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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7년 12월 3일 주일오전
성경봉독 : 시63:1-11; 눅23:33-43
본문 : 시42:1-11
제목 : “조소와 갈망”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22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89편 1,2,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42편 1,2,3
설교 후 찬송 - 시42편 4,5,6,7
성찬식 찬송 - 시23편 1,2,3
폐회찬송 - 시18편 8,9,13
조소와 갈망
얼마 전에 한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내가 신자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살고 상대에게 가장 좋게 대하려 할수록, 상대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이용해서 더 나를 이용해 먹는 것 같다.”
신자들 중에서도 용의주도하여 곤란한 상황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말씀을 따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어떤 분들은 우직하고 강직하기 때문에 말씀을 따라 굽히지 않고 그대로 살아서,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소위 재빠르고 교활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먹으라고 준 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들어주지 않으면 되는데도 자기 일을 맡기면 힘들어도 다 해주니까 그 사람에게 자기 일을 떠 넘깁니다. 책임을 질 문제가 생기면 자기는 쏙 빠지면서 결국 신자인 그 사람이 덤태기를 다 쓰게 만듭니다. 그러면 신자인 그 사람은 일은 일대로 다 하고, 힘은 힘대로 들고, 그렇게 해 놓고는 뒤에서 욕은 또 자기가 먹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슬며시 일어나게 됩니다. “왜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나라고 해서 잽싸고 교활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런 고초를 왜 굳이 당해야 하나? 정말 주님의 도리를 따라 섬김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손해만 보면서 사는 삶인가?”
아마 성도들 중에는 이런 일을 당해보신 분들이 꽤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들 중에서는 “당신 복이 최고다”라고 가르치는 교회들도 있어서, 이런 교회의 신자들은 쉽게 말하면 버스에 자리가 나면 옆 사람을 밀치고서라도 자기가 앉은 다음에 그 자리에서 폰을 꺼내서 자기 페이스북에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리를 얻었어요, 호호” 이렇게 쓰는 사람 같습니다. 옆에서 눈살을 찌푸리건 말건, 세상에서 잘 되면 그게 하나님이 주셔서 그리 된 거라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지라고 가르칩니다. 손해 보라고 가르칩니다. 희생하고 섬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복적 교회에서는 이렇게 손해를 당하는 일로 고민하는 사람이 적을지 몰라도, 우리 교회처럼 이렇게 가르칠 때는 그런 피해를 입어 본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심방을 다녀보면 사회생활에서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조소
시편 42편은 “목 마른 사슴”이라는 CCM 때문에 유명해진 시편입니다. 시편 전체에서도 시편을 직유법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이 시편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갈한 사슴처럼”
시편 42편은 마치 한 장의 그림을 펼치듯이 우리를 이 시의 내면으로 인도해 들어갑니다. 이 시편에는 풍경화 같은 연출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1절의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장면도 그렇지만, 장면이 바뀌는 6절 같은 곳을 보아도, 6절과 7절은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어떤 장소의 모습을 눈에 보이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시편 42편은 아주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시편 42편에서 가장 주도적인 주제를 앞의 서론에서 말씀드린 그 내용, 즉 “세상의 조소”라는 것에 두고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보려하는 이유는 시편 42편을 읽었을 때 아주 자연스럽게 가장 중심 되는 주제 두 가지가 아주 선명하게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주제가 바로 한쪽은 “조소”이고, 다른 한쪽은 “갈망”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조소와 갈망”이라고 잡았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장면은 두 번째 주제인 “갈망”에 해당되는 것이고, 우리가 설교 서두에서 들은 이야기는 첫 번째 주제인 “조소”에 해당되는 주제입니다.
사람들의 조소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이 “조소”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시편 42편 전체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면, 자기도 모르게 쑤욱 올라오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 시 안에 이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쑤욱 올라오는 주제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이 “조소”라는 주제입니다. 왜 그런지를 한 번 보십시다.
