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본받는 자, 빛의 자녀로 행함(2)
엡 5:1-14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 설 교 >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
엡 5:8-14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떻게 살아가야 진정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인지,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성공이나 실패는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들이 닥쳐왔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닥쳐오는 일들을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실패나 역경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패배자로 인정하면서 비관적인 해석을 내릴 때에 그에게는 결코 새로운 기회나 성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해, 나는 실패할 것이야, 나는 예전에도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일어서지 못할 것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영영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우리 입으로 말한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인 칼 메닝거(Karl Menninger)는 이런 말을 합니다.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s) 인간의 행복과 성공은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와 사물을 보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사람,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사람, 매사를 희망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으며, 절망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났지만,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지옥 같은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발 한 켤레의 사랑]이라는 감동 깊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고 은퇴하신 침례교회의 윤영준 목사님이 편집하신 책입니다. 그 책에 '전화위복의 기회'라는 글이 있습니다. 청년 월터(Judd Walter)는 얼굴의 여드름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하는 과정에서 엑스레이를 너무 과다하게 사용하는 실수로 얼굴이 볼품 없이 나빠졌습니다. 월터는 심한 우울증과 함께 열등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흉한 얼굴의 이 청년이 신앙과 의지를 발동하여 새롭게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나의 최선을 다하여 일생을 살리라" 그는 다짐하였습니다. 그는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최선으로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중국에 가서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고, 미국으로 다시 들어가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데, 유례 없이 10번이나 당선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일생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다보니 일생을 참으로 의미 있게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드 월터라는 사람처럼 외모에 신경 쓰지 말고,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헌신하며, 희생하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잘 살려고 하실 것입니까? 잘 죽으시려고 하실 것입니까? 우리들이 어떻게 살며,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은 그가 결정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좀 야박한 말씀 같지만, 먹는 즐거움에 빠져 지내지 말기 바랍니다. 청년의 때라고 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후회막급한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임금이 제국을 건설하고 거대한 궁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궁전의 많은 방들 중에 하나에는 언제나 임금이 직접 잠근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임금은 하루에 꼭 한번씩 그 방에 들어가서 얼마동안 시간을 보내고 나왔습니다. 임금 이외는 어느 누구도 그 방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그 방에는 왜 들어가는 것인가?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이 궁금해하였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보물을 숨겨놓고 그 방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오는 것인가? 별의별 추측을 다하였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궁금해하던 몸종 하나가 잠겨진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는 금은보화가 하나도 없었고, 값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목동이 입는 낡은 옷 한 벌이 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옷은 임금이 왕좌에 오르기 전에 어렸을 때에 입던 낡은 옷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이름 없는 목동이었으며, 나는 왕이 되기 전에 한낮 목동에 불과하였다. 나 한 사람의 부귀영화를 꿈꾸지 말고 양 떼를 보살피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이 나라를 잘 이끌어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누구냐 하는 자기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정립하여야겠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케플러라는 사람은 "기쁨은 인생의 요소이며, 인생의 욕구이며 인생의 힘이며, 인생의 가치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쁨에 대한 욕구를 갖고 기쁨을 요구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기쁨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진정한 기쁨이란 다른 말로 하면 감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감격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감격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격이 있으니 하는 것이요, 기쁨과 보람을 얻을 수 있으니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밥 아니 먹어도 배부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보람을 먹은 것이요, 감격이 그를 사로잡았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에 밥을 먹지 않았어도 배부를 수 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본 사람은 아니지만 설교하는 사람이기에 깊은 명상의 시간을 종종 갖게 됩니다. 그래야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를 즐거운 마음으로 살며, 감사하면서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살아갈 때에 그것이 곧 보람이요, 의미 있는 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데 어제의 내가 어제와 같은 삶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는 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내가 살아야 합니다. 행3:19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전 성경에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심리학책을 보니 어른들은 하루에 열 번도 웃지 않는다고 하며, 어린이들은 보통 하루에 200번 이상 웃는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기도원에 가보니 중한 환자들만 고치기 위하여 모여드는데, 곳곳에 "웃으면 산다"고 쓴 표어가 걸려 있었습니다. 중병으로 인하여 하도 인상 쓰다고 죽으니 웃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오늘 제목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10절 말씀입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아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있고, 또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수 백 구절이 있는데 일일이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중에 제가 은혜 받은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이 돌아와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말씀과 신약에 주된 사상입니다.
