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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요1:14-24)
◈ 원문강해 ◈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거함
본문은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장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의 증거는 그 내용들을 한결같이 현재 시제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그가 증거한 예수님의 절대 신성이 끝날까지 영원한 현재적 사실로 전해질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1. 요한의 증거(14-18절) 1) 구속의 진리 (Kai; oJ lovgo" sa;rx ejgevneto kai; ejskhvnwsen ejn hJmi'n 카이 호 로고스 사륵스 에게네토 카이 에스케노센 엔 헤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4절) '육신'을 뜻하는 사륵스(sa;rx)는 보통 육체적 존재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sw'ma)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전자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하고, 후자는 영혼과 반대되는 몸의 의미로서의 육신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육신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다(히4:15,A.Barnes).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가현설(Docetism)을 반반할 수 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8:3) 오셨다고 증거하였다. 한편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뜻하는 에스케노센 엔 헤민(ejskhvnwsen ejn hJmi'n)에서 '우리 가운데'를 뜻하는 엔 헤민(ejn hJmi'n)은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은 '성막을 치다, 진치자, 거주한다'라는 의미의 스케노오(skhnovw)의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인 에스케노센(ejskhvnwsen거하시매)을 사용함으로 성육신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장막에 거하시는 것처럼 거주하셨음을 알게 한다
2) 요한의 외침 ( jIwavnnh" marturei' peri; aujtou ... o{ti prw'tov" mou h\n. plhrwvmato" aujtou' hJmei'" pavnte" ejlavbomen, kai; cavrin ajnti; cavrito": 요안네스 마르튀레이 페리아우투…호티 프로토스 무 엔…플레로마토스 아우투…카린 안티 카리토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5,16절)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계심이라(h\n엔)는 에이미(eijmi;이다)의 미완료 과거로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지속적으로 계셨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증거하여'에 해당하는 마르튀레이(marturei)는 마르튀레오(marturevw)의 현재 직설법 3인칭 단수로서 계속되는 동작을 강조해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해 주고 있다. 그리고 '충만한'에 해당하는 플레로마토스(plhrwvmato")는 플레로마(plhvrwma)의 소유격 단수로 문자적으로 홍수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둑이 차고 넘치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진리는 아무리 부어도 모자람이 없고 다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다. 한편 '은혜 위에 은혜'를 뜻하는 카린 안티카리토스(cavrin ajnti; cavrito")는 안티(ajnti)가 주고 '∼위에'라는 뜻보다 '∼대신에'(눅11:11)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됨으로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암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부어지는 은혜의 풍성함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3) 은혜와 진리의 근거 (hJ Cavri" kai; hJ ajlhvqeia dia; jIhsou' Cristou' ejgevneto. ... monogenh;" qeo;" 헤 카리스 카이 헤 알레데이아 디아 예수 크리스투 에게네토…모노게네스 데오스;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독생하신 하나님, 17,18절)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것을 가리키는 에게네토(ejgevneto온)는 기노마이(givnomai되다, 발생하다)의 제2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이것은 곧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또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은혜와 진리는 율법처럼 수동적으로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을 통하여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결국 본문은 율법에 근거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째 흔드는 말씀임과 동시에 교회의 근거를 확실히 밝히는 말씀인 것이다. 한편 독생이신 하나님을 뜻하는 모노게네스데오스(monogenh;" qeo;")에서 모노게네스(monogenh;")는 '유일한, 단 하나'를 뜻하는 형용사 모노스(mono")와 '낳다'를 뜻하는 겐나오(gennavw)에서 파생되어 '민족, 자손'을 뜻하는 중성 명사 게노스(gevno")의 합성어로 유일한 혈통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적으로 '유일하게 태어난 하나님'이라는 의미로서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2. 요한의 공적 증거(19-21절) 1) 무리들의 첫 번째 질문 (o{te ajpevsteilan 팺ro;" aujto;n? oiJ jIoudai'oi ejx JIerosoluvmwn iJerei'" kai; Leuivta" ... Su; tiv" ei\_ 호테 아페스테일란 「프로스 아우톤」호이 유다이오이 엑스 예로솔뤼몬 이에레이스 카이 류이타스…쉬 티스 에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19절) '보내어'를 뜻하는 아페스테일란(ajpevsteilan)은 아포스텔로(ajpostevll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 3인칭 복수로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대거 요한에게 와서 질문을 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명실 상부한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와 지도자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 중 일부는 그를 메시야가 아닌가 하고 생가하기도 하였다(눅3:15행13:25).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위험이 되었던 까닭에 이들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한편 '네가 누구냐'(Su; tiv" ei\쉬 티스 에이)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정체뿐 아니라 그에게서 이단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사회적으로 매장할 명분을 찾으려 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요한의 증거 (kai; wJmolovghsen kai; oujk hjrnhvsato, kai; wJmolovghsen o{ti jEgw; oujk eijmi; oJ Cristov". 카이 호몰로게센 카이 우크 에르네사토 카이 호몰로게센 호티 에고 우크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20절) 본문은 접속사 카이(kai)를 세 번에 걸쳐 병렬적으로 나열함으로 세례 요한의 진술이 진지하면서도 솔직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드러내어 말하고'를 뜻하는 호몰로게센(wJmolovghsen)은 '고백하다'를 뜻하는 호몰로게오(wJmolovghw)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서 그의 고백이 믿음의 확신으로 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곧 그가 자신의 사명과 임무를 잊지 않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요한의 고백 중 '나는'( jEgw;에고)이란 말이 언급된 것은 '아니라'(oujk eijmi우크 에이미)의 에이미(eijmi나는 ∼이다)가 1인칭 단수 동사임에도 덧붙여져 언급된 말로서 그 의미를 강조하는데 있다.
