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트볼의 원인은 버팔로 그래스였다.
미국은 인디언만 제노사이드 한 것이 아니다. 인디언의 몇 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넓이의 북미 대륙에 살던 버팔로(buffalo)를 살육했다.
버팔로를 사냥한 이유는 처음에는 인디언들의 가장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옷의 재료, 각종 생활 도구의 재료였던, 버팔로를 죽여서 인디언들의 생활 기반을 부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고기를 위해, 비료의 재료, 가죽을 얻기 위해서 등 철도 건설의 방해가 되는 버팔로를 철도 사냥단 까지 조직해 대량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버팔로는 19 세기 말에는 천여마리 밖에 남지 않았으며, 지금은 복원을 하여 50만 마리가 있으나 순종 버팔로가 아니라 교배로 만든 잡종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버팔로 먹이였던 목초 버팔로 그래스(buffalo grass)를 농업을 위해 전부 파버린 것이다.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국도에서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떠돌면서 일과 먹을거리를 찾았다. 그리고 서서히 분노가 발효를 시작하고 있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의 1920년대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흔히 광란의 20년대(The Roaring 20's)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발전을 많이 했다.
대량생산 체제의 선구자인 포드 모델 T가 나왔고
스포츠 중계가 대중화되면서 상업 스포츠가 활성화되었으며 당시 최초의 고층 빌딩인 크라이슬러 빌딩 건축까지 화룡점정을 찍었다
유일하게 농업 부문은 문제가 존재했다.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농산물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고, 당연히 미국은 이 틈새시장을 노리고자 했다. 농민들은 무지성으로 개간을 하기 시작했고, 대량 생산을 하며 큰 이익을 보았다. 하지만 종전 이후에는 다시 가격이 떨어졌고, 대부분의 국가들이 보호무역주의를 경제 기조로 삼으면서 수출로 돌파구를 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여전히 1920년대의 강우량은 풍부했기 때문에 일단 농산물 경작을 늘려가며 좋은 때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런 낙관주의를 비웃듯이 1933년부터 4년 동안의 대기근이 발생했다. 문제는 가뭄만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농민들이 몰상식하게 경작을 했던 스노우볼이 구르기 시작했다.
개간을 하기 전의 초원에는 버팔로 그래스라는 풀들이 깔려있던 대지를 경작지로 바꾸었는데, 이 풀은 흙이 흩어지지 않도록 제자리에 잡아주고 땅이 마르지 않도록 습기를 머금는 특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이를 몰랐기 때문에 다 갈아버렸다. 이에 더해 20세기 초반의 미숙한 건조 농법과 휴지기 설정을 하지 않은 판단들은 토양 황폐화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겉으로 드러난 토양은 강한 바람에 날리기 시작하면서, 높이가 3km를 넘을 정도의 거대한 모래 폭풍이 텍사스주와 오클라호마주를 중심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이때 피해를 입은 경지는 무려 1억 에이커(약 40만 k㎡)였다.
결국 계속되는 농지 황폐화와 가뭄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로 인해 무려 50만 명에 이르는 이재민이 발생했고,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66번 국도를 따라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들처럼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일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오키(Okies), 즉, 오클라호마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대공황 시대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조드 가족도 이들과 같은 오키였다)
다행히 1937년부터 다시 비가 정상적으로 내리기 시작하고, 루즈벨트가 뉴딜 정책 중 농업을 살리는 정책들로 어느 정도 회복을 했다. 이후에는 농민들에게 철저한 농업교육을 통해 1940년부터는 정상화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 시절의 무서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중 관리 구역으로 설정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