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24-35)> 품위 있는 죽음(Well-dying)
<성서와 문화(Bible & Culture)> 2024년 여름호 14-15쪽에 실린 글이다. 계간지 <성서와 문화>는 2000년에 창간되었으며, 성서(聖書)와 문화(文化)의 상관관계를 심화 확장시키기 위한 의사소통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이계준 목사(감리교 원로목사, 연세대 명예교수)이다. 필자는 이계준 목사님(전 연세대학교회 담임목사)의 요청으로 가끔 글을 올리고 있다.
품위 있는 죽음(Well-dying)
박명윤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 과정을 거쳐 저 세상으로 떠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인 천상병(千祥炳, 1930-1993)의 시 <귀천(歸天)>의 마지막 구절이다. 삶이 한 편의 시(詩)라면, 마지막 구절에서 맥락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웰빙(well-being)을 추구하고, 웰다잉(well-dying)을 소망한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웰다잉에 관한 영화가 상영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2월 7일 개봉한 <소풍>은 80대를 주인공으로 한 노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담은 영화로 친숙한 원로배우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등이 출연한다.
영화 <소풍>은 주인공인 은심(나문희)은 최근 돌아가신 엄마를 꿈속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온 오랜 친구이자 사돈 지간인 금순(김영옥)이가 은심에게 함께 고향 남해로 가자고 제안한다. 둘은 함께 여행을 떠나 고향에서 은심은 우연히 예전에 짝사랑하던 태호(박근형)를 만나게 된다.
은심은 잊고 지내던 추억들을 하나둘씩 회상하게 된다. 이후 은심과 금순, 그리고 태호는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나누며 소중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은심과 태호는 서로에게 “다음에 다시 태어나도 네 친구 할 거야”라는” 말을 하며 우정을 나누게 된다. 오랜 친구들이 60년 만에 고향 남해로 여행을 떠나 16살 시절 추억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영화 <소풍>이 제44회 하와이 국제영화제의 스프링 쇼케이스(showcase)에 상영된다. 하와이 국제영화제 측은 “<소풍>은 우정과 가족 그리고 존엄사(尊嚴死)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로 세대를 아울러 깊은 울림을 주어 한국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며 “모든 나이대의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일본에서는 <소풍>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플랜 75(Plan 75)>는 75세를 넘긴 노인의 안락사가 제도화된 초고령 사회의 디스토피아(dystopia, 유토피아의 반대말)를 그렸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78세 미치는 생계수단을 잃고, 친구의 고독사(孤獨死)를 목격하고는 안락사를 신청한다. 사실상 강제된 죽음의 값은 준비금 명목의 1010만 엔이 전부이다.
<플랜 75> 영화 초반, 노인들을 무차별 살상한 청년은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현재 일본 사회가 맞닥뜨린 초고령 사회의 현실과 고민이 녹아 있어 섬뜩하게 느껴진다.
87세 배우 김영옥 씨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소풍>이 존엄사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100세 시대’라지만 건강을 잃고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없을 때의 불행은 대처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2월 5일에 93세의 드리스 판 아흐트(Dries van Agt) 전 네덜란드 총리와 부인 외제니 여사의 동반 안락사(安樂死) 소식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들은 자살을 금기시하는 가톨릭 신자였는데도 “너무 아팠다.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며 동반 안락사를 택하여 하늘나라로 떠났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허락한 국가다. 2022년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택한 사람은 8720명이며, 이 가운데 58명이 부부동반 안락사를 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미국 일부 주(州)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네덜란드는 환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치료의 가망이 없고 오랫동안 죽음에 대한 소망을 밝히는 등의 조건 아래에서 안락사를 실시하고 있다. 외국인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에서 마지막을 맞겠다며 관련 단체에 가입한 한국인은 300여 명이며, 이미 10여 명이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학병원 윤영호 교수팀이 2021년 3-4월에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락사·의사조력자살 합법화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매우 동의한다(61.9%), 동의한다(14.4%), 동의하지 않는다(21.7%), 매우 동의하지 않는다(2%)로 나타났다.
안락사·조력존엄사·존엄사의 주요 차이는 ‘안락사(安樂死)’는 의료진이 환자에게 사망에 이르도록 약물 등을 투약하는 것이며, ‘조력존엄사(의사조력자살)’란 의료진에게 약물 처방을 안내받은 후 환자 스스로 결정한다. 존엄사(尊嚴死)란 환자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중단하는 것이다.
2018년 2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 외래어 표기: well dying law)이 시행되고 만 6년이 지난 현재, 전국 200만여 명이 ’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에게만 허용된 연명의료 중단 대상을 확대하라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미리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지 않았거나 동의할 가족이 없는 1인 가구와 무연고자는 뜻대로 죽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지적이다.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대비해야 할 것은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 ▲죽음에 대한 경제적 준비, ▲임종 돌봄 대비, ▲유품 정리, ▲유산 상속, ▲임종 및 장례 절차 확정 등이다. 죽음을 자연 변화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고 편한 마을 가지고, 본인 스스로 죽음에 대한 입장을 세워 대비해야 한다. 임종(臨終)을 누구와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를 미리 결정해 놓은 것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유언서(遺言書)를 작성한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삶은 허락했지만 죽음을 피할 능력은 주지 않았으므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관문을 넘어야 한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살아온 여정은 다르지만 종국에는 누구나 절대 평등의 순간인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사람의 바람은 인생의 마지막을 품위 있게 맞이했으면 하는 것이다.
인간은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空手來), 빈손으로 저 세상으로 가는 것(空手去)이 인생이다. 이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나의 삶에 무엇을 담으며 살까를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품위 있는 삶이 곧 품위 있는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진> (1) <성서와 문화> 2024년 여름호 표지, (2) 품위 있는 죽음(14-15쪽)
靑松 朴明潤(서울대 保健學博士會 고문, AsiaN 논설위원), Facebook, 8 June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