겔18:23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은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한 사람도 더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겔18:32에 보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죽을 자라고 해서 어서 죽으라고 하지 않고, 그런 사람이라도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 하나가 돌아와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를 통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눅15:7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눅15장에서 계속하여 잃은 드라크마 은돈을 찾는 여인의 비유를 마치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고 하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죄인 한 사람은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요,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진정한 기쁨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하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생활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기쁨도 되고, 슬픔도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147:10-11입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이 아주 많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을 기뻐하시고, 올바른 간구를 기뻐하시고, 공평한 저울과 추를 기뻐하시고,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산 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에배소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1. 빛의 자녀로 살자. (8-9)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빛으로 표현하고, 이 세상에 속하여 멸망 받을 것은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살아가면서 빛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빛을 지으셨기에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참된 빛으로 오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라고 했으며, 요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된 빛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빛이 가진 사람이요,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은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어두움이란 빛이 들어와야 물러가지요, 빛이 없는 한 어두움은 그 어떤 것으로도 물러가지 아니합니다. 빛으로 어둠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절)고 하셨습니다. 빛은 식물로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빛은 곧 열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이라도 이 빛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데, 모든 식물은 빛이 비취므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빛 가운데 살아가면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빛으로 살아야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착함의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여러분, 착하게 사세요. 이 착하다는 말은 악하지 않고 선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악한 생각을 버리고, 선한 생각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든지 선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 하시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고 하면 솔선해야 하고, 헌신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이 뒷짐지고 피동적으로 따라가고, 자기 몫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을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 빛을 받아 빛을 반사하고 빛을 발하여야 하는데 빛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빛된 삶을 살아야 빛이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모나고, 유별나고, 말만 앞세우고, 행실이라고는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다고 하면 그것이 어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까?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빛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촛불은 자기를 태우는 아픔이 있을 때 빛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친구 하나가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만 사용하는 자물쇠로 잠겨 있는 책상의 깊은 서랍을 열어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음란한 책들과 나체사진들이 들어 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겉 다르고 속 다른 분이라고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긴 이 소년이 마침 혼자 집에 있게 되어 아버지의 깊은 서랍을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버지의 일기장이 들어 있는데 읽어보니 기도문으로 쓰신 일기장이었습니다. 소년은 아버지의 기도 일기장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매일 같이 자기의 이름,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일 같이 기도의 일기장을 쓰면서 아들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한 소년은 수천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받고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힘들지만 빛의 자녀로 살아가면 우리 때문에 함께 은혜 안에 들어오는 이들이 생기고, 빛의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지금은 좀 여유 있고, 쉽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하여 악한 방법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선하지 않은 방법으로 처신하였는데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으로 의식이 굳어지고 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의로움의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라는 것은 의롭게 되는 것과 함께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게 되는 것 따로 있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어야 의롭게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므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매사에 있어 옳고 바르고 정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면 의롭게 사는 것이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되살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진실의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진실이라고 하였지만 진리라는 말입니다. 도덕적인 진리, 구원을 주는 진리, 행함이 있는 진리, 진실이란 살아있는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진실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1:3-4)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믿고 진리를 간직하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절망과 의심의 그늘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진리 안에서 살지 않으니 모든 일에서 짜증스럽고, 내가 나 자신을 봐줄 수 없는 증오에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명명백백하게 살아가시면 밝은 대낮과 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답게 살기 바랍니까?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진리 안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힘들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면 진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2.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11-12)
11절-12절입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기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데,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할 때가 생깁니다. 어쩌면 좋을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어둠의 일은 매력 있어 보이고, 무언가 흥미진진하고, 그 속에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들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열매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매력 있어 보이는 것들은 대개 어둠에 속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혼을 죽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밀하게 행하려는 일들을 끊어야 합니다. 공개적인 시간관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하는 일들을 드러내놓고 일해야 합니다. 혼자서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은 잘못되기 쉽습니다.