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를 죽이고 큰 ‘나’를 살리는 일 / 우룡스님 (울산 학성선원 조실)
경주 남산자락의 새 절 함월사 마당에서 우룡 스님을 뵈었다.
과일쟁반을 들고 있으신 스님에게 합장 반배로 인사를 올리자
“큰스님들은 서울에 다 있는데 이런 시골에는 뭣하러 내려 왔냐”고 되물었다.
그래도 멀리서 온 기자를 내치지 않고 요사로 들인 스님은 별로 할말이 없다고 했다.
“맨날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무슨 이야기해야 해요?”라며 기자의 맥을 뺐다.
세상 사람들이 스님의 말씀 같지 않음을 섭섭해 하는 혼잣말처럼 들렸다.
이런 저런 근황과 건강을 묻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마침 주지 스님이 자리에 없어 우룡 스님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한참 말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던 스님이 천천히 입을 뗐다.
“곁에 스승이 있으니까 곁의 스승한테서 배우세요.
불교는 출발점이나 도착점이나 똑같아요. 가는 코스도 정해져 있어요.
화두 염불 주력 기도 어느 것이든 가까운데서 스승을 찾고 물어서 그길로만 가면 돼요.”
“누구 이야기는 되고 누구 얘기는 안 된다는 것도 없어요.
내 곁의 스승 찾아서 그분들에게 질문하면 돼요.” “…”
스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상대가 스님을 찾아뵙겠다고 떼를 쓰는 모양이다.
“그런 분별심을 갖고 있는 분이라면 만나고 싶지 않아요.
(보살님은) 아침저녁으로 부모, 자식, 부부간에 3배씩 서로 절합니까?
절에 다닌다고 하면서 하루 세끼 밥상머리에서 합장한번 할줄 모르고 아침저녁으로 내 가족에게 무릎한번 꿇지도 않는 사람이
어디에서 누구법문 들었다, 어디 절 갔다왔다가 무슨 소용이에요? 곁에 있는 스승을 찾으세요.”
스님을 찾아간 11월 17일은 대입 수능시험이 치러지던 날이었다. 전국의 사찰에서 기도하는 부모들의 간절한 모습을 담은 뉴스가
연일 지면과 방송을 뒤덮고 있던 때였다.
“뭔가 잘못됐지요. 일상생활에서 내 일을 착실히 잘하면 되지, 그렇게 별나게 해서 이루어지는 게 뭘까요?
우리나라 엄마, 아버지, 학생이 얼마나 한마음으로 일체가 되어 있을까요?
어제도 어떤 보살이 여기 와서 아들이 시험 본다며 밤을 새워 새벽 4시까지 3000배 하신 것 같아요.
그 엄마의 노력과 그 아들의 책장 넘기는 노력이 얼마나 일치할까요?
엄마 아버지들이 하는 만큼 자식의 노력도 상응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요?
사람들은 불교를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거 잘못 된 거예요.”
스님은 일상생활 속에 가족간의 유대 없이 일방적인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다시 내 옆의 부처님인 가족들에게 정성을 다하라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옛날 어른들은 혓바닥이 칼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거 평소 생각 못하잖아요.
살면서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가슴 콕콕 찌르는 말 숱하게 하면서도 잘못을 못 느끼잖아요. 그래서 내가 늘 부모들에게 얘기합니다.
부모 자식 형제동기간이라도 말로 상처 주지 마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 가족에게 윽박지르고 고함지르고 때리는 건 업이 아니고,
업이 되더라도 쉽게 녹아져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게 더 안 녹아져요.
한평생 죽을 때까지 안 풀릴 수 있어요. 이 응어리가 남은 동안 해탈은 이루어 질수가 없어요.
또, 내가 많이 하는 질문 중에, 당신은 당신가족을 형제를 이웃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늘 요거 껍데기(볼을 꼬집고 때리며) 이거 하나 밖에 모르지 않느냐?
모양도 소리도 빛깔도 냄새도 없는데 ‘나’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밖에 몰라요.
나만 생각하고 자식도, 부모도, 남편도 생각 않는 사람들이 답답하다고 우물 파듯이 절에가 기도해서 뭐가 이루어지냐는 거예요.
요새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부정합니다.
그러면 그 밝은 눈으로 마음이라는 것을 본적이 있느냐 묻습니다. 마음도 생각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는 거라고 할 거냐?
