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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교회
A. 올바른 교회상 정립을 위하여
기독교 신학을 가르치는 필자의 세부 전공은 교회사(Church History) 또는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아주 무겁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지나간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을 통하여 오늘의 신앙인에게 올바른 교회의 좌표를 설정해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과거 교회의 역사를 있는 대로 기술하면 될 것 같은 작업이지만, 앞 장에서 설명한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면 그리 쉽게 교회의 역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더 더욱 제한된 지면에 요약해서 정리할 수도 없다. 이런 방법으로는 2000년간의 역사를 모두 담아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간단하게 교회의 역사를 둘러보고 싶다면, 요즈음 앞 다투어 출간되는 “이야기 형식의 교회사” 서적 가운데 간단한 것 한두 권쯤 읽으면 될 일이다.
<종교개혁과 교회>라는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종교개혁 운동이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론과 격한 충돌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론의 문제는 종교개혁 운동이후 등장한 다양한 개신교 교파 안에서 서로 다르게 인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교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험 안에 있기 때문에 “교회”라고 하면 다 같은 줄 생각한다. 만일 고등교육을 받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구세군교회의 차이를 아느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마, “교회가 시키는 대로 신앙생활만 잘하면 되지 그것이 왜 중요합니까?”라는 대답일 것이 분명하다. 목회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각각 교파의 간단한 특징을 들을 수 있겠지만, 왜 이러한 다양한 교파가 교회의 역사 속에 등장했는지 쉽게 설명을 듣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교 커리큘럼 안에 이런 다양한 교파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와주는 과목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유독 “장로교” 간판을 단 교회가 많다. 그런데 장로교의 종류가 수백 가지인 것을 아는 분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장로교들 중에 서로가 인정하는 소위 공적인 장로교는 40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 많은 장로교들은 모두 같은 기준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을까?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에 가볼 수도 없고, 이에 관하여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배운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교파들도 장로교만큼은 아니지만 한 교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감리교도, 성결교도 그리고 순복음교회도 분열과 일치의 역사를 기독교 역사 속에 남겼다. 그리고 같은 교파도 어느 나라에 있는 교파인가에 따라 서로 다른 교회의 운영방식을 지녔다. 이것은 기독교와 민족의 문화가 만나면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는 변화해도 되고, 어는 부분은 절대로 변하면 안 될까? 예배 의식은 서로 달라도 될까? 한국교회처럼 세계의 교회도 새벽기도와 수요예배와 금요철야기도회와 주일 오후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의도는 “다양성” 때문이다. 교회는 교회마다 다 다르다. 여기서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교회라면 같아야할 본질이 무엇이고, 교회마다 서로 달라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분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필자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교회의 종류나 역사에 대한 공부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몫이다. 자신의 관심에 따라 조금만 수고하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은 생각하는 기준을 찾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교회를 세 가지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신약성경 속에서 찾아낸 처음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시대에 등장한 교회의 모습이니 아무래도 이 모습을 원래(original)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리지널 또는 원조라는 용어는 그 말 자체가 지닌 권위가 강하다. 더구나 신약성경 속에 나오는 교회의 모습이라면 그 누구도 그 권위를 부인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역사 속의 교회의 모습이다.
신약성경 시대의 교회는 로마제국의 지배 동안 그 지경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지배 종교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여러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만나서 다시 또 변화하였다. 역사 속에 남긴 교회의 다양한 발자취이다.
셋째는 미래교회의 모습이다.
저절로 만들어지는 미래의 교회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원래교회의 모습과 역사 속의 교회의 모습을 비교하며 반성할 때에 소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쉽게 하곤 한다. 그것이 마치 역사 속의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2000년 이라는 시간과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서론에서 언급했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 시절을 그대로 복원하자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러니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모습을 향하여 문자적으로 맹종하자고 달려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래교회의 모습은 결코 초대교회를 복원하는 것이 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상업적인 영화이지만 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의 제목은 정말로 잘 지은 제목이다. “미래로 돌아가자!”
