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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배(빌 길버트) 11
흥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이 홍수처럼 불어나자 후퇴하는 미군들은 피난민들에 대한 생각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사단의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폭이 넓은 바지저고리와 훌렁한 두루마기를 한때는 호기심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의심스러워서 수색 대상이 되었다. 검문소와 초소에서 미군 헌병과 한국 경찰이 검색하는 과정에 그 품이 훌렁한 옷 속에 감추어진 무기를 찾아내기도 했고, 인민군이 자신들의 군복을 두루마기로 가린 것도 발각되었다. UN군의 병력과 장비를 정탐하여 보고하라는 북한 여자와 아이들로 된 적군의 첩자들도 색출되었다.
미군들은 그들이 접근하여 특히 뒤쪽이나 혹은 옆에 있을 때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농장에서 일하던 농사꾼 부부는 특히 경계 대상이 되었다. 가득 실은 나무더미는 겨울철 땔감일 수도 있으나 그 더미 속에 무기나 탄약을 감추었는지도 모른다. 수색 정찰대도 이제는 배수 도랑이나 쌀가마 속이나 그럴만한 은밀한 곳에서 무기를 찾아내는 데 능숙해졌다."
실제로 철수작전은 미 해병 1사단이 홍남에 집결한 12월 10일에 시작되었다. 해병대뿐만이 아니었다. 도시와 마을과 농촌 사방에서 몰려오며 길을 막아 군인들의 후퇴를 곤경에 빠트린 피난민 행렬은 이제 흥남 시내
로 흘러들어갔다.
열일곱 살 난 여학생 박정과 그녀의 어머니도 그 물결 속에 파묻혀 있있다. 박정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은 아주 "운이 좋은" 측에 끼여 있었다. 그 까닭은 홍남까지 까마득한 거리를 걸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근방에서 싸우던 남한 군인 한 사람이 그녀의 오빠 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그들은 트럭을 타고 40마일의 길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 모녀는 12월 중순 야밤중에 어둠을 타고 은신처에서 빠져 나왔다. 작은 논두렁 옆에 있던 그들의 농가가 폭격에 허물어진 뒤 인민군들의 눈을 피해 다른 이웃의 가족들과 같이 숨어 있다가 흥남을 향해 도망 치기 시작했다. 북한의 혹독한 추위가 그들의 피난을 더욱 힘들게 했다. 메릴랜드의 그녀의 꽃가게에서 박정은 말했다: "진눈개비와 바람이 지독하게 몰아쳤지요. 북한의 겨울 날씨는 시카고(Chicago)와 같았어요."
그녀는 책가방 속에 생필품 몇 가지를 싸서 넣고 오빠의 기타와 아코디언까지 어깨에 메고 갔다. 해변에서의 교전은 며칠 후에야 벌어졌으므로 잠시 정적이 지속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겁에 질려 쥐죽은 듯 있었지요." 피난민들 중에 처음으로 흥남부두에 왔기 때문에 50대 중반의 어머니와 여학생은 처음 눈에 띈 작은 고깃배에 우선 타고 봐야만 했다. "그 배가 가라앉는 줄 알았어요. 사람만 태우지 짐은 안 된다고 해서요...." 그때가 그들이 모든 짐을 배 밖으로 내던져버린 때였다.
마침내 그 어선은 바닷물 속에 잠길 듯 말 듯 하면서 동해안의 홍남과 부산 중간쯤에 있는 묵호항까지 갔다. 거기서 피난민들은 훨씬 크고 안전하며 편한 해군의 LST를 기다렸다. 며칠 기다린 후에 LST가 나타났다. 원래 LST는 승객의 항해를 위해 업그레이드된 배가 아니었지만 고깃배 속에서 시달린 피난민들에겐 퀸 메리(Queen Mary) 호 여객선만큼이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박정 모녀는 LST를 타고 크리스마스 음식을 처음으로 먹어봤다. "평생 처음으로 스파게티를 먹어 봤지요. 아, 그 토마토소스! 맛있었냐고요? 그럼요. 무척이나 맛있었어요. 배도 몹시 고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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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이라고 하는 다른 여학생은 그녀의 동급생들과 같이 홍남에 당도해서 대기 중인 LST로 인도되었다. 배가 며칠 동안 홍남을 떠나지 않고 있어서 박순과 함흥에서 같이 온 그녀의 친구들은 배 맨 밑바닥층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2000년 3월에 박순을 인터뷰했을 때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그때 적어도 춥지는 않았어요. 갑판 위에 탄 사람들은 추위에 벌벌 떨었지요." 박순과 학급 친구들은 갑판으로 올라가 철수 중에 해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포격전을 바라본 중인들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불꽃놀이(fireworks) 같았어요."
