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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
- 트렌드를 창조하는 자 -
김영세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 2005년 5월 / 230쪽 / 12,000원
01 공상이 아니라 상상을 해라
02 생각을 그려라
03 무난함을 버리고 확실한 차이를 만들어라
04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용도를 창조하라
05 사소한 일상에서 보물을 발견하라
06 나만의 블랙박스를 가져라
07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생각은 예측하지 않은 보상을 준다
08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가져라
09 우선 자신을 만족시켜라
10 잘된 디자인만큼 멋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없다
11 자신만의 행복하고 편안한 공간을 창조하라
12 디자인은 자신감을 파는 일이다
13 삶을 모험처럼 즐겨라
14 미래를 움켜쥐어라
15 해결책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
16 자신의 의도를 끝까지 따라가라
17 기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이 돼라
18 유행을 쫓기보다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라
19 불편한 것을 참지 말고 해결하라
20 가장 가까운 사람을 즐겁게 하라
21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호하기 위해 실현하라
22 좋은(good) 것보다 적절한(right) 것을 만들어라
23 삶을 더욱 쉽게 만들어라
24 생명을 구하라
25 남을 위해 일하라
26 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라
27 협상가가 되어라
28 디자인 감각은 비즈니스 감각이다
29 움직이는 과녁에 집중하라
30 내용을 놔두고 방식을 바꾸어라
31 사랑하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32 전문가적인 열정을 가져라
33 타인을 감동시키는 논리를 가져라
34 쓸데없는 것을 찾아내고 버려라
35 여러 가지 모습을 한꺼번에 포용하라
36 스스로 세상에 필요한 일을 찾아라
37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영감을 놓치지 마라
38 정리하면 또 다른 창조가 된다
39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라
공상이 아니라 상상을 해라
상상은 너무나 재미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담임선생님께 칠판지우개로 한방 맞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며 상상하는 습관은 신기하게도 내 직업의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한국에 출장을 나오는 나는 그 어느 곳에서보다 비행기 안에서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 10시간 넘게 걸리는 비행시간 동안 사람들이 하나 둘 담요를 덮고 잠자리에 들기 시작할 무렵, 나는 개인용 라이트를 켜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해 나간다. 실제로 그동안 진행해온 수많은 디자인 프로젝트 중에는 기내에서 냅킨이나 메모지에 스케치한 아이디어가 출발점이 된 경우가 많다.
상상은 사람들이 원하는 욕구를 재빨리 파악하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해결책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머릿속에서 그리는 것만으로 끝내고 만다면 그것은 공상(空想)이 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빌 게이츠는 그의 회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남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는 성격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어떤 새로운 생각을 했을 때 남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했던 것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준비하지 않고 다니는 버릇이 있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종이와 펜을 마련하느라 허둥대곤 한다. 비행기 안에서도 이러한 버릇 때문에 허둥대며 승무원을 부른 적이 많다. 만약 승무원이 종이와 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냅킨 없어요?"라고 묻곤 한다. '성공시대'라는 MBC프로그램에서 내 이야기를 다룬지 얼마 안 지났을 때였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승무원으로부터 선물 상자 하나를 받았다. 집에 돌아와 상자를 풀어보니 항공사의 마스코트인 색동인형 한 쌍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인형 밑에는 스케치북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아내와 아이들은 안 봐도 알겠다는 듯 깔깔대고 놀려댔다. 불행히도 나는 아직도 비행기를 탈 때면 매번 메모지를 찾곤 한다.
무난함을 버리고 확실한 차이를 만들어 내라
2001년 12월, '레인콤'이라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한국기업의 대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의 책 『12억짜리 냅킨 한 장』을 보고 내게 디자인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지금은 세계 MP3 플레이어 분야의 선도주자가 된 아이리버 브랜드와 이노디자인은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당시 레인콤은 주문자 생산 방식으로 MP3 CD를 미국업체에 납품해 오고 있었는데, 이제는 자사의 브랜드에 사운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맨 처음 함께한 프로젝트는 미국 최대의 전자제품 유통사인 '베스트바이(Best Buy)'로부터 미국시장 진입 테스트제품으로 개발을 의뢰받은 '플래시 메모리 타입 MP3 플레이어' 개발이었다. 당시 레인콤은 플래시 메모리 타입 MP3 플레이어에 대한 생산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개발 기간도 4개월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우선 첫 번째 해야 할 과제는 기존의 MP3 플레이어 제품과 사용자들의 취향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프리즘이었다. 이는 사각형 일변도인 기존의 MP3 플레이어 제품보다 더 작고 새로운 삼각기둥 형태의 제품이었다. 기존제품의 부품 배치와 기능의 한계를 벗어나는 개발이었으므로 개발 과정에 진통이 많았다. 기존의 부품사이즈와 배치를 고려해 디자인했음에도 실제로 전혀 다른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발팀의 엔지니어들은 제품 사이즈를 1㎜라도 늘려줄 수 없겠냐고 요청했다. 그러나 레인콤의 경영진은 "꾸겨 넣어!"로 일관했다.
