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빛, 사라지지 않는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깊은 호수를 떠올렸다. 긴 속눈썹 아래 검게 빛나는 눈동자에 담겨 있던 온기와 그윽함, 신뢰, 침묵은 단숨에 나를 매료시켰다. 그 눈은 마치 "나는 너를 알아'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 눈빛으로 그의 성품과 감성이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느꼈다. 햇살 아래 실크처럼 반짝이며 바람에 흩날리는 갈기에서 자유를 떠올렸고, 달릴 때의 근육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엉덩이의 탄력은 순간의 힘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완벽한 리듬을 만들었다. 그 순간 말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시처럼 느껴졌다.
말을 좋아하다 보니 승마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도 기회가 될 때마다 승마 체험을 즐기곤 했다. 오래전 평창 숲길에서 말을 타고 천천히 달리던 순간에는 중세 유럽의 공주가 된 듯했고, 태안 바닷가에서 말을 탄 날의 설렘은 내 생의 영화 같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 승마의 기본은 명령이 아닌 호흡이다. 기수가 몸을 조금만 기울여도 말은 그것을 읽어낸다. 손끝, 허벅지의 압박, 호흡의 길이는 하나의 언어가 되고, 속도가 붙으면 내 심장은 말의 심장과 함께 뛴다. 그 순간 사람과 말의 경계는 사라지고 두 존재가 하나의 생명처럼 리듬을 공유한다. 이것이 말과의 교감, 이해받는 생명으로서의 감동
일 것이다.
나는 그 말들을 잊을 수 없다. 수년 전 무심코 본 TV 화면은 우리나라 어느 지방 소도시의 인적 없는 벌판의 농가였다. 이미 몇몇 말들의 사체는 바닥에 뒹굴었고 다른 말들은 벽을 긁거나 몸부림치며 그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경마장에서 경주용으로 제 역할을 다한 병든 말들을 방치해 죽음으로 이끄는 그 광경은 나치의 수용소를 방불케 할 만큼 끔찍했다. 누군가 화면을 돌렸기에 더 이상 그 프로그램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그 사건의 진행과 경과를 알아보고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났는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온 생애가 소모품이던 말들의 고통이 내 몸 어딘가에 잠겨 있다가 최근에 수면 위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사 레슈코의 사진집 <사로잡는 얼굴들: 마침내 나이 든 자유를 얻은 생추어리 동물들의 초상>을 펼치는 순간, 낯설고도 고독한 눈빛들에서 그 말들을 떠올렸다. 늙은 동물들의 표정에 마음이 마구 흔들렸다. 이들은 대량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 속에서 '상품'으로 존재하다가, 기적적으로 생추어리(Sanctuaries, 동물보호시설) 에 구조되어 남은 생을 온전히 누리는 농장 동물들이다. 보통의 돼지가 6개월, 닭이 30일 만에 도살되는 현실에서, 이들의 주름진 얼굴, 상처 입은 눈빛, 평온히 잠든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생존의 기록이고, 우리가 외면해 온 '생명의 시간'에 대한 웅변이었다.
사진 속 늙은 수닭의 빠진 깃털과 닳아버린 발,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팬 소의 잔잔한 눈매를 바라보면, 그들 역시 '고기'나 '가축'이라는 효용의 이름 뒤에 숨겨진 하나의 온전한 생명임을 깨닫는다. 그들의 노년은 비로소 나이들 자유를 얻은 죽음의 시간이다. 이들의 초상은, 동물의 삶을 그저 인간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해 온 문명의 폭력과 야만을 돌아보게 한다.
스물일곱 살의 교배종 마리 클레어의 슬픈 눈에 마음이 저린다, 캐나다의 농장에서 구조되었는데, 그곳은 임신한 암말의 소변을 채취해 호르몬 대체 약물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농장에서는 암말을 소변 채취용 마구로 묶은 채 좁은 우리에 가두고 반복해서 임신시겼고 소변을 농축시키기 위해 말을 탈수 상태로 만든다고 했다. 쓰임이 다한 말들은 도축되거나 경매장으로 가는 운명에 처한다
이 순간,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 일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광장에서. 마부의 거친 채찍질에도 꼼짝하지 않던 늙은 말의 목을 껴안고 니체가 울부짓다가 결국 정신착란에 빠졌다는 이야기. 이는 자연과 동물을 지배해 온 인간 문명의 광기에 대한 철학자의 처절한 절규이자, 자신을 도구화하는 폭력에 침묵으로 저항하는 생명체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니체가 껴안은 말은, 어쩌면 <사로잡는 얼굴들> 속 동물들의 원형일지 모른다. 존재의 이유를 오직 '사용됨' 에서만 찾도록 강요받았던 생명. 니체의 눈물은. 인간이 가해온 소외와 폭력 앞에서 가면을 벗은 순수한 인간성 자체였을 것이다.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그의 마지막 이성적 말은 동물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간성을 되찾고자 했던 몸부림으로 읽힌다
생추어리 동물들의 노년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니체가 토리노의 말에게 달려갔던 행동의 현대적 재연일지 모른다. 이 늙은 생명들의 눈을 통해 그들의 고유한 생의 역사를 읽어내고, 그들도 마땅히 누려야 할 '나이들 자유', 존엄하게 죽어갈 권리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다움의 행복은, 타자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모든 생명과의 공존을 모색할 때 비로소 꽃필 것이다. <사로잡는 얼굴들>의 동물들이 마침내 얻은 평온한 노년의 모습처럼. 모든 생명이 늙어갈 자유를 얻을 때, 인간의 영혼 또한 자유로워지리라.
내 젊은 날의 추억,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던 그 말의 깊고 꿈같던 눈빛을 잊지 못한다. 햇살 속에서 반짝이던 검은 호수 같은 눈, 나를 향해 잠시 머물던 그 따뜻한 시선. 그 눈빛은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 문득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스칠 때, 나는 그 말이 내 곁으로 달려오는 듯한 환영을 본다 생명을 향한 연민이란, 어쩌면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 눈빛 하나를 마음에 품는 일인지도 모른다
박미경 rose4555@hanmail.net
한국수필가협회 운영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대한민
국예술문화상 수상 <내 마음에 라라가 있다고><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 작가17>외
눈비가 아득한 날,알 수 없는 오해로 헤어진 30년 지기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고싶다. 다 뛰어넘자. 내 마음은그래" 우리는 곧 만난다. 기쁘다. 올해 제일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