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여도 그렇습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대낮같이 드러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지 말고, 두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13-14)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발광체는 아니요, 반사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방송 설교가였던 짐 베이커(Jim Baker)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다가 타락하여 철창 신세까지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는 잘못되었다]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유명한 목사가 되고 3천명의 직원을 두고 1년에 1억9천 달러라는 예산으로 200개 채널의 텔레비전 방송국을 통하여 일을 할 때에 정말 바빴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16시간 씩 일하다 보니 더 이상 조용히 앉아서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었고, 더 이상 엎드려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왔을 때 나는 그것을 반격하여 물리칠 수 있는 아무런 무기도, 영력도, 하늘의 도움도 없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력을 받아야 하고, 빛을 받아야 하고,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여야 빛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경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도 없이 승리할 것으로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우선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고, 연구하고, 찾아보아야 하지만, 우선 주님 그 분을 기뻐해야 합니다. 시편7:4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느헤미야8:10에는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다같이 따라 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요즈음 잘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예수님을 먼저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빛 되신 주님 안에 거하면서 빛을 받아 그 진리의 빛 아래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빛의 열매를 맺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
엡 5:8-14 / 이수영 목사
새문안교회의 2000년의 교회표어는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였습니다. 그리고 2001년의 표어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자"였습니다. 그 연속선상에서 2002년의 표어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로 정했습니다. 하나되고 새로워지는 일은 각각 1년씩이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되고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되고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계속하면서도, 이제 다른 한편으로는 어두운 밖을 향해 빛을 발하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안으로는 꾸준히 예배, 교육, 친교의 내실화를 꾀하면서, 밖으로는 선교와 봉사를 확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년 교회표어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로 정한 것은 오늘 본문말씀 첫 절의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신 말씀에 응답하자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까? 그것은 본문 8절 말씀대로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빛의 자녀요 빛이기 때문에 본문 11절에서 말하는 대로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본문 9절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10절이 말해줍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주님이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하고, 우리의 영이 아니라 우리의 육이 즐거울 일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들은 어둠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오로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고 또 분별할 줄 아는 이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2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동시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은 단지 소극적으로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어둠의 일들을 폭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한다는 것은 폭로한다,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12절에서 말하는 어둠의 자녀들이 "은밀히 행하는 그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을 폭로하고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빛은 무지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죽어가는 불쌍한 심령들에게 진리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빛은 죄와 불의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죄와 불의는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합니다. 악과 부정은 주로 어두운 곳에서 은밀히 이루어집니다. 그 어두운 곳에, 부패와 부조리의 구조악으로 그늘진 사회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죄가 죄로, 불의가 불의로 드러나도록 의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빛은 절망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만 맡겨진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은 인간의 죄와 탐욕과 거짓이 너무나 강해서 선하고 의롭고 진실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악이 더 큰 악을 낳고, 불의가 더 많은 불의를 양산하며, 불행이 더 심한 불행을 빚어내는 세상에서 착하고 약한 사람들은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세상에 희망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은 미움의 어두움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심과 불신으로 가득찬 세상은 갈등과 반목과 미움과 싸움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회에서 사랑의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이 구절의 앞부분인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난다"는 것은 빛은 책망 받을 모든 것, 즉 모든 악과 불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 구절의 뒷부분인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한 것은 사도 바울이 말을 너무 절약함으로써 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어지긴 했으나 본래 빛이 아니고 어두움 가운데 있던 것이 빛을 받으면 드러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빛을 반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빛은 어두움 가운데 있던 것을 비춤으로써 그것이 또한 빛을 발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진리입니까? 사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복음에 무지했더라면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 없는 어두움의 존재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받음으로써 이제 우리가 비록 작지만 복음의 빛을 발할 수 있는 존재로 바뀐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우리가 이 진리의 빛, 의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을 잘 비추기만 하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꾸시는 것이며 우리는 그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빛이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받아 반사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하면 어두움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하나님의 빛을 받으면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빛의 반사체가 되어 어두운 세상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자로서 거역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신 말씀도 바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이 사명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서 깨어 일어나 그리스도의 빛을 힘있게 비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부터 어둡고 잘 안 보이는 구석구석에도 선과 의와 진리의 빛을 비추어 은밀히 행해지는 부끄러운 일들이 있다면 모조리 드러내고 추방하며, 나아가 이 세상을 향하여,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빛을 발하는 일에 온 교우들이 함께 힘쓰는 이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빛의 열매
엡 5:7-14 / 김경년 목사
알렉산더 대왕 부하 가운데 이름이 같은 병사가 한명 있었습니다. 이 병사는 다른 병사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형편없는 생활을 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먹칠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알렉산더 대왕이 알렉산더 병사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자네가 알렉산더 병사인가, 그렇다면 자네의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자네의 형편없는 생활을 바꾸도록 하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움에서 빛 가운데로 옮겨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안에서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본문 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자녀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님의 얼굴입니다. 자식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부모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또한 가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분들 가운데 여러 가지 측면에서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외아들 박모씨가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많이 합니다. 얼마전에도 상습적인 마약 복용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벌써 마약 복용 때문에 10번 이상 교도소를 드나들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얼굴이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포도나무에서는 포도열매가 맺고, 사과나무에서는 사과열매가 맺습니다. 결코 배나무에서 사과가 맺지 않습니다.