아직도 업계에서 "꾸겨 넣어!" 신화로 회자되는 이 단호한 단어는 레인콤 경영진의 경영마인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1㎜의 크고 작음은 소형 디지털 디바이스에서는 그 차이가 엄청나다. 이 크기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가 돼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베스트바이 측은 이 제품을 보자마자 '출시 후 6개월간 독점판매권을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프리즘은 그 시작부터 승승장구하여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며 세계 젊은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프리즘으로 불렸던 'IFP100' 시리즈 이후 레인콤과 이노디자인은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아이리버의 제품들을 잇달아 개발했다. 2002년 중반에 출시한 MP3 CD 플레이어 '슬림X' 개발과정은 프리즘 개발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결정 단계가 있었다. 당시 내가 제안한 레드와인 컬러는 기존의 전자제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너무 과감한 컬러였다. 때문에 당시 레인콤 경영진은 나를 믿고 제품 출시를 결정하면서도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결국 나의 예측은 적중해 함께 출시된 '무난한' 컬러인 실버보다 판매량이 앞섰다. 이후 소형 디지털 디바이스 시장에 과감하고 화려한 컬러가 잇달아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레인콤과 이노디자인의 만남으로 세계 MP3플레이어 시장이 재편된 지 3년이 흘렀다. 불과 매출 80억의 벤처 회사가 매출액이 수십 배로 증가하고 세계 1위 애플의 아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성장한 것이다. 레인콤 경영진은 마케팅과 고객 만족을 위한 기획 및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생면부지의 이노디자인을 찾아냈듯이 그들의 경영방식은 참으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강자가 될 수 없는 다변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지 끊임없이 '차이를 만드는' 도전만이 그 해답이 될 것이다.
사소함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라
지난 2003년 여름, 나는 가족들과 함께 하와이를 찾았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지인과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에 들어섰다. 딸 레아는 그날따라 자신이 애용하는 아이리버의 '프리즘 MP3 플레이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그런데 호텔에 들어서는 내 모습을 보고 호텔 입구의 종업원이 인사와 함께 말을 건넸다. "목에 건 디지털 카메라가 참 멋지네요!" 나는 '카메라가 아닌데···'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지만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깊이 감사했다. 바로 신제품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이었다. MP3 플레이어 밑에 조그만 디지털 카메라가 부착된 신상품을 떠올린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MP3의 배터리 공간 중 남는 부분에 180도 움직일 수 있는 카메라를 넣어, 셀프카메라를 좋아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춘 신제품을 디자인하여 서울의 디자인 스튜디오로 팩스를 넣었다. 그렇게 세계 최초로 MP3 플레이어와 디지털 카메라가 결합된 제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2004년 4월, '프리즘 아이'라는 애칭을 가진 이 제품은 8개월 만에 전 세계 시장에 출시되었다. 그리고 미국 산업디자이너협회(IDSA)와 「비즈니스 위크」가 수여하는 세계적 디자인상인 IDEA에서 2005년 소비재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내가 아끼는 아이리버의 또 다른 MP3 플레이어 시리즈인 'N10'은 사소한 발견에서 출발한 프로젝트였다. 2003년, 거리나 카페에서 내가 가장 유심히 본 것은 바로 MP3 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목에 MP3 플레이어를 걸고 다니기를 좋아했는데, 아무리 봐도 내 눈엔 뭔가 불편해 보였다. 목걸이 따로, 이어폰 따로, 주렁주렁한 느낌 때문에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목걸이에서 이어폰이 바로 빠져나오도록 하고 OLED 디스플레이 창이 달린 가장 작은 MP3 플레이어를 고안하여 레인콤에 제안했다.
패션과 테크놀러지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 N10은 쥬얼리 같은 느낌을 주는 MP3 플레이어로 탄생되었고, 2004년 7월에 출시되어 6개월 만에 약 25만대 이상이 팔리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게다가 2005년 초에 유럽의 권위 있는 디자인상 '레드 닷 어워드(Red Dot Award)'를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그 혁신성과 참신함 때문에 아이리버의 브랜드 이미지를 크게 상승시키는 영향을 끼쳤고, 내게도 무척 자랑스러운 프로젝트로 남아있다.