3) 무리들의 두 번째 질문 (Suv jHliva" ei\_ kai; levgei, Oujk eijmiv. JO profhvth" ei\ suv_ kai; ajpekrivqh, Ou[. 쉬 엘리 아스 에이 카이 레케이 우크 에이미 호 프로페테스 에이 쉬 카이 아페크리데 우; 네가 엘리야냐 가뢰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21절) 종교 지도자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답변은 '나는 아니라'를 뜻하는 우크 에이미(Oujk eijmi)인데, 이는 20절에서 대답한 '나는 아니다'를 뜻하는 우크 에이미 에고( jEgw;)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즉 20절에서처럼 강조형인 에고( jEgw;)를 사용하여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강한 부정은 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종교 지도자들이 인식한 엘리야가 아니라는 표현인 것 뿐이다. 이는 간결하고 무뚝뚝한 부인이기도 하다(A.T.Robertson). 사실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적 사명을 담당하는 자로서 예수께서도 인정을 하셨다(마11:1417:12).
3. 요한의 자기 증거(22-24절) 1) 무리들의 세 번째 질문 (i{na ajpovkrisin dw'men toi'" pevmyasin hJma'": 히나 아포크리신 도멘 토이스 펨파신 휘마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22절) 본문은 요한에게 찾아온 무리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대답하게'에 해당하는 아포크리신(ajpovkrisin)은 아포크리시(ajpovkrisi)의 여성 목적격으로 이들이 요한의 답변에서 만족할 만한 말을 듣지 못하였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권위가 상당히 위축된 당시 유대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의 하수인들로서 요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2) 광야에서 외치는 자 ( jEgw; fwnh; bow'nto" ejn th'/ ejrhvmw/, Eujquvnate th;n oJdo;n kurivou, 에고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유뒤나테 덴 호돈 퀴리우;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23절) '외치는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보온토스(fwnh; bow'nto")는 서로 관사 없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일종의 감탄문으로 이사야가 했던 말을 요한이 직접 자신의 입을 통하여 대화체의 말로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소리'를 뜻하는 보온토스(bow'nto")는 원래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요한의 소리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본문과 관련하여 마태, 마가, 누가 등은 그들 자신이 본문의 내용을 사40:3의 인용으로서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에 관련시켜 언급하고 있다(마3:3막1:3눅3:4).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 자신이 직접 이 말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한편 본문은 오늘날 참전도자는 권세자에게 아부하며 이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로 아첨하는 자가 아니라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곳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해 하는 심령을 찾아가 위로하는 복음의 열정과 불타는 사명감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무리들의 정체 (Kai; ajpestalmevnoi h\san ejk tw'n Farisaivwn. 카이 아페스칼메모이 예산 에크 톤 파리 사이온;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24절) '보낸'에 해당하는 아페스탈메노이(ajpestalmevnoi)는 '파송하다'를 뜻하는 아포스텔로(ajpestallw)의 완료 부정사 중간태로서 이들을 보낸 자들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당시 사제 직분의 대부분은 사두개인이 맡고 있었지만 그 일부만 바리새인이 맡았다. 요한에게 온 무리들은 바로 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파송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음에 틀림없다(Hendriksen, Bernard).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말씀이 뛰어난 능력(14-18절)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oj lovgo" savrx ejgevneto호 로고스 사륵스 에게네토)라는 문구는 요한이 볼 때, 로고스가 이미 천적 인간이었기에 '인간'(a]nqrwpo"안드로포스)이라는 단어를 회피하였다(O.Cullmann). 