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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류지혜 기자 |
M은 완전히 혼자 고립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라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인간이다
그런 편이 그에게는 오히려 마음 편해서 좋다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이 없으니 무슨 일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M은 스스로 자신을 시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속이 편안해진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은 내가 워낙 시시한 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맞는 생각이다. 사귀는 여자마다 나를 떠나가는 것도 내가 시시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자신의 단점을 이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고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시시한 대로 내버려 두고 그것이 저절로 굴러가도록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하고 있다.
명함 한 장 건넬 만한 처지도 안 되는 별 볼 일 없는 시시한 놈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전화가 걸려오는 일도 없고, 그가 전화를 걸고 싶은 상대도 없다. 그의 전화는 항상 꺼져 있다.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휴대전화에 하루 종일 눈을 박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되고, 역겨운 느낌마저 든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세상에 전파하려고 기를 쓴다. 휴대전화 때문에 사람들은 쓸데없이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M은 완전히 혼자 고립되어 있다.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절해고도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라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으니 그라는 인간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인간이다. 그런 편이 그에게는 오히려 마음 편해서 좋다.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이 없으니 무슨 일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의 그림자를 밟고 지나간다. 그러면서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그림자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투명인간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오후 2시 16분. 열차는 부산역 플랫폼에 스르르 미끄러지듯 하다가 멈춰 섰다. 그는 감겨 있던 눈을 뜨고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접어, 막 일어서서 나가는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던져 놓는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는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검은색 트렁크와 같은 색의 배낭을 끌어내린다.
40대 초반의 그는 중키에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커 보이는 헐렁한 베이지색 남방과 카키색 바지에 가려 몸매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납작하고 둥근 얼굴은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오고 밑으로 쳐진 가는 두 눈은 항상 꿈꾸는 듯한 표정이다. 그 눈을 도수 높은 안경이 어느 정도 가려 주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못생긴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듯 그의 머리 위에는 누런 운동모가 얹혀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역 광장에 쏟아지고 있는 햇빛과 그 햇빛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한 번 결혼한 적이 있었고, 초혼에 실패한 후에는 두 번 다시 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평생에 걸쳐 여자를 먹여 살리고 자식들을 낳아 길러야 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로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나이가 차면 아주 당연한 것처럼 기계적으로 결혼을 하고 그때부터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죽을 때까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결혼이라는 의식을 치렀다고 해서, 그 한 가지 이유로 해서 평생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생이란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가. 오늘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막상 하룻밤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 사랑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고 허덕거리며 출근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 지지리 공부도 못하고 미련스러운 자식들을 위해 피땀 흘려 번 월급을 통째로 내놓아야 하는, 그 어처구니없는 짓이라니. 왜 사람들은 그런 어리석은 짓들을 자청하는 것일까.
그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블랙커피를 한잔 받아 들고 창가에 가서 앉았다. 딱히 가야 할 곳이 있다거나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부산에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내려온 것이었다. 그냥, 그냥…. 그는 이 말의 편리함이 마음에 들었다.
커피숍을 나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간 그는 광복동 쪽으로 가는 전철에 올랐다. 뒤쪽 칸 문이 열리더니 검은 선글라스를 낀 맹인 사내가 나타났다. 흰 지팡이를 든 그 앞에는 코흘리개 소년이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소년은 얼굴이 더러웠고 몹시 허기져 보였다. 맹인은 걸음을 멈추더니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M은 구슬픈 가락의 '타향살이'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모니카 연주가 끝나자 맹인과 소년은 승객들 앞으로 다가섰다. 소년은 조그만 바구니를 들고 있었고, 목에는 네모진 골판지 조각이 걸려 있었다. 골판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서툴게 적혀 있었다. "아내는 가출하고 아이들 셋은 배고파 울고 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승객들은 그것을 흘끔 쳐다보고 나서 하나같이 고개를 돌린다. 맹인 부자가 그 앞으로 다가왔다. 소년이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는 동전 몇 개와 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바구니 안에 집어넣었다. 소년이 놀란 눈으로 만 원짜리 지폐를 들여다보더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고개를 연방 숙여 댔다.
