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위경(提謂經)이라고 하는 경(經)은
인천(人天)의 일을 설(說)했으며,
아함경(阿含經)이라고
하는 경(經)은
이승(二乘)의 일을 설(說)하셨고,
화엄경(華嚴經)이라고
하는 경(經)은
보살(菩薩)의 일이니라.
방등(方等)·반야경(般若經) 등(等)은
혹은 아함경(阿含經)·제위경(提謂經)과 흡사하고,
혹은 화엄경(華嚴經)과도 흡사하니라.
이러한 경(經)들은
말대(末代)의 범부(凡夫)가 이를 읽으면,
부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행자(行者)는 생각하지만,
위세(委細)하게 이를 논(論)한다면,
자기의 마음을 읽는 것이니라.
자기의 마음은
원래(元來)부터 어리석은 마음이기 때문에
아무 대견한 일도 없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함은 수자의(隨自意)라고 하여
부처의 마음을 설(說)하셨으며,
부처의 마음은
좋은 마음이기 때문에·
가령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 경(經)을 읽으시면
이익(利益)이 헤아릴 수 없느니라.
삼 밭의 쑥·통(筒) 속의 뱀처럼,
선(善)한 사람과
친(親)한 자(者)는
이렇다할 일이 없어도,
마음도 행동(行動)도
언사(言辭)도
올바르게 되는 것이니라.
법화경(法華經)도 이와 같아서,
이렇다할 일이 없어도
이 경(經)을 믿는 사람을
부처는 좋은 자(者)라고 생각하시느라.
이 법화경(法華經)에 있어서
또한 기(機)에 의(依)하여·
시(時)에 의(依)하여·
나라에 의(依)하여·
넓히는 사람에 의(依)하여·
여러가지로 다르다는 것을
등각(等覺)의 보살(菩薩)까지도
이 관계를 알지 못하신다고 보이는데,
하물며
말대(末代)의 범부(凡夫)가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중생신심어서(衆生身心御書)
1590쪽~1591쪽
젊은날의 일기
1954년 7월 17일 (토) 흐림 때때로 맑음 –26세-
조난(城南), 가나가와(神奈川) 방면으로 출장.
한여름인데도 냉해(冷害)가 계속되고 있다.
쓸쓸하고 슬픈 예감이 되는 해이다.
쌀값이 765엔이라니, 일본 경제의 장래가 걱정된다.
정치가여, 지도자들이여, “정신 차려라!”라고 외치고 싶다.
명문명리를 던져버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민중을 위해 ‘신명을 바쳐라!’라고 외치고 싶다.
밤, 선생님 댁에 신례를 무릅쓰고 찾아뵙다.
여러 가지 지도가 있었다.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어쩔 수 없다. 내 잘못이다. 질타 받아도 꾸중 들어도 끝까지 따르며 성장해 가는 것이 제자다. 건방져서는 결코 안 된다.
힘도 기초도 갖고 있지 않는 자기 자신이 위대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증상만이다.
생애 ― 정진, 생애 ― 공부.
생애 ― 노력, 생애 ― 건설.
#
1955년 7월 17일 (일) 쾌청 –27세-
이사하고 벌써 한 달 반이 지났다.
오늘은 오랜만에 휴식. 점심에는 뜰에 물을 뿌렸다.
도쿠토미 로카(도쿠토미 로카)의 <자연과 인생>을 떠올렸다.
Y군, K군 등 집에 왔다. 함께 식사.
느긋하게 신문을 읽었다.
사회란, 복잡함을 나타내는 대명사인가.
세계란, 동란(動亂)을 의미하는 형용사인가.
밤, I씨 댁에 지도차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S씨 댁에 백중날 인사.
등이 아파서 괴롭다.
12시 넘어 취침.
#
1956년 7월 17일 (화) 맑음 –28세-
건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다. 광선유포의 그날까지 끝까지 힘내자.
일이 재미없다. S씨, 매우 좋아졌다. S옹, 무서우리만큼 왕성한 것은 좋다지만, 무례하고 멋대로인 데는 질렸다.
본부로 갔다. 참으로 언짢아하시는 선생님.
호후 7시 청년부회, 참석 ··· 기운이 없다.
나는 격분한다. 청년은 사랑스럽다. 그러한 청년을 괴롭히는 권위주의의 최고 간부들에게.
학회의 전진을 똑똑히 보라고 말하고 싶다. 선생님의 은혜를 잊은 것이냐고 ― 화가 치민다. 두렵고 두렵다. 나는 쓸쓸하다.
강하게 끝까지 살아가자. 학회의 미래를 위해.
#
1957년 7월 17일 (수) 비 –29세-
7월 3일은 도다 선생님의 출옥 기념일.
이 의의 깊은 날, 오후 4시 ― 나는 오사카 부경에 들어갔다.
불법 호별 방문 용의였다. 15일 동안 검사에게 조사를 받으며, 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 ― 구치소에서 10여일 남짓 있었다.
죄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부 조직에 책임을 지는 것도 부득이한 일이다. 단지 K지부의 N군 등이 저지른 매수 행위나, 지부장 등의 무책임한 태도에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선생님 정신도, 숭고한 학회 전통도 잊어버리다니, 분하다.
오늘, 17일 ― 오후 12시 10분 ― 출소했다.
수백 명이 넘는 오사카 동지들이 마중 나와 주었다. 기쁘다. 학회는 강하다. 학회는 올바르다. 학회야말로 아름다운 단체이다.
오사카 벗을, 또 도쿄에서 걱정하여 달려와 주신 벗을 생애 잊지 않겠다. M씨, W씨, B씨, F형 등도. H, M ··· 오사카의 M, S, T, Y씨 등.
오후 1시 30분, 이타미 공항으로 선생님을 마중 나갔다. 스승의 자비에 가슴으로 울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 심려하신 마음, 바다보다 깊음을 안다. 이 은혜는 반드시 평생토록 갚아야 한다.
6시 ― 나카노시마중앙공회당에서 임시 오사카 대회가 열렸다.
2만 동지가 결집.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다시 광포의 전진을 결의한다.
생애, 기념비적인 날이다.
제천의 가호에 감사한다.
#
1958년 7월 17일 (목) 맑음 –30세-
다음 법전을 향한 결의, 반석과 같다.
하루 종일 흥분 ··· 젊은 사자와 같이.
선생님 유족 분이 밝은 얼굴로 본부에 인사차 오셨다.
내 마음도 기뻤다.
오후에 면접 지도. 전혼을 기울였다.
끝나고 늦게까지 I군과 대화. 소생(小生: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의 심정을 좀처럼 모르는 사람. 아름다운 우정이여, 생애 변치 말라고 오로지 기원했다.
M씨 댁에 들러 백중 인사를 드렸다.
난전이 벌어질 때, 혁명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의연한 태도다.
#
1959년 7월 17일 (금) 흐림 –31세-
마음껏 창제. 언제나처럼 ―.
스승의 자비가 차츰 가슴에 퍼진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자(父子)의 정. 유대. 이 깊고도 깊은 불이(不二)의 혈맥을 그 누가 알겠는가.
밤에 이사장, Z씨와 B에서 회식. 선인(善人)이긴 하지만 더욱 더 자애가 깊어지기를 염원한다.
소인(小人)이 지도자인 시대는 그 세계 또한 불행해지는 것인가.
돌아오는 길에, 벗들과 황거(일본 천황이 거처하는 곳) 앞 광장 길을 걸어가면서 광포의 미래도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 귀가.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