볼트만은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과 신화와의 유사성을 지적하였다(R.Bultmann). '우리가 보니'(ejqeasameqa에데아사메다)에서 '우리'는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 증인들을 의미한다(Raymond, E.Brown). '보니'의 대상은 도성인신하신 예수라기보다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언급한다고 하는 주장(DeAusejo)도 있다. 15절의 '외쳐'(kekragen케크라겐)는 완료형으로 현재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이는 요한의 증거가 현재적 의미를 지녔음을 암시해 준다(Lucian).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라는 구문은 두 가지를 상기시키고 있는데, 첫째, 모세를 통한 옛계약의 은혜는 복음의 은혜로 바뀌어졌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개의 등급으로 적용될 수도 없다(C.K.Barrett). 둘째, 헬라어의 헬라어의 배후에는 아람어의 언어적 유희(Word Play)가 내포되어 있다. 즉 히스다 할라카 히수다(ar(w)s*lh arsj)에서 '수치'(arsj)의 자리에 '은혜'(ar(w)sj)라는 단어를 썼는데 번역자가 이를 감지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M.Black) 17절의 '은혜와 진리'의 강조점은 모세와 그리스도, 율법과 복음 사이의 대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은혜는 율법과 대립되는 것으로 바울의 표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J.Jervell). 17절을 편집적으로 이해하는 비평가들은 18절을 원래의 시적 표현으로 간주한다(De Ausejo, Bernard). '독생하신 하나님'(monogenh;"모노게네스 데오스)에 대하여서는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① 독생자 하나님(God the only son)이라는 견해(Irenaeus, Clement of Alexandria, Origen), ② 유일한 그 아들(the son, the only one)이라는 견해(Athanasius, Chrysostom, Latin Fathers), ③ 그유일한 아들(the only son)이라는 견해들(Tatian, Origen, Epiphanius)이다.
2. 세례 요한의 첫 번째 질문(19-24절) 19절의 '유대인들'은 예수와 세례 요한에게 대항하고 있는 유대교와 공적인 지도자들을 지칭할 때 요한이 흔히 사용하는 칭호이다(C.K.Barrett). 또한 유대인들은 종교적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으며, 요한이 이 칭호로 갈리리 사람들과 유대에 사는 사람을 구분하고자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C.Dekker). 혹자는 요한이 이 세상을 대표하기 위해 이 칭호를 사용한데 대한 역사적인 배경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Schnackenburg). 20절에 나타나고 있는 중복 어구가 세 번씩이나 긍정(드러내어 말하고), 부정(숨기지 아니하니), 다시 긍정(드러내어 하는 말)으로 연결된 사실은 아마도 요한의 편집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Raymond, E.Brown). 이에 반하여 이 문체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장중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주장도 있다(C.K.Barrett).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며, 전에 메시야였다는 주장을 강하게 부정하기 위하여 21절이 강조되어 있다(George, R.Beasley-Murray). 당시 요한의 제자들 중 하나가 세례 요한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O.Cullmann). 21절에서 요한은 묵시 문학적인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전승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자유롭게 다루고 있다(J.T.S. Series, 이에 반대 입장:C.H.Dodd).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세례자를 엘리야로 선언하고 있으나(마11:41막9:13), 요한복음서에서는 이 명령을 부인하고 있다(C.F.D.Moule). 요한은 아마도 공관복음 이전의 기독교 신앙 단계로 묵시 문학적 필요성에 따라 예수보다 먼저 온 자 중에서 엘리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인 것 같다(C.K.Barrett). '선지자(oJ profhvth"호 프로페테스)는 세례 요한이 이미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고(20절), 여기서 그리스도를 지칭하지 않았다(C.K.Barrett). 유대인들도 신18장에나오는 '선지자'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간혹 사용한 경우에는 선지자와 그리스도를 같이 여기지 않았다(.L.Morris). 이 용어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것은 사마리아인의 자료들에서 비롯되었다( F.J.Foakes Jackson, Kirsopp Lake). 그러나 비평가들은 요6:14의 선지자와 본문의 선지자를 동일시하여 그리스도로 이해하였다(Hahn). 23절의 세례 요한은 이미 정평이 난 어떤 인물과도 동일하지 않은 단순한 소리일 뿐이다(O.Cullmann). 