그리스도인이 소망해야할 미래의 교회상을 정립하는데 신약성서에 나오는 원래적인 모습이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예수의 정신이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예배당도 없고, 교회 조직도 단순하고, 예배 의식도 간단하던 시대에 그리스도인을 이끌던 정신을 찾아야 한다. 이 정신을 돋보기 삼아서 지난 2000년 간 역사를 써온 교회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 교회의 행적을 낱낱이 드러나게 살펴보는 비판적인 교회사 읽기를 하자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욕심이 마주치는 곳이 교회 현장임에 틀림없는데, 그곳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한 인간의 욕망과 이전투구가 자리하기 마련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읽어야지 절대로 비판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반성하지 않으면 잘못을 고칠 수 없으며, 그 벌로써 똑같은 잘못을 평생 반복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처음 교회의 정신에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져 나온 교회는 결국에 예수의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도 될 수 없게 마련이다. 비판적 역사읽기를 통한 반성과 개혁 없이는 초대교회의 정신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소속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읽는 다는 것이 한편으로 매우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비판적 역사 읽기를 통해 미래의 교회 상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한국의 개신교는 약 130년의 역사를 지녔다. 유럽의 교회에 비교하면 “젊디젊은 교회”(Young Church)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말해주는데, 첫째는 오래된 교회만큼 긴 세월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나 많은 양의 교회적 전통들이 일거에 쏟아져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숙고하고 실마리를 풀어나갈 겨를도 없이 2000년 동안 벌어진 논쟁들과 분열의 역사를 한 몸으로 받아들인 교회가 한국교회이다.
다른 나라의 신생교회와 매우 다르게 한국교회는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개신교가 아시아로 전파되어 한국처럼 성장한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그리고 한국은 아시아에서도 가장 젊은 교회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의 130년의 역사는 유럽 개신교 500년에 맞먹는 혼란스러움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돌아 볼 때가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사회의 여러 군데에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향한 질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기에 한 몫 더 하는 것이 바로 사이비 이단 교회들의 행각이 던진 파장이다. 사이비 이단들 때문에 야기된 문제와 질타에 대하여 대부분의 건전한 한국 교회가 모두 책임을 질 필요는 없겠지만, 사이비 집단들도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천명하고 있다는 사실과,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아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많다는 점에서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책임이 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가장 손쉽고도 정확한 방법은 교회의 역사를 검토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지나간 130여 년 동안에 처음으로 겪는 일들이었지만, 이런 일들은 이미 서구 교회의 역사 속에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하였던 것들이었다. 비록 시대와 장소와 문화는 달라도 사람 사는 곳에 비슷한 일들이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때의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였던 문제들을 놓고 오늘날에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교회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런 문제의 결말이 어찌 될 것인지를 이미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바른 모습을 유지하는 데에는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이 특효약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아서 “개혁된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말을 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의 모토는 “개혁”(reformation)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에 “개혁”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500년 전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 운동에 비추어 볼 때, 그 함성이 만들어 내는 진동만큼이나 강렬한 개혁을 꿈이나 꾸어 본적이 있는가? 떡만 주던 성찬을 잔도 함께 주도록 만들고, 눈에 무엇인가 보이는 것을 찾아 헤매고, 무엇인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신앙의 대상들을 만들어 교회 안에 세워야 만족스러워 하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허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참다움을 목숨 걸고 가르쳤던 종교개혁자들의 소리가 들리는가? 그들의 떨림을 느끼면서 오늘 우리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 뒤에 숨은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거룩한 교회 안에도 개혁할 것이 상존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말은 자기 눈에 있는 대들보를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개혁”이라는 것은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대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빼 주겠다.”라고 생각하며 세상을 자신만만하게 살아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개혁된 교회를 통하여 스스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교회와 맞닿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교회 2000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명을 감당할 준비를 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이다. 그래서 “미래의 교회상”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필자는 이 교회상을 정립하는데 가장 적합하고 또 가장 책임적인 존재가 현장 목회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미래 교회를 위하여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현장 목회자들이 꿈꾸는 교회의 모습이 성서적 교회상이 보여주는 정신에 부합할 때 진정한 개혁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속의 원시적 교회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자는 문자주의적인 요청이 결코 아니다. 목회자들이 성경 속의 교회 모습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어떤 것은 따르고 어떤 것은 버리는 자의적인 선택을 해서도 안 된다. 초대교회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예수의 정신이 중요하다. 예수의 정신이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할지를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교회상은 더 바르게 정립될 것이다.