그는 남포동역에서 내렸다. 계단을 올라가 출구를 빠져나가자 맞은편 벽 앞에 세워져 있는 엑스 배너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멈춰 서서 거기에 쓰여 있는 글을 읽었다. '쾌적한 승차 질서를 위하여 구걸인에게 돈을 주지 말고, 잡상인의 물품을 사지 맙시다. 부산교통공사'.
그것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모두가 그냥 무심코 지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기막힌 글이었다. 구걸인에게 돈을 주지 말라는 경고 배너를 다른 곳도 아닌 공공기관에서 전철역 입구에 버젓이 세워 놓다니! 걸인을 쓰레기 취급하지 않는다면 저와 같은 경고문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한 처사에 그는 화가 치밀었다. 어쩌다가 이 사회는 이렇게 잔인하고 무지해졌을까. 외국 여행을 많이 해 본 그는 세계 어디에서도 걸인에게 돈을 주지 말라는 경고문을 본 적이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걸인의 존재는 필연이다. 빈부 격차에 대한 제재가 없기 때문에 부자는 갈수록 더 많은 돈을 벌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끝없이 추락한다. 걸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걸인을 제거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자들이 돈 잔치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비곗덩어리에 깔린 빈자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끝없이 무시당하다가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걸인에게 돈을 주지 말라는 것은 담벼락에 소변을 보지 말라,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박애를 저버리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인륜을 저버리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걸인 따위는 굶어 죽어도 좋으니까 절대 돈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이런 무자비한 경고문을 공공기관이 버젓이 세워 두다니! 바보 멍텅구리 같은 놈들이다.
그는 역 사무실 앞으로 다가가 머뭇거리다가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두 남자가 있었는데 젊어 보이는 사람은 출입구 가까운 곳에, 그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 사내는 안쪽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젊은 남자가 앉은 채로 그를 쳐다본다. 그는 바깥에 있는 배너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기, 저 배너 말인데…저, 저런 걸 왜 저기다 세워 두는 거죠?"
젊은 직원은 어리둥절해한다.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를 못 해 "네?"하고 되묻는다. 상대가 행색이며 생김새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뻣뻣하게 나온다.
"저기 밖에 세워 둔 배, 배너 말이에요. 그런 걸 왜 거기다가…. 마, 말이 안 되잖아요. 좀 치, 치울 수 없나요?"
"그게 뭐 잘못됐나요?"
"쾌, 쾌적한 승차 질서를 위해…구, 구걸인에게…도, 돈을 주지 말라는 거…말이 안 되잖아요. 너무 모, 몰인정해요. 그런 걸 써서 세워 두다니…마, 말이…."
"뭡니까?"
안쪽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다가왔다. 청년이 들은 내용을 이야기했고, 거기다 M이 몇 마디 더 보태자 중년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을 가해 왔다.
"잡상인하고 구걸인 때문에 우리도 골치가 아픕니다. 승객들 항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구걸인한테 돈을 준다고 해서 그게 그 사람들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뒤에 다 조직이 있어서 걸인은 한 푼도 못 갖고 조직이 다 챙겨 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걸인한테 돈을 줘서는 안 됩니다."
"참 펴,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군요. 정말로 배, 배가 고파서 구걸하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닙니까? 어, 어떻게 그렇게 이, 일률적으로 판단하십니까? 걸인한테 돈, 돈을 주지 말라는 거 너, 너무 잔인한 말 아닙니까? 오, 오죽해야 동냥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굶어죽는 데도 모, 모른 체 하라는 건…."
"요즘 굶어 죽는 사람 어딨습니까? OECD 10위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인데 굶어 죽는 사람 없습니다."
"저 배, 배너를 보고 창피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건 상부에서 일률적으로 만들어 가지고 배포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시에 따른 것뿐입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저 배너…너,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 안 하십니까?"
"우린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잘 알겠습니다."
지상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는 기분이 우울했다.