삼성의 PCS휴대폰을 위한 게임 패드 디자인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날도 비행기 안에서 상상을 하거나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게임에 열중해 있던 앞자리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던 소년은 작은 휴대폰 위에서 손을 놀리느라 여간 애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번쩍 떠오른 생각이 '게임패드를 휴대폰에 부착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생산하게 된 삼성의 게임폰 SCH A-600모델은 휴대폰에 간단히 탈 부착하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패드로서, 미국 스프린트 사를 통해 시판되어 큰 수익을 창출해 냈다. 생활 속에서 누구나 접하는 사소한 아이디어가 높은 부가가치 상품으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많은 클라이언트(client:의뢰업체)들은 일반적으로 이미 듣거나 접해본 경쟁사 제품을 취합해서 좀 더 나은 디자인을 의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디자인은 개발과 생산과정을 거쳐 시장에 출시하게 되면 이미 트렌드가 바뀌어 있을 수가 있다. 잘못하면 계속 뒷북을 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세계 시장의 흐름을 읽고 있어야 하고, 각 분야에 경험과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가상적 신상품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때로 제조업체에 접근했을 때 기술진과 상품기획팀에게 더욱 혁신적인 영감을 줄 수도 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가져라
어려서부터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은 좋아했지만 화가가 되고 싶은 욕망은 없었다. 구체적으로 뭔지는 잘 몰랐지만 그저 더 신나고 즐거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좋아했던 것 같다.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드디어 '그 무엇'의 실체와 만났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한 친구네 집에 놀러가게 되었는데, 그 친구네 집은 골프를 칠 수 있는 정원과 지하실에 당구대가 있는 아주 부잣집이었다. 한참을 놀던 중 무심코 2층에 있는 친구의 형 방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 형 방에는 이름 모를 서양 책으로 가득한 책꽂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우연히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란 잡지를 꺼내 보게 되었다. 한 장, 한 장, 별 생각 없이 넘겨보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놀라움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책에는 보기 좋고 쓰기 좋은 일상 생활용품을 생각하고 그려서 만들어 내는 일을 설명하는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생각을 그리는 엄청난 일, 그런 작업의 매력에 순간적으로 빠져들었다. 그 놀라운 첫 대면은 나를 미술대학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하게 했고, 디자인 선진국인 미국으로 가 디자인을 공부하게 이끌었다. 나는 열여섯 살에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공부보다는 비틀스나 롤링스톤스의 팝송에 빠져 지냈다. 그래서 2학년 때는 친구들과 '다이아몬드 포'라는 그룹사운드를 조직하여, 학교소풍 때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하기도 했다. 내가 직접 디자인한 광고 전단을 만들어 뿌리고, 여러 고등학교 담벼락에 우리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도 붙이면서 최초로 고등학생 그룹사운드 공연을 개최했다. 그렇게 엉뚱한 짓만 골라 하는 가운데 고등학생 시절은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입시라는 괴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산업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이 확고했기 때문에 미술대학에 가고자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말만으로도 기겁을 하셨고 더구나 산업디자인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들은 부모님은 "산업디자인인지 뭔지 나는 잘 모르겠다만, 그걸로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겠냐?"고 하시며 화를 내셨다. 그때 나는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살피지도 않고 당신 생각만 말씀하시는 부모님이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른다. 결국 부모님의 뜻에 떠밀려 공대에 지원을 한 나는 시험도중 시험장을 나와 버렸고, 다시 부모님을 설득하여 미술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디자인을 하는데 기초가 되는 그림을 배우면서 점점 더 '디자인이야말로 내가 앞으로 몸담아야 할 세계'라고 확신했다. 이듬해 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신입생 환영회에서 고등학교 동창 김민기(학전대표, 아침이슬 작곡자)를 만났다. 민기는 그때 회화과 2학년이었다. 둘 다 음악을 좋아했기에 우리는 대학에서도 쉽게 친해졌다. 민기와 나는 무교동에 있는 카페에서 연주를 하고 돈도 벌었다. 유학에 대비해 영어를 공부하거나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 많은 시간을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다가 교내전시회에서 나는 지금의 아내인 첫사랑을 만났다. 우리가 만난 날은 7월 1일이었는데, 그녀와 사귄지 5년 후 7월 1일에 명동성당에서 결혼을 했다.
잘된 디자인만큼 멋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없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디자인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과 같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디자인 역량을 키우기 위해 유학을 준비했고, 결혼한지 얼마 안 돼, 잠깐 몸담았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아내마저 서울에 남겨둔 채 출국했다. 보통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면 대학원에 진학하지만 나는 대학 시절 학업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일리노이 대학(시카고 캠퍼스)에 편입했다. 그리고 학부 과정에서 미국 학생들과 그룹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곳 학생들과 자주 어울려 작품 활동도 하고 놀기도 하다 보니 어학연수를 따로 받지 않아도 자동으로 어학연수가 되었다. 그래도 미숙한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한국에서는 강의식 수업이 많았다. 하지만 미국의 디자인 수업은 주로 디자이너 스스로 발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수업방식을 따라가자니 나의 짧은 어휘력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지도 교수는 '보기 드물게 창조적인 사람'이라며 나를 칭찬하더니 "너의 미숙한 영어가 오히려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창조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다"라고 말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미숙한 영어 때문에 내 아이디어를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온 열정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디자인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 예를 들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자리에 나가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옷을 입는다. 입고 있는 옷차림과 그로 인한 전체적인 느낌을 통해 개인의 가치관 등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기업이 소비자의 시선을 끌거나 인정받고 싶을 때 잘된 디자인만큼 멋진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없는 것 같다. 멋진 디자인은 소비자에게 오랜 여운을 준다.