성도는 빛의 자녀입니다. 성도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본문 9절 말씀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첫째로, 하나님은 착한 행실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에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일에 착한 행실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주소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요, 우리가 일하는 직장이요, 우리가 공부하는 학교요, 우리가 속한 사회를 말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가 착한 행실을 나타내어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도만난 사람을 첫 번째로 발견한 사람은 제사장이었고그 다음은 레위인이었습니다. 그 두사람은 바쁘다는 핑계와 더 중요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면서 돕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마침 사마리아에서 올라온 촌부 한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즉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게 하고 모든 치료비를 자기가 부담하고는 훌쩍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살아가기를 요청하십니다.
이번에 15호 태풍 루사가 관통한 한반도 전역이 전무후무한 피해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시작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등 태풍이 지나간 자리마다 가옥이 침수되고, 도로 가 유실되고, 제방이 붕괴되어 수많은 농경지가 침수되고, 통신 이 두절되고, 단전, 단수 사태를 겪었습니다.
특히 태풍 루사로 많은 교회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시내 전역이 물에 잠긴 강릉, 김천, 속초, 정선, 영동 등에 위치한 교회들은 침수 피해를 당했고, 태풍으로 인해 무너지거나 교회 지붕이 날아간 교회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전라북도 무주에서는 갑작스런 산사태로 교회와 목사관이 매몰되면서 목회자와 자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참변이 벌어졌습니다.
이번 태풍은 결코 우연하게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이번 태풍을 통해 몇가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입김 앞에 인간의 수고와 노력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교만과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이 점점 다가오고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이 땅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 ‘더웁게 하라’고 외칠것이 아니라 진정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으로 저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서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착하게 산 것이 잘못 산 것이 아니라 악하게 사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면 세상에서는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간의 손해를 보아도 그런 삶이 결국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착함의 열매를 맺고 살아야 빛의 자녀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의롭게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세상에서 기준이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시대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시사프로를 보면 여당과 야당에서 한 사람씩 나오셔서 말씀하시는데 정말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최근에 이모씨가 라디오 방송에서 일방적으로 한 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 방송을 그만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구원에도 다양한 채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등산을 할 때 다양한 길로 정상을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구원 얻는 길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믿어도 구원이 있고, 마호메트나 공자를 믿어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기준이 없는 시대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천하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구원 얻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먼저 소유에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유욕이 없으면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둘째,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롭게 사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노아는 당대에 가장 의롭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책임의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방주를 예비하여 홍수를 피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노아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쪽으로는 약속을 믿고 방주를 준비하였으며 다른 한쪽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홍수를 피할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사명자의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때로운 외롭고 또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감수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놀려대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했지만 그는 책임감을 가지고 묵묵히 사명을 다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향하여 우리가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이 땅이 아닙니다. 영원히 들어가서 살 땅,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를 의인시하는 죄인과 자기를 죄인시 하는 의인이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을 자기를 의인시 하는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고 구제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모든 공로를 자기에게로 돌렸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달라는 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너무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절하셨습니다. 물리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리는 죄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자복하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철저히 낮추고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진실한 삶을 원하십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이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정직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행동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듣고 계시다는 것을 얼마만큼 확신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결정됩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어디에서나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느끼며 삽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개의치 않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성도는 물질에 진실해야 합니다.
