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문화와 아프리카의 문화가 만나다!
로큰롤의 역사 어느덧 50년. 이제는 줄여서 록(Rock)으로 널리 통용되는 로큰롤은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대중음악의 중추로 자리 잡았지만, 그 정의를 딱 부러지게 얘기하고 그만큼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언젠가 '폭발하는 젊음의 반항 코드'라고 정의를 내렸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젊음의 표현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단지 '시끄러운 음악'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로큰롤이 미국 땅에서 1950년대 초반에 생성의 기운이 싹텄다는 것이고 그 시절은 갈라져있던 백인과 흑인의 문화가 서로 거리를 좁히던 때였다는 사실. 다시 말해 로큰롤은 '흑백문화의 융합'이 가져온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천대받던 흑인의 음악이 어떻게 백인의 것과 만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인데, 전반적으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그 시절에도 일부 백인들은 적어도 음악만은 흑인의 것에 끌렸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로큰롤은 그리하여 흑인의 음악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흑인의 음악은 바로 블루스(Blues).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미국 흑인들의 한과 분노가 표출된 블루스가 오늘날 로큰롤의 기초를 이룬 셈이다.
그룹 유투(U2)의 보노(Bono)가 “로큰롤은 두 개의 문화 즉 '유럽 백인의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만나서 잉태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 그 아프리카 문화가 다름 아닌 블루스인 것이다.
블루스는 흑인노예들이 목화를 따던 남부 미시시피에서 북부 시카고에 올라오면서 증폭 음, 다시 말하면 일렉트릭 기타에 의한 리듬 앤 블루스(Rhythm & Blues)로 진전한다.
초기 로큰롤의 제왕으로 불렸던(나중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타이틀을 뺏기지만) 리틀 리처드는 로큰롤을 “템포가 빨라졌을 뿐 리듬 앤 블루스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럼 유럽 백인의 음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컨트리(Country) 음악이다. 이 말은 당시 흑인들도 컨트리를 들었다는 말이다. “난 흑인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다.”며 컨트리 스타인 진 오트리(Gene Autry)를 열렬히 좋아했다는 흑인 가수이자 로큰롤 초기 인물로 꼽히는 행크 발라드(Hank Ballard)의 증언이 실증한다.
역시 흑인 가수인 척 베리(Chuck Berry)도 백인 컨트리 냄새가 물씬한 곡 'Maybellene'을 써서 로큰롤이 블루스와 컨트리 즉 흑백의 결합이 잉태한 결과물임을 몸소 증명했다.
물론 로큰롤이 형성되는데 블루스와 컨트리만이 작용한 것은 아니다. 루스 브라운(Ruth Brown)이 말해주듯 블루스와 뗄 수 없는 관계인 교회음악인 가스펠도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스윙을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하고 노래한 루이스 조던(Louis Jordan)은 재즈도 한 몫을 했음을 밝혀준다.
초기 로큰롤은 기존의 음악으로 앨범판매에만 혈안이 된 메이저 레코드사와 달리, 새로운 음악에 주의를 기울인 군소 레코드사들이 당시로는 혁신적 흐름인 로큰롤 앨범을 연이어 출시하면서 번창했다는 점도 중요한 사실이다.
메이저 음반사에서 활동하기 어려웠던 빅 조 터너, 보 디들리, 팻츠 도미노, 리틀 리처드, 척 베리, 빌 헤일리 등의 초기 로큰롤 영웅이 일제히 소규모 레코드사를 통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 빌 헤일리(Bill Haley)는 1955년, 자신의 그룹 코메츠(Comets)와 발표한 'Rock around the clock'으로 전미차트 1위에 올라 로큰롤 열풍에 불을 댕겼다.
하지만 그 모든 초기 로큰롤의 영예는 말할 것도 없이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차지였다. 그는 미국 멤피스 소재의 소규모 레코드사인 선(Sun)에서 데뷔한 뒤 1956년 메이저 음반사 RCA 빅터에서 발표한 기념비작 'Heartbreak hotel'로 미국 대중음악계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꿨다.
사람들은 같은 해 연이어 나와 줄줄이 빌보드차트를 정복한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Don't be cruel' 'Hound dog' 'Love me tender' 등에 철저히 사로잡혔다.
그는 흑인의 감성을 체득한 경이로운(육질이 좋은!) 가창력과 함께 잘 생긴 외모와 파격적인 허리 아래의 율동으로 경천동지의 충격을 일으키며 일세를 풍미했다.
그가 전국 TV 프로그램인 < 에드 설리번 쇼 >에 세 번째 출연했을 때, 카메라가 '격정적으로 흔들어대는' 허리 아래를 비추지 않은 사건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것 때문에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로큰롤의 제왕'(King Of Rock'n' Roll)에 등극했다. 엘비스의 등장과 함께 로큰롤은 갓 피어나자마자 대중음악의 중핵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피부색에 대한 편견을 버려라!!
엘비스 프레슬리가 쉽게 스타덤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점잖고 우아한 재즈와 발라드를 듣고 있던 당시의 기성세대는 소음에 몸을 마구 흔들어대는 로큰롤이 맘에 들 리 없었다.