특히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예언적 목소리를 발했다는 사실은 70인역(LXX)이 신약에 보다 적합하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Raymond, E.Brown).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상징 어법은 이방 신상을 경외하는 일과 군주를 방문하기 위하여 행진을 준비한다는 데에서 출원하고 있다(Grenfell, Hunt). 또한 B.C.3세기 때에 궁전 수비대의 우두머리의 방문을 준비하는 것으로 프톨레미 파피루스(Ptolemaic Papyrus)에 묘사되어 있다(Garofalo). 혹자는 이 동사가 인종적 또는 도덕적 의미로 당시에 자주 사용된 점에 요한이 매혹되어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E.D. Freed). 24절은 바리새파에서 보냄받았다고 하지만, 19절에서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서 보냄받았다고 소개되어 있기에 난해한 구문 중 하나이다(L.Morris), 이는 요한이 새로운 그룹을 도입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주장과(Bernard)과 일부 제사장들은 바리새파인들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Lagrange), 이 삽입 구절은 요한이 A.D.70년 이전의 유대교와 친숙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심각한 의구심을 제시하고 있다(C.K.Barrett).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육신이 되신 말씀(14절) 14절에서 대명사들이 처음으로 객관적 서술의 3인칭 그들에서 주관적 고백의 1인칭 우리로 바뀐다(요21:24요일1:1-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역설은 이 구절에 이르러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W.E.Hull). 신약의 어느 곳에서보다도 이 구절은 니케아 신조(A.D.325년)와 칼케돈 정의에서 공식화된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의 근거를 제공한다(F.F.Bruce, J.N.D.Kelly). '영광'은 성경의 신학적 어휘에서 가장 풍부한 단어 중의 하나로, 주로 권세를 잡고 계신 하나님의 가시적인 표현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위엄의 초점을 맞춘 임재로 빛난다. 그의 지상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목적과 신망의 새로운 깨달음으로 그들을 불러모으신 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셨다. '독생자'(monogenhv"모노게네스, D.Moody)는 '외아들'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아들 관계는 보통 출생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일차적 의미는 '그 종류의 단 하나'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은 인간으로서 독특하신 말씀인 하나님의 계시가 결여된 것이 아니라 자비, 은혜, 인자, 진실(출34:6,7시85:9,1089:14;108:4)이 충만했다는 것을 뜻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한없는 관대하심 속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것으로 인간이 받을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다.
2. 요한의 증거(15-18절) 15절의 '나보다 앞선 것'은 특별히 강조적 용어로 표현되었다. 요한은 단순히 '그가 내 앞에 있었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나와 관계되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하셨다'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그는 나보다 절대적 우선권이 있다' 내지는 이것보다 더 나은 해석으로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는 이미 있었다'를 뜻하는 것이다(F.F.Bruce).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는 문자적으로 '∼과 교환으로', 혹은 '∼에 의해, 대신으로'이다(롬1:17고후3:18). 분명히 하나님은 항상 은혜의 하나님이시었다(W.E.Hull). 17절은 16절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구약시대에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시었지만, 반면에 신약 시대에 그의 변함없으신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주시었다. 그 차이점은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주는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내용의 본질에 놓여 있다(W.E.Hull). 18절의 '아버지의 품'에 대한 언급은 1절을 상기시킨다. 이 두 병행 구절 사이에서 예수님의 지상의 생애가 묘사되었기 때문에 본 구절은 구속의 포물선을 완성하신 높아지신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이제는 영광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 예수의 생애는 신적 숨기심의 독특한 드러남, 눈에 보이는 주석, 아버지를 나타내신 말씀이었다(요12:4514:9, W.E.Hull).