세금도 철저하게 잘 내고, 남의 돈을 빌려왔으면 이자와 원금을 정당하게 갚아주고, 수고하고 노력한 댓가만을 바라면서 일확천금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권이나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리는 방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한 이성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했으면 다른데 눈 돌리지 말고 진실 되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결코 나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살아보고 결정한다고 계약결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기 전에 미리 동거하는 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대로 하면 가장 행복하고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식 앞에도 진실해야 합니다.
학생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 결과를 기대하세요. 왜 공부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쳐서 보고 합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들키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노력한 만큼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실수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지 옆 사람 답지를 볼 때 안 들키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곤란합니다.
대화에도 진실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남의 말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덕스럽습니다. 그리고 부득이 할때는 없는 말은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고, 남을 비난하고 허물을 들추고 단점을 지적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거짓말을 잘 하니까 남의 말도 믿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체면문화에 길들여져서 안 먹고도 먹었다고 말하고, 더우면서도 시원하다고 말하고, 안 괜찮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좋게 보면 예의 같지만 나쁘게 보면 진실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미국사람은 성경적 사고와 언어로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매우 진실합니다. 공항에서도 말하면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냐고 또 묻습니다. 정말! 진짜! 틀림없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처음 만나서 칭찬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다나엘의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진실한 사람을 불러서 주의 종을 삼으셨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회개 기도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시편 51:10절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였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입니다. 지금도 진실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진실한 자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지 못했을 때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단지 열매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 나무는 저주를 받아 말라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8-16 / 김명혁 목사
에베소서는 교회의 모습과 신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1장에서부터 4장 16절까지는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4장17절부터 6장까지는 신자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고 신자가 신자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엡5:8-21절까지의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묵상하면서 저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엡5:8-21절까지의 말씀이 신자의 모습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성령 강림 주일을 맞이해서 엡5:8-21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들을 일곱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들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그 존재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어두움의 존재에서 빛의 존재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 존재의 질이 바뀌어진 사람입니다. 그 존재에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와 영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어두움이던 존재가 빛이란 존재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장소에서 설던 존재가 빛과 생명의 장소로 그 현주소가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주 안에서 빛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특징이 ‘주님 안에서’ 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이 바로 ‘주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 안에서 봉사하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살기도 하고, 주님 안에서 죽기도 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존재의 질이 변화되고 존재의 현주소가 바뀌어진 사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그 행동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 여기서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행동의 종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의 모토로 ‘믿음만'을 내 세웠는데 그것은 좀 잘못된 주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믿음만의 종교가 아닙니다.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행동의 종교입니다. 그 행동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산상 설교에서 주님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된 사람들이란 착한 행실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착함이란 이웃에게 좋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착함이란 이웃에게 누추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을 하지 않고 덕을 세우는 말과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것을 말하고, 이웃에게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며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4).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 그리스도인은 그 행동이 변화된 사람이고 선한 일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 사람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로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면서 사는 못된 존재입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12:19). 이 말은 눅12장에 나오는 부자의 독백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소원이고 독백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 이성택 목사님도 그런 욕망을 품고 살았다고 고백했고 지난 4월 8일 아침 조용기 목사님도 그런 욕망을 품고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 기쁨의 대상이 돈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시게 하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15:3). 사도 바울도 자기를 기쁘게 하는 대신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기브게 하며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우리 강한 자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그리스도인은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 ‘세월’이란 말은 ‘시간’이란 말도 되고 ‘기회’란 말도 됩니다. 헬라어는 ‘카이로스’입니다. ‘기회’ 또는 ‘때’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간과 기회와 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여기 ‘아끼라’라는 말은 ‘사라’라는 말도 되고 ‘붙잡으라’는 말도 됩니다. 