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페팽 저자(글) · 이세진 번역
푸른숲 · 2024년 10월 21일
우리가 지나온 인생이 “진짜 삶”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단 한 줄로 축약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아가라’가 아닐까. 이렇게만 하면 당신도 성공할 거라 부르짖는 온갖 자기계발서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을 이룬 누군가의 인터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어디 말처럼 쉽게 과거를 뒤로한 채 전진할 수 있을까. 어제의 추억, 자라온 방식, 우리를 변화시킨 기쁨 혹은 시련… 우리의 과거는 결코 잊힐 수 없는데.
《삶은 어제가 있어 빛난다》는 경주마처럼 미래를 향해 내달리는 우리에게 잠시 숨을 고르고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볼 것을 제안하는 쉼표와 같은 책이다. 프랑스인들이 사랑하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샤를 페팽은 철학, 문학, 예술 등을 경유해 길어 올린 사유와 신경과학에 기반한 과학적 탐구를 엮어, 한 인간을 형성하는 ‘과거’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펼쳐 보인다.
행복은 과거를 떨치고 나아가는 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함께 현재를 잘 사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따금 떠오를 때마다 쓰린 과거의 기억도 우리가 그걸 포용하고 재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오늘의 기쁨을 더욱 진하게 누리게 하는 감미료가 될 수 있다!
고대의 지혜에서부터 프루스트, 베르그송, 니체, 프로이트와 같은 대가들의 인용은 물론 데이비드 보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등 대중문화 아이콘들의 사례까지 풍부하게 제시하여 과거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이 빛나는 여정은 이때껏 살아온 삶을 반추하고, 앞으로의 삶 또한 잘 살고 싶은 당신에게 선물 같은 경험이 될 것이다.
어떻게 과거를 미래로 나아갈 힘으로 삼을 것인가?
지나온 삶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한 철학적 사유
“노화는 얼굴보다 영혼에 더 많은 주름을 새긴다. 늙어가면서 쉰내와 곰팡내를 풍기지 않는 영혼은 없거니와 있더라도 드물다.” 몽테뉴는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가? ‘그땐 그랬지…’ 운운하며 걸핏하면 왕년에 자기가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늘어놓지 않는가? 실패했던 기억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회한에 젖어 있진 않은가? 저자는 많은 이들이 아름답게 늙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과거와 ‘함께’ 살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은 어제가 있어 빛난다》는 통상 ‘과거’를 떨쳐내고 싶은 괴로운 기억이나 꽃다운 시절로만 머문 어제로 바라보곤 하는 우리의 시야를 전환하고, 삶에 자양이 될 과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 〈과거의 현존들〉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어떻게 분류되는지, 분류된 세부적 ‘기억들’이 어떠한 작용을 거쳐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와 함께 기억의 끈질길 생명력에 대해 다룬다. 신경과학적으로 기억은 일화기억(체험한 일들에 대한 기억), 의미기억(말과 관념에 대한 기억), 절차기억(기술적 능력, 습관에 관한 기억), 작업기억(당장 필요한 정보를 짧은 순간에 붙잡아놓는 기억), 감각기억(환경에서 비롯된 지각을 찰나의 순간에 저장하는 기억) 다섯 가지로 분류되는데, 이 다섯 가지 기억이 합쳐져서 영속적으로 작용한다. 신경과학이 꽃피우기도 전인 20세기 초에 이미 철학자 베르그송은 추억이 우리 안에 “존속된다”고 말한 바 있다. 현대에 들어 일화기억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 실제로 밝혀지기도 했다. 심지어 ‘잊어버린’ 기억도 뇌 속 어딘가에 남아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한데, 우리가 과거의 어떤 일화를 현재에 다시 소환하고, 다시 해석하여 재구성함으로써 과거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도모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일화기억과 의미기억 간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기억은 하드 디스크에 차곡차곡 축적되는 데이터라기보다는 언제고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악보에 더 가깝다. 기억이 그토록 질기다 해도, 쓰라린 기억투성이라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우리에겐 기억을 재해석할 놀라운 능력이 있기에, 이 책에 소개된 옛 선인들의 지혜와 ‘기억 재강화’와 같은 심리 요법을 활용한다면 더 이상 과거를 족쇄처럼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2부 〈과거와 마주하기〉는 순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까닭과 지금의 나로 살 수 있는 이유를 과거에서 찾고, 이런 과거를 외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담고 있다. 