디자인은 자신감을 파는 일이다
미국 유학을 어렵게 마친 후, 미국에 남아서 실무 경험을 쌓기로 했다. 그래서 디자인 회사에 취직하기로 마음먹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그동안 했던 작품들, 심지어 대학 시절의 작품과 유학 오기 전, 1년 동안 일한 프로젝트까지 주섬주섬 모아보았지만 포트폴리오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렇지만 희망을 안고 시카고 주변의 디자인 회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열다섯 군데도 넘는 회사를 찾아다녔지만 경험 없는 동양인 신참 디자이너를 환영해 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자신감은 사라져 갔다. 게다가 내 비자는 졸업 후 1년 안에 취직을 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유학 비자였다.
그렇게 계속 직장을 찾아다닌 끝에 나는 마침내 직장을 얻었다. 시카고 근교의 대형 디자인 컨설팅 회사였는데 첫 직장생활에서 나는 1년을 채우지 못했다. 70~80여 명의 디자이너들이 일렬로 앉아 말 한마디 없이 그림만 그리는 업무분위기는 마치 기능공이 된 것 같은 답답함을 주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둔 후, 나는 일부러 작은 규모의 회사를 골라 문을 두드렸다. 내가 일하게 된 두 번째 직장은 디자이너가 7~8명에 불과한 조그만 회사였다. 회사의 창업자인 마쓰다 사장은 일본계 미국인 3세였는데, 그는 디자인 디렉터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하루에도 수많은 고객 회사를 직접 찾아다니는 대단한 정력가였다. 나는 그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디자인은 자신감을 파는 일'이라는 그의 말이다.
디자인 작업이 디자이너의 마음에 흡족한 상태에서 끝나더라도 자신 있게 프리젠테이션을 하지 못하면 그 디자인은 채택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쓰다 사장은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고객에게 "이럴 수 있다"가 아니라 "이것이다!"라고 자신감 있게 말했고, 그 결과를 책임졌다. 이러한 그의 열정에 고객들은 거의 우리의 디자인을 채택했다. 나는 마쓰다 사장과 프리젠테이션을 다니면서 자신의 직업에 대해 갖춰야 할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감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해결책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
1979년 말, 나는 일리노이 대학(어버너 샴페인 캠퍼스) 교수채용에 지원했다. 유학 온지 불과 5년밖에 안된 동양인으로서 영주권도 없는 처지였지만, 학교 성적표와 이력서 그리고 그동안의 작품 포트폴리오와 지도 교수들의 추천서 등을 준비하여 인터뷰에 임했다. 몇 주의 기다림 끝에 나는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디자인 컨설팅 등의 일을 겸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수업을 하고 그 나머지는 미국 전 지역의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밤새워 스케치와 도면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데 대해 죄책감이 들었다.
'교수의 길을 계속 걷느냐, 디자이너의 길로 다시 나갈 것이냐' 하는 고민에 빠져있던 어느 날, 우수학생들을 스카웃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한 실리콘밸리 최대의 산업디자인 회사 GVO의 디자인 담당 부사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인터뷰한 학생 중에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고, 당신이 마음에 드니 디자인 디렉터로서 자신들과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또 한 번 내 인생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학 진학 때처럼 또다시 부모님을 설득하고, 아내를 설득하여 2년간의 교수생활을 마쳤다.
1986년, 실리콘밸리의 산타클라라에 조그만 사무실을 임대해서 결국 나의 브랜드인 'INNODESIGN' 간판을 내걸었다. 비록 직원이 한 명밖에 없는 작고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그때의 감격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INNO'라는 단어는 평소 내가 좋아하던 'INNOVATION'이란 단어에서 내 나름대로 창조한 것이다. 이 회사명과 로고는 내가 창업하기 6년 전 한 디자인 컨설팅 회사에서 일할 때 우연히 떠올라 준비했던 것이다. 지갑 속에 넣고 다녔던 로고를 6년 만에 쓰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노디자인을 설립했지만 그때부터 시작된 고생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정적인 월급을 받는 것이 얼마나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인지 절실히 느꼈다. 사업자금으로 마련한 돈은 겨우 10만 달러 정도였다. 이노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일이 바로 여행용 골프가방인 '프로텍' 디자인이었다.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특수 합성 플라스틱을 사용해 쉽게 운반할 수 있고 내용물이 잘 보호될 수 있도록 하면서 신발이나 재킷, 골프 공, 우산 등을 넣는 공간을 함께 마련한 제품이었는데, 나는 직접 생산까지 해보겠다는 간 큰 생각을 했다.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개발비, 금형비, 생산비 등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던 터라 벤처 캐피털리스트(벤처 투자전문가)에게 어렵게 50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그런데 처음에 지분만을 요구했던 투자가는 불안했는지 몇 개월 만에 융자로 지분의 전환을 요구했다. 1년 후에는 50만 달러를 전부 갚아야만 했다. 결국 나는 생산ㆍ판매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프로텍'을 라이센싱하기로 했다.
