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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와 동이족(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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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순(舜=하나라 순임금)은 동이 사람이고 주나라 문왕은 서이(西夷) 사람이었다. 살았던 곳은 서로 1천리 가량 거리가 있고 살았던 때는 서로 1천년 가량 거리가 있으나 중국에서 뜻을 이루어 왕이 된 점은 모두 같았다..."
하나라의 순(舜)임금과 주나라의 문왕(文王)은 모두 중국 고대사의 중심인물로써 중국문명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동이족이었다는 것이다. 맹자라는 대 학자가 동이족이 중국문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실토한 것이다. 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에 옛 법이 없어져도 이(夷)의 나라에는 그대로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 말이 옳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는 진시황도 그 조상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서이(西夷)에 이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주(周)나라를 세운 문왕이 만난 최초의 명재상 태공망(강태공) 여상(呂尙)도 동이족이었다. 중국의 고대 인물들을 논하는 '18사략'이라는 책에서는 여상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상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동쪽 바다에서 살았다. 궁색하고 구차하며 나이는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주나라에 이르러 위수에서 낙시질을 하고 있었다....
강(姜)씨 성을 가졌던 여상은 주나라 문왕이 고대하며 찾던 재상감이었으며 6도(韜), 삼략(三略)등의 책을 써서 주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했고 나중에는 제(齊)나라에 봉해져서 제나라의 조상이 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동쪽 바다에서 왔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쪽은 곧 동이(東夷)를 의미한다.
하(夏)나라의 순(舜)왕이 이(夷)족이었다는 맹자의 말은 '사기'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또 순임금에 이어 우임금이 된 우(禹)라는 인물은 9년홍수 후의 중국대륙을 다듬어서 물길을 내고 산을 뚫는 거국적인 토목공사를 한 사람이다. 이 '우'라는 인물에 대한 중국의 신화를 요약하면 우는 회계산(會稽山)에서 각처의 군신들을 소집했고 그곳의 한 굴 속에서 고대의 신 복희를 만나 옥간이라는 특별한 기구를 건네받아 치수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도산(塗山)에 이르러 한 꿈을 꾸었는데, 꼬리 아홉 달린 흰 여우를 만났다고 한다. 꼬리 아홉 달린 흰 여우는 예로부터 청구(靑丘)국에 나타난다는 영물로서 그 여우가 나타나면 나라에 경사가 생긴다는 전설 때문에 기쁘게 여긴 우는 그곳에서 만난 여교라는 여자와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 청구국은 9환족의 치우천왕이 세운 이(夷)족의 나라였다.
우(禹)가 회계산의 동굴에서 만나 옥간이라는 특별한 기구를 건네받았다는 고대의 신 복희는 '동방의 제왕'이었다. 동방의 제왕이란 곧 동이족의 왕이란 뜻이다. 그리고 복희는 우의 시대보다 수백년 앞선 신시(神市)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치수의 공로자 우가 동굴에서 복희를 만났다는 것은 동이족에게서 치수의 방법을 전달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우의 신화는 복희시대와 신농, 황제시대를 지나 황제의 증손자였다는 요임금 다음 순임금 때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가 수백년이나 앞선 시대의 인물 복희를 동굴에서 만날 수 있었겠는가?
그 시대에 있었던 홍수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대홍수가 아니라 요순(堯舜)시대에 있었던 9년홍수를 말하는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회계산의 집합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태자(단군왕검의 아들)는 도산(塗山=회계산의 본래 이름)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삼한 중에 중국대륙에 있었던 고조선의 한 갈래)을 통해서 우(禹)사공에게 고하여 가로대,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은 이것으로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이와같이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을 받아 치수하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으고 하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禹)공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회계산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것과 신침이나 옥간 같은 신기한 물건을 이용해서 거대한 대륙의 치수사업을 완수했다는 점에 있어서 중국과 단군조선의 신화는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중국의 이야기는 동이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대신 고대의 신 '동방의 제왕 복희'를 거론하고 있는 점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동방의 제왕 복희는 우공이 치수를 했던 순임금의 시대보다 5-6백년 가량 거슬러올라가는 신시(神市)시대의 인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나라가 시작된 것은 단군조선과 같은 기원전 2300년 경이었고 복희가 살았던 대홍수의 시대는 히브리 신화서의 연대기에 의하면 기원전 2700년 경의 일이었다.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의 순임금에 관한 기록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
2월에 순임금은 동방을 순수하고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드리고....이때 동방의 제후를 소견하고 절기와 월분 및 하루 시간의 표준을 정하였으며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순인금이 동방의 제후를 만났다는 위의 이야기를 환단고기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나게 했다.....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바 '동쪽으로 가 망제(望祭)를 지내고 동후(東后=동쪽 제왕)를 찾아뵙다'가 바로 이것이다....(번한세가 상)
중국의 사기와 서경에서 말하는 '동방의 제후를 만나다'는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를 만난 도산에서의 회합을 뜻하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또 환단고기의 '삼한관경본기'에서는 도산에서의 만남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전한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단군왕검의 아들)는 명을 받들어 도산(회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 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순임금)도 역시 사악(四岳=신하)을 인솔하고 와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와 대 사이(황하, 양자강 하류지역)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삼한관경본기)
순임금이 4악을 대동할 때에 치수의 공로자 우(禹)가 4악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임금이 태산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바로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와 함께 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산이 있는 산동반도는 바로 동이의 제왕 치우천왕이 세웠던 청구국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사기에서는 황제(黃帝), 복희(伏犧) 이전에 천황, 지황, 인황이 있었다고 말하고 환단고기에서는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삼태극(三太極)의 존재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아홉의 인황이 있었다고 하고 환단고기에서는 구황(九皇)의 존재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구황의 지도를 받던 구환(九桓)의 존재들은 중국의 삼위, 태백지역으로 이주한 후 환웅(桓雄)의 계도를 받으며 배달국(培達國)을 세웠는데 그 치세가 18대 3300여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5대 환웅 태우의의 막내아들이 복희였으며 중국신화의 황제 역시 환웅에서 갈라져 나간 소전(小典)의 후손이라는 것이 환단고기의 기록이 말해주는 동이족과 중국 조상들의 관계인 것이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은나라의 조상과 동이족의 조상이 같다고 주장한 것은 충분한 사료(史料)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기의 기록에서는 요임금의 계보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요임금이 황제의 증손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세부적인 기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기록을 보자.