포도주 한 잔에 깃든 섬세한 풍미를 발견하고, 난해하다고 여겼던 록 음악을 이제는 즐겨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감각의 취향을 발달시킨 과거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저 유명한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냄새나 맛 등 어떤 감각의 순간만으로도 그 감각에 결부된 옛 감정이 되살아나 벅찬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과거의 특정한 감정과 진실로 다시금 연결되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내맡기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다. 가령 퇴근 후엔 스마트폰 알림은 꺼두고, 휴일엔 다음 주 회의 자료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려놓는다. 앞일 생각에 불안하다면 현재에도 과거에도 충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앞서 말했듯 과거는 우리 안에 “존속된다.” 잊으려고 술을 마시거나 일에 몰두해도, ‘절대로 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해도 과거를 ‘완전하게’ 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과거를 외면하고 전진할 수 있지만 그 길은 금세 가파른 오르막이 될 것이다.”(105쪽)
책의 대단원인 3부 〈과거와 나아가기〉는 과거를 버팀목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용서, 애도와 같은 적절한 망각의 기술도 포함된다. 저자는 기억과 추억에 관해 유례없이 새로운 철학을 수립한 베르그송과 자신의 계급 및 출신 문화를 종내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창조적으로 수용한 디디에 에리봉을 주로 인용하면서 프루스트, 보르헤스, 프로이트, 아렌트 등 문학과 철학의 대가들의 레퍼런스를 풍성하게 교차하는 한편, 자신의 내밀한 경험담을 엮어낸다. 저자는 절친한 친구 필리프의 죽음과 그 이후의 자기 삶을 통해 진정한 애도가 남아 있는 자들에게 선사하는 미덕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진정한 애도란 죽음이 끝이 아니란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고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압도적인 슬픔이나 고인과의 추억에 매몰되진 않되, 죽음 이후에도 고인과 공명하는 관계를 부단히 느끼며 또 한 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뒤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과거를 끌어안고 행복으로 나아가는 법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때론 우리를 힘겹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힘이 된다. 어린 시절의 상처나 실패의 흔적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건 아니다. “과거에는 행복했던 시간, 충만감이나 흥분되는 발견의 순간, 관조의 기쁨도 가득하다.”(190쪽) 그러니 우리는 그저 “그 순간들을 불러내고 다시 연결되어” 현재를 살면 된다. 저자는 하르트무트 로자의 말을 빌려, 아름다운 기억을 다시 불러낼 “공명”의 순간을 일상에서 자주 만들어내자고 권유한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둘러보는 동안, 예전에 다녀온 다른 미술관의 기억이라든가 각별히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떠오른 대로 생각하며 하염없이 추억에 젖어볼 수 있다. 걷다가 우연히 만난 기이한 형태의 구름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에는 보들레르의 시구절에 나왔던 “신기한 구름”이라는 시어를, 그 시를 처음 알려준 문학 선생님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슬며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과거를 불러오는 데엔 아주 작은 실천만으로도 족하다.
아직도 갈 길이 창창한데, 당신은 남은 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오만한 ‘꼰대’로 남고 싶지 않다면, 다시 못 올 지난날을 그리워하고만 싶지 않다면 과거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보라. 과거를 끌어안고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앞으로의 삶은 당신 안에 깃든 기억들의 힘으로 더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결정, 모든 경로는 현실이 될 수도 있었을 수많은 가능성을 물리친다. 무엇이 됐을지 결코 알 수 없을 잠재력들을 뒤로하고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약속들을 그냥 내팽개친 게 아니다. 그것들은 섬세하게 세공된 무늬처럼 지금의 우리 안에 새겨져 살아 있다.”(2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