나는 그 시제품을 가지고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서 매년 열리는 골프 관련 상품 박람회인 PGA 'Merchandise Show'에 참가했다. 나는 전시장 한구석에 초라하게 제품을 전시해놓고 전시관을 지켰다. 그러다가 미국 굴지의 플라스틱 제조업체인 플램보 사의 회장으로부터 라이센스 계약을 제안받았다. 게다가 아식스 사로부터 본 상품을 수입해 판매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 첫 제품으로 마음고생을 한지 2년 만에 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이 경험으로 디자인 관련 실무를 한꺼번에 공부했다. 아이디어 제안에서부터 브랜드 제작, 특허 출원, 금형제작, 생산과정, 판매, 수출 그리고 금융문제, 계약과정 등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수년 동안 플램보 사로부터 로열티를 받았다. 그때 벌어들인 로열티는 지금의 이노디자인 사옥을 구입할 만큼 큰돈이었다. 더구나 그 제품은 IDEA에서 동상을 받았고, 「비즈니스 위크」로부터 1990년도 최우수 제품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 경험을 시작으로 노력한 끝에 1996년, 나는 드디어 실리콘밸리에 이노디자인 사옥을 마련하고 둥지를 틀었다.
유행을 쫓기보다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라
1993년, 그날의 감격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가 디자인한 동양매직의 휴대용 가스버너가 IDEA 금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상직후에는 산업디자인 업계에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영국의 디자인 잡지 「DESIGN」의 표지에 그 제품이 실리게 된 것이었다. 이노디자인을 설립한 후 겪은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다 받은 것 같았다. 그 휴대용 가스버너 디자인은 다리를 접으면 몸통과 머리만 있고, 다리를 펼치면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랍스터를 닮은 디자인이었다. 이는 어느 휴일, 아내가 주방에서 랍스터 요리를 하는 것을 보고 고안한 것이었다.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을 디자인할 때는 여성, 특히 주부의 마음을 먼저 읽어야 한다. 집안 살림살이를 구입하는 결정권은 대개 주부에게 있고, 한 가정의 분위기는 그 집에 모인 물건들이 만들어낸다. 단순히 어떤 기능만을 위한 일상용품들이 배치된 집은 공장이나 군대 분위기를 연상하게 할 것이다. 주부들의 생활감각에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마음을 배려한다면 얼마든지 히트 상품을 만들 수 있다. 디자이너는 대중가수 같아서 관객의 갈채를 받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노디자인을 설립하던 당시 가장 역점을 둔 분야는 제품 디자인을 통한 기업의 이미지 구축이었다.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소비자는 친근하게 느껴지는 기업의 생산품에 후한 점수를 준다. 그들은 제품의 품질과 기능뿐 아니라 그 제품을 만든 기업에 대한 신뢰성까지도 선택의 요소 가운데 하나로 생각한다. 독일의 벤츠자동차는 로고를 떼어도 쉽게 벤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소니 사의 제품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경우가 많고 필립스 제품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자사만의 색깔, 무엇보다 기능성을 중시한 디자인으로 기업이 지향하는 바를 소비자에게 보여 왔기 때문이다.
회사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CI작업이나 홍보, 광고 등 엄청난 노력을 하는 경우는 많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생산하고 있는 상품 디자인에는 기업의 철학이 담겨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더구나 우리나라 제품 디자인은 자사 이미지 구축보다 유행에 더 신경을 쓴 디자인이 많다. 한 회사에서 진주빛 디자인을 내놓아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게 되면 너나없이 진주빛으로 제품을 디자인하는데 몰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그 상품을 처음에 내놓은 기업이나 나중에 내놓은 기업 모두의 이미지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정체성 구현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도 자기 디자인이다.
불편한 것을 참지 말고 해결하라
나는 잦아진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노트북을 들고 다닐 때마다 늘 번거로움을 느꼈다. 회의실에서 노트북 화면을 다 같이 보려면 매번 프로텍터에 연결해야 하고 실내의 빛을 조절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LCD화면을 180도 회전시키고 뒷면에는 발표자를 위한 작은 모니터를 달아 소규모 모임에서 노트북만으로 자료를 볼 수 있는 양 화면 노트북을 고안해냈다. 이 노트북은 기내 같은 곳에서는 작은 화면만 사용하니 옆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고, 화면이 작아 배터리도 오래간다.
노트북 컴퓨터에 대한 또 다른 디자인은 자물쇠가 달리 지퍼디자인이다. 내 경우 노트북에 지적 재산권이 담겨 있기 때문에 프리젠테이션 도중 식사를 하러갈 경우에는 '두고 가야 할지 가져가야 할지' 무척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노트북의 열고 닫는 기능에 잠금 기능을 부가한 지퍼디자인이다. 이 디자인은 2000년 IDEA에서 은상을 받았다. 디자인은 1%의 시장을 보고 뛰어드는 모험이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하는 반응을 얻는 제품은 시장에서 반드시 성공한다. 'Why not?'은 상상력의 출발이며 새로운 발상의 기초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사고가 부족한 것은 개성보다는 중용과 화합을 존중해온 우리의 문화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튀는 행동'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 이제 그 거부감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좋은(good) 것보다 적절한(right) 것을 만들어라
나는 '굿 디자인(Good Design)'이란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산업계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면 무엇보다도 단순히 좋은(good) 디자인보다는 오히려 적절한(right) 디자인, 즉 잘 팔리는 디자인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 디자인 철학은 쓰기 좋고, 보기 좋고, 만들기가 쉬운 디자인을 말한다. 실제로 만들기가 쉽지 않으면 가격이 올라간다. 소비자들은 아름답고, 쓰기도 편하고, 게다가 비싸지도 않은 것을 찾는다.
