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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말씀인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요1:1-13)
◈ 원문강해 ◈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심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소개한 본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일명 로고스(Logos) 송가라 불러지는 부분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창조적 지혜와 모든 존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의 신적 존재와, 또 그 말씀이 마침내 이 역사의 현장에 친히 찾아오신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1. 영원한 생명과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1-5절) 1) 하나님의 말씀 ( jEn ajrch'/ h\n oJ lovgo", kai; oJ lovgo" h\n pro;" to;n qeovn, kai; qeo;" h\n oJ lovgo". 엔아르케 엔 호 로고스, 카이 호 로고스 엔 프로스 톤 데온,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1절) 태초에 해당하는 아르케(ajrch')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여성 명사 아르케(ajrch')의 단수 여격으로 '처음에'라는 뜻인데, 이는 시간의 출발점 이전의 때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말씀'에 해당하는 로고스(lovgo")는 본래 호머(Homer)의 글에서 의견을 말하기 위해'(말을)수집하다, 배열하다'등의 뜻으로 쓰여진 말에서 유래되었다. 흔히 '이성, 말'을 뜻하는 말로 간주되나(A.T.Robertson), 여기서는 관사 호(oJ)가 붙어 '그 말씀'으로서 성육신 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시며(나타내시며),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으로서의 선재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말들은 에이미(eijmiv이다)의 미완료 과거 3인칭 단수인 엔(h\n계시니라)과 결합하여 말씀이 태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또 지속적으로 그 말씀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즉 말씀은 태초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Bernard, Hendriksen, Albert, Calvin). 이런 그리스도의 선재성은 구약의 잠8:22-31에서도 암시된다. 한편 프로스 톤 데온(pro;" to;n qeovn하나님과 함께)이란 말에서 전치사 프로스(pro;")는 '∼와 함께'라는 전치사(h\n엔, metav메타, mapav파라, suvn쉰)와 같은 반면 프로스는 동적인 공존을 의미하고 있다. 즉 서로간에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였음을 가리키는 삼위일체의 교리임을 알 수 있다(J.Calvin).
2) 만물의 창조 (ou|to" h\n ejn ajrch'/ pro;" to;n qeovn. pavnta di j aujtou' ejgevneto, kai; cwri;" aujtou' ejgevneto oujde; e{n. o} gevgonen 후토스 엔 엔 아르케 프로스 톤 데온 판타 디 아우투 에게네토 카이 코리스 아우투 에게네토 우데 헨 호 게고넨;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2,3절) 만물을 뜻하는 판타(pavnta)는 관사 없이 사용됨으로 인하여 현재에 국한된 전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에 존재하는 전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이 되다'를 뜻하는 기노마이(givnomai)의 3인칭 단수 과거인 에게네토(ejgevneto되었으니)와 결합하여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말씀을 통하여' 창조 사역을 담당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롬11:36골1:16). 잠8:22-31에서는 지혜에 의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전1:24,31).
3) 말씀안에 있는 생명 (ejn aujtw'/ zwh; h\n, kai; hJ zwh; h\n to; fw'" tw'n ajnqrwvpwn: kai; to; fw'" ejn th'/ skotiva/ faivnei, kai; hJ skotiva aujto; ouj katevlaben. 엔 아우토 조에 엔 카이 해 조에 엔 토 포스 톤 안드로폰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카이 헤스코티아 아우토 우 카텔라벤;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4,5절) '생명'에 해당하는 조에(zwh;)는 본문에서 정관사 없이 사용되어 주로 영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요3:15요일5:12).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임을 뜻하고 있다. 특히 엔(h\n있었으니)은 에이미(eijmiv이다)의 미완료 과거 3인칭 단수로 지속적으로 있어 왔음을 암시한다. 본문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주 안에 만물을 지으시고 유지하시고 계심을 암시해 준다. 또한 본문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본질을 '빛이라'라는 뜻의 엔 토 포스(h\n to; fw'")라는 말로 인간들과 연결 시키고 있다. 토 포스(to; fw'")는 중성 명사와 정관사의 결합형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에게 계속 빛으로 역사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한편 '깨닫지'에 해당하는 카텔라벤(katevlaben)은 '굳게 잡다'를 뜻하는 카랄람바노(katavlambanw)에서 파생된 제2부정 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서 '이해하다, 깨닫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사람들은 죄악된 세상 속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하였다는 것을 본문은 가리키고 있다.
