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안 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쏜살같이 지난 시간의 아쉬움 속에서
발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는 중입니다. '소공녀'라는 영화를 봤어요.
2년 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던 작품인데 주인공은 30대 여성 ‘미소’입니다.
3년 차 가사 도우미 미소의 취향은 확실합니다. ‘담배와 매일 글렌피딕 위스키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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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자 친구만 있으면 된다는‘ 확고한 취향입니다. 물가가 올라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지자 미소는 취 향 대신 월세 집을 포기하고 대학시절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들을 찾아 나섭니다. 미소가 찾아간 친구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나름의 평범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어요. 직장생활에 바쁜 친구 문 영 부터 시작해 시집살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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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현정, 이혼을 당하고 밤마다 우울증에 빠지는 대용, 가족과 결혼이라는
족쇄를 갈구하는 록이, 부자 남편과 결혼해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정미까지.
‘평 범‘이라는 틀 안에 매몰되어 있는 붙박이들의 삶에 찾아온 떠돌이 미소는 즐거운
추억과의 연결고리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새로운 삶의 방식과의 조우입니다.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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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에게 위로를 받기도 하고 경멸을 느끼기도 하며 저마다 다른 반응을 내비칩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이유에 대하여 ‘터무니없이 비싼 집값 때문이라고 했어요.
높아져가는 집값에 허덕여 작은 행복을 포기하는 모습이 너무 화가 나서 영화를
만들었다고요. 신간 ‘파이어족이 온다는‘ 또 다른 30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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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아끼고 아껴 최대한 빨리 은퇴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사람을 일컬어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라고 한다지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고소득, 고학력 전문직을 중심으로 확산된 파이어족은 늦어도
40대 초반에는 은퇴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먹 거리는 스스로 재배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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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이만 구입하고, 넷플릭스는 친구 아이디로 즐기고, 웬만하면 걸어 다닙니다.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 소득의 대부분을 저축하는 이들이 목표로 하는 금액은 100만 달러
(10억)입니다. 은퇴 후 이 돈을 다양한 곳에 투자해 연 5-6% 수익을 얻어 생활한다는
그림 같습니다. 소공녀의 ‘미소‘나 ‘파이어 족‘은 둘 다 모든 게 버거운 30대의 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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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 것입니다. 조금 늙긴 했지만 저는 스스로 ‘파이어 족’이면서 ‘워라벨’입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의도한 것은 없습니다. 어쩌다보니 이미 은퇴했고, 새롭게 시작한지
몇 년 됐어요. 해보니까 6포(연애, 결혼, 출산, 취업, 내 집 마련, 인간관계 포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애부터 시작해서 인간관계까지 6포를 다해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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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견딜 만 하고 살만해요. 연애 그거 환장하게 좋지요. 근데 안 해도 살만 하다는
말이에요. 나머지 5포도 마찬가지에요. 안하고 살아도 죽지는 않아요. 혹시 40-50대
‘미소‘같은 친구라면 한번 질러보고 싶긴 합니다만. 퇴근하고 찹쌀, 고구마, 햅쌀을 섞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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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솥 영양밥을 지었어요. 엇 그제 어머니가 싸준 열무김치가 알맞게 익었는데 시장 봐온
구운 김에 웃짐을 얹어 먹으려고요. 벌써부터 시골에서 군불 때서 짓던 그 밥 익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습니다. 파래 김에서 나는 타우린 냄새를 아시나요?
"집이 없긴 하지만 취향과 생각까지 없는 건 아니거든"
2019.11.7.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