B. 처음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맨 처음 교회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은 대답하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움을 안고 있는데, 바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 대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 교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어졌는지를 묻기 이전에 “교회가 성립되기 위하여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가?”를 물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설립되는 필요조건들이 충족되면 바로 그때가 교회가 처음 시작된 시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백성들의 문제를 혼자 해결하기 어려워서 모세의 장인 조언으로 천부장, 백부장 등등의 제도가 생긴 것처럼, 처음의 교회에는 직급이 없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사도로써 지도자의 역할을 하다가 봉사하는 일을 맡을 자들을 구별하여 세우게 되었고, 몇 세기가 지나자 교회는 제도화되어 감독과 주교의 직분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각각의 교단과 교파에 속해 있어야 하고 반드시 목회자가 있어야 그리고 상위 기관의 치리 가운데 있어야 정식 교회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교직 제도를 세우기 이전의 모임들은 교회가 아니라는 뜻인가?
독일어판 신학 사전(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18권)의 “교회”항목은 웬만한 단행본 도서의 분량을 차지하는데 교회를 아홉 가지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다. 구약, 신약, 가톨릭교회, 동방 정통 교회, 개신교, 교리사, 기독교 윤리, 그리고 실천신학이라는 각각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개념을 간단하게 정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는 신약성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이 신학 사전에서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Volk Gottes)에 까지 교회의 지평을 넓히고 있으며, 신약성서에서 사용되는 “선택”(Erwählung)의 개념도 이미 초기 유대교의 “선택 신학”(frühjüdische Erwählungstheologie)으로 소급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교회사 교과서가 있다. 이미 우리말로도 좋은 번역을 접할 수 있는 윌리스턴 워커(Williston Walker, 1860-1922)의 『기독교회사』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교회의 원형을 찾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던 무리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함으로써 그분이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이 확신은 흩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자리로 모여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초기의 공동체는 예루살렘에 그 본부를 두게 되었고 아직은 유대교와의 차별화가 드러나지는 않은 형국이었다. 윌리스턴 워커는 그들이 자신들을 “가난한자”(갈2:10), “성도”(롬:15 25), “에클레시아”라고 부른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오늘날 “교회”라고 번역되는 에클레시아(έκκλησία)는 본래 그리스의 자유 도시국가들에서 법안에 대해 투표하고 그 밖의 공적인 업무들을 처리하기 위해 모인 민회들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던 용어였다. 또한 70인역 성경(그리이스어로 된 구약 성경, Septuaginta)에서는 종교와 의식을 위하여 모인 이스라엘 백성을 일컫는데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신31장, 왕상 8장). 신약성서에서는 이 전통을 따라서 유대인들의 모임을 뜻하는 “회당”(συναγωγή) 대신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공통의 신앙으로 연합된 사람들을 교회(에클레시아)라고 칭하였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AD 49)는 비로소 공식적으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도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점을 인정한 회의였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의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선언한 시점을 처음 “기독교회”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C. 교회의 발전과정 속에서 생긴 문제는 무엇인가?
아직 교회의 제도들이 확립되기 전 가장 활발한 전도 활동을 벌인 사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바울이다. 바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여행을 하였고 많은 교회를 세웠다. 물론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갈릴리의 교회들은 바울에게 진 빚이 없다. 로마서를 바울이 쓰기도 전에 이미 로마에도 교회가 있었으며 본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 지역에도 다른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들이 있었다.
이러한 양상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당시의 교회는 오늘날처럼 유기적인 통일체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표하는 권위의 상징으로 그리스도만 존재하였으며, 교황이나 대주교 등등의 통일적 권위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상과 교리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성서도 아직은 태반이 집필되지 않았거나 전혀 수합되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과 개개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문제에 거의 모든 열정을 쏟았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까지도 교회 앞에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는 재산 공동체였으며, 가난한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당연히 말씀 전하는 일 다음에 교회의 가장 큰 업무였다.