값을 치루면서까지 기회를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허송세월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회,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꼭 붙잡는 사람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그 기회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조선족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그 기회들을 재빨리 붙잡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을 채우는 내용물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술로 채우든지 욕심으로 채우든지 정욕으로 채우든지 지식으로 채우든지 무엇으로든지 채웁니다. 그런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술이나 욕심이나 정욕이나 지식으로 채우는 대신 성령으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하나님 자신의 일부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와 기운으로 자기를 채우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으로 자기를 채우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사모하므로 성령을 자기 몸에 채울 때 기도가 뜨거워지고 찬양이 뜨거워지고 봉사가 뜨거워지고 구제가 뜨거워지고 사랑이 뜨거워지고 착함이 뜨거워지고 기쁨이 뜨거워집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할 때 삶이 부드러워지고 삶이 따뜻해지고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새들은 물론 인간은 노래하는 동물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논 밭을 갈면서도 노래하고 고기를 잡으면서도 노래하고 운동을 하면서도 노래합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노래방이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조용필의 노래와 신승훈의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이 송정미의 노래나 박종호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고, 유행가를 좋아하던 사람이 찬송가와 복음찬송을 좋아하게 된 사람입니다. 여기 시는 시편의 노래들을 말하고 찬미는 찬송가의 노래를 말하고 신령한 노래들은 복음찬송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이고 서로 부르는 찬송인데 궁극적으로는 주께 노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이고 항상 주께 노래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삶의 자세에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인은 지배하는 자세에서 복종하는 자세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의 자세에서 종의 자세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피차 복종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상전에게 순종하고 종들에게 순종하게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복종하는 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2:8). 사도 바울도 자기를 종이라고 부르면서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의 종 바울과”(빌1:1).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고 다스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 존재와 행동과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은 지배하려는 삶에서 복종하려는 삶을 삽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모든 섬기는 살았다고 어거스틴이 참회록에 기록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살았고 손양원 목사님도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살았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삶 복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 일곱 가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존재와 행동과 기쁨의 대상과 시간 개념과 마음과 입술의 노래와 삶의 자세가 변화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여주시고 사도 바울이 보여주시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히 변화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날마다 변화를 받는 삶이라고 롬12:2에서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오직 변화를 받아." 변화를 경험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주위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어린 아기가 거름 마를 배울 때 자신도 기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우리 동혁이가 요사이 훌라 후프를 배워서 엄마보다도 잘 하고 할머니 보다도 잘하고 아빠 보다도 잘하니까 너무 신이 나고 너무 좋아하고 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니까 동혁이 엄마도 기뻐하고 할머니도 기뻐하고 아빠도 기뻐합니다. 할아버지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서너 번 밖에 하지 못하지만 동혁이가 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변화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성도들도 기뻐하고 우리 사회도 기뻐할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 두 가지만 말씀 드립니다. 첫째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늘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늘 사모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구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강변의 성도들 여러분들, 주님을 늘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항상 주님 안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늘 사모하고 의지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변화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뻐하시고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에베소서 5:8 / 이성호 목사
지난 12월 1일 빨램방이라는 수마트라 남부 도시에 지방교역자 성탄예배가 있어서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이틀 전에 도착해서 몇 몇 교회를 지방 감리사님과 함께 돌아보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정전이 되어 밤길에 어두움이 갑작스레 도시를 삼켜버렸습니다. 문제는 60세가 가까운 감리사님이 그만 방향 감각을 잃어 버려 도시 변두리를 몇 바퀴 헤매다가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8년 동안 살아온 감리사님이신데 갑자기 어두워지니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빛은 방향을 알 수 있게 하고, 따뜻함을 주며,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상용한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빛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1:3-5절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첫날 빛과 어두움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빛은 생명이며(욥 3:9, 16:20), 우리를 진리와 정의로 인도하고(이사야 42:6, 누가 11:33-26) 빛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시27:1)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참된 빛(요한 1:9)이시고, 세상의 빛(요 8:12, 9:5, 12:46)이시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모두도 빛의 자녀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요 12:36, 누가 16:8, 살전 5:5)
본문 말씀을 보면 전에는 우리 모두가 어두움이었는데,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로 정체성과 존재의 문제입니다.
일년생 화초로 키가 제일 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해바라기는 전 세계 어디서나 햇빛만 따라서 움직입니다. 큼지막한 꽃과 해바라기 씨는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줍니다. 그러나 햇빛이 없는 해바라기는 별 존재의 의미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보름달도 자신의 빛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으로 찾아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빌려 오셨지만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리신 적이 없기에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주안에 거하게 될 때 세상은 더 아름다워 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질줄 믿습니다.
둘째로는 상황에 대한 문제입니다.
