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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충만한 삶(1)
엡 5:15-21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5-21 /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행실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은 악한 시대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현명한 자가 되십시오. 모든 기회를 충분히 살려서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17) 분별없이 행동하지 말고 주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18) ㄴ) 술에 취해 살지 마십시오. 그 길에는 많은 악이 숨어 있습니다. 그보다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으십시오. (ㄴ. 70인역 잠23:31) 19) 시편과 찬송가를 암송하고 거룩한 노래를 부르십시오. 마음속에서 우러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21) [남편과 아내] 서로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높이십시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같이 세월을 아끼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라고 권면합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고 모든 일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삶(15-18)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흘리는 성도의 땀과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빛의 자녀는 지혜 없는 세상 사람처럼 하지 말고 세월을 아껴 지혜로운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들의 악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헌신하고 수고해 영원히 가치 있는 일을 이루는 기회를 잡습니다. 또한 빛의 자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행하는 것도 주님의 뜻에 속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주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겸손히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성령 충만하면 예배 회복(19-20) 바울은 성령 충만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찬양을 반복하고 범사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은 예배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가장 먼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관계로 나타남(21) 그리고 성령 충만은 인간관계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구체적인 삶의 정황을 반영합니다. 가정 속의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일터 속의 상하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5:11-6:9).
적용: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당신 삶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나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부분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부분을 성령께서 당신 삶을 주관하고 계신가요? 성령께서 당신과 함께하심이 어떻게 드러나나요?
(1) 기도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2) 예수 중심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3) 변화가 있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 설 교 >
세월을 아끼라
엡 5:15-16 / 피종진 목사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악한 세상에서 세월을 아끼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여 지혜롭게 행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세월’이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작정되어 주어진 특정한 시간을 가리킵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잘 선용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른 뒤에 그 기회는 다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세월을 아끼라고 했을까요?
첫째, 세월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자체를 항상 청지기의 삶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자입니다. 세월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사람은 세월을 아끼게 됩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를 인정하든지 않든지 간에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①귀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시한부 인생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세월을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②기뻐하며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한해 한해를 맞이할 때마다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에 보면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주의 재림을 대비하며 맡은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③주어진 세월을 잘 활용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때가 촉박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에 ‘때가 악하다’는 것은 때가 촉박하다, 아주 긴박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월은 신속하게 지나가기 때문에 자칫하면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세월을 놓치지 말고 잘 붙잡아서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감당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 4절에 보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낮’은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하는 반면, ‘밤’은 활동할 수 없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분명히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활동할 수 있는 매일 매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이 생을 마감할 때에 후회하는 공통적인 세 가지는 ‘좀 더 참았을 걸, 좀 더 사랑했을 걸, 좀 더 베풀었을 걸’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좀 더 오래 참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며, 서로 사랑하고 베푸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①타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엡 5:18a) 술 취하여 방탕하게 살면 타락하게 됩니다. 술에 취해 있는 그 시간이 몽롱하고, 기분이 좋고, 시름을 잊게 하고, 사람의 기분을 순간적으로 좋게 할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할 뿐이고, 주의 뜻을 행할 수 없게 합니다. ②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b) 성령으로 충만할 때 주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려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③신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찬양을 하며 신령한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④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언제나 감사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때 주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⑤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 복종하는 삶을 살 때 주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월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아 세월을 귀하게 여기고, 선용하며, 때가 촉박한 줄 알아 매일 매순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타락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신령한 생활과 감사와 복종하는 삶을 살아 주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
엡 5:15-21 / 김서년 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은 오직 한번뿐인 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두 번 살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한번뿐인 이 인생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바로 이점을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그 구성형식에 있어서 하나의 공통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전반부는 바로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그 ‘믿음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믿는 우리 크리스찬은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는 학문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윤리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윤리는 이런 일반적 윤리와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일반적인 윤리란 ‘가치관’을 말하고 ‘유익’을 말하며, ‘화평’을 말하고 ‘의’를 말하며, 혹은 ‘상호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겠는가?” 하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윤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윤리란 이런 것과는 그 근본에서부터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말이 공자님의 말씀에도 나오고,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고, 그래서 화평하고 하나 되고……’ 이런 것들은 성경에만 나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만 가지고서는 기독교의 윤리를 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근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그 거룩한 뜻 안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기독교윤리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랑받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서—이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하니라!!’ ―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특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는 바로 이런 삶―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할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바로 이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혜! ―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이 지혜에 대하여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위로부터 주신 지혜’, 그리고 ‘땅에서 오는 지혜’ ―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말씀하십니다. 같은 ‘지혜’라는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고 사람들이 땅에서 만들어내는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지혜’라고 ― 둘 다를 같은 ‘지혜’라는 말로 지칭하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지혜이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소위 지혜라는 것은 ‘지혜’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재주’인 것입니다.
이 ‘지혜’에 대하여 ‘라인홀드 니버’라고 하는 분의 유명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영어 그대로 읽어드린다면 이렇습니다.
“Oh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오 하나님, 저에게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허함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바꿀 수 있는 용기와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둘의 차이점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여기 보면, 하나님께 ‘내게 이런 것을 주옵소서’하고 세 가지를 구합니다. 바로 겸허함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serenity’, 이것은 ‘겸허, 침착, 또는 냉정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the serenity to accept’ ― 내가 할 수 없는 것,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겸허함, 냉정함, 침착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이제 받아들여야지요! 누가 이미 죽었다고 한다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은 아이 자꾸 들춰보면서 울기만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the courage to change’ ―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고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뻔히 할 수 있는 일인데 하지 않습니다. 못합니다. 왜요? ― 용기가 없어서입니다. 그런고로 ‘용기를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 이제 내가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이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 참으로 중요한 기도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가 되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도 가장 기본적인 지혜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시간관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 시편 90편 12절에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자기의 날 수를 모르는 자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위에서 중한 병으로 입원하여서 “내가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줄을 그거 막연하게만 생각하였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구체적으로 온다는 것을 심각하게 알았더라면 나의 인생은 지금과는 다른 생을 살았을 것이다”―이렇게 후회하듯 말하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나이를 셀 줄 모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당신 지금 나이가 얼마요? 앞으로 얼마나 살 것 같소? 가진 것이 얼마정도면 될 것 같소?’ 하고 물어보십시오. 혹 어떤 사람은 ‘얼마만 가지면 될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런 사람! ― 미련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습니다. “다 쓰고 죽어라” 하는 그런 책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정말 옳은 말입니다. 다 쓰지 못하고 죽으면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오늘이라도 죽었다고 할 때, 재산이 남았습니다. 누가 가질는지를 모르는 그런 재산이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있습니다. 약간의 재산이 있는데, 이것을 놓고 자녀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형제간의 화목은 벌써 옛날에 금이 갔고, 서로들 ‘으르렁’ 다투기만 하고 있습니다. 정작 당사자는 그저 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인 채 인공호흡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것 모으느라고 착한 일 한 번도 못해보고, 헌금도 한번 크게 해보지도 못하고,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그러고 보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거든요.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입니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주세요. 내 나이를 알게 해 주세요’ 라는 말씀은 ‘내 나이에 걸맞게 살도록 해 주세요. 나잇값을 하게 해 주세요’ 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라고 했을 때, 이 시간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Real Time이 있습니다. 시간은 시간대로, 우리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흘러가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real time—실제시간’이 우리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는 ‘physical tim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시간입니다. 시간과 함께 우리는 자꾸 늙어가지 않습니까? 내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 앞으로 몇 시간 남은 것 같습니까?
바로 그 시간! ― 이것이 physical time입니다.
다음은 ‘psychological time’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적 시간이라고 할까요. 이것은 대단히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시간가는 줄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과 같이 있으면 왜 그리도 시간이 더디 가는지, 지겨운지, 그렇지 않습디까?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합니다. 같은 시간이라도 힘들게 일하면 길고, 아픈 시간은 길고, 반면에 행복한 시간은 짧습니다. 하룻밤이 단 한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불과 3분이 30분처럼, 세 시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계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psychological time’입니다. 십년이 하루 같을 수도 있고, 하루가 백년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영원’이라는 시간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시간이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말이지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중생할 때 ‘시간의 개념’이 확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가?
오늘 본문대로 말하면 ‘때가 가까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쇼펜하우어란 철학자가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시간을 소비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이용한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시지 않습니까? 주의 때가 가까웠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 때가 가까울 때 여러 가지 징조들이 나타난다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그 징조들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때가 가까웠습니다. 주의 재림이 분명히 가까웠습니다. 그것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인테림’이라고 하는데, 중간기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하신 다음부터 재림하시기까지의 그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구원의 기간이요, 전도의 기간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셨고, 그리고 이제 재림하시는 그날! ― 여기까지입니다. 이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문 닫힌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끝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가서 사정할 것입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개인적으로 보아도 이것은 ‘인테림’입니다. 지금 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숨넘어갈 때까지, 이제부터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까지, 그때까지가 딱 주어진 것입니다. 계산하자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 시간 안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 그 안에서 최선의 시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시간은 항상 있는 줄 압니다. 계속 주어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은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같지가 않습니다! 건강할 때의 시간과 젊었을 때의 시간, 늙어서의 시간이 같지가 않습니다! 이것을 구별하고 낭비하지 않는 것! ―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참되게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지요.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내 편에서 생각하지를 않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이것을 생각하라 하십니다!
여러분, 주의 뜻을 생각하는―주의 뜻 안에서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일에만 집착합니다. 자기 뜻대로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아닌 것입니다! 주의 뜻 안에 내가 있는 것이지, 내 뜻대로 하나님의 뜻이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전도사님에게 부축을 받아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간증을 하였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내가 삼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삼 개월밖에 못살게 하였습니까? 왜 나를 곧 불러가려는 것입니까?
이렇게 원망하는 기도를 드렸는데, 그런 다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젊어서 죽은 사람이 참으로 많더군요. 나는 할머니거든요. 지금 죽는다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많이 산거예요. 그래서 곧바로 원망하는 기도를 취소한다고 기도드렸습니다. ‘잘못된 기도 같다, 내 시간은 넉넉했다’ 하고 생각했지요. 삼 개월 남은 것, 그 시간도 많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이해가 되었는데, 그 다음이 또 문제였습니다. 고통스러워요. 자꾸 아프고 쑤셔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고야만 자게 되는데, 이러니 또 머리가 아파요. 그래서 ‘하나님,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힙니까?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십니까?’하고 또 원망을 하였는데, 그런 다음 또 생각해보니, 오늘까지는 좋았거든요. 늘 건강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건강한 시간에 ‘건강에 대한 감사’를 드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아프지만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참으로 많다, 내가 아픈 경험이 없었다가 오늘에 와서 이렇게 경험을 하는구나!’ 그래서 또다시 생각을 돌렸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 앞에 아주 단순한 기도를 했어요.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오래 살게 해 주세요,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뭘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딱 한 가지 ‘하나님, 오늘밤 편히 자게 해 주세요.’ 이것만이 내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이 잘 왔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떠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 이 할머니는 이렇게 간증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고민도 많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래서 복잡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할머니처럼 인간의 소원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잠 잘 자게 해 주세요. 좋은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 소화 잘 되게 해 주세요, 맛있게 먹게 해 주세요. ― 이런 소원이면 사실 그만이지 않습니까?
아주 소박한,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주님의 뜻 앞에서 자기의 소박한 소원을 말씀드리면, 그처럼 편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성령에 충만하다’ 하였습니다. 성령에 충만해가지고, 다시 말하면 영성이 살아 역사하는 시간만이 지혜로운 자의 생애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우리 사람을 보십시오. 영이 지배하는 때가 있고 육이 지배하는 때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영에 속해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육에 속한 일을 하게 됩니다. 휘청거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입니까? 이 비율을 물어야 합니다.
얼마만큼 영에 충만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세상근심에 매여 살았는지 걱정하며 살았는지 ― 육의 욕망에, 육신적 욕망에 끌려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지혜로운 자에게는 성령 충만한 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에 찬 시간이 더 많습니다. 영에 속한 시간으로서의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오늘 본문에 보듯이, 술 취하고 방탕한 시간이 많습니다. 맑은 정신을 술 취함으로 몽롱하게 만들었습니다.
술 취해가지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 시간은 버려진 시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잃어버렸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래서 한마디로 “세월을 아끼라” 하십니다. 세월을 아끼라! 소중한 시간이니 아끼라 하십니다. 여러분,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에서 ‘아낀다’는 말은 성경 원어로는 ‘엑사고라조메노이’라고 하는 말인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redeem'이라는 말입니다. Redemption, redeem―바로 속량한다는 뜻입니다. 구원한다, 대속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가운데 어떤 번역은 이렇게 의역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Make your time the best.” “Making the most of the time.” ― ‘네가 가진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만들어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뜻은 이보다도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대가를 지불해서, 그래서 좋은 시간으로 만들어라 하시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좋게 만들려고 하면 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냥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을 고귀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공부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냥 되지 않습니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꽃꽂이 한 것을 우리가 봅니다. 이렇게 강단을 장식하기 위해서 금요일에 꽃꽂이 팀이 하루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쁜 꽃꽂이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불하고 정성을 지불합니까? 연구하고 노력해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들에 있는 꽃 한 송이, 그냥 거기에 두면 그대로 있겠지요. 그러나 이걸 가져다가 꽃꽂이를 해서 많은 사람이 보도록, 많은 사람이 보고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 작품 하나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바쳐져서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지요. 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어머니들이 얼마나 수고합니까? 그 하나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내게 주어진 시간! ― 한 시간 한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가장 높은 가치의 시간으로, 가장 귀한 시간으로 만들어라!! ―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가장 높은 가치의 시간으로, 가장 귀한 시간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종합하면 바로 20절 말씀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 하십니다! 왜요? 그것만이 시간을 높이는 길이요 얻는 길이니까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시간! ― 이것은 빼앗기는 시간이 아닙니다. 부득이한 시간도 아닙니다. 창조적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얻는 길은 바로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왜요? 감사하는 것은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요, 감사하는 것은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감사할 때 내 마음이 기쁩니다. 기뻐지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더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쁜 마음이 자기 능력을 극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에 감사 대신에 원망을 한다고 해보십시오. 원망하고 있는 동안에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창조력도 줍니다. 상상력도 줍니다. 지혜도 줍니다.
또 내가 원망을 했으니까 원망 듣는 그 사람이 또한 나를 미워하느라고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 사람도 그 사람대로 또한 비생산적이 됩니다. 마음이 어두워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만이 시간을 높은 가치로 창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하시는데, 여러분은 언제 이렇게 찬송하게 되십니까? 구체적으로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울면서, 가슴 치며, 원망하며, 그러는 동안에 찬송하게 되십디까?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으셨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감사할 때, 우리는 찬송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기쁘게 마음으로 노래하며 찬송할 때, 우리에게는 창의력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작고한 스티브 쟙스란 사람이 ‘인문학(Liberal Arts)’를 강조한 것은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컴퓨터와 같은 첨단 과학적 기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단순히 과학적인 기술이나 훈련이나 숙련보다도, 인문학적인 창의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또 애플 컴퓨터나 스마트 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데서 우리가 보듯이,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 참으로 아름답고 보람된 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범사에,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우리는 찬송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창의력이 넘치는 값진 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6절, 7절 말씀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셨습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셨습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에 깃듭니다. 그래서 생각도 맑아지고, 눈도 밝아지고, 귀도 밝아지고, 몸도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11월을 맞이했습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이제 두 주 후엔 일년의 모든 삶을 묶어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우리는 쌓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인생을 값진 인생, 보람된 인생, 우리의 모든 시간을 극대화 하여 아름답게 살기 위한 비결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데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고 골로새서 2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참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자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항상 부르게 되며, 그 노래들은 우리에게 창의력을 불러 일으켜주고, 삶의 원동력이 되며, 또한 그 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드리는 그 감사의 그릇에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은혜를 넘치게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자입니까?
제가 서두에, 우리 기독교의 윤리란 ‘마땅하니라’하는 것으로 설명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혜로운 자, 참 은혜를 깨달으며 참되고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감사’라고 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범사에 항상 감사하십시오! 진정한 감사―넘치는 감사로서 참되게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항상 승리의 찬송을 부르며 아름답게 하늘나라를 향하여 진군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행할까
엡 5:15 / 김광일 목사
이창훈은 523대 1이란 경쟁을 뚫고 한국방송 사상 최초의 지상파 장애인 앵커로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나서 한번도 TV를 본적이 없기에 아나운서의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점자 단말기를 통해 뉴스를 정확하고 빠르게 읽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는데 마치 누군가 뒤에서 등을 받쳐주는 듯 든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지만 그는 청년부 회장과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 찬양을 인도하며 피아노 반주도 합니다. 봉사를 하는 그를 보면 1급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뇌수막염 후유중으로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되어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형체는 물론 빛과 어둠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예수를 영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란다. 사람들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도전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란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야.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 꿈은 가까이 있단다.” 어머니와 아들은 빛을 향해 한 발씩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8세에 서울 한빛맹학교에 입학하여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다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2007년 시각장애인 인터넷 방송에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KBS 장애인 뉴스 앵커 선발 공모를 본 그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지 않을까의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평소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는 기도하면서 준비했고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움직이고 도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에담에 장막을 치고 있을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별개의 기둥이 아니라 한 기둥의 이중적인 현상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였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인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랐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 속에 담긴 메시지를 바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를 통과해야 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상징적 도구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갈 때 필히 하나님과의 동행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으며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나와 함께하시니
2차 대전이 치열할 때, 군사업무를 띤 영국 기선 한 척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선장에게 비밀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항로를 벗어나지 말고 똑바로 항해할 것, 유사시에 즉시 비밀부호로 타전할 것’ 그런데 항해 도중 적함으로 보이는 군함을 발견하고 선장은 급하게 무전을 쳤습니다. ‘적함으로 보이는 군함이 보인다.’ 그러자 바로 회신이 왔습니다. ‘계속 똑바로 담대하게 항진하라.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라’선장은 이상했습니다. 바다에는 영국 전함도, 비행기도 아무도 없는데 누가 나를 지켜 준단 말인가? 무사히 항해 끝에 도착하여 입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잠수함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잠수함이 같은 항로를 따라 그 기선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때로는 드러날 때도 있지만, 모르게 임할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잠수함보다 더 힘 있게, 더 강하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백성들과 함께 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했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계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증거(Sign)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 믿음으로 여호수아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 믿음으로 기드온의 삼 백 용사는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 족속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리고성과 같은 장애물이 있다 해도 미디안족속 같은 방해꾼이 있다 해도 골리앗과 같은 악한 세력이 진을 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해결해 주십니다. 부디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로 인도하시니
노스웨스트 대학 창설자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 박사의 간증입니다. 그가 대학을 세우기 전에 목회자로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부흥집회를 인도하려는 교회의 노부부 집에 숙소를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노부부가 음식솜씨도 신통치 않고 집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침대도 낡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자들은 집도 크고 넓은 정원에 부유하게 사는 젊은 부부의 집으로 옮길 것을 그에게 권유하였습니다. 그러자 버터필드는 숙소를 옮기는 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며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교회 직분자들이 말합니다. “이런 일까지 기도하십니까? 그냥 옮기시지요?” 그러나 버터필드는 잠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젊은 부부가 사는 집으로 옮겨도 됩니까? 아니면 이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기도하던 중에 마음속에 누가복음 10장 7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버터필드는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으므로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머물겠습니다” 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젊은 부부의 집에 장티푸스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집이 1개월 동안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만약 버터필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부흥회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갇혀 돌아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집회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를 받는 가운데 위대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여기의 ‘가시며’ 의 ‘홀레크’ 는 ‘걷다’ 인 ‘할라크’의 분사형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인도하며 계속 걷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행진할 때마다 그들 앞에서 인도하셨고 이스라엘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동행의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기둥과 불기둥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뒤처지지도 않았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다른 방향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방향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아닐지라도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기도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변해서는 안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책임을 지는 하나님의 징표이기에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끝까지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를 보호하시니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설교 부탁을 받고 낯선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길을 모르는 그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내자를 따라 나선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곳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안내자가 어이 없어 합니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목적지가 아닌 곳에 이미 와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그 날 설교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가 목적했던 곳에 갔더라면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입니다. 어거스틴을 반대하는 대적들이 이미 숲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칼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내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여 그 길을 못 가게 하시고 어거스틴을 보호하여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0절입니다.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과 애굽 진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애굽 군대가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자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이 건넙니다. 나중에 애굽 군사들이 따라 들어갔지만 물이 합쳐지면서 수장됩니다. 19절에 구름기둥이 앞에서 뒤로 이동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배후가 되어 보호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 하셨듯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눈동자처럼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험한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심을 믿었습니다.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그의 손길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수록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동행하여 주십니다.