빛깔도 모양도 냄새도 소리도 없는 이것, 어떤 이는 ‘부처’라고 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진리’라고 하고
가장 쉽게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것. 우리하고 항상 공존하고 생성하는 ‘이것’을 아느냐 이거예요.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내외간에, 형제, 부모 자식간에 그 모진 소리, 독한 소리로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게 결국 나한테 돌아온다는 생각은 못해요.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씨앗으로부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안다면,
내가 지금 저 사람에게 하는 말과 행동이 내게 어떤 결과로 돌아 올 것인지 생각안할 수 있어요?
그렇게 어리석게 사는 것이 우리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정말 가족이 있느냐? 가족을 진정 사랑하느냐? 의문이에요.
무심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원결(怨結)을 맺는지 알기나 하는 건지….”
스님은 이어 세세하게 사례를 들어가며 나쁜 업의 무서움을 이야기 하셨다.
“불자들이 착각을 하해요, 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이 (볼을 탁탁 때리며)요거 없어진 다음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으로 알아요.
그러면서 내 가족들에게 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웃으면서 지내면 그곳이 극락이라는 생각 왜 안 해요?
‘너 때문이다’ ‘네 잘못이다’ 하고 매사에 따지고 물어뜯으면 그게 바로 지옥이라. 지옥과 극락을 착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내가 그럽니다. 법당에서는 절 안 해도 된다, 아침저녁으로 내 가족들에게 3배해라, 부모 남편 아내 자식에게 서로 3배씩 꼭 해라,
그게 가장 진실한 예불이고 기도다, 아침저녁으로 꼭 그렇게 해라. 내가 늘 부탁해요.”
스님은 얼마전 찾아왔다는 50대 거사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스님 책을 읽고 가족들에게 매일 3배씩 실천하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가족들을 향해서 3배를 하려니 쉽겠어요?
일주일을 망설이다 이제 겨우 자기 방에서 혼자 가족들이 있는 방향으로 3배를 한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참 장하십니다!’ 하면서 같이 웃었어요.
또 조계종 신도회장을 지냈던 울산의 처사님은 설날 아침 60평생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서로 맞절을 했다 합니다.
말은 쉬워도 막상 그렇게 무릎 꿇고 절하기가 어려워요. 저는 늘 강조합니다.
법당에서는 무릎 안 굽혀도 좋으니 내 가족들에게 절해라. 그러면 내 가족에게 쌓인 원결 풀고 가족에게 복을 짓는 밑바탕이 된다!”
스님의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졌다.
이어 스님은 불교라는 것이 무엇이고 불교인은 어떻게 신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평소 생각을 천천히 풀어 나갔다.
“불교는 그 ‘나’를 죽이라고 하잖아요. 내가 죽어야 한다고 해서 내 육신을 죽이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나’라고 점찍는 것, 마음, 그게 죽어야 불교인데 절에 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합니까? 모두들 어디 절에 나가고,
어디 스님 법문 들었다하면 전부다 이루어지는 걸로 착각을 해요.
풀어야 하는 것은 결국 내 응어리입니다. 내가 억지소리 많이 해요.
부처님 말씀 팔만대장경은 당신이 사람이면 사람 자리에 서세요, 그리고 사람의 길 가세요, 그게 팔만대장경이라고 말해요.
불교는 벗어나는 게 목적이다, 해탈,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 가슴에 있는 응어리를 풀어야 해요. 다른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답답하니까 어른들이 생각해낸 방편이 염불 참선 주력 기도 간경입니다.
이쪽으로 생각을 집중시키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의 응어리가 엷어지고 풀어지는 것을 말씀하신 거예요.
흔히 불교의 목적이 참선 염불 기도 같지만 이건 다 가슴의 응어리를 풀기위한 방법이지 그것이 목적은 아니에요.
어쨌든 불교는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니까. 답답하면 염불 주력 화두라도 부지런히 해라 하죠.
부지런히 하다보면 시간의 세계, 공간의 세계가 분리된 정(靜)의 세계,
삼매라는 것을 한번 두번씩 겪으면서 이유도 모르고 까닭도 모르는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마냥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면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이 우주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하고 고마운 것인지 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이런 곳에 생을 받았다는 자체가 또 얼마나 감사하고 복 받은 일인지 저절로 느껴지고 그것을 알게되면 불평불만이 떨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내 옆의 누구나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안 생길 수 없어요.
불교인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까지는 해야 불교에 발을 들여 놓았다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남이 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부지런히 노력하고 실천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경지예요.”
스님은 대화 내내 작은 ‘나’를 죽이고 큰 ‘나’를 살리는 일이 가족과 세상을 건강하게 만드는 근본임을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