합니다. 옛날에는 낮에는 사람들 때문에 못쓰고 밤에 나와 몰래 직장 전화로 시외전화, 국제전화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타인의 지경을 침범하지 말고 그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다른 사람이 힘써 가꿔놓은 지적 경계선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인용부호를 치고 노래나 작품을 가져올 때는 원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남의 논문을 표절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경계선을 침범하는 일입니다. 남이 힘써 만든 음반, 책을 무단 복제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건축을 맡았을 때 이익을 남기기 위해 적당히 짓지 말아야 합니다. 공사비 아끼려고 재료를 부실한 것을 써서 결국 성수대교 무너지고 삼풍 백화점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요즘 집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집을 지어주는 “국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에서 1992년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몇 채의 집을 지었습니다. 때마침 허리케인이 몰아쳐 모든 마을이 폐허처럼 날아가고 집들이 부서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몇 채의 집만 끄떡없이 버텼습니다. 알고보니 사랑의 집짓기 운동본부에서 지은 집들입니다. 기자들이 “사랑의 집짓기” 마이애미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이 지은 집은 허리케인에도 끄떡하지 않습니까?” 대표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집 지을 때 돈을 빼돌리지 않거든요”.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지은 집만 살아 남습니다. 정직하게 산 인생만 살아 남습니다. 집도 건물도 인격도 신앙도 인생도 정직하게 지어야 오래갑니다. 이것이 26절,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엡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죄인인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임해서 우리의 거룩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도록 순종합시다.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일한만큼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 우리를 성령으로 새롭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사로잡으사 거기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주관하옵소서”.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
엡 4:23-24 / 김윤기 목사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형상'이라는 명사는 통상적으로 신들의 상(像), 입상(立像)을 의미합니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고대로부터 절대 권력이 부여된 왕정이 확립되었습니다. 왕은 신으로서 권위를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왕에게 백성은 신에게 하듯이 복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땅 위에 세움으로써, 인간을 대리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보살피며 다스려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인간에게 위임되었다는 의미이지, 인간에게 신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사회에서의 상하 관계나 불평등 관계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다스려야 할 것은 같은 인간이 아니고 자연입니다. 그런데 이 다스림은 파괴와 착취의 다스림이 아니라, 보호와 양육의 다스림입니다.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아니 되는데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습니다.
"본문은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계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의 영을 새롭게'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야 영적 성숙에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성도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되찾아 재창조된 성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가 되려면
1.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진실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누구나 그의 신분을 변화시켜 줍니다. 이들은 그 순간에 영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릅니다. 이제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능력을 받는 전혀 다르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영적 성장에 이르는 길은 많지만 영적 성숙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도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표시로 거룩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거룩한 생활이 영적 성장의 표시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때로 거룩함과 도덕성을 동일하게 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은 도덕적으로도 결함이 없는 삶을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2.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관계 회복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데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일단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인 화목을 되찾으면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인 화평도 회복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세상적인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고후 5:16). 두 개의 세상에서 저자 "프란시스 쉐퍼"는 참된 영성이 있는 곳에 "아름다운 인간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영성은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미국의 한 성도가 걸어 다니는 사전이라고 불리 우리 만큼 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료를 다루는 능력이, 그것도 대부분 사소하기 그지없는 자료를 다루는 그의 능력은 가히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를테면 대서양의 넓이라든가, 각 나라의 수도, 어떤 지역의 연중 평균 기온 같은 것을 물어 보면. 그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정보 항아리는 바닥이 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두 개의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어느 날 그가 체스 게임하는 법을 배웠는데, 곧 그는 자기가 개발한 삼차 원 체스 게임으로 전국 과학 재단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 3 시절 그는 미국의 주 대회 시험과 전국 대회 시험마다 상위 성적을 받았고, MIT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똑똑했습니다. 아니 두뇌가 아주 명석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를 '괴상한 놈'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좀더 달랐는데,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경험은 그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때로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의 지성은 특정 분야(특히 학문적인 것)에 쏠려 있었으며, 인생의 다른 측면에서는 발휘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결점은 사람을 잘못 판단하기 일쑤였고, 인간 관계를 원활히 맺고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똑똑하다는 것이 인간을 지혜롭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지혜가 있으면, 인간 경험의 모든 면에 성경을 정확히 적용시키어 다양하고 복잡한 인생의 문제를 풀어 갑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성경의 원리와 우선 순위를 먼저 고려하여 적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근세 유명한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세 가지로 진단했습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립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관계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부버는 또 하나의 관계로 '나와 그것의 관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그때 '나와 그것의 관계'가 성립된 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부버는 그렇게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다. 