로마제국 내에 있는 교회들이 서로 확고하게 연대하기도 전에, 교회는 약 250년간에 걸쳐 부분적으로 지속적인 박해를 받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사실 종교적으로는 관용을 지향하는 지배자였다. 그래서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지 않는 종교라면 대부분의 지방 종교를 허락하였다. 단 유대교만큼은 그들의 저항이 워낙 거세기 때문에, 황제 숭배를 하지 않아도 예외적으로 허가해 주었다. 그런데 유대교의 한 분파라고만 여겨졌던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다른 종교이며, 황제 숭배도 하지 않으며, 유대인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 우연한 기회에 드러나게 되었다. 네로황제 치하에서 AD 64년 로마에 대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방화의 의심을 받던 네로황제는 기독교인들을 희생 양으로 삼아서 고문하고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황제에 따라서 박해의 경중도 있었고 전혀 박해받지 않은 기간도 있었지만, 교회는 313년이 될 때까지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박해의 기간에 교회는 무엇을 하였을까? 교회는 숨어 있지만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수많은 인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을 교회의 아버지(교부)라고 부르는데 이 교부들에 의하여 교회 안에는 신앙을 위한 훌륭한 지침서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어떤 교부들은 로마제국의 철학적인 박해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증하는 훌륭한 글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에는 감독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순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313년이라는 해는 기독교에게는 전혀 새로운 해이다.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한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서방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였다. 그는 동방의 황제와 협의하여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80년이 지난 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는 국교로 반포되었다. 즉, 313년을 기점으로 하여 허락 받지 못한 기독교는 허가된 종교(licita religione)가 되어서 더 이상 박해와 순교의 위협을 받지 않게 되어 좋았다. 그리고 국교가 되면서부터는 국교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혜택과 보호를 아울러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박해 당하던 기독교에 관용을 베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를 공인하여 허가받은 종교가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열렬한 기독교 지지자가 되었다. 최초의 교회역사가로 알려진 유세비우스(Eusebius)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군주로서의 사역을 그의 교회사책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서방의 황제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아 다리의 전투를 앞두고 신비한 꿈을 꾸었다. 꿈에 본 것은 그리스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철자 X(키이)와 P(로)를 겹쳐 놓은 표지(Sign)였다. 이 표지를 앞세우고 전쟁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베푼 은전이 바로 밀라노 칙령이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역사라는 학문적 방법론으로 볼 때에 검증할 방법이 전혀 없다. 신이 끔 속에서 나타나 계시하는 것은 전형적인 그리스 신화서술 방법이다. 이 서술양식은 이미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역사책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이 유세비우스의 기독교 공인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어찌되었든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에 기독교는 세속통치자의 종교가 되었고, 이후 로마제국의 뒤를 이어받은 신성로마제국과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기독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아직 교황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황제가 교회의 수장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나간 교회의 역사 관찰을 통하여 미래 교회를 위한 역사의 교훈을 찾아보자. 황제의 승인을 받은 교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리고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을 때에는 기독교인들이 제국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을 정도로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몇 가지 간과하여서는 안 될 문제가 숨어 있다.
첫째, 공인 받은 교회의 문제에 공인을 허락해 준 황제의 간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니케아 신조(325)가 형성될 때에 니케아 회의가 열리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와 장로 아리우스 사이의 논쟁이었지만, 니케아 회의를 정작 소집한 것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그는 자신의 통치 지역이 종교 문제로 시끄러운 것은 제국을 다스리는 일에 크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 내용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수차례나 바꾸어서 집행하였다. 즉, 추방된 아리우스(그리스도의 신적본질이 아버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유사하다고 주장)를 다시 불러들여 복직 시켰다가, 다시 또 추방하는 등등 교회의 지도자들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추방하거나 복직시키는 일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둘째, 교회가 제국의 정치 관료 구조를 교회 안에 도입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군주적인 주교 직분의 등장은 박해의 기간에도 시작되었던 일이지만, 교회 고위층이 제국 정치 안에도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교회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우월성 논쟁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려는 우리의 본래 목적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등장한다. 박해받던 시대의 교회와 허락 받은 시대의 교회 그리고 지배자의 입장에 선 교회의 모습과 역할이 달라지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라는 인물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교회의 위상은 교회의 목표를 “생존”에서 “확장”으로 그리고 “지배”로 바꾸어 놓았다. 과연 어떤 교회모습이 교회다운 모습인가?
오늘날 세계 각국의 기독교회들도 위의 세 가지 중 하나의 처지에 있다고 본다. 공산주의 하에서 박해받고 위협받는 교회, 다종교 국가 속에서 일부의 역할을 담당하며 선교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교회, 그리고 기독교 국가 하에서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안정을 구가하는 교회들이다. 만일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기준이라면 이 세 가지 중에 어떠한 교회의 모습이 정답일까?
