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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4일 북경 한국총영사관
에 진입한 탈북자 26명 서울 도착.
▲한국 총영사관에 진입했던 21명과
대사관에 진입했던 2명, 지난 13일 중국
경찰에 체포된 원모(53)씨 등 24명(남자
13명, 여자 11명)은 태국 방콕을 거쳐
대한항공 KE654편으로 오전 8시45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지난 5월 23일 최모(40)씨가 맨
먼저 한국 총영사관에 진입한 이후 한 달
여 만에 중국 정부의 제3국 추방 형식으
로 한국 땅을 밟게 됐다.
이들은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으나 곧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한국에 입국
한 데 대한 기쁨을 표시했다.
베이징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들을 실은 한국 대사관의 소형 승합차가 23일 오후 영사관을 출발하고 있다.
▶ 2015년 자수성가 택시회사 대표 김광자씨, 50억원 평생 모아 ‘언지장학회’ 설립
6월 초,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의 60대 여성이 서울시교육청을 찾았다. 지난달부터 “장학회를 설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수차례 전화로 묻던 여성이다. 교육청에 온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재산을 물려줄 가족도 자식도 없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며 장학회 설립 신청서를 냈다. “택시 기사로 일하며 평생 모은 돈”이라며 내놓은 재산은 50억원에 달했다.
서울시 면목동에 있는 택시 회사 ‘평화교통’ 김광자(68) 대표가 개인 재산을 털어 일용직 근로자 등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재단 ‘언지장학회'9를 설립했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그는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20대부터 택시 기사로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러면서 주경야독으로 고졸 검정고시까지 마쳤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1981년 한 택시 회사를 인수, 여성 CEO가 됐다. 몇 년 뒤 ‘평화교통’의 전신인 ‘평화택시’를 설립, 현재 기사 100여명, 택시 65대에 이르는 중견 회사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그는 이번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만 교육청을 통해 “열악하게 살아가는 일용직 근로자들과 단기 계약 종사자 자녀들이 희망을 갖고 성실하게 사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2015년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의
맏딸 안수산 여사 별세
독립운동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맏딸인 안수산(100·미국명 수전 안 커디) 여사가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문학세계사가 밝혔다. 문학세계사는 2003년 안 여사의 전기 '버드나무 그늘 아래'를 출간했다.
5남매(3남2녀) 중 맏딸인 안씨는 1915년 미국 LA에서 태어나 샌디에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1942~1946년 미 해군에서 사격 교관과 정보장교로 근무했다. 미 역사상 최초 동양인 여성 해군 장교였다.
종전 이후 예비역 대위로 전역한 뒤에도 1951년 미 합참정보국에서 암호 시스템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전문가 300여 명을 교육했다.
1973년 도산공원 건립 소식에 처음 방한(訪韓)했으며, 1983년 도산의 유품과 자료 등을 정리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안 여사는 신한민보와 흥사단, 3·1 여성동지회 등에서 활동했다. 1994년 타계한 아일랜드계 남편 프랜시스 커디와의 사이에 아들 필립과 크리스틴 등 1남1녀를 뒀다.
▶2009년 나경우씨,
한국인 첫 'PGA 마스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나경우(41)씨가 2009년 6월 24일 미PGA로부터 마스터 프로페셔널 자격증을 획득했다.
미국 프로골프협회(PGA of America)는 수많은 골프 교습가들에게 경륜과 전문지식에 따라 다양한 자격증을 수여한다. 'PGA 마스터 프로페셔널' 타이틀은 이 가운데 최고봉으로 행크 헤이니나 짐 맥클린 같은 세계적인 코치들이 지니고 있는 타이틀이다.
나경우씨는 최근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PGA 에듀케이션 센터에서 최종 논문 프리젠테이션을 한 뒤, 이날 현지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골프 교육의 대가(大家)로 인정받는 PGA 마스터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PGA 클래스 A와 그 다음 단계인 PGA 공인 티칭 프로(CPP)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고, 8년간 실무 경험을 쌓아야 한다. 또 구체적인 전문 지식을 담은 책 한 권 분량의 논문을 제출해, 기존 마스터 프로페셔널들 앞에서 발표한 뒤, 심사를 거치는 오랜 '수행기간'을 거쳐야 한다. 1969년 미 PGA 마스터 프로그램이 창설된 뒤, 인스트럭터 분야에는 고작 172명에게만 마스터 자격증이 수여됐다. 일년에 4명에게만 문을 열어 준 셈이다. 현재 PGA클래스 A멤버는 2만8000명가량이고, PGA 공인 티칭 프로는 900명 정도이다.