3. 광야에 외치는 자(19-24절) 19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전체를 말하지 않고 하나의 구체적인 특수 집단, 예루살렘의 종교적 기성 집단을 말한다. 그들은 산헤드린 내지는 성전 당국자들이었다(F.F.Bruce). 20절은 마10:32,33을 상기시킨다. 요한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자신을 부인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긍정적 확언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점차적으로 강조적이 되어 자기를 부인한다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21절)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확고하게 자신을 종말에 기대되는 종말론적인 인물과 결부시키지 않는다. 많은 유대인들은 다윗의 기름부음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사9:2-711:1-9)뿐만 아니라 엘리야(말4:5,6)와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18)를 열렬히 고대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전이나 혹은 그사이에 다시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다(막8:289:4, W.E.Hull). 21절에서 요한은 자신을 메시야급에 속하는 세 인물과 어떤 연관짓기를 거절했다(W.E.Hull).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는 요한의 응답은 예수님의 요한에 대한 대답에 비추어 볼 때 (마17:11-13), 우리에게 몇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어떤 면에서 요한이 엘리야라는 말이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가 엘리야가 아니라는 말은 개인이 세상에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가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의 부인은 이런 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으로 와서 말라기가 예언한 대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엘리야이다(,J.W.Stallings). 분명히 요한과 공관복음 저자들 사이에, 그리스도와 세례자 사이에 어떤 모순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L.Morris). 22절의 '누구냐'라는 질문들에 대하여 그는 계속하여 사람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떼려하였다. 이와 같은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 이러한 칭호들이 지칭하는 궁극적인 신망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W.E.Hull). 요한은 분명히 '종말론적'인물이었다. 그는 오실 자에 의해 이루어질 임박한 심판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인기있는 종말론적인 어떤 인물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거절하였다(.F.F.Bruce). 23절에서 질문자들에 대해 요한이 말한 대답의 의도는 '만일 당신들이 선지자들의 신탁 가운데 내가 예언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당신들은 광야에서 주의 길의 예비를 요청하는 목소리라고 나를 확인할 것이다'를 나타내는 것이다F.F.Bruce). 그는 선지자나 메시야 같은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단지 소리이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을 말하는 것만 있을 뿐이다(L.Morris). 세례자의 한 가지 바람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는 것이었다(R.Schnackenburg). 24절의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들'은 그들 모두가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부분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F.F.Bruce, L.Morris, R.Schnackenburg).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필로의 로고스론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헬라주의적 유대주의 종교 철학자 필로는 그의 저서에서 로고스를 1,300회 이상 사용하고 있다. 그는 유대교와 헬라 철학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로고스 배경에는 유대교적 맥락과 헬라주의적인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그가 전생애를 알레산드리아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에서 발견하는 일종의 종교적 고찰이 동시대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는 것을 거의 확실히 한다.
1. 로고스의 인격성 필로의 로고스는 인격성이 모호하다. 그의 창조적 로고스는 창조자가 사용한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도구이다. 비록 그가 로고스에게 하나님의 형상, 중보자, 대제사장, 하나님의 장자, 천사장, 두 번째 하나님, 왕 등의 인격적 명칭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분히 구약의 인물들과 알레고리적 동일시에 불과한 것이다.
2. 로고스의 선재(先在)성 필로에게서는 로고스의 선재가 모호하다. 그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비록 '가장 오래된 최연장자'라는 형용사를 붙인다 해도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선재는 아니다.
3. 로고스의 구원론 요한복음의 서언은 로고스에서 생명과 빛 사이에 연결의 교리가 있다. 그러나 필로에게서는 구원론이 없기 때문에 그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4. 로고스의 성육신론 필로에게는 성육신의 교리가 없다. 그것에 관한 그의 사고가 희랍적인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한하고 불변하는 하나님과 물질적인 세계와의 연결을 로고스로 보았다. 그러나 요한의 해답이 훨씬 더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필로는 그 자신의 원리에 의해서 그 문제의 그리스도인적인 해답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필로는 말하기를 "세 종류의 삶이 있는데, '신적 삶'과 '탄생' 그리고 '첫째와 둘째의 혼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적 삶'은 우리에게 전승되지도 않았고, 멀리서부터 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요한의 이성은 필로의 로고스 개념이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라는 요한의 진술은 필로가 사색을 통해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간격을 성육신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었다.