우리가 공부하는 교회의 역사는 각각의 처지마다 수반되는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단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러한 세 가지 유형들 가운데 어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분실되지 않고 살아 있는가를 판별하는 일이다.
이번에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통하여 교회상을 정립하여 보자. 앞서 언급한 교황 제도의 문제이다. 보통 우리는 중세를 정의할 때, 시간적으로는 교황제가 뚜렷하게 확립된 590년 그레고리 대제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초까지를 중세라고 말하고, 중세의 특징은 “교황권과 황제권의 이중 주의가 지배하던 시대”라고 한다. 동그란 원안에는 구심점이 하나만 있듯이 중세 이전까지의 권력 구조는 황제를 중심으로 통일적이었는데 반하여, 중세는 마치 타원 안에 있는 두 개의 구심점처럼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확고한 교황 중심제가 성립되기도 전인 492년경에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는 “두 권력 이론”을 제시하여 교회감독의 권한이 황제권 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후 중세기는 정치권과 교회권의 권력투쟁으로 점철된다. 1302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때에 발표되는 칙령 “우남 쌍탐”(Unam Sanctam)에서는 “두 검 이론”이 제시되었다. 즉,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 잡히실 때에 베드로에게 두 자루의 칼이 있었는데, 그 칼 중에 하나는 교황권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권세의 원 소유자는 교황(베드로)이며, 교황이 황제에게 세속 권세를 잠시 위임하였을 뿐이므로, 다시 찾으려면 얼마든지 도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내용이다.
이처럼 교황의 위치는 실로 막강한 자리였으며, 도처에 교황령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 지역의 주교를 임명하는 문제를 두고 늘 그 지역 통치자와 갈등을 겪었다. 이처럼 교황의 지위가 막강하였던 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정치력뿐만 아니라 기독교 국가 안에서는 황제도 교황의 파문 위협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중세기에는 정치와 종교가 서로 그 우월성 투쟁을 통하여 경우에 따라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연합하기도 하는 등 이합집산을 자유롭게 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과연 섬기러 오셨다는 그리스도의 정신은 살아있었을까?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논하면서 간과하기 쉬운 사건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다. 게르만 민족이 이동한 것이 교회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사건은 일반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교회사적인 의미가 훨씬 더 많은 사건이다. 주후 5-8세기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로마제국의 판도는 매우 심하게 변화하였다. 즉, 로마제국의 찬란한 그레코-로만 문명을 맛보지 못한 민족이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로마제국의 각 지역에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410년에는 서고트족의 알라릭(Alaric)이 로마를 침공한 사건을 필두로 하여 476년 오도아케르(Odoacer)가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를 폐하고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 내에 깊숙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정착 과정에서 로마제국 변경에 흩어져 살던 아리우스주의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신앙을 물려받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신앙을 표방하였는데, 이것은 로마교회의 정통 신앙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신앙의 문제로 늘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 자리한 프랑크족만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서 이들은 멸망한 서로마 제국 대신에 로마교회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으며, 후에 독일은 신성로마제국(The Holy Roman Empire)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에 들어와 모두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고,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이방 민족의 통치를 받게 되어 그들의 문화와 관습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게르만의 기독교화”(Christianisierung der Germanen) 그리고 “기독교의 게르만화”(Germanisierung des Christentums)라고 부른다. 이것은 5세기의 교회상에 새로운 영향을 끼쳤다. 다시 말하면 유대주의적인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한 헬라적인 바울의 사상이 기초가 되어서 그레코-로만 세계에 자발적인 교회를 건설하게 한 것이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이었다면, 게르만족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오다가, 기독교 종교와 문화를 정치적으로는 지배하면서 종교적으로는 영향을 받는 상호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구조 속의 교회는 자연히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비록 게르만 족의 지배자가 자기 통치 구역 내의 교회와 성직자를 마치 자신의 사유물처럼 취급하는 일이 빈번하였지만, 게르만족이 기독교로 전체적인 방향을 수정한 것은 장차 정치 사회적인 해체 과정 속에 성장하게 될 교회의 가치를 예견케 하는 일이었다.