나경우씨는 1992년 경희대 체육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샌디에이고 골프아카데미를 시작으로 17년간 공부와 레슨 프로를 병행하며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섰다.
▶2009년 원로 성악가 오현명씨 별세
▶2003년 배리 본즈
500홈런-500도루 달성
미국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39)가 사상 최초로 ‘500―500클럽’에 가입했다. 본즈는 24일(이하 한국시각)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벨 파크에서 벌어진 LA 다저스와의 홈 경기에서 연장 11회말 2루를 훔쳐 통산 500 도루를 기록했다. 이미 633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본즈는 이로써 메이저리그 사상 통산 500홈런과 500도루를 함께 기록한 첫 번째 선수가 됐다. 500도루를 넘긴 선수로는 통산 36번째.
본즈는 2―2로 맞선 연장 11회말 선두 타자로 나와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 에릭 가니예로부터 볼 넷을 얻어 출루한 뒤 다음 타자 안드레스 갤러라가 타석 제 2구째에 2루를 훔쳤다. 본즈의 예상치 못한 도루에 다저스 포수 폴 로두카는 2루에 볼을 송구하지도 못했다.
500도루를 성공시킨 본즈는 2루 베이스를 뽑아낸 뒤 환호하는 홈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본즈는 이어 1사 후 베니토 산티아고의 좌전 안타 때 홈을 밟아 팀의 3대2 승리를 이끌었다. 본즈는 이날 4타수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결정적인 도루로 팀의 4연승을 도왔다.
지난 1986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본즈는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73개)을 보유한 대표적인 슬러거지만, 2001년까지 16년 연속 두자리 수 도루를 기록할 만큼 발도 빠른 선수. 1996년엔 42홈런, 40 도루로 메이저리그에서 역대 두번째 ‘40-40클럽’에 가입했다. 그의 아버지 바비 본즈도 통산 5차례나 ‘30-30클럽’을 기록했다. 바비 본즈는 이날 경기 전 아들을 방문, 격려했다.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24일(한국시각) 열린 미 프로야구 LA
다저스전서 연장 11회 2루 도루에 성공,
역사적인 통산 500도루를 달성한 뒤
기념으로 간직하기 위해 2루 베이스를
뽑아 가져가고 있다.
1986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199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7 은퇴
최다 통산홈런 762개, 최다 단일시즌 홈런 73개, 13년 연속 30홈런, 시즌 최고장타율 2001년 0.863
단일 시즌 최고 볼넷 2004년 232회, MVP 7회, 18경기 연속 볼넷 기록, 500-500클럽
▶2001년 해군, 서해 북방한계선(NLL)
을 침범한 북한 어선에 경고사격
우리 해군이 2001년 6월 24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어선을 경고사격으로 물러나게했다. 백령도 레이더 기지에 북한 선박 1척의 NLL 침범이 처음 포착된 것은 이날 오전 2시50분경. 4시5분쯤 대청도에 있는 150t급 ‘참수리’ 고속정 편대(3척)가 시계 200야드의 안개를 뚫고 현장에 접근해 뱃고동 소리와 발광으로 정선을 명령한 뒤 국적을 물었다. 갑판 승조원은 “접근하지 말라우”라고 대답, 북한 선박임이 확인됐다. 9t급 소형 목선으로 배에는 ‘ㄴ-함-7501’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01년 6월 24일 오후 국방부에서
박정화 합동참모본부 해상작전과장이
이날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속정은 어선으로부터 80~90m쯤까지 접근, 정선을 명령했으나 북한 어선은 각목을 휘두르고, 횃불을 고속정 10m 앞에까지 던지는 등 위협 행동을 계속했다. 고속정은 사격 경고방송을 3차례 한 뒤 2함대사령관의 지시로 4시52분 K-2 소총으로 공포탄 9발을 발사했다. 5시쯤 북한 어선은 북상 의사를 밝힌 뒤 30여분 뒤 NLL을 넘어 북측 지역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2시간37분간의 상황은 종료됐다.