이것이 인간성의 연약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이 인간 관계를 중매하는 하나의 축매자가 필요하다." 고 말합니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한 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으로 부딪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을 발견합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아내,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남편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한번 만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무릎을 꿇을 때에 비로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놀라운 관계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되면 나와 너와의 바른 관계가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적 성숙을 이루어 하나님과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영적 성숙은 세상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즉 성도들이 사는 삶의 모든 부분에는 기독교 세계관 안에 있어야 하며, 삶의 모든 측면에 성경적 지혜를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사생활이나 가정 생활, 교회, 사업, 정부 등의 직장에서 청지기로서 잘 봉사해야 합니다. 각 분야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영적 성숙을 가져온 성도는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성도들이 성도들의 삶을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이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올림픽 챔핀언인 에릭 리델의 삶과 증언을 알리는 영화입니다. 리델(Eric Liddell)은 철저한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릭 리들은 영국 대표로서 1924년 제 8 회 파리 올림픽 경기의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100 m 경기 일정이 발표되었는데 첫 예선 일자가 7월 6일 주일 오후 1시와 5시였습니다. 그는 일정표를 보자 마자 "저는 주일에는 안 뜀니다"라고 단호한 결정을 알렸습니다. 그의 그런 결정은 그의 주일 성수를 위한 자기 희생적 결단이었으며 주일은 주님의 날이므로 주님을 위한 일만을 해야 한다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에릭 리들의 100m 출전 포기를 들은 영국 전체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를 가르켜 "편협하고 옹졸한 시낭인", " 신앙을 소매끝에 달고 다니는 신앙심 깊은 척 하는 위선자","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 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릭 리들은 100m 예선 경기를 하던 7월 6일 주일에는 스코츠 커크 장로교회의 간증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날 에릭 리들은 경기장에 나가 동료들을 위로하지도 않고, 평소처럼 주일을 교회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100m 경기는 영국의 헤롤드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의 기록은 에릭 리들보다 약간 뒤졌었습니다. 에릭 리들은 기쁜 마음으로 헤롤드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들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에릭 리들은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200m에서 동메달을 땄고 400m에도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400m는 다른 선수들의 들러리였습니다. 예선에서 만도 스위스의 임바흐, 미국의 피치 같은 선수들은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 후보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결승전이 왔습니다. 에릭 리들은 신들린 사람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첫 코너를 돌았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던 전문가들은 "에릭이 저런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 지도 모른다". 고 불안감을 표현하였습니다. 에릭 리들은 임바흐, 피치 등의 우승 후보를 제치고 47초 6 이라는 세계 신기록 까지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가 결승전을 출전할 때 담당 안마사가 쥐어준 쪽지가 응답되었습니다.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 최선의 영광이 있길 빌면서. 그는 400m우승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처음 200m 는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일이 자기를 위한 날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설교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누이 제니가 불평했습니다. 에릭이 뜀박질하는 데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시간 낭비로 보였습니다. 그 시간에 기독교 사역에 시간을 보냈으면 더 좋았을 것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릭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달리는 능력을 주셨고 달림으로써 나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다. "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히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능력을 사용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영광 되게 했던 것입니다. 반면 제니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면 풀타임으로 선교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제니처럼 생각한다면 전도사나 목사, 교회의 전임 직원이 가장 영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세상에서 나의 직업과 은사와 재능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영적 성숙은 사회적으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주위에 재난이나 고통, 빈곤을 당한 국가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난 당하는 것을 보고 돕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힘을 쓰고 있습니까? 이런 국가나 사람을 돕기 위한 전 세계의 자선 사업 중 상당 부분이 미국에서 담당했습니다. 여러 기독교 교단들이 의료 선교를 했고 막대한 양의 필수품을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진정한 기독교 정신에서 기대가 됩니다. 영적 성숙이 진행되려면 이러한 특징들이 우리 삶에 더 많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영적 성숙을 가져온 사람들은 후대를 위해 새로운 예술 매체를 개발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음악이나 영화 그 외 시각 예술이라는 매체는 문자나 말보다 구체적 영향을 주므로 특히 더 강력합니다. 새로운 매체를 속속 개발하는 동시에 기존에 예술, 즉 문학, 음악, 드라마, 미술 등에도 새로운 관심을 자극 받아 기독교 정신에 맞게 제작되고 감상되도록 하는 것도 분명 타당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적 성숙을 이루어 문화 영역에까지 침투되어 사회에 새로운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4. 영적 성숙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이루어져야 합니다.
영적 성장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영적 발달이라는 것은 평생이 걸리는 과정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목표에 점점 가까이 데려가기는 하지만 언제나 또 한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에 대해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성장에는 시련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든 신체적 성장이든 다 역경이 있습니다. 질병과 병환이 언제나 위험 요소로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영적 역경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삶을 뒤돌아보면 큰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하시므로 장애물이나 곤경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기 순교자들은 이런 불굴의 두려움 없는 신앙으로 무장했으며, 이런 두려움 없는 신앙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큰 영감을 줍니다.
루터가 시편 46편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고 하는 다음의 유명한 시에서 이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루터는 고난과 싸우면서 영적 성숙에 이르고 승리를 했습니다.
바울도 영적 훈련을 받으려고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 동안이나 있어 퇴수회를 통한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준비했습니다.