그 여학생은 LST가 묵호항으로 들어올 때 또 다른 전쟁의 끔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사지가 마비되어 죽은 피난민의 시체 대 여섯 구를 뱃전 밖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박순은 말했다: "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니까요!"
남한의 안전한 곳에 내린 후 박순은 만나는 사람마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물었다. 마침내 남녀노소 5만여 명의 피난민들이 함흥에서 흥남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 서로 타려고 아귀다툼을 하던 그 기차
에 탔던 고향사람 여자 하나를 만났다. 그녀는 순에게 말했다. 그녀의 부모들을 그 마지막 기차에서 보지 못했다고. 40년이 지난 후에야 그녀의 가족들 모두 피난 가지 않고 남았다는 사실, 이미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시고 남동생마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북한사람들, 미군이 생명을 바쳐가며 싸우고 있는 적국의 민간인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스탠리 볼린(Stanly Bolin)은 25년이 지난 후 이렇게 술회했다. "그들은 북한에서 좌익세력이 공산혁명을 전개할 때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정치적으로 반공투사들, 지주들, 기업인들과 교육자들이었다.
유엔군이 북진하여 공산당들을 만주 땅으로 몰아냈을 때 공무원으로 일한 사람들도 있었다. 수복지에서 수립된 지방정부 공무원이나 청년단원이 되어 유엔군의 지도 아래 평화와 질서 회복에 헌신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염원하던 남북통일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그들의 운명도 바뀌었다. 중공군에 밀려 UN군이 홍남 주위의 고립지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도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은 중공군이 무서워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미 7사단과 제3보병사단의 방어선이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고립된 항구 지역의 포위망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볼린은 당시 홍남시 주위의 정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그때는 12월 10일이었다. 흥남항구 밖으로 온갖 종류의 배들이 일렬로 쭉 뻗어 있었다. 193척의 대 선단을 만들어 전투사상 최대의 철수작전을 수행할 단계였다."라고 했다.
이와 동시에 미 육군에서는 전쟁영웅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 한 영웅은 AP통신의 한국 특파원 스탠 스윈튼(Stan Swinion)의 특별 타전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국에서 이렇게 써 보냈다:
"작달막한 체구의 2성 장군 로버트 슐리(Robert H. Soule)가 현재 이곳에서 가장 중심인물이 되어 있다. 제3보병사단장인 술리야말로 인간발전기(dynamo)' (정력의 화신, 초인이란 뜻. 역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신출내기 3사단이 이 고립된 해안 교두보에서 핵심적 전투사단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술리 장군은 부하 장병들을 고무시키며 자신의 유명한 구호를 외쳤다. '장병들! 독하게 버텨!' 그는 수없이 '사격! 사격! 제군들이 죽어라고 퍼붓는 한, 놈들은 쏘질 못해!'하며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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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애틀리(Clement Atlee) 수상이 워싱턴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고 본국에서는 미국인들이 교외의 쇼핑 몰 시대가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내의 백화점으로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러 몰려들고 있을 때, <워싱턴 포스트>지의 마샬 앤드류스(Marshall Andrews) 기자는 12월 5일자에, 트루먼 대통령이 다음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며 그날 밤 전 국민에게 "미국이 급박한 위기에 처하게 되어 그간 소매를 걷어붙이고 해온 중대한 과업을 완수해야 할 때가 왔다"는 요지의 중대한 담화문을 발표할 것이라는 기사를 터뜨렸다.
앤드류스의 예보 기사가 맞았다. 다음날 트루먼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규모 군사력 증강, 전시체제 하의 생산을 위한 경제안정, 임금과 물가 동결을 요구하는 담화였다. 징병제도 하에 매월 8만명을 군에 입대시킨 결과 한국동란 중 전 세계에 포진한 미군 남녀 장병들은 총 5백7십만 명에 이르렀다.
트루먼은 12월 16일 행정명령을 발동하여 연봉 $175,000를 받던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의 찰스 윌슨(Charles E. Wilson) 사장을 국가방위 총동원국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심각한 공산당들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그의 직위로, 연봉은 $22,500로 줄어들었다.
프란시스 더글러스 (Francis P. Douglas)에 의하면, 트루먼의 행정명령으로 윌슨은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즉, 이 행정명령은 윌슨으로 하여금 군사물자의 생산, 조달, 인력수급, 수송 및 기타 업무에 관한 행정부의 총동원령 활동 전반을 지휘·감독·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전 합참의장이었던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 국방장관은 후에 말했다. "그때 우리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 있었지요. 한국전쟁은 '2차대전과 3차대전의 중간'이란 말이 돌았을 정도였지요."