이날 우리 군의 경고사격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6월 한달동안만 해도 북한 선박이 수차례 우리 영해를 제집 드나들 듯이 유린해도 우리 정부와 군은 속수무책으로 관대한 대응해왔다. 북한 선박이 조직적으로 NLL을 침범한 것은 2001년 6월부터였다. 북한측은 6월부터 8월 사이에만도 10여 차례 이상이나 서해 북방한계선은 물론 제주해협 심지어는 독도 영해까지 잇달아 침범을 시도했다. 북한측의 동시다발적인 우리 영해 침범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유례없는 일이었며, 남북 해빙 무드를 틈탄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과 여론은 “국토수호의 의무를 유기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북한 선박의 NLL 침범 및 6.15 남북공동선언 이면합의 의혹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1998년 클린턴 미 대통령,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북경에서 정상회담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24일 취임 후 처음으로 9일간의 역사적인 중국 국빈방문에 나섰다.
클린턴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첫 방문지인 중국 시안에 도착, 진시황릉 등을 관광한 뒤 26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을 방문, 톈안먼(천안문)광장에서 열리는 공식 환영식에 참석하고 장쩌민(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클린턴 대통령은 26일 시안에서 교외 농촌지역과 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진시황릉의 병마용을 참관한 뒤, 오후 7시55분 특별기편으로 베이징에 도착, 숙소인 댜오위타이(조어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클린턴 대통령과 장쩌민(강택민) 국가주석은 27일 밤 국빈 만찬에서해방군 밴드를 차례로 지휘했으며, 장주석은 특히 중국 전통악기인 얼후인(이후인·2줄짜리 바이올린)을 연주, 인권 문제 등 양국간의 골칫거리를 잠시 접어둔 채 개인적인 우정을 나눴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8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 동편의 충원먼(숭문문) 교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본 뒤, 고궁(자금성)과 만리장성을 돌아보며 전날 정상회담의 피로를 풀었다.
클린턴은 이날 예배에 참석한 2천3백여 중국인 신도를 향해 “우리는먼 길을 왔지만, 이 교회는 집처럼 편안하다”며, “중국에서 교회가 늘어나는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인사했다. 그는 이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사도행전 17장26절말씀을 인용해서 “중국인과 미국인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9일 베이징(북경)대학 연설에서 중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미국의 논리’를 적극 전파했다. 그는 21세기 중국을 이끌어갈 청년 학생들에게 인권과 자유 등 보편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tv로 전국에 생중계된 이날 연설에서 올해 베이징대학이 1백주년을 맞은 것을 중국 말로 ‘궁시 베이다(공희북대)’라고 치하, 학생과 교수 등 1천여명의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2시간 이상에 걸친 연설과 질의 응답이 끝난 뒤, 베이징대학 총장은 동판에 베이징대학 건물을 배경으로 클린턴 대통령의 얼굴을 새긴 기념품을 증정했다. 이날 베이징대학 강연에는 스탠퍼드대학에 다니는 딸 첼시 양이 어머니 힐러리 여사와 함께 참석, 끝까지 경청했다.
▶1989년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 사망
한국계로 알려진 일본 가요계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가 1989년 6월 24일 5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미소라는 2년전 만성간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이래 투병생활을 계속해왔었다.
생선장수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그녀는 9살 때 첫 무대에서 천재소녀란 명성을 얻었다. 뛰어난 미모, 가창력에 매끄러운 스테이지 매너를 지닌 미소라는 1950년 ‘슬픈 휘파람’의 대히트로 예능계 여왕의 자리에 군림하며 일본 국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패전후 황폐해진 국토, 그 잿더미 속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했던 일본인들의 마음을 그녀의 노래가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항구의 13번지’ ‘슬픈 술’ 등이 그 대표곡으로 그녀가 남긴 노래는 1천4백여곡에 이르며 음반판매량만도 4천만장에 달했다.
