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57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강원도 구름이 가까워서 옷이 젖는 고을 화천
산이 가까워 구름이 골짜기에서 솟아오르니 잠깐 그늘졌다간 도로 맑아지곤 하네
땅이 낮으니 봄물이 창일하고 나무가 빽빽하니 여름 바람이 맑구나
밤이 어두운데 등잔불에 무리지고 처마가 비었으니 빗소리가 잘 들린다
읊으면서 그대로 잠자지 못하노니 치우치게 고향 생각이 일어나네
이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유관이 화천을 노래한 시이며, 다음은 『여지도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백성들이 송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농업과 양잠에 힘쓰며, 유학을 숭상하지도 않고 또 공업과 상업도 일삼지 않는다. 활쏘기를 좋아하나 과거를 보는 일은 드물다. 예로부터 고을에 장시(場市)가 없다. 산에 사는 백성들은 곳곳에서 화전을 경작하며, 한 지역에 붙어 지내지 않고 옮겨다니는 일이 잦다.
화천군의 고구려 때 이름은 생천군(牲川郡)이고, 신라 때 낭천(狼川)으로 바뀐 후 조선 말까지 낭천현이었다가 190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김극기가 “옛 고을이 푸른 시냇가에 있는데, 푸른 산이 사방의 이웃이로다. 한 가닥 동쪽으로 향한 길이요, 천 리 북으로 가는 사람이로구나”라 노래하였고, 이지직이 “구름 가까우니 옷이 젖고, 바람 부니 여름 대자리가 밝구나”라고 읊었던 화천의 지형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 당시 호수는 264호요, 인구는 750명, 군정은 시위군이 100명이요, 선군이 30명이었다.
조선시대에 화천창(和川倉)이 있었고, 회양에서 추지령을 넘어 동해안의 통천으로 이르는 도로가 지나던 곳이 바로 화천이었는데, 화천(和川)이 언제부터 지금의 이름인 화천(華川)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화천군에는 높은 산들이 많다. 대성산(해발 1175미터), 재안산(해발 1060미터), 화악산(해발 1468미터), 석룡산(해발 1300미터), 적근산(1073미터) 등의 높은 산들 사이로 내금강산 장안사를 건너다보고 흘러내린 물이 북한강이 되어 화천군 동북쪽 끝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들어 파로호로 접어든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화천에서 나는 통나무들은 뗏목에 묶인 채 북한강 물길을 따라 서울로 운반되었다. 서울의 뚝섬나루까지 운반되는 과정에서 적어도 사나흘 넘게 물속에 잠겨 있게 되기 때문에 나무의 진이 빠져서 품질이 뛰어났고, 그 때문에 서울의 장사꾼들은 앞을 다투어 화천 뗏목을 사려고 하였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강원도장타령」에 나오는 “화목 많은 화천장, 길이 막혀 못 보고”라는 말이었다.
춘천이라 샘밭장
길이 질어 못 보고 신발이 젖어 못 보고 영 넘어라 영월장 홍천이라 구만리장
담배 많아 못 보고 길이 멀어 못 보고 어화지화 김화장 이 귀 저 귀 양구장
놀기 좋아 못 보고 당귀 많아 못 보고 회회층층 회양장 한 자 두 자 삼척장
길이 험해 못 보고 배가 많아 못 보고 이 강 저 강 평강장 명유 바꿔 원주장
강물 없어 못 보고 값이 싸서 못 보고 정들었다 정선장 횡성 건설 횡성장
갈보 많아 못 보고 에누리 많아 못 보고 화목 많아 화천장 김 많은 강릉장
길이 막혀 못 보고 값이 싸서 못 보고
양식 팔아라 양양장 이 통 저 통 통천장 살이 많아 못 보고 알 것 많아 못 보고
즉금 왔다 인제장 엄성듬옷 고성장 일 바빠서 못 보고 심심해서 못 보고
울퉁불퉁 울진장 이 천 저 천 이천장 울화 나서 못 보고 개천 많아 못 보고
안창곱창 평창장 철덕철덕 철원장 술국 좋아 못 보았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뗏목은 북한강이나 남한강의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뗏목은 육로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 강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원목을 엮어 물에 띄워 내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압록강, 두만강, 한강 상류에서 벌목한 나무를 강물에 띄워 내려보내 궁궐을 짓거나 집을 짓는 데 활용했다.
압록강은 백두산 일대에서 신의주까지, 두만강은 무산 지역에서 회령까지, 한강은 강원도 고원 지대의 임산 자원을 옮기는 데 이용되었다. 특히 1908년 1월 26일 러시아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을 넘겨받은 일제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뗏목을 결빙기를 제외한 시기에 줄을 잇다시피 하여 띄웠다. 1943년 수풍댐이 건설된 뒤에는 이곳에서 일단 해체하였다가 다시 띄워 내려보냈다.