일반적으로 경영인들은 '디자인'하면 장식을 추가하고 덧바르는 것이라는 생각에 추가비용으로 생각한다. 이는 외형에만 신경을 써온 디자이너들의 책임이 크다. 따라서 유능한 디자이너는 가격도 경쟁력에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아름답고 편리하면서도 생산가를 5% 낮출 수 있다면 이것을 마다할 경영자가 어디 있겠는가? 디자인은 부가가치 산업이다. 만약 다른 회사의 동일한 제품을 120원에 살 수 있는 소비자에게 자사 제품을 150원에 팔고자 한다면, 30원어치 이상의 부가가치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을 위해 일하라
언젠가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 CD보관함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아이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휴대용 CD케이스를 디자인한 적이 있다. 그것은 CD를 앞뒤로 4개씩 나눠서 한 묶음으로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디자인이었는데, 이 제품은 종류별로 구분하여 찾기가 쉽고, 펼쳐서 벽에 부착하거나 휴대하기도 편하도록 만든 디자인이었다. 이는 미국 특허를 받았는데 최근 이 아이디어가 다시 빛을 발하는 흐뭇한 계기가 있었다. 대학시절 '도비두'라는 타이틀로 함께 기타를 치며 어울려 지냈던 김민기가 음악인생 30년을 결산하는 기념음반 디자인을 내게 부탁한 것이다.
나는 LP세대인 그의 음악을 담은 CD 4장을 LP사이즈 정도 되는 판에 나란히 배치했다. 이것은 커버를 닫으면 LP 한 장처럼 보이고, 열면 CD 네 장이 보여지는 디자인이었다. 민기는 앨범 디자인을 보고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고 있는 나의 컨셉을 잘 이해하고 매우 즐거워했다. 이 앨범은 2004년 가을, 민기가 음악인생 30년을 결산하는 행사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행사를 지켜보던 내 마음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각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30년 만에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기쁨이 매우 컸다. 디자인이라는 직업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보람은 바로 다른 이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주말 오후, 동네에서 자동차를 운전하여 막 교차로를 지나다가 사고를 낼 뻔한 적이 있다. 앞에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던 사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자동차 앞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뒤따르고 있는 내차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뒤를 쉽게 볼 수 있다면 더 안전할 텐데···.' 그래서 내 생각을 한 번 그려보았다. 자전거용 헬멧 뒤에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부착하고 넓은 보안경 한쪽 끝에 디지털 카메라가 잡은 뒷면의 영상을 보여주는 작은 스크린을 설치하면 어떨까?
내가 존경하는 빅터 파파넥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만일 자동차 디자이너가 차에 장착된 재떨이를 지금보다 몇 센티미터만 오른 쪽으로 더 옮겨 디자인했다면, 교통사고율과 사망률이 엄청나게 증가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디자인이 얼마나 섬세하고 남을 배려한 작업인지를 설명하는 말이다. 디자이너는 제품디자인을 할 때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일을 예측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다른 사람의 삶을 윤택하고 즐겁게 해주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을 안전하게 해줄 의무도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비즈니스이다
디자인 컨설턴트로서 20년이 훌쩍 넘도록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CEO를 만났지만 진정 디자인으로 경영을 풀어가는 CEO를 만난 경험은 매우 적다. 그래서 드물기는 하지만 디자인을 경영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는 CEO를 만나게 되면 참으로 뿌듯하다. 10여 년 전, 전동 공구 업체인 계양전기의 이상익 전 대표를 만났을 때 그랬다. 당시의 계양전기는 품질 개선에 주력한 결과 국내외 시장에서 탄탄한 기반을 쌓았지만, 세계 유명 제품들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위해서는 품질만으로는 어려웠다.