이렇듯 일본 가요계에서 신격화됐던 그녀이지만, 현실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1962년 배우인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 1년반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후 혼자 살아오던 그녀는 1988년 4월 동경 돔에서의 컴백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일본의 정통 엔카 세대는 막을 내렸다. 그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신문들은 1면 또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취급,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일본대중문화에 기여한 그녀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1989년 장쩌민,
중국 당총서기에 선출
1989년 6월 24일 중국공산당 제13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 그 후임으로 덩샤오핑(등소평)에 의해 장쩌민(강택민)이 당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장쩌민은 장쑤성 양저우시 출신으로 상하이교통대학에 다니던 1946년 공산당에 가입, 1955년 모스크바 유학 후 기술경제 관료로 성장하였다. 문화혁명으로 한동안 밀려났다가 복귀한 뒤, 1985년 7월 상하이시장이 되어 상하이를 중국의 금융·산업중심지로 발전시켰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로 실각한 조자양에 이어 당중앙위원회총서기가 되고 11월 덩샤오핑에게서 당군사위원회주석을, 1990년 4월 국가군사위원회주석을 물려받은 데 이어 1993년 3월 국가주석까지 겸함으로써 당과 행정, 군을 총괄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기술관료로서의 장쩌민은 마오쩌둥(모택동)이나 덩샤오핑과 같은 카리스마는 갖지 못했으나, 대신 남다른 성실성과 정치력으로 인구 13억의 대국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장쩌민이야말로 사회주의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지도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프랑스 파리서
사학자유 요구 데모
▶1983년 서방19개국 정치지도자,
런던서 사회주의인터내셔날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민주연합(IDU) 발족
▶1983년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
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국내 발효
▶1981년 세계은행(IBRD),
중국에 첫 차관 제공 결정
▶1980년 김종필,
이후락씨 모든 공직 사퇴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 방일
▶1978년 북한, 유아의 가정양육 금지
▶1976년 구마고속도로 기공
▶1976년 미국의 식물 사진 작가
커닝엄 사망
▶1976년 베트남 첫 남북통일국회 개막
▶1976년 로물로 필리핀 외무장관,
아세안독트린 제창
▶1973년 미국-소련 가상병기
사용금지 합의
▶1965년 월남, 프랑스와 단교
▶1960년 미국,일본 안보조약 발효
▶1960년 국회, 군정법령 55호,
88호 폐기. 신문, 정당등록법안 통과
▶1950년 제4회 월드컵
브라질에서 개막
▶1948년 소련, 서베를린 육로 봉쇄
베를린 시민의 식량공급을 위한 비행기.
1948년 6월 26일부터 미국, 영국에
의해 시작된 물자공수는
1949년 10월 31까지 계속됐다.
소련이 1948년 6월 24일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공동 관리하는 서베를린이 고립됐다. 2차대전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특히 소련점령지역인 베를린은 공동관리하에 있었다. 이러한 동서 양진영의 공동보조도 소련과 다른 3국과의 입장차이로 균열이 시작돼 1947년 런던에서 개최된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기도 했다.
봉쇄 전날 소련군의 소콜로프스키 원수는 독일의 소련점령지역에서의 통화개혁을 발표했고 다른 3국도 같은 날 새로운 통화인 독일 마르크를 발행했다. 소련은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항공로를 제외한 모든 교통로를 봉쇄했다. 더욱이 25일에는 베를린의 3국 점령지역에 대한 식량수송을 금지했다. 6월30일 미 국무장관 마샬은 `식료품과 물자 보급을 위한 공수를 단행한다`고 발표, 공수작전을 시작했다. 232만 5천톤에 달하는 공수는 1949년 10월31일에 중단됐다.
▶1947년 반탁투쟁위 결성
▶1947년 미국 아이다호주,
케네스 아놀드가 비행중 UFO를 목격
했다고 보고, UFO 최초 발견
▶1940년 프랑스-이탈리아
휴전협정 조인
▶ 1933년 아우토반 건설 公社 설립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는 즉시 아우토반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명칭은 ‘라이히스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도로)’. 아우토반 건설을 담당할 공사(公社)를 설립(1933년 6월 24일)하고 3개월 뒤에는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 간의 제1기 공사를 시작했다.
1933년에 아우토반 공사 현장을 방문한 히틀러가 삽질을 하고 있다.