(갈1:17-18)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15일을 유할새
악의 세력이나 독재를 만나서도 성숙한 신앙인은 용기를 잃지 않고 투쟁을 해야합니다. 선한 사람이라도 두려움 때문에 악한 사람이나 악한 생각에 저항하지 못한다면 결국 나쁜 사람이 여러분의 나약함을 이용해 힘을 얻고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예를 독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저항했더라면 선이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나서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면 불안합니다. 그리고 근심의 원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만들고 한 걸음씩 더욱 성숙해 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 강성찬 목사
어느 가정이 새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집은 낡은 집이었습니다. 마당에 잔디도 잘 가꾸지 않아 거의 죽어 가고 있었고 쓰레기통 주변에는 지저분해서 청소를 해야 할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집으로 새로 이사온 사람은 집을 고칠 생각도 안하고 청소도 별로 하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살아가고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집은 낡은 집을 싼값으로 사서 입주했는데 역시 마당에 잔디가 다 죽었고 쓰레기통도 다 낡아 지저분한 상태로 있었고 담벽이 오래되어 페인트도 다 낡아 있었습니다. 유리창은 더러웠고 방충망은 구멍들이 여기저기 뚫어져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런 것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사한 그날부터 부지런히 정원을 쓸고 잔디에 물을 주고 나무와 꽃밭을 가꾸기 시작했으며 외벽은 새로운 페인트로 아름답게 칠했고 문마다 방충만을 새로 설치했으며 집 내부도 구석구석 쓸고 닦고 고쳤습니다. 얼마 후 이 집은 새집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은 계속 더 지저분해지고 속히 낡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심령도 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17장 9절에서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합니다. 사람마음이 제일 부패했습니다. 썩었다 썩었다해도, 사람같이 썩은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자와 짐승이 악하다해도 사람같이 악한게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사람이 제일 잔인합니다. 내 안에 온갖 독사의 굴이 내 안에 있고 온갖 무서운 짐승들이 내 안에 다 살고 있는걸 알아야합니다. 내 안에 온갖 무기들이 있습니다. 칼이 있고 독가스가 있고 핵무기가 있고 췌루탄이 있고 총 칼이 내 안에 미사일이 내 안에 있는걸 알아야 합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여섯 개의 감옥이 다 있다고 합니다 첫째의 감옥은 자기도취의 감옥입니다. 자기 잘난 줄 알고 교만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 병에 걸린 감옥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 약점만 보고 비판하는 겁니다. 세 번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 불만하는 것은 감옥입니다. 네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자꾸 옛날 생각하고 옛날 좋았다고 지난 날을 생각하는 겁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고 남에 것만 귀하게 생각하고 남의 것만 자꾸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겁니다. 여섯 번째의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공연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는 이게 모두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기독교는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심령을 살려주는 종교입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는 종교입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옛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벗어야 할 옛 사람은 어떠 합니까 죄로 인하여 모든 것이 굳어진 마음입니다. (엡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굳어진 마음은 대리석보다 더 굳은 돌을 의미합니다. 의학적 용어로 사용할 때 관절 속에 생겨 그 동작을 마비시키는 결정체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이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자리에 생기는 굳어짐 곧 본래의 뼈보다 더 굳은 것을 말합니다. 죄의 무서움은 이렇게 마음을 굳어지게 합니다. 마음이 석고처럼 된 것을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방탕과 욕심으로 행합니다. (엡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방탕은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죄악을 서슴지 않고 밖으로 행동화하는 것으로 체면도 염치도 아예 생각지 않습니다. 마약을 몰래 복용하다가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매이게 되고 마침내 거기에 종이 되는 마약 상습자와 같습니다. 욕심(Pleonexia)은 교만한 탐욕 저주받은 소유욕으로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말합니다. 그 결과 그것이 물질을 도둑질하게 하고, 개인을 죽이게 하고 사회와 국가를 불안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육신만 남은 자입니다 (창 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맹인이요 어둠에 거하는 사단의 종입니다 (신 28:29)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자들입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정욕을 좇아 사는 자들입니다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옛사람은 실패의 사람,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입니다. 굳어진 마음, 부끄러움도 모르는 방탕, 욕심을 행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새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의 더러운 죄의 옷을 벗었으면 이제는 새사람을 입기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엡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심령(the spirit of minds)이 새로워 진다는 것은 마음의 중심에 있는 영이 먼저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샘은 영입니다. 영의 샘이 터져야 마음이 맑아지고 결국 육신도 맑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될 때,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면서 영의 생명, 영의 기쁨, 영의 생수가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때 마음이 맑아지고 육신까지도 새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져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아그립바왕에서 소개하며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회심을 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방의 사도로 부르신 사실과 이방인들에게 가서 한 일을 증거했습니다.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된 사람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은 받은 생명은 두 번째 연적인 생명 새 생명이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생명, 두 번째 태어나는 생명, 두 번째 갈아입는 새 사람은 쇠하여지지 않습니다. 새영을 받고 새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므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합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새사람을 입으면 어떠 합니까 새사람이란 마음에 주의 영이 거하는 사람이요, 주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의 사람을 말합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존재와 삶으로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것, 정욕적인 낡은 것을 버린 것이고 하나님에 의하여 새로워진 것입니다. 위엣 것을 찾습니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 영광중심이 됩니다. 지금까지는 세상을 따라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존재의 목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위해 생각했던 마음이 바꾸어졌습니다. 자기 자신이 목적이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내주하심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인간 삶의 가치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가치관이 달라진 것입니다. 인생의 삶의 모든 가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세상 사람을 부러워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불쌍한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불의한 재물이라도 은혜로 알았지만 이제는 저주스럽게 알고, 죄된 부귀와 권세를 수치스럽게 느끼며, 오히려 진실한 가난의 길을 부러워하고 의인의 고난을 영광된 것으로 알며,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의 길을 가장 큰 상급이요 행복의 길로 아는 가치판단을 가지게 됩니다.
1990년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엘리나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별명은 '노인의 어머니'라 하는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훌륭한 양로원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었습니다. 이분은 본래 하나님께 헌신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힘써서 중국선교사로 일 하려고 했는데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그 불결한 환경 속에서 폐결핵 걸려가지고 각혈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여 어째서 내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 라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제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조용히 겸손한 기도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불모지 넓은 땅이 있습니다. 이걸 개간을 해서 농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농사해서 얻어지는 수확을 가지고 중국선교사들의 선교비를 많이 보냈습니다. 자기 대신 일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농사하다가 또 추수하면서 탈곡을 하던 중에 탈곡기에 손이 끼어들어가면서 손이 부러지고 손을 자르게 됐습니다. 오른손을 짤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멈추고 그 땅에다가 양로원을 짓고 노인들을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확장되어서 세계적인, 유명한 양로원이 되고 그는 노인의 어머니라고 하는 높은 칭호를, 사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주는 내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령안에서 살아갑니다. 한 어린 소년이 이미 작고한 이태리 화가의 화랑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그 소년은 "부인께서 대가의 붓을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소년은 미술가가 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가와 같은 화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부인은 붓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고 그려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곧 자기 붓으로 그린 것보다 더 잘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대가의 정신을 이어받지 않고는 위대한 대가 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하고 일러주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에 실망하고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내재하는 성령이 없이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삶을 경험했고 심령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고 해도 무기력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성령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해도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전부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야심과 욕망을 성령의 지배에 맡겨야 합니다.