광복동 거리는 무더위 속에서도 활기에 넘쳐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쇼윈도에서는 최신 디자인과 화려한 색상으로 다듬어진 갖가지 상품들이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거리에 무성한 가로수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왼쪽으로 꺾어 설렁탕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부산에 올 때마다 그가 자주 들르는 식당이었다. 점심때도 많이 지난 어중간한 시간인데도 실내에는 많은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설렁탕을 주문하면서 기름을 빼 달라고 했다. 그 집은 무엇보다도 김치와 깍두기 반찬이 맛이 있었다. 설탕을 넣어 달게 만들었기 때문에 먹기에 좋았다.
설렁탕과 함께 김치와 깍두기까지 남김없이 먹고 나자 포만감으로 기분이 느긋해졌다. 식당을 나온 그는 부근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흡연실은 2층에 있었다. 그는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물었다. 팝송이 귀가 따갑게 실내를 울리고 있었다. 왜 유럽이나 일본의 커피숍들은 조용한데 한국의 커피숍들은 하루 종일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 놓을까. 그것은 음악이 아닌 소음 공해였다. 밖으로 나온 그는 사람들을 피해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그 비좁은 골목은 지저분했고 전선들이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었다. 골목 중간쯤까지 왔을 때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골목의 움푹 들어간 공간에 젊은 여자가 한 명 처박혀 있었고, 건장한 사내 두 명이 그녀를 무자비하게 걷어차고 있었다. 여자는 옷이 갈가리 찢긴 채 거의 벌거숭이나 다름없었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이 썅년,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왜 남의 유부남 꼬셔 가지고 내 동생 피눈물 나게 만들어? 너 때문에 내 동생 자살할 뻔 했어!"
"얼굴이 반반해서 그러니까 얼굴을 그어 버려!"
그가 주춤거리자 대머리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구경할 거 없다고 하면서 어서 가라고 말했다.
"여, 여자를 그렇게 때리면 안 되는데…."
"야, 가라면 가! 새끼야!"
대머리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때리는 순간 그는 얼핏 장발의 사내가 깨진 소주병으로 여자의 얼굴을 긋는 것을 보았다.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고, 뒤로 돌아선 장발이 그 앞으로 다가왔다. 얼룩덜룩한 남방 차림에 풀어헤친 가슴 위로 금빛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코밑수염이 유난히 까맣다고 생각하면서 M이 뭐라고 말하기 위해 더듬거리기 무섭게 강철 같은 주먹이 그의 코빼기를 후려갈겼다. 그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고, 잠시 얼이 빠져 쓰러져 있다가 가까스로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꺼져!"
엉덩이를 걷어채인 채 정신없이 골목을 빠져나온 그는 그제야 자신이 코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코에서 흘러내린 피는 베이지색 남방 가슴께까지 방울방울 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지나쳐 갔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코피를 닦으면서 차도를 건너갔다.
자갈치 시장 쪽으로 걸어가다가 그는 시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돌았다. 조금 걸어간 곳에 5층짜리 낡은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옆에 지은 지 얼마 안 된 높은 건물이 솟아 있어서 그것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 그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는 복도 맨 끝까지 걸어간 다음 바다 쪽으로 향해 있는 520호실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열쇠를 꺼내 철문을 열자 열기가 훅 끼쳐 왔다. 그가 11평짜리 그 오피스텔을 구입한 것은 3년 전이었다. 신축 오피스텔의 절반 값도 안 되는 그것을 구입한 것은 부동산 투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은신처 같은 의미가 더 강했다. 그는 서울에 두 곳, 대전과 제주도에도 각각 한 곳씩 은신처를 확보해 두고 있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싫어한 그는 그 은신처들을 돌아가면서 이용하고 있었다.