17년 동안 1만7000km의 도로를 까는 것이 목표였지만 2차대전 발발로 히틀러는 생전에 4000km 만 볼 수 있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1926년부터 ‘하프라바(HAFRABA)’라는 민간단체가 아우토반 건설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하프라바’는 고속도로 연결 예정지 함부르크·프랑크푸르트·바젤(스위스)의 머리글자에서 딴 명칭이다. 히틀러가 아우토반에 매달린 이유는 1차대전 때 마른 전투의 패인이 수송력 부족에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650만의 실업자를 구제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를테면 공황 타개를 위한 독일판 뉴딜정책이었던 셈이다.
아우토반은 경부고속도로와도 인연이 깊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방문길에 올라 본·쾰른 간 20km 구간을 160km로 달려본 뒤 경부고속도로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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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프랑스 프랑크화
5분의1로 평가절하
▶1915년 미국,
연합국측에 대차관 제공
▶1910년 일제,
한국 경찰권 완전박탈
▶1905년 국고증권조례 공포
▶1903년 국문학자 양주동 출생
▶1901년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 출생
1901년 6월 24일에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朴敬元)이 조종사로서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7년 1월, 3등 조종사 시험에 합격하면서였다. 이 당시의 도쿄 아사히 신문은 ‘조선출신 여성비행사 1호 탄생’이란 기사를 실어 그의 존재를 알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1901∼1933)
고국의 하늘을 날고 싶었던 박경원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33년. 서울을 경유해 중국 창춘(長春)까지 ‘일·만(日·滿)친선, 황군 위안’을 위한 장거리 비행이 허락된 것이다. 몰고갈 비행기가 없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고이즈미 현 총리의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체신대신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신사참배도 함께 하는 등 만남이 잦아져 둘 사이의 염문이 일본 신문 가십란에 실리기도 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박경원이 장장 2000km의 비행을 위해 청연호(靑燕號)를 몰고 고국을 향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그러나 50분 만에 그의 애기(愛機)는 하코네 중턱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청연호의 동체는 두동강났고 박경원은 핸들을 잡은 채 숨져 있었다.
▶ 1901년 피카소 19세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피카소가 1901년 6월 24일 1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전해 1900년에 이어 재차 파리에 온 피카소는 화상(畵商) C. 보라르와의 친분 덕에 그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피카소의 개인전을 관람한 한 미술평론가는 이 무명의 청년화가를 두고 ‘피카소는 화가이다. 근성부터 화가이다. 그는 색채를 색채로서 찬미하고 있다’고 격찬했다. 파리에서의 데뷔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향과 달리, 작은 체구에 까만 피부의 스페인 출신 청년화가 피카소의 그림은 단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자화상 1901년
청년시절을 모국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피카소는 그 즈음 캬바레나 선술집을 강렬한 색채와 역동감 넘치는 터치로 그려냈다. 그러던 어느날 풍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동행했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으로 권총 자살을 한다. 이 소식은 피카소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이 때부터 온통 푸른색으로만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계속된 ‘청색시대’의 시작이었다. 로맨틱한 파리생활의 또 다른 얼굴에는 잔인한 고통, 정신이상이 될 것 같은 현실이 있었다. 질병과 추위, 배고픔을 체험한 피카소는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을 짙푸른 청색을 통해 나타냈다. 이 시절 파리에서의 체험은 향후 그에게 사회 저변에 꿈틀거리는 어두운 존재들을 어두운 파란 색을 주조로 그리게 했다.
▶ 1894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제4대 대통령 카르노 사망
▶ 1894년 `킨제이 보고서`를 낸 알프레드 킨제이 출생
▶ 1892년 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김은호 출생
▶ 1886년 개신교,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
▶ 1883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헤스 출생 - 우주선(宇宙線)의 발견으로 193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 1881년 멕시코서 열차 추락. 200명 사망
▶ 1859년 솔페리노 전투
[역사 속의 인물] 국제적십자 창설 앙리 뒤낭
'아침해가 떴을 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처참한 광경들이 드러났다. 길과 웅덩이, 수풀과 들판에는 시체들과 부상자들이 널려 있었다.'``` 불쌍한 부상자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오! 선생님, 아파 죽겠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버려져 죽고 있지만 우리들은 훌륭히 싸웠습니다."(솔페리노의 회상)
야만의 시대였다. 추악한 영토 전쟁과 무자비한 살육, 그것만이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가치인 듯했다. 1859년 오늘, 이탈리아 북부에서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솔페리노 전투가 벌어졌다. 사상자만 4만 명이었고 부상자 상당수는 길에서 죽었다.