1)
먼저 우리는 1절에서 사슴이 갈증을 느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하는 시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왜 이렇게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할 수밖에 없는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물론 오늘 시편에는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이 되는 어떤 사건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42편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시인의 이러한 상태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이유 때문에 고초를 겪었을 수는 있지만, 그 “어떤 이유”보다는 그렇게 고초를 겪었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 거기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읽고 3절을 읽으면 이 사실이 확연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1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명의 하나님을 갈망합니다(2절).” 그 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인은 다른 이유 때문에 아프기를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사실 지금 시인을 괴롭히는 것은 이 사람들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혹은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갖고서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아냥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서? 너 하나님을 의지한다면서? 그런데 너를 돕는 그 하나님이 어디 있니? 왜 너를 돕지 않니? 하나님이 너를 돕는다면서? 그런데 너는 왜 그 꼴이야?”
1-1)
4절에 나오는 시인의 회상은 이 사람들의 말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4절에서 시인은 과거를 회상합니다.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여 내었다.”
우리는 이 시편의 제목이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압니다. 지난 시편에 시편 1권을 마쳤기 때문에 시편 42편의 저자는 다윗이 아닙니다. 고라는 민수기에 나오는 사람인데 레위의 증손이고 고핫의 손자입니다. 민수기 16장은 이 고라가 다단, 아비람과 짝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거스른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땅이 갈라져 산 채로 음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고라는 나쁜 사람이지만, 사실 성경 역사를 쭉 살펴보면 이 고라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들 중 중심에 있었습니다. 고라 자손들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시글락에 숨어 있었을 때 다윗에게 힘을 보탰던 이들이며(대상12:6), 역대상 6장과 9장을 보면 고라의 자손들은 성막의 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이들과(대상9:19-31),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이들(대상6:22-32)입니다. 즉 고라 자신은 나빴지만 그의 자손들은 성전 봉사 직무를 맡은 유력한 레위인들이 되었습니다.
이 시편의 제목과 4절 말씀을 붙여서 생각해보면, 시인은 성일, 즉 이스라엘의 절기 때에 사람들을 이끌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기도 하고, 또 이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함께 예배와 절기의 축제를 보내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이 레위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4절을 읽으면 훨씬 더 그 감흥이 큰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이 추억이 되어서 지금 4절에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과거 하나님께 드리던 절기와 예배 때에 이러저러하게 봉사하고 섬기던 일이 추억이 되어서, 지금 이 시인에게 아주 기쁘고 감격스럽던 과거로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상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의 곁에서 자기를 비웃으면서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시 전반부의 이 내용들 모두에서 사람들의 조소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4절의 끝이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사용된 단어는 “팍 쏟아버리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쏟아져버렸습니다. 이런 행복한 기억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이들의 조소로 인해 완전히 바닥에 팍삭 쏟아져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의 첫 번째 장면에서 중심되는 주제가 되는 “조소”를 발견합니다.
2)
그리고 6절과 7절부터 바뀌는 장면에서도 보십시오. 6절부터 장면이 요단, 헤르몬, 미살 산으로 바뀝니다. 아마 이 지명들은 요단 강 근처의 어딘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장소가 중요하다기보다 폭포가 넘쳐흐르고 파도가 치는 장면 어딘가라는 것이 이 시적 장면에서 중요합니다. 7절에서 시인은 주의 폭포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깊음이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자신을 뒤덮는 것을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굉장히 시각적인 언어로, 직접 눈으로 보듯이 그렇게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보십시오. 9절에서 시인은 이 엄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고 묻고 있는데 이 이유가 대적들의 조소 때문입니다. 9절의 뒷부분은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하고, 10절에서는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10절의 이 비방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앞서 보았던 조소의 반복입니다. 10절 뒷부분에 대적들의 비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늘’은 ‘하루 종일’로 읽을 수 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그렇습니다! 시인의 고통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고통의 시작은 환경에서 온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을 결정적으로 힘들게 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을 결정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조소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비웃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또 과거에는 그 하나님께 예배와 절기로 희락을 누렸던 기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고통과 슬픔이 다가오자, 삶의 어려움이 닥치자, 순식간에 주변의 사람들이 시인의 이 “하나님 의존”을 비난의 소재로 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늘 지키신다며? 그런데 넌 왜 그 모양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대매?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항상 빌빌대고 있어?”