그 회사의 문제는 회의실에 들어설 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20여 명에 이르는 모든 임원들이 점퍼 스타일의 유니폼을 똑같이 입고 있었다. 외국생활에 익숙한 나에게는 이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일률적인 원칙과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기업의 뿌리를 내려온 회사가 새로움을 찾는 도전에 과연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임할 수 있을 것인가? 슬그머니 걱정이 들었다. 나는 첫 프리젠테이션에서 임원들을 향해 제품 디자인의 아이덴티티는 물론, 회사 전체의 CI를 바꾸어보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회의실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했고, 청문회에 피의자로 나가 있는 것처럼, 약 두 시간에 걸쳐 쏟아지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주로 부정적인 우려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중역들을 부단히 설득하여 그들의 동의를 가까스로 받아냈다. 그리고 새로운 제품 혁신을 위해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독일의 전동 공구 박람회에 달려가 세계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디자인 컨셉을 추출하기 위해 많은 기술자와 판매상을 만나러 다녔다. 그렇게 해서 계양전기의 새로운 CI디자인과 제품 디자인이 속속 개발되었다. 그 후, 수년이 지나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나는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계양전기의 독자적이고 새로운 이미지의 제품들이 중국과 유럽 시장에서 인지도가 급격히 높아졌으며, 매출이 3배 이상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계양전기가 이러한 결과를 안게 된 것은 우리의 노력보다도 최고 경영자의 결단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방향을 잡는 것은 경영자의 몫이다.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대안을 찾기 어렵고, 미래를 볼 수 없으면 변화가 두려운 법이다.
움직이는 과녁에 집중하라
나와 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쌈지'의 천호균 사장이 한 모임에서 "디자인은 예감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고교 졸업이후 다시 만난 천사장과 나는 이노디자인이 한국 진출을 준비 중이던 수년전, 아주 특이한 계약을 했다. 쌈지는 이노디자인에게 압구정동 건물을 사무실로 쓰게 해주었고, 그 대신 이노디자인은 쌈지의 제품 디자인을 무료로 컨설팅해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는 무형인 디자인의 가치를 유형의 부동산만큼이나 인정할 줄 아는, 당시엔 흔치 않은 기업인이었다.
이노디자인 한국 지사는 쌈지의 가방, 신발 등의 제품디자인을 개발하면서 꾸준히 품평회를 가졌다. 그러던 중 쌈지와 스포츠화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의 발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때 불쑥 떠오른 것이 운동화 구두였다. 그래서 바로 천사장에게 내 뜻을 전하고 운동화처럼 편안한 구두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그 제품은 '텅 슈즈'라고 이름 지은 제품인데, 뒤축이 혀 모양처럼 뭉툭하게 튀어나와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신발은 시판되자마자 신세대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쌈지 브랜드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그리고 그해 한국 산업디자이너협회가 선정하는 한국 산업디자인상 대상을 수상하는 행운을 얻었다.
사실 미래의 소비자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알아내야 하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마치 움직이고 있는 과녁을 향해 활을 쏘듯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요즘은 제품의 라이프사이클과 생활패턴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예감'이라는 정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디자이너는 미래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사랑하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몇 해 전, 어머니날(Mother's Day: 5월 두 번째 일요일) 전날이었다. 당시 16살이던 아들 녀석이 밤늦게까지 무엇을 하는지 부산했다. 아마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선물을 마련하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 아들 윤민이는 엄마에게 선물이라며 얇은 수첩 같은 것을 내밀었다. 뭔가 들여다보니 <For Mother's Day>라는 제목이 겉장에 씌어있는 효도 쿠폰 북이었다. 아내와 첫 장을 넘겨보면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엄마 차 세차하기, 유효기간 3주'라고 적혀있었다. 이어서 설거지 유효기간 4주, 강아지 산책시키기 유효기간 2주 등 효도서비스에 대한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쿠폰북을 넘겨보던 아내의 눈이 갑자기 촉촉해졌다. 그래서 들여다보니 마지막장 쿠폰에 'Love!!(엄마를 사랑하기)'라고 씌어있었다. 쿠폰 유효기간은 'Forever'.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리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급조한 듯해도 사랑이 듬뿍 담긴 선물은 이렇게 받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아들의 쿠폰을 보고나서 좋은 디자인의 출발은 바로 소비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너무나 소중한 진리를 되새길 수 있었다. 자신이 개발하려는 상품을 사용하게 될 소비자를 마음속에 그려놓고 그에게 선물을 하듯이 정성을 쏟아 디자인한다면 사용자의 만족도는 훨씬 높아질 것이다.