김성광 목사님의 설교에 있는 간증이라 합니다. 정 집사님이라고 제멋대로 엉터리로 믿는 집사님이 있었답니다. 예배시간에도 늦게 왔다가 일찍 가고 믿음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십일조도 아까워서 그냥 예의상 5만원씩만 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빚을 내서 식당을 했는데 그것마저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도와주지는 않고 구역예배, 수요예배 등 교회 간다고 자주 식당을 비우자 불만이 생겨서 자꾸 싸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보건소에서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식당주인이 감염환자인데 누가 그 식당에 오겠습니까? 간염에는 약도 없습니다. 좋다는 약과 건강식품을 다 복용했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식당도 망하고 병들어 죽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하나님께만 매달리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물론이고,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때로 기도원까지 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은혜 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이제는 아내가 교회 일로 늦게 들어와도 화를 내지 않고, 자신도 열심히 충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하면 할수록 식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자 점점 그 액수가 많아지고 식당을 시작할 때 빌렸던 2,000만원을 7개월만에 모두 갚게 되고, 식당을 두 배로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보건소 가서 재검사를 하니 '이상 없다'는 결과까지 나왔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서도 검사를 받았는데 역시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풍족하게 채워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께서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옛사람 그대로 사는 자가 있다면 속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새사람을 입었지만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자들은 경건의 연습에 힘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은혜와 복을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거듭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며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며 고백하며 학습 받고 유아세례 받고 입교하고 세례 받았습니다.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더욱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신앙생활과 신앙인격
엡 4:25-32 / 조용기 목사
<서론>
저는 “신앙생활과 신앙인격”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부흥집회에 한 흑인이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의 죄의 굴레와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기쁘게 간증을 했습니다. 간증이 끝나자 사회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님이 받은 구원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는데 구원받기 위해서 형제님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즉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제가 한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습니다. 저는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다니는 일만 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욕심껏 시키는 대로 죄를 지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망다니는 것을 끝까지 따라오셔서 결국 저를 쓰러뜨리시고 기적같이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2천년전의 역사적 인물로만 전하고 기적은 없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믿음 뿐만 아니라 응당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기형적인 복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 흑인이 간증한 것처럼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주님을 피해서 도망치는 일, 주님을 거역해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생활을 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붙잡아서 우리를 성령으로 감동시켜서 회개시키고 예수를 믿도록 도와주셔서 순수히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하고 신앙적인 인격의 성장하고는 대단히 틀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난 다음 자라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고 난 다음 자라지 않는 것처럼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태어나는 것은 부모님의 은혜로 태어나는 것이지만 태어나고 난 다음 먹고, 운동하고, 자라는 것은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노력없이 먹고 마시고 자랄 수가 없습니다. 구원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 한일 없이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자라는 것은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자식이 자라지 못하면 부모의 마음에 큰 부담과 걱정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자라지 못하면 하나님이 굉장히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자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로 30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주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 난 다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서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모두다 예수님을 닮은 자녀들만 모인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그 목표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자라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사람 인(人)자 하나를 붙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고 나오면 그 몸에 음식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몸에 향수를 뿌리면 향수를 반드시 냄새 맡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과 같이 있기 때문에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 냄새가 나야 돼요. 예수 향기가 나야 돼요. 예수를 믿으면서 전혀 예수 향기가 나지 않고 예수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이홍재 교수가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설문을 통해 인격과 설교, 상담, 가정, 외모, 경륜 등의 6개의 자질 가운데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겠냐고 물었습니다. 어떠한 것이 목사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자질이냐. 그 결과 인격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혔고, 그 다음이 설교, 상담, 경륜 등의 순서로 나타났습니다. 일반인들이 목회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인품을 기대합니다. 목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좋고 풍성한 인품을 가지고 대해주는 것을 성도들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보았을 때 한눈에 알아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언어, 심사, 행동이 다르다. 그에게 예수 향기가 난다. 그렇게 인정할 수 있어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품과 행실이 예수님을 닮을 때 비로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본론>
1. 말씀으로 변화