제곡(요임금의 아버지)은 진봉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방훈을 낳았다. 또 추자씨를 아내로 맞아 지를 낳았다. 제곡이 세상을 떠나고 지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요임금이다. 요임금이 바로 방훈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기록이며 모순성을 지닌다. 방훈은 진봉씨가 어머니이고 지는 추자씨가 어머니다. 그리고 지가 제위에 올라 요임금이 되었다 했다. 그런데 어떻게 요임금이 곧 방훈일 수 있겠는가?
또 요임금의 시조(始祖)는 문조(文祖)라고 말한다.
마침내 순(舜=요임금의 후계자)은 문조의 사당에서 요임금으로부터 천자의 자리를 선양받았다. 문조(文祖)는 요임금의 시조다....순은 문조묘에 가서 사악과 의논하여 사문을 활짝 열고 사방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요임금의 시조를 황제라 하지 않고 왜 문조(文祖)라 했을까? 위의 기록들은 분명 요임금이 황제의 후손이 아님을 증거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사기에서 말하는 요임금의 계보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쓴 것은 후한의 초기였다. 다시 말해서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함과 동시에 단군조선이 망했고, 그때부터 동이족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아전인수적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요임금의 조상이 동이족이었다고 기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사마천은 임금에게 간한 말 한마디로 인해 궁형(성기를 자르는 형벌)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기록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황제의 손자였다는 고양씨(전욱)에게는 여덟의 유능한 자손이 있었으나 요임금은 그들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제의 손자 고양씨와 요임금이 같은 가계였다면, 당시의 걸출한 인물들이어서 팔개(八愷)라고 불렸다는 문중 인재들을 요임금은 왜 아무도 기용하지 않았을까? 순임금이 동이족을 선조로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듯이 요임금도 황제의 후손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요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같은 시대에 동북쪽의 송화강 유역에서는 단군왕검이 흐터졌던 9환(桓)의 후예들을 모아 단군조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두 나라의 탄생을 하늘이 축하하고 있었다. 단군조선의 출발을 축하하기 위해서는 즉석 동물원을 만들어 그 안에 곰과 호랑이, 양과 소가 평화롭게 노니는 광경을 보여주었고, 요임금의 어짐을 치하하기 위해서도 같은 서상을 보여주었다. 요임금의 거처에 오르는 돌계단과 찬장에는 역협과 삽포라는 신기한 풀이 돋아나 달력을 대신하게 했고 냉장고(?) 역할도 했다고 한다. 역협이라는 풀은 매일 한 개씩의 잎이 돋아나 15개에 이르고, 16일 부터는 다시 하나씩 잎이 떨어져 그믐(30)에 이르면 하나도 남지 않기 때문에 몇날 며칠인지를 알 게 해주던 신기한 풀이었다고 한다. 삽포라는 풀은 스스로 흔들려 바람을 내기 때문에 찬장의 음식이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그런 설화들이 고대인의 상상으로만 생각되었으나 뉴에이지 메시지들은 그런 놀라운 생명공학 기술이 실재함을 말해주고 있다. UFO를 탑승했었다는 접촉자들은 그곳의 식물과 꽃들이 스스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향기의 발산도 스스로 조절하는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하기 때문이다.
동이(東夷)는 은나라 사람들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복희), 제준, 제곡, 제순, 소호, 그리고 설 (계=은나라 시조)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위의 문구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펴낸 '고사변'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다. 동북공정이라는 억지역사설을 주장하기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들이 동이족이라고 주장하는 제곡은 바로 요임금의 아버지 고신씨다. 아버지 제곡이 동이족이었다면 그 아들 요임금도 분명한 동이족이 아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