은혜의 개념과 그 사례(1:14-24) ◈ 세계배경 문화사 ◈
일반적으로 '은혜'는 친절한 태도 및 찬성, 또는 호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은혜의 개념은 철학과 종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일반 사회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을 받았을 경우에 은혜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은혜가 종교에서 사용되었을 때는 '일방적으로 베풀다'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근동/유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말에서 이 단어는 '호감' 또는 '유쾌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나, 호의나 친절에 대한 고마움의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으며 따라서 '감사'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감사의 의미로 쓰인 경우는 이집트의 파피루스나 기타 여러 곳에서도 '신들에게 감사'라는 글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신은 인간에게 은혜를 내리는 근원이었다. 은혜란 인간 자신은 성취할 수 없는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특별한 뜻으로서 신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무엇보다도 거저주는 선물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코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도 아니며, 어떤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유대인은 은혜간 믿음을 통해서 존재하며, 믿음과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신의 은혜란 신이 인간에게 접근해 올 때의 인격적이고 자비스러운 신을 묘사하는 표현 방법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이집트 : 이집트에서 '은혜'라는 말은 나일 강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쓰였다. 그것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은혜)'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나일 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이집트인의 정치·사회·종교·학문·예술·교역 등 모든 분야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이집트는 지리적으로 연안 양쪽의 좁은 지대를 제외하고는 주위가 황막한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일 강은 이집트의 식수원으로서, 농사지을 수 있는 기름진 땅을 제공했으며, 아울러 정기적인 나일 강의 범람은 치수 관개(治水灌漑)와 토목 공사를 통해 강력한 전제왕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은혜라는 개념이 나일 강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서양/그리스 :그리스인들은 자기들 주위에 많은 신들이 존재하며, 인간의 여러 가지 소망이나 소원·목적을 성취하려면 신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신들의 존재를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인식했으며, 신들이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 존재한다고 여기면서 의지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의 모든 공식적 행사에는 신들에게 기도하고 원조(은혜)를 바라는 절차가 끼여 있었다. 결혼이나 새로 태어난 아기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가족 구성원이 죽어 장례를 치루는 경우에 그런 절차를 밟았다. 또한 신의 승인(은혜)이 없으면 농사도 잘되지 않으며, 육지나 바다를 통한 해외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줌으로써 인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양/한국 : 한국에서는 은혜와 관련하여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구렁이에게 잡혀 죽게 된 까치 새끼들을 구해 주었는데, 후에 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에 까치들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어 자기를 구해 준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이다.
성경적 접근 :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혜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창6:8), 그리스도의 은혜(고후8:9), 구원의 은혜(딛2:11)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 없이 주시는 것이며(시84:11), 그리스도의 은혜는 자기 희생으로 인한(고후8:9) 은혜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이런 은혜를 풍성하고 공평하게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 은혜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성도에 대한 세상의 질문(1:14-24)
사람은 무리 가운데 자신의 주체성과 정체성(identity)을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 주체성의 확신은 그 사람의 활동과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해줄 것이다. 세례 요한의 정체를 유대인들이 묻듯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성도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1. 너는 누구인가? '네가 누구나?' (19절)는 질문에 요한은 '숨기지 아니하며'(20절) 대답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네가 누구냐고 묻는다. 이때 성도들은 떳떳하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대답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대답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를 각오하고 자신의 본질을 밝혀야 한다.
2. 너는 무엇인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그 선지자냐'(21절)고 물었다. 그의 사명,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은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너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라고 끝없는 질문을 한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아니면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우리는 늘 자신의 삶의 사명과 의무를 미리 점검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3.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절) 고 물었다. 세상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다. 특히 성도를 시험하려 할 때 사단이 곧잘 던지는 질문이다. 자신에 대해 과대 평가를 하거나, 과소 평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진정한 목사인가? 진정한 성도인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가? 라고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단과 세상의 질문에 믿음으로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하겠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성육신의 은혜(1:14-24)
우리 인간의 역사에 가장 큰 전무후무한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신이 인간으로 오사 이 세상에서 삼십여 년간을 지내고 가신 일처럼 경이스러운 일은 없다. 본문은 이러한 성육신의 은혜적인 의미를 증언해 주고 있다.
1.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은혜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절). 이 세상은 죄와 불완전과 불의와 모순으로 얼룩져 있다. 그와 같은 세상에 절대 거룩하시고 완전무흠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한 한 인간으로 오셔서 함께 생활하셨다는 사실 그 한가지만으로도 인간들에게는 큰 은혜다. 구약 시대에 성막과 성전에 한시적으로 임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의 은혜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자 성육신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인격과 영광을 보여 주신 은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14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절). 어떤 종교의 비의로도, 또 철학적 탐구로도 알 수 없었던 창조주와 절대자 하나님을 볼 수도 또 온전히 알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과 영광을 온전히 보여 주시고자 몸소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했듯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행동은 곧 하나님의 인격과 그 행동이시다.
3. 율법을 초월한 구원진리를 주신 은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절)고 했다. 율법대로라면 범죄한 자들은 모두 죄값을 스스로 치루고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죄값을 자신의 몸으로 대속하고자 이 땅에 한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그것은 구속주의 모습이요, 은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29절)고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이 그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