인생길을 가는 동안 반드시 동행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과의 동행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는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시는 증거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역사하시는 은혜를 얻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월을 아끼며 좋은 일꾼이 됩시다
엡 5:15-16 / 강성찬 목사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유명한 철학자였습니다. 어느 날 친하게 사귀던 여자로부터 청혼을 받았습니다. 칸트는 용기가 없어서 머뭇거리기만 했지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답답한 여자는 청혼수용 여부를 분명히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칸트는 생각해 보겠다며 도서관에 들어가서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책들을 구해서 결혼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연구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고 여자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여자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늦었다네. 우리 딸은 이미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네.”
칸트는 결혼에 대해 너무 심사숙고 하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때를 놓치면 후회합니다. 인생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놓치고 후회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농사를 짓는데도 때가 있습니다. 씨앗은 파종의 때를 놓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농사짓는 일뿐 아니라 인생사에도 때가 있는 법입니다. 때를 놓치면 후회의 인생을 살게 마련입니다.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있어도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고, 시기가 있는 법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고, 건축할 때가 있다. 울 때와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와 춤출 때가 있다.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들을 모을 때가 있고, 껴안을 때가 있고, 그것을 멀리할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고,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어 버릴 때가 있고, 수선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고, 화평할 때가 있다.(전3:1-8 쉬운성경)
사도 바울은 허탈과 허무가 느껴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율 배반적인 인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거기에 대한 교훈으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5-16)고 합니다.
‘지혜 있는 자’란 곧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는 지혜 없는 자가 아닌 지혜 있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4)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고린도 교회 뿐만 아니라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도 분명한 어조로 밝혔습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 2:3)
이것은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 지혜 있는 자임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지혜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의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의 과거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알고 있습니다. 점쟁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우리 자신은 물론 이 세상의 영원한 미래까지 알고 있는 자들 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혜자라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엡 5:15)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을 전제로 주시는 말씀입니까? 바로 지혜 있다고 하는 우리가 행동으로는 전혀 지혜 없는 자처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인간적 한계입니다. 우리는 지혜 있는 자임메도 불구하고 지혜 없는 자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전혀 믿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충분히 있다는 말입니다.
그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 바로“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지혜 있는 자로서 지혜 없는 자의 행동을 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모든 행동은 대단히 섬세한 점검과 관찰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행동과 몸가짐이라도 성도의 그것은 깊은 관찰과 검증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 없이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가?'’‘과연 교회에 미칠 부정적인 파장은 없는가?’’‘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결과를 낳을 것인가?’등 이 모든 것들이 충분히 고려 되고,검증 된 후에 나와야 하는 것이 성도의 행동이요,말이요,몸 가짐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이어 성도 각자의 새 생활과 관련한 결론적 교훈으로 성도의 지혜로운 삶에 대하여 교훈하며 악한세상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세월은 때때로 현재의 세계에 주어진 전 기간을 의미하기도 하며, 인간의 삶의 기간, 또는 합당한 때나 기회 등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세월은 위의 모든 것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세월은 합당한 때나 기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어진 기회와 세월을 선용하여 주의 뜻을 이루라는 의미에서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아끼라는 말씀은 속량하다 되사다 매입하다 그리고 잘못된 처지로부터 건져내다라는 폭넓은 적용까지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는 단순히 세월을 사는(live)존재가 아니라 세월을 사는(redeem)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할 때 세월은 그냥 사는(live)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물론 그것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결코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도가 만일 세상을 단순히 산다면(live)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혹은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소일(消曰)한다’라는 말이 이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월을 죽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세월은 주님 앞에서 전혀 계산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반드시 우리가 산 세월을 회계해야 할 때가 이릅니다.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25장에서 친히 베풀어주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양과 염소로 어떻게 분류가 되게 되었습니까? 그들 앞에는 거의 동시에 혹은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어린 소자의 모습이 되어 혹은 헐벗은 자,혹은 병든 자,가난한 자,옥에 갇힌 자,목마른 자의 모습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염소에 분류된 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거기에 어떤 반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자연인’이었습니다. 그냥 아무 반응 없이 자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비해 양에 분류된 이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그냥 살지(live)않았습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들은 그 세월을 샀습니다(redeem). 어떻게 샀습니까? 특별한 대가를 치렸습니다. 관심이라는 대가를 치렸는가 하면 옷,혹은 물,돈 따위를 지불했습니다. 이렇게해서 그들은 세월을 되샀습니다. 그 세월을 자신의 세월로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세월로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세월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월로 만들었습니다. 그 세월에 그들은‘자연인’이 아닌‘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관심과 그리스도의 희생올 실천함으로 그 세월을 보냈습니다. 바로 주님께는 그 세월이 기억이 되었고,그 세월이 계산이 된 것입니다. 그 세월이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산다고(live)해서 정말 사는(redeem)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치관,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정신,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세월을 살(redeem)때 정말 그 인생을 사는(live)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세월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인정될 만한 세월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덧없이 살고 있습니까?
아끼라는 말은 세월을 사서 속량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세월을 잘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월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쉴 때 쉬고, 잘 때자고, 깰 때 깨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세월을 절약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세월을 규모 있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하루하루의 세월을 쪼개고 쪼개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월을 낭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가이며 연사인 존 어스킨(1879-1951)은 그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교훈을 14살에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이 그에게 연습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 번에 한 시간 정도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라. 어른이 되면 그만큼 오랫동안 앉아 있을 시간이 없게 돼. 학교 가기 전에 5분이나 10분, 점심 먹고 시간이 조금 날 때마다 몇 분씩 연습하는 거야. 집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이에도 짬짬이 연습해야 해. 연습을 하루 중 언제든지 틈틈이 하면 음악이 너의 삶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어." 훗날 어스킨은 이 충고대로 하여 가르치는 일을 본업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창의적인 작가로서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트로이의 헬렌」이라는 책의 대부분을 학교와 집 사이를 출 퇴근하며 전차 안에서 썼다합니다.
세월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세월을 엄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세월을 허비하는 것이 죄악이듯이 다른 사람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더 큰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세월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에게도 남의 세월을 허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경향은 세월을 우리의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월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 할 때 우리는 이웃의 세월까지도 아껴 줄 수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가 되려면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세월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십일조를 드릴 때 더 큰 물질의 복을 주시듯, 세월의 십일조를 드릴 때 더 좋은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루의 일과 중 일부를 쪼개서 기도하며, 전도하며, 성경을 읽고, 찬양해야 합니다.
성도는 특별히 일주일 중의 하루는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날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령하신 안식일이요 주일입니다. 그날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며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주일 성수', 혹은 '성수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세월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소중히 해야 합니다. 옛말에 '천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늘이 준 기회라는 뜻입니다. 이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안 옵니다. 곡식을 심을 때가 있는가 하면, 곡식을 거둘 때가 있고, 공부할 때가 있는가 하면 배운 것을 사용할 때가 있는 것처럼, 천하만사에는 '천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소중히 해야 합니다.
미국의 국무장관으로 미국 외교에 새로운 활력을 주입시켰던 정치가 슈어드 씨는 오늘이라는 현재를 상당히 중요시했던 사람이었다 합니다. 그가 국무장관으로 재직시 지금의 미국 영토가 된 알라스카를 러시아로부터 720만 불에 매입하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합니다. 그가 워싱톤에서 러시아 공사와 회담할 때 알라스카를 720만 불에 매입하기로 언약을 받고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협정서에 조인함으로써 성공시켰다합니다. 그 당시 러시아 공사는 이 협정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지만 좌우간 내일 다시 만나서 정식으로 매수 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의를 하자, 외교에 노련한 슈어드 장관은 시간을 늦추면 필연코 쓸데없는 논쟁이 생겨지고 불쾌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알고는 협정서 작성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합니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공사에게 말하기를, '스케끄루 씨! 왜 내일까지 기다려야 하십니까? 오늘 밤에 협정서를 작성하도록 하십시다.'하고는 큰 코를 부비며 말했다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으로 상원 외교 위원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하고 사람을 보내는 한편 러시아 공사가 다른 계획을 하지 못하도록 같이 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사무관을 시켜 협정서를 기초하게 하고는 새벽 4시에 쌍방이 서명함으로 버려졌던 러시아의 땅인 알라스카를 미국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합니다. 오늘의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으므로 교묘한 외교 전략에 말려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은 지나가는 것이므로 오늘 배우지 않더라도 내일이 있다고 말하거나 올해에 안 배워도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주자)하고, '오늘의 일을 오늘 하지 아니하고 내일로 미루기 시작하면 결국 시대의 물결을 쫓지 못하고 뒤떨어지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오늘의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스마일즈)하기도 합니다.
옛날에 두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을 하며 나무를 베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1시간을 일하고 10분간 쉬고, 또 1시간 일하고 10분간 쉬고, 이렇게 계속해서 일하면서 쉬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다 마치고 보니, 하루 종일 일한 사람보다도 1시간 일하고 10분 쉬었던 사람이 더 많은 나무를 베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하루 종일 일을 한 나무꾼이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나보다 휠씬 더 많이 쉬면서,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은 나무를 베었는가?" 그러자 1시간 일하고 10분 쉬면 일한 그 나무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가 계속해서 일만할 때, 10분씩 쉬면서 무뎌진 도끼날을 갈았다네"
물건을 살 때 대가를 지급해야 하듯이 귀하게 알고, 기회를 선용하기 위해 절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낀다'는 말은 절약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절약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부지런하기를 늘 권면합니다.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고 했으며, 솔로몬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고 했습니다.
부지런한 것이 곧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부지런해야 성경도 열심히 일고 봉사도 열심히 하며, 기도도 잘하고 사업도 잘됩니다.
성도들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한 바울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쓰기 전에 내란 음모 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총살 대에 섰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5분의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집행관은 그 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는 시간을 3등분으로 나누었습니다. 2분은 신세진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고 나머지 2분은 28년 동안 살아온 삶을 정리하였고 나머지 1분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바라보았습니다. 5분이라는 시간이 지나 집행관이 형 집행을 하려고 할 그때 바로 황제의 특사가 와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5분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고 합니다.
인생은 길어야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인생이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지극히 짧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절약해야 합니다.
미국의 20대 대통령이었던 가필드가 대학생이었을 때의 일이라 합니다. 동급생 중에 수학을 기막히게 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수학에서는 그 친구를 앞지를 수가 없었다합니다. 어느 날 밤 그가 잠자리에 들기 전 그 친구의 방을 보았더니 아직 불이 켜져 있었고 그때부터 10분간 더 켜져 있다가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그렇다. 이 10분이었구나."하고 외쳤다합니다. 가필드는 다음날부터는 10분 늦게 잠자리에 들기로 하고 그 세월에는 수학 공부를 했다합니다. 그 결과 가필드는 그 친구를 앞질러 1등을 차지하게 되었다합니다.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합니다. "지금 그 일을 생각해 보면 가볍게 웃고 지나갈 청년 시절의 야심처럼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10분을 이용하는 것. 이것이 모든 성공의 열쇠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전화는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입니다. "당신 앞으로 어떤 사람이 1440만원을 은행에 예금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오늘 반드시 이 돈을 쓰셔야 합니다. 조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익하게 쓰십시오." 이 사람은 어리둥절하게 하루를 보내다가 1440만원을 써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에 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당신 앞으로 1440만원이 또 입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예금된 돈은 쓰지 않았으므로 그 주인 이 도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오늘 찾아가서 그 돈을 쓰시면 그 돈은 당신 것이라고..." 두 번째 날은 조금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 사람은 은행에 가서 그 돈을 찾아 다가 썼습니다. "에이 한번 기분이나 내보자" 하고 기분 좋게 써버렸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또 전화가 걸려 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또 썼습니다. 이런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매일 쓰면서 기분은 좋았지만 이 사람의 마음속이 자꾸만 불안이 생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이 딱 멈추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시 무엇인가 요구하면 어쩌지?”
이 은행의 계좌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전화를 주는 은행원인 하나님은 우리 에에 하루 24시간을 주셨습니다. 이 24시간을 분으로 계산하면 1440분이 됩니다. 우리에게 1440만원은 주시지 않았지만 1440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24시간을 공평하게 맡겨주셨습니다. 이것은 대통령도 거지도 똑같이 받는 양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을 날이 있을 겁니다. "이제 그만. 그리고 지금까지 분배한 것을 네가 어떻게 사용했는지 계산해 보자.“
쌀독의 쌀은 퍼내야 없어지지만 세월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귀한 세월을 우리는 절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월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세월은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눅 12:20)십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세월을 주관하십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세월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세월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끝없이 솟아나는 줄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개인에게 부여된 세월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세월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여해 주신 일생은 그 길이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길고, 또 어떤 이에게는 짧은 인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에 직면한 히스기야의 생명을 오십년이나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우리로서는 놀라운 일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에게 부여된 세월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월의 주인은 따로 있으며, 언제라도 찾아가실 수 있습니다.
일생을 최고의 시계를 만드는 데 바친 사람이 아들의 성인식 날 손수 시계를 만들어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시계의 시침은 동(銅),분침은 은(銀),초침은 금(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시계를 받아들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시침이 가장 크니까 금으로 장식하고 가장 가는 초침은 동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나요?”“아니다. 초침이야말로 금으로 만들어야 한단다. 초를 잃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시간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는 아들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며 말을 덧붙였습니다. “초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시와 분을 아낄 수 있겠니? 세상의 흐름은 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명심하고 너도 성인이 되는 만큼 1초의 시간에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라.”
1초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하루를 잃고 일생을 잃습니다. 인생의 승패는 순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역사의 주권자가 되십니다. 개인의 세월뿐 아니라 역사라는 거대한 시계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며 내용을 채워가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릇된 판단입니다. 역사의 문을 여시고, 역사를 진행하시며, 역사의 문을 닫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세월이라는 선물을 받은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세상에 살 동안 세월을 얼마나 받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세월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회계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해서 현세의 삶을 그저 무미건조하게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현재가 성도에게 주어진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오늘에 요구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없는 아쉬움만 남겨주고 흘러가 버리는 세월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세월은 길이도 없고 넓이도 없는 그 무엇인가요? 아무것도 모를 존재의 한 그릇인가요? 그저 신비하기만 한 것인가요? 그런데도 사람은 이 세월에 지배받고 살면서도 한 계절을 넘겼다는 아쉬움을 갖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어거스틴(Augustine)은 그의 「고백록」 11권 14장에서 “정말 세월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다면 아는 듯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가 있어 그것을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연령에 따라서 세월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세월의 속도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월의 속도가 10대는 10㎞, 20대는 20㎞, 30대는 30㎞, 60대는 60㎞로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세월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속도감을 더 많이 느낍니다. 중·고등학생들은 세월이 제발 빨리 갔으면 하고 바랍니다. 아직도 인생의 속도가 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드신 분들은 인생의 속도가 붙었기 때문에 너무나 빠르게 느껴집니다.
남아프리카의 한 인쇄업체가 미국 시카고 어느 회사가 개발한 최근에 가장 발달된 인쇄기 한 대를 비싼 값으로 사들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쇄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판매업체에 부탁을 해서 이것 저것 고쳐보았지만 수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기기를 발명한 시카고 회사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전문가 한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미국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다시 회사에 팩스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할 수 없습니다. 노련한 전문가를 보내 주시지요." 간단한 답신이 왔습니다. "바로 그 젊은이가 그 기계를 디자인한 사람입니다. 그 고장난 기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기계가 어디에 사용되는지, 고장 났을 때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그 기계를 만든 사람이 가장 잘 알 수 있듯이 세월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때에 절약하며 활용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토니 캠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질문에 대한 그들의 응답은 매우 다양했으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대답했던 것 중의 하나가 영원한 것에 투자하고 싶다는 것이다 합니다. “만일 인생을 다시 살게 된다면, 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될 일들을 더 많이 하겠다.”