2. 빛을 증거하러 온 자(6-8절) 1) 보내심을 받은 자 ( jEgevneto a[nqrwpo" ajpestalmevno" para; qeou', 에게네토 안드로포스 아페스탈메노스 파라데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6절) '보내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아페스탈메노스(ajpestalmevno")는 '파송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포스텔로(ajpostellw)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메시지나 어떤 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를 의미하나,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사용하던 용어이다(사6:8). 그런데 이말이 완료 수동형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보내심을 받아 사역하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났으나'에 해당하는 에게테노( jEgevneto)는 '발생하다'를 뜻하는 기노마이(givnomai)에서 파생된 제2부정 과거 중간태 직설법 3인칭 단수로서 요한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이신 그리스도와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리켜 주고 있다. 한편 '∼에게서'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para;)는 1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사용된 전치사 프로스(pro;"∼와 함게)와는 대조되고 있다. 즉 전자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 반면 후자는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곧 요한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단순한 사역자임을 말해 주고 있다.
2) 빛에 대한 증거 (ou|to" h\lqen eij" marturivan, i{na marturhvsh/ peri; tou' fwtov", i{na pavnte" pisteuvswsin di j aujtou'. 후토스 엘텐 에이스 말튀리안 히나 말튀레세 페리 투 포노스 하나 판테스 피스튜소신디 아우투;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위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7절)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적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먼저 '증거에 해당하는 말튀리안(marturivan)은 목적격 여성 단수로서 '보고들은 것을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즉 그는 신기원을 이루는 예수의 사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오직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제한적인 사역만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또한 요한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로고 하는 데 있는데, 이것은 본서가 쓰여진 목적이기도 하다.
3) 빛의 증거자 (oujk h\n ejkei'no" to; fw'", ajll j i{na marturhvsh/ peri; tou' fwtov". 우크 엔 에케이노스 토포스 알르 히나 말튀레세 페리 투 포토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8절)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다른 요한의 사역에 대한 본질적 특성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요한이 이러한 관계 정립을 한 이유는 세례 요한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요한이 죽은 후 그의 임무를 알지 못한 채 하나의 당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행19:2). 따라서 당시의 초대교회로서는 이들을 교회의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문제로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9-13절) 1) 빛이신 그리스도 ( \Hn to; fw'" to; ajlhqinovn, o} fwtivzei pavnta a[nqrwpon, ejrcovmenon eij" to;n kovsmon. ... kai; oJ kovsmo" aujto;n oujk e[gnw.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 호 포티제이 판타 안드로폰 에르코메논 에이스 톤 코스몬…카이 호 코스모스 아우톤 우크 에그노;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9,10절) '참빛…있었나니'에 해당하는 엔 토 포스 토알레디논( \Hn to; fw'" to; ajlhqinovn)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는 참빛이시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참'(ajlhqinovn알레디논)은 거짓에 반대되는 '참'(ajlhqhv"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이란 의미와 함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말해 주고 있다(J.Calvin). '있었나니'( \Hn엔)란 에이미(eijmiv이다)의 미완료 과거로서 줄곧 있어 왔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각 사람'에 해당하는 판타 안드로폰(pavnta a[nqrwpon)은 어떤 집단이나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각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결국 한 인간에게 비추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참빛은 구약에서와 같이 한 국가, 민족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 개개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요한은 '알지'에 해당하는 에그노(e[gnw)는 '알다'를 뜻하는 기노스코(ginovskw)에서 파생된 제2부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그런데 이 말은 후천적인 객관적 관찰로서 선천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을 나타내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타락으로 인한 무지의 결과임을 의미한다.