D. 중세 교회는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었는가?
보통 우리는 중세 약 1000년을 암흑기라고 부른다. 아마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종교 개혁적 관점에서 중세를 조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 개혁적인 관점대로 본다면 중세 교회는 고여 있는 썩은 물이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황청은 교권 투쟁에만 몰두해 있었다. 교황은 이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까지도 가지고 있었으며 중세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잉여공로설을 주장하여 교황이 면죄부를 발부할 수 있는 신학적인 근거도 마련해 주었다. 중세의 교황 중심 교회와 성직자들을 향한 가장 강력한 종교 개혁적인 비판은 바로 성직 매매와 축첩 문제였다.
교회가 조직화되고 체제화 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나쁜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직을 매매하는 일이다. 하위 성직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골의 작은 교회 하위 성직자들은 변변치 못한 봉급에 시달렸고, 때로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성직 매매는 주로 고위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고위직을 차지하는 데서 돌아올 금전적 또는 세속적인 이익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브란덴부르크의 대주교직을 차지하고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권이 부여되는 마인쯔 대주교 자리가 탐이 나서 이를 매수하였던 알브레히트(Albrecht)는 교황에게 바칠 대가를 마련하기 위하여 고리대금업자의 돈을 빌렸고 이를 갚기 위하여 교황의 허락을 얻어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으로 1517년 비텐베르크의 교수이자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 붙였는데, 그 중심적인 내용이 면죄부의 효능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일개 인간인 교황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었다.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속죄하고 용서를 받아야하는데, 교황이나 주교가 발행한 면죄부로 그 죄값을 대신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옳지 않다. 인간은 비록 교황일지라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인간은 인간에게 맡겨 주신 일은 성실하게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루터의 말이다.
중세 교회와 교황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다 타락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중세 교회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다 보면 뜻밖에도 중세 교회 안에 많은 개혁자들이 있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중세 중반까지 신실한 교황들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 축첩의 악순환을 끊으려고 노력하였다. 한편에서는 대주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교황을 세우려고 대립 교황을 추천하여 교황이 두 명이 된 적도 있었고,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으로 분열되어 오랫동안 서로를 정죄하는 역사도 남겼다. 이럴 때마다 개혁 공의회는 분열된 교회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교회의 제도화와 군주적인 체제 속에서 생동감 있는 신앙의 유실을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은 수도원으로 유입되었다. 비록 중세 후기에는 수도원까지 타락의 중심지가 되어 버린 경우가 많았지만, 수도원의 정신은 언제나 살아남아서 교회답지 못한 교회를 견제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건 서적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 라는 책은 수도사들의 올바른 경건한 삶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교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은 영국과 보헤미아 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운동을 우리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 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영국에서는 옥스퍼드 대학교수와 루터워스 교구 목사를 지낸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경-1384)가 성경을 모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였고(1382년), 성직자의 타락상을 지적하고 교회 개혁을 위한 바람직한 성직자 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의 재산 축적을 비판하고, 교황 교회가 물욕과 통치욕에 물들어 있음을 지적하며, 성직자들에게 청빈과 겸손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초대 교회의 모범을 회복하라고 권고하였다.
위클리프의 정신을 물려받은 보헤미아의 후스(Jan Hus, 1371?-1415)도 면죄부 판매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사도 직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설명하였다. 사도란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므로 누구든지 그의 교훈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머리가 되려는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을 거부하는 거짓 사도라고 주장하였다. 후스는 1414년부터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1415년 7월 6일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이런 역사를 본다면, 교회를 교회답게 유지하려는 노력은 역사 속에 언제나 계속되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등장하게 된 것은 그 동안 교회개혁의 목소리를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중세교회는 권력을 추구하였고 실제로 엄청난 권력을 소유하였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세속권세의 시녀노릇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이런 문제가 중세 가톨릭교회에만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교회가 오래되면, 교회가 권력에 맛을 들이면, 교회가 세력이 커지면, 교회가 세속권세와 결탁하면 이런 현상은 반드시 나타난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려는 시도는 마치 거대한 물줄기를 작은 돌 몇 개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와 같다. 그렇게 작고 약한 목소리가 모이면 언젠가는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물줄기가 바뀌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교회를 개혁하는 데는 “실패한” 운동이다. 왜냐하면 결국 가톨릭교회가 분열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혁명”으로는 “성공한” 운동이다. 왜냐하면 결국 루터교가 등장하였고 이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개신교회가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500년이 넘은 개신교도 중세 가톨릭교회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개혁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마저도 어쩔 수 없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교회는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더 이상 개신교가 아니다.