영원한 것에 투자한 세월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진정한 투자는 붙잡을 수 없는 헛된 것,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것을 위한 투자가 진짜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는 일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내 삶의 진액을 한 방울도 헛되이 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몽둥이 들고 지켜도 못 막고, 철사 줄로 동여매도 잡지 못하는 것”(춘향가)이 세월입니다. 화살처럼 빠른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아껴서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것에 투자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올해도 곧 여름이 다하고 과실이 익어가는 새 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되되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서 인생의 가을이 멀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세월을 아끼며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 말고
에베소서 5:15-17 / 인명진 목사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만족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지난 날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서 잘 살았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만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아쉬워하며 후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며 지난날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지난날의 후회는 인생을 오래 산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이 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았기 때문에 실수도 많았고 그만큼 아쉬운 것도 많아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연세가 많은 분들 중에 입만 열면 지난날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회스러운 인생을 살아왔던 자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노후에 인생을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에 잘 살아야 합니다. 젊은 시절에 잘못 살면 나이가 들어 후회하게 됩니다.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이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어영부영하다가 놓친 사람은 큰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치지 말고 그 기회를 잡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 자신에게 찾아왔던 많은 좋은 기회를 놓치고 나중에 되어서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회는 나에게 찾아왔을 때 잡아야 합니다. 한번 놓치면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 때문에 평생을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다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제가 살아온 인생도 되돌아보면 후회가 되고 아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왔지만 그 중의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가 서툴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좀 더 좋은 인간관계가 되어야 하였는데 저는 평생을 살면서 사람보다는 일을 먼저로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지나놓고 나니 일보다는 사람이 훨씬 중요합니다. 일의 성과보다는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가 인생에 있어서 더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족보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보다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관계는 엉망이 되었고 그것은 제 인생의 큰 손실과 흠으로 지금도 저는 그것을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면서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동반자로 주신 축복의 사람이요 소중한 사람인 것을 알고 그들과 좋은 인간관계 좋은 경험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후회 없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제가 후회하는 것은 제가 살아온 삶 중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훌륭한 스승을 만날 기회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주신 이 소중한 기회를 잘 잡지 못하고 그 훌륭한 스승님들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만난 선생님들 중에 우리나라 역사에 그 이름이 남겨진 훌륭한 분들이 여러 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함석헌 선생님, 장준하 선생님, 김재준 목사님이나 서남동 목사님, 문익환 목사님들이 그런 분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서 이런 훌륭한 분들을 만날 수 있고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축복 중의 축복이었고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리석게도 그냥 무심하게 생각하고 원하기만 하면 늘 만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가까이 계신 분들이기에 신경도 쓰지 않고 무덤덤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분들은 세상을 떠나셨고 저는 그분들을 만날 수도 그분들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기회가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만일 제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그때 그분들의 더 가까이에서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제 인생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삶으로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저와 너무 가까이 있었던 분들이어서 그분들의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에게서 더 큰 가르침을 받았어야 했는데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인생이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 저의 어리석음을 후회할 뿐입니다. 이제는 시간이 늦었고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위대한 스승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축복을 주신 것을 우리가 잘 선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한 시대의 역사적인 인물을 내 인생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 내 옆에 가까이 있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큰 행운인데 저는 유감스럽게 그 기회를 놓친 불행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세 번째로 제가 후회하는 것은 저에게 능력이 있었을 때 더 좋은 일, 더 선한 일,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열심히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영부영하다가 제대로 선한 일 한번 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제 인생의 큰 후회이며 아쉬움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망설이지 말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귀찮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좋은 일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저것 따지고 미루고 때로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감정적인 이유로 충분히 도울 수 있는데도 돕지 않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이 참 후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기회가 또다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지나가 버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기회가 있었을 때 마음껏 그런 일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아온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인생에 후회가 되고 아쉬움이 되는 일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회가 있었을 때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교회에 충성을 다 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을 다하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 때나 우리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도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후회와 아쉬움의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온 저는 때때로 여러분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기회를 잘 붙잡으면 얼마나 큰 축복이 될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선 우리 갈릴리교회는 참으로 좋은 교회입니다. high church입니다. 가까이 있으니까 잘 모르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우리 교회를 바라보면 정말 좋은 교회입니다. 이 같은 교회를 평생 동안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큰 행복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축복이지만 좋은 교회를 만난다는 것은 더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축복입니다. 이런 교회를 섬길 수 있을 때, 이 교회가 내 곁에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교회에 온 충성을 바친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을 사는 보람과 자랑과 행복이 될 것이며 역사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 이런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영적인 큰 축복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 인생에 쉽게 가질 수 없는 축복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한주일이라도 더 이런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선교의 사역에 우리가 참여하며 인생을 산다면 그 어떤 삶보다도 인생을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인생을 잘 살 수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자랑스러운 인생을 산 것이며 내가 왜 인생을 살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사역은 우리나라에서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선각자입니다. 자랑스러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대로 우리나라는 앞으로 다문화사회가 될 것입니다. 두고두고 다문화에 대한 논의와 다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시대의 앞을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선용해서 20년 전부터 다문화의 문제를 마음에 담고 기도하며 살아왔습니다.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자랑입니다. 내가 비록 선교사로 다른 나라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800여 명이 되는데 그중에 내 몫도 있다는 자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800여 명이 우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 중에 내 몫도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평생을 예수를 믿으면서 나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의 부끄러움입니다.
내가 우리 교회가 선교사를 외국에 보내지는 못했지만 몽골의 울란바트라에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내 기도가 거기에 있고 내 봉사가 거기에 있다고 내 헌신과 헌금이 있다는 것이 우리 인생의 자랑이요 기쁨이요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과 기쁨은 내 스스로 자랑스러움이 있을 때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을 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주는 행복은 허망한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을 했다, 영원히 남겨질 일을 했다, 적어도 한 세상을 살면서 역사를 내 손으로 터치했다는 자랑이 있을 때 우리의 삶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넘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식들에게도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면서 살았다, 우리 시대의 화두인 문제에 대해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고 떳떳한 것이 있을 때 우리 자손들에게 할 말이 있고 자랑스럽고 떳떳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몽골에 나무 심는 것에 대해서 무심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역사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구가 깊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지구를 괴롭혀 왔습니다. 이제는 그 지구가 우리에게 댓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합니다. 보복을 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의 위기입니다. 이제 우리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폭우가 쏟아지고 봄가을이 없어지고 폭서가 계속됩니다. 지구적인 과제입니다.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지구가 병들었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물을 것입니다. 그때 “병든 지구를 고쳐보고자 너희들에게 아름다운 지구를 물려주기 위해서 겨울에는 내복을 입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고 정성을 모아서 몽골에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새벽마다 몽골에 심은 작은 나무가 지구를 살리시고자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할 말이 없고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또 있습니다. 북녘의 어린이를 돕는 일입니다. 남과 북의 문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과제요 해결하고 붙잡고 씨름해야 할 과제입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인데 북녘의 동포가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홍수로 식량의 부족을 어려움을 당했을 때 들과 산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닐 때 동포라고 하면서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통일이 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게 북녘 동포들을 만나야 합니다. 부끄러워서 피해 다니면 안 됩니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크게 후회하게 하고 아쉬워하게 할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인생을 살아야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북녘의 어린이를 돕는 우리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이 선교는 이 나라가 통일이 되었을 때 북녘 동포들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는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이것을 무심하게 생각하고 이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하며 아쉬워하는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분단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떳떳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후회와 아쉬움은 이 세상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이를 때 더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떠난 분들의 장례를 자주 집행하면서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이 사신 삶을 제가 대충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큰 상급과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장례를 모시는 경우도 있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하고 크게 후회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장례를 모실 경우도 있습니다. 유가족 때문에 당신 아버지가 후회할 것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후회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기회는 그냥 저절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여러분들은 나중에 크게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후회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더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깨닫고 후회하면 늦었지만 그래도 바로잡을 기회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후회하게 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열 처녀의 비유를 읽었던 것처럼 문이 닫히면 끝입니다.
여러분 혹시 후회하는 일이 있습니까?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늦었지만 기회를 잡으면 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어영부영 살지 말고 되는 대로 무심하게 살지 말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내 주변에서 펼쳐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주실 것인가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후회하는 인생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치지 마십니다.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온 저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말고 머뭇거리지 말고 그 기회를 잘 잡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내가 인생을 잘 살았다, 행복한 인생이다, 자랑스러운 인생이다, 누구에게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다, 한 역사를 잘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가질 때 그 인생이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불행인지 행복인지 우리가 늙어서 오래 살게 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살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이 행복해야 여러분의 노후의 삶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깊은 깨달음이 되어 어리석은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 있는 자처럼 여러분 주위의 펼쳐져 있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잘 잡아서 축복의 삶으로 만들어나가는 귀한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시대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
엡 5:15-17 / 성홍모 목사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실 때에 나는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왔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조금은 지혜롭지 못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후회하고 있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른 누가 내려줄 수 없고, 여러분, 스스로가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도 운전하다보면 어느 곳에서 과속 범칙금을 물었다거나, 어느 골목을 돌아가다가 담 모서리나, 전선주에 차 옆을 긁었다고 하면 다음에는 그곳을 지나갈 때는 조심하고 주의하여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똑 같은 자리에서 범칙금을 문다든지, 똑같은 장소에서 사고를 내는 것을 보면 조심성이 없고, 주의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여러 번 인사를 나누고 명함도 주고받았습니다. 같은 부서에 배정받아서 몇 번을 한 자리에서 일한 사람인데, 만날 때마다 처음 만난 사람인 것처럼 ‘처음 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만나도 건성으로 만나고,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면 잘 아는 척 하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두 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을 산다면 한 번은 연습 삼아서 그냥 대충대충 살아보고, 마지막으로 살아갈 때는 정성스럽게 성실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의 생을 살고 마쳐야 합니다. 인생을 어리석게 허송세월하고는 한탄하면서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예전의 노래 중에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그런 가사가 들어간 노래가 있었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유행에 따라, 시류에 따라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배를 몰고 영원한 항구인 하늘나라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대부분이 지난 20세기도 살았고, 지금 21세기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세기에 걸쳐 살고 있는데, 한 마디로 급변하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변하는지,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습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이 나오고, 핸드폰이 나오기 전에 삐삐라는 것을 사용해본 사람들입니다. 빼빼를 차고 다니는데, 누가 전화를 걸어달라고 전화번호가 화면에 뜨면서 삐삐가 울어댑니다. 그러면 얼른 공중전화에 가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날로그 방식의 무전기와 같은 핸드폰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1세대 이동통신이었습니다. 음성을 다른 부호로 바꾸지 않고, 음성으로만 전달하다보니 용량이 크고 속도가 느려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세대 핸드폰은 호랑이도 때려잡을 만한 크기의 무전기보다 크고, 새까만 핸드폰을 가지고 폼을 잡고 다녔습니다. 그것이 불과 20년 전입니다. 그후에 2세대 이동통신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2G라고 했습니다. G는 Generation의 약자로 세대라고 부릅니다. 이제는 3G가 상용화되자마자, 4G로 넘어가버렸습니다. 용량도 커지고 속도도 빠르고, 우리 대한민국은 정말 대단합니다. 세대가 바뀔수록 용량이 커지고, 전송속도가 빨라지고 기능이 보강되어, 환상적인 통신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속도의 변화와 정보의 홍수는 가치관의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20세기를 마칠 때에 미래사회의 변화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고, 이런 모양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아가면서 그러한 많은 변화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제시하였지만, 몇 가지만 기억합니다. 미래학자들이 예견하기로는 개인주의가 만연될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성이 상실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윤리의식이 희박해지고 윤리의 부재로 인하여 사회통제력이 약화된다고 했습니다. 생활의 기계화, 자동화, 전자화로 정보의 홍수 시대를 맞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급격한 사회변화는 가치관의 몰락을 가져오고, 여가산업의 발달로 천민적인 오락주의, 퇴폐적인 향락주의가 확산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심미성, 영성, 종교성이 약화되어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사랑하고, 영생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기독교를 하나의 문화로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지난 주간의 뉴스에 국내 최대 룸살롱의 실소유주에 대하여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룸살롱은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8만8천여 건이 넘는 성매매가 이루어졌다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경이적인 기록이라고 봅니다.
방이 180개에 종업원이 500명이 이르고 이렇게 기업형 룸살롱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권력기관과 유착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치관이 몰락한 현대, 천민적인 오락주의, 퇴폐적인 향락주의가 만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주에서 일어난 어린 7살 여아 성폭행 사건을 보면서 이런 류의 사건은 잊을 만하면 일어나고 또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성범죄는 중범죄로 다루고, 아예 거세하든지, 수십 년 징역형에 처하든지 해야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가치관의 붕괴로 인하여 인명을 중시하지 않고, 윤리의식의 부재로 인하여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즈음 ‘멘붕’이라는 말을 하더니, 정말 멘붕을 실감합니다. 멘붕이란 멘탈리티(mentality)가 무너진다는 말인데, 정신이나 가치관이 허물어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정신력, 지성과 심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대체종교’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정체된 사회적인 요인으로, 대체종교의 발달을 지적하였습니다. 여가산업의 발달을 말합니다. 서구 선진국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관광지, 휴양지가 개발되었습니다. 각 자치단체에서도 사활을 걸고 관광지를 개발하고, 휴양지를 조성합니다. 골프장, 스키장, 수영장, 스파, 온천지구, 사람들은 건강을 챙겨야 하고, 휴식을 즐기고 각종 유흥업소에 드나들고, 오락을 즐길 공간들이 많아졌습니다.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면 지방마다 콘도와 호텔이 즐비하고, 각종 위락시설을 갖추고 주말이 되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5일 근무가 정착되면서 금요일 오후가 되면 도시는 텅 비워지고 썰물처럼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자, 이러한 오늘의 시대에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지 않는다면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다가 인생을 망칠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 바울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롭다’는 말은 “숙련되었다, 현명하다, 분별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참으로 분별력에 있어 뛰어납니다. 어려운 순간에도 탁월한 선택을 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1.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는 사람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우리에게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라는 말은 “어떤 방식,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확정해야 합니다. “행한다.”는 말은 헬라어에서는 “걷는다, 돌아다니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도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존 맥스웰박사의 여러 책들 가운데 ‘생각의 법칙’이란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제자훈련생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그가 줄 곳 강조하는 것은 “당신의 생각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존 맥스웰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 생각한 결과이다. 우리의 내일은 우리가 오늘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명언이라고 생각됩니다.
2. 세월을 아끼라고 하십니다.
16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시간을 선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시간을 아끼라는 말씀입니다.
욥기14:1-2를 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전 사람들이 더 깊이 생각하고 말한 것 같습니다.
시편90:4에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천년을 살아도 어제 같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셨는데, 우리말에 “아끼다”는 말은 ‘소중하게 여기어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 “아끼라”는 말은 원어로 ‘엑사고라조’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구속하다’, ‘속량하다’(redeem), ‘사다’라는 뜻입니다.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속전을 지불하고 사오다는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라는 뜻으로 의역한 것입니다. 시간을 사와라는 말은 시간을 정말 가치 있게 쪼개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시간을 활용하는데, 1시간 단위로 사는 것도 너무 길다고 봅니다. 30분 단위로 끊어서 30분을 쓰는데, 마치 1시간을 보낸 것처럼 소중하고 아끼면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말에 ‘아낀다’는 말도 좋은 번역이지만, 공동번역성경 개정판에는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15-16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엡5:15-16)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라는 말이 정말 잘 번역되었다고 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주어진 기회를 사오라’는 말인데,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라는 말이 정말 알아듣기 쉬운 번역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정신없이 질주하였습니까? 너무 빨리 달려서 속도감을 잃어버렸습니까?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이제는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제 길을 가고 있는지, 바른 방향, 향방을 바르게 확정하여야 합니다. 향방 없이 달려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3.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입니다. 사고력을 주셨습니다. 생각 없이 무분별하게 살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가치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무가치한 것에 목을 맨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의 밭에 소출이 풍성하였습니다. 그해 대풍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심중에 생각합니다. “내가 많은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니 너무나 만족하여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준엄하신 말씀을 주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롬12:2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어수룩하게 살고, 좀 뒤쳐져도 좋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야겠습니다.
여러분, 생각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데, 어떻게 귀한 열매를 얻을 것입니까? 목회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한 주간 사고의 산물이요, 깊이 생각하는 중에 한 편의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깊이 생각해야 하는지, 진액을 짜낸다고 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고된 노동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그토록 적은 이유가 바로 그래서이다.”라고 했습니다. 생각은 고되지만, 값진 노동입니다. 작가 나폴레옹 힐은 “황금은 땅 속에서보다 인간의 생각 속에서 더 많이 채굴되었다.”라고 합니다.
릭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을 많은 분들이 읽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에 따르는 유익 다섯 가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1) 목적을 아는 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2)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집니다. 3)목적을 알면 초점을 맞춘 삶을 살게 됩니다. 4)목적을 알면 삶의 동기가 유발된다. 5) 목적을 앎으로써 영생을 준비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보냄을 받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술을 끊기 바랍니다. 술이란 참으로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술을 먹지만, 계속하여 술을 먹고 보면 술이 그를 삼켜 버립니다.
1876년 “윌리엄 클라크 박사”는 일본으로 건너온 뒤 삿포로 농업학교를 세우고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원기 왕성한 학생들은 가끔 술을 마시고 난폭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학교 선생인 ‘구로다’ 씨가 클라크에게 학생들에게 술을 금지시켰으면 좋겠다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클라크 선생님도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자기가 먹을 1년 치 술을 미국에서 준비해 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병들을 모두 교실로 운반시킨 다음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금주를 서약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깨부쉈습니다. 그것을 본 학생들도 그를 따라서 금주서약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술을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양주 수입에 세계1위로 올라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여기 저기 술판이 벌어집니다. 우리 사회의 치유해야 하는 가장 시급한 일이 음주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은 절대로 술로 끝나지 않습니다. 음란으로 이어집니다. 가정의 파탄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방탕하여 고성 방가하는 모습을 생각한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했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현재수동형으로 늘 받으라는 뜻입니다. 한번 받은 것으로 되었다고 하지 말고, 계속적인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에게 순종하고 나를 통하여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펼쳐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도 충만하도록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5. 범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20절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아놀드 토인비가 지은 「역사의 한 연구」라는 책에서 “창조하는 힘의 신성한 섬광(閃光)은 아직도 우리들 안에 살아 빛나고 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책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해주셨고, 정치, 경제, 문화와 과학, 사회 모든 분야, 특별히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오늘 사도바울은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십니다. 때가 악합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십시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범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우리 시대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노래는 무엇인가?