빛은 어두움이 있어야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대낮에 아무리 환한 불을 켜 놓아도 햇빛아래서는 그 빛이 무의미합니다. 전방을 지키는 군인들은 밤 경계 근무 때 성냥이나, 라이타를 휴대할 수 없습니다. 그 작은 불빛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육안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오셔서 죄로 사망의 심판을 받을 수 밖 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은 죄로 가득했고, 그래서 구세주로 오셔서 천하만민을 구원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세상에 아직도 어두움이 존재한다는 말씀이고, 이 어두움 때문에 우리의 존재의 목적은 더욱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우리 이웃, 주변국가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살아야 하는데 이 어두움의 상황은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포기하거나, 지치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셋째로 희생입니다.
촛불은 빛을 나누어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은 녹아져 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지식인도 많고, 부자도 있고, 세상적인 직위가 높은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세상이 점점 삭막해 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
부모와 자식간에도 돈으로, 심지어는 어린 자녀들에게 심부름시키는 것도 돈을 줘야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물론 자립심을 키운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려서부터 보상과 댓가를 치뤄야 만 하는 훈련으로 자기희생과 봉사 정신은 날로 희박해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주셨고, 우리 삶의 모범으로 기독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라야 하는가를 몸소 행해 보이셨습니다.
세상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우리 모두가 이렇게 변화 될 때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
빛 뒤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에너지의 힘이 없이는 어느 것도 잠시라도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빛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난 한해를 돌아보고 결단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빛 된 춘천중앙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6-9 / 박덕기 목사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의 생활을 어두움 가운데서 사는 생활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빛 가운데서 사는 생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빛이 없는 자연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햇빛도, 별빛도, 촛불도, 전기 불도, 아무런 빛도 없는 칠흑 같은 캄캄한 세상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도, 아름다운 꽃들도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어떠한 위험이나, 죽음까지라도 전혀 알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달리는 도중 갑자기 이런 흑암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순간 온 세상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될 것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활동은 즉시 정지되고, 온갖 폭력만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마치 이와 비슷한 흑암의 세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영적 흑암의 세계입니다. 영적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지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 때문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영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 안에 빛이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영혼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참된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삶의 진정한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이란 다만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주의인 것입니다. 구원의 길도 모르고, 영원한 하늘나라도 모르고,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참 삶의 길을 찾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과 심판도 모른 체 살아가는 인간,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심령의 암흑세계입니다. 결국 어두움이란 마귀, 죄, 사망, 저주, 무지, 혼란과 절망 상태,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인류가 처한 운명이었습니다. 일년에 육 개월밖에 햇빛이 비치지 않는 북극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해가 떠오를 때가 되면 화려한 옷들을 입고서 산꼭대기에 모여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리다가, 그 첫 햇살이 비치면 큰 소리로 ‘아! 해가 떠오른다!’고 외친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하여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밤하늘에는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취었습니다. 그리고 한 큰 별빛이 동방의 박사들을 베들레헴까지 인도하였고, 지금도 진리의 참 빛은 뭇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천국과 영생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바로 이와 같은 비참한 상태, 어두움 자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광명의 신이십니다. 하나님께는 털끝만큼의 어두움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빛의 근원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신 고로, 어두운 것을 미워하시고, 빛 가운데서 사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또 우리 더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빛이신 하나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1)빛의 특성은 가르는 역할을 합니다.
빛은 낮과 밤을 가르고, 어두움을 가릅니다. 빛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빛은 모든 것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해줍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게 합니다. 시 119:120절에 “주의 말씀이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귈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빛 가운데 거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어두움에서 분리되시기 바랍니다. 어두움에 속한 것들은 음행, 더러운 것, 탐욕, 비열함과 누추함, 어리석은 말, 우상 숭배와 같은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어두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2)빛은 모든 것을 폭로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 빛이 비취이면 어둠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폭로됩니다. 빛은 모든 것을 다 드러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 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정체가 드러날 때 우리는 이 빛 앞에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도망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빛 앞에 드러난 것들을 새로이 정리하는 것입니다. 참 빛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셨을 때, 그래서 이 빛이 내 모든 정체를 폭로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피합니다. 빛으로부터 도망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직하게 이 빛 앞에 노출된 자기 자신을 보며, 그 추한 모습이 자신임을 인정하며 회개하기를 주저치 않습니다.
3)빛은 열매를 맺습니다.