첫째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디서 닮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열 두 제자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듣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고 묵상하므로 마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며 마음이 새롭게 창조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면 말씀은 살아서 속에 들어가서 운동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별도리 없이 마음속에 변화가 다가오고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떡을 먹고 사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말씀을 먹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입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길이 평탄하게 되고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할 뿐 아니라 말씀을 외우는 것이 굉장히 좋습니다. 앉으나 서나 시간만 있으면 말씀을 외워서 말씀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렸거니와 시편 23편을 주야로 외웁니다. 그것이 나의 양식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말씀을 여러분 매일 앉아도 외우고 서도 외우십시오. 그러면 말씀이 속에 들어가서 큰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3편만 외워도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정신적인 억압에서 자유를 얻고 마음과 육신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용기와 힘을 얻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마음에 외우고 입으로 시인하면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말씀은 죽은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은 보통 말씀과 다른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에 반드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97절로 99절에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명철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늘 읖조리면 지혜롭게 되고 명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을 입으로 시인하게 만들면 어린 아이들이 성경을 통해서 굉장히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역사를 통해서 위대한 대통령, 위대한 지도자들은 모두다 성경을 의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돌보신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이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주의 법을 사랑하고 하루 종일 하나님 말씀을 늘 묵상하는 것이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프린스톤신학교의 성서 신학자인 오토 파이퍼 교수가 강의를 하다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입니까?” 학생들이 다 “예, 마틴 루터입니다.”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깜짝 놀랬습니다. 이 선생님이 이단이 되었나 보다. 역사를 거꾸로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말하기를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것이 아니라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다가 말씀에 감동이 되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루터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폭발을 일으켜서 변화를 받아 그는 도저히 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은 진리의 생명력이 마틴 루터를 사로잡아 마침내 종교개혁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적인 양식이 될뿐만 아니라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면 마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어 새롭게 창조되며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고 묵상하면 변화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변화를 받지 아니하면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형식과 의식을 따라 살면은 자라지 않습니다. 마음이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자라야 되는 것입니다. 승리에서 승리로 자라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용기에서 용기로 성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가 자라는 방향을 인도하고 변화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로 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불안하기 짝이 없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데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은 말씀이 들어와서 온전하게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선한 일을 행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때 말씀이 들어와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 몸에 근력이 생겨나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우리는 체력에 운동을 해서 연단을 해서 몸에 저항력을 길러야 되는 것처럼 말씀이 들어오면 몸에 신앙의 근력이 생겨서 힘이 생기고 저항력이 생겨서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세상 씨앗은 썩어 땅에 심으면 썩어지지만 말씀은 마음속에 들어와서 항상 살아있고 하나님께 능력을 주는 말씀으로써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2. 분명한 결심과 목표
둘째로, 인격적인 신앙인이 되겠다는 결심과 목표가 뚜렷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나는 그냥 예수만 믿고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변화되어야 되겠다. 나는 신앙적으로 인격을 얻어야 되겠다. 우리가 태어날 때는 품성을 그대로 태어납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 느린 사람, 또 마음이 좁은 사람, 넓은 사람, 태어날 때부터 그런 품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만 신앙의 인격이 자라고 그리스도를 닮아 변화받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인격을 얻게 되는 것은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는 가만있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 받은 품성은 부모로부터 유전을 받아 태어나지만 신앙적인 인격 캐릭터는 노력하고 애써야만 되는 것입니다. 믿고 난 이후에 인격적 성장에 무관심한 사람도 있고 세속적인 신앙에 처해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주인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세상으로 꽉들어차 있다가 세상을 쫓아내고 새로운 주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모셔들인 것입니다. 새로운 주인이 들어왔으므로 주인을 섬기고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주인 앞에 우리는 엎드려서 신발을 벗어 놓고 종으로써의 헌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주인을 한쪽 구석에 모셔 놓고 여전히 세상이 꽉 들어차 있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고 세상의 쾌락에 젖어서 산다면 이러한 사람은 형식적인 신앙을 얻었지 성장하지 못한 무심한 사람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4절로 5절에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믿을 수가 없어요. 서로 배신하고 조급하고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고 경건의 모양은 교회와서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밖으로 볼 때는 참 예수 잘 믿는 것같이 보이나 그러나 실제 생활은 그와 정반대의 생활을 하는 이러한 위선자에게서 돌아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5절로 28절에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큰 경고를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 그릇은 겉만 깨끗하지 속은 더러운 것으로 꽉 들어차 있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무덤을 아름답게 회칠을 해놓아서 야~ 그 무덤 참 곱다. 아름답다. 파헤쳐 보면 뼈가 남아있고 썩은 살점이 있고 냄새가 나고 더러운 것이 가득한 것입니다. 신앙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훌륭하게 보여도 속은 썩어 빠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옛날에 바리새교인과 사두개교인의 생활이었는데 우리도 그와 같이 외식하는 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성장을 뚜렷히 원하지 않고 평범한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으면 나는 성장해야 되겠다. 인격자가 되어야 되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에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갑니다. 아무리 세월을 잡아 놓으려고 해도 잡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세월이 흘러가지만 딱 죽고 난 다음에는 영원으로 들어갑니다. 영원한 세상은 흘러가지 않습니다.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란 그대로 들어가서 그대로 영원히 남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히 지옥에 남아있지 다시 변화되어서 천당으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천당에 올라갈 때 중학생 정도로 인격이 성장해서 들어가면 영원히 중학생 정도로 사는 것입니다. 천당에 올라갈 때 대학원 졸업생 정도로 인격이 자라서 들어가면 영원히 대학원생 정도의 인격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그릇이 적으면 은혜와 축복도 적고 그릇이 크면 큰 축복을 받는데 천국에 들어가서도 똑같이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란 분량대로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적게 자란 자는 적게 크게 자란 자는 크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어찌하든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충만히 성장시켜서 예수님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이구 나는 턱걸이해서 천당만 올라가면 되겠다. 뭐 그러면 할 수 없지요. 턱걸이로 올라가면 늘 하늘에 올라가서도 턱걸이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으로 충만해서 올라가면 영원히 영광스러운 신앙생활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로 10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여러분은 빛입니다. 