에베소서 5:15-21 / 이필재 목사
요즘 한국은 5만원권이 새로 나왔습니다. 마침내 여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화폐문화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여자 인물을 유관순과 신사임당이라고 생각한 끝에 신사임당으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바랐던 일은 유관순이었습니다. 신사임당은 가정교육의 훌륭한 어머니상으로서 유명하신 분이고 유관순은 민족의 여인이었으니까 유관순이 되기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정말인지 알 수 없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유관순은 철저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또 종교 편향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신사임당으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그렇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아무것도 못해야 되느냐? 그러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나 사용하는 돈에는 반드시 인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달러에도 1불짜리에서 100불짜리까지 가장 존경인물들의 얼굴이 들어있습니다. 워싱턴, 링컨, 해밀톤, 잭슨, 그랜트…. 제일 고액판인 100불짜리에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심이 돈에 반영된 것입니다. 미국을 탄생시킨 도시가 필라델피아인데 도시에 가면 대단히 아름답게 건축된 시청 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청건물 맨 꼭대기에 보면 벤자민 프랭클린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그리고 법으로 정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벤자민 프랭클린보다 더 높은 건물은 건축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는가 대해서 몇 가지 그분의 삶의 철학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분은 시간에 대한 정의를 아주 철저하게 실행하신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 언제냐? 지금이라는 겁니다. 지금을 잘못 쓰면 큰 손해를 본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시간 개념에 있어서 흘러간 과거는 나에게 다시 오지 않고 미래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는 시간만이 나에게 유익하고 쓸 수 있는 여유라는 것입니다. 그는 청년 시절에 서점에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손님이 들어와서 책 하나 골라 가격을 물어서 1불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손님이 자꾸만 붙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깎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프랭클린은 1불50센트를 내라고 가격을 별안간 올려버렸습니다. 기가 막혀서 손님은 “이 책이 내가 꼭 필요한데 좀 깎아주세요.” 나중에 이 프랭클린은 2불을 내라고 했습니다. 점점 가격을 올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 이 책을 안 팔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오늘 아무 쓸데도 없는 일로 귀중한 나의 시간을 계속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1불짜리 책 한권 때문에 시간을 다 허비해야 되는 불행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에 대해서 그렇게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에 하나님 백성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 관리에 대한 문제요 또 하나는 하는 일에 대한 성격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기회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이 말은 내가 어떻게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이고, 그 다음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이것은 시간관리 교훈이 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한 일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 이것은 후회하는 소리 아닙니까? 인간은 세상에 왜 사는가? 거기에 대한 성격적 답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는가를 우리가 볼 수 있고 인간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인간은 일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 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우리 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과 무능한 사람을 말할 때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가? 능력 있는 사람이란 자기 할 일을 찾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 일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든지 안 벌든지 상관없습니다. 이름이 나든지 말든지 그런 기준이 아닙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그 일을 극대화 하는 사람! 봉사할 수 있는 일이면 더욱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가장 능력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남을 위해서, 봉사적 삶을 위해서 평생 몸을 바친 그런 사람들입니다. 저는 지금 계획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제 은퇴를 한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재미있을지…. 그래서 ‘나는 은퇴 후에도 그냥 설교를 계속 하겠다.’ 내가 다니면서 보니까 교회는 있는데 교인이 너무 적어서 목사님을 월급을 주고 못 모시는 그런 교회들이 많습니다. 수백 개 됩니다. ‘아! 내가 은퇴한 다음에는 이런 교회에 가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내가 무보수 사역을 해야 되겠다.’ 지금 생각할 때 그때가 제일 기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찾아보면 얼마든지 세상을 능력 있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모한 사람이란 누구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볼 때 그 사람은 동네 이장님 하시면 딱 좋을 거 같은데 대통령을 꿈꾸고 있으니까 할 일이 없지요? 아무리 봐도 저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환상 속에 있다면 그런 사람은 무모한 사람입니다.
갈보리교회 온 후에 어떤 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셔서 제안을 하셨습니다. “아! 이필재 목사! 세계 선교에 그렇게 정열이 있는 것을 아는데 내가 획기적이고 놀라운 선교 계획이 있으니까 나와 같이 선교를 합시다.” “그럽시다.” 그래서 제가 흥분을 해서 획기적 선교 방법이 무엇인가 롯데 호텔로 그를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저한테 무슨 제안을 했느냐 하면 나와 영화사를 하나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너무 놀라서 ‘아니, 저 목사님이 지금 제 정신이신가?’ 의심을 했습니다. 그 분은 목회를 안 하십니다. 저더러 하는 말이 “지금이 어느 시대이냐? 첨단 과학 영상 시대이다. 그러므로 영화사를 만들어서 기독교 복음을 영상으로 전도하는 이 시대가 되었는데 지금도 나가서 전도지 들고 사람 한명 만나서 굽실대면서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 믿으십시오. 그러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니 나와 영화사를 만들어서 영화를 찍어서 온 세계 영상으로 전도하는 일을 같이 하자.”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시드니에 본부를 두고 할리우드보다 앞서가는 영화사를 하나 만들자.” 와! 영화사는 돈이 1천억도 더 있어야 되는 그런 내용이고 나는 영화는 볼 줄은 알아도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감도 안 잡히는 겁니다. “목사님,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목회 밖에 모릅니다. 오늘 찻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병원심방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안 만났습니다.
지혜자의 노래는 무엇인가? “내게는 나에게 어울리는 일이 있다.” 그것을 찾아서 그 일을 극대화함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문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우리가 많이 좋아했잖아요? 자신이 그렇게 세계적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20대에 큰 위험스러운 일을 만났습니다. 젊은 나이에 국가 내란 음모죄에 걸렸습니다. 사형수가 되어서 사형당하는 날이 된 겁니다. 사형하는 시간을 10시, 12시 딱 정해놓고 그 시간에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사형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총살당하기 위해서 끌려 나가서 기둥에 묶여있단 말입니다. 5분이 되니까 자기를 죽이려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한 15여명이 자기 앞으로 나와 서는 겁니다. 집행관이 “5분 남았다. 할 말 있느냐?” 그래서 그 사형장까지 자기를 보기 위해서 따라와 준 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을 바라보면서 말을 하는데 2분을 썼습니다. 3분 남았는데 시간이 계속 흐르잖아요? ‘아! 나는 오늘 저녁에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 들면서 갈 곳이 없는 자기 영혼에 갈등이 막 생기면서 떨고 있는데 군인들이 “집행 준비!” “철커덕!” 부들부들 떠는데 한 병사가 말을 타고 하얀 손수건을 막 휘날리면서 그 사형장에 나타났습니다. “사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되었다. 황제의 명령이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 후 평생 남아있는 내 인생의 5분! 이 시간 개념을 가지고 절박한 글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청년들이 사회 개혁을 하려고 거리로 뛰어나옵니다. 거리에 흰 수건을 동여매고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성세대를 향해서 “기성세대는 물러가라. 기성세대는 물러가라.” 그런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돌아보니 뒤에서 더 젊은 아이들이 나를 보고 “기성세대는 물러가라.” 이것이 시간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세월이 신속하게 가니 날아가나이다.” 인생이 많이 남은 것 같아도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루한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의무감과 없는 사람과 환자입니다.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 시간에 쫓기는 사람입니다. 칼뱅 선생이 이 대목을 해석할 때 “마귀가 가지고 있는 시간을 빼어내어 네 것을 만들어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보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일하는 백성은 영원합니다. 제 평가대로 말하면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은 다른 게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일한 열매를 갖는 겁니다. 세상을 보면 참으로 게으른 백성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발전 안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정부는 온 국민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정부입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은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내가 평생 부를 내 삶의 노래 제목이 무엇인가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연속극 많이 보시죠? 인기 있는 연속극을 보면 간단한 원리가 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아주 지독한 악역을 하나 만들어놔야 합니다. 보기만 하면 사람들이 막 욕할 수 있는 악역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가 부르는 악의 노래가 들려짐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시켜서 인기가 있는 겁니다. 정 반대로 선한 노래를 끊임없이 부르는 착한 주인공을 하나 만들어놓는 겁니다. 사람들은 선한 노래의 주인공이 승리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연속극은 틀림없이 인기가 있습니다. 나중에 어떤 결론을 내어야 되느냐? 똑같습니다. 악역을 맡았던 사람의 비참한 최후를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겁니다. “저 놈은 저래야지! 잘 죽었어!” 그리고 선한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눈물 흘리면서 잘했다고 보는 겁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현실에 맡게끔 꾸며나가면 그 연속극은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그런데 연속극이 아니고 현실 삶의 무대에서 나는 어떤 역할의 노래를 부르고 사는가? 이 성경을 기록한 바울의 노래는 자신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무엇을 했습니까?” “네,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적 해피엔딩은 무엇입니까?”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나에게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모세는 평생 민족 해방의 노래를 부르다가 성취시켜 주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의 노래를 마지막 십자가에서 부르다 돌아가신 분입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무가베와 미얀마의 탄센 대통령, 북한의 김정일이 이 시대의 마지막 악역의 주역이라고 신문이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그 악인의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는 겁니다.
테레사는 자신의 노래를 켈카타에 가서 일생동안 불렀잖아요? 슈바이처 박사는 랑바레네의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동안 희생의 즐거운 노래를 부르다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먹 하나로 서울 장안을 휘어잡던 암흑가의 노래를 평생 부르며 산 악인이 있고, 가방 하나 들고 온 세계를 다니며 사업을 펼치는 사업가의 노래가 있고, 시 한편을 씀으로 온 세상을 감동시키는 시인의 노래를 부른 사람이 있고, 평생 건설의 노래를 부른 기업인이 있고, 몸뚱이 하나를 자본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운동선수도 자기 노래를 부르는 것이고, “교회는 내 인생의 전부다” 교회 봉사의 노래를 평생 부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도 있고, 나라와 민족 자유를 위해서 평생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세상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복합적 삶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부분이 문화적 영웅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박지성이 골을 넣으면 온 국민이 시원해 하잖아요? 문화적 영웅입니다. 김연아가 은반 위에서 회전을 하면 나라 전체가 박수를 칩니다. 이승엽이 홈런을 치면 일본팀인데도 한국 사람들이 승리감을 가집니다. 문화적 영웅들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죽었다고 하니까 온 세상이 슬퍼하잖아요? 김수환 추기경은 그분의 노래를 부르면서 사셨고 한경직의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 온 크리스천들이 다 은혜를 받았고 장군들은 무인의 노래를 부르며 살고 농부는 생산의 노래를 부르며 살고 주부는 가정 평화를 노래를 부르고 과학도는 과학도의 노래를 부르면서 다 자기 노래를 부르면서 세상을 사는데 나의 노래 제목은 무엇인가? 오늘 성경말씀은 이것입니다. 지금 제 주변에 한 대학생이 있는데 세계에서 10대 대학으로 평가받는 대학을 다니고 있습니다. 생물학 연구를 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주임교수와 함께 가장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것이 인간을 늙게 만드는 유전자를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느냐 입니다. 틀림없이 사람을 늙게 하는 유전자가 있는데 그것을 스톱시키면 사람은 안 늙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는데 자기 말로는 틀림없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대학생 보고 말했습니다. “그것 좀 빨리 만들어라. 내가 70세 되기 전에 만들어야지!”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저도 앞으로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 그리고 세월을 아끼라. 주어진 시간은 지금이다.” 얼마나 훌륭한 삶의 방향입니까?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에 필요한 네 사명의 노래를 부르며 살라.”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네 마음에는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지만 급하다. 시간이 얼마 없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영혼의 만족을 얻게 됩니다. 가능하면 음악 듣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추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좋은 책을 골라 독서하는 시간을 가지시면 마음에 풍요가 찾아옵니다. 운동하는 시간을 가지시면 건강을 되찾고 봉사하는 시간을 가지면 마음에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축복하는 말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시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집니다. 오늘 말씀의 뜻은 “그러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만 부르기에도 네 인생의 시간이 모자라는데 어찌 악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대개 시를 쓰고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나 조용히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마음이 외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을 하다보면 세상의 핍박받는 정신적 고통이 있습니다. 세상과 멀어지는 부분 때문에 마음이 외로워지고, 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진실이 무시당하고 엉뚱하게 생기는 오해 사건 때문에 괴로움을 당해야 되는 그런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기도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에 나타난 좋은 말씀의 시를 읽으세요. 시편, 잠언을 많이 읽으세요. 또 좋은 시집을 많이 읽으세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20세기 우리 신학도들에게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받는 칼 바르트 선생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같이 위대하신 학자가 또 위대하게 생각하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모차르트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여 두 번째로 하는 일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일이다. 거기에서 얻는 영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다.”
오늘도 암흑의 긴 터널을 피곤하게 걷는 형제여! 쉬지 말고 걸으십시오. 넘어지면 또 일어나 걸으시오. 조금만 더 가시면 터널 저 끝에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형제의 눈과 마주치게 될 것이요. 누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당신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쉬지 않는 형제가 당신 모르게 있습니다. 주님이시여! 내 곁에 영원하소서. 주님이 내 곁을 떠나시면 나는 저 황량한 벌판의 외로운 나그네와 같고 주님이 내 손을 잡으시면 내 눈은 황태자 같이 빛이 난다오. 샤론의 꽃 예수여! 샤론의 꽃 예수여! 오늘 아침 삶에 지친 외로운 나그네들 마음에 가득하게 피소서. 가득하게 피소서! 할렐루야! 아멘!
악한 때에 세월을 아끼라
에베소서 5:15-21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의 후반부를 시작하는 4:1에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반부인 1-3장에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과, 그 교회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도리를 설명했다면, 후반부인 4-6장에서는 이에 따른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 후반부에서 주어지는 여러 권면들을 요약하며 이 후반부의 정점에 서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본문 15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정말로 주의를 기울여서 어리석은 자같이 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본문 16절에서 보듯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하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때나 시간이나 세월 자체가 악하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때의 세상이 악하고 사람들이 악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며 살아갈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기독교에 대하여 얼마나 적대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악한 때를 우리가 살고 있는지를 실감한 사건을 겪었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여파로 대통령이 총리를 비롯한 몇몇 장관급 인사들을 경질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관련부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도덕적 측면에서 엄격한 국회의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인사는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것 하나 걸리지 않는 인사는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은 특히 총리후보자를 지명하면서는 최우선적으로 중시한 것이 청문회 통과 가능성 여부였습니다. 총리로 지명을 받은 분은 모처럼 도덕적으로 걸릴 것이 없는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엉뚱하게도 그의 신앙적 발언 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시달리던 끝에 자진사퇴 형식으로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친일파니 매국노니 하는 욕을 먹어야 했습니까? 주로 과거에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은 일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한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그 발언이 어떤 장소 어떤 모임에서 한 것인지는 온 국민이 다 압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거나 역사가들의 학회에서 한 강연이 아니었습니다. 한 기독교신앙인으로서 신앙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발언에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기독교인의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의 하나가 섭리신앙입니다. 섭리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단지 창조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창조하신 온 세계가 당신의 창조목적에 이르도록 당신의 주권과 지혜와 권능과 의와 사랑으로 계속해서 다스리시고 인도해 가심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인도하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이 하는 일을 허락하심으로써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는 계속 가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사람이 하는 일을 방해하심으로써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아닐 때 가려는 길을 자꾸 막으셔서 결국은 당신이 원하시는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사람이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도 않지만 방해하지도 않으시고 내버려두시되 그 일의 진행방향을 돌려놓으심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다른 일을 이루시는 데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의 경우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을 질시하여 그를 먼 이집트로 가는 상인에게 팔아넘긴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방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창39:1-4). 그런데 그 집 여주인이 요셉을 좋아하여 날마다 그를 유혹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거절하자 그 여주인은 거꾸로 요셉이 자기를 희롱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여주인의 행실은 매우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아니지만 방해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바람에 요셉은 또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옥살이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요셉은 바로 앞에 서게 되고 바로의 꿈을 잘 해석하여 신임을 얻은 요셉은 서른 살의 나이에 이집트 온 땅의 총리가 되었습니다(창41:41).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은 칠 년 간의 풍년 동안 뒤에 올 칠 년 간의 흉년에 잘 대비하여 모든 이집트 백성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나라 백성까지도 다 기근에서 살려내는 큰일을 한 것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그 모든 가솔까지도 요셉 덕에 극심한 기근에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우리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간 것이나 바로의 친위대장의 부인에 의해 무고를 당해 옥살이를 하게 된 일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일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바로의 친위대장의 부인이 요셉을 유혹하고 뜻대로 안 되자 그를 무고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인간의 잘못된 행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 내버려두시며 그 일이 되어가는 방향을 바꾸셔서 당신이 이루고자 하시는 더 큰 일을 이루시는 데 이용하신다는 뜻으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그의 형들은 큰 흉년에 양식을 구하려 이집트로 내려가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바로 옛날 자기들이 팔아넘긴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얼마나 큰 불안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습니까? 그런데 그 형들에게 요셉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일은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는 일을 내버려두셨지만 그로 인한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용하셔서 인류구원을 이루셨다는 의미에서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행위 자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행위에 마땅한 정죄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주권과 그 섭리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뜻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중에 베트남 호지민시에서 아웃도어를 생산해서 미국과 유럽 등지로 수출하는 큰 회사를 운영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난번에 베트남에서 대중국 반감이 폭발해서 폭동을 일으킨 근로자들이 중국인이 경영하는 회사공장들을 약탈하며 중국인 몇 명을 죽이기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 불똥이 중국인으로 오해받은 집사님 회사까지 튀었습니다. 회사가 완전히 약탈을 당했습니다. 생산된 제품뿐 아니라 원자재며 재봉틀이며 컴퓨터며 휴대전화까지 하나도 남은 것 없이 몽땅 털렸습니다. 폭도들에게 붙잡혔다면 생명까지도 잃을 뻔한 위기에서 그 집사님은 기적적으로 살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탈출과정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지 며칠 후 그 부인 권사님이 귀국해서 주일예배에 나오셨습니다. 예배 후 인사하러 다가온 권사님에게 걱정스럽게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그 권사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 말이 "다 하나님의 뜻이예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베트남인들이 그 집사님의 공장을 다 약탈한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이겠습니까? 그런 악한 일을 당했지만 생명을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사건을 계기로 더욱 더 겸손하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더욱 더 신앙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예요."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신앙적인 발언입니다. 그런 고백을 할 줄 모른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총리후보자였던 이의 "하나님의 뜻" 발언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그런 신앙을 고백했다고 총리가 될 수 없다 한다면 앞으로 이 나라에서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공직에 오를 그리스도인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엉터리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우리 사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악하다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총리후보자를 비난하며 총리지명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시위도 벌였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불교 신자가 그런 경우에 "다 부처님의 뜻입니다." 해도 그 이유로 정치적 반대를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일 것입니다.
