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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4: 20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 고전 14: 23 너희를 미쳤다.
4.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라 ( 14 : 20-25 )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고전 14: 20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
사람 속에는 악의 경향성이 있으므로 악은 모를수록 좋고 경험해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생각과 깨달음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이루며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 잠언 23: 7 -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인격이지만, 생각이 온전하면 온전한 인격이다. 바른 생각, 깊은 생각, 원만한 생각, 온전한 생각은 성숙한 인격의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1]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통역 없이 방언을 회중(會衆)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지혜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하나의 호기심(好奇心)과 자랑거리로 구경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더러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행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뒤이어 어린아이에게서 본받을 것만은 본받으라고 말한다. 곧, 악에 있어선, 그것을 경험해 본 일이 전연 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상반절에 있는 "아이"란 말과 다른 단어이다. 이것은 실상 유아(乳兒)를 의미하는 네피오이이다.
2]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방언하는 자들이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 지혜이다. 그렇게 행함이 장성한 사람다운 자의 소위(所爲)이다.
고전 14: 21 율법에 기록된 바 -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를 율법이라고 불렀다. 율법은 구약 성경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모든 책들은 권위에 차등이 없다.
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이것은 사 28: 11-12에서 인용한 것이다.
* 사 28: 11-12 – 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런데 이것이 "율법에 기록된" 것이라고 한 이유는, 그 때에 구약 전서를 가리켜 "율법"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 요 10: 34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롬 3: 20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면 여기 인용된 사 28: 11-12의 예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이사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이 장차 외국인들(앗수르 사람들)이 유대를 침략하여 정복하고 지배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여기 이른바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것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이다.
여기 "다른 방언하는 자"란 말은 앗수르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다른 방언하는 자가 유대인에게 온 것은, 그들을 벌하시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일반이 깨닫지 못하는 말로 회중에게 말하면 그것은 그 회중에게 대한 일종의 벌이다. 그것은 유익을 주는 일이 아니다.
2]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사도는 이렇게 구체적인 사례로 가르칠지라도 듣는 자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고전 14: 2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
사도 바울은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이며, 예언은 믿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는 방언보다 예언을 구해야 하며 오늘날 성경 교훈을 사모해야 한다.
1]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1)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이 말씀 뜻은, 남들이 깨닫지도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듣는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23절).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침내 다른 방언하는 자(앗수르 민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음과 같은 일이다(21절).
(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
곧, 방언하는 결과는, 그 듣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고쳐 주지 못하고 그냥 믿지 않는 자들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것 뿐이란 뜻이다.
이것은 방언의 결과가 어떠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2]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이것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언을 하면 그 듣는 자들이 회개하고 믿는 데로 나아가진다는 뜻이다.
3] 14: 22의 해석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좀 부탁드립니다. 저는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 이라는 부분을 '방언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은사'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이야기' 라는 책의 저자 윤석준 목사께서는 운영하시는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http://www.lovereformed.com/)' 이라는 곳에 어떤 독자분이 방언에 대하여 묻는 글에 대해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22절의 말씀은 "방언이란 믿지 않음의 표적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예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언이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주어지는 것은 "그들이 불순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저주와 심판의 표시" 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인 것입니다.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해석의 주된 근거로는 바로 전에 나오는 21절의 이사야서 내용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방언이 은사로서 존속하는가, 아닌가' 라는 토론에서 한발짝 더 나간 해석인 것 같고, 실제로 이것이 보다 더 성경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라면, 방언을 사모하기는 커녕 멀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우선 본문은 문맥상 20-25절까지가 한 단락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메인 메시지는 지혜에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 주제를 논증하기 위해서 이사야 28:11-12의 내용을 21절에 인용하였습니다. 그 내용인즉, 다른 방언으로 내 백성에 말해도 이 백성이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후문맥인 23절에서는 교회에서 다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와 무식한 자들이 와서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 합니다. 즉, 그렇게 다 방언으로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이런 문맥을 고려해서 22절을 해석하면,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징이 아니라 안 믿는 자들을 위한 표징이라는 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도 하나님이 설득을 하셔도 안들으니 이방 언어로 그들에게 말했는데, 그도 안듣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단의 전체 주제 곧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고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깨우치라는 것이지요. 이걸 다시 후문맥과 연과지어 봅시다. 방언하면 안 믿는 자들이 와서 미쳤다고 합니다. 근데 분명 22절에 믿지 않는 자를 위한 표징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미쳤다고 하니 표징이 아닌게 됩니다.
따라서 문맥을 따르면 22절은 방언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안 믿는 자들 곧 믿음 없는 자들에게 주시는 표징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지혜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분량의 지혜이고 그러니 너희는 방언을 사모할 것이 아니라 예언(설교)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표징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위의 주해가 정당한 것이지요. 방언은 신자가 사모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하도 안 믿으니 방언을 주셨다 이런 뜻이 되고 그걸 사모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안믿는 자들이 미쳤다 하는 그게 정작 표징의 역할도 못하는 것이지요. 본문은 가짜방언을 말하는게 아니라 방언이 믿지 않음에 징표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위의 주해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파란색 글의 두번째 줄에 예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주어진다라는 표현은 아마도 방언=예언이란 의미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대로 예언은 설교를 의미하고 이는 불신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어야지 예언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실수 인거 같습니다. 아마도 방언을 설명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긴 실수인 거 같습니다.
출처:http://lewisnoh.tistory.com/entry/고린도전서-1422의-해석?category=426976[Post Tenebras Lux]
고전 14: 23 너희를 미쳤다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
1]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사도는 교회를 몸의 지체를 예로 들어 가르쳤었다. 그런데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여러 은사중 방언만 고집하여 모두 방언으로 말한다면 당사자에게는 유익한 점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한 모습으로 비쳐 신자들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을 말한다.
2]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신자들이 방언을 통역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에, 그 듣는 불신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방언하는 자들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통역 없이 방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바울이 이 말로써 역설(力說)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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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속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사랑과 행복으로 편안한 삶에 만사형통 하시고 즐겁게 아름다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