이 참상을 우연히 지켜본 스위스의 청년 사업가인 앙리 뒤낭(1828~1910)은 '솔페리노의 회상'을 쓰고 부상자를 돌보기 위해 초국가적인 구호단체를 설립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863년 2월 17일 제네바에서 그의 제안을 실천하기 위해 '국제부상자구조협회'가 발족됐는데 현재의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출발점이다. 열정적인 한 청년의 헌신과 봉사로 인해 인류는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진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 1852년 디프테리아균을 발견한 독일 세균학자 뢰플러 출생
▶ 1838년 독일 경제학자 구스타프 폰 슈몰러 출생
▶1434년 장영실(蔣英實)·김빈 등,
자격루(自擊漏) 제작
자격루가 탄생하게 된 이유
세종대왕 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수압을 조절하는 3단의 수위 조절용 항아리, 낮과 밤을 번갈아 이용하는 두 개의 물받이 통 그리고 종과 북, 징과 같은 자동 시보장치를 갖춘 물시계로서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진일보한 것이었다. 자격루가 발명되기 전, 세종대왕은 장영실로 하여금 경점지기(更點之器)라는 물시계를 만들게 하였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먼저 항아리를 층층이 놓은 다음, 맨 위쪽에 위치한 항아리에 물을 채워 아래쪽의 항아리에 차례로 흐르도록 한 것이었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아래에 있는 항아리에 일정하게 물이 공급되도록 하여 그 안에 눈금을 매긴 잣대(자의 종류)를 띄워 놓는다. 그러면 항아리 안의 물이 늘어나는 대로 잣대가 떠오르는데, 이 잣대의 눈금을 읽어 시각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물시계는 밤낮으로 사람이 지키고 있다가 잣대의 눈금을 읽어야 했으므로 매우 불편하였다. 이를 안 세종대왕은 “사람이 눈금을 일일이 읽지 않고도 때가 되면 저절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를 만들라.”고 다시 지시하였고, 세종 16년(1434년) 장영실은 ‘자동 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인 ‘자격루’를 완성하였다.
덕수궁에 보관된 국보 229호 자격루.
이는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것을 개량
하여 중종 때 새로 만든 것이다.
자격루 이전에도 물시계는 많았다. 물시계는 유입식과 흡입식이 있는데 유입식은 물이 흘러가는 양으로 시간을 아는 것이고, 흡입식은 물이 흘러들어오는 양으로 시간을 측정하게 된다. 자격루는 이러한 흡입식과 유입식 기술이 모두 사용되었고 여기에다 자동적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까지 더해진 것이다. 이렇게 정확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궁궐에서 호위병들이 업무교대를 하거나 성문을 여닫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성문을 여닫는 시간이 들쭉날쭉하면 일상생활의 혼란을 주는 것은 물론 임금에 대한 신뢰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또 하나 자격루 탄생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전쟁 때문이다. 전쟁할 때 여러 부대가 연합하여 작전하려면 제시간에 군대를 정확하게 이동시켜야 했다. 그래서 세종대왕 때 시계를 만들어 가장 먼저 보낸 곳이 군사적으로 위협이 상존하는 국경 변방이었다. 이와 같은 국가적 필요로 인해 정확한 시계를 만들어 활용하였으며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자격루의 작동 원리
그렇다면 자격루는 어떻게 자동으로 시간을 알렸을까? 세종실록 65권 [보루각기]편에 적힌 자격루의 원리를 살펴보면,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있는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에 있는 쇠알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 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알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 징, 북을 울린다.’라고 적혀있다. 자격루는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물 항아리 부분), 물시계로 측정한 시간을 종, 북, 징소리로 바꿔주는 시보장치(종,북,징을 치는 인형 부분), 물시계와 시보장치를 연결해주는 방목(方木)이라는 신호발생장치(2개의 네모기둥/잣대)로 구성되어 있다.