악한 때를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더더욱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적당히 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본문 18절에서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악한 때에 세월을 아껴야 할 터인데 술 취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 하면서 기껏 술 취하지 말라는 권면을 하는 것은 다소 생뚱맞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음주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정신을 놓고 책임을 망각하며 그저 먹고 마시며 노는 일로 할 일을 소홀히 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의 자세를 경고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술 취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이는 방탕한 것이니" 했는데 바로 그런 뜻에서 한 말일 것입니다. 여기서 "방탕함"이란 다름 아니라 "세월을 아끼지 않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악한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자세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살 것인가 결단할 것을 사도 바울은 촉구한 것입니다.
여기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도 바울 자신이 그 뜻을 설명해줍니다. 본문 19-21절을 다시 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먼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라." 합니다. 여기서 "시"란 시편을 가리킵니다. 시편에는 역경 속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하면서도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한 신앙인들의 고백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악한 때에 이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성도들이 서로 나누며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좋은 것입니다. "서로 화답"하는 것은 마음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주님을 찬송하는 것도 신앙의 용기를 북돋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합니다. 20절에서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그의 인도하시는 방법을 이해한다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보기에 불의하고 악한 일들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선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존귀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악한 때에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사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끝으로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때가 악할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싸우지 말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 그의 뜻을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한 말의 뜻입니다. 악한 세상과 마귀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찢어놓고 하나님의 백성을 갈라놓으려고 온갖 궤계를 동원할 것입니다. 이에 놀아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바른 믿음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진정 한 몸 이루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혜 없는 자,지혜 있는 자
엡 5:15-18 / 김광일 목사
그리스에 애꾸눈 장군이 있었습니다. 장군은 죽기 전에 초상화를 남기고 싶어서 이름난 화가들을 불러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장군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화가는 애꾸눈 그대로 그렸고, 어떤 화가는 장군의 속마음을 짐작해 양쪽 모두 성한 눈을 그린 것입니다. 장군은 애꾸눈의 초상화도 못마땅했지만 성한 눈을 그린 것은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고민하고 있는 장군 앞에 어느 이름 없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보겠다고 나타났습니다. 장군은 미심쩍었으나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그 화가는 장군의 성한 눈 쪽의 옆모습을 그렸던 것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의술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제 병을 낫게만 해 주신다면 집을 팔아서 바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집을 팔아서 바치려니 너무 아까웠습니다. 궁리 끝에 집을 처분한다는 광고를 이렇게 냈습니다. “대지 200평, 건평 60평의 집의 대금은 10만원. 단,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를 함께 구입해야 함. 그 대금은 5억” 약속대로 집을 판 돈 10만원은 하나님께 바치고, 은행나무를 판 돈 5억은 부자가 챙겼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화가와 부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화가는 지혜를 사용하여 애꾸눈 장군의 옆모습을 그려 장군을 만족하게 하였고, 부자는 지혜를 사용하여 약속을 지키면서 재산은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지혜를 사용하였지만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화가는 지혜를 통하여 자신도 상대방도 만족을 누렸지만 부자는 지혜를 사용하여 양심과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의 이기심만 채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 없는 자입니까? 누가 지혜 있는 자입니까?
본문 15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여기의‘어떻게’ 라는 말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라는 말입니다. 즉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걷는다. 돌아다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를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주의하라 하십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교훈하고 있습니다. 지혜 없는 자같이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살아가라고 합니다. 자세히 주의하여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작정 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정하고 주의 깊게 살아가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제시하는 지혜 있는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첫째로 세월을 아끼는 자
미국의 헌팅턴 프레스(Huntington Herald Press) 신문사 건물입구에 3개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 위에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 밑에 깔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상 밑에는 설명이 있습니다. “지구본은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있는 모습은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 한 것이며 지구본 위에 거만하게 서 있는 모습은 시간의 귀중함을 비웃는 것이고 지구본 밑에 깔려 있는 모습은 시간을 무시하다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헌팅턴 프레스 신문의 편집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문사는 항상 흐르는 시간 속에서 최고의 신문을 만들고자 이 동상을 세웠습니다.”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시간의 귀중함을 비웃고 무시하는 사람입니까? 시간을 무시하다 실패하여 후회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시간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간순간 자세히 주의하면서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짧은 순간의 시간이라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의 ‘세월을 아끼라’는 ‘값을 지불하고 세월을 사라’는 뜻입니다. 칼빈은 ‘마귀에게 빼앗긴 시간을 되찾아 내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쓸 수도 있고 마귀를 위하여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시간을 쓰자고 하면 이유와 핑계가 많지만 마귀를 위하여 시간을 쓰는 데는 관대합니다. 향락을 위해 쓰는 시간은 많지만 하나님을 위해 쓰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시간과 기회는 하나님께서 똑같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어떤 개념을 가지고 시간을 대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양적인 개념의 시간으로 살면 ‘얼마나 살았느냐?’가 기준이 됩니다. 질적인 개념을 가지고 살면 ‘무엇을 하면서 살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삽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얼마나 살았느냐의 양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는 질적인 시간 개념으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지혜 없는 사람과 지혜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둘째로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위대한 점은 순교자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주의 뜻을 따르는 자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는 1925년 12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문제투성이의 초량교회에 부임을 합니다. 아무도 가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초량교회를 한국교회가 주목하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마산의 문창교회가 위기였을 때도 선배들이 주기철 목사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문창교회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찢어진 교회를 엮어 부흥하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일제의 신사참배가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주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조만식 장로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센터로 산정현교회를 만듭니다. 그 소문이 한국교회에 퍼지게 되면서 의식 있는 사람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합류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주목사는 8년 후에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의 순교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따랐을 때 하나님은 기독교 역사의 인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주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 뜻에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혜없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뜻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가는 것을 중지하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창조주를 거절하고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공통된 마음입니다. 부모의 뜻을 헤아려서 순종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진실한 주의 자녀는 주의 뜻 아래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주의 뜻이 내 뜻을 다스리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오만함으로 경거망동 하지 아니함을 말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모든 일이 나 중심적 사고였지만, 믿은 후에는 예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여 주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리석음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주의 뜻을 분별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자의 삶입니다. 주의 뜻을 깨닫기 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며 그 뜻을 따라 사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의 뜻을 이해하고 주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준행하여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함 받는 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성령을 체험하고 강력한 영향을 끼치자 옥스포드 대학에서 웨슬리를 초청했습니다. 웨슬리는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 최고의 석학인 교수들의 반응을 보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만났고,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와 함께 생활했고, 자신의 눈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머물며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렸고 오순절날 성령 충만함을 받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이 전도하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 여러분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까? 예수와 함께 식사했습니까? 예수의 기적을 직접 보기라도 했습니까? 예수를 만나고 함께 먹고 기적을 목격했던 제자들도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은 다음에야 영혼을 건질 수 있었다면 하물며 당신들이야 말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쓰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웨슬리의 설교를 들은 교수들이 깨어졌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성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의 위기를 겪던 영국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국민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빈부격차의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밀려오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고는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밀려오는 시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방탕한 죄의 습관을 끊어 버릴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끌려 다니며 시간을 낭비하고 후회뿐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삶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술 취함과 성령충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우상숭배가 가득한 도시이며 방탕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방탕과 향락에는 술이 빠질 수 없으며 우상제사와 함께 따라오는 것은 술의 축제였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절제하지 못한 채 방탕한 삶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런 환경 속에 계속하여 머무르는 것을 경고하며 성령에 붙들리어 살아가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성령충만함은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인이 되셔서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가시도록 준비되어 있는 상태가 성령충만함입니다.
랜디 호프만(Randy Hofman)은 목사이면서 예술가입니다. 그의 특징은 해변가에서 모래와 바닷물을 가지고 20여년에 걸쳐 모래 조각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등 대표적인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가 해변 가에서 모래와 바닷물로 조각품을 만드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함입니다. 모래 조각 작품들을 통해 연약한 재료를 가지고도 위대한 작품들이 창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동시에 인간도 모래와 같이 보잘것없고 조류가 밀려오거나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나 하나님에 의해 위대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래와 같은 연약한 인생입니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가듯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될 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누구의 손에 맡기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문필가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세상 사회는 내가 영광을 누릴 처소가 아니라, 내가 쓰여 질 처소”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나 결과는 허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양보와 희생을 통해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는 데 기여하는 삶을 산다면 행복을 느끼는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지혜 없는 자의 삶입니까? 지혜 있는 자의 삶입니까? 부디 주어진 인생 속에서 세월을 아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삶을 통해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간을 사라
엡 5:15-18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시간을 아끼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시간을 사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오늘 평균 연령이 80년 아니면 90여년이라고 하는데 그 8-90여년을 사는 동안 우리에게 당부하시기를 시간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시간을 아끼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 시간을 아끼라는 삶에 대해서 몇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인생을 주의 깊게 성찰하라
본문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어떻게 살아갈지를 위해서 깊이 생각하란 말입니다. 즉 함부로 살아서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강조하시기를 “너희는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인생의 삶에 대해서 항상 두 세계를 대비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빛과 어둠으로 설명을 하는 일입니다. 빛은 진리의 세계를 말하고 어둠은 하나님이 없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항상 너희는 어디에 속하는지를 묻고 촉구를 합니다. 또 성경은 어둠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자녀는 불순종의 자녀입니다. 세상의 욕망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속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불신앙의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종말에 대한 의식이 전무하거나 세상에 깊이 묻혀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통곡할 때를 모르고 무감각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빛의 자녀는 때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진리 안에 들어와 사는 사람입니다. 통곡할 때를 알고 사는 사람이고 앉고 일어설 때를 알고 사는 사람이고 올 때를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지혜 있는 자와 지혜 없는 자로 설명을 합니다. 지혜 없는 자는 헬라어로 아소포이(asopoi)라고 하는데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도로서 꼭 알고 행하여야 할 지극히 중요한 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줄 모르고 생각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혜 있는 사람은 삶을 조심스럽게 살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좀 더 진지하고 고민하며 깊은 세계에 주목하며 살아가기를 촉구하십니다. 오늘 고민하며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너무 가볍게, 너무 경솔히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즘 신문지상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보면 사람들이 생각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은 내 안에 무슨 생각을 그리고 무슨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엄청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이 달라지고 내 얼굴이 달라지고 내 이력이 만들어지지 때문입니다.
한 남자가 새를 잡으려 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날지 못하는 어린 독수리 새끼가 어미를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새끼를 잡아 집으로 와서 닭장에 병아리들과 함께 사육을 하였습니다. 그 독수리는 닭 모이를 먹으며 자라게 되었습니다. 5년 후에 어린 독수리가 자라서 3m나 되는 날개를 보유한 독수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는 날지 못하는 닭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연히 동물학자가 이 모습을 발견하고 독수리로 하여금 하늘을 날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독수리는 닭 모이에 만족하면서 날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조사를 해보니 이 독수리 몸에 독수리의 정신 대신 닭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겉모양은 분명 독수리인데 속성은 닭 이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내 안에 어떤 정신,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안일하고 평안하고 무개념으로 살아가면 당장은 평안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불행하게도 날지 못하는 독수리처럼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성도는 성도가 지녀야 할 정신이 있고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그 정신이 없으면 천국이 없는 신자로 부활이 없는 신자로 영생이 없는 신자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인생을 깊게 성찰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여기 “세월”은 “때”라는 말입니다. 여기 때는 헬라어로 카이로스(kailos), 즉 정해진 때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두 시간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요즘 소천 받으신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을 보면 ‘아, 그분은 그만큼의 시간을 받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 세월이나 때는 모두 그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아끼라”는 말은 “엑사고라조메노이(exagolasomenoi)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자신을 위해 시간을 도로 사라”는 뜻입니다. 즉 “엑사고라조메노이 톤 카이론”은 자신을 위해서 때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기회를 잡으라는 말이고 또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지혜 있는 사람인가 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정한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빛의 아들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전하는 일, 즉 전도하는 일이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즉 성장시키는 일이고 성숙시키는 일이고 눈을 뜨게 해주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전도하는 일입니다. 전도하는 일은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이고 영혼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보다 더 생산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시간을 낭비하고 살아갑니다. 너무 무의미하게 보내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경고하는가 하면 “때가 악하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와있다고 경고한 말씀입니다. 여기 악하다는 말은 포네리아(ponelia), 즉 타락된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말인데 그런데도 시간을 낭비하고 허송세월 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당시에 로마가 세상 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로마만 전도되면 세상 종말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2천년동안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이제 로마전도가 곧 이루어 질 것인데 언제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럴 시간이 있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모두 긴박감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세상에 경고한 말씀들이 많습니다. 롯의 경우가 그 경우입니다. 롯이 소돔성이 멸망당할 것을 미리 통고받았습니다. 천사는 빨리 성을 떠나 가족들을 데리고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롯이 사위들에게 빨리 떠나자고 하니까 농담하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반응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니까 유황불이 입체적으로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소돔성이 불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노아 홍수도 마찬가지 입니다. 노아시대에 하나님이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산위에서 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제정신이냐 하고 비아냥 거리고 얼마나 방해를 하였겠습니까. 마침내 배가 완성되어 문을 닫기전까지도 노아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농담인줄 알고 비웃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물이 쏟아지는데 소돔성에 유황불이 입체적으로 쏟아지듯이 물이 입체적으로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쏟아져 내려오게 되어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심판의 때가 가까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식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여전히, 어느 시대나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도 어느 시대나 적용되고 움직이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역사를 운영하시고 자연을 운영하시고 시대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운영하시는 섭리는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세밀하게 운영하시기 때문에 세밀하게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농사꾼이 농사를 짓습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가 적절하게 내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도시생활을 하니까 비가 와야할 때인지 아닌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시생활은 메마른 생활입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신의 섭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농부들은 가물 때 그릇을 들고 나가 물을 퍼 나릅니다. 하루 종일 물을 퍼 날라도 돌아서면 금방 땅이 타 들어갑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고 아주 보잘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그때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낙비를 퍼 붓습니다. 그때 농부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때 농부는 내가 하루 종일 물을 퍼나르느라 수고한 것과 단 한때 소나기가 퍼부어 땅을 적신 것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농부는 고백하기를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농부들이 가지고 있는 한결같은 생각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하나님이 궁극적인 것들을 다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엄숙한 것입니다. 시간을 아껴 쓰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배려와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겨울 차가운 호수에서 유유자작하며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오리를 보십시오. 그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생각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왜 오리는 양말도 신지 않고 저렇게 맨발로 얼음 위, 눈 위를 걸어 다니는데도 추위도 타지 않고 동상도 걸리지 않고 왜 오리는 추위가 문제가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보았을 것입니다. 또 참새 떼들을 보면 겨울 눈 위, 얼음위에서 모이를 찾으러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양말도 필요 없이 말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종일 맨발로 얼음 위를 돌아다닌다면 분명 무슨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들은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요? 그것이 창조주의 세상을 살피시는 손길로 모든 생명체에게 스스로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술취하지 말라
그러면서 성경은 “시간을 아끼라” 하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술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기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매사 적당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자동차가 규정 속도대로 달리면 평안하고 안전하고 여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술에 취하듯 과속을 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성경이 술에 취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즉 술에 지배를 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술에 인박이지 말라는 말이고 술 때문에 방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술은 인류역사와 함께 했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술 없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술을 만들어 먹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술이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도 주었겠지만 동시에 술 때문에 많은 실패도 재앙도 안겨 주었습니다. 술은 세 가지 피해를 안겨 줍니다. 하나는 술에 취하게 되면 방탕하게 됩니다. 술은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생활의 질서도 무너트립니다. 그래서 방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또 하나는 술로 인해서 가난하게 만듭니다. 술에 취하면 나태해지고 잠자게 되고 일손을 놓게 됩니다. 그래서 술꾼 집에 가 보면 한결같이 가난합니다. 그리고 결국 패가망신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이 술취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본문 18절에서는 방탕하지 않기 위해서 취하지 말고 하였고 잠 23:21에서는 “가난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취하지 말라”고 했고 삼하 13:28에서는 “망하지 않기 위해서 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술은 아무리 좋아도 취하면 문제를 야기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문제를 만들 때 술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게 해서 문제를 만들고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삼하 13:28을 보면 압살롬이 자기 누이를 욕보인 이복동생 암논을 죽일 때 술에 취하게 해서 분간을 못할 때 죽였습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한가지 흥미로운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충만입니다. 성령충만과 술 충만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충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술에 충만해서 취하게 되면 사람의 이성이 술에게 주권과 의지를 빼앗기게 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을 보십시오. 이성을 잃습니다. 그리고 술이 시키는대로 행동을 합니다. 거리에 쓰러지고 비틀거리고 노래를 부르고 말이 많아집니다. 그것은 술이 시키는대로 하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주권과 중심이 술에게 접수 당해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주권과 의지와 중심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술에 충만해서 취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될까요.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에 나타나는 현상과 같되 세련되고 고상한 모습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즉 이성을 잃는 것이 아니고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되고 무력했던 자신이 능력의 힘에 사로잡혀 지혜를 발휘하게 될 것이고 웃음을 잃고 살아가던 사람의 입에서 웃음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고 찬송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사람이 술에 취하게 되면 술이 주는 힘에 사로잡히듯이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성령이 주는 힘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발생하고 고백이 나타나고 지혜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충만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기도 전에 주님은 이미 우리를 선택하셔서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우선 나의 값을 알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이 나를 택하여 주시고 함께 해 주실만한 가치를 지닌 우리들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며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뿐 아니고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들을 선용하고 주어진 시간을 아끼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삶입니다.