세계의 모든 신문들이 한국전쟁을 계속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다시 한번 전면 상단에 가장 큰 활자로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으로 국내외적으로 휩싸여 있는 전쟁 분위기를 반영했다.
트루먼 언명: 국가 위기사태, 특단조치 임박.
170억 달러 국방비 의회 통과.
빨갱이군대 한국의 동북 해안 교두보 분쇄
미군의 후퇴과정에 중공군은 10만 명의 미 육군과 해병대 대부분을 38선 이북 135마일 지점 장진호 근방에서 포위해 버렸다. 최초의 뉴스 앵커맨인 CBS의 더글러스 에드워즈 (Douglas Edwards)와 NBC의 존 캐머런
(John Cameron)의 한국전쟁 뉴스를 처음으로 TV를 통해 시청하면서 전국민이 군인들의 운명을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때는 흐린 흑백 사진, 엉성한 지도, 전투와 후퇴 장면을 찍은 뉴스영화 등으로 해설을 하면서 군인들의 운명을 전해 주었다. 아군 병력은 정치 상업 교육의 중심지인 함경남도의 수도 함흥과 홍남항구를 향하여 꾸불꾸불하고 험준한 산간도로를 따라 후퇴를 하고 있었다.
휴대 가능한 만큼의 장비와 군수품을 몸에 지니고 산속에서 밤에는 온도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에 떨면서 3미터나 깊이 쌓인 눈을 헤치고 행군을 해야만 했다. 무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끊임없는 적의 포화를 뚫고 빠져나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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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베이징의 중국해방군 군사과학원은 이 시기의 전투에 관한 전투결과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 보고서의 한 발췌문 역시 격렬한 전투상황과 무서운 추위를 지적했다.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2월 7일 적군(미국군)은 고도리(장진호와 흥남 사이)로 퇴각했다. 8일오전 7시엔 남쪽으로 대대적인 공군 지원(미국 공군)을 받아 탈출을 계속 시도했지만 아군 58사단 2개 중대병력이 고도리 남방의 협소한 도로
에서 그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때 적군은 수많은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퇴로를 확보하려고 맹렬히 공격해 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쪽으로 적의 증원부대가 올라와서 그들을 구출해 주기를 바랬다.
아군(중공군)은 영하 30도의 맹추위를 견디며 완강하게 적을 막아냈다. 격렬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아군은 800명의 적을 사살하고 증원부대의 진입을 차단했다. 그러나 적군은 9일 아군의 진지를 뚫고 계속 남쪽으로 도주했다.
아군 20군단 89사단이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600명 이상 적군을 사살하고 90대 이상의 차량을 공격하여 노획하거나 파괴했다. 12일에야 적군 3사단 증원부대가 오로리에서 북진하여 그들을 구출했다. 적군은 마침내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오로리로 패주했다."
영하 수십 도의 강추위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맹위를 떨쳐 뼛속까지 스며드는 북한의 추위를 가지고 GI들 사이에서는 "빨갱이들이 써먹는 모든 수단들처럼 이놈의 추위도 시베리아에서 곧바로 왔다."라는 농담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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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3보병사단 장교 프레드 롱(Fred Long) 대령은 1997년 미 7보병연대 재향군인협회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지독한 추위야말로 우리들이 당해낼 수 없는 적이었다. 그 추위에 총의 노리쇠와 총열이 얼어붙어 쪼개져 버렸다. 배터리가 다 나가버리고 오일이 얼어붙어 발동을 걸 수가 없었다. 땅이 꽝꽝 얼어붙어 박격포 바닥판을 부러뜨렸다.
참호를 판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맹추위는 병사들의 힘을 빼고 사기를 저하시켰다. 그 그칠줄 모르는 지옥 같은 추위에 적군은 우리보다 더 크게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이 냉혹한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크리스마스이브에 롱(Long)의 7연대는 존 거쓰리(John Guthrie) 대령의 지휘 하에 흥남의 핑크 해변을 건너 상륙정을 타고 해군 수송선에 승선하여 위험지대를 빠져나와 항구 밖으로 나아갔다.
롱 대령의 회고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상륙 지휘부대에 속한 해병대와 해군장병 몇몇이 해변을 건너가는 중에 적의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거쓰리 대령의 침착한 지휘 아래 일시적인 혼란이 수습되고 그 이상의 사상자 없이 해변을 빠져 나왔다.
거쓰리 대령과 상륙 지휘부대 요원은 맨 마지막으로 상륙정을 타고 해변을 떠났으며, 그들은 흥남항을 떠난 맨 마지막 미군들이 되었다."
그러나 9만8천 명의 피난민들은 아직도 추위에 벌벌 떨면서 부두와 해변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