한편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는 한강은 뗏목에 의한 목재 운반이 더욱 손쉬워서 백두대간 서쪽에 자리한 인제 지역의 목재는 북한강으로, 오대산 자락의 정선과 평창 그리고 영월 등지의 목재는 남한강으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뗏목은 교통의 발달과 함께 차츰 줄어들었으며, 북한강 뗏목은 1943년 청평댐이 건설됨에 따라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강원도 지역의 벌목과 떼 짓기 그리고 뗏목을 운전해서 내려가는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나무를 베기 전 나무 상인들은 인부들의 안전을 위하여 산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절차나 제물 내용은 일반적인 산신제와 비슷하지만 소지는 올리지 않는다. 치성이 끝나면 으뜸으로 선출된 벌목꾼 한 사람이 제단에서 제일 가까운 데의 소나무 한 그루를 도끼로 찍는다. 사람들은 그 주위에서 음복을 한다. 이곳에서는 벌목 인부를 두고 ‘산판꾼’이라 부르며 음력 10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나무를 벤다. 이때에는 산에 눈이 수북하게 쌓여 하산 작업에 유리할 뿐 아니라, 해빙기에 시작되는 뗏목 띄워 내리기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 길이는 대개 6미터, 끝머리 지름은 15센티미터 이상이 되어야 한다. 나무는 운반의 편리를 위하여 산기슭에서 시작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벤다. 뗏목을 만드는 방법에는 첫째 칡넝쿨이나 쇠줄로 연결하는 법, 둘째 나무 끝에 구멍을 뚫고 이에 나무덩굴이나 밧줄을 꿰어 연결하는 법, 셋째 고리를 박고 이에 칡넝쿨이나 밧줄 등으로 잡아매는 법 등이 있다.
뗏목은 나무의 굵기나 길이의 정도에 따라 궁궐을 지을 때 쓰는 떼(길이 6미터 이상, 지름 60~90센티미터 이상)와 부동 떼(길이 6미터 정도, 지름 15~60센티미터 정도) 그리고 가재목 떼(길이 3.6~3.9미터, 지름 12~15센티미터)로 나눈다.
이보다 더 작은 나무로는 화목 떼와 서까래가 있다. 부동 떼의 경우 제일 앞쪽에 띄우는 통나무는 25~30개, 너비는 5~9미터, 길이는 6미터 정도가 된다. 이를 앞 동가리라 부르며 이어서 만든 동가리를 더 붙여서 한 바닥을 만든다. 뗏목은 언제나 이와 같이 닷 동가리를 한 바닥으로 엮는다. 그런데 둘째 동가리에서부터 끝 동가리까지는 엮는 나무의 수를 3~4그루씩 줄여나가서 보통 150~200그루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두세 명이 한 바닥을 엮는데, 대략 2~3일 걸린다.
한편 두 동가리에서 닷 동가리까지는 서로 한 몸이 되도록 튼튼하게 묶지만, 앞 동가리만은 앞 사공의 운전에 따라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두 동가리 사이를 떼어서 연결한다. 앞 동가리의 앞머리(나무의 뿌리 쪽)에는 노의 구실을 하는 ‘그레’를 걸기 위한 가위 다리 모양의 강다리를 세우며, 이 밖에 삿대를 따로 갖춘다. 뗏목을 운전하는 사람은 앞 사공 한두 명, 뒷 사공 한 명인데, 인제에 있는 합강에서 춘천까지는 하룻길이었으나 춘천에서 서울까지는 일주일에서 보름이 걸렸다. 따라서 사공들은 떼 위에서 밥을 지어 먹고 떼를 운반해갔으며, 해가 지면 뗏목을 버레(강가의 돌무지)에 매어두고 주막에서 묵었다. 뗏목에는 인제 부근에서 구운 옹기나 서울로 보내는 땔나무 등 여러 물산들도 실었는데 이를 ‘웃짐치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떼가 출발하기 직전에 강에 올리는 제사를 지냈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채 나물 세 접시 그리고 메(밥) 세 그릇, 포 한 개, 삼색실과, 소지용 한지 세 장(목상, 앞 사공, 뒷 사공 몫)을 마련하였으며 무꾸리가 이를 주관, 뗏목과 사공의 안전운행을 빌었다.
뗏목이 떠날 때는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며, 특히 여성은 뗏목 부근에 접근하는 것조차 금기로 여겼다. 뗏목을 운전하는 뗏사공의 노임은 화천이나 인제에서 춘천까지는 5~6원(당시 광목 1통 값)이었으며, 춘천에서 서울까지는 30~35원을 받았다(당시 쌀 한 말 가격은 1원 5전). 사공들은 뗏목을 운전하면서 강원도 아리랑 조에 얹은 「뗏목아리랑」을 불렀다. 이 노래의 기본 음률은 3ㆍ4조 내지는 4ㆍ4조이며 모두 14연인데 한 연은 4행으로 짜여 있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리리오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가네 뗏목을 타고서 술잔을 드니
만단의 서름이 다 풀어지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리리오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가네
앞 사공 뒷 사공 조심하게 포와지 물서품 치솟는다
이렇듯 북한강의 물길은 뗏목을 나를 뿐 아니라 서울의 소금배가 오르내리고 춘천이나 서울을 드나드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북한강의 물길이 끊어진 것은 1941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에 화천댐을 만들면서부터였다.
그 뒤 또 한 번 화천군의 기름진 논밭이 물속에 잠겼는데, 그렇게 된 이유가 바로 춘천 저수지 때문이었다. 화천군 간동면의 일부와 하남면 일부가 물에 잠겼으며 100만 평에 가까운 논밭이 수몰되었다. 그곳의 땅을 일구며 대대로 살았던 수재민들이 고향을 등진 채 타향으로 뿔뿔이 흩어져갔으며, 일부는 물이 들지 않은 산 중턱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래서 화천 사람들은 ‘화천은 한국전쟁 때 불로 한 번 망했으며, 저수지 만들면서 물로 두 번째 망했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늘어놓고는 한다.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승일교는 동송읍 장흥 4리와 갈말읍 문혜리를 잇는 다리다. 1948년 이곳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 그후 휴전이 성립되어 한국 땅이 되자 1958년 한국 정부에서 완공하였다. 처음 북한이 지을 때는 구소련의 유럽 공법으로 지었으나 완성 시에는 다른 공법이 도입되었다. 그 때문에 양쪽의 아치 모양이 약간 다르다. ‘한국의 콰이 강의 다리’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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