E. “개혁”이 교회를 교회답게 한다.
사실 교회의 개혁 운동은 크건 작건 간에 2000년 교회 역사의 “생명 운동”이었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 개혁하려는 시도가 없었다면 교회는 교회다움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필자는 교회의 역사를 그림으로 설명할 때, 종종 여러 겹 피복을 입힌 구리 전선에 비유하곤 한다. 교회사 속의 사건들은 여러 겹의 피복들처럼 다양한 모양으로 등장하지만 그 속에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할 것은 개혁하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전선 의 피복이 아무리 든든해도 구리선이 끊어지면 전기가 통하지 못하듯이, 교회역사 속에 개혁정신이 사라지면, 교회는 아무리 성장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개혁 정신은 예수가 유대교의 개혁을 시작 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사도 바울이 율법과 복음의 대비를 통하여 가르친 깨우침이었으며, 이것이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부활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 사상은 16세기를 넘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수되고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를 향하여 교회다움을 지향했던 개혁 정신은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를 찾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종교 개혁자들이 제시한 교회다움의 조건들을 결론 삼아서 되새겨 보는 일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정의할 때, 사도신경에 나오는 “성도의 교제”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교회”(Church, 또는 Kirche)라는 용어보다는 “공동체”(Gemeinde)라는 말이 그 본래의 의미나 사상을 더 잘 전달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설명할 때, “기독교 공동체 또는 모임”, “거룩한 기독교 세계”, “하나님의 거룩한 기독교 백성”이라고 즐겨 말하였다. 이러한 설명의 배후에는 계층구조적인 가톨릭교회의 직제(hierarchical order of Catholic church)에 대한 반발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교회의 전체 생활과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안에 있다. 그러므로 루터는 교황의 교서나 교회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 어긋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교황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직분을 독점하고, 성경, 세례, 성찬, 설교에 대한 권위를 주장을 하는데 대하여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어느 누구도 교회가 오류를 범한다고 말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거나 그것에 반대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면, 잘못을 범한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참된 교회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우선 루터는 성서의 말씀이 근거하면, 로마교회의 많은 전통과 교훈들이 전혀 옳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문자적인 것을 넘어서는 말씀이었다. 최종적인 권위는 성경책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중심으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철저하게 이해된 복음으로부터 자신을 해석하고 또한 자신을 비판하는 성서”였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 말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성서해석은 중세의 알레고리방식이나 문자적 방식을 넘어선다. 그의 성서해석방식을 정의하면,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심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공생애 기간을 통하여 남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이 전체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라는 말이다. 그래서 루터는 “성서가 성서자체의 해석자”라고 하였다.
또 한 가지 교회를 알아보게 하는 외적인 표지가 있는데, 바로 세례와 성만찬이다. 세례와 성만찬이 비록 외적인 표지이지만 이것은 그 사용상 신앙을 필요로 한다. 즉, 신앙을 가지고 성례전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표지로써 성례전은 하나님의 제정의 말씀 때문에 그 효능을 발휘한다. 즉, 성례전이 성례전 되게 하는 것은 외적인 표지로써의 물과 떡과 잔이 아니라, 또는 그때 고백되는 인간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구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말씀(promissio)이 그 토대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교회와 예배당을 혼동하기도 한다. 교회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십자가 종탑이 달린 예배당을 그린다. 눈에 보이도록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가장 눈에 익은 예배당 건물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내용처럼 교회에는 말씀과 성례전과 성도의 참된 교제가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에는 세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뜻은 영광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낮고 참담한 십자가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참으로 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예배당에 드나드는 것으로 교회 다니는 의무를 다하였다고 착각하여서는 안 된다. 겸손과 인내와 용서 그리고 사랑과 공의가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 있어야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이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오는 예언을 성취한 것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드릴 때에 죽음의 잔을 피하는 대신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늘 교회에게 요구하는 교회다움이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이 교회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가장 잘 설명해 줄 것이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윌리스턴 워커, “기독교회사”, 송인설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좀머/클라르, “교회사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백용기/홍지훈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김홍기, “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의 역사 이야기”, 예루살렘
홍치모 편, “교회사 대사전 1,2,3”, 기독지혜사
알트하우스, “마르틴 루터의 신학”, 구영철 옮김, 성광문화사
홍지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