더욱이 백인 중심일 수밖에 없는 기성의 제도권은 흑인의 요소가 강한 로큰롤에 빗장을 걸면서 맹공을 취했다. 그들의 눈에는 로큰롤이 한낮 '불량한 10대 비행청소년의 음악' 아니면 '깡패음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대갈등이 아닌 엄밀히 말해서 인종차별이었다. 50년대에도 흑인 가수의 레코드는 레이스(Race) 뮤직이란 딱지가 붙었으니까. 로큰롤은 흑인과 백인의 두 음악을 묶은 것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러한 인종주의 공세를 넘어서는 도덕적 우월성이 존재했다.
거기에 흑인에 대한 공평한 대우의 측면이 깃들어있다면 그것을 마다하기는 곤란하다. 로큰롤은 역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도덕적 토대를 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인 척 베리가 같은 로큰롤가수이자 백인인 칼 퍼킨스(Carl Perkins)에게 “우린 음악을 통한 장벽철폐에 워싱턴에 있는 정치인만큼 열심히 뛰고 있는 거야.”라고 말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발굴한 선 레코드사 사장 샘 필립스의 머리 속을 아른거린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흑인을 위해 무엇을 할까? 음악에는 인종이 없는 것! 피부색에 대한 편견을 버려라!”
그것을 떠나 당시 음악 팬들은 백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고, 흑인 척 베리의 리듬에도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로큰롤이 갖는 흥겨움과 솔직한 감정표현에 인종을 불문하고 포섭되어갔던 것이다. 한마디로 음악이 좋았기에 로큰롤은 단기간 내에 기존의 음악인 재즈와 발라드를 물리치고 대중음악의 선두로 비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창기에 활동한 로큰롤 가수는 무수히 많지만 10대들의 정서를 예리하게 대변한 탁월한 작사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였던 척 베리, 로큰롤의 광기를 몸으로 실천한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와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1950년대에 피아노에 발을 올려놓고 흔들어댔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Blue suede shoes'의 칼 퍼킨스, 낭만적 선율로 한국에서도 크게 사랑받았던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 그리고 안경을 쓴 버디 할리(Buddy Holly)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거목들이다.
버디 할리는 드물게 곡을 쓴 작가였음은 물론 미국의 텍사스와 인접한 멕시코, 이른바 텍스멕스(Tex-Mex)라는 독특한 리듬을 로큰롤에 이식하고 직접 크리케츠(Crickets)란 그룹을 이끌면서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이뤄진 '로큰롤 밴드'의 개념을 확립하는 등 천재적 역량을 과시했다.
하지만 버디 할리는 전성기인 1959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에 앞서 엘비스 프레슬리는 애국심을 보여주기 위해 군에 입대했고, 리틀 리처드는 신(神)의 부름을 받았다면서 갑자기 로큰롤 음악계를 떠났다. 척 베리는 미성년자 희롱혐의로 투옥되고 말았다. 초기 스타들이 일제히 사고를 당하면서 일시적 공백상태를 맞이한 것이다. 로큰롤의 위기였다.
게다가 로큰롤 노래를 틀어주던 라디오 디스크자키가 레코드제작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미국사회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패욜라(Payola) 추문으로 로큰롤은 더욱 수세에 몰렸다. 로큰롤의 산파역할을 했던 명 디제이 알란 프리드(Alan Freed)는 이 사건의 여파로 음악계에서 사라진 뒤 얼마 안 있어 사망했다.
어찌 이런 일이 동시다발로 터져 나올 수 있었을까? 제도권의 치밀한 '로큰롤 죽이기'였을까? 1970년대의 로커 탐 페티(Tom Petty)는 인터뷰에서 이를 '음모'라는 뉘앙스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랬어도 그 공백기에 로큰롤이 죽었느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로큰롤은 최고의 방송진행자 딕 클락(Dick Clark)의 프로그램 < 아메리칸 밴드스탠드(American Bandstand) >에 의해 트위스트(Twist) 열풍을 낳았고, 기민한 제작자 돈 커시너(Don Kirshner)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브릴 빌딩에서 일련의 작곡가를 양성하면서 로큰롤에 음악적 세련미를 부여했다. 3코드의 단순무식 로큰롤이 화성을 획득한 것이다.
당시 작곡가로는 나중 가수로도 성공한 캐롤 킹과 제리 고핀 콤비, 닐 세다카와 하위 그린필드 콤비, 신시아 웨일과 배리 맨 콤비 등이 맹활약했으며 프로듀서로는 하나의 기타가 아닌 두세대 기타로 사운드를 풍성하게 한 필 스펙터(Phil Spector)가 발군이었다.
그의 솜씨가 빚어낸 로네츠(Ronettes)의 'Be my baby'(1963년),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You've lost that lovin' feeling'(1964년)과 'Unchained melody'(1965년)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들의 음악은 초기 로큰롤의 거친 측면보다는 예술성에 역점을 두었고, 그 결과 어른들도 로큰롤을 납득케 하는 공적을 남겼다. 로큰롤은 비록 탄생기의 폭발력은 약화되었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져가고 있었다.
2005/09 임진모(jjinmoo@izm.co.kr)
첫댓글 ㅁ흑백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에두 많은수의 흑백혼혈들이 태어났지요.사랑은 흑백을
넘어서~ Black Is Beauty !
흑인들의Blues는 제생각엔 노동요 인거같아요. 일이 힘들어 시름을 달래는~
오직 내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