지혜로운 선택이 주는 축복
엡 5:15-21 / 김대응 목사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는 이 다음에 뭐가 될 거야. 꿈들을 꾸며, 같이 출발을 했습니다. 꿈은 같이 꾸었지만 꿈을 이루는 순서는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빨리 이룬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이루어 가는 과정에 있기도 하고, 어떤 이는 꿈을 포기한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출발을 했는데 왜 이런 현상이 발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누구는 더 많은 축복을 받는 것 같고, 누구는 아닌 것 같고... 이런 것에 대한 의문이 우리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습니다. 평소에는 열심히 살다가도 어느 지경에 이르면 부정적일 때 폭발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사단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사고 속에 즉각 영향을 미치려고 틈을 탑니다.
그래, 그렇게 사는 것은 잘못 살고 있는 거야. 모든 것이 축복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봐 어렵잖아. 너는 최선을 다했어. 결과가 뭐야.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다했잖아. 맞아. 내 마음을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니.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해 못해 줘. 다들 나만 못살게 굴어. 나는 잘 한다고 하는데도 자꾸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는 거야. 속상해 죽겠어. 지긋지긋해. 집에 가기도 싫고, 일할 맛도 안나고, 사는 게 요즘 힘들어. 만나는 사람마다 다 힘들다고 해. 다 싫어. 그런데 마음속에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CEO 안철수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려울 때 무엇을 하는가에서 미래는 결정이 된다고 하면서, 자신이 결정할 때의 판단기준을 말합니다. 원칙을 지킨다. 본질에 충실한다. 장기적인 시각으로 본다.
미국의 유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처음으로 정식 채용된 직장에서 겨우 3주일 동안 일했습니다. 그가 맡은 일은 외교 및 비즈니스 에디터였습니다. 입사한지 얼마 후 힘들여 쓴 기사를 들고 당시 편집장이었던 독일인을 찾아갔습니다. 편집장은 그 기사를 읽더니 전혀 좋은 게 없다고 소리 지르며, 등 뒤로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3주일이 지난 어느 날 편집장이 조용히 불렀다고 합니다. “드러커, 앞으로 3주 안에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너는 다른 직장을 찾는 게 나을 거야.”
당시엔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한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드러커는 지금까지도 자신을 위해 한 말이 옳은 말이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기분 나쁜 일들을 겪을 때 지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구별됩니다. 성공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살아가야할 삶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기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지혜있는 삶이다. 세상 속에서 살 때에 지혜롭게 살아라. 덤벙대지 말아라. 실수하지 말아라. 실수가 없을 수 없지만 지혜롭게 대처하라. 세상을 자세히 살펴 보아라. 어떤 세상인지 좀 알아라.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 사람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라. 기회는 지나가면 버린 것이다. 기회를 잡으라. 살아가는 그 날, 그 날들이 악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가 없습니다. 자세히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알기를 원합니다. 있는 정보를 다 빼내려고 합니다. “[마2:7]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마2: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다. 자세히 말입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습니다.
적당히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피하였습니다. “[마2:16]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속이려다가 오히려 그것이 탄로가 난 것을 알고 분노했습니다.
누가는 자기의 믿는 믿음에 대하여 편지로 상관에게 자세히 써 보냈습니다.
“[눅1: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자초지종이 여차여차합니다. 알렸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려야 할 사람들이 있을 때는 자세히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찾아왔지만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눅24: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친히 자기에 관한 부활을 믿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신앙의 정상에서 엠마오 신앙이 하향하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서 자세히 설명을 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유대인을 분란하게 합니다. 나사렛의 이단자입니다. 성전을 더럽게 합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로마 총독인 벨릭스에게 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고발한 자들보다도 그 내용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행24:22]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우리들이 세상에 대해 무지하면 역이용을 당합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떤 지, 사람이 어떤 지, 알지 못하면 고발을 당하였을 때 고스란히 당하고 맙니다. 지혜 있는 자는 이용을 당하더라도, 탈출구를 압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도 인간이기에 곤경에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다른 점은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살길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엡 5: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생활의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없으면 지혜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주셨고, 우리는 반응해야 합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노력하는 반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게 될 때 세월(=시간=기회)를 아껴야 됩니다. 사람을 얻는 것이 세월을 사는 것입니다. 일거리를 많이 얻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만날 때마다 관계와 일이 깨지기만 하고, 성사가 되지 않는다면 세월을 무한히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날들은 악하다고 합니다.
때(=그 날들이)가 악하니라. 악한 세상, 악한 사람들이 많은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한 사람, 선한 일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궁핍하지 않고, 번창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분명한 열매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현장에서 망설이는 동안에 헷갈립니다. 한 번 잘못 “예”하면 순간의 선택이 평생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혜로운 자는 먼저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합니다.
주님이 주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살면 보입니다. 예로, 성경 공부를 하다보면 보입니다. 인생의 축복의 길이 어떤 길인지 보입니다. 말씀이 시키는 대로 따르다 보면 몸도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말씀이 인생을 지배하는 사람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술을 먹다 보면 보입니다. 방탕한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술이 시키는 대로 이해하고 몸이 그렇게 따라가는 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술이 몸을 지배하기 때문이지요. 술이 주인인 사람은 알콜중독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취하는 것은 꼭 술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많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술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선택을 하려면 의지적으로 해야할 습관들이 있습니다.
시편을 낭송하고, 찬송하고, 경건한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일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함께 있을 때는 합창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시간이 있을 때는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감정과 의지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이면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이고, 서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주장하다가도 주님의 뜻인 것을 알고 서로 복종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한 주간도 지혜로운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세히 주의하여 꼭 기회를 붙잡고, 사람을 얻는 주간이 되도록 지혜로운 자신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찬송의 힘
엡 5:15-21 / 김서년 목사
우리 기독교 신앙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찬송하는 신앙’임을 지난 주일에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특징을 한마디로 간단히 표현한다면 “찬송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와 또한 매일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찬송 부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찬은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지낼 때에도 찬송을 부르지 않습니까? 다른 일반 사람들은 그저 목 놓아 울며, 노래는커녕 감히 큰 소리도 내지 못하는 자리에서 말이지요.
우리 크리스찬은 기쁠 때에도 찬송을 부르며 슬플 때에도 찬송을 부릅니다. 어려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에도 찬송을 부릅니다. 또한 함께 모여 어디에 갈 때에도 찬송을 부르지요.
주일 예배에 있어서도 ‘찬송-찬양’이 기도와 말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세 요소 중의 하나’로 차지하고 있고, 특히 주일 오후에는 ‘찬양’을 중심 하여서 ‘찬양예배’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곡하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찬송을 부르라고 간곡히 권면하시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 찬송이란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고, 또한 바로 그 감사하는 마음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과 함께 반드시 찬송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찬송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게 될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찬송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주시는 축복과, 성령의 역사하시는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찬송에는 세 가지의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위로 올라가는 힘’(Up-going Power).
다음은 ‘나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힘’(In-going Power).
그리고 ‘밖으로 뻗어 가는 힘’(Out-going Power) ― 바로 이 세 가지의 힘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말씀에 따라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바꾸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하는 것은 바로 찬송이 우리에게 주는 ‘세 가지의 힘’을 받기 위해서인데, 바로 찬송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힘’, ‘소망의 힘’, 그리고 ‘사랑의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Up-going Power!’ 바로 ‘위로 올라가는 힘’을 얻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체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내가 굳센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주님께로 가까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은 바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이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2편 3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부르는 그 찬송 속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 속에 거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며, 그의 구원과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길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속에 거하고 계시는 이 찬송보다도 더 확실한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현대의 모든 음악들은 ‘도 레 미 화 솔 라 시 도’라고 하는 바로 이 ‘7음계’로서 표현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레미 7음계’가 어떻게 하여 생겨진 것인지 그 유래를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지요?
옛날 라틴 찬송가 가운데 가장 많이 불려지던 찬송이 하나 있었는데, 이 찬송은 모두 일곱 소절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소절의 첫 음이 지금의 한 옥타브로 차례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붙여진 가사 각 소절의 첫 발음이 ‘도, 레, 미, 화’ 이렇게 시작하고 있어서 그대로 ‘그 음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도 레 미 화’를 탄생시킨 바로 그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종의 무가치한 입술을 귀중한 화음으로 채워주시고,
나의 목소리로 당신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게 하소서!”
오늘의 아무리 거창한 심포니 음악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다 이 ‘7음계’로서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7음계 ‘도레미화’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앨버트․아인슈타인 하면 그가 누구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인사입니다. 바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위대한 물리학자이지요.
그런데 그가 발견한 이 ‘상대성 원리’라고 하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난해한 수학공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발표할 당시에는 웬만한 다른 물리학자들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했다고 그럽니다.
한번은 ‘상대성 원리’를 쉬운 말로 설명해 달라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답장을 썼습니다. “내 집에 한번 들리시오. 상대성 원리에 대하여 내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여 설명해 보겠오.”
아시다시피 우리 인간의 말이란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하여도 이해 못하겠다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래서 차라리 음악이라는 수단을 써보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중에 Grand Canyon에 가 보신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만, Grand Canyon에 가서 첫 눈에 펼쳐지는 그 장관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것입니까?
우리의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그저 “야, 굉장하다” 하고만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굉장하다”는 이 한마디로 과연 나의 느낌을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같은 이 말이지만, 박자와 음률을 타면 내 느낌이 그런 대로 표현되고 또 상대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참~ 굉~장하다~!!” ― 이렇게 표현하면, 단순히 ‘굉장하다’는 말보다도 무언가 여러분은 그 ‘굉~장한 것’이 좀 느껴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지요. 우주의 창조주이시오, 인간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며 그를 높이는 데에는, 우리의 이 언어는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통하여서는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96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는 것은, 찬송이란 것이 그만치 중요한 매체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체험하게 하며,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고, 나의 ‘피조물 됨’과 나의 ‘죄인 됨’과 나의 ‘종 됨’을 자각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깊이 체험하시기 원하십니까?
좀 더 내가 주님과 가까이 이끌림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찬송하세요. 찬송만큼 믿음에로 인도하는 길잡이는 없습니다. 더 크게, 더 자주, 더 열심히 찬송을 부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의 힘’, ‘위로 향하는 힘’―이 Up-going Power를 더욱 풍성히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화와 힘과 용기는 바로 이 찬송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In-going Power!! 즉 나의 가슴속으로 파고든 힘이 바로 이 찬송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에 고달픔이 있습니까? 답답함이 있습니까? 피곤함이 있습니까?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위로를 받으며, 내 속에 들어와 기쁨과 용기를 주는 이 ‘소망의 힘’을 공급받을 것입니까?
그 길은 바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힘으로써, 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바로 이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갈 때에 찬송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눈앞에 다가온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기에, 예수님은 찬송을 함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결심과 용기를 공급받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정말 애절하고도 처절한 외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이렇게 ‘엘리 엘리’를 부르짖었겠는가?!! ― 여러분, 이런 비통한 생각이 드시지요?
그런데 여러분, 막상 알고 보면, 그 말씀조차도 시편 22편 찬송의 가사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상에서도 찬송을 부르심으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도 찬송을 부르시는 것입니까? ― 찬송은 바로 ‘소망을 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던 중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개혁운동을 하던 동지들이 용기가 없어져 낙심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루터는 그들에게 “우리 시편 46편을 노래하자!” 이렇게 격려하며 힘차게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시편 46편은 이와 같은 내용입니다. (공동번역)
“하나님은 우리의 힘, 우리의 피난처
어려운 고비마다 항상 구해 주셨으니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깊은 바다로 빠져들어도,
우리는 무서워 아니하리라.
바닷물아! 우짖으며 소용돌이쳐 보아라.
밀려오는 그 힘에 산들이 흔들이고 떨릴지라도
만군의 주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바로 이 시편 46편의 찬송을 토대로 나중에 그의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하는 찬송이 작사 작곡되게 되고, 이 찬송을 부르며 종교개혁이 완성되게 된 것입니다!!
찬송이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1346년에 유럽은 페스트(흑사병)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전 유럽 인구의 삼분의 1일, 영국과 프랑스는 절반이 이때 이 전염병으로 쓰러졌고, 마치 지구의 종말을 맞고 있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 크리스마스를 맞은 런던 거리는 공동묘지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조그만 교회당 문이 열리며, 거기서부터 청년 몇 명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하는 성탄 찬송을 힘차게 부르면서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을 것 같습니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삽시간에 수천, 수만의 합창이 되어, 공포에 떠는 런던의 하늘을 우렁찬 찬송으로 수놓았습니다. 공포 속에서 찬송이 희망의 힘을 공급하여 준 것이지요!!
여러분, 삶에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습니까? 새로운 결심과 용기가 필요하십니까?
찬송하세요. 찬송은 소망을 주는 힘!! 나에게 위로와 평화와 회개와 기쁨과 결심과 용기를 일으켜주는, 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의 힘’이 바로 이 찬송 속에 있습니다. 더욱 더 찬송을 부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In-going Power!! 소망의 힘’을 더욱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찬송을 해야하는 세 번째 이유는, 찬송은 우리에게 Out-going Power! 밖으로 뻗어나가는 힘, 곧 ‘사랑의 길잡이’의 역할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혼자서 부를 때에도 물론 놀라운 힘이 됩니다만, 특히 여럿이 함께 부를 때에는 더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예배 시간에 성도 모두가 함께 일어나 부르는 찬송을 통해서 감동을 느끼실 것입니다.
또한 오후에 드리는 찬양예배와 또 금요일 저녁의 심야기도회 시간에 우리 온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힘차게 찬양할 때, 아마도 여러분은 이 찬송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계실 것입니다.
같은 가사, 같은 멜로디를 같은 리듬으로 같이 부를 때, 이 힘은 여러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사상을 연결하여서 하나의 큰 공동예배 common praise를 형성합니다.
또 각 사람의 개개의 영혼을 가깝게 해서 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체험하게 하며, 이로서 성도의 교제 koinonia, 즉 교회가 형성되게 됩니다.
또한 이 교회는, 함께 부르는 찬송을 통해 교회에 부여된 선교의 사명을 자각하며, 이 복음을 나누어야 되겠다는 강한 소명을 가지게 되며, 그 사명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을 나누어야겠다는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미 사도행전 당시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파되며,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언제고 어디서고 간에 항상 찬송이 불려졌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에 ― 그가 길을 걸을 때나, 배를 타고 파선을 당할 때나,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 그의 입에는 찬송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사자의 밥이 될 때에도 이 찬송은 울려 퍼졌습니다. 어디서 이와 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찬송의 힘입니다!! 여러분, 쿼바디스란 영화를 통해서 이와 같은 모습을 잘 보시지 않았습니까?
또한 십자군의 행렬이 사방으로 뻗어갈 때도,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사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도, 찬송이 계속적으로 불려져 왔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을 부를 때 간수들까지도 회개하며 감화를 받은 것처럼, 찬송이 불려지는 곳에는 언제나 감동이 따랐고, 복음이 소통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져왔습니다!! 찬송의 힘은 이렇게도 놀라운 것입니다!!
찬송을 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되어, 나의 내적으로 힘과 용기를 가지며, 나아가서는 ‘이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다―실천해야 하겠다’는 사랑의 힘을, ‘밖으로 뻗어나가는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이 없이는 선교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에서 우리는, 시작부터 성가대의 찬양으로 시작하며, 회중 모두가 일어서서 여러 번 찬송을 다같이 부릅니다. 또한 성가대를 특별히 두어 찬양을 합니다.
왜 이렇게 예배에 찬송을 많이 부르며, 왜 성가대를 이렇게 예배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찬송이 주는 ‘이 힘’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의 첫 출발 때부터 모든 선교의 역사가 이같이 찬송을 통하여, ‘찬송의 힘’으로 시작되고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특히 성가대의 찬양은, 성가대원들만이 미리 연습하고 준비하고 그리고 발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런 것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온 교우 모두가 찬송을 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여러분 모두가 이 강단에 올라와서 찬송을 불러야 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함께 찬송을 하며,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나누며, 함께 섬김을 실천함으로 찬송의 열매를 전도로서 거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가대원들이 옛 레위인들처럼 열심히 이 예배를 위해 찬송을 연습하고 준비하듯, 여러분 모두도 열심히 찬송을 부르시며 동참하셔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온 회중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결심을 끌어낼 수 있는 ‘음악을 통해 들려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며, 성가대원들은 ‘제사장이라는’ 이와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이 찬양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 여러분은 성가대의 찬양 후에 ‘아멘’으로 화답할 때, 그 찬양을 통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마음으로 새기며, 주신 사명에 더욱 충성하겠다는 결단을 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없이 선교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이 주시는 말씀을 종합하여 마음속에 정리하시며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다함께 부르라”고 권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찬송은 믿음의 힘, 소망의 힘,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 때문입니다.
이같이 나의 찬송이 ‘나와 하나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이웃’도 감화시키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찬송을 어떻게 불러야 하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열심히 부르며, 힘을 다하여 부르며, 감정과 정성을 다 기울여서 불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여러분 스스로를 돌이켜보세요.
여러분의 생활에 있어서 찬송이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만큼 되십니까?
나는 얼마만큼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까?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여자 분으로써 평생 동안 9천여 편의 찬송시를 썼는데, 현재 우리가 가진 이 찬송가에도 이분이 지은 시가 무려 21편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맹인이었습니다. 어려서 그만 의사의 실수로 인해서 맹인이 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맹인으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괴로운 인생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크로스비는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기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입에는 찬송이 그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찬송시들을 작사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어떻게 그 불행가운데서도 그렇게 찬송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하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신체장애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믿었으며, 이 괴로운 조건이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는 거룩한 봉사의 계기가 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불운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찬송을 통해 행운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 크로스비가 이런 찬송을 썼는데, 우리 모두가 잘 부르는 찬송입니다. 조금 후 이 찬송을 우리 모두 함께 부르고자 하는데, 시편 57편을 읽다가 감동을 받고 지은 찬송이라고 합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샘솟는 그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여러분, 깊이 마음속에 새기십시오.
찬송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네가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림을 받는 ‘믿음의 힘’을 우리는 가지게 됩니다.