그래서 시편 42편은 “조소의 시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세상 조소의 본질이 “하나님이 있느냐”임을 기억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향한 세상 조소의 본질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등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속에 자신의 충성스런 신하들을 심어두시기를 원하셨고, 이들이 세상 가운데서, 고통 속에서라도 이 섬김의 직분을 감당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세상은 자신을 유지시키고, 보호하시고, 궁극적 생명을 주고 계시는 하나님을 모욕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고 계신데 하나님을 모욕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 세상에 여전히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 적국의 기지에 전기를 공급해주는 발전소는 참 웃긴 일이 아닙니까? 전기를 끊으면 적국이 죽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발전소는 참 어리석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등불을 꺼버리면, 일순간 모든 이들이 죽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더 잘 모욕할 수 있도록 밥도 주고, 양식도 주고, 생명도 주고, 빛과 태양열과 공기와 순환을 모두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이 이해할 수 없는 기막힌 하나님이신 것은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모욕을 멈추지 않는 아들들을 향하여 칼을 들이대시지 않고 그 모욕을 다 받으시면서도 생명을 공급해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의 충성된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버지가 생명을 공급해주고서도 비웃음을 당하기 때문에, 그 충성된 아들이 된 우리 신자들 역시 세상을 사랑하고서도 모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조소의 본질은 사실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 그분이 조소와 모욕을 당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조소와 모욕입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이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왜 내가 상처를 주었는데도 맞받아 욕을 하지 않지?”, “왜 내가 손해를 끼쳤는데도 손해를 감수하지?”, “왜 더 많은 수고를 하게 되었는데도 웃지?”
세상이 신자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바로 그 때 행하는 방식이 “조소”입니다. 자신들이 능멸하는데도 자신들을 벌하지 않는 하나님을 대할 때, “아! 저 신은 바보 멍청이로구나!”라고 한 것과 똑같이, 신자가 하나님의 방식대로 세상에 지고, 손해보고, 사랑을 주기만 하고 피해에 반응하지 않을 때, 바로 그 때 신자에게 역시 “아! 저 녀석은 바보 멍청이로구나!” 하면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향한 세상의 조소의 본질이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간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신자를 향하여 행하는 모든 조소는, 결국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문제 때문에 지나치게 발끈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의 조소의 결국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한다면, 신자는 여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향해 죽어주고, 이해해 주고, 져 주었는데도, 세상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한다면, 그 때는 신자는 여유로워져야 합니다. 이 때의 세상의 나를 향한 조소는 사실은 존재의 본질에 관한 불안, 즉 하나님 없는 자가 하나님이 계실 가능성 앞에서 두려워 떨기 때문에 행할 수밖에 없는 자기 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안해하지 말라
그리고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만약 우리를 향한 세상의 조소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 하나님이 정녕 계신다면 네가 이러지는 않을 것 아니냐”라는 것이라면,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을 비웃는 이들보다 높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결론은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잠깐 세상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아는 신자는 잠시 세상의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세상이 나를 향해 “하나님이 있다면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는 비아냥에 대해 여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건 간에, 결국의 우리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일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 역시 불안과 공포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세상의 비아냥에 동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붙들고 있어도, 세상의 그 비아냥을 자꾸 듣다가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 때, 이 모든 조소를 다 무릅쓰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외침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변의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눅23:37),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막15:28-32)
그리스도께서는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의 모든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패배자였기 때문에 침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의 끝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침묵하셨습니다. 열 두 영이 더 되는 천사들을 당장 부르실 수 있었지만 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세상의 비아냥에 몸과 마음이 극심하게 어려워질 때면, 이 모든 것을 우리보다 더욱 당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진정한 평강, 참된 평정을 가질 수 있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갈망
그리고 다시 시편 42편의 주제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시편 42편의 중심된 주제가 “조소”라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조소는 하나님 없는 이들의 전용 무기이며, 하나님 없는 이가 가진 존재적 불안을 드러내는 외적 표현입니다. 조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며, 또 세상을 사랑하는 신자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응분의 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조소의 본질이 “하나님 없음”에 있기 때문에, 결국 신자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 됩니까? 하나님 없는 조소자들의 조소가 극에 달했을 때에, 하나님 있는 신자가 더욱 바라게 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계심”인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42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계심을 의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조소자들이 계속해서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놀려대더라도, 시편 42편의 시인은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없어지거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 버릴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소는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몸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며, 고통을 당하면 고통스러운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나, 인터넷 댓글로 상처받아 본 분이 계십니까? 보통의 경우 제가 생각키로는, 이런 일들은 직접 당해보기 전에는 “약하게” 느끼기 십상입니다. 남의 일일 때는 “저 정도 일을 갖고 뭘 저리 힘들어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당해보면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분명 내가 그렇게 한 일이 아니어서 억울한데도 불구하고, 아닌 이야기를 듣고 아닌 줄 알고 있는데도 힘이 듭니다. 참 희한하지만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 조소가 그렇지 않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게 우리의 신앙의 궁극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비웃을지라도 우리가 그것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시편 기자도 보십시오.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라 하는 말이 내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사람들의 비아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신자의 마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합니다.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합니다. 이것은 이 시편에서 일종의 비유적 대조법입니다. 여기 “시냇물”이 심상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눈물”은 같은 선상에서 대조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마시듯이” 생수를 마셔야 하는데, “눈물이 음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먹어야 할 것의 반대를 먹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몹시 힘이 듭니다.