쓸데없는 부분을 없애고 기능을 복합시켜라
10여 년 전, 한국의 한 대기업과 컴퓨터 모니터 디자인 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 기업의 사장과 수출 담당, 생산 담당 임원들은 한결같이 '가능한 싸게' 만들 수 있는 모니터를 디자인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들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과연 어느 정도 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을지 나도 고민스러웠다. 그들이 제시한 상품의 규격서를 면밀히 검토하던 끝에 모니터 뒷부분의 각도를 변형시켜, 모니터의 회전 받침대를 본체 위에 올려놓은 채 포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수출 운반비용을 15% 정도 절약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좋은 디자인으로 가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줄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디자인은 쓸데없는 부분을 줄이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자인 역사를 돌이켜보면 패션과, 제품 디자인, 트렌드의 상관관계가 참으로 흥미롭다. 한 시대의 제품 디자인 경향이 같은 시대의 옷, 신발, 가방 등의 패션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컨버전스(convergence) 컨셉'이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종이 배터리 기술을 응용하여 재킷을 디자인하고, 유명 스포츠카인 페라리 디자이너가 삼성의 휴대폰을 독특한 컨셉으로 제시하여 CES에서 전시한 것도 이러한 트렌드의 반증이다. 즉, 전 산업계에 걸쳐 여러 가지 상품들이 서로의 경계를 넘어가며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제품 분야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오고 있는 디지털 상품들을 보면 키워드가 바로 '멀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복합 기능의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몰고 온 디지털카메라 폰은 이미 생활필수품으로 자리를 잡았는가 하면, 휴대폰과 PDA가 합쳐진 스마트폰이 일반화될 날도 머지않았다. MP3플레이어나 휴대폰 등, 단순한 디지털 기기들이 이미 안경, 시계, 장신구 등의 형태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절제와 규율을 무시한 다양한 컬러와 패턴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지는 새로움에 소비자들은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패션처럼 '입고 다니는' 디지털 기기들이 지배할 것이다.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라
미국 실리콘밸리의 연간 경제규모가 4,500달러를 돌파한지 오래다. 이것은 유럽 선진 국가들의 전체 주식 시장을 합한 것과 맞먹는 규모다. 실리콘밸리의 면적은 겨우 제주도 두 배 정도로서 인구도 230만 명을 조금 넘으니 크기로 보면 인천광역시 정도의 규모다. 그러나 실리콘밸리는 세계가 인정하는 기술의 메카다. 이곳에서 기술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이유는 '기술을 판매하는 기술'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면, 그 옆에선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기술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제품화하는 기술에서도 앞서 있는 것이다.
나는 매년 연초가 되면 디자이너들과 함께 라스베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전자쇼인 CES를 관람하러 간다. CES는 전 세계의 앞서가는 전자 기업들이 모두 참가해 신기술을 앞 다투어 발표하는 각축장으로, 기술과 디자인의 흐름을 한눈에 예측할 수 있는 전시회이다. 2005년, CES의 막을 여는 기조연설에 나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대표 빌 게이츠는 연설 중에 빨강색 MP3플레이어를 손에 들고 '디지털 라이프 시대를 주도할 제품'으로 소개했다. 그 제품은 바로 내가 디자인한 아이리버의 하드디스크 타입 MP3플레이어 H10 모델이었다. 빌 게이츠가 나의 디자인을 들고 전 세계인들 앞에서 디지털 시대의 대표적 제품으로 소개한 그 순간, 내 가슴은 흥분으로 들떴다. 그날, 빌 게이츠의 연설 덕분에 내가 디자인한 H10은 전 세계 600여 개의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었다.
오늘의 지구촌 젊은이들은 휴대폰이나 MP3플레이어, 노트북, 게임기 등의 디지털 기기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움직이면서 일하고, 통화하고, 음악과 비디오 게임을 즐기며 하루를 보낸다. 디자이너에게 이러한 환경은 마치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아서 무궁무진한 디자인을 창출해내게 한다. 나는 1년 전, 머지않아 디지털 멀티미디어 브로드캐스팅 폰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을 것이고, 휴대폰으로 편리하게 방송을 시청하기 위해 가로 화면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다. 그래서 디자인한 것이 화면이 움직일 수 있는 삼성전자의 유럽형 모델 Z-130폰이다. 이는 이미 개발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의 소비자들은 꼭 필요해서 구입하기 보다는 수많은 선택의 여지를 놓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여유와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설명서를 볼 필요도 없이 새 상품을 다루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속속 탄생하고 있고, 이는 디자인이라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을 거쳐 간편한 상품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가 시작된다며 모두들 설레던 지난 2000년 초, 내 얘기가 MBC 의 '성공시대'에서 다뤄진 이후로 5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한국의 학생들과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사업가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있다. 어린 학생 중에는 자신의 작품을 한번 봐달라는 내용도 많았다.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검토했는데 정말 숨은 다이아몬드 같은 작품이 많았다. 이들은 모두 나의 열여섯 때보다 훨씬 뛰어나 있었다. 나는 비로소 또 하나의 목표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의 디자인 시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한국의 디자인 꿈나무들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 이노디자인 지사를 설립할 당시, 한국은 IMF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경제 불황에서 벗어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후, 실로 많은 일이 생겼다. 나는 멋진 기술력을 갖춘 한국의 기업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어 오늘날 세계 시장에 우뚝 서게 된 한국의 제품을 디자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CES와 같은 세계적인 전자쇼에 참가한 한국 기업의 전시관은 화려한 일본 전자회사들의 전시관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초라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일본기업의 제품들을 열심히 찍고 다니는 한국 비즈니스맨의 모습에서는 안타까움마저 일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대표적인 전자회사들은 라스베거스 CES 컨벤션홀 한복판에서 가장 큰 전시관을 차지하고, 기술과 디자인에 앞선 신제품들을 세계인들의 관심 속에서 자랑스럽게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진검 승부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 승부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젊은이들이다. 늦은 시간까지 새로운 기술 개발에 매달리는 연구원,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디자이너, 그리고 지금 이 책을 들고 있는 독자의 손에 미래를 건 멋진 승부 한 판이 달려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