찬송을 통해 우리는 나에게 위로와 평화와 회개와 기쁨과 결심과 용기를 일으켜주는 ‘소망의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찬송을 통해 우리는 각 사람의 영혼과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룩하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감화시키고 변화시키며 새롭게 하는 ‘사랑의 힘’을 늘 공급받게 됩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부서진 질그릇 같은 화니 크로스비입니다. 어려서 억울하게 남의 실수로 눈이 멀어 평생을 맹인으로 살게 된 이 가냘픈 여자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어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않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내 인생이 상처투성이 일지라도,
비록 내가 죄인 중의 괴수일지라도,
메마른 땅을 달리는 외로운 순례자일지라도,
비록 내가 깨진 옹기 그릇 같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찬송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항상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더욱 찬송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그래서 그 찬송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더욱 충성하시며, 힘차게 믿음의 행진을 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엡 5:15-21 / 김광일 목사
미연방교도소에서 복역한 에드워드 분커(Edward Bunker)는 ‘미스터 블루-변절자의 추억(Mr.Blue:Memoirs of a Renegade)’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분커는 5세 때 부모가 이혼을 하여 8세 때부터 아동 보호소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소년원 수감, 탈옥, 정신병원 수용 등 악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범죄 조직에 가담하고 마약거래와 무장강도 혐의로 검거돼 최연소 수형자로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 그 곳에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모르는 초조감 속에서도 글을 쓰는 사형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분커는 그 사형수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인생을 헛되이 살지 말아야지” 그래서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고전 작품들은 모조리 섭렵했습니다. 그리고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8년간 교도소에 있으면서 장편소설 6편과 단편소설 50편을 쓸 수 있었습니다. 41세가 되어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작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도 미친 듯이 글만 썼습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자신이 다시 타락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 점심, 저녁, 밤낮 없이 글만 썼습니다. 비로소 그의 글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화 제작자들로부터 교섭이 들어오고, 그가 각본을 쓴 영화가 오스카상 후보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시간도, 한 순간도 이제는 헛되게 보내지 않을 꺼야! 나는 시간을 알차게 보낼 것이다”라고 결심하고 시간을 선용하며 살았기에 전과자였지만 소설가로 성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월을 아끼라’에서 ‘아끼라’는 원어로 ‘엑사고라조메노이’입니다. 이는‘속량하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redeeming the time’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노예제도를 통해 ‘속량’을 설명합니다. “노예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재주와 능력, 그가 버는 돈,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생명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노예가 주인이 원하는 것보다 더 충성스럽게 일하면 주인이 얼마의 돈을 줍니다. 그러면 노예는 돈을 신전에 맡깁니다. 이렇게 하기를 반복하여 액수가 어느 정도 되면 노예는 신전에 가서 돈을 찾아 주인에게 몸값을 치룹니다. 그 때부터 노예는 자유하게 됩니다. 자유의 시간을 생각하며 충성되게 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시간을 속량한다는 의미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알고 선용하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악합니다. 일이 많아서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합니다. 지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도 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 말씀을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게 합니다. 혼자 예수 믿기도 힘들어 다른 이에게 전도할 엄두도 못 내게 하는 악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속한 악한 시대를 사서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지혜 있는 자는 바로 세월을 아끼는 자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세월을 아끼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주의 뜻을 이해해야
전도자 무디(D. L. Moody)가 시무하던 교회의 교인이 양조장을 크게 짓고 개업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모두 양조장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 그리고 축사를 했습니다. 마지막 축도시간이 되어 무디가 앞으로 나갔습니다. 무디는 손을 높이 들고 축복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양조장이 예배드린 후에 곧 문을 열게 됩니다. 이 양조장 문이 열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문이 열리면 엄청난 술이 생산될 것입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술을 마시고 타락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먹고 취하여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오! 하나님. 오늘 밤 양조장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양조장 문이 열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모인 사람들은 파티도 못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양조장 주인은 밤새 고민하며 한숨도 잘 수 없었습니다. 새벽에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양조장 문을 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이 후에 무디 신학교가 되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우리는 건강할 때보다도 오히려 약할 때, 부유할 때보다도 오히려 가난할 때, 불행할 때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있음으로 시간을 더욱 선용할 수 있으며 그 시간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에 개입 할 때가 더 안정될 때입니다. 시간을 선용해 가는 때는 환경, 여건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문제입니다. 그것만 알면 어느 시간도 낭비는 없게 됩니다.
욥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고난 자체, 재물 손실 자체가 욥에게 억울함이 아니고 그 시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데 대한 이해를 못하는 데에서 오는 고민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갈등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몸부림입니다. 모든 것을 다 상실하고 비참한 지경에 있다 할지라도 그 시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분명히 이해한다면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는 삶으로 복음을 사는 케이티 데이비스(Katie Davis)의 현재진행형 감동 실화를 그린 책입니다. 그녀는 우간다에서 14명의 아이들을 친딸로 입양해서 키우는 동시에 ‘아마지마(Amazima)’라는 비영리 사역 단체를 세워 빈민과 아이들, 병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스물세 살의 미국인 여성입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다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2007년 열여덟의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과 풍족한 생활, 보장된 미래를 모두 내려놓고 우간다로 날아간 그녀의 선택과 결단은 미국 사회 내에서 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시대의 귀감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책의 서두에서“주님, 우리가 매 순간 주님을 선택하게 해 주세요. 주님을 사랑하면서부터 나 자신의 계획, 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사랑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고, 그 사랑이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대학 입학 전 1년만 머물 작정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우간다에서 잠시 맡아 돌봐주던 다섯 살배기 아이가 꺼낸 한 마디,“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말이 그녀의 삶을 새로운 지경으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사람들은 나를 엄청난 사람으로 생각하곤 합니다.‘정말 용기가 대단해! 정말 강인한 아가씨야! 정말 특별한 사람이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미국 테네시 주 출신의 평범한 아가씨일 뿐입니다. 나는 틈만 나면 실수를 저지르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봐도 특별한 점이라곤 없습니다. 딱 하나, 늘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점이 특별하다면 특별할 것입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비범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평범한 사람.”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아끼며 살아가는 그녀에게서 행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들을 보면 자신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묻는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성령 충만함으로 세월을 아끼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본문 18절입니다. “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기의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음주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세상적인 쾌락에 자신을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망각하고 먹고 마시면서 할 일을 소홀히 하는 자세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방탕함은 세월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악한 때에 방탕한 자세로 살 것인가, 혹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살 것인가 결단을 촉구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마비시키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분별력을 가지고 깨어 있도록 해 줍니다. 세월을 아끼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인격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생각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항상 낮추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고 교만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맙니다. 결국 세월을 낭비하는 모습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월을 아끼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마음으로 노래해야
런던의 웸블리 스테이덤에서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세계적 록밴드와 가수들이 모여 축제를 벌였습니다. 7만에 가까운 군중들이 모여 만델라의 취임과 흑인의 해방을 축하하면서 보냈습니다. 어둠이 짙어갈 무렵 콘서트의 마지막 주자로 흑인 여가수 제시 놀만(Jessye Norman)이 올라섰습니다. 놀만은 무대에서 한동안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잠시 후 노래가 시작되었습니다. 반주도 없이 목소리만을 사용해서 부르는 노래는 노예매매상의 죄악을 회개하고 노예 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존 뉴턴의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숙연해졌습니다. 3절이 시작되자 따라 부르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찬양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침묵 속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어둠 속에서 노래를 통해 선포되어진 메시지를 가슴에 안고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튿날 신문에 기사가 실렸습니다. “어젯밤 웸블리 스테이덤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셨다.” 다음 주일에 적지 않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교회로 향했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죽어 있던 사람들에게 생명을 허락하시는 은혜가 임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세월을 아끼며 그리스도의 변화된 삶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19절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에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은 주로 근심, 걱정, 분노의 감정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게 되고 그 상처들은 허용된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시간을 더 의미 있게 합니다.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는 것 자체가 시간을 구속된 시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자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선용하는 지혜를 줍니다. 그러므로 삶의 전 영역에서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와 찬양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약할 때 신령한 노래들은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좋은 것이 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주님을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용기를 북돋기에 좋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미국 헌팅턴 프레스(Huntington Herald Press) 신문사 건물 입구에 3개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고, 다른 하나는 지구본 위에 사람이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 밑에 깔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신문사측은 동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구본은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이요.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있는 동상은 시간을 아끼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고, 지구본 위에 거만하게 서 있는 모습은 시간의 귀중함을 비웃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지구본 밑에 깔려 있는 모습은 시간을 무시하다가 실패해서 고통당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 신문사는 항상 흐르는 시간 속에서 최후의 신문을 만들고자 이 동상을 세웠습니다.”
세월을 아끼며 살아간다면 그 무엇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구속의 시간을 살지 못한다면 후회가 막급할 것입니다. 시간을 아끼는 선용의 문제는 외적인 여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내적인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속 받은 자의 삶이 되지 않고는 시간 속에서 어두운 경험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해 갈 때 비록 상황이 힘들다 해도 시간을 선용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쫓아다니는 존재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아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노래하며 찬송함으로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회를 선용하라
엡 5:15-17 / 계강현 목사
시간과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유한하고, 시간은 제한적이다.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렇다!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에 결단하고, 과거의 생활을 끊어버리고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천국영생을 누리라. 열심히 예수 믿는 것도 미루지 말고 주어진 기회를 잡으라.
엡 5:15-17,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골 4:5,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기회를 사라.’이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기회를 선용하라는 의미이다. 기회를 선용하는 사람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1.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옛말에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성공할 수 있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이 있다. 또한 ‘기회의 신은 앞에는 머리카락이 있으나 뒤에는 밋밋하다’는 영국 격언도 있다. 오는 기회는 숱이 많은 머리카락같아서 잡을 수 있지만, 지나가버린 기회는 민대머리같아서 잡을 수가 없단 얘기다. 지나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는 없지만, 오는 물로는 마음껏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고 기회를 선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2016년도는 갔지만, 이제 2017년도가 우리에게 기회로 주어졌다. 하루 24시간은 마치 주인이 종들에게 한 므나씩 주고 떠난 므나의 비유처럼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이요, 기회이다. 돈이 많다고 지식이 많다고 예쁘다고 25시간을 사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시간의 기회가 주어져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누가 살리느냐 아니면 못 살리고 놓쳐버리느냐가 미래를 판가름할 뿐이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한 행상이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스크림은 접시에 담아 먹는 간식이었다. 아이스크림은 불티나게 팔렸고, 얼마 안 있어서 아이스크림은 있는데 접시가 동이 나고 말았다. 이 상인은 쩔쩔 매다가 궁여지책으로 옆에서 파는 ‘페르시아 워플’이라는 얇은 과자를 가져다가 그 과자위에다 아이스크림을 담아 팔기 시작했다. 그날 ‘과자에 감긴 아이스크림’은 일약 대히트상품이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아이스콘의 시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목장이 분가하고 대행목자 목녀로 헌신한 부부가 임명받았다. 너무 잘 했다. 평생 아니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일이다. 우리 가정교회에서 목자목녀가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다. 나는 우리 교우들 모두가 목자목녀가 되는 꿈을 꾸고 반드시 그렇게 되길 바란다. 목자목녀가 되는 것은 곧 주님의 명령대로 제자가 되고 그 제자의 축복을 누리는 기회이지만, 한편 부담이요 짐이다. 편안히 신앙생활하는 것을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 만사가 다 그렇다. 부담이요 짐이 아닌 유익이 어디 있겠는가? 손 안대고 코 풀려고 하고, 노력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려는 사람은 패망하고 만다. 모든 유익한 것들은 누군가가 고생하고 희생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부모의 부담과 짐을 통해 자녀들이 평안을 누리는 것이고, 자녀들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부모가 위로와 기쁨을 얻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연약한 인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끼치려면 반드시 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갈등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갈등이 생겼다면 그 때가 기회인 줄 알라! 갈등, 부담, 짐 앞에 늘 도망만 가는 사람들이 있다. 평안할 때는 좋아라 하고 머물지만, 조금만 부담이 생기려 하면 냅다 도망한다. 예수 믿는 것도, 신앙성장도, 봉사도, 결혼도 그렇게 도망을 간다. 교회에서 몸으로 봉사하는 일만 생기면 슬그머니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 자신만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지, 왜 모르나? 모든 교인들이 다 안다. 여러분, 언제까지 도망하겠는가? 평생 도망가는 인생을 살 것인가? 기회를 발로 차지 말고 잡으라.
2.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세계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다. 그러나 그는 심한 근시로 연주할 때에 제대로 악보를 볼 수가 없었다. 남보다 불리한 조건에 처한 그는 할 수 없이 악보를 통째로 외워서 연주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악단의 지휘자가 병원에 갑자기 입원하게 되었다. 단원들 중에 누군가에게 지휘를 부탁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때 악보 전체를 몽땅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대리 지휘자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우연찮게 임시로 지휘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될 수 있었다. 만약 토스카니니가 그토록 시력이 나쁘지 않았다면 그는 평범한 첼로 연주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히려 육체의 고통의 위기가 기회가 되어서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스카니니는 회고록에서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런데 역발상으로 생각을 전환해보면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선용할 때는 기회가 되지만, 악용할 때는 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퇴보하거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다. 그러나 기회를 잘 잡고 선용하면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게 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위기(危機)가 무엇인가?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뜻한다. ‘위기일발’이란 ‘여유가 조금도 없이 몹시 절박한 순간’을 말한다. 이런 위기의 순간, 위기일발의 상황을 만나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연약한 우리들이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면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지만, 그러나 내 능력 밖의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병이나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됐을 때 그렇지 않은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을 때 그렇지 않나? 직장의 문제가 생길 때 그다. 오늘 우리나라가 처한 정치 경제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북한과의 긴장관계가 그렇다. 여러분이 혹시 지금 그런 위기상황 속에 처해있지 않나?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나?
바둑 7급에게는 바둑 9단이 두는 포석이나 행마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때 거기에 두었는지는 수십 수가 지난 다음에 좀 이해할 수 있고, 해설자가 해설을 해줘야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이해 못한다. 하나님은 인생바둑의 십 단, 아니 십팔 단도 넘는다. 크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포석과 행마를 한계를 가진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될까? 그냥 좀 믿고 기다려봐야 되는 것이다. 분명히 뜻이 있어서 거기다가 포석과 행마를 두신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危機)가 곧 기회(機會)이다.”라는 말이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정말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실수하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날고 긴다는 9단 바둑기사도 실수할 때가 있고,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나이가 들면 바둑에서 질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백전백승 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예외이고 제외된 일은 한 톨도 없다. 더구나 우리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삶의 모든 일에 있어서 우연히 일어난 일은 없다. 무엇인가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는 것이고, 무엇인가 목적이 있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다가 “에이쿠, 깜짝이야! 내가 깜빡했네.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잖아. 내가 그걸 생각하고 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내가 건망증이 요즘 심해서 그렇단다.” 뭐 그런 일이 있겠는가?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 神이 아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고 후회가 없으신 분이시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시다. 시간을 초월하여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일어난 고난과 위기는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위기는 하나님의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변장된 축복의 기회다.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가게 앞에 콧수염을 한 할아버지 동상을 보셨을 거다. 그는 KFC의 창업자 커넬 할랜드 샌더스(Colonel Harland Sanders) 할아버지이다. 그의 생은 고난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2살 때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동생들 먹여 살리느라 별의 별 일을 다해보았지만 계속 잘 안 되고, 결혼해서 낳은 아들은 죽고, 하는 사업마다 망하고, 화재가 나고, 미국의 경제공황을 만나 전 재산을 다 잃었다. 이때 65세의 커넬은 국가에서 받는 사회보장기금 단돈 $105를 가지고 살아야했고, 절망감과 아들 잃은 충격으로 정신병까지 앓게 되었다. 정신병 때문에 결국 사랑하던 아내마저도 떠나가고, 이젠 아무런 소망도 없는 인생이 되었다.
이런 인생 최대 위기의 순간에 커넬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를 듣게 된다. 382장 ‘너 근심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그 찬송 소리를 따라가 보았더니 어느 미친 여인이 교회 안에서 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미친 여자 옆에 앉아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미친 여자가 있는 바로 이곳에도 주님은 계시는 군요. 제가 평생 예수님 없이 돈만 벌려고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의 잘못을 용서해주세요.” 한참을 울며 회개기도를 하다가 자신의 정신이 갑자기 맑아짐을 느꼈다. 순간 정신병이 다 나은 것이었다.
이후로 진실한 크리스천이 된 그가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이 자신에게 ‘닭고기를 만들어 팔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려주시는 것을 순종하게 된다. 몇 가지 양념을 준비해서 불을 피우고 압력 기름 솥에 닭고기를 넣고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걸 집어넣고 닭튀김을 만들었는데, 이게 KFC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게 불티나게 팔리게 되면서 결국 74세에 600여개의 체인점 사장으로 재기에 성공하게 되고, 90세에 전 세계 80여 개국에 체인점을 설립하는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참 기업이 성장할 때에 경영권을 존 브라운이란 전문가에게 넘기고, 자신은 월급을 받으면서 가난한 이웃을 돕고 선교를 후원하며 자신을 치유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는 간증자로 여생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인용하며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사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였다고 한다.
성도에게 위기는 언제나 기회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일에 초청하실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의 크기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크기로 말씀해오시는데 어떻게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이사야가 그랬고, 마틴 루터와 칼뱅이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언제나 갈등과 위기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큰 조정을 반드시 함으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이다.
3. 위기를 기도로 극복하고 기회를 선용하면 축복이 된다.
그렇게 갈등을 조정하여 순종하기만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경험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소명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소명을 주신다고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건 마치 교회도 안 나오는 아들이 목사되길 기도하는 어머니와 같다. 목사가 되려면 우선 교회에 잘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 과정과정을 두려움을 극복하며 걸어갈 때 마침내 목사로 쓰실 것이다.
여러분, 두려워하고만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마귀도 그것을 노리지 않겠는가?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내어 발을 내디딜 때 요단강이 갈라진다. 마음의 갈등을 조정하고 결단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하나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소명의 길로 발을 내딛게 된다. 새해가 그런 새해가 되게 하자. 우리 교회가 평신도 세미나 주최로 다른 교회를 섬기게 부름을 받고 있다. 이 기회를 발로 차버릴 것인가? 아니면 잘 선용할 것인가?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기도하고 감동있는 섬김과 신약교회의 감동을 보여주자. 그때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더 크게 사용해주실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문제는 우리가 위기를 만날 때 그 위기를 기회와 추억으로 삼을지, 그냥 위기와 상처로 품을지 판가름하는 우리의 관점과 선택에 달려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악한 마귀가 대적하여 나와 싸울 때 겁먹을 필요 없다. 마귀보다 천만 배 강하신 하나님이 친히 싸워주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위기를 만나도 담대하라!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라.
