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 세계가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개인들은 자기의 욕망 충족과 편리함을 쫓다 보니 속도와 경쟁의 노예가 되어 있고 국가들은 자기 나라의 국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다 보니 경제 전쟁과 무력 충돌까지 불사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생산력의 놀라운 증가로 인류가 더욱 풍요롭고 평화롭기를 기대했으나. 세계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세계 기후협약이나 평화조약을 깨트리고 자기의 정치적 입지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 유일한 세계 공론장인 UN 헌장의 권위마저 무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는 동안 이 지구별은 생태 환경의 위기를 겪게 되었고, 과연 인류가 계속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커지고 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현금 자본주의 문명은 속도와 효율을 최우선시하여 로봇과 AI를 통한 대량생산과 빠른 유통, 대량소비와 무분별한 폐기라는 시스템으로 작동된다. 나무와 숲, 물과 대지를 난개발하고 석유를 과잉 채취하여 무분별하게 에너지를 사용하다가 지구 생태계가 교란되어 몇 년 전 코로나 대大감염 사태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서로 상생하기보다는 강자와 승자의 독식을 용인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오로지 인간의 탐욕과 이윤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파국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이익'과 '경쟁'은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인간 생존의 기본 공간인 땅과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어 온 나라가 부동산 광풍에 휘말리게 되었다.
청춘남녀들은 살 집은 마련할 수가 없어 결혼은 포기하고, 용케 결혼해 아이를 낳아 학교에 보내도 학교가 인간다운 사람은 양성하는 데 목표한 두지 않고 성적만 잘 따는 득점기계를 양성하는 곳으로 변질되어 유치원부터 과외 학원에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 사회 전체가 무한경쟁과 이윤추구를 향해 질주하다 보니 서로 간의 적대감과 불안심리는 증폭되고, 이익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다 보니 이 지구별은 심각하게 병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전 인류가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인류의 지혜를 담지하고 있는 현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진리 전파와 비폭력 평화를 외치고 실천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 지구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우리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가난한 곳이다." 라고 갈파하였다. 이 지구촌의 생산량은 늘 과잉이지만 고르게 배분되지 않고, 우리 인간들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데 늘 허덕거리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고 정직하게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더 많은 생산을 위한 경쟁과 효율성이 아니라 공생과 공존을 위한 나눔과 돌봄을 어떻게 기획하고 실천하느냐 하는 것이다. 부국강병을 추구한 전국시대를 살았던 평화 생태 사상가 장자가 사람들이 '쓸모 있음의 쓰임(有用之用)'만 알고 '쓸모 없음이 쓰임(無用之用) 을 모른다고 하였다. 날마다 사람을 죽이고 곡식 자연을 황폐하게 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쓸데없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非戰) 생명 자체를 소중히 여기며 한가하게 소요하다가 낮잠이나 자는 게 낫다고 말한 이유이다.
이러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동서고금의 성인이나 현자들은 대개 헐벗고 굵주리고 아프고 지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대를 말해왔다. 불가에서는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중생에게 필요한 것을 보시하고(布施), 희망과 위로의 말을 건네고 (愛語). 그들을 이롭게 하며(利行), 같이 일하고 동고동락할 것(同事)을 권면하고 있고, 유가에서도 널리 민중을 사랑하고 어려움에서 구제해 줄 것(搏施濟衆)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한 사람과 친구가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교회에 다니거나 절에 간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자께서 말씀한 대로 극기복례 克己復禮 할 때만이 가능하다. 부단한 수양과 성찰을 통해 지나친 욕망과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자기 절제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민중을 사랑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도 먼저 홀륭한 인격이 되고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난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노자는 사랑 (慈)과 검소함(儉)과 겸손함이 인간의 세 가지 보배스러운 덕목이라고 했는데, 그중에서 검소라는 덕목은 반자연적인 근대문명이 초래한 오늘날 위기 상황에서 특별히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자연을 낭비해 왔다. 급기야 현대인들은 생각하는 인간에서 소비하는 인간으로 변해왔다. 생텍쥐페리가 말한 대로 인간이 껌을 소비하는 동안 우리가 몸담은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껌을 소비하는 인간을 생산해 왔다. 내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빈폴이 나를 입고, 내가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가 나를 신고, 내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루이뷔통이 나를 들고 다니고, 내가 정보를 선택하는 것이아니라 미디어가 나를 길들이는 지경이 되었다. 주객이 전도되고, 소비하는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을 큰 병으로 여긴다. 그러나 도道를 추구하는 사람은 가난을 오히려 즐긴다. 공자 孔子는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돈이 있으면서도 예의법절을 지키기를 좋아하는 (貧而樂,富而好禮 )"경지로 나아갈 것을 주문했고, 맹자孟子는 "부귀하더라도 너무 지나치지 않고, 가난하더라도 뜻을 바꾸지 않을 것 을 사람의 도리라고 여겼다. 조선 후기 실학파 문인 박지원의 <허생전> 에도 "재물 때문에 얼굴에 기름기가 도는 것은 장사치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만 냥이 어찌 도를 살찌울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나온다.
벌들은 이 꽃 저 꽃으로 다니면서 꿀을 조금씩 모은다. 그러면서도 꽃을 해치지 않는다. 저들이 얼마나 점잖고 자제를 할 줄 아는지 아는가. 하지만 인간들은 어떤가. 땅이 아낌없이 주는 것을 얻으면서도 한계를 모르고 땅이 고갈될 때까지 가려고 하지 않는가.-사티쉬 쿠마르, <그대가 있어 네가 있다> 이제라도 이러한 별들의 지혜를 본받아 탐욕의 질주를 멈추고, 하늘과 땅에 의지해 사는 인간의 도리를 회복하고 자발적으로 가난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와 우리 후손의 미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