자갈치 시장과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그 방은 아주 삭막해 보였다. 가구라고는 군용 간이침대와 낡은 탁자, 그리고 의자가 전부였다. 탁자 위에는 재떨이로 사용하는 깡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다음 부두를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이 짠 내음을 풍기며 불어왔다. 낡은 배들이 오가고 있었고, 갈매기들이 활개 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거리에는 생선을 진열해 놓은 좌판을 자식처럼 품에 안은 여인네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었고, 바닷물로 질퍽한 길 위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좋았다. 그래서 그곳에다 은신처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콧잔등이 부풀어 있었고 그 밑에는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콧잔등을 만지자 몹시 아팠다. 코뼈가 부러지지 않았는지 걱정이 됐지만 병원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바짝 마른 걸레를 빤 다음 그것으로 방바닥을 닦았다. 탁자와 의자, 그리고 창틀도 훔쳤다. 청소가 끝나자 가볍게 샤워를 한 다음 벌거벗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책을 펴들었다. 영국 출신 작가인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였다. 스파이 소설의 고전으로, 동서 냉전 시대의 베를린이 무대였다. 그는 스파이 소설을 좋아했다. 목숨을 걸고 숨어서 은밀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 세계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 같았다. 졸음이 밀려오자 그는 책으로 얼굴을 덮은 채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 그는 오피스텔을 나와 전철역 쪽으로 걸어갔다. 전철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모두가 기계적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두가 기계 같아 보였다. 서면역에서 내린 그는 해운대로 가는 2호선 전철로 갈아탔다.
해운대역에서 내렸을 때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햇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두터운 구름층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비까지 뿌리고 있었다. 가는 비였기 때문에 그는 비를 맞으며 해변을 걸어갔다. 해수욕장에 들끓고 있던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고, 백사장을 뒤덮고 있던 비치파라솔들은 날개를 접고 있었다.
비를 피해 상가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다가간 그는 목로주점 앞을 지나치다가 멈칫했다. 아까 광복동 뒷골목에서 깨진 병으로 여자 얼굴을 긋고 그의 콧잔등을 후려갈긴 그 장발의 사내가 노천의 처마 밑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흰색 블라우스 위에 자주색 에이프런을 두른 미녀가 앉아 그가 지껄이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그 앞을 지나쳤다가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해서 발길을 돌렸다. 코밑수염과 얼룩덜룩한 남방, 그리고 풀어헤친 가슴 위에 걸려 있는 금빛 목걸이가 틀림없는 그 사내였다. M은 건물 옆으로 돌아갔다. 코너에 자리 잡은 가게는 내부 수리 중이었고 벽돌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인부들은 안에서 작업 중이었다. 그는 재빨리 벽돌 한 개를 집어 들어 배낭 안에 넣었다. 목로주점 쪽으로 돌아온 그는 옆에 나란히 있는 다른 카페로 가서 기둥 뒤에 자리 잡고 앉아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바다의 침묵'이라는 그 카페 앞 노천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반면 목로주점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기둥 뒤에서 목을 조금 빼면 코밑수염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의 목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값 잘 쳐줄 테니까 좋게 말할 때 듣는 게 좋을 거요."
협박 조의 은근한 말에 여주인 주오는 차갑게 반응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어요. 이 가게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다른 데 가 보세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녀가 냉큼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코밑수염은 조금 남아 있는 맥주를 마저 마시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M도 따라 일어섰다. 코밑수염은 침을 찍 하고 뱉은 다음 건물 가운데 있는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화장실이 있었고, 그는 남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성기를 꺼내 소변을 보기 시작했을 때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그는 목로주점 여주인을 납치해서 강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미녀인 데다 몸매도 글래머라 맛이 좋을 거라 생각하자 성기가 금방 단단해지면서 고개를 쳐든다. 일주일 동안 가둬 놓고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 다음…. 그는 뒤통수에 강한 일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M은 다시 한 번 벽돌로 그의 뒤통수를 힘을 다해 내리쳤다. 코밑수염은 무릎을 꺾으면서 온몸을 후들후들 떨다가 뒤로 쿵 하고 나가떨어졌다.
손을 털면서 밖으로 나온 그는 빗속을 한참 걸어가다가 길을 건너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들고 노천에 앉았을 때 그는 비로소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조금 전의 자신의 잔인한 행위가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것 같았고, 그런 짓을 저지른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배낭에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소설을 한 편 쓰고 싶었다. 작가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고, 소설을 한 편 써서 가명으로 발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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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