야곱이 에서 형의 위협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다가 들녘에서 해가 져서 돌베개 배고 잠을 자는 데, 꿈에 천사의 사닥다리에 천사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 그걸 통해 야곱은 비록 그곳이 허허벌판 광야였지만, 하나님이 그곳에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야곱이 집을 떠나 광야로 쫓겨 가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꾀에만 기대서 살았을 것이다. 고난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삶으로 그를 인도해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로 나아가는 자는 아무리 깊은 웅덩이에 빠졌다고 할지라도 건져냄을 받는다. 시 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지금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성도가 혹시 있나? 인생 살다보면 그럴 때가 너무 많다. 어떤 때는 기가 막히는 경우를 만나면 제대로 말이 안 나올 정도가 된다. 그때가 바로 기도할 때이다.
기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삶의 난제에서 빠져나오는 승리의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가 다 위기 속에 있다. 교회도 위기, 경제도 위기, 정치도 위기, 안보도 위기, 내 사업도 위기, 내 가정도 위기,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왜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해놓으셨을까? 이 위기의 자리에서 이런 뜨거운 기도를 통해서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하려는 불씨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여러분이 서있는 위기의 자리에서 기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부르신 것이다.
희한한 건 뭐냐 하면 그렇게 “위기다. 어려움이다.” 얘기는 하면서도 “기도하자!”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모여서 기도하자!” 그래도 기도하러 잘 오질 않는다. 엎드려 기도하는 일을 싫어한다. 그저 바쁘게 사방으로 막혀있는 담만 자꾸 두드리고 다닐 뿐 열린 하늘 문을 향해 두드려 기도하지 않는다. 성도의 사명은 한 사람이 되었든 두 사람이 되었든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나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런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최고의 능력은 기도의 능력이다. 이걸 도외시하고 다른 것 추구해봐야 껍데기밖에 건질 게 없다. 자녀의 특권인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여서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전환하라.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냈고 현재 호서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정근모 장로에게는 아주 후회스러운 일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인 김재익 박사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당시에 김재익 박사는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꼭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던 정근모 장로는 몇 번씩 자리를 만들었지만 그때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곤 했다.김재익 박사가 대통령을 수행해서 동남아로 떠나기 전에 그들은 또 한번의 만남을 가졌지만 망설이다가 결국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다음 기회로 미룬 채 헤어졌다. 그리고 정근모 장로는 중국으로 회의차 출국했다.중국에 있던 정장로에게 ‘아웅산 폭발사건’의 소식이 들려왔다. 김재익 박사는 그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정장로는 가장 절친했던 한 친구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중국의 한 호텔 방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만 했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더더욱 영혼을 구원하는 귀중한 일이라면 절대로 미루지 말라. 생명의 삶공부와 삶공부의 기회를 붙잡으라. 사랑의 기회를 절대로 연기하지 마라. 사랑하려 할 때 이미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올 한해 동안 성령님이 우리 속에 말씀해주실 때,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순종하라.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라.
위기가 곧 기회다. 하나님의 신의 한 수와 같은 포석을 우리가 당장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다. 마침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해주실 것을 믿으라. 우리를 형통한 자로 만들어주실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기도하여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 가시며 하나님을 크게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지혜로운 자
엡 5:15-18 / 김양인 목사
지혜로운 자
엡5:15-18
오늘은 ‘지혜 있는 자’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이 시대를 일컬어 지식산업시대라고 합니다. 과거 제조업 시대에는 육체노동이 중요했고 물건을 생산하는데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현대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첨단 과학과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경쟁력을 높이려면 남보다 차원 높은 지식을 먼저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해서 자녀 교육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해서 석박사가 되었다고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석박사는 어느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면 됩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지혜를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 지식은 별로 없는데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은 매사에 덕을 세우고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마땅히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간해서 행합니다.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족할 줄 압니다. 권위를 인정하고 승복할 줄 압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어딜 가든지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반면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지식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언행을 통해 덕을 세우지 못하므로 대인관계에서 실패합니다. 피스 메이커가 못되고 트러블 메이커가 됩니다.
지혜는 신앙생활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성도를 지혜롭다 하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성도를 지혜 없는 자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에서 덕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세월의 체감 속도’라는 글을 읽어보니, 30대는 30킬로, 40대는 40킬로, 50대는 50킬로, 60대는 60킬로로, 나이에 따라서 세월의 속도를 다르게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년시절에는 세월이 너무 더디게 간다고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에는 왜 나는 항상 아이로만 있는 것인가, 나는 언제나 클까 하고 걱정 아닌 걱정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이 60킬로 이상으로 달리는지,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런가하면, 과거를 추억하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추억에 잠길 겨를이 없이 미래의 꿈을 좇아 달려 나갑니다. 그들은 지나온 날보다 갈 날이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추억에 잠기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다고 다 과거지향적인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많아도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한 일이란 그가 이룩한 업적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부심을 느낄만도 했지만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가 바라본 것은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바라본 푯대가 무엇입니까? 장차 주님께서 주실 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푯대 곧 추구하는 목표가 분명하였고, 살아가는 목적이 확실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야 좋을까, 저것을 해야 좋을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저와 성도님들도 사도와 같이 미래지향적인 삶,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고 쉼 없이 믿음의 경주를 달려 나가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추억에 잠기지 마시고,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수입을 일하는 시간으로 나누어 시간당 얼마를 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돈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주고 돈을 바꿀 수는 있으나 돈을 주고 시간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은 살 수 있으나, 돈으로 나의 시간을 연장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능력이 있건 무능하건 각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할 수도 있고 헛되이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낭비하는 사람을 보고서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돈보다 더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면서 사는지, 아니면 허비하면서 사는지 말입니다. 16절에서, 사도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때란 이 시대를 말합니다. 이 시대가 악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일에 시간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악한 때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가운데 악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사람들을 바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 없이 살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살지만, 정작 무엇 때문에 바쁜지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살지 않은 시간은 낭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이르기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면, 밥 먹는 것, 일하는 것, 잠자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일에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촌음을 아껴 주의 일을 위해 살아가는 지혜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지혜 있는 자가 되려면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17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어리석은 자일까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이 주의 뜻에 달려 있는데, 주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는 평가를 받을지라도 실은 가장 미련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주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실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생각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처럼 교만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결국 다른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롭고 똑똑한 척하면 그 누구도 권면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충고를 거부할 뿐 아니라 감히 주의 뜻을 무시하려 합니다. 주의 뜻을 몰라도 자기는 얼마든지 제 지혜를 가지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미련함이나 약한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그렇게 가정할지라도 하나님 보다 더 지혜롭고 강한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이르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삶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지만, 주님의 뜻은 그를 믿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아감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뜻을 따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으며, 불행한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뜻은 선하지 못하고 결함투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주의 뜻을 무시하고 사람의 뜻을 따라 살면 믿음의 길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일러주실 때 기꺼이 순종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지혜 있는 자가 되려면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18절에 이르기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술 자체가 악이라고 볼 수는 없을지 몰라도 술을 즐기다 보면 자제력을 상실하고 방종하기 쉽습니다. 노아와 같이 경건한 사람도 포도주를 과하게 마셨다가 벌거벗고 장막에서 잠자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요즘 범죄 사건들 가운데는 술이 원인인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정신이 해이해 져서 방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간혹 이 구절을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을 만큼 마시는 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도 있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국인들은 ‘술을 권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식 자리에서는 으레 술 마실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강요하는 술 문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편, 술 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서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방탕이란 성적인 방종을 말합니다. 술과 성적 방종의 관계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술을 금하는데, 이는 술에 취함으로써 발생하는 실수와 방종을 사전에 막으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만큼 경건한 생활을 하는데 유리합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이유는 쾌락 추구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5장 6절에 이르기를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바르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 즐거움을 좇아 살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술처럼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락과 영화, 게임, 도박, 식도락, 여행 등등, 무엇이든지 신앙생활을 방해할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술 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멀리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을 대조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하듯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십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꺼이 순종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 충만할 때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주의 일을 위해 힘쓰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시험이 다가와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너끈히 이겨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는데도 여전히 무기력하게 방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지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내리신 처방이 무엇이었습니까? “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받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도를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성령을 받고 모두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유대인 앞에서 각가지 방언으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다 놀라며 서로 말하기를 “이 어찐 일이냐“고 했습니다.
‘저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어쩌면 저렇게 외국어에 능통한가. 저 겁 많던 사람들이 어쩌면 저토록 담대하게 되었는가?” 그뿐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서 병자들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들을 보고서 “이 어찐 일이냐?”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사도들을 조롱하기를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사도들이 포도주나 소주에 취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행동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보고 “저희가 새 술이 취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새 술이라고 한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용기가 생기고 마음이 기쁜 것처럼, 성령 충만하면 마음에 담대함이 생기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술을 마셔서 용감해 진 것이나 마음이 기쁜 것은 일종의 마비 증상과 같습니다. 알코올이 뇌의 도파민 분비를 활성화시켜서 기분을 좋게 하고 담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술기운이 사라지면 흥분이 사라지고 이전처럼 돌아가고 맙니다. 더구나 술에 취해 내는 용기를 일컬어 만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능력이 임해서 담대해 지고, 신령한 기쁨이 마음에 충만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쓰기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 이를 본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두 사도를 체포하여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하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가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있는 것을 보고는 힐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제사장은 공회원들과 의논하고 나서 두 사도를 불러 위협하며 말하기를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대제사장의 위협에 겁먹지 않고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사도들에게 이 같은 용기가 생겨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단에 속한 자들은 귀신의 영에게 사로잡혀서 종살이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정통 교회에 다니다가 끌려간 자들이 상당수 됩니다. 왜 이단에게 미혹당하여 끌려갈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화를 거부하는 자들은 귀신의 영에게 미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로 12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9)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악한 자는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단들의 교주들은 적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적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작은 적그리스도들입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곧 이단에 속해 있는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단의 미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그들 딴에는 열심히 잘 믿는 줄 알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입니다. 신천지든, 통일교든, 하나님의 교회든, 여호와의 증인이든, 몰몬교든 이단에 속한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 버림받은 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단에 대하여 경고해도 듣지 않고 미혹 당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기 때문에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끌리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므로 우리는 그들과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지혜가 없는 미련한 자들이므로 멸망을 자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주의 강림이 심히 가까운 때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배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디 서구는 2천년 가까이 기독교를 믿어 왔으나 지금 유럽인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떠나 인본주의를 따라 살아갑니다.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지금은 명목만 기독교인이지 실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많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 안에서 버젓이 용인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준비하는 한 과정입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이 주님의 강림이 임박한 시대가 되었다는 징조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자다가 깨어 주님의 강림을 준비할 종말의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할 일은 지혜 있는 자들이 되어 허탄한 일을 위해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세월을 아껴 주의 일을 위해 힘쓰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며, 술 취함과 방종을 멀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이르기를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지혜 있는 자’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이 시대를 일컬어 지식산업시대라고 합니다. 과거 제조업 시대에는 육체노동이 중요했고 물건을 생산하는데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현대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첨단 과학과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경쟁력을 높이려면 남보다 차원 높은 지식을 먼저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해서 자녀 교육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해서 석박사가 되었다고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석박사는 어느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면 됩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지혜를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 지식은 별로 없는데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은 매사에 덕을 세우고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마땅히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간해서 행합니다.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족할 줄 압니다. 권위를 인정하고 승복할 줄 압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어딜 가든지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반면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지식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언행을 통해 덕을 세우지 못하므로 대인관계에서 실패합니다. 피스 메이커가 못되고 트러블 메이커가 됩니다.
지혜는 신앙생활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성도를 지혜롭다 하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성도를 지혜 없는 자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교회에서 덕을 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세월의 체감 속도’라는 글을 읽어보니, 30대는 30킬로, 40대는 40킬로, 50대는 50킬로, 60대는 60킬로로, 나이에 따라서 세월의 속도를 다르게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년시절에는 세월이 너무 더디게 간다고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에는 왜 나는 항상 아이로만 있는 것인가, 나는 언제나 클까 하고 걱정 아닌 걱정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이 60킬로 이상으로 달리는지,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런가하면, 과거를 추억하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추억에 잠길 겨를이 없이 미래의 꿈을 좇아 달려 나갑니다. 그들은 지나온 날보다 갈 날이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추억에 잠기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다고 다 과거지향적인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많아도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한 일이란 그가 이룩한 업적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부심을 느낄만도 했지만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가 바라본 것은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바라본 푯대가 무엇입니까? 장차 주님께서 주실 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푯대 곧 추구하는 목표가 분명하였고, 살아가는 목적이 확실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야 좋을까, 저것을 해야 좋을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저와 성도님들도 사도와 같이 미래지향적인 삶,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고 쉼 없이 믿음의 경주를 달려 나가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추억에 잠기지 마시고,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수입을 일하는 시간으로 나누어 시간당 얼마를 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돈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주고 돈을 바꿀 수는 있으나 돈을 주고 시간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은 살 수 있으나, 돈으로 나의 시간을 연장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능력이 있건 무능하건 각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할 수도 있고 헛되이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낭비하는 사람을 보고서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돈보다 더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월을 아끼면서 사는지, 아니면 허비하면서 사는지 말입니다. 16절에서, 사도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때란 이 시대를 말합니다. 이 시대가 악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일에 시간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악한 때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가운데 악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사람들을 바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 없이 살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살지만, 정작 무엇 때문에 바쁜지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살지 않은 시간은 낭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이르기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면, 밥 먹는 것, 일하는 것, 잠자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일에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촌음을 아껴 주의 일을 위해 살아가는 지혜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지혜 있는 자가 되려면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17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어리석은 자일까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이 주의 뜻에 달려 있는데, 주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는 평가를 받을지라도 실은 가장 미련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주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실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생각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처럼 교만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결국 다른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롭고 똑똑한 척하면 그 누구도 권면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충고를 거부할 뿐 아니라 감히 주의 뜻을 무시하려 합니다. 주의 뜻을 몰라도 자기는 얼마든지 제 지혜를 가지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미련함이나 약한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그렇게 가정할지라도 하나님 보다 더 지혜롭고 강한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이르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삶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지만, 주님의 뜻은 그를 믿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아감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뜻을 따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으며, 불행한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뜻은 선하지 못하고 결함투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주의 뜻을 무시하고 사람의 뜻을 따라 살면 믿음의 길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일러주실 때 기꺼이 순종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지혜 있는 자가 되려면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18절에 이르기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술 자체가 악이라고 볼 수는 없을지 몰라도 술을 즐기다 보면 자제력을 상실하고 방종하기 쉽습니다. 노아와 같이 경건한 사람도 포도주를 과하게 마셨다가 벌거벗고 장막에서 잠자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요즘 범죄 사건들 가운데는 술이 원인인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정신이 해이해 져서 방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간혹 이 구절을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을 만큼 마시는 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도 있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국인들은 ‘술을 권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식 자리에서는 으레 술 마실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강요하는 술 문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편, 술 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서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방탕이란 성적인 방종을 말합니다. 술과 성적 방종의 관계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술을 금하는데, 이는 술에 취함으로써 발생하는 실수와 방종을 사전에 막으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만큼 경건한 생활을 하는데 유리합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이유는 쾌락 추구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5장 6절에 이르기를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바르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 즐거움을 좇아 살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술처럼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락과 영화, 게임, 도박, 식도락, 여행 등등, 무엇이든지 신앙생활을 방해할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술 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멀리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을 대조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하듯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십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기꺼이 순종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 충만할 때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주의 일을 위해 힘쓰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시험이 다가와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너끈히 이겨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는데도 여전히 무기력하게 방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지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내리신 처방이 무엇이었습니까? “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받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도를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성령을 받고 모두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유대인 앞에서 각가지 방언으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다 놀라며 서로 말하기를 “이 어찐 일이냐“고 했습니다.
‘저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 어쩌면 저렇게 외국어에 능통한가. 저 겁 많던 사람들이 어쩌면 저토록 담대하게 되었는가?” 그뿐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서 병자들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들을 보고서 “이 어찐 일이냐?”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사도들을 조롱하기를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사도들이 포도주나 소주에 취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행동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보고 “저희가 새 술이 취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새 술이라고 한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용기가 생기고 마음이 기쁜 것처럼, 성령 충만하면 마음에 담대함이 생기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술을 마셔서 용감해 진 것이나 마음이 기쁜 것은 일종의 마비 증상과 같습니다. 알코올이 뇌의 도파민 분비를 활성화시켜서 기분을 좋게 하고 담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술기운이 사라지면 흥분이 사라지고 이전처럼 돌아가고 맙니다. 더구나 술에 취해 내는 용기를 일컬어 만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능력이 임해서 담대해 지고, 신령한 기쁨이 마음에 충만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쓰기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 이를 본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두 사도를 체포하여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하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가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있는 것을 보고는 힐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제사장은 공회원들과 의논하고 나서 두 사도를 불러 위협하며 말하기를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대제사장의 위협에 겁먹지 않고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사도들에게 이 같은 용기가 생겨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단에 속한 자들은 귀신의 영에게 사로잡혀서 종살이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정통 교회에 다니다가 끌려간 자들이 상당수 됩니다. 왜 이단에게 미혹당하여 끌려갈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화를 거부하는 자들은 귀신의 영에게 미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로 12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9)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악한 자는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단들의 교주들은 적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적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작은 적그리스도들입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곧 이단에 속해 있는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단의 미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그들 딴에는 열심히 잘 믿는 줄 알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입니다. 신천지든, 통일교든, 하나님의 교회든, 여호와의 증인이든, 몰몬교든 이단에 속한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 버림받은 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단에 대하여 경고해도 듣지 않고 미혹 당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기 때문에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끌리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므로 우리는 그들과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지혜가 없는 미련한 자들이므로 멸망을 자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주의 강림이 심히 가까운 때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배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디 서구는 2천년 가까이 기독교를 믿어 왔으나 지금 유럽인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떠나 인본주의를 따라 살아갑니다.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지금은 명목만 기독교인이지 실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많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 안에서 버젓이 용인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준비하는 한 과정입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이 주님의 강림이 임박한 시대가 되었다는 징조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자다가 깨어 주님의 강림을 준비할 종말의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할 일은 지혜 있는 자들이 되어 허탄한 일을 위해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세월을 아껴 주의 일을 위해 힘쓰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며, 술 취함과 방종을 멀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이르기를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