빛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첫 번째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착함’은 ‘모든 악함’과 정반대되는 말입니다. 엡4:31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했고, 벧전 2:1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착하지 못함이 무엇입니까? 악독한 것, 노하고, 분내는 것, 훼방하는 것입니다. 궤휼과 외식, 시기,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착한 그리스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착함은 무엇입니까? 착함은 곧 하나님의 성품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선함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그리스도인은 관용한 사람입니다. 모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중심적인 사람,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합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입니다. 그는 자기의 욕심, 자기의 소원을 채우려고 하고, 그 욕심을 채우면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이웃을 만나게 될 때,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고, 악한 것을 막아 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한 사람 착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라고 하면서 화목케 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아마 이러 저러한 뜻이었을 거야”라고 하면서 긍정적입니다. 밝고 명랑하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원망 불평을 일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도저히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말 듣고도 가만히 있어?”라고 하면서 불화케 합니다. 부정적입니다. 매사를 비뚤어지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평, 불만, 원망을 일삼습니다. 착하고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은 접촉하는 사람도 서서히 감화시킵니다. 그러나 착하지 않고 부정적인 그리스도인은 접촉하는 사람도 서서히 물들어 가게 합니다. 우리 모두 악하고, 나쁘게, 비뚤어지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고,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힘쓰십시다. 간교함이나 간사스러움이 없는 착하디착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힘쓰도록 하십시다.
빛의 열매 두 번째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이란 법적인 개념을 가지게 하여 준다는 의미에서 선함과 다릅니다. ‘의’란 법적으로 준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착함보다는 더 좁은 의미를 갖습니다. 벽돌을 쌓을 때, 혹은 문을 세울 때, 수직으로 잘 서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림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의’의 개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판단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코 자기의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눈치나 경험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정당한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에 의해서 판단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누군가가 말한 시류, 소위 시대 조류를 따라서 살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불의한 수단 방법을 모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처세술에 능하다면, 그는 의로움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미련할 만큼, 우직스러울 만큼 곧은 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편견이나 독선과는 결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빛의 열매 세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그 안에 속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춘 것이나, 숨긴 것이나, 정직하지 못한 것이나,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이며, 투명하고 명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실함 때문에 그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사로잡기 때문에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너무도 진실치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12:1-2에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고 탄식한 말씀이 있습니다. 약4:8에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도 중요하지만, 사람 앞에서의 진실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도의 인격, 성도의 언행은 그 나라 그 사회의 양심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성도의 세계를 떠나, 그 어디서 보다 나은 진실을, 보다 깨끗한 양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불신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성도의 말 한 마디면 보증수표보다 더 신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세상 사람들은 차치해두고라도, 신자들에게서 마저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이고, 성도들 세계에서도 불신풍조는 만연되어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어떠한 오해나 억측이라도 성도들 끼리 만나서 한 마디 해명하고 밝히면, 그 진실성 때문에 모든 오해가 풀어져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진실치 못한 사람들끼리의 만남에서 무슨 신뢰가 생기겠으며, 무슨 사랑이 싹트겠으며, 어떻게 단합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겠습니까? 사랑, 사랑하고 백 번 천 번 부르짖지만,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무조건 경계하는 데서는, 온갖 거짓과 불신만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성이 없을 때, 그 신앙은 생명력이 없는 죽은 것이고, 언행에 거짓이 많을 때, 그 인격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언건대 신앙과 인격의 생명력은 진실한데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000는 참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말을 듣도록 삽시다. 000는 참 진실한 집사였었다 하는 말을 듣도록 삽시다. 000는 참 진실한 장로였었다는 말을 듣도록 삽시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되고 진실무망한 나의 종아!”라는 말씀과 선언과 평가를 받도록 삽시다. 그보다 가치가 있고, 또 성공적인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하고 갈망했습니다. 어느 누군가는 또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으나,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가 꼭 건강해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가 다 성공하고, 우리가 다 장수해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몰라도,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어떤 의미에서 그 나무의 생명의 표현입니다. 열매는 그 나무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빛 그 자체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그래서 우리가 과연 빛이라고 하면, 그 빛 된 성격을 나타내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물론 우리의 구원이 윤리나 도덕의 실천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나 언행은 최고 수준에 있는 불신자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빛의 자녀들이 되어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