10절 역시 그렇습니다. 대적의 비방이 마치 “내 뼈를 찌르는 칼 같다”고 하였습니다. 뼈에까지 칼이 들어간 본 경험이 다들 없으시겠지만, 큰 수술을 받아서 칼로 뼈를 잘라내거나 하는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마취 없이 그 일을 당할 때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이 조소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이 정도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크므로 갈망이 큰 것
이 때 시인이 이 조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조소의 본질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이기 때문에, 시인이 찾는 것 역시 “하나님의 현존”이라고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배가 아플 때 두통약을 배에 바른다고 낫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문제는 하나님의 현존의 문제가 치료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조소합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 여기에 대한 치료는 “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여야 합니다. 그래서 1절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다”라고 할 때, 그 다음이 무엇인지를 잘 보아야 합니다. 무슨 갈급입니까? 무슨 갈망입니까?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존재의 문제가, 다른 어떤 걸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비웃을 때, 땅의 쓸 것이 더 공급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궁극의 해결은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라는 확신인 것입니다.
한 주석에 보니까 여기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다”는 표현을 흥미롭게 주석했습니다. 이 주석에 의하면 “시냇물”이란 “물이 철철 넘치는 개울물이나 시냇물이 아니라 광야의 깊은 계곡의 바닥에 흐를 듯 말 듯한 시냇물을 가리킨다.”1)라고 했습니다. 시냇물이 이것인 것의 중요한 이유는 목마른 사슴이 찾아온 것이 물이 풍성하게 있는 강줄기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1절의 사슴은 언덕만 넘어가면 커다란 강이 있는 곳으로 손쉽게 나아온 것이 아니고, 물 한 모금을 찾기 위해 깊은 계곡 밑바닥까지 샅샅이 뒤져서 찾아온 장면인 것입니다. 겨우 한 모금의 물을 찾아서 계곡의 구석구석을 가야 하는 상황! 가뭄으로 모든 시냇물들이 말라버렸기 때문에, 흐를 듯 말 듯한 계곡 바닥의 물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온 상황! 이것이 1절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기에 기본적으로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소에 대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갈망하고 계십니까? 한 모금의 물을 찾아 계곡 전체를 뒤지고 있는 사슴처럼, 그렇게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하나님
2절 말씀에 보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생존하시는 하나님”할 때 “생존”은 “생명”입니다. 이것은 주격으로 읽을 수도 있고 형용사격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일 수도 있고, “생명의 하나님”일 수도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어떻게 읽든 간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체시라는 사실이 여기 전제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갈급은 무엇을 향한 것입니까? “생명”을 향한 갈망입니다. 즉 말하자면 시인은 지금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신 하나님께 붙어야만 살 것 같아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소에 대해 신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비아냥에 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위로는 어디에만 있습니까? 생명이신 하나님의 현존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인 바 되는 것입니다! 오직 여기에만 우리의 살 방도가 있습니다.
정 리