2) 빛을 영접하는 자 (eij" ta; i[dia ... tevkna qeou' genevsqai, toi'" pisteuvousin eij" to; o[noma aujtou', 에이스 타 이디아…데 엘라본 아우톤…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 토이스 피스튜우신 에이스 토오노마 아우투; 자기 땅에 오매…영접하는 자…그 이름을 믿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11,12절) '자기 땅'에 해당하는 타 이디아(ta; i[dia)는 자기 자신을 뜻하는 형용사 이디오스(i[dio")의 중성 복수형으로 '자기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곧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거처이며, 궁극적으로 세상의 소유권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의미해 주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을 뜻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tevkna qeou' genevsqai)에서 '되는'에 해당하는 게네스다이(genevsqai)는 '되다'를 뜻하는 기노마이(givnevsqai)의 제2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 그분의 영적 자녀가 됨을 암시한다(롬8:15-17,29히2:11). 즉 구원으로 인한 신분의 변화가 영원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하나님으로 난 자 (oi} oujk ejx aiJmavtwn oujde; ejk qelhvmato" sarko;" oujde; ejk qelhvmato" ajndro;" 호이 우크 엑스 하이마톤 우데 에크 델레마노스 살코스 우데 에크델레마토스 안드로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13절)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를 육적인 세대와 대조시켜서 이들이 영적인 자녀임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요한은 부정을 나타내는 우크 우데(oujkoujde;)를 사용하여 영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 세 가지 요인, 즉 혈통, 육정, 사람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육정(qelhvmato" sarko;"델레마토스 살코스)에서 텔레마토스는 델레마(qelhvma경향, 뜻기뻐하는 것)의 소유격이며, 살코스는 죄의 본성을 지닌 '육신'의 의미를 지닌 사륵스(savrx)의 소유격으로, 직역하면 '육신의 성향(기뻐하는 것)'을 뜻한다. 곧 1차적으로 성욕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성령의 뜻에 거슬리는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본문은 예수에 대한 서언적인 증언으로서 (Morgan, G.R.Beasley-Murray), 영원한 신적인 말씀에 대한 우주론적 서술과 세례 요한의 증거와 빛의 도래를 잘 묘사하고 있다(C.K.Barrett).
1.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1-5절) 1절의 '태초에'( jEn ajrch'엔 아르케)는 예수 안에서 인간이 시공을 초월한 존재와의 상면함을 의미하고 있다(R.Bultmann). 특히 본문에서 '태초'란 창1:1의 시공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보다 더 깊은 뜻으로서 영원 전의 뜻을 함축한다. 한편 '말씀' (oJ lovgo"호 로고스)이란 근본 '모음, 산출, 이성'등의 뜻을 갖으나 요한에 의해서 인격화되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은 '로고스'란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사도 바울에 의해서 묘사되어지기도 한다(골1:16). 그리고 구약에서는 잠8:22-33에 '지혜'라는 표현으로 언급되었다. 한편 철학자 필로는 로고스의 선재성을 가르치지 않았다(J.Bernord). 2절의 반복적인 언급은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① 다름아닌 바로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음, ② 바로 그가 모든 시대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심, ③하나님이신 말씀이 하나님을 추종하는 역설적인 장면 등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G.R.Beasley-Murray). '그가'(oJuto"후토스)는 요한이 강조하기 위하여 즐겨 사용한 말이며, 이를 통해서 셈어적 배경이 들어 있음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다(Burney, Black). 3절의 '만물이…지은 바 되었으니'는 2세기부터 창조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Raymond, E.Brown), 폴라드(Pollard)는 이 문장을 넓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구원사를 포함한 영원한 행위로 묘사하였다. 4절의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에서 생명이 라는 단어와 빛이라는 단어는 복음서에서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가진 명사로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서 생명(요11:25)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강조하였다(C.K.Barret). 생명과 빛은 모두 묵시 문학적으로 함축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생명이 쿰란 종팡의 어휘들에서 특별히 자주 묘사된 것은 아니다(H.Braun). 5절에 대한 요한의 사상은 예수를 세상 속에 나타난 빛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두움도 이에 상응하는 윤리적 성격을 띠게 된다(S.Aalen).