옛날에는 마귀에 속한 어둠이더니 이제는 빛입니다. 한번 따라 하세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어둠이 지나가고 빛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가 맺어지는데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마음이 착해지고 의로워지고 진실해지는 것은 빛이면 그 열매로써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땅만 보면서 살 수도 있고 위를 보고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땅만 보고 사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육신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쫓아 소돔 고모라에 사는 사람들처럼 땅만 보고 살다가 나중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늘 위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아침에 자고 깨어나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위를 쳐다보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도 위를 쳐다보고 예배에 만나도 위를 쳐다보고 늘 하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늘 예수님 계신 곳을 바라보고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쫓아 예수님 제자가 되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면은 우리는 로마서 12장 2절처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세상에 살면은 하나님이 이 정도면 되었다. 선하신 뜻도 있고 하나님이 좀 더 잘해라. 기뻐하시는 뜻도 있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만 행하지 말고 좀 더 나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고 기뻐하는 뜻보다 더 나은 온전한 뜻으로 사는 우리들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그저 이 정도 믿었으면 되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그런 정도에 머무는데 그러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온전하다고 인정하는 그런 신앙생활로 전진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하기는 쉬워도 생활은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상충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하나님 원하는 것을 따라가야 될 것인 것입니다. 주일날 내가 꼭 교회 나가야 되겠는데 친구들이 동창들이 모여서 그날 운동하러 나가자고 합니다. 친구들이 야~ 하루쯤 교회 안나가도 된다. 우리와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운동 한번 하자. 내가 하고 싶은 데 거기 따라가면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고 거기 안따라가자면 친구들을 내가 무시하는 것이고 굉장한 갈등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냥 갈 수 없으니까 기도 좀 하고 자기 혼자 주님 바쁘니까 주님 좀 들으십시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오늘은 이것만 만족해 주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고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돼요. 자기를 못박고 이 세상을 부인하고 그리고 주님을 따라가면 한번이면 섭섭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내가 섭섭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섭섭하더라도 나를 부인해야 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온당한 일이지만 노력을 해야 되고 투쟁을 해야 됩니다. 쉽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면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40대 부부를 대상으로 부부의 신앙생활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문항 중에 “남편이나 아내의 신앙에 대한 평가”를 하라고 했는데 152명이 대답을 했는데 그 가운데 배우자의 신앙이 ‘성숙한 편’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52명 중에 4명밖에 없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노력하는 편’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24명이었습니다. ‘부족하면서도 노력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으로 124명이나 되었습니다. 부부가 서로 볼 때 형식적인 신앙을 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 124명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하거나, 자기 뜻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인격적 성장에는 무관심합니다. 내가 뭐 인격적으로 자라겠느냐. 예수 믿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무관심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인격적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목표를 정하고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 따라가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되기 때문에 희생이 따라오고 고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라는데 고통이 안 따라 올 수가 없어요. 자라면 신발도 커지므로 적은 신발은 벗어 놓아야 되고 옷도 커지므로 적은 옷은 벗어 놓고 큰 옷으로 갈아입어야 되고 자랄 때는 변화가 다가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려면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잘믿으려면 힘들어요. 신앙적인 인격을 가지려면 힘들어요. 성 내고 싶을 때 성 못내지요. 한 대 쥐어박고 싶어도 못하는 것도 답답한 일이지요. 먹고 싶은 것 못 먹으니까 술병을 보고도 옛날에는 저것 맛이 괜찮았는데... 마셔볼까? 안마셔볼까? 고통스럽지요. 가고 싶은데 못가니까 괴롭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걸머져야 되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참아야 자라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참을 수가 없는데요. 난 내 힘으로 도저히 안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돕는 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과 똑같으나 다른 분을 말하는데 보혜사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계셔 지금 이 자리에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보혜사는 나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항상 같이 계신 분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항상 같이 계세요.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우리에게 보증을 하셨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계신 그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옛사람은 죽고 우리 속사람이 살아나서 영이 살아났지 않습니까? 그러면 살아나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몸속에 와서 거하시면 성령이 우리 영혼만 와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죽을 육체도 치료하여 도와주신다. 나는 그런 것을 종종 체험합니다. 몸이 굉장히 피곤하고 지치고 오늘은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없겠다고 생각할 때도 아~ 성령이 계시지 않느냐. 성령이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했는데 내 몸이 죽을 것 같으나 성령이 다시 살리는 힘을 주실 것이니 성령을 믿고 나가자. 그래서 담대하게 나가서 설교를 시작하면 제일 처음에는 흔들흔들하고 넘어질 것 같으나 점점 강해져서 나중에는 성령의 힘이 몸을 나중에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두번 체험했으면 모르겠거니와 늘 체험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세상 뜨신 하용조 목사님이 저보고 조목사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주일에 이 신장투석을 3번이나 하고 매일같이 죽음 직전에 서 있습니다. 나의 삶이란 죽음과의 몸부림입니다. 그래도 내가 항상 설교하러 서기만 하면 새사람이 되고 설교 끝마칠 때까지 기운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체험을 하는데 조목사는 그런 체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해서 나도 같습니다. 나도 동창생이니까 그것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령이 도와주시는 한도 내에서는 우리가 어떠한 연약도 이길 수 있다고 내가 보증을 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성령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의 도우심