자격루의 작동 원리 <출처: 국립과천과학관>
물이 일정하게 흐르는 이유
위 그림에서 보는 물 항아리를 ‘파수호’라고 한다. 자격루는 물 항아리의 크기에 따라 대파수호와 중파수호, 소파수호로 구분된다. 이 세 곳의 파수호를 거쳐서 나온 물이 수수호(긴 원통형으로 생긴 2개의 물받이통)에 일정하게 채워지면서 수수호에 있는 잣대가 위로 떠오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바로 부력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 잣대에는 길이는 잣대만큼, 폭이 2촌(약 6cm)인 구리판을 넣게 되는데 이 구리판에 12개의 구멍을 뚫어 작은 구리 구슬 12개가 들어가게 하였고 이 모든 구멍은 열고 닫을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자격루가 시계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수수호에 일정하게 물이 채워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정하게 물을 흐르게 하는 핵심 역할은 바로 소파수호이다. 대파수호에서 물이 직접 수수호로 들어가게 되면 통에 채워지는 물의 높이가 일정하게 변하지 않는다. 이는 수압이 물의 높이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파수호와 수수호 사이에 소파수호를 둠으로써 소파수호에 늘 물이 가득 차게 하여 물의 높이를 일정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수호에 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자동 시보장치의 비밀 – 뻐꾸기시계의 알람 소리
문헌을 토대로 건국대학교 남문현 교수가 복원한 자격루 복원도
<출처: 국립과천과학관(남문현 교수 기증자료)>
파수호에서 떨어진 물이 수수호로 흘러들어 가면서 수수호에 꽂힌 잣대가 점점 올라가게 되는데 잣대가 어느 정도 높이게 이르게 되면 잣대 안에 있는 구리판 구멍의 여닫이 기구가 뒤로 젖혀지게 된다. 그 구멍으로 잣대의 작은 구슬이 자동 시보장치와 연결된 구리통으로 굴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구리통으로 굴러 들어온 작은 구슬이 밑으로 떨어지면 그 아래에 있던 숟가락 받침 모양의 기구가 이 구슬을 받게 된다. 즉 작은 구슬이 숟가락에 떨어지면 그 구슬이 떨어질 때의 에너지 때문에 숟가락 손잡이 부분이 뒤로 젖혀지게 되고 차례로 큰 구슬이 굴러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반복하면서 큰 구슬은 2층에 세워져 있는 3개의 인형의 팔뚝을 건드리게 되고 자동적으로 3개의 인형의 팔이 움직이면서 종, 북, 징을 치게 된다. 쉽게 말해 우리 주변에 있는 뻐꾸기시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각종 연산장치들을 갖춘 디지털시계
엄밀히 말해 자격루는 물시계에서 측정된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시켜주는 변환기, 그리고 십이시(十二時 / 낮 시간을 12시간으로 구분하여 알려주는 시간 계산법)와 경점법(庚點法 / 하룻밤을 5경으로 나누고 매 경을 다시 5점으로 나누던 고대의 시간 계산법: 해가 진 후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부터 동이 틀 무렵까지 적용)에 맞추어 고안된 각종 연산장치들을 갖춘 디지털시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보장치에는 시, 경, 점을 담당하는 3개의 시보인형이 각각 종, 북, 징을 칠 수 있는 기구를 들고 있다. 인형 가운데 하나가 종을 울리면 곧바로 시보장치 안에 있는 십이지신(十二支神) 가운데 그 시에 해당하는 동물 인형이 시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나온다. 예를 들면 자시(子時)에는 자시를 상징하는 쥐가 ‘자’자가 적힌 팻말을 들고 나와 지금 울린 종소리가 ‘자시’임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머지 2개의 인형은 밤 시간에만 경점의 숫자대로 북과 징을 울려주었는데, 즉 1경 1점에서 북과 징을 울리기 시작하여 5경 5점까지만 작동했다. 예를 들어 1경 3점이 되면 북을 1회, 징을 3회 울려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과천과학관에 전시된 자격루 복원 모형
15세기 공학기술의 백미 – 자격루
자격루 작동 원리의 핵심은 물의 흐름을 동력원으로 사용하여 이 힘이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즉 물의 낙차를 이용해 생긴 부력으로 구슬이 움직이면서 계속적으로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시켜 시간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뛰어난 디지털 기능을 갖춘 자격루에도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 잣대에서 떨어진 구슬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는 일, 그리고 물을 갈아주는 일은 모두 사람이 해야 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격루는 15세기 초 제어계측 기술의 백미이며, 우리나라 공학기술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명품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https://youtu.be/LsMpQ_Cc25k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