2. 세례 요한의 증언(6-8절) 6절은 서언의 두 번째 부분의 시작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위임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는 모세(출3:10-15)나 예언자들(사6:8), 예수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헬레니즘적인 철학자도 마찬가지였다(C.K.Barrett). 7,8절의 '모든 사람'의 범위는 3절의 모든 만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영역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나, 혹자는 예수보다는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로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은 세례자라기보다는 증거인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Raymond, E.Brown).
3.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세상의 반응(9-13절) 9절의 '세상에 와서'라는 구문이 사람과 빛 중 무엇을 수식하는 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① '사람'을 수식하면 '참빛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에게 빛을 준다'고 해석되는데, 초기 역본들(OL, Vulgate)과 헬라 교부들(Eusebius, Cyril of Alexandria, Chrisostom)그리고 현대 신학자(Burney, Schlatter, Bultmann, Wikenhauser)와 랍비 문서의 지지를 받고 있다. ② 이에 반하여 '빛'을 수식하면 '참빛이…세상에 왔다'고 해석되는데, 라틴 교부들(Tertullian)과 현대 주석가들(Lagrange, Braun, Duport, Macgregor, Boismard)등이 지지한다. 11절의 '자기 땅에 오매'는 예수가 자신의 소유지인 그의 고향(C.K.Barrett)으로 왔음을 암시하며, 로고스가 자신의 자연적 대응자인 피조물 세계로 왔음을 의미한다(Platon). 특히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그 율법은 그곳에서 거할 적합한 장소를 발견했던 것이다(J.Jervell).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신앙으로 받아 드릴 수 있는 것이다(Schweizer). 13절의 '혈통적으로나'(ejx ajimavtw'n엑스하이마톤)는 '하나님으로부터'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조로 쓰였다(C.K.Barre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태초에 계산 말씀(1-5절) 1절의 '태초에'는 복음의 말씀의 시작뿐만 아니라 또한 창조의 시작을 나타내어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말씀은 이미 있었음을 나타낸다(W.E.,Hull). 이것은 옛 창조의 기사와 새로운 창조 기사를 소개한다(Wilson). 이들 두창조의 사역에서 대행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F.F.Bruce). 말못하는 우상과는 다르게(왕상18:26-29시1153-8;합2:18,19고전12:2), 하나님은 항상 힘 있게 말씀해 오셨다(W.E.Hull). 구약에서 '말씀'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특별히 창조, 계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F.F.Bruce). 2절의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는 말씀과 하나님 사이의 적절한 구별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둘 사이의 동등성과(W.E.Hull)그들 사이에 인격적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F.F.Bruce). 3절의 두 부분은 첫 번째는 긍정적으로(∼되었으니), 두 번째는 부정적으로(∼없이는) 말한다. 이 이중 확언은 창1장의 가르침을 요약해서 말하는 것이다(F.F.Bruce). '된 것이 없느니라'는 만물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것의 존재도 하나님의 창조의 표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씀의 활동으로서 창조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대화하시려는 하나님의 노력의 한 부분이다(W.E.Hull). 4절의 정확한 해석은 대단히 어렵다. 창조의 대행자로서 역할을 하신 말씀은 '생명'을 주는 자였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 생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는 빛이 되었다(8:12;12:46, W.E.Hull). 5절과 창1:2,3사이에는 분명한 병행이 있다. 하나님께서 빛이 어두움에 비치도록 하신 것처럼, 사람들의 빛인 말씀이 실수와 잘못의 어둠에 비춘다(Wilson).