그리고 그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되는데 보통 때 자기가 잘 나갈 때는 주면 잊어버립니다. 제자들이 여러분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갈 때 좋았습니다. 푸른 하늘, 조용한 물결, 순풍이 다가오니 기분이 좋고해서 예수님 필요 없었어요. 예수님을 혼자 내버려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대화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배 한머리에 손베개를 하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갑자기 불고, 파도가 치고, 물이 넘쳐서 배에 물이 스며들어오고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니까 그때 고통 속에 누구를 생각했느냐. 이제는 세상 즐거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자기를 고통에서 건져줄 예수님 이 필요했습니다. 자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사오니 우리를 죽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옵소서. 주님께서 일어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 즉시로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은 것은 우리가 좋을 때는 우리 믿음이 세상에 있지요.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고통이 있어야 주님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들이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좋을 때는 예수님을 찾지 않는데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를 찾으면 주님이 같이 계시니까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있어야 살아날 것이니까. 물에 빠진 사람은 무엇이라도 잡지요? 지푸라기라도 잡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고난당할 때 예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여, 내가 주님을 구하니 나를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맹세도 많이 합니다. 살려만 주면 이제 주일 열심히 지키겠습니다. 십일조 꼭 내겠습니다. 전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변화 받겠습니다. 나중에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수두룩히 하지요. 그러나 고통을 당해야 자기 연약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할 때 주님께 의지하면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점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강해서 주님께 의지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뿌리치면 주님이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제가 늘 D.L.무디 목사님과 그 딸의 이야기를 하는데 D.L.무디 목사님이 그 딸을 데리고 얼음판을 지나갈 때 그 딸이 아버지 손 놔. 내 손 잡지마. 나도 걸어갈 수 있어. 아버지가 위험한데 위험한데... 잡지마! 잡지마! 그러다가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쾅 찧었습니다. 그러자 우니까 아버지가 손을 탁 잡았습니다. 가다가 미끄러지면 아버지 손에 달랑 달리고 달랑 달립니다. 그가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었기 때문에 아버지 손을 잡는 것입니다. 안그러면 아버지 손을 잡지 않아요. 여러분도 엉덩방아를 찧어야 예수님의 손을 잡습니다. 고통스러워야 예수님의 손을 잡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으면 예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와서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팡이는 예수님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이 체험되게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해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격이 변화돼요. 한대 얻어맞고 고통을 당하고 나면 아이구 옛날에 잘못해서 고통당했으니 그런 것 안당해야 되겠다. 그래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고통 당한 만큼 변화되는 것입니다. 고통 당하지 않고 변화된 사람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아무런 고통없이 편안하고 안락한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 몇사람 있습니까? 여러분 누구든지 손가락 밑에 바늘이 들어가도 가시가 들어가도 아팠으니까 예수 믿고 나왔지. 모든 것이 편하고 좋았으면 안 믿을 사람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를 믿고 변화시키는 대는 고통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감당할 만큼만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고통 밖에 못받을 것 같으면 초등학교 정도밖에 안주시는 것입니다. 중등만 하면 중등, 고등학교 정도되면 고등 고통, 대학이면 대학같은 고통, 고통을 당할수록 많이 깨어지고 그릇이 커지고 인격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당치 못할 것은 안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로 10절에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할 때 주님이 강하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약할 때 주님의 능력이 임하여서 나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하다는 것은 내가 시험과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지날 때 약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로 27절에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보십시오. 성령이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가 약해서 흔들릴 때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우리를 통해서 대신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방언기도요. 방언기도는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못하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우리를 성령의 기도까지도 도와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와서 계시므로 성령과 인격적인 교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께서는 떠나가실 때 우리에게 주님과 똑같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고 했는데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으로써 성령이 우리 속에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인격자이기 때문에 교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할 때 결혼식만 하면 부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죠. 그러나 그 다음부터 대화가 있어야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같이 살면서 좋은 일과 슬픈 일을 같이 나누고 이야기 하며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생활을 하나로 살아가는 대화가 있어야 부부가 되지 그냥 결혼했다고 부부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여러분 관심을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와 대화를 하려면 관심을 기울여야 돼요. 그냥 직장에 와서 웃통 벗어 놓고 밥줘! 밥 먹고 난 다음 자자! 자고..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밥줘! 아침만 먹고 그냥 간다! 하면 가고... 그렇게 하면 그 부부가 올바른 가정생활이 될 것이냐. 안되는 것입니다. 부인도 남편과 대화를 하지 않고 아침밥만 먹으면 빨리빨리 청소해 놓고 난 다음에 자기 친구들과 놀러 가고 모임에 가고 혹은 직장에 나가버리고 늦게 들어와서 저녁에 남편은 밖에서 먹고 오시오. 나는 오늘 바뻐서 못들어옵니다. 그와 같이 하면 대화가 안되기 때문에 깨어집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깨지는 이유는 대화가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모르고 아내도 남편을 모르고 좋은 일도 나누지 못하고 슬픈 일도 함께 짊어지지 못합니다. 대화가 안되니까. 그저 동거인으로 있다가 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만날 때도 별볼일 없이 만났겠지만 헤어질 때도 슬픔도 없이 헤어지는 것입니다. 동거인이었다가 바이바이하면 그것뿐인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을 그와 같이 모시고 있으면 안됩니다. 예수 믿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 그냥 계시는가보다 그리고 나는 내 마음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신 것을 관심을 기울이면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감사하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분을 도와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원하고 힘을 주시기를 원하고 기름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면 성령께서 외롭게 혼자서 어떻게 대화를 합니까? 혼자서 대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기를 원하시지만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속에 계시므로 우리가 대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받고 방언 받았으니 그로써 다 되었습니다. 그것 아닙니다. 제가 50년 목회 동안에 세계 다니면서 가장 깨우치기를 원하시는 것은 성령님이 살아계신 인격자이므로 인격자로 대우하라. 내가 여러분 집에 왔는데 환영도 하지 아니하고 있을 곳으로 안내도 안해주고 그냥 팽개쳐 버리면 당신 집에서 나가지 집에 있겠는가. 푸대접하는데 왜 있겠는가. 성령이 모든 사람 속에 슬퍼하는 것은 푸대접을 한다. 인정도 아니하고 환영도 하지 아니하고 모셔들이지 아니하면 어떻게 역사하느냐.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 섰지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저희 속에 충만합니다. 제 입술을 잡고 있는 것을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저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강단에 올라오기 전에 성령님 함께 갑시다. 성령님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나는 성령께 의지합니다. 함께 나가십시다. 함께 갑시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성령님 함께 갑시다. 시장도 함께 가고 학교도 함께 가고 사업도 함께 하고 염려도 함께 하고 성령님 함께 도와주시옵소서. 기도도 혼자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성령님 기도하오니 기름부어 주셔서 성령님이 기도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생활에 성령님은 돕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지 아니하면 여러분 손해입니다. 성령님은 아무것도 안하기 위해서 와 있지 않습니다.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도우시면 몸이 찌릿찌릿 하든지 몸이 흔들리든지 떨리든지 해야지요. 대개 주님이 몸을 떨리게 한다든지 찌릿찌릿하게 하는 사람은 아주 신앙이 어린 사람이 그렇게 하지 성장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고 느낌도 없고 아무 일도 안한 것 같지만 성령님은 여러분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듯 모르는 듯 여러분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공기가 있지 않습니까? 공기가 꼭 바람이 되어야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가 있는 것 느끼지 않아도 항상 공기가 있기 때문에 숨쉬고 살지 않습니까? 폭풍우가 되어서 불어오고 나무가 뽑히고 집이 날라가고 그렇게 해야 바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수한 때고 조용하고 소리도 없이 느끼지 못해도 공기가 있어서 숨쉬고 사는 것처럼 성령님은 지금 여러분과 잠잠히 계신 것입니다. 고요하게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도움을 청하십시오. 도와주십니다. 안 믿는 사람은 성령이 안계시지만 여러분은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인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다른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도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가운데 있을지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와 같이 있고 사랑이 같이 있어도 이는 성령의 교통을 통해서 너희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교통하면 예수님의 은혜를 퍼부어 주시고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인데 성령이 교통 안하면 예수님의 은혜도 사랑도 체험하지 못하는 그림의 떡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성령과의 교통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은혜로 여러분의 감정도 달라지고 소원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7절로 10절에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 곧 옛사람 어떤 사람이냐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이렇게 옛사람을 벗어버리는데 내 힘으로 못벗고 성령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옷도 자기 마음대로 벗었다가 입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돕는 자가 필요해요. 옛날에 윤치영씨가 나이 많으시면서 골프장에 운동하러 나와서 혼자서 운동을 하는데 제가 친해서 저하고 늘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한국에 저명한 지도자 아닙니까? 그가 하는 말이 조목사, 내가 고백을 하는데 마누라 있을 때는 필요한줄 몰랐는데 없고 나니까 너무나 너무나 필요해. 뭐가 필요하냐고 하니까 나 혼자 양말을 신을 수가 없어. 마누라 있을 때는 낑낑 거리면서도 양말을 신겨주고 옷도 벗겨 주고 옷도 입혀 주고 그렇게 해주었는데 마누라 없으니까 당장 양말을 나 혼자 신으려고 하니까 양말을 신기가 얼마나 힘이 들고 옷벗기도 힘이 들어서 겨우겨우 옷을 벗고 옷을 입는다네. 그러니 마누라 있을 때 중요한 것 알아라. 죽고 나면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성령도 우리에게 옛사람을 벗었는데 여러분 힘으로 못 벗어요. 여러분 힘으로 분한데 삭힐 수가 없고 성이 나는데 잠재울 수 없고 악의와 비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이 나오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 성령이 도와주시라고 부탁하면 성령이 와서 벗겨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분함도 가라앉혀 주시고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입술의 부끄러운 말도 제하여 주시고 거짓말도 제하여 주시고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감정과 소원과 생활이 달라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되니까 여러분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4. 세상 언어와 천국 언어
마지막으로 우리의 세상의 언어와 천국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마음의 표현의 도구인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고 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말합니다. 말로써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 언어는 세속의 길, 천국 언어는 천국문화의 가슴을 안고 있는 것을 밖으로 내는 것입니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4)고 말한 것입니다.
말과 성품은 동반자인 것입니다. 말이 어떠하면 그 사람도 그렇게 합니다. 말이 흉악한 말을 하고 악한 말을 하고 상처입힌 말을 하면 그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속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이 고운 말, 아름다운 말, 사랑의 말, 깨끗한 말, 신령한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고 자기 친구도 환경도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고 말한 것입니다. 말은 여러분, 자기를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로 32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말을 통해서 이렇게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악한 말을 하고 남을 모욕하는 말을 하면은 그 마음도 그렇게 변화되고 이웃 사람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모든 악의와 함께 비방하는 말과 악독과 분냄과 떠는 것을 버리고 친절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말을 하면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것을 받아서 여러분도 그렇게 변화시키고 이웃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말이 여러분 인격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좋다고 말하면 나도 좋아지고 이웃도 좋아집니다. 내가 나쁘다고 말하면 나도 나빠지고 이웃도 나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못살겠다 하면 나도 못살고 이웃도 못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밉다고 하면 나도 미워지고 이웃도 미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약하다고 말하면 나도 약해지고 이웃도 약해지는 것입니다. 말은 나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주위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말은 여러분 우리 인생에 굉장한 변화의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 우리 뇌가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이 최근 연구를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성경이 그럴 뿐만 아니라 오늘 심리학자들이 뇌를 연구해서 우리말이 참말인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감사의 과학적 변화를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하고 말하면 뇌의 왼쪽에 있는 부분이 활성화되어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재설정(reset)’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에몬스 박사는 12세에서 80세까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그룹은 감사 일기를 매일 또는 매주 적도록 했고, 다른 사람은 그냥 아무 것이나 적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한 달 후에 조사를 해보니까 감사 일기를 쓴 사람 중 4분의 3은 행복해지고 수면이나 일, 운동 등에 더 좋은 성과를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면 그만한 변화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말과 성품은 동반자입니다. 우리말이 어떠한 가에 따라 그러한 사람이 됩니다. 평소에 고운 말, 아름다운 말, 사랑의 말, 깨끗한 말, 감사의 말 등을 하면 얼굴도 달라지고 표정도 달라지고 환경도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왜 말을 이렇게 빨리 하느냐면 시간이 없어요. 마음이 급하니까 말이 빨라지고 말이 빨라지니까 마음이 더 급해지네요. 말은 우리 인격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결론>
신앙생활의 결과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결국에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 동안에 주님 축복으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지만 이것 영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의 생일이 끝나고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격자가 되면 그 인격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오직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금세와 내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면 변화받고 인격으로 자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은총을 받을 뿐 아니라 변화를 받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예수를 닮는 인격자가 되기를 목표로 하고 노력하기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