2. 보내심을 받은 자 요한(6-8절) 6절에서 요한과 예수님과는 놀라운 대조를 보인다. 예수님은 말씀인 반면에 요한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prov"프로스) 친밀한 교제를 즐겼지만 요한은 그의 편'에서'(parav파라) 보냄을 받았다. 예수님은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있었다' (h엔). 이에 반하여 요한은 적당한 때의 한 시점에서 '존재하게'(ejgevneto에게네토)되었다(W.E.Hull). 7절에서 요한의 증거의 완전한 설명은 19-34절 이하와 그 후에 요3:27-30:5:33에 나타난다. 증거의 주제는 복음서 전체를 관통한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진리의 증거는 다중적이다. 다중의 증거의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려 함이다. 8절에서 요한은 자신이 '이 빛'(tov fw'"토포스)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빛'이란 정관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직역하면 '그 빛'으로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에 '관하여'(periv폐리) 증거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3.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빛(9-13절) 9절의 '참빛'은 모든 사람 위에 비추는 우주적인 빛으로 이제는 특별한 한 사람이 되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도 항상 존재했던 그 빛이 이 역사의 한정된 시점에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것이다(.W.E.Hull). 10절의 '계셨으며'는 온 우주를 창조했던 그 대행자가 이제 지구 공간의 특정 지점을 점유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때 만들어진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 그는 '세상 안에서' 살았다(W.E.Hull). 11절에서 사람들은 빛의 오심을 거절하는데, 그것은 그가 만든 '세상'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모두에게 해당된다. 자연적 이성의 빛으로 살아가는 세상도, 신의 계시의 빛으로 살아가는 종교도, 세상의 참빛이 인간으로 구체화되었을 때 모두는 영접치 않았다(W.E.Hull). 13절은 성도가 중생하는 형태를 보인 것이다. 유전이나 인간적 노력을 통한 것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이다(W.E.Hull).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적 생명에 의해 새로이 그분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요3:1-6히2:11).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요한복음의 로고스
요한의 서문을 읽을 때 우리는 요한의 서언의 로고스를 어떻게 이해하며, 그 내용이 무엇이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가 로고스의 이해를 문제시할 때, 요한복음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주시해야 한다. 이런 경우 두 개의 극단적인 견해가 있어 왔다. 즉 어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오로지 팔레스틴적이라고 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헬라적 종교 철학의 예로써 보려고 한다.
1. 헬라적 영향 볼트만(R.Bultmann)은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의 구속적 신화(Gnostic Redeemermyth)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도드(C.H.Dodd)는 요한복음을 필로(Philo)가 대표하는 헬레니즘의 이원론에 비추어 설명한다.
2. 유대주의적 영향 브라운(R.E.Brown)은 "신약성서 시대에 이미 헬라적 요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서와 유대의 사상적 근원을 더욱 강조한다. 그러면서 예수가 지금까지 왔던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것같이, 요한의 사상도 모든 것을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테니(Merrill C,Tenney)도 요한이 예수의 부활을 근거로 하여 이교도의 개념을 넘어서 새로운 철학을 시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 로고스의 의미 요한의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문제는 쉽지가 않다. 클라크(Gordon H.Clark)는 요한 서언의 로고스(요1:1,14)는 태초에 말씀, 도리, 가르침, 마음, 하나님의 지혜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 바로 자신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셨고 우리가 그의 은혜와 진리의 영광을 본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잠8:22-31).
4. 로고스의 내용과 결단 요한의 로고스의 내용은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으며, 인간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 오실 때 빛과 진리와 계시로서 왔다는 것이다. 이제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 자체인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요한은 세례 요한의 증거(고백)과 자신의 기록 목적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함이며,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한다.
혈통의 개념(1:1-13) ◈ 세계배경 문화사 ◈
혈통(血統)은 가계(家系)의 계승(繼承)을 뜻하고, 부계 사회(父系社會)에서 가계의 계승은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혈통은 곧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부계 사회를 형성한 이래 아들들은 가계의 계승자로서 특별한 지위를 누려 왔다. 그것이 곧 남성의 지위가 여성보다 높아진 근본 이유이다.
근동/이집트 : 이집트에서 아들이 생긴다는 것은 노동력이 더 늘어난다는 의미 외에도, 가족을 부양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였다. 또 아들은 가장인 아버지의 뒤를 계승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가정 내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자격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양/로마 :로마 사람들은 특히 혈연 관계를 중요시했다. 공화정 초기에는 가족의 장이 법적으로 가족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 중에 누구라도 벌로써 죽일 수가 있었다. 이 권한이 실제로 행사되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시대가 흐른 다음에도 역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남편의 이름은 가계(家系)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노멘' 즉 미들 네임(middle name)으로 이것은 씨족 또는 가문의 유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스 :그리스안에서는 7세가 되면 교사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는 교사에게 아이를 때리는 권한까지 주었다. 학교 교육은 읽기, 쓰기, 셈하기, 시, 노래 및 체육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모든 교육은 그들이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혜택이었다. 이렇게 교육받은 아들들은 성인이 되면 국가에 봉사함은 물론이고 한 가정을 이어갈 혈통의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였다.
동양/한국 : 한국 사회는 아버지 중심의 부계사회(父系社會)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지계 가족은 아버지가 가장이 되고, 아들은 그 후계자가 되었다. 한국의 가족 구조는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하는 수직선을 중심으로 상하 관계를 형성하였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출생했다는 보은관계(報恩關係)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절대적 상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족 구조는 아버지와 아들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적 수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아들은 성장할수록 아들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즉 집안을 번영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장차 가문의 계승을 위해 그리고 집안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특히 집안을 계승할 의무가 장남에게 주어졌으므로 형과 동생과의 관계도 상하 관계를 이루었다. 상속 제도(相續制度)는 아들의 가족 안에서의 위치, 그 중에서도 장남의 위치가 어떠했나를 잘 보여 준다, 삼국 시대 이전 부여(扶餘)의 상속제도는 원칙적으로 장자 상속(長子相續)이었고, 제사 상속과 재산 상속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삼국 시대에 들어와 고구려에서의 왕위계승은 적자 상속(嫡子相續)이 원칙이었고, 신라에서도 장자에 의한 상속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렇듯 혈통이 아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남아선호 사상(男兒選好思想)이 일찍부터 나타났다. 아들이 없다는 것은 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교에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여성의 잘못으로 이혼 사유가 되는 7가지 항목 중에 무자(無子), 즉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다. 불임여성들은 가계를 이을 수 없다는 불안감과 조상에 대한 죄책감으로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계보를 통해 사람 또는 한 가문의 흐름을 알 수 있으며(대상1:1-28), 예수그리스도의 혈통을 알 수 있고(마1:1-17눅3:23-28), 성경에 나타나 여러 선지자들의 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계보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오직 믿음과 회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이 있을 뿐이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빛을 영접하지 않은 백성(1:1-13)
말씀이시며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이 빛에 대하여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으며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세상이 죄악과 죽음의 어두움 속에 깊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1. 빛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 사도 요한은 말씀으로 선재하셨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을 비췄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여기서 어두움은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들을 가리킨다. 이 어두움은 죄악 세상이고, 죽음의 세계이며, 이는 사단이 지배하는 왕국이다. 따라서 사단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깨닫지 못하도록 무지와 불신으로 역사한다.
2. 빛을 알지 못하는 세상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그리스도가 세상 속에 오시자 그를 알지 못했다. 세상은 다만 그를 목수의 아들(막6:3)이나 미친 자(막3:21,22)로 알았으며,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사렛 이단(행24:5)으로 알았다. 심지어 그 제자들까지도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눅7:16), 정치적 메시야(막10:37행1:6) 쯤으로 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이해는 그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3. 빛을 영접하지 않은 백성 참빛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땅인 유대 땅에 태어나셨으나 유대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그들은 사단의 도구로 그런 일들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1:1-13)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
1. 말씀으로 선재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때 세상은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세상은 이 모든 것들을 잃고 영적 어두움에 싸여 버렸다.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가들을 보내 주셨지만 이 어두운 세상이 그 말씀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2. 빛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직접 이 세상에 찾아오셨다. 죽음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기 위하여 빛으로 오셨다(마5:14). 빛은 생명이고 어두움은 죽음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서 죄와 죽음의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오는 자는 다 생명을 얻는다(요10:1020-31).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요3:19,20).
3.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자녀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하셨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복음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오신 것이고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간 지대